<조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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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chalkadak/view?db=160&search_field=&search_value=&no=356045&page=1
3부 - /chalkadak/view?db=160&search_field=&search_value=&no=356246&page=1
4부 - /chalkadak/view?db=160&search_field=&search_value=&no=356425&page=1
<유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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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chalkadak/view?db=160&search_field=&search_value=&no=357262&page=1
3부 - /chalkadak/view?db=160&search_field=&search_value=&no=357734&page=1
<손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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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책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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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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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시작합니다.
<손권, 초상화>
<손권 - 후반기>
적벽에서 패한 조조는 213년이 되어서야 손권이 있는 유수구로 쳐들어 갑니다.
(유수구에는 여몽이 건설한 유수오가 이미 대기중. 유수오는 방어 요새로서 여몽이 유수구가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을
파악하고 방어 요새를 건설함. 여몽의 뛰어난 식견을 보여준 사례중 하나)
이 전투에서 조조는 동오군의 정연함을 보고 감탄하고 물러갔는데 이 때, 조조와 손권의 개돼지 일화가 생깁니다.
-조조편 참고-
조조는 장강 북쪽의 군과 현이 탈취당할 것을 두려워해 백성들을 강제 이주시키려 했는데 백성들이 이 소식에 놀라
되려 장강을 넘어 손권에게 무려 10만호가 대거 이주해 버립니다. (대략 4~50만명)
이 사건으로 인해 합비 남쪽으로는 환성 하나밖에 남지 않고 사람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니...
손권은 여몽의 권고로 이 환성을 치게 되는데 감녕과 여몽의 활약으로 눈깜빡할 새에 점령해 버리고 구원하러 왔던
장료도 이를 보고 그냥 철수, 북쪽 경계선을 합비 이남까지 끌어올립니다.
이 해에 유비가 촉을 점령하자 손권은 제갈근을 보내 형주 지방을 돌려달라고 합니다.
이에 유비는 "량주(서량)를 취한 뒤 돌려주겠다" 며 거절합니다. 손권은 이 말을 듣고 핑계일 뿐이라며
장사, 계양, 영릉에 관리를 일부러 파견하지만 관리들이 관우에게 줘터지고 돌아오자 군대를 보내 장사와 계양을
강제로 점령합니다.
당연히 유비는 딥빡.. 직접 5만군을 이끌고 형주로 출정, 관우를 익양으로 보내 대치하게 합니다. (익양대치)
그러나 이 와중에 여몽은 계략을 써 영릉마저 접수하고 후위대로 영릉을 점거한 채 관우와 노숙이 대치하고 있는
익양으로 향합니다.
결국은 일촉즉발의 대치 끝에 서로간의 합의로 강하, 장사, 계양을 손권이 갖고 무릉, 영릉, 남군은 유비가 갖는걸로
하고 서로 군을 철수시키며 분쟁을 종결시킵니다. (종결된 줄 알았으나..)
215년, 손권은 군을 이끌고 두번째로 합비에 출진합니다.
(1차는 적벽 이후 쳐들어갔으나 유복과 장제의 덫에 걸려 아무것도 못하고 후퇴)
이 전투에서 그 유명한 "료 라이, 료 라이" 라는 말이 탄생하며 적장 장료에게 큰 명성을 남겨준 채 역사에 남을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후퇴하고 마니.. 이 전투에서 진무는 전사하고 서성은 크게 상처를 입고 능통은 아끼던 근위대를
모두 잃어 눈물을 흘릴 정도로 물리적으로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게다가 물리적 그 이상으로 정신적으로도 큰 피해를 입어 향후 10년이 넘도록 합비를 넘보지 못했고 손권은 이 전투를
두고두고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800 vs 10만의 전투.. 10만은 약간 과장일 수 있으나 장료군이 천명도 안되었다는건 사실임.
10만의 군이 800기를 막지 못해 일점 돌파를 당하고 장료는 손권의 대장기 근처까지 도달했을 정도..
손권은 혼비백산해 도망갔다는게 팩트임. 합비성을 지키던 병력은 1만도 안되던 7천에 불과)
216년, 유수구를 조조가 또다시 쳐들어옵니다.
역시 유수오를 여몽의 활약에 힘입어 잘지켜내었고 결국 조조는 물러나며 손권과 화의를 맺습니다.
217년, 손권을 제위에 오르게 하려고 했던 동오의 대도독 노숙이 47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후임으로 여몽을 임명합니다.
(훗날, 손권의 평에 의하면 노숙은 제왕의 기업을 세우게 하고 적벽에서 주유와 함께 적을 물리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평함. -형주 빌려준게 유일한 단점이었다고 한건 안비밀..-)
219년, 드디어 관우는 북진을 시작해 방덕과 우금을 격파하고 번성을 포위하기에 이릅니다.
이 때 무려 3만여명의 병사를 포로로 잡아서 강릉으로 압송했는데 이들의 병량을 대기 위해 영릉군 상관의 병량을
맘대로 털어버립니다.
(상관은 유비와 손권의 완충지대. 이곳의 군량을 손권의 허락없이 가져간것)
손권은 내심 관우를 무척 두려워 했지만 이것을 명분으로 기회 삼아 조조에게 편지를 보내 관우를 정벌하는데
힘을 보태겠다 하고는 여몽을 선봉으로 삼아 군대를 보냅니다.
관우는 곳곳에 관측소를 세워 여몽의 침입을 대비했는데 이를 알아챈 여몽이 군사들에게 평복을 입혀 속인 뒤
관측소부터 차례대로 제압하자 관우는 후방이 침입당했다는 것 조차 모른채 그저 공격에 열중할 뿐이었습니다.
여몽이 공격하자마자 사인과 미방은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않은 채 항복을 했고 이에 관우의 후방은 완전히 여몽에게
제압당해 북쪽에서 고립되게 됩니다.
뒤이어 손권마저 본대를 이끌고 오자 관우는 서쪽의 맥성으로 도망갔다가 위병계를 써서 다시 달아나는데
뒤따르는 병사는 고작 10여기.. 결국 관우는 반장의 부하 마충에게 붙잡혀 손권에게 참수당하고 맙니다.
형주를 성공적으로 공략한 여몽은 얼마 안있어 시름시름 앓다가 겨우 4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주유, 노숙, 여몽 연속으로 요절)
손권은 이를 매우 비통해합니다.
(손권의 평에 의하면 싸움은 주유 다음으로 가장 잘했다고 평.
그가 앓아 누웠을 때 밥을 제대로 못먹자 손권은 그가 밥먹는거만 봐도 기뻐할 정도로 격하게 아꼈음.
여몽은 후임으로 주연을 지목했으나 육손이 뒤를 이음)
220년, 조조마저 죽자 손권은 이 기회를 틈타 형주를 압박하고 조비는 사마의의 만류에도 불구, 양양과 번성을
불태워 버린채 조인을 완성까지 불러들입니다. 이에 손권은 군대를 보내 비어있는 지역 일부를 점령합니다.
221년, 유비가 황제 자리에 오르자 손권은 위나라 조비에게 칭신해 오왕에 봉해집니다.
(제위에 오르고 싶었으나 별자리 점괘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함..)
그리고 드디어 유비는 관우의 복수와 형주의 수복을 위해 대군을 이끌고 오를 침공합니다. (이릉대전)
놀란 손권은 먼저 유비에게 손을 내밀지만 유비는 단호히 거절,
이에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삼아 5만군을 보내 유비를 격퇴하게 합니다.
육손은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어 동오 내부에서 그를 대도독으로 삼는 것에 대한 반발이 상당했는데
형주에서의 전과를 보며 손권은 믿음을 가졌고 육손은 그 믿음에 화답해 군을 이끌고 유비를 대파,
촉한 차세대 장수들의 씨를 말려버립니다. -유비편 참고-
222년, 촉을 격퇴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병사가 많이 상해있었는데 조비가 세 방향으로 군을 나누어 대규모로 쳐들어옵니다.
(유수, 동구, 남군)
유비는 여전히 백제성에 머물러 있었고 이 때를 노려 후방을 치면 굉장히 위험했기에 서신을 보내 다시 화친을 청합니다.
이 화친 요청을 유비가 받아들이자 안심하고 조비와 해가 바뀌도록 계속 싸우다가 결국 223년 3월 조인이 후퇴하게 됩니다.
조비의 침략까지 막아내자 4월에 손권은 제위에 오르도록 신하들에게 권유를 받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거절합니다.
그리고 이 달에 유비가 사망하자 조문을 보냈고 이에 대한 답례로 촉한에서 사자로 등지가 와서 손권을 설득,
결국 오와 위는 단교를 하고 다시 촉과 연수를 맺어 위에 대항합니다.
224년, 조비는 위와 단교하고 촉과 다시 동맹을 맺은 오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나 서성의 위성계에
걸려 아무것도 못하고 3개월만에 철수,
이 위성(가짜 성)을 보고 조비는 감탄하며 "저곳은 인물이 있으므로 도모할 수가 없겠구나."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225년, 승상 손소가 죽자 대신들은 장소를 승상에 추천했으나 (손권이 개인적으로 장소를 싫어했으므로)
고옹을 승상으로 임명합니다.
이 해 겨울에 지난 번 패배에도 불구하고 위문제 조비는 다시 한번 광릉으로 쳐들어가나 역시나 또다시 패배,
한 겨울에 강이 얼어붙어 수군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돌아옵니다.
226년, 위문제 조비가 사망하자 손권은 군을 일으켜 강하를 치고 석양을 포위하지만 얻지 못하고 철수합니다.
이 때, 팽기란 자가 무리 수만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227년이 되어서야 겨우 토벌이 됩니다.
이 해에는 손권에게 칭신하고 매 년 예물을 바치던 손권 빠돌이 교주자사 사섭이 사망하고 뒤를 이은 사휘가
동오의 처사에 불만을 품어 반란을 획책, 결국 여대에게 토벌되어 집안은 사광을 제외하고 모두 멸족하고 맙니다.
227년,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던 팽기가 잡혀서 호송되고 오의 구신 한당이 사망하는데 자식 농사를 잘못지었는지
한당의 아들 한종이 아버지의 시체를 끌고 위나라에 투항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228년, 석정에서 대규모로 위군과 맞붙어 위군을 아예 관광보냅니다. (석정전투)
이 때 위군을 이끈 것은 위의 대장군 조휴였는데 이 패배로 인해 부끄러워 결국 악성종기로 인해 사망하게 되니
오군은 꽤 굵직한 전투에서 여러번 크게 승리를 거둬 삼국 시대의 유명 인물들을 골로 보내는데 도가 튼 인물들인가
싶을 정도입니다. (유비, 관우, 조휴..)
229년, 드디어 손권은 오의 황제 자리에 오릅니다. 그리고는 장소에게 하는 말,
"만약 장공의 계책같이 했다면, 지금쯤 이미 밥이나 빌어먹고 있을 것이오."
<정사 삼국지 장소전 주석 강표전>
(뒤끝 작렬...적벽 대전 당시 항복론을 펼쳤던 장소에게 섭섭함을 표출한 것이긴 한데 그게 무려 20년이 지난 시점-_-)
이에 장소는 엎드려 땀을 뻘뻘 흘렸다고 하는데..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장소는 관직을 사임한 채 집에 칩거합니다.
막상 오의 최고 대신 장소가 저렇게 나오자 손권은 그래도 노신을 그렇게 대우할 수 없었는지 장소에게 미안하다며
결국 다시 조정으로 데리고 옵니다.
230년, 그 유명한 손권의 인간사냥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 희대의 사건으로 손권은 두고두고 까이게 되었으니 그 일화를
살펴보면.. (손권은 까일거리가 참 많음..)
손권은 평소에도 동오에 이민족들이 많고 한족이 적어 인구가 부족하자 이민족들을 데려와 융화시키는 정책을
자주 펼칩니다.
그리고 이 해에도 현재의 대만까지 가서 인간을 붙잡아오는 임무를 제갈직과 위온에게 내리는데 그들은 임무에 성공해
1만여명을 데리고 오긴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 섬의 원주민들로 대륙과의 기후나 풍토가 완전히 달라 1만명 중 8~9천명이 병으로
죽어버리는 의도치 않은 학살을 하게 되었으니.. 뻘짓도 이런 뻘짓이 없다고 현재까지도 대차게 까이는 사건을 벌입니다.
손권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위에게 자꾸 막혀 치기 어려워지자 요동의 공손연과 고구려와 연계해 움직이려고 하나,
전예에게 막히고 나중에는 공손연과 고구려 둘다에게 통수를 맞게되자 매우 분노합니다.
(이렇게 농락당해서 더더욱 그의 노망이 가속화 되었는지...)
234년 5월, 제갈량이 군사를 이끌고 위를 침략하자 이 때를 기회로 위 명제 (조예)가 자신에게 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합비로 출진해 포위합니다.
사마의는 제갈량을 막으러 가고 조예는 직접 군을 이끌고 손권을 치러 가자 또다시 눈물을 머금고 후퇴...
이후로 꾸준히 이민족 토벌, 반역 진압, 여일 처벌, 인간 사냥 등을 하며 내부 안정에 온 힘을 다하는데 ..
사실 강동은 여전히 미개발 지역도 많고 이민족들도 많았으므로 손권은 외부로 힘을 쏟기 보다는 강동을 개간하는데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전까지 미개척지였던 강동의 개발은 사실 손권의 공이 가장 컸음)
그러다가 정말 중요한 사건이 242년에 벌어지는데 바로 이 해에 촉망받던 태자 손등이 사망하고 만 것입니다.
여러 일화를 봤을 때 성군이 될 자질이 충분했던 손등이었는데 어이없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삼남 손화를 태자로 삼게 됩니다.
(차남 손려는 더 일찍 사망함)
그리고 사남 손패를 같은 궁에 살게 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는데,
이는 원소나 유표처럼 후계자와 후계자가 아닌 자를 정확히 구분하지 않아 생긴 문제로 그 다툼이 막장으로 치달아
결국 오나라를 멸망까지 하게 만든 원흉이 되고 맙니다.
이 사건은 사변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엄청난 피바람을 오나라에 몰고 왔는데 이 사건에 연루되어
직접적으로 처형, 혹은 간접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사망한 자들 목록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손화파
육손, 고담, 고승, 고제 (이상 오의 사성-대호족- 고옹의 일족), 주거, 오찬, 장휴(장소의 차남), 진정, 진상, 장순 등
손패파
손패, 보즐, 전종, 제갈작(제갈각의 아들), 양축, 오안, 손기 등
<이궁의 변 주역, 손노반, 코에이 일러스트>
한 마디로 이궁의 변은 오의 대들보, 오를 지탱하던 대호족과 명망있는 대신들이 전부 휩쓸려 나간 엄청난 대참사였습니다.
스토리 자체는 막장 드라마 뺨칠 정도라 자세히 적진 않겠지만 중요한 건 손권이 후계자 문제를 확실히 하지 않았단 점,
신하들이 두 패로 갈려 싸우도록 내비뒀다는 점, 막장 행보를 보인 손패파의 손을 들어 후계자를 쉽게 갈아치웠다는 점
등에 의해서 현재까지도 이 사건 하나만으로 주구장창 대차게 까이고 있단 점만 적도록 하겠습니다.
<이궁의 변을 한마디로..>
(흔히들 손권의 노망으로 표현하지만 노망이라기보단 본인의 억눌려 왔던 욕망 등을 한 번에 삐뚤어진 방식으로
풀어낸 것이 아닌가 싶음. 대호족들의 연합체, 장소와의 관계 등에 항상 억눌려 있다가 이 기회에 모조리 쓸어버렸을
지도.. 승상 고옹이 243년 사망하는데 좀 더 살았다면 어땠을지 또 모르겠음. 육손도 어쩌지 못했는데 고옹이라고
별 수 있었겠냐만은..)
이 사건은 무려 10여년간 일어난 사건으로 (242년~252년) 손권은 폐태자 손화를 남양왕으로 임명하여 장사성에 유폐시키며
이 사건들을 마무리 짓고 그해 4월에 71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 삼국지 정사의 저자 진수는 평하길,
"손권은 몸을 굽혀 치욕을 참으면서 재능 있는 자를 임용하고 지혜로운 자를 존중했고,
구천(句踐)과 같은 비범한 재능이 있었으니, 영웅 중에서 걸출한 인물이었다" 고 평했습니다.
실제로도 인물보는 눈만큼은 유비 못지 않게 굉장히 뛰어났고 그가 등용한 인물들만 봐도 면면이 화려하니
그의 재능은 거의 대부분 여기에 몰빵되었다고 봐도 될 정도였습니다.
# 손권은 특히 술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한 번 마시면 꽐라가 될 때까지 자주 마셨다고 하는데 술버릇도 개차반이어서
심지어는 오의 대신 우번을 죽일뻔한 일도 있었기에 "내가 취했을 때는 누구를 죽이라고 해도 죽이면 안된다" 라고
말할 정도 였다고...
# 군재는 뭐 다들 아시다시피...스스로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겼던 전투는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다만 쉽게 지지 않았단
점은 어느 정도 플러스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만 어쨌든 그만 알아보겠습니다.
# 학문을 굉장히 좋아해 여몽에게 학문을 권하며 그 유명한 "괄목상대" 라는 사자성어가 탄생합니다.
그 일화를 잠깐 소개하자면,
손권이 여몽과 장흠에게 이제 앞으로 큰 임무를 맡게 될것이니 평소보다 공부를 많이 해서 견식을 넓혀야 한다고 말하자
평소 여몽은
'독서는 공부하는 사람들의 일이다. 나는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가서 이기면 되는 것이지 공부는 무슨 공부인가?'
라고 생각했기에 "부대의 일로 바빠서 공부할 여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손권은 아래와 같이 답합니다.
"제가 여러분들보고 경전을 공부해서 박사(博士)가 되라고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경전을 읽어서 옛 사람들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았으면 해서 이러는 것이오.
경은 일이 많을 거라 말씀하셨는데, 저랑 비교해서 저만큼 바쁘겠소?
저는 어렸을 때 [시경], [서경], [예기], [춘추좌씨전], [국어] 등등 이것저것 다 읽어,
읽지 못한 것은 [주역] 정도 입니다.
(손책이 돌아가시고 제가) 일을 떠맡은 이후에도, 삼사(三史), 사람들의 [諸家] 병서(諸家兵書)를 정독해,
스스로 도는 많이 안다고 자부합니다.
경들은 의지도 성질도 명랑이기 때문에, (학문을 하는데 적합한 성격이라서) 배우기만 하면 꼭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째서 하지 않으려 하십니까? 우선 먼저 [손자], [6도], [춘추좌씨전], [국어] 및 삼사를 읽으십시오.
공자께서도 말씀하셨는데, "하루 종일 안 먹고, 잠도 안자고 생각해도 다 무익한데, 오로지 배우는 것은 달랐다."고
하셨습니다. 한나라의 광무제도 군대를 이끌고 다니면서도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조맹덕(조조)도 늙도록 책읽기를 좋아한다는데, 그대들은 왜 자기 개발에 힘쓰지 않는다는 말이오?"
이후 여몽은 열심히 공부해 여몽 주위에는 아무도 학문으로 여몽을 이길 수 없게 되었고
어느 날, 주유의 후임으로 오게 된 노숙이 찾아와 대화를 해보자 여몽의 말솜씨가 굉장히 유려하여
노숙조차도 경시할 수 없게 되자 노숙은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나는 (여섯 살 적은) 동생이 단지 전략 밖에 가지고 있지 않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학식은 넓고 밝고,
더 이상 오하아몽 (吳下阿蒙)(오나라의 아몽(阿蒙: 멍청한 여몽이라는 그동안의 여몽의 별명)이 아니군요."
이에 여몽이 대답합니다.
"학자는 (배우는 사람은) 헤어져 3일이 지나면, 눈을 비빈 후에 다시 만나야 합니다.
(사람은 삼일을 만나지 않으면 똑똑히 눈을 크게 뜨고 상대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뜯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괄목상대(刮目相對)
<정사 삼국지 여몽전 주석 강표전>
이렇게 해서 현재까지도 유명한 "괄목상대" 라는 말이 탄생하게 됩니다.
# 사실상 강남 지역 개발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었고 이렇게 초석을 다져놓은 덕분에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쳐
당송 시대가 되면서 강남의 경제력은 강북을 압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꾸준한 이민족 유입 정책 (인간사냥),
교화 작업 등을 통해서 호구수도 많이 늘렸기에 정치력 면에서는 굉장히 후한 평가를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궁의 변 사건 하나가 그의 판단력을 의심케 만들었으니... 그러나 이 사건을 제외한다면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국가를 훌륭하게 운영했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으로 손권편 까지 모두 마쳤습니다. 읽느라 수고들 하셨습니다~
다음 편은 외전으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