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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경상남도 신수 시 괴담 : 땅거미
1945년 9월의 신수 시. 신수 시장으로 가는 길에는 누추한 집 한 채가 있다. 항상 아낙들로 인산인해인데, 바느질 솜씨가 좋은 ‘경완서’란 사람 때문이다. 한복이든 양복이든 고객의 입맛에 맞게 수선을 참 잘했다. 특히 돈 좀 있는 집안이나, 공무를 보는 집안 사람들이 자주 찾았다. 그곳은 아낙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경완서’만큼은 아니지만 바느질로 살림에 보태려고 온 아낙들이 많았다. 그래서 온갖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그날도 ‘춘기 엄마’라 불리는 여자가 바늘로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느그들 그거 아나? 동철이 아재가 곡동에서 호랑이를 봤단다.” 옆에 있는 거창 댁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아이고 춘기 엄마야, 그 양반 말하는 거 거짓말이다. 요즘 세상에 호랑이가 어디에 있노? 일본 놈들이 다 죽여뿟을 걸?” “아이라! 재작년에 조 씨 가족도 호랑이한테 잡아먹혀 죽었다아이가?” “어데? 그거 헛소문이라.” “아이라니까? 누가 헛소문이라데? 조 씨네 가족들이 도망치려고 짐도 싸고 그랬다아이가? 그리고 곡동에서 내려오는 전설도 모르나? 산신님이 죄인들을 벌하신다고!” “전설은 전설이고…. 지금이 무슨 시대인데 그런 걸 믿는데? 헛소문 좀 그만 퍼트려라.” 이야기를 들은 종석 어멈이 언성을 높였다. “춘기 엄마랑 거창 댁은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손봐야 하는 옷이 산더미 같은데 말이야.” 그때였다. 경완서가 춘기 엄마와 거창 댁을 보더니,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걸 본 종석 어멈이 물었다. “호준 엄마,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고….” “그게 말이죠. 저도 이상한 것을 느껴서요. 요즘 시장에서 보이는 아이들의 수가 줄어든 것 같지 않아요?” 거창 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땅거미들? 가들은 좀 사라졌으면 좋겠다. 우리 먹고 살기도 없는데, 천지빼까리도 모르면서 구걸하는 꼴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난다. 호준 엄마도 가들한테 사탕이니, 떡이니 좀 주지 마라. 안 그렇나? 춘기 엄마?” “하모, 하모…. 호준이 엄마가 그런 걸 주니까, 거렁뱅이들이 자꾸 따라온다아이가?” 경완서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먹고 살기 힘든 마당에 아이들이 구걸하는 모습이 가엽잖아요. 자꾸 어린 시절이 떠올라요.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시골을 떠나 이곳으로 올라왔는데, 막막했거든요.” 종석 어멈이 고개를 저었다. “호준 엄마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그런 아이들이랑 엮여 봤자, 자네만 피곤해져.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 아니야. 자네가 옷 수선 솜씨가 제일 좋다고 해도 땅거미들 도와주면 손님들이 별로 안 좋아해. 그리고 자네에게는 호준이가 있잖아.” 경완서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다. 이름은 김호준, 경성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온 수재였다. 어느날 갑자기 공부를 그만두고 신수로 내려왔는데, 온몸이 크게 다친 상태였다. 꽤 오랫동안 치료를 받은 덕에 회복했지만, 지능은 다섯 살 아이가 되었다. * “김호준은 바보래요, 바보래요, 멍청이래요. 경성 갔다가 바보 되어서 돌아왔대요. 돌아왔대요.” 아이들 여럿이 호준을 보며 놀렸고, 그중에 고약한 아이 몇몇은 돌을 던지기도 했다. 호준은 그러든가 말든가 콧물을 흘리며 웃기만 했다. “으허허허….” “이 바보 새끼, 놀려도 웃기만 하네?” “이거 순 등신 새끼 아이가? 니 등신 맞제?” 호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드, 등… 신? 드, 등신이 뭐야? 조, 좋은 거야?” “하…, 이 새끼 등신도 모른다. 그러면 쪼다할래?” “흐흐흐흐…. 쪼, 쪼다? 그, 그건 또 뭐야? 아이스께끼같은 건가? 아이스께끼는 일제가 와따인뎅?” 골목대장 앞잡이인 용우란 녀석이 박장대소를 하더니, 호준을 노려봤다. “쪼다도 모르나, 등신 새끼야? 쪼다가 뭐냐면? 니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처웃는 새끼를 쪼다라고 한다. 에잇, 요거나 먹어라.” 용우 놈이 돌멩이를 들어 호준이의 머리를 내려찍으려는데, 누군가가 팔목을 잡았다. “어떤 놈이 팔을 잡고 지.랄이야?” “나다, 치사한 새끼야.” 시장에서 구걸이나 하는 ‘땅거미 무리’의 도연이었다. 용우는 자신보다 한두 살 어리고 비렁뱅이 주제에 참견하는 도연이 가증스러웠다. “아아, 이거 땅거지 년이네? 니가 뭔데 막는데? 니가 이 등신 새끼 여자 친구라도 되나?” 도연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 된다. 우리 오빠야한테, 이러지 마라!” 용우는 구걸이나 하는 주제에 자신에게 덤비는 거지의 모습에 이성이 나갈 지경이였다. “그러면 니년부터 피투성이로 만들어 줄게! 오늘 잘 걸렸다. 어디 한번 반 죽어봐라.” 그때였다. 정국환이란 30대 중반의 사내가 소리쳤다. “너희들 뭐하냐?” 호준이가 아이들 틈으로 삐져나와 팔을 마구 흔들었다. “아, 아저씨, 아저씨! 여, 여기 요, 용우가 도연이를 때리려고 해요. 저, 저 새끼 순 나쁜 새끼에요.” 정국환이 다가가자, 아이들이 파리처럼 흩어졌다. 호준이는 자리를 떠나려는 도연이를 잡았다. “도, 도연아. 어, 어, 엄마 올 시간이 됐엉!” “어쩌라고 바보야! 나는 갈 거야. 아저씨랑 잘 지내고 있어. 안녕!” 정국환은 말수도 없고 표현도 잘 하지 않지만, 호준의 가족을 지켜주는 존재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독립군에게 일본 경찰의 정보를 넘기는 밀정으로 활동하다가 광복이 된 후 신수경찰서 서장으로 내정됐다. “호준아, 아이들이 많은 곳은 가지 말라고 했잖냐. 녀석들은 나이도 어리고 미성숙해서 너에게 못되게 군단다.” “그, 그게…. 아, 아이들끼리 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요.” “재밌는 이야기? 어떤 이야기길래?” “그, 그게 말이에요. 저, 저기 고, 곡동에 호, 호랑이가 산데요. 2, 2년 전에 조, 조은애라는 여, 여자가 호, 호랑이에게 물려서 주, 죽었데요.” “호랑이라고? 그거 매우 기이한 일이구나. 1924년 강원도 횡성에서 잡은 호랑이가 마지막이라 알고 있는데 말이지.” “아, 아저씨…. 그, 그런데 곡동에서는 죄, 죄를 지으면 호, 호랑이가 머, 머리만 남기고 잡아먹는다는데, 조, 조은애라는 여자도 죄, 죄를 지어서일까요?” “글쎄…. 일단은 집에 들어가서 밥부터 먹자. 아저씨가 배가 고파서 우리 호준이가 무슨 말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네?” * 그날도 경완서는 어느 부잣집의 신사복을 말끔하게 고쳐주고 선물로 양과자 세트를 받았다. 한 뭉텅이는 보자기에 넣고, 나머지는 종이에 싸서 땅거미들이 사는 다리 아래로 갔다. 경완서가 들어서자, 도연이만 밖에 나왔다. “도연아? 왜 혼자 있어? 다른 아이들은?” “어떤 아재가 와서 입양 갈 아이들을 찾는다면서 따라갔어요.” “입양?” “네…. 돈 많은 사람 중에 아이를 입양하고 싶은 사람이 많다면서 심사받으러 갔어요. 이미 입양 간 아이들도 많은데?” “그 사람들은 믿을 수 있니?” “몰라요. 관심 없어요. 어차피 저는 안 갈 거니까요.” 이미 도연은 경완서의 제안을 한차례 거절했다. 그곳에 사는 친구들을 배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경완서도 모두를 입양하고 싶지만, 형편이 그렇지 못하니 안타까울 노릇이었다. “도연아, 입양 간 아이들이랑 연락은 하니?” “아뇨? 이미 입양 갔는데, 걔네들이 거지들이랑 연락을 왜 해요. 잘 살겠죠. 여기보다 좋은 곳에 사는데, 생각나겠어요?” 경완서는 어릴 적이 생각났다. 촌구석을 벗어나 돈을 벌기 위해 타지로 와서 고생하면서 도연이처럼 마음의 벽이 생겼었다.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공부도 하고 싶은 나이라는 걸 알기에 더욱 도연이를 딸로 삼고 싶었다. “도연아, 아줌마가 부자는 아니지만 도연이가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됐어요, 아줌마. 그런 이야기 그만하고 호준이 오빠나 밖에 못 나오게 하세요.” “호, 호준이? 우리 호준이가 왜?” “못돼처먹은 애들이 득실거리는데, 자꾸 돌아다니잖아요.” 경완서는 걱정되는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도연아. 이거 나중에 친구들이랑 먹어. 아줌마는 이만 가볼게.” 왜 동네 꼬마들은 호준이를 괴롭히는 걸까? 부족하고 잘 모르면 친절하게 가르쳐주면 되는 일 아닌가? 하늘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집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울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호준이는 멀쩡하게 딱지를 접고 있었다. “호, 호준아!” 호준이는 빙긋이 웃으며 경완서의 손에 든 보자기를 낚았다. 그러곤 보자기에 냄새를 맡았다. “이, 이 냄새는? 야, 양과자다? 으흥흥흥, 내 코를 속일 뚜는 없띠!” 호준은 양과자를 게걸스럽게 먹었다. “여, 역띠 과, 과자는 외, 외제야!” 경완서는 호준의 옆에 앉았다. “오늘 밖에 나갔다면서? 정국환 선생님 집에 얌전히 있지. 왜 나갔어?” “모, 몰라!” 호준은 들은 채, 만 채 과자만 먹었다. “에휴…. 오늘은 녀석들이 기분이 좋았나 봐. 널 한 대도 안 때리고?” “아, 아니야. 도, 도연이가 지켜줬어.” “뭐? 도, 도연이가?” “나, 나쁜 녀석들이…. 나, 나보고 쪼, 쪼다, 드, 등신 새, 새끼라고 하, 하면서 돌로 내 머, 머리를 치려고 하는데, 도, 도연이가 나타나서 막아줬어.” * 경완서의 가장 큰 고민은 아들이다. 남편은 곡동에서 실종된 지 오래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경성까지 공부하러 가더니 바보가 되어 돌아왔다. 삶이 다하는 날이 오게 되면 아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그런 이유로 도연이를 입양하겠다는 마음은 아니지만…. 매일 복잡한 심경이 악몽으로 바뀌었다. 시장이나 공방 사람들은 ‘선녀’를 찾아보라고 했다. 신수 시에서 약간 떨어진 ‘곡동’이란 마을에는 조선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마을을 지켜주는 ‘선녀’란 신선이 있다고 했다. 사람의 미래와 과거를 볼 뿐만 아니라,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단다. 문제가 있다면 나랏일 하는 높은 사람도 그녀를 보기 힘들기에 무작정 찾아갈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정국환의 아들이 다급하게 공방의 문을 열었다. “아, 아줌마. 큰일이 났어요. 호, 호준이 형이 따, 땅거미 왕초한테 맞고 있어요.” “뭐, 뭐라고? 어, 어디야?” “땅거미들 소굴이요. 일단 저는 아버지를 불러올게요.” 호준이가 거기까지는 어떻게 간 걸까? 거리도 멀뿐더러 평소에 무섭다고 하지 않았던가? 경완서는 뛰어갔다. 저 멀리 땅거미의 왕초가 호준이를 무자비하게 밟고 있었다. “그만해!” 경완서가 왕초와 호준이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줌마는 뭔데? 안 나오나?” “나, 이 아이 엄마야. 우리 호준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러니?”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구경만 했다. 호준은 웅크린 채 울고 있고, 도연은 겁에 질려 서 있었다. 경완서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왕초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어딜 가노? 아직 화가 안 풀렸는데?” 그가 주먹을 들어 올리는 찰나, 누군가가 왕초의 손목을 꺾더니 쓰러트렸다. “야이, 새끼야. 지금 머 하는 거야?” “놔, 놔라!” 경찰이었다. 경찰은 미소를 살짝 짓더니, 그대로 다리를 들어 왕초의 머리를 밟았다. 그러곤 사정없이 걷어차고 때리기 시작했다. 경완서는 이대로는 왕초가 죽을 것 같아 말렸지만 경찰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거지새끼 주제에 감히 사람에게 폭력을 썼나? 이 새끼가 죽을라고!” 왕초는 울부짖었다. “사, 살려주이소. 잘못했으예!” “잘못 했다고? 잘못 했으면 맞아야지! 이 땅거지 새끼!” 왕초의 얼굴이 피떡이 되고 나서야, 뒤에서 멈추라는 지시가 들렸다. “엄 순사, 이제 그만하게.” 경찰은 동작을 멈춘 채 일어나 칼같이 오른손을 머리 위에 올렸다. ‘윤 경부’라 불리던 자가 사람들 틈으로 나왔다. “어머니, 괜찮으십니까?” 윤 경부가 머리를 숙였다. 경완서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윤 경부…. 사람을 이렇게까지 때릴 필요가 있습니까? 빨리 치료라도 시켜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어머니 말이 맞아요. 그런데요. 법과 원칙을 적용한다면 이런 쓰레기는 맞아야 정신을 차려요. 정신을 못 차리니까, 우리 호준이 같은 애를 죄책감도 없이 때리는 거라고요. 호준이야말로 빨리 병원에 보내보세요. 이 새끼는 저희가 잡아넣겠습니다.” 뒤늦게 정국환이 달려오자, 윤 경부를 비롯한 경찰들이 자세를 고쳐잡았다. 정국한은 심각한 얼굴로 인사에 답하며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폭력 신고가 와서 엄 순경을 먼저 출동시켰습니다. 그리고 보시는 바와 같이 폭력을 멈추게 했습니다.” 정국환은 한숨을 쉬었다. “이보게 윤두석이, 피의자를 잡는 과정에서 이렇게 폭력을 쓰면 어떻게 하나? 무기를 든 것도 아니고, 이 아이는 성인도 아닌 것 같은데?” “네, 서장님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정국환이 호준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자, 경완서도 따라갈 채비를 했다. 또한 도연이를 혼자 둘 수 없기에 손을 꼭 잡은 채 데려갔다. 지금까지 눈물을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도연이는 집으로 가는 내내 울기만 했다. 왕초에게 맞은 후로 호준의 상태가 이상했다. 갓을 쓴 할아버지가 옷장 위에 올라가 있다던가, 허공에 처녀 귀신이 자신을 부른다며 무서워했다. 그럴 때마다 도연을 붙잡으며 옆에 있어 달라며 외쳤다. 의원은 머리에 충격을 받은 거라며 오랜 기간 동안 안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도연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친동생처럼 호준을 간호했다. 경완서는 그런 도연을 말렸다. “도연아, 이렇게 하지 않아도 돼. 너도 쉬게 하려고 데려온 거야.” 도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줌마. 호준 오빠가 이렇게 된 것은 저 때문이에요.” “너 때문이라니?” “그날…. 구걸해서 처음으로 돈을 받았는데, 그걸 숨겼다가 왕초한테 걸려서 호준이 오빠가 나타나서 구해줬어요. 제가 왕초에게 줬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저 때문이에요.”“도연아, 너 때문이 아니야. 오히려 잘된 일이야, 호준이가 너를 구해서…“ 경완서는 도연이 맞기라도 했다면 왕초를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다. 그럼에도 열 살 꼬마는 자신 때문이라며 자책해서 마음이 미어졌다. 세상은 어려운 시기에 어려운 사람을 왜 더욱 어렵게 만드는가? 진심으로 무정했다. 도연은 호준이가 회복될 때까지 땅거미의 소굴로 돌아가지 않았다. 덕분에 차도가 좋아졌고 헛것이 보인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둘은 오누이처럼 장난도 치고 가깝게 지냈다. “헤헤헤… 또연아, 수수께끼를 내겠뜹니당. 물고기 중에 머리가 좋은 녀석들은 낚시꾼에게 잡혀도 탈출 방법이 있다고 합니당.” “그런 물고기 어디있어!” “어헛, 있뜹니당. 어떻게 탈출하는지 아시닙깡? 이 쉬운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몰라, 헛소리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근데 어떻게 탈출하는데?” “순순히 잡혀주다가 낚시꾼이 입에서 바늘을 뺄 때, 온 힘을 다해서 파닥거리는 겁니당. 초보일수록 물고기가 바늘에 걸리면 다 잡은 줄 알기 때문입니당.” “에이, 뭐야? 시시하게.” ”내가 아는 사람도 일본 놈한테 그렇게 탈출했어요.” “누, 누가?” “누구긴 누구야, 각띠탈이지!” “에휴, 밥이나 빨리 먹으세요. 안 먹으면 아줌마가 주신 양과자 내가 먹는다?” “아, 안돼 먹지마! 먹지마!” 며칠뿐이지만 경완서는 행복했다. 딸이 생긴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에 호준이가 깨웠다. “무슨 일이야?” “어, 엄마. 또연이가 없당. 또연이가 집에 갔나봥!” “뭐, 뭐라고?” 경완서가 밖을 나갔지만, 도연이는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해가 뜨자마자 정국환의 아내에게 호준을 맡긴 채 땅거미의 소굴로 찾아갔다. “도연이를 좀 만나려고 하는데, 불러 줄 수 있겠니?” 땅거미의 일원인 키가 큰 녀석이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도연이 지금 바빠요,” “미안한데, 도연이가 왜 바쁜지 물어봐도 되니?” “헤헷, 저도 몰라요.” 녀석이 땅거미들 소굴로 들어가자, 다른 아이들도 따라갔다. 지푸라기로 만든 열릴 때, 도연이가 보였다. 눈이 마주쳤지만 도연이는 애써 외면하는 듯했다.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도연이를 보고 안심이 됐다. * 경완서가 자리에 앉자마자, 거창 댁의 수다가 시작됐다. “호준이 엄마는 좋겠다. 경찰서장이 옆집이라서 도둑은 안 들겠네?” 그걸 본 춘기 엄마가 손사래를 쳤다. “지금 그런 농담할 때가? 호준이 안부부터 물어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니가? 호준이는 좀 어때?” “호준이는 거의 회복했어요. 오늘부터는 서장님네 가족이 봐준다고 하셨어요.” 거창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준이를 봐준다고? 경찰 서장이나 된 양반이 배알도 좋네? 호준이 엄마 여기서 번 돈 서장님한테 다 갖다주는 거 아니가?” 춘기 엄마가 거창 댁의 팔을 때렸다. “입조심해, 이 여편네야. 잡혀가고 싶나?” “아니, 내가 틀린 말 했나? 이제부터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매? 그러고 보면 그 말이 소문이 아니었나 보네. 일본 놈 있던 시절에 정 선생이 억울하게 누명 쓴 사람들 도와줬다는 거…. 결국 독립군한테 정보까지 빼준 양반이라고 하던데? 그래서 광복되면서 친일파들 싹 갈아엎을라고 경찰서장 자리에 들어간 거 맞제?” 경완서는 잘 모른다며 말을 아꼈지만, 종석 어멈은 일리가 있다고 했다. “이번에는 거창 댁 말이 맞을 거여. 정국현 씨가 독립군 편에 섰었으니까, 친일파였던 양반들을 숙청하려고 하는 거지.” 춘기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근데 서장님이 친일파를 잡는 건 좋은데, 도둑이랑 강도를 더 많이 잡아야 살기 좋은 거 아니가? 어차피 친일파 잡는 일은 우리랑 관계없는 일이다. 즈그들끼리 다 해쳐먹겠지. 그리고 서장님도 소문 안 좋더만?” 거창 댁이 물었다. “무슨 소문?” 춘기 엄마가 작게 소리냈다. “서장님이 청렴하게 보여도 딸내미랑 아들내미 좋은 학교 보내는 거에 안달이 났다더만? 그래서 선생들한테 촌지 줘서 시험지도 미리 받고 답도 대신 풀어주고…. 그런 사람인데,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지.” 거창 댁의 눈이 커졌다. “참말이가? 니는 누구한테 들었는데?” “아이고 순진한 사람아, 정국현이가 술집 사장들한테는 더 한 것도 받고 다닌다더라. 호준이를 맡아준다는 것도 순 가식이라. 나중에 더 높은 자리 갈라고 그러겠지.” 그곳에 있는 아낙들이 정말이냐며 물었다. 어떤 이는 믿지 않았지만, 어떤 이는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이라며 비난했다. 경완서에게는 아낙들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도연이도 걱정됐지만, 아이들의 수가 이전과 차이가 날 정도로 줄어있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에게 입양이니, 좋은 일자리를 소개 해준다지만, 어른에게도 삭막한 세상에 과연 호의를 베푸는 이가 있을까? 경완서는 땅거미의 소굴로 달려갔다. “도연아, 도연아! 얘들아!” 아무도 나오지 않자, 소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이들이 둘러앉아 있었고 왕초가 음식을 혼자 먹고 있었다. 경완서의 동공이 커졌다. 왜냐하면 도연이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 도연이 어디에 있니?” 왕초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입양 갔십니더. 와요?” “입양? 아침에는 있었는데, 언제 갔니?” 왕초는 인상을 찌푸린 채 밥만 퍼먹을 뿐이었다. 경완서는 다른 아이들에게 물었다. “도연이 어디에 갔니? 어디로 갔어? 빨리 좀 말해줘….” 그때 한 아이가 소굴 뒤편을 가리켰다. 평소에 도연이가 언니처럼 따랐던 아이였다. “좀 전에 아재가 도연이를 데려갔어요.” 경완서는 뛰쳐나갔다. 입양은 죽어도 가기 싫다던 아이가 그런 선택을 할 리 없다. 가더라도 작별 인사라도 할 아이라 이렇게 떠날 리 없다. 도연이가 갔다는 길은 산길이었다. 아이를 이런 곳으로 데려간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아무렇게 나 있는 식물이나 나무들을 붙잡으며 언덕을 오르니, 멀리서 한 사내가 소녀의 손을 잡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도연이가 분명했다. “도연아!” 도연이는 힐끔 돌아볼 뿐 아는 척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내의 걸음이 빨라졌다. 경완서가 다시 도연이를 부르자, 이번에는 사내가 도연이를 안은 채 뛰었다. 이상했다. 입양이니, 취직이니 모두 거짓말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괴나 인신매매였다. 경완서는 초소로 달려갔다. “유괴 사건이 일어났어요. 지금 한 남자가 아이를 유괴해서 옥동으로 가고 있다고요.” 애타는 심정으로 말했지만, 경찰은 시큰둥할 뿐이었다. “저기 아줌마, 유괴요? 누가 유괴됐는데요?” “우리 동네 아이요.” “그게 누군데요?” “다리 밑에 사는 아이….” “에이…. 거지들은 취급 안 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자, 경찰서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보초를 서고 있는 경찰이 가로막았다. “아주머니, 무슨 일입니까?” “유괴 사건이라고요! 윤 경부, 아니…. 윤 경감님에게 말씀을 드리려고요.” “무슨 유괴요? 이렇게 날 밝은 날에 유괴가 말이 됩니까? 호준이나 잘 챙기이소.” 경완서는 울먹였다.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유괴 사건이라니까요….” 그때 정국환이 건물에서 나오자, 경찰들이 행동을 멈추고 경례했다. 경완서를 발견한 정국환은 고개를 숙였다. “호준이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서장님. 유괴 사건이 일어났어요. 다리 밑에 사는 아인데요, 어떤 남자가 옥동으로 가는 산에 데려가는 걸 봤어요.” “지금 그곳으로 같이 가보시죠.” *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한참을 걸어도 사내와 도연이의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경완서는 도연이를 계속 쫓았어야 하나, 후회됐다. 그런데 순경 하나가 길 중앙에 무언가가 보인다며 외쳤다. 그러곤 물체에 손전등을 비추자, 소리를 질렀다. 정국현이 물었다. “무슨 일이고?” “서, 서장님… 저거 사람 머리입니다.” “사람? 사람 머리가 왜 있는데?” “모,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는 윤 경감이 성큼성큼 걸어가 손전등 불빛으로 머리를 비췄다. “하…. 이거 아무리 봐도 이상합니다. 고의로 머리만 자른 것으로 보입니다. 사내의 머리가 꽤 크고 얼굴 근육의 생김새로 보아 키가 180 정도 되는 거구인 듯합니다. 호준이 어머니, 혹시 아이를 유괴한 사내가 키가 크거나 덩치가 컸나요?” “마, 맞아요.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머리의 주인은 눈을 위로 치켜뜬 채 혀를 내밀고 있었다. 윤 경감은 이 사람이 도연이를 유괴한 납치범일 수도 있다며, 땅거미 무리의 왕초를 불러오라고 했다. 잠시 후 그를 데려와 머리를 보여주니, 도연이를 데려간 사내가 맞다고 했다. 하지만 유괴범이 아니라, 입양이나 취업을 알선 시켜주는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벌써 9명을 좋은 곳에 보내줬어요. 아이들도 잘 먹고, 잘 살 겁니다.” 정국환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 아이들이 간 곳이 어딘데?” “나야 모르죠.” 경완서도 거들었다. “어디에 갔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호준이 어머니,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도연이를 찾아보겠습니다.” “저도 도연이를 찾아볼래요.” “아니요. 밤이 깊어 위험합니다. 저기 권 순경, 호준이 어머니를 집까지 모셔주시게.” 정국환은 경완서가 집으로 가는 모습까지 본 후 윤 경감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나온 정보가 있나?” “아니요. 하나도 없습니다. 머리의 주인도 찾기 힘들 것 같고, 아이를 비롯한 어떤 흔적도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신수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나다니…. 이 산길은 옥동과 곡동으로 가는 지름길이야. 어른이 아이를 데리고 이곳으로 간다는 것은 틀림없이 두 지역 중 하나를 간다고 추측해 본다. 더욱이 입양이란, 밥상에 젓가락 하나만 놓는 일이 아니기에 뭔가 구린 일이 있을 것 같네. 옥동과 곡동에 아이를 입양할 만큼 부유한 집이 있을까? 더욱이 그곳에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가 있을까? 내 생각에는 없다. 그렇다면 사내는 왜 도연이를 데리고 이 길을 갔을까? 옥동을 가려고 했을까, 곡동을 가려고 했을까? 아니면 지리산을 건너 전라도로 가려고 했을까? 아이를 데리고 전라도로 간다는 가설은 확률이 지극히 낮아. 일단 옥동과 곡동에서 사내의 신원을 물어 보게. 호준이 엄마 말로는 여덟 살에서 열 살 사이의 아이들만 없어졌다고 하니, 분명 그곳에 아이를 빼돌리는 장소가 있을 거야.” * 벌써 이틀이 지났지만, 경찰은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사내가 누구인지, 도연이는 살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경완서는 공방에 와서 얼이 빠진 채로 있었다. 춘기 엄마가 그녀를 흔들었다. “호준이 엄마야…. 이만 들어가라. 남은 거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 “아니에요. 강 선생님네 양복이랑, 어르신 한복이 남았어요.” “도연이 걱정에 일이 되겠나? 경찰들한테 아무런 소식이 없고?” “그러게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서장님은 일이 진행 중이니, 기다리라고만 해요.” 춘기 엄마가 한숨을 쉬었다. “에휴, 경찰이고 군인이고 다 필요 없다. 도연이도 찾고 범인도 찾으려면 그분밖에 없다.” 경완서의 눈이 커졌다. “누구요?” “선녀님!” 공방에 있던 아낙들이 춘기 엄마만 봤다. 하지만 거창 댁만 비웃었다. “크크크, 선녀라고? 아이고, 춘기 엄마야. 그게 말이 되나? 나무꾼은 없나?” “거창 댁아, 모르면 조용히 좀 해라. 내가 곡동 출신 아니가? 선녀님은 모르는 게 없다. 느그 일본 놈들이 있을 때 신수고, 옥동이고 와서 지.랄발광 했제? 곡동은 안 그랬다. 와그런지 아나? 선녀님 때문이다. 일본 놈들도 선녀님의 능력을 알아봐서 까불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거다. 호준이 엄마는 믿제?” 경완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도 곡동에 그런 존재가 있다는 건 듣기만 들었지, 사실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춘기 엄마가 답답해하던 그때, 공방에 자주 들리던 나씨 부인이 끼어들었다. “춘기 엄마 말이 사실일걸? 우리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곡동 출신인데, 선녀가 우리 집안의 대소사를 해결해 줬어. 진짜 죽은 사람을 살릴 정도로 힘든 일이었지…. 선녀님은 진짜라니까? 그 증거로 조선시대에 온 사람이 아직도 늙지 않는다잖아. 호준이 엄마도 선녀님께 빨리 찾아가.” “생각 좀 해 볼 게요.” 거창 댁도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선녀라는 사람, 나도 찾아가 보자. 진짜인지 궁금하네?” 경완서가 말했다. “그런데 성님? 찾아간다고 해서 저 같은 사람을 만나줄까요? 그리고 저는 돈도 없어요.” 나씨 부인이 웃었다. “선녀님은 돈 그런 거 바라지 않으셔.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이미 이런 일이 벌어진 걸 알고 계실 거야.” 경완서는 집으로 가는 내내 나씨 부인과 춘기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몇 년 전에 조은애라는 여자가 시댁의 물건을 모조리 훔쳐 나갈 거라며 아낙들에게 조언했는데, 그녀가 소학교까지 나왔고 교양까지 넘치는 사람이라 그럴 리 없다며 무시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시댁의 재산을 들고 도망가다가 곡동의 수호신으로부터 벌을 받았다. 마치 도연이를 데려간 남자처럼…. 문을 여니, 호준은 철없는 아이처럼 자고 있었다. 경완서는 측은한 눈빛으로 호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니? 진짜 선녀라는 사람이 있을까? 그 사람이 도연이를 찾아 줄 수 있을까?” 호준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경완서도 옆에서 눈을 감으려고 할 무렵, 밖에서 누군가가 찾아왔다. “호준이 엄마, 집에 있어?” * 신수 경찰서의 형사들이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해 늦게까지 회의 중이었다. 사내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없었고, 도연이의 흔적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에 정국환과 윤 경감의 의견은 나날이 부딪쳤다. 정국환은 부산과 대구에 있는 경찰들을 불러 산 전체를 수색하자는 의견이었고, 윤 경감은 시간이 없다며 ‘선녀’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자고 했다. “윤 경감까지 왜 그러는가? 선녀라니?” “그런 게 아니라요, 아무런 단서가 나오지 않잖아요? 저도 답답합니다.” “다른 지역 경찰들을 모으고 산을 수색해 보자.” “서장님, 시간이 없습니다. 유괴는 시간이 관건입니다. 빨리 곡동에 가서 선녀에게 묻는 게 빠릅니다. 지금도 이렇게 꾸물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나는 그런 사람을 믿을 수 없어.” 그때였다. 경찰서 앞에서 경완서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정국환을 불렀다. 그가 창을 열었을 때 사람들은 불만 섞인 표정이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경완서가 대표로 말했다. “도연이를 빨리 찾으려면 지금이라도 선녀님을 찾아가는 방법이 우선일 것 같아요.” “호준이 어머니, 세상에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답니까?” “경찰들의 일만이 아니잖아요. 도연이는 저에게 딸 같은 아이예요.” 윤 경감도 정국환에게 부탁했다. “서장님, 마을 주민들이 불안해하는 것 같습니다. 일단 우리 아이들 둘을 붙여서 곡동으로 보내는 것이 어떨까요?” 정국환은 화를 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윤 경부는 머리를 긁적였다. “서장님, 왜 이렇게 선녀님을 못 믿으세요? 일단 모든 방법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진정 방법이라고 생각하는가?” 경완서가 말했다. “서장님, 사람들이 선녀님을 찾자고 말씀드렸는데, 전부 거절하셨다면서요? 그리고 선녀에게 가지 못하게 곡동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라고 하셨다면서요. 왜 그러셨어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을 왜 몰라주세요? 저희는 가지 말라고 해도 지금 가야겠어요. 도연이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정국현은 한숨을 쉬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윤 경감은 이를 놓치지 않고 선녀를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곡동까지 걸어서는 못 갑니다. 차를 타고 가야 해요. 이 중에 세 분만 가실 수 있습니다.” 젊은 순경 둘이 운전석과 보조석에 타자, 경완서와 거창 댁, 그리고 마을 촌장이 뒤에 끼어 탔다. 경완서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거창 댁 역시 그런 존재가 있는지 궁금했다. 촌장은 그런 둘을 보며 미소지었다. “아지매들 걱정 마이소. 선녀님은 진짜입니더. 우리 어릴 적에 선녀님에게 도움받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더.” 경완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춘기 엄마나 나씨 부인에게 저도 들었어요. 그분들 말이면 믿겠지만, 저 같은 미천한 사람의 말도 들어줄지 걱정이에요.” “허허허, 들어 줍니다. 선녀님은 지역을 따지지 않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분이시니까요.” 여기에 조수석에 앉아 있는 엄 순경도 어르신의 말이 맞다며 거들었다. “선녀님은 진짜입니다만, 아무나 만날 수 없다는 말도 사실입니다. 마음이 결코 더러운 자는 선녀님께서 알아보시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뒷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조용했다. 한동안 적막이 흐른 후 거창 댁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자동차라는 것이 사람이 걷는 속도와 차원이 다르네요? 벌써 옥동까지 왔네요. 평소 같으면 다섯 시간이나 걸릴 텐데. 거기에 곡동까지는 또 얼마나 걸리겠노?” “하하하, 그런데 곡동 입구부터는 쪼매 걸어야 합니다. 거기는 길이 안 좋아서요.” 엄 순경의 말대로 ‘곡동’은 산이 마을을 한바퀴 휘감은 동네였다. 곡동 입구에서 내려도 팽이처럼 내려가는 구조였기에 한참을 내려가야 사람들이 사는 곳이 나왔다. 거창 댁이 손짓했다. “순경님, 저기 너르고 큰 곳이 선녀님 집인가요?” 엄 순경이 손전등을 치켜들었다. “아니요. 거기는 이 동네에서 제일 부잣집이고요. 저기, 불이 켜진 곳입니다. 조금만 더 걸어서 가면 됩니다. 휴, 겨울이 아니니 천만다행이다. 여기에 눈 오면 일반 사람도 걸어서 못 다닙니다.” 경완서는 도연이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걸음이 빨라졌다. 이윽고 선녀의 집에 당도하니, 대문이 저절로 열렸고 아낙 하나 나왔다. “선녀님께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 선녀의 집은 유명한 절을 연상시켰다. 곳곳마다 등불이 있었고, 소박하지만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또한 한 번도 맡은 적이 없는 향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일행이 대문을 지나 마당을 건너 조그마한 사랑방으로 가니, 아리따운 여자가 반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도 전에 곡동에 살았다는 사람인데, 스무 살도 안 된 여인처럼 어려 보였다. “안녕하세요, 곡동에 사는 선녀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도연 양이 많이 걱정되시겠어요.” 경완서는 눈을 의심했다. 선녀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경찰서와 선녀가 연락할 방법이 없기에 의심은 곧 믿음으로 변했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았고, 당시의 상황을 본 것처럼 읊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제 3일이 지났네요. 한 사내가 다리 밑에 있는 아이들을 데려갔지요? 음…. 이번에는 그 사람이 도연이라는 아이를 데려갔고요. 그런데 신수에서 옥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죽었군요. 사내의 목만 발견됐지요?” 경완서가 냉큼 대답했다. “네, 맞아요. 우, 우리 도연이는 어떻게 됐어요?” 선녀는 다시 눈을 감은 채 집중했다. “잠시만 조용…. 지금 사내의 죽음을 추적하고 있어요. 이름은 박일종…. 이 사람, 아주 못된 사람이에요. 신수에서 아이들을 빼돌려서 부산이나 대구에 팔았어요. 땅거미의 왕초는 그걸 알면서 푼돈을 받은 거고요. 남자아이는 위험한 일터에 넘기고 여자아이는 술집에 넘겼어요. 도, 도연이도 그럴 목적으로 데리고 갔어요….” 경완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서, 선녀님 정말이에요?” “산신께서 사내에게 벌을 준 것 같아요.” “사, 산신이요?” “네…. 곡동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셔요.” “도, 도연이는 어떻게 됐어요?” “글쎄요. 아마도 저의 힘이 닿지 않는 걸 보니, 산신께서 도연이를 지켜주고 계시는 것이 분명해요. 지금 도연이 걱정보다 신수가 큰일이에요. 신수에 박일종과 왕초랑 내통하는 자가 있어요.” 엄 순경의 눈이 커졌다. “내통이요?” “음…. 비렁뱅이 아이들을 신수에서 쫓아내면 이익을 보는 사람…. 그 사람은 아이들을 파는 명목으로 돈도 꽤 많이 받았네요. 겉과 속이 정말 다른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누굽니까?” * 경완서는 집으로 오는 내내 마음이 복잡했다. 선녀는 산신이 도연이를 지켜주고 있다며 때가 되면 돌아온다고 했지만, 도연이를 만날 수 없었기에 찜찜했다. 다만 선녀가 다음에는 아들을 데려오라며 반드시 병을 고쳐주겠다고 해서 희망이 꿈틀거렸다. 선녀는 경완서의 운명만 봐주지 않았다. 거창 댁에게는 아픈 남편이 있는데, 때마침 그를 고칠 수 있는 약이 있다며 무료로 주었고, 촌장에게도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어줬다고 했다. 집에 온 경완서는 평소와는 다르게 눈을 감자 잠들었다. 눈을 뜨니 해가 중천에 떴다. 호준이는 일어나라며 노래를 불렀다. “어, 엄마! 일어나, 일어나!” 경완서는 화들짝 밥을 차렸고, 호준이가 식사를 끝내자마자 공방으로 함께 출근했다. 하루의 시작이 평소와 다른 호준이가 물었다. “엄마…. 수현이 누나 집에는 왜 안가?” “그런 것이 있어…. 오늘은 엄마랑 공방에 가자.” 공방에 도착하니, 다른 아낙들이 반겼다. 특히 거창 댁의 표정이 밝았다. “호, 호준이 엄마. 선녀님은 진짜다.” “무, 무슨 일이 있어요?” “선녀님이 주신 약을 남편에게 먹였는데, 다 죽던 양반이 벌떡 일어났어.” “저, 정말이에요?” 십여 년간 병환으로 누워만 있던 거창 댁의 남편이 아니던가? 움직이지도 못해서 첫째 딸이 어릴 적부터 간병하고, 거창 댁은 세상에 있는 좋은 의원에게 치료받게 할 거라고 지금까지 돈을 모았지만 매번 허탕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경완서의 마음이 떨렸다. 아들도 예전처럼 돌아올 것 같았다. “거, 거창 성님…. 정말이에요?” “그렇다니까? 이 양반이 괜찮아져서 좀 전에 나랑 같이 왔어!” 춘기 엄마도 끼어들었다. “참말이다. 거창 댁 서방이 공방까지 데려다주고 갔다. 기지도 못하던 양반이 두 다리로 여기까지 오는 게 신기하더라. 내 말이 맞다 아이가? 선녀님은 진짜라니까? 호준이 엄마는 어떻드노?” “잘은 모르겠지만 선녀님 말씀으로는 산신께서 도연이를 지켜주고 있데요. 시간이 되면 찾아 올 거라면서…. 그런데 정말 용하시더라고요. 사람의 얼굴을 보더니 어떤 삶을 살아오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두 맞히더라고요.” “그래, 선녀님이 하시는 말씀이 모두 맞다. 그런데 선녀님이 그 양반이 범인이라며? 아이고야, 우리 동네에 좋게 본 사람들 많은데 참말로 실망했겠다.” “저도 실망했어요.” * 지난밤, 엄 순경이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순식간에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정국환의 집 앞에 섰다. 윤 경감이 문을 두드렸다. “서장님, 서장님…. 안에 계십니까?”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대문이 저절로 열렸다. 윤 경감이 들어가 동태를 살폈다. “서장님! 서장님?”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얘들아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모두 들어와서 빨리 수색해라. 엄 순경은 서로 가서 정국환 서장이 가족들과 함께 도주했다고 전해라.” “네!” 선녀는 정국환이 아이들을 부산이나 대구로 판 장본인이라 했다. 그런 이유로 윤 경감을 비롯한 경찰들이 출동했고, 조사하기 시작했다. 정국환의 집을 뒤지던 경찰들이 급히 윤 경감을 불렀다. “경감님, 경강님! 여기 증거를 찾았습니다.” “어디?” 윤 경감이 그곳으로 가니, 아이들이 입는 옷들이며 신발이 나왔다. “하…. 이런 잔인한 새끼…. 아무리 그래도 애들한테 그러냐? 너네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 서장이랑 관련된 범죄가 이게 전부가 아닐 거다. 샅샅이 찾아야 해. 그리고 나머지는 정 서장을 쫓는다. 집 상태나 족적을 보니 도망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 “네, 경감님!” 다음 날 아침, 정국환의 범죄가 신수 시내에 모두 뿌려졌다. 정국환의 집에는 기자들로 인산인해였다. 경완서는 참고인으로 불려 갔다. 정국환의 집에서 나온 옷이며 신발을 보더니, 동공이 커졌다. 그녀가 땅거미들에게 선물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정국환은 겉과 속이 다른 자였던 걸까? 윤 경부가 말한 정국환은 악인 중의 악인이었다. “호준이 어머니께서도 정국환에게 깜박 속으셨네요. 사실 정국환은 몇 년 전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저울질하기 위해 밀정이 된 양반입니다. 광복을 한 후 조선의 건국 세력에 붙어 친일파를 잡겠다고 앞장섰지요. 물론 그들이 숨겨 놓은 보물들을 가지기도 위해서…. 아무튼 땅거미의 왕초가 모두 진술했습니다. 각 지역의 술집 사장들에게 접대를 받으면서 인신매매가 돈이 된다는 소리를 듣고 실행한 거랍니다. 경찰 서장이 이런 일을 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습니다. 어쩐지 선녀님을 찾겠다고 하니, 반대하더라고요. 아마도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될까 봐 막은 것 같습니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그런 사람인 줄도 모르고 우리 아이를 맡겼다니, 소름이 돋아요.” “에휴, 호준이 어머님도 많이 놀라셨겠어요. 이제 이 더러운 사건은 모두 끝났습니다. 도연이가 돌아오면 호준이랑 행복하게 살 일만 남았습니다. 그나저나…. 엄 순경에게 들었는데요. 선녀님께서 호준이 어머니를 데리고 오라고 했답니다. 호준이 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서요. 저희가 내일 선녀님이 계신 곳까지 데려드리겠습니다.” “저, 정말요?” 경완서는 불이나케 집으로 왔다. 마당에서 홀로 앉아 있는 호준이를 향해 외쳤다. “호준아, 내일 선녀님을 만나러 가자!” “서, 선녀님? 그, 그게 뭐야?” “니 병을 낫게 해줄 분이셔. 다시 예전처럼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그땐 경성으로 가서 다시 공부해….” “시, 싫다. 공부하기 싫다.” “호준아, 그래도 내일 선녀님을 뵈러 가야 해.” “히잉…, 알았다. 그러면 나 애들이랑 놀고 오겠다.” 선녀를 만날 생각에 경완서의 가슴이 뛰었다. 호준이가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도연이도 돌아온다면 아무것도 바랄 게 없다. 하지만 희망도 잠시, 밖에서 호준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경완서는 맨발로 나갔다. 문 앞에는 호준이가 눈을 감싸며 울고 있었다. “호, 호준아, 무슨 일이야? 왜 눈을 감싸고 있어?” “나, 나쁜 놈들이 얼굴에 흙을 뿌리고 도, 도망쳤다. 나, 눈 아프다. 눈이 아파서 눈을 못 뜨겠다. 허어엉….” 상태를 조금만 보자고 해도 호준이는 아프다며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 경완서의 마음은 미어졌다. “괘, 괜찮아. 이것 또한 선녀님께서 고쳐주실 거야.” “지, 진짜? 서, 선녀님이 고쳐주실 수 있을까?” “당연하지….” * 아침이 되자, 경완서가 호준이를 데리고 경찰서 앞으로 갔다. 윤 경감을 비롯한 경찰 몇이 마중을 나와 있었는데, 눈에 헝겊을 칭칭 두른 호준이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호, 호준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다친 거야?” 호준이 아무도 없는 윤 경감 옆에 인사를 했다. “어? 유, 윤 경부 나으리 아니띱니까? 안녕하띱니깡! 역시 윤 경부 나으리한테서는 외제 향수 냄새가 납니당.” “니 녀석 개코구나, 하하하….” 경완서가 멋쩍게 웃었다. “어제 동네 아이들이랑 놀다가 눈을 좀 다쳤어요….” “아 그러시군요. 걱정 마세요. 선녀님께서 눈도 치료 해주실 겁니다. 일단 타시죠.” 차에 타니, 엄 순경이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호준이가 눈을 다쳤구나? 조심해서 타거라.” 호준이는 차에 타는 것을 거부했다. “어, 엄마, 차 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난다. 무, 무섭다….” 엄 순경 웃으며 말했다. “나쁜 녀석들을 잡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거야. 호준아, 어서 타!” 그때 호준이가 질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바, 반말하지 마라! 새끼야. 내, 내가 더 형이다!” 경완서가 당황하며 호준이를 움직이지 못하게 몸통을 안았다. “얘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가만히 있어. 엄 순경 미안해요. 빨리 출발하시죠.” 호준이의 몸이 경직됐다. 호준이의 심정과 다르게 경완서의 마음은 들떴다. 호준이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올 일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윤 경장이 입을 열었다. “하하하, 호준이 어머니. 현재 정국환 가족을 추적 중입니다만 정말 그 쥐새끼같은 인간들이 어디로 도망갔을까요?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네요….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알만 한 곳이 있을까요?” 경완서도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무 것도 몰라요. 선녀님께 여쭈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글쎄요. 선녀님께 너무 많은 것을 부탁하는 것 같아서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정국환 몰래 선녀님을 찾아뵙는 것이었는데, 판단 오류였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사이, 곡동에 도착했다. 마을까지 차가 들어갈 수 없기에 입구에서 내려 걸어갔다. 호준이가 경완서의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어, 엄마…. 어, 어디로 가는 거야?” “선녀님을 만나러 간다니까? 여기서부터는 걸어야 해. 그러니까 호준이도 엄마 손을 꼭 잡아.” “어, 엄마. 그, 그러면 여기가 곡동이야?” “그래…. 우리 호준이가 지리를 잘 아네.” “그, 근데 신수에서 곡동까지 하루 꼬박 걸리는데, 어, 어떻게 빨리 온 거야?” “자동차를 탔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윤 경부님이 자동차로 태워주신 거야. 고맙다고 말해야지!” 호준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유, 윤 경부님! 아, 아, 아가리또 고쟁이마스!” 윤 경부가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호준아. 조금 이상하지만, 일본어를 잘하는구나? 그나저나…. 엄 순경? 내년에는 곡동에도 도로를 깔아야겠어. 차가 진입할 수 없으니까 불편하구먼?” 엄 순경이 거들었다. “맞습니다! 곡동에도 도로 포장이 시급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입구도 입구지만, 여기 요봉사에서 옥동 넘어가는 길을 터널로 뚫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훨씬 교통이 편할 텐데요.” “내년에 한 번 위에 건의하겠네!” ‘선녀의 집’으로 가는 내내 윤 경감과 엄 순경은 윗사람들 이야기만 했다. 경완서는 호준이가 다칠까 노심초사했다. 기어코 선녀 집에 도착하니, 이전처럼 한 아낙이 마중을 나왔다. 여전히 선녀의 집에서는 좋은 향이 쏟아져 나왔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선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호준이가 엄마의 손을 더욱 꽉 잡은 채로 계단에 올랐다. 이윽고 문이 열렸고, 선녀가 웃으며 반겼다. “잘 오셨어요. 네가 호준이구나? 눈은 또 왜 그러니?” 경완서가 자리에 앉자마자 선녀에게 물었다. “서, 선녀님. 우리 아들의 눈도 고칠 수 있는 거죠?” “그럼요. 호준아, 붕대를 한 번 풀어볼까? 누나가 우리 호준이 눈 좀 보자.” 선녀가 호준이의 얼굴에 손을 대자, 호준이 크게 엄살을 부렸다. “아, 아프다. 만지지 마라! 만지지 마라!” 선녀는 다시 붕대를 빼기 위해 윤 경감에게 도움을 청했다. “경감님, 호준이가 겁을 먹은 것 같아요. 좀 잡아 주세요.” 두 사내가 호준이를 움직이지 못하게 팔을 잡으려고 할 무렵, 갑자기 호준이가 선녀를 밀치더니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 아프다…. 아, 아프다….” 경완서가 호준이를 잡기 위해 재빨리 뛰어갔다. “호준아, 나가면 어떻게 하니?” “아, 아프다, 누, 눈이 아프다. 만지지 마라!” 호준이는 만지지 못하게 얼굴을 좌우로 돌려대더니, 다시 일어나 대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경완서도 놓칠세라 이를 물고 뛰었다. 호준이의 발이 점점 빨라졌다. “호, 호준아! 어디로 가는 거야?” 환자라고는 볼 수 없는 속도였다. 아니, 언뜻 고도로 훈련된 군인처럼 빨랐다. 더욱이 붕대를 풀어 요봉사가 있는 언덕까지 달려갔다. 점점 선녀의 집으로부터 멀어졌다. 뒤늦게 나온 윤 경감과 오 순경이 쫓아 오자, 호준이 뒤를 돌아 소리질렀다. “엄마, 빨리 따라온나!” 경완서는 눈을 의심했다. 아들의 모습이 더 이상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호, 호준아? 돌아가자. 선녀님의 능력이 통한 것이야….” 호준은 한숨을 쉬며 신경질을 냈다. “무슨 선녀님이야? 말이 안 되는 소리 좀 하지마.” “그러면 어떻게 된 거야?”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할게. 일단 여기를 빨리 나가야 한다. 윤 경부에게 잡히기 전에 빨리!”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경완서는 아들의 말대로 했다. 그러던 중, 곡동과 옥동을 지나는 지점에서 오래된 오두막이 하나 나왔는데, 호준이가 문을 열었다. 도연이가 군것질거리를 입에 문 채 뛰쳐나왔다. 경완서는 당황스러웠다. 도연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호준이는 설명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엄마, 도연아. 지금부터 잘 들어라! 이제부터 우리는 서쪽으로 가야 한다.” 경완서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서쪽이라니?” “집이고 뭐고 다 버리고 서쪽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 “아니,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줘야 할 것 아니야?” “일단 서쪽으로 가서 모두 말할게! 앞으로 큰일이 날 거다.” 호준은 경완서와 도연이를 데리고 서쪽으로 향했다. 그들이 서쪽으로 꽤 멀리 갔을 무렵, 요봉사 근처에서 호랑이 울음소리가 났다. ※ 본 소설은 이번에 발행한 저의 첫 장편 소설 ‘창귀’의 프리퀄 ‘땅거미’입니다. 읽어 보신 후 뒷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선생님, 사장님들 함 도와주십시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4903199 (알라딘)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5101616 (교보문고)https://www.yes24.com/Product/Goods/140900823 (예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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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26년 자서전 영화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1962) +@ 무료 공개 중
https://standardebooks.org/ebooks/t-e-lawrence/seven-pillars-of-wisdom https://www.youtube.com/@MovieCon_Korea/search?query=%EC%95%84%EB%9D%BC%EB%B9%84%EC%95%84%EC%9D%98%EB%A1%9C%EB%9E%9C%EC%8A%A4 * 스포일러가 우려되시는 분들은 위의 링크를 통해서도 자서전 및 영화판을 보실 수 있으니 참고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T. E. 로런스'로도 알려진 '토머스 에드워드 로런스'(Thomas Edward Lawrence, 1888~1935)는 자서전에 따르면 영국인이지만 아랍에 애정을 느끼고, 여성과 교제 기록은 없는데 이니셜을 이용해 특정 대상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시를 자서전에 넣는 등(이로 인해 학계에선 동성애자로 분석하기도) 복합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이자 1916년 '대아랍 봉기'(표기에 따라선 '아랍 전쟁', '아랍 반란')가 승리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공헌한 인물로 알려졌으며, 1926년에는 자서전이자 회고록 '지혜의 일곱 기둥'(Seven Pillars of Wisdom)을 발표하는 등 작가로서의 면모도 보였습니다. 이 자서전은 훗날 각색해 영화화되면서, 공교롭게도 숫자 2와 6만 바뀐 1962년에 '아라비아의 로렌스'란 제목의 영화로 개봉해 당시 대성공을 거둔 한편으로, 자서전이란 형식의 한계 상 다원주의 및 교차검증이 가능해진 이후로는 해당 자서전 및 이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판 역시 미화, 과장, 우월주의, 사실과 다른 왜곡 문제 등이 논의되기도 했습니다.(웹 상에선 왜곡 문제가 발생한 김두한 자서전 및 이를 원작으로 삼은 '야인시대' 역시 실제 역사와 큰 차이가 있던 사례와 비교하는 등 다소 거친 비유도 존재) 이와 관련해선 아래 기사들도 참고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열다섯 피를 흔든 결단의 밤은 어디로, <아라비아의 로렌스> http://m.cine21.com/news/view/?mag_id=4511 culture film - 우리 마음 속의 영원한 ‘아라비아의 로렌스’ https://economist. co.kr/article/view/ecn201312230018 데이비드 프롬킨, 『현대 중동의 탄생』. http://feliview.com/modern-hist/nation-state/davidfromkin-apeacetoendallpeace/ [백병훈 칼럼] 세기의 명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감춰진 진실 http://www.financialreview.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860 아래 내용은 Yes24에서 인용한 자서전 '지혜의 일곱 기둥' 작품 소개입니다. 20세기 초반 서구 제국주의와 아랍 민족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시대를 온몸으로 체험했던 T. E. 로렌스의 자전적 기록이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대중에게 알려진 로렌스의 역작 『지혜의 일곱 기둥』은 영어권에서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필적하는 대작으로 손꼽히며, 20세기 최고의 전쟁 문학이자 자서전 문학의 정수로 평가받고 있다.이 작품은 원서 8백여 쪽에 달하는 분량의 대작으로, 로렌스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함께 실어 로렌스의 여정을 시각적으로 풍성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편집했다. 또한 로렌스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소개를 덧붙여 로렌스의 행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 세속적 가치와 물질적 이익만을 좇는 현대 사회에서 사막의 모래폭풍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로렌스의 생애를 담고 있는 이 저작은 진정한 명예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리더들이라면 반드시 읽고 음미해야만 하는 고전이다. 역사와 문학이 만나는 현대의 고전,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자화상“낮에 꿈을 꾸는 사람은 위험하다.그런 사람은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꿈을 향해 행동한다.그렇다. 나는 낮에 꿈을 꾸었다."『지혜의 일곱 기둥』은 1935년에 간행된 Seven Pillars of Wisdom의 국내 최초 완역으로, T. E. 로렌스가 아랍 반란 전쟁에 참여했던 경험을 개인 기록을 토대로 1919년 봄에 집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해 겨울 원고를 분실하고, 자신의 기억과 당시의 노트에 의존하여 1921년부터 다시 쓴 책이다. 이 작품은 1922년 자비 출판으로 8부가 출간되었고, 1926년에 공식적으로 출간되었다. 번역 판본으로 사용한 1935년 판은, 로렌스 자신이 1926년 판을 수정ㆍ보완한 것이다. '지혜의 일곱 기둥'이라는 제목은 로렌스가 구약 성서의 잠언 9장 1절("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을 인용한 것으로, 아랍 지역의 일곱 도시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의 결과를 담은 원고에 붙이려던 표제를 사용한 것이다.『지혜의 일곱 기둥』에서 로렌스가 활동했던 역사적 무대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 분할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다. 영국 정부는 터키에 대한 아랍인들의 반란을 이용하여, 적대국이었던 독일의 동맹국인 터키를 격퇴할 수 있으리라는 속셈에서 아랍 반란을 지원한다. 당시 터키에 대항한 아랍 반란을 주도했던 인물은 메카의 후세인 왕이었으나, 이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지도자는 그의 셋째 아들 파이살이었다. 로렌스는 파이살과 함께 부족 간 적대로 흩어진 아랍 부족민들을 민족주의적 정신 속에 하나로 규합하고, 2년 만에 다마스쿠스 해방이라는 업적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1918년 파리 평화회의에서 아랍 자치 정부 수립에 대한 논의는 안건에 오르지도 못했고, 이러한 영국 정부의 약속은 결국 거짓으로 드러난다. 로렌스는 이 전쟁이 “아라비아에서 벌어진, 아랍인의 목적을 위해, 아랍인들이 주도하고 수행한 아랍 전쟁”이라는 확신 속에서 역사의 흐름을 주도했으나, 끝내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결정을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열강의 치열한 이해관계와 힘없이 분열된 민족들의 고통 사이에서 고민했던 로렌스 역시 자신의 역할의 역사적 한계와 이율배반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로렌스는 이러한 한계 속에서 자신의 행위가 ‘헛된 희망’과 ‘실패’로 귀결될지라도 아랍인들이 최소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자유를 향한 내적 신념 속에서 행했다.1권에서는 로렌스가 카이로에서 출발하여 아라비아 반도의 항구 도시 지다에 도착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후세인 왕의 셋째 아들인 파이살을 만나기까지의 진로와 이후 메디나 근방의 철도를 장악하고 터키군의 물자 수송로를 차단해 나가는 북방 원정의 과정을 담고 있다. 2권에서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아부 타이족이 파이살과 로렌스 진영에 합류하여 주요 항구이자 요새인 아카바로 진격하는 과정과 치열한 전투를 그리고 있다. 3권에서는 이 저작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사해 전투로부터 시작하여, 전쟁의 종착지였던 다마스쿠스로 입성하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진다. 고원지대의 혹독한 날씨와 엄혹한 지형 속에서 행했던 행군을 그려낸 3권의 사해 전투 기록은 이 저작에서 인간 한계의 극단에 대한 예리한 묘사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영어권 문단에서 이 저작에 멜빌과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장이 지닌 서사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3권에서 펼쳐지는 이러한 대장정은 결국 다마스쿠스에 입성하여 아랍 독립을 완수하고 아랍의 자치 정부 수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끝이 난다. 로렌스는 비정한 살육의 현장에서 터키군 포로를 시켜 전사자들을 매장하고, 이후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이살에게 모든 권한을 넘긴 뒤 아라비아를 떠난다.문학적 형상과 철학적 사색에 담아낸 아랍의 격동기 근대사“우리는 원하는 곳 어디에나 자유롭게 스며드는 안개가 되어야 한다.우리의 왕국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로렌스는 아랍 반란과 게릴라 전술을 지휘하면서, 아라비아 반도의 혈맥이자 터키군의 물자 수송로인 헤자즈 철도를 파괴하는 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가로서의 면모는 로렌스의 진면모를 온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로렌스는 스스로를 ‘군인’으로 생각한 적이 없으며, 오직 내적 이상을 향해 나아갔을 뿐이었다. 그는 모든 권위와 “나는 행동가들이 느끼는 행복을 경멸했다.”고 할 만큼 영웅적인 신화를 거부했다. 헌시에서 로렌스는 “자유에 걸맞는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오직 그 집을 허물고 완성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는 ”실패를 부르짖으며 죽음에 이를 때까지 싸우는 것“이 진정한 승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오직 ‘완성하지 않음’만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그의 고백은 거듭되는 자기반성 속에서 인간 의지의 극한에 이르고자 하는 초인적 정신을 드러낸다.정신의 힘과 의지에 대한 찬양, 거대한 역사적 흐름 안에서 몸부림쳤던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이 함께 녹아 있는 이 저작은 사색의 기록이자 여행기이자, 픽션을 뛰어넘는 문학적 정신을 지니고 있다. 근대적 교양인의 전형으로서 로렌스는 “평생토록 사람보다는 사물에, 사물보다는 관념에 더 이끌려왔다.”고 고백할 만큼 최고의 지성인이었으나, 동시에 극단적인 허무와 실존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구토』의 로캉탱을 떠올리게 할 만큼 모든 사물과 존재에 부여된 고정된 이름을 거부하고, 순수한 ‘사막’에서 세속의 범주를 모두 벗어버린 채 있는 그대로의 지각을 경험했다. 이 저작은 20세기 초반 서구 최고의 지성이 오해와 몰이해로 점철되어 있던 아랍 지역을, 바타유라면 ‘내적 체험’이라 했을 이러한 극단적 체험 속에서 직접 경험하고 기록한 기행문이자 사상서이다. 이러한 점에서 소로우의 『월든』이나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처럼 픽션을 뛰어넘는 감동과 사색의 계기를 선사한다.특히 특유의 예민한 감성과 역사의 소용돌이와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 속에서 고뇌하던 스물아홉의 청년 로렌스의 눈에 비친 아랍 지역은 놀랄 만큼 생생하다. 옥스퍼드 대학 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영박물관 산하 원정대의 일원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탐사했던 고고학자로서 로렌스는 셈족의 종교와 사막의 신앙, 아랍의 식문화 및 주거 풍습, 야만적인 터키군의 실상 등을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생동감 넘치게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관찰기록 속에 그려낸 풍경 및 인물 묘사는 단순한 기술적 서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대 국가로 정립되기 이전 베두인족을 비롯한 아랍 부족민들의 20세기 초반의 실제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이기도 하다. 『지혜의 일곱 기둥』이 문학적 필치로 그려낸 거대한 화폭과도 같은 한 편의 역사서이자, 여행기로 읽을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숭고한 자연과 인간의 초월적 의지에 대한 최고의 묘사“사막의 본질은 마치 묘지처럼이 세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서길의 아들인 듯 고독하게 혼자서 움직이는 데 있다.”『지혜의 일곱 기둥』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어떠한 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숭고한 자연에 대한 묘사가 펼쳐진다. 광활한 사막, 혹독한 추위와 숙련된 낙타마저도 무릎을 꿇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던 엄혹한 자연에 대한 사실적인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로렌스는 인간을 압도하는 숭고한 자연의 질서 안에서 “온갖 근심과 걱정으로 무거워진 우리의 세속적 짐을 부끄러워”하면서, “자유와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자유의 허울을 벗을 수 있는 힘”을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충만감은 “존재의 연쇄적 고리에 대한 망각과 영원한 안식”에 대한 치열한 기도로 이어진다. 특히 2권에서 펼쳐지는 와디 룸의 장엄한 풍경과 이에 대한 로렌스의 묘사는 사막 위의 한낱 모래먼지와 같은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사유로 이어지면서 준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로렌스는 자신의 행위가 자유를 향한 거대한 의지에, 광막한 사막에 한낱 점으로 존재함을, 들뢰즈의 표현대로 “자신이 맡은 역할이 국부적이며, 부서지기 쉬운 그물 속에 놓여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일곱 기둥을 세운 집”, 로렌스가 자유를 대신하여 부른 그 집은 오직 완성하지 않음으로써만 완성할 수 있는 집이었던 것이었다. 로렌스는 자기부정을 통한 초월의지를 내세웠던 낭만주의적 사유 속에서 오직 과정으로서만 도달할 수 있는 드높은 이상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로렌스에게는 극단적인 허무주의와 한 개인으로서의 실존적 고민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로렌스가 ‘아라비아의 무관 왕’이라는 세간의 이름 외에 현대의 서사시적 인물, 20세기의 햄릿이라 불리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자신이 처한 모순과 역경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했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일곱 기둥』이 근본적으로 희비극의 정서를 지니는 이유이다. 이러한 점에서 로렌스를 전쟁의 영웅으로 신화화하는 태도나, 영국 제국주의의 꼭두각시였다는 비판적 독서 모두 이 저작의 이중적인 면모를 사장시킨다. 이 자서전은 차라리 자신을 전쟁의 영웅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또 자신의 위선을 훗날 기억하게 될 아랍인들에게 조롱하는 문체로 쓴 거대한 보고서이다. 로렌스는 이러한 기묘한 보고서를 스스로 “전쟁의 규칙을 이용한 패러디”라 불렀다. 또한 로렌스에게 『지혜의 일곱 기둥』은 아랍인들과 스스로를 속였던 자신에 대한 속죄이자, 구원의 기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그려내지 못한 로렌스 자신의 문체를 읽어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국인으로서 아랍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로렌스에게는 위선의 가면도, 그 뒤의 진정한 얼굴도 없었다. 따라서 그는 아이러니를 구사하기보다는 어떤 수치의 흔적, 쓰고 다시 지우는 여러 겹의 문장을 쓴다. 그의 이 방대한 기록은 용해되고 분열된 여러 자아들 속에서 자신의 단 하나의 얼굴을 찾고자 하는 끝없는 여정이기도 한 것이다.아마도 끝내는 물처럼 모든 것을 극복할 것이다. 생명이 시작된 이래로 그들은 끊임없는 파도가 되어 육체의 해안에 스스로를 부딪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파도는 부서져 버리고 말았지만, 파도가 부딪힌 거대한 화강암은 조금도 닳아버리거나 없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인가는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물질적인 세상이 자리 잡고 있던 그곳을 완전히 뒤덮어버릴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본문 중에서서구 열강의 막대한 지원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국 간의 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 현재에 이 저작은 그러한 갈등의 기원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윤리와 정의(justice)는 다르다. 정치의 이해관계에 따른 세속의 정의는 단 하나이지만, 윤리는 여럿이다. 그러한 윤리의 선험적이고도 절대적인 근거란 없다는 것, 정의의 주체는 민족일 수도, 국가일 수도 있으나, 윤리의 주체는 오직 개인일 수밖에 없으며, 그 개인을 정의(define)하기란 참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지혜의 일곱 기둥』이 전하는 궁극적인 메시지일 것이다. 역사와 사회 앞에 개인은 나약할지 모르나, 한 개인의 윤리적 경험은 모든 세대와 해석을 뛰어넘어 스스로 살아남는다. 아래 내용은 교보문고에서 인용한 '스콧 앤더슨'의 저서 '아라비아의 로렌스 전쟁, 속임수, 어리석은 제국주의 그리고 현대 중동의 탄생' 작품 소개입니다. 지난 백 년간 중동에 불어닥친 흉폭한 역사!한 줌의 모험가와 새파란 장교들이 판치고 다녔던 사막의 무대로렌스의 어두운 면과 심각한 결점을 세밀하게 재건하는 저자는현대 중동이 난장판이 되어가는 과정을 스펙터클하게 펼쳐낸다네 사내가 펼치는 20세기 최대의 첩보전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드리우기 전,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모래바람이 몰아치는 황량한 중동 사막에 네 사내가 등장한다. 한 줌도 안 되는 모험가와 새파란 장교들이 멋대로 쑤시고 다니며 은밀하고도 복잡한 게임을 펼치려 하고 있다. 비밀로 묻어둔 충성심, 일대일로 뒤엉킨 육박전은 각자 자국의 제국주의적 탐욕을 대표하며 비극적인 사막 전쟁으로 이어질 터이고, 이것은 오늘날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현대 중동의 탄생을 야기하게 된다.네 사내는 누구인가. 쿠르트 프뤼퍼는 이집트 카이로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일하는 문약한 학자. 그는 영국을 향한 복수심의 칼날을 갈며 지하드에 불을 댕기는 비밀 임무를 맡았다. 훗날에는 중동지역에서 활동하는 독일 첩보 조직의 책임자가 된다.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인인 서른일곱 살의 아론 아론손은 저명한 농학자이면서 열성적인 시온주의자. 길쭉하고 광대한 팔레스타인 땅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빼앗아 유대인 조국을 재건하겠다는 구상을 펼치려 한다. 이를 위해 영국의 힘을 등에 업고자 팔레스타인 한복판에서 첩보 조직을 꾸린다. 윌리엄 예일은 몰락한 귀족 집안 출신으로 스탠더드오일 사의 하수인이다. 스탠더드오일 사는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교활한 미국 기업으로, 세계대전의 비극을 지켜보면서 이 기회에 단단히 한몫 잡으려 한다. 예일을 중동 땅으로 파견한 것은 거대한 유전을 차지하려는 속셈으로, 그는 중동 전역을 통틀어 단 한 명뿐인 미국인 정보요원이다. 이들 세 인물과 함께 로렌스가 등장한다. 그는 중동이라는 원형 경기장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영국인 첩보요원으로,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간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모든 상황과 긴밀히 연결된다.네 사람은 자기 임무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아마추어들이지만 영악함과 용감함, 남을 배신하는 재주 따위의 특성으로 전쟁이 키운 열매를 거두어들이려 한다. 즉 유럽 열강이 계획한 각종 정책과 국경선을 전후에 현실로 만드는 장본인이 될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은 수백만 명의 주체가 발을 담근 대사건이었다. 세부 사건들은 당대에는 인과관계가 없는 우연의 연속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우연들이 뒤엉키면서 중대한 국면들을 형성하게 된다.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제1차 세계대전 때 가장 낭만적인 인물로 일어섰다. 그리고 이 책은 어리석은 현대 중동이 탄생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가운데 처칠도 다른 누구도 아닌 로렌스를 중심 무대에 올린다. 국내에서는 로렌스의 자서전 『지혜의 일곱 기둥』이 번역된 게 전부이고 이 책은 로렌스 개인을 다룬 책으로서는 처음 출간되는 것이다. 방대한 분량과 복잡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로렌스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다. 양면적 평가 사이에 낀 그는 역동적인 역사를 만들기도 했지만, 다른 세 애송이와 더불어 지난 100년간 중동을 가장 비극적인 역사의 격전지로 만들어놓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여파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서구 열강의 격전지, 중동의 비극정복, 탐험, 착취의 대상으로서 동양은 수천 년 동안 서양을 끌어당겼다. 중세에는 기독교 십자군이 300년 주기로 근동지역에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1790년대에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이 파라오가 되겠다는 환상을 품고 이집트를 침략했다. 1830년대에는 유럽 최고의 고고학자들이, 1870년대에는 서구의 석유 재벌과 투기를 일삼는 채굴자, 사기꾼 등이 카스피 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오스만 제국은 종교, 부족, 인종 면에서 다양한 구성 인자를 하나로 묶어놓은 모자이크였다. 이 제국은 한순간에 무시무시한 그림으로 둔갑할 수 있는 곳으로, 다양한 공동체가 자기 보호를 위해 끼리끼리 뭉칠 경우 조상 대대로 묵혀온 반목과 의심과 질투가 폭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1850년대부터 오스만 제국은 서구 경쟁국들이 자신의 변두리를 야금야금 뜯어먹는데도 이들과 돌아가며 동맹을 체결하는 줄타기를 함으로써 간신히 버티는 상황이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오로지 한곳에 눈독을 들였는데, 바로 분열과 혼돈의 땅 오스만 제국이었다.러시아 차르는 콘스탄티노플을 낚으려고 200년 전부터 낚싯바늘을 드리우며 기다렸다. 그리하여 1870년대에 발칸에서 오스만 군대를 궤멸한 바 있다. 프랑스 역시 16세기 이래 오스만 제국 치하 시리아의 가톨릭 신도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특별한 지위를 누려왔다. 만약 제국이 붕괴하면 그 지역은 프랑스 땅이 될 터였다. 영국은 인도로 가는 육로를 제국주의 경쟁자들의 침식 작용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1882년 대영제국은 민족주의 움직임을 구실 삼아 이집트를 잡아채기도 했다. 1915년에 연합국을 구성한 이들 3국은 독실한 기독교국으로서 어쩌면 십자군의 역사를 해피엔딩으로 다시 쓸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보았다. 한편 독일 역시 군사대국으로 떠오르면서 오스만 제국과 무슬림의 영토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 5개국(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은 눈치껏 뜯어먹던 행태에서 벗어나 게걸스럽게 달려들었고 오스만 제국은 “거대한 전리품”이 될 위기에 놓였다.특히 영국은 유럽 열강 가운데 해양 의존성이 가장 큰 국가로, 1870년대 이집트 수에즈 운하 건설을 배후에서 주도했으며, 운하를 독차지할 수만 있다면 오스만 제국과 지켜온 우호관계 따위는 내동댕이칠 준비가 돼 있었다. 마침내 영국은 속마음을 드러냈는데, 1882년 이집트를 침공한 것이다. 그 결과 수에즈 운하 서쪽 이집트 땅 전체가 영국 손안에 들어왔고, 오스만 군대는 운하 건너편 시나이 반도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시작에 불과했다. 영국은 1906년 사소한 외교적 분쟁을 핑계로 시나이 반도까지 차지했다. 그리하여 이제 이집트와 시리아 서남부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리하는 넉넉한 완충지대까지 얻게 되었다. 즉 영국은 오스만의 가슴에 영원토록 변치 않을 적개심을 심게 된 것이다.더욱이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영국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아랍인들에게 거짓 독립을 약속했고,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뒤통수를 쳤다. 그리고 밸푸어 선언으로 시온주의자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내주었다. 중동에 피바람을 일으키고 마침내 아랍인들과 로렌스를 좌절시킨 영국의 3중(속임수) 외교의 핵심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이었다.20세기 초까지 간신히 멸망을 피해왔던 오스만 제국은 1914년 막판으로 치닫던 끔찍한 전쟁에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바람에 제 목숨을 재촉했다. 그리고 21세기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분열의 물꼬를 트고 말았다.로렌스 그리고 아랍의 좌절T. E. 로렌스(1888~1935)는 대단히 매혹적인 인생을 바람처럼 살다 간, 20세기 초 서구 역사의 스타다. 역사적 탐구 대상이든 대중적 호기심거리이든 로렌스만큼 인기를 누리는 이도 드문데, 한편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다. 그는 유대인들의 위대한 수호자인가, 아니면 반유대주의 선동가인가? 아랍 독립에 힘쓴 깨우친 진보주의자인가, 아니면 가면을 쓴 제국주의자인가? 희대의 영웅, 사유하는 투쟁가, 제국주의의 하수인, 자기파멸적 몽상가와 같은 수식어로 역사는 그를 칭송과 조롱 사이에 놓고, 먹칠과 금칠을 번갈아 덧댄다.저자는 당시 서구 열강의 탐욕적 경쟁과 그에 따른 외교 및 첩보전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로렌스의 정체를 살핀다. 옥스퍼드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고고학자인 20대 초반의 로렌스는 중동 사막에 대한 열정과 지식을 지닌 터라 영국이 새로운 영토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며 제국주의자로서의 기질을 발휘한 때에 영국 정보요원이 된다. 여느 서구인과 달리 로렌스는 중동에 정통했고, 오스만 제국의 시골 마을에서 제국이 무너지는 과정을 낱낱이 목격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첩보전 한가운데 섬으로써 고고학자로서의 경력에 종지부를 찍으며 1914년 9월 육군에 들어갔다.당시 영국은 오스만 제국을 파멸로 이끌고자 아랍 민족운동을 이용했다. 이런 움직임의 중심에 로렌스가 섰는데, 그는 1916년 6월 파이살 이븐 후세인을 내세워 아랍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1917년 7월 6일에는 홍해 끝부분 쪽 아카바를 장악했고, 1918년 10월에는 다마스쿠스(현재 시리아이 수도)를 점령했다. 이런 면모로 인해 그는 아랍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그러나 로렌스는 원래 군인 출신도 아니었을뿐더러 성격, 태도, 말투, 복장 등 모든 면에서 조직과는 어긋나는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차디찬 눈빛을 지닌 그는 군 조직에서 자기와 다른 의견이 제시되면 나이와 계급에 관계없이 정면으로 맞서 하극상을 저지르고도 남았다. 또한 그는 영국과 아랍 세력 사이에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즉 그는 영국의 정보요원이었지만, 어느 순간 모국의 군 조직을 흔들 만큼 치명적인 전략이나 정보를 내놓는가 하면, 아랍 반란을 이끄는 가운데 아랍인의 입장에 서서 사고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는 아라비아에서 활약하는 주요 인사들, 그들이 견지하는 주장의 요점, 그들의 경쟁자까지 꿰뚫고 있었던 반면, 그가 관찰한 바의 상당 부분은 특별한 내용이 거의 없고 권위 있는 분석이라기엔 겉핥기식에 지나지 않기도 했다. 그는 자기편에게 전보를 서둘러 보낼 때는 외교 의례를 밥 먹듯이 어겼고, 원치 않는 명령을 받으면 못 받은 것처럼 꾸며 사안을 무효화시켰다. 어쨌든 28세의 대위에 불과한 로렌스는 영국 정부 관료의 척후병 역할을 수행하면서 과도한 권력을 휘두르던 정부 관료의 세도를 꺾고, 영국의 아라비아 정책에 근본적인 물꼬를 텄다.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대단원을 향해 치달으면서 로렌스가 투쟁하고 조국을 배신하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아랍을 지키려는 소망은 영국과 프랑스 총리의 대담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영국은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을 가지려 했고, 프랑스는 시리아에서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려 했다. 종전 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새로운 세계 질서’를 호언장담했지만 종국엔 뒷거래, 앙갚음을 위한 협정, 독단적으로 그어버린 국경선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즉 파리평화회의에서 서구 열강들은 저마다 음모를 품고 오스만 제국이라는 짐승의 사체를 나누어 갖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이후에도 로렌스는 아랍의 희망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접지 않았다. 파리회의 내내 아랍 반란의 지도자 파이살의 조언자로 활동하면서 아랍인들이 사활을 걸고 싸운 그 땅을 되찾을 수 있도록 협상 전략을 짰다. 영국 유력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펼치는가 하면, 아랍을 옹호하는 열정적인 칼럼을 수차례 기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렌스는 영국 정부가 보기에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사람이었다. 정부 관료들은 그를 가리켜 ‘악영향’ ‘시리아 문제로 프랑스와 갈등을 빚는 데 대한 책임’ 등을 들이밀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결국 로렌스는 아랍을 지켜내려는 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함과 동시에 평화를 상실하고 말았다.마크 사이크스, 20세기에 가장 큰 비극을 드리운 인물이 책에서 네 명의 주인공 외에도 모든 등장인물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채워넣을 만큼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그중에서도 현대에 가장 큰 비극을 몰고 온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 경이 될 것이다. 역사상 그처럼 부주의하게 수많은 비극을 야기한 인물은 없다.제1차 세계대전으로 정치인들이 득세하고 각국이 제 이익을 더 챙기려 하면서 속임수와 비잔틴식 술책이 판치는 곳에서 그는 술수의 대명사가 된다. 사이크스란 인물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가장 영리한 사람이라고 증명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서, 또는 재미 삼아 상대방을 속이고 싶어하는 사기꾼의 전형적인 습성을 지녔다. 그런 까닭에 이 젊은 아마추어는 자신의 필요에 맞춰 사실을 곡해하거나 중요한 정보를 숨기거나 조작하면서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했다.그런데 영국 정부는 이 젊은이에게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골치 아프면서 가장 중요한 숙제를 떠넘겼다. 그것은 바로 대영제국과 중동 우방들의 상충하는 영토적 요구를 정리하는 업무였다. 로렌스는 훗날 자서전 『지혜의 일곱 기둥』에서 사이크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세상만사를 제멋대로 지껄이는데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편견, 지레짐작, 유사과학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그가 내놓은 아이디어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했다. 진실의 일면에 도취한 나머지, 그것이 속한 상황에서 분리해낸 다음, 의미를 부풀리면서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빚어내는 식이었다.”그가 이뤄낸, 역사상 가장 이상하고도 파괴적이었던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1916년 1월 초, 회담이 열리고 처음 며칠 동안 영국과 프랑스의 중진급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수아 조르주피코는 미래 중동의 지도를 날림으로 끼워서 맞추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가 제국주의적 탐욕을 부린 탓에 영국 또한 경쟁의식이 불타올랐다. 그 결과, 프랑스가 시리아 전역을 직접 관리하게 되고 영국은 이라크를 모두 차지하는 반면, 진정한 아랍의 독립국은 아라비아 사막의 격오지로 대부분 밀려나고 말았다.어불성설로 들릴지 모르나, 미래 중동의 지도를 거의 완성한 1916년 1월 초, 이 중차대한 시점에 후세인-맥마흔 서한과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내용을 속속들이 꿰뚫고 아랍과 프랑스와 영국이 그 지역에서 이루려는 목표가 결국엔 충돌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사람, 마크 사이크스뿐이었다.중동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 책1960년대까지 유럽 제국주의 시대가 황폐한 뒷모습을 남긴 채 막을 내리자, 중동에는 식민주의 열강이 지구 반대편에 저질러놓고 떠나버린 난장판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중대한 차이점이 있었다. 석유였다. 중동이 여타 제국주의 피해 지역과 달리 여태껏 지구상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으로 남아 있는 것은 석유 때문이다. 그런 탓에 서구 역시 스스로 야기한 중동의 혼란으로부터 아무리 발을 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물론 지난 50년 동안 그곳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랍과 이스라엘이 네 차례나 전쟁을 벌였고, 레바논과 예멘은 각각 10년과 21년에 걸친 내전을 치렀다. 시리아와 이라크는 소수 인종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고, 국가가 지원하는 테러가 40년 동안 이어지고 있으며, 극단주의 종교가 격동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네 차례 대규모 군사작전을 비롯해 수시로 개입에 나섰다. 아랍 민중의 절대다수는 최근까지도 튀니지부터 이라크에 걸친 광대한 땅에 포진한 수많은 독재 정권의 통치에 억눌려 시민권을 빼앗긴 채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이 모든 고통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에 내린 끔찍한 결정들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 대단히 치명적인 씨앗을 심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전 세계 분쟁지역을 누벼온 언론인 스콧 앤더슨은 로렌스의 행적을 더 깊이 파고드는 작업이 더없이 절실한 시대라고 판단했다. 로렌스가 열정을 바친 대상이 바로 중동의 국경선 문제였기 때문이다.저자는 몇 년간 사료를 모으는 일에 집중한 뒤 이 책을 썼다. 그 결과 현대 중동의 형성 과정에 대한 통념을 완전히 뒤집는다. 유럽의 제국주의 책략이 초래한 파괴와 고통에 대해 단호하게 지적하고 날카롭게 묘사하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철저한 고증과 방대한 사료, 최근 기밀 해제된 자료까지 동원해서 큰 그림부터 세밀화까지 치밀하고도 힘 있게 펼쳐낸다.저자만의 독특한 관점도 몇 가지 확인할 수 있는데, 예컨대 로렌스가 경쟁국 프랑스에 맞서서 어느 정도는 조국의 이득을 고려했다는 식의 애국주의적 설명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 등이 그렇다. 구체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통설에 이견을 제시하는 내용 중에는 로렌스가 터키군에 붙잡혀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데라 사건도 포함된다. 저자는 무엇보다 태생부터 유년기, 꿈 많은 옥스퍼드 재학 시절을 거쳐 전쟁 이후 피폐한 심리 상태와 불행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로렌스 개인의 인생 전반을 충실히 파악할 수 있도록 독자를 안내한다. 아울러 첩보의 세계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그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영화판 Lawrence of Arabia (1962) 위에서 언급했듯 1926년 자서전을 원작으로 삼아 영화화한 작품이며 극장 개봉 당시 기준으로 이미 1950년대에 엇비슷한 제작비의 작품이 제작됐거나, 혹은 이 작품보다 더 제작비가 높은 작품도 볼 수 있는 정도의 제작비인 1500만 달러로 제작해 영국 및 미국 개봉 당시 평론적으로 극찬을 받아 아카데미 수상작이 됐고, 극장 매출만으로 제작비의 4배가 넘는 7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초대박 흥행 성공을 기록하고, 부가 매출 시장에서도 큰 수익을 올렸으며, 이 글을 올린 시점 기준으로 무비콘에서 한국어 자막과 함께 무료 공개 중입니다. 아래 내용은 KMDB에서 인용한 영화판 작품 소개이며, 당시 이 작품 관련 소개를 한 잡지 '영화 TV'도 PDF로 공개 중이니 링크 역시 참고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영국 정보국 소속 장교 로렌스(피터 오툴)는 1차 대전 중 중동지역의 전투에서 아랍 부족의 지원을 받기 위해 아랍 지역으로 파견된다. 그런데 그는 영국 정부가 바라던 것 이상으로 아랍의 지도자들을 사로잡고, 아랍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싸워 아랍 민족으로부터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웅적인 칭호를 받게 된다. 그는 아랍 전사들을 이끌고 터키 군과 싸우면서 규율을 잡기 위해 남의 마을의 우물물을 마신 병사를 과감히 처형하는 등 독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그런 용맹성은 터키 군에게 포로로 잡힌 후 그곳에서 받은 성적 학대를 통해 병적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마침내 로렌스는 영국 정부의 소환을 받고 런던으로 돌아오지만, 종동으로 보내줄 것으로 요구하면서 사막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미 정치적으로 타결이 된 아라비아 사막은 이제 그를 원치 않는다.* 70mm 대형영화의 대표작인 <아라비아의 로렌스> 역시 1970년 1월 1일 대한극장 신정 프로그램으로 개봉하여 한 달간 상영되었다. " (출처 : 시네마테크KOFA상영정보(2017))아라비아에 정통한 로렌스 중위는 아라비아의 상황파악을 위해 파견된다. 파이잘 왕자와 알리 족장을 만난 로렌스는 파이잘 왕자에게 수에즈 운하의 주요 통로인 아카바로 출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파이잘 왕자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50명의 부하들과 알리를 내준다. 신이 내린 죄악의 땅인 네퓨드 사막을 간신히 통과한 로렌스 일행은 호웨이랏족의 족장 아우다 이부타이를 만나 서로 힘을 합치게 되고, 수가 불어난 일행은 아카바의 터키군을 무찌르는 데 성공한다. 이후 계속된 전쟁에서 연승을 올린 로렌스는 아랍부족민에게 신처럼 떠받들어지고, 스스로도 자신은 예언자이며 특별한 사람이라는 자아도취에 빠지게 된다.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F/01083 '로런스: 애프터 아라비아' Lawrence: After Arabia (2021) 아랍 시절 장면도 잠시 나오긴 하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그 이후 시기가 메인인 내용의 저예산 영화 작품으로, 단순 사고였는지 혹은 첩보부에서 입막음 차원에서 제거한건지 의문이 제기됐었던 로런스의 사망 사건을 포함한 'T.E. 로런스'의 인생 말기를 다뤘으며, 이 글을 올린 시점 기준으로 '무비 센트럴'에서 무료 공개 중이고 Plex에선 다중 언어 자막 기능도 지원하는 형태로 공개 중이니 아래 링크 역시 참고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https://watch.plex.tv/watch/movie/lawrence-after-arabia
콩라인박작성일 2025-01-14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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