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미국은 '남북전쟁'이라는 사상 최대의 내전을 경험했고, 전쟁의 승리자는 북군이었습니다. 이로써, 남북으로 분열되었던 미국은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1870년대에 이르자, 미국 땅에는 큰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게 됩니다. '성장'과 '부의 탄생'이었습니다.
이 시기, 미국은 안드로메다 급 성장을 하게 되는데요. 그 성장의 비밀은 바로 '영국'에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은 영국인들이 북아메리카에 건너가 세운 나라입니다. 즉, 미국이 아무리 독립했지만 그 뿌리는 영국일 수 밖에 없었죠.
1800년대 당시 영국은 '대영제국'이라 불리며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인들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산업혁명을 주도했죠.
따라서 영국의 기술은 고스란히 미국에 '이식'되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은 독립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 1차 산업혁명을 거치며 자본주의의 길로 접어들게 되죠.
이처럼, 미국의 성장 원동력에는 당대 최강대국이던 영국이 존재했습니다. 더구나 그 시기에는 미국이 '기회의 땅'이라는 소문이 전 유럽에 퍼져 있었어요.
그래서 수많은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이주해왔죠. 이는 미국이 뛰어난 기술 뿐만 아니라, 풍부한 노동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북전쟁이 끝난 19세기 후반에는 석유, 철강, 전기 등 새로운 중화학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하는데요.
이렇듯 미국의 산업이 급격한 성장을 하고 있을 때, 미국에서 새로운 '날강도'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의 주머니를 빼앗지는 않았지만, 매우 불합리하고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막대한 부를 모으기 시작하죠.
바로 '악덕 자본가'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들은 새로 개발되는 발명품과 기계, 그리고 풍부한 천연자원과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크게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성장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여서, 얼마 지나지 않아 특정 산업 자체를 통째로 장악할 수 있게 되었죠.
이렇게 해서 세계 최초로 '독점 기업'이 탄생합니다. 이들은 철도, 조선소, 석유 시추 시설을 만들어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였죠.
'어떤 한 회사가 그 분야 전체의 산업을 지배한다'
이것이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독점 기업의 형태인데요.
독점이 바람직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왜냐하면, 독점 기업은 '공급'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가격을 얼마든지 높게 매길 수 있죠.
독점 기업 직원 曰
: "사장님하. 우리가 파는 아이스크림 가격이 너무 높은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ㅋㅋ"
독점 기업 사장 曰
: "그럼 괜찮고 말고. 사람들은 이미 아이스크림에 중독되어있어. 근데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은 우리 밖에 없지. 헷헷!"
그렇습니다. 방금 전 예시처럼, 독점 기업은 '모든 아이스크림 가게'를 소유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아이스크림의 재료가 되는 설탕과 우유까지도 독점하는데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독점 기업은 미국에서 처음 나타난 형태였기 때문에 규제할만한 법이 따로 없었어요. 그리고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독점 기업에 대한 미국 정부의 '시선'이었는데요. 미국 정부는 대단히 큰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정부 曰
: "지금 중소기업 신경 쓸 때냐? 대기업이 잘 되어야 우리나라 경제가 살아날 수 있어."
즉, 대기업이 나라 전체를 구원해 줄 수 있다는 착각, 그리고 그들에게 잘 보이면 뇌물을 받고 잘 살 수 있다는 개인적 욕심까지 더해져 미국 정부는 독점을 그저 '약육강식의 원리' 정도로 치부해 버리죠.
그 결과, 악덕 대기업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장을 통째로 집어삼켰습니다. 그래서 19세기 말에는 각 산업을 지배하는 괴물 기업들이 등장합니다.
그 유명한 석유왕 록펠러, 철강왕 카네기, 철도왕 밴더빌트, 은행왕 J.P 모건 등이 다 이 시기 자본가들이었죠. 이들은 당시 미국 전체 자본의 60%을 소유하고 있었어요.
특히, 1870년에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석유 회사를 세운 록펠러는 미국 내에 있는 정유소의 90% 이상을 소유하는데요.
록펠러의 당시 재산을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3360억 달러(370조)'입니다. 록펠러만큼 재산을 모은 사람은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죠.(빌 게이츠도 그의 1/3 수준)
그가 이렇게 엄청난 부를 획득할 수 있었던 비결은, 석유가 국민들에게 판매되기까지의 과정(채굴, 정제, 판매)에 있는 모든 회사를 싸그리 사들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스탠더드 오일은 생산 단가를 엄청나게 낮출 수 있었죠. 그래서 경쟁기업들은 도저히 장사를 해먹을 수 없었고, 그 덕에 독점이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악덕 자본가가 부를 축적하는 동안, 수많은 노동자들은 가난에 찌들어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말도 되지 않는 급료를 받으면서 하루에 12시간 이상 일해야 했죠. 그러다 보니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갔지만, 기업가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굳이 신경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미국에는 수많은 이민자들이 취업을 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으므로 자본가들에게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이나 상황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죠.
이러한 인식으로 인해 당시 미국은 전 세계에서 '노동자들의 사망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일례로, 앤드류 카네기를 철강왕으로 만들어 주었던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는 유명한 철강 생산지였지만,
늘 쾌쾌한 냄새가 나고, 하루 종일 뿌연 연기가 자욱해 시민들은 고통을 받아야 했죠.
또한, 고층 빌딩을 짓는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위험했습니다. 위 사진은 록펠러 센터를 짓기 위하여 69층 높이에서 아찔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합성 No)
노동자들은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는 철강 빔 위에서 위험천만한 작업을 해야 했죠. 실제로, 숙련된 노동자들은 초보자와 일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고 합니다.(자칫하면 덩달아 죽을 수 있기에)
그렇다면, 미국 정부의 바람대로 미국의 경제는 잘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요. 부자들은 극소수였지만, 일반 평민들이나 노동자들은 거의 빈민 수준이었기 때문에 '빈부 격차'가 심각해졌습니다.
미국은 20세기에 들어 세계 최대의 석탄, 철, 강철 생산국으로 발돋움했지만, 일반 국민들에게 있어 미국은 더 이상 '기회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노동자 계층 曰
: "잘 살게 해준다더니 뭐 개뿔 하나도 없네. 아메리칸 드림은 안드로메다로 이사갔음? 에잇 퉤퉤"
1877년이 되자, 노동자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 결과,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철도 건설 노동자들이 파업했고, 이에 동조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퍼지게 됐습니다.
이를 1877년 총 파업이라 합니다. 여담으로, 제가 좋아하는 올드 팝송 중에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라는 노래가 있는데요.
이 노래의 가사에는 19세기 중반에 독립했던 '웨스트 버지니아주'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주는 남부였지만, 노예 제도에 반대하여 따로 독립했던 '왕따 주'였어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웨스트 버지니아에 살았던 주민들과 노동자들은 다른 주보다 더욱 가혹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노래는 19세기 당시, 이러한 웨스트 버지니아 주의 암울한 상황을 가사로 잘 빗대어 표현했죠.
Take me Home, Country Road - John Denver
Almost heaven west Virginia
Blue Ridge Mountains Shenandoah river
Life is old there older than the trees
Younger than the mountains blowin' like a breeze
(서 버지니아주는 거의 천국에 가깝네
블루리지 산과 쉐난도 강
그곳의 역사는 나무들보다도 오래되었지만
산들보다는 짧고 산들바람처럼 지나가네)
Country roads take me home
To the place I belong
West Virginia mountain momma
Take me home country roads
(시골길이여 나를 집으로 데려가다오
나의 보금자리로
서 버지니아주의 산신령이여
나를 집으로 데려가다오 시골길이여)
All my memories gather round her
Miner's lady stranger to blue water
Dark and dusty painted on the sky
Misty taste of moonshine teardrop in my eyes
(나의 모든 기억은 그녀에 관한 것이네
광부의 부인인 그녀는 푸른물에 익숙치 않았네
어둡고 탁한 하늘은
손수 만든 위스키의 맛을 희미하게 연상케 하고 눈물이 고이게 하네)
....생략
노래 잘 들으셨나요? ㅎㅎ 이처럼, 미국의 성장 이면에는 일반 국민들과 노동자 계층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으로 건너와 미국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이민자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이민자들은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에 현혹되어, 미국 동부로 많이 왔어요. 특히 뉴욕으로 많이 왔는데 그들이 미국으로 와서 가장 처음 본 것은,
'자유의 여신상'이었습니다. 자유의 여신상은 1886년에 세워졌는데, 이민자들은 이 동상을 보고 커다란 감격과 기대를 한껏 품었겠지요.
당시 뉴욕 항구에는 '앨리스 섬'이 있었어요. 모든 이민자들은 앨리스 섬에 있는 입국 심사대를 통과해야 비로소 미국에 정착할 수 있었죠.
앨리스 섬에 근무하는 입국 심사관들은 이민자들을 철저하게 검사했습니다. 이민자들이 전염병에 걸리지는 않았는지, 필요한 서류는 갖추고 있는지 등을 엄격한 기준으로 판단했죠.
하나라도 결격 사유가 있으면 이민자들은 바로 고국으로 돌려보내졌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앨리스 섬은 이민자들 사이에서 '눈물의 섬'이라고 불리기도 했어요.
1820년부터 약 100년 동안, 앨리스 섬을 통해 이주한 외국인들의 수는 3천만 명이 넘었습니다. 미국인들은 이주자들을 고국에서 자리잡지 못한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이민자 대다수는 고국에서도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오늘의 미국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온 이주민들은 비록 가난했으나, 각 분야에서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따로 있었어요.
바로 '인종 차별'이었습니다. 미국은 남북전쟁을 통해 노예 제도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반적으로 인종 차별이 퍼져 있었습니다.
미국인들은 머나먼 바다를 건너 미국땅까지 온 이민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일자리는 부족한데, 이주민들은 낮은 급료도 마다하지 않고 일하려 했으니 좋게 보일 리가 없었죠.
특히, 가장 심한 차별을 받은 사람들은 '중국인'이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를 쫓아 약 30만 명이 건너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882년, 미국 의회는 '중국인 추방법'을 통과시켜 미국에 들어오려는 중국인들의 입국을 법적으로 제한하죠.
사실 중국인들만큼 산업 현장에서 궂은 일을 했던 이주자들도 드물었기에, 이러한 미국 정부의 처사는 매우 부당한 것이었어요.
미국 정부는 한술 더 떠 1924년, 이탈리아인과 유대인, 동유럽 국가 사람들의 미국 이주를 법적으로 제한하죠.
그러나 대조적으로 '영국인'과 '독일인'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는, 당시 미국 내에 인종 차별이 얼마나 만연해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는 사례입니다.
출처.피키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