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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공일기장] 공상) 신이 없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여기서 말하는 신이란,유일신, 절대신을 강조하는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유대교를 포함한 아브라함계열 종교의 신을 말한다. 보통 과학자들에게 신에 대한 질문을하면 현대에 들어와선 과학자들이 내리는 결론은 “신의 존재여부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음으로 과학의 영역이 아니고 과학이 관심 갖어야 할 분야도 아니다.” “니들이 교회에서 뭘하든 상관 안함. 근데 니들이 내 과학수업 중에 들어와서 성경학교 내용을 가르치려한다면 그건 싸우자는거지” 우리는 신이 없다고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아주, 아주 있을법하지 않다라고 성급하지 않은 결론을 내릴수 있다.물론 합당한 결론이다.하지만 과학적으로 신의 존재여부를 증명할 방법은 없더라도 적어도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관의 논리가 엉망인 것으로 얼마든지 신은 존재하지 않음이 증명 가능하다. 이 속칭 아브라함계열 종교는 이러한 공통점이 있다. 1. 이들의 신은 동일한 신이고 모든 것을 알고 능력에 한계가 없는 전지전능한 신이다. 2. 성경, 코란, 타나크 등등 이들의 성서의 내용은 신이 말하고 인간이 손으로 받아적은 문자 그대로 절대적인 진리이다. 그들의 신과 마찬가지이고 신의 본질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는 것은 이단이다. 3. 성서의 내용은 신이 “지금 너희가 알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안 알려줌” 이라던가 “너희는 능지가 처참하여 내가 하는말 어짜피 못 알아들으니 비유와 상징으로 말해주마” 라는 것도 없다. 말 그대로의 진리로만 채워진게 성서이다. 4. 이들 모두 기독교 기준 구약성경을 성서로 공유하고 있다. 5. 이 세상은 언젠가 종말을하고 진정한 신자만이 구원을 얻는다. 6. 진화를 부정한다. 난 진화론이 이해가 되질 않아!그러니 내 아이들이 그걸 이해하는 것으로 부터 보호해야겠어!! 5번은 약간씩 차이점이 있는데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는 천당과 지옥의 존재를 믿고 세상이 종말이되면 신자들은 천당을가고 불신자는 지옥을 간다고 믿고유대교는 죽으면 신자, 불신자, 착한자, 악한자 일단 모두 망자의 세계인 "쉬올"로 들어가 망령으로 떠돌다가 종말과 심판의 시기가 오면 오직 “유대인 신자”만 부활을 한다고 믿는다. 유대인들의 망자의 세상 “쉬올” ..지금도 이 계열 종교 사람들에겐 딱히 바뀐게 없어보인다. 애당초 기독교, 천주교의 신인 야훼와 동급인 그의 아들 예수를 부정하고 심지어 우상으로 여기는 것도 모잘라서 “니들은 백날 믿어봐라 유대인만 구원을 얻을수 있거든?” 같은 애당초 구원의 티켓을 강탈해가는 교리로 이미 예전부터 유럽에선 탄압을 받을 준비가 된 유대교였다. 심지어 유대교에선 3대 악인이 존재하는데종교 전쟁을 일으킨 카톨릭의 교황과개신교 종교 개혁에 자신들을 이용한 루터그리고 우상이 된 유대인 예수가 있다. 유대인들에게 루터는 거의 히틀러 급이다. 지금 현대의 “지리적 배경” 으로 인한 이슬람과의 갈등보다 훨씬 역사가 깊고 더 근원적인 증오는 카톨릭과 개신교를 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특히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가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것은 120% 현대 미국이라는 국가의 영향이다. 기독교 입장에선 교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유대교는 이슬람보다 훨씬 더 악날한 이단이다. 그러니 이건 아무리봐도 미친 그림 ㅋㅋㅋㅋㅋㅋ 유대교는 이 3개의 종교에서 조차 미친놈들이라고 수백년전부터 낙점을 받은 애들이라 이번 주제에선 약간 논외 대상이기도 하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들이 만들어낸 이 속된 말로 "아브라함계 유니버스"는 과학적인 증명도 필요없이 그들이 직접 만들어낸 논리적 모순으로 자신들의 신이 거짓됨이 증명 가능하다. 우리의 “선하고” 전지전능한 신을 믿지 않은 자, 영원의 시간 동안 지옥의 불에 타오르리다. 자, 전지전능은 둘째치고 과연 이들의 신이 “선”한지 따져보자. 이들의 성서에 따르면 지금 인류가 여러가지 언어를 쓰는 이유는 하나의 언어를 써서 평화롭게 단합하여 자신에게 대항을 해서 높은 탑을 쌓기 시작했기 때문?!?!? 이라고 한다. 일명 바벨론탑, 차후 가챠 게임의 재앙 리니지 시리즈에 “오만의 탑”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이를 방해하기 위해 신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게 만들었고 갑자기 말이 안 통하게 하자 서로 단합을 못하고 싸우기 시작했다고 한다.“가만? 나중에 서로 맨날 싸우고 난리쳐서 홍수로 쓸어버리지 않나?” 라는 의문이 든다면 그건 사탄의 속삭임이다. 아무튼 그렇다. 어…음…여기 바벨론탑은 장난으로 보일 높은 건물들이 이렇게 많은데요?;;; 음…;;; 자신을 믿지 않는 자들은 처음엔 마을 그담엔 도시를 몰살 시키더니 결국 인류 전체를 한번 홍수로 몰살 시킨 전력이 있다. 야훼의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맞았다고 알려진 도시 소돔, 고모라 자신을 믿지 않으면 그 사람이 평생 선하고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 삶을 살았어도 “무.조.건”적으로 “영원”의 시간동안 지옥에서 불타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 심지어 예수보다 먼저 태어났거나 지역상 예수나 기독교에 ㄱ자도 들어본적 없는 사람, 또는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종교는 커녕 말 한마디 못하는 나이에 죽은 아이 아니면 현실적으로 기독교로 개종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람 등등 이러한 모든 불가능 조건까지 다 걸어서 자신의 신자가 아니면 이 지옥행 익스프레스 열차에 탑승하게 된다.으아아 탄다요~ 그렇다면 “선한” 신으로서 자신의 외형을 그대로 본따서 만든 인간들이 지옥행 익스프레스 열차에 탑승하는 걸 줄여보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그렇다, 자신의 존재를 들어내면 된다.지금 당장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기적이 행해지면서“내가 기독교의 야훼이자 예수이자 성령이니 앞으도 다 믿어라 이 좃만이들아” 라고 하고 간다면아마도 세계인 99.99%는 기독교인이 되서 더 이상 지옥행 걱정을 안 하고 다들 참된 크리스찬으로 삶을 살며지구상의 앞으로 모든 종교 분쟁을 종식 시킬수 있다.나 진짜란 말야 ㅠㅠ 힝그러나 그런적이 없다. 전지전능하다는 이 신은 인간에겐 영원의 시간 동안 불타는 고통의 여부가 걸린 문제인데 사실상 방관 중인 것이다. 이런 것을 “선”하다고 하나? 우리의 선하고 “전지전능한” 신을 믿지 않은 자, 영원의 시간 동안 지옥의 불에 타오르리다. 전지전능: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 그런데 이런 신의 말로 쓰여졌다는 성서에는 너무나도 많은 결함이 있다.일단 스케일은 작지만 오지게 웃긴거 부터 시작해보자 a. 노아의 방주 세상이 너무 타락해서 지구상의 모든 인간과 동물을 홍수로 휩쓸어 버리겠다고 마음 먹은 우리의 야훼,(왜 여기에 동물이 포함되어야 하는지, 식물은 포함이 안되어 있는지는 전혀 설명이 없다.) 뭐 900살이 넘게 살았다고 알려진 노아는 야훼의 계시를 받고 배를 건조하여 세상의 모든 동물을 한 쌍씩 태워야 하는 임무를 얻게 된다.(위에서 언급했지만 이는 절대 비유와 상징이 아님)그림작가가 하도 성서가 하도 코알라와 캥거루 공격을 당해서 신경을 썼지만백호와 일반 호랑이는 같은 종이라는 점,그리고 백호와 함께 앵무새를 같은 칸에 그린 점은 참으로 안타깝다.판다는 어짜피 짝지기도 잘 안하니 각방 쓰는건가? ㅋㅋㅋㅋ양과 사슴과 함께 방을 쓰는 늑대는 살이 포동포동 찔 예정.. 심지어 그 배의 크기까지 자세히 묘사가 되어 있는데배의 길이는 약 135미터 폭 22.5미터 높이 13.5미터의 초대형 선박이다. 문제는 이때가 청동기 시절쯤이다.철이 존재하지 않는다.참고로 지금의 기술로도 철이 없이 이정도 크기의 선박을 목재로 만드는건 불가능하다. 그니까 이만한 선박을 목재로, 청동기 시절에 만들었다고 주장 중임 ㅋㅋ 전지전능한 야훼의 권능으로 노아는 900살까지 살았고 노아의 방주 역시 기적의 힘으로 어떻게든 그 목재들이 버틸 수 있는 신성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치자.(아래 언급하겠지만 "그렇게 치자”는 불가능하다) 동물들을 모으는 시간은 약 일주일의 시간이 있었고다시 말하지만 이들은 진화를 믿지 않기 때문에 지금 존재하는 모든 동물을 다 노아의 방주에서 살아남은 동물들이다.근대 들어와 인간이 직접 멸종 시킨 동물들은 포함시키지 않아도 최소 10만종 이상의 동물을 태워야 했다.심지어 그 동물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간건 단 하루만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 사자들 번식…행운을 빌어요..북극에 사는 북극곰은 일주일만에 지금의 중앙 아시아 적도 부근까지 왔어야 했고오스트렐리아 지역에 살던 캥거루도 일주일만에 이 지역에 당도했어야 했다.아니 캥거루야 빨리 뛸 수라도 있지 마찬가지 지역의 코알라는?! 그렇다 전지전능한 야훼의 권능으로 선택받은 캥거루 부부가 파우치 안에 코알라 부부 하나씩 대리고 죤내 뛰어왔다 치자.(아래 얘기하겠지만 “그렇다 치자”는 불가능하다) 신의 언어로 쓰여졌다는 이 성서에 캥거루나 코알라나 웜벳이나 북극곰 같은 특이한 동물들의 묘사가 일절 없는 것은 너무 이상하다.사실상 성서에 묘사된 모든 동물은 그 지역 반경 수킬로미터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동물 밖에 없다 코알라는 어쩔거냐고 코알라는?!그래 뭐 성서가 동물 백과 사전은 아니니 전부 다 묘사할 수는 없었다.그 동물들은 방주 안에서 어떻게 버텼는가?코끼리 같은 대형 초식 동물은 하루에도 어마어마한량의 풀을 먹어야 했다.육식 동물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 거기 안에서 다른 동물을 먹는 순간 그 동물은 멸종인데?기독교인들은 노아와 그의 가족은 육식 동물을 위해 다지고 말려 압축된 육포를 준비했다고 한다는데 아주 많은 경우의 포식자들은 살아있는 먹이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 그리고 방주의 인류는 고작 8명. 이 8명에서 이 동물들을 다 어떻게 관리했을까?10만종 이상의 동물을 먹이고 똥오줌을 퍼내고.. 아니 그니까 이 정신이상자들아, 저 배를 어떻게 청동기 기술로 만들었고 8명에서 저 큰배 가득찬 짐승들을 관리했냐고 ㅋㅋㅋ 거기에 성서에는 “동물”만 언급되어 있어 식물은 언급이 없는데 그렇다면 수초(水草)가 아닌 모든 식물은 이때 멸종했어야 됐다.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동물들은 대체 뭘 먹었다는 얘긴가? 그리고 바닷물에 잠겨있던 염분을 머금고 있었던 땅은 물이 빠지고도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년 식물이 자라지 못할 땅이었단 얘기다. 육식 동물은 지금 방주에서 풀려난 동물을 먹었다면 거의 모든 초식 동물이 멸종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 초식동물이 최소한 첫 번식을 한 자손을 잡아먹었단 얘긴데 그 동안은 어떻게 버텼다는 얘기인가? 당장 8살만 되도 생각할 수 있는 의문점“노아는 어떻게 방주안에 맹수들이 다른동물과 노아의 가족을 잡아먹는걸 막을 수 있었죠??” 문제는 성서는 무결점의 신의 언어를 받아적은 책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노아가 청동기 시절에 지금의 기술력으로도 건조 할 수 목재 선박을 건조 할 수 있었던건 야훼의 축복 버프 덕이라면 그런 축복을 내렸다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야훼의 권능으로 오스트렐리아 지역에 사는 캥거루와 코알라가 바다를 건너 중앙 아시아 지역을 올 수 있게 갑자기 날개를 달아주고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축복을 내렸다면 그러한 구절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코알라: 난다요~!(애당초 날개를 달아줄 권능이 있었다면 걍 방주 안 만들어도 되는거이기도 하고 ㅋㅋㅋㅋ) 방주 안의 동물들이 갑자기 공격성이 제거되고 더 이상 배가 고프지도 않는 축복 버프를 야훼가 쐈다면그래야 했다는 구절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신이 내린 축복과 기적은 성서에 기록이 없었다면 없었던 일이다.절대로 “신이 다 축복하셔서 가능하셨지” 라는 말로 도망갈 구석이 없다는 뜻. 지금도 교회에서는 어린 아이들 상대로는 무지성으로 “야훼께서 다 축복하셔서 가능!” 으로 퉁치고 있는 실정이다. b. 지구와 우주의 나이. 노아의 방주에서 이미 언급한거 처럼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행할 능력”이 있는 신의 언어로 쓰여진 성서에는지구의 나이는 5천년, 우주의 나이는 6천년이라고 나와있다.현대인은 다 알다시피 인류의 역사도 6천년이 넘는다.한반도 문명의 역사도 심지어 5천년 가량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비유와 상징”이라고 숨을 여지가 없는 “성서”의 내용이다. "아니 그래도 한 뭐 6만년된다고 하지 왜 하필 6천년인가? 너무 짧은거 아닌가?" 지금이야 억, 조, 경 이런 단위를 자연스럽게쓰지만 성경이 쓰인 시절만해도 100만 단위도 상상을 초월하게 큰 단위였다.근데 하물며 우주의 나이인 "137억" 이란 단위는 아에 상상력 범위 밖의 숫자였고 천 정도 단위 년도 그 당시 저자에겐 정말 긴 세월이었을 것이다. 단군: 한반도 역사=지구나이? 개이득 ㅋㅋㅋㅋ 하물며 성경을 쓴 작자는 굳이 지금의 과학력 필요 없이 당장 조금만 생각해봐도 앞뒤 말이 안 맞는 “노아의 방주” 사건의 저자임을 생각한다면 처참한 지능으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c. 지구가 구(球) 형태가 아니라 원형이라 묘사 지구 평면설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 재공은 바로 성경이다.성경에는 구형태가 아닌 원형이고 허공에 “메달려있다" 라고 묘사가 되어 있는데이를 기반으로 대항해의 시절까지도 지구는 원형 디스크 모양의 원반이었고지구에는 끝이 있으며 그 끝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면 지옥이 있다는 미신의 직접적인 원인 재공을 한다. d. 천동설 (지구 중심설) 우주의 나이는 수백억년 차이로 오류가 났지만 “사소한” 실수라 치자.어째서 온 우주의 창조자는 고작 이 작은 태양계가 움직이는 원리 조차 설명하지 못하였을까? 성경은 지동설이든 천동설이든 어떤쪽도 확실하기 설명하지 못하고 훨씬더 에매하게“하늘에 큰 광명체 띄어 놓고 이건 낮을 주관, 작은 광명체 띄어놓고 이건 밤을 주관하고 반짝이는 별들을 하늘에 박아두셨다”는 식으로 써놨다. 일단 이부분도 엄청나게 틀린점은 “큰 광명체”는 태양을 묘사함에 있어서 오류가 없지만달을 “작은 광명체”로 설명하는건 이미 심각한 과학적 오류이다. 이 작은 광명체는 큰 광명체의 판사판에 불과하고 스스로 광명체가 아니기 때문.성서에서의 묘사 자체에도 큰 오류가 있고 이후 이 성서를 성서로 믿는 종교들이 다 천동설을 믿었고 지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을 “종교 재판”으로 처벌했다는 점에서 아브라함계 종교와 천동설은 땔래야 땔수 없는 관계이며과학적으로 천동설이 틀렸다고 알려지며 개신교는 이를 카톨릭의 문제로 떠넘기려 하지만 결국 창세기는 이 두 종교가 같이 공유하는 성서라는 점에서 현대 개신교의 비겁함만 드러날 뿐이다. e. 외계 생명체의 존재 이는 비단 지적 생명체가 아닌 생명체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신이 창조한 생명체의 요람은 지구뿐이며 지구 외 지역에 생명체를 만들었다는 구절은 단 한 구절도 없다. 다시 말하지만 노아의 방주에 태운 모든 동물의 하나하나의 묘사가 없는 것은 넘어 갈 수 있어도신이 행한 창조와 기적의 역사가 성서에 없다면 그건 없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신이 행하지 않은 기적을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이단이다.야! 숨어! 발견되면 야훼 좃된다고!하지만 우린 이미 화성에 생명체 존재의 “정황적 증거”가 포착되었다.정말 가까운 미래에 물리적이고 확정적인 증거가 포착될 것이다.현재 어떠한 과학자들 두고 물어봐도 “생명체” 자체가 지구에만 있을거 같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과학자는 없다.(지적 생명체가 아닌 그냥 생명체) 100번 100만번 양보해서 노아의 방주는 "작은 이벤트"였다 치더라도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 언어로 쓰여진 성서에서 우주의 나이를 6,000년 vs 13,700,000,000년 오차로 벗어나는건 정말 심각한 오류이지 않을 수 없다. 과학의 발전은 종교, 특히 아브라함계 종교의 입지를 계속해서 줄여나간다.그러니 “창조 과학”같은 참으로 근시안적인 방법으로 입지를 찾아나가고 있다.신은 시간이 갈수록 작아지는 과학적 무지의 주머니다. 종교의 미래는 단 두가지만 남았다고 단언 할 수 있다. 끝까지 자신의 믿음이 진리임을 강조하며 인류 역사에 마지막 한번 더 큰 비극을 남기고 아에 금기의 영역으로 폐기 될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인문학 계열로 남아 인류의 한 역사 페이지로 그 나름의 역할과 공로를 인정 받을 것인가 역사를 알면 미래를 알 수 있다 하였던가,참 불행하게도 전자의 미래로 갈 것이라는걸 어렵지 않게 예상해볼 수 있다. 전통적인 논리:나 야구공이 있어! / 그래? 증명해봐!여기! / 아! 그래 니말이 맞네종교 논리:나 야구공 있어! / 그래? 증명해봐!내가 야구공이 없다는걸 넌 증명할 수 없어?!! / 뭐야 ㅅㅂ;;;; -끄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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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일반] [인류학] 문화의 수수께끼
빗자루와 악마연회 하나는 사람들이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녀가 있다고 믿었던 이유가 무엇인가?또 하나는 이와는 전혀 다른 문제로 16세기와 17세기에 이런 마녀사상이 그토록 널리 일반화된 까닭은 무엇인가? 15세기에서 17세기 사이, 유럽에서 50만명이 마녀 또는 마법사라는 죄목으로 화형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의 죄목은 악마와 계약을 맺은 죄,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 죄, 불법적인 악마연회에 참석한 죄, 악마에게 예배한 죄, 악마의 꽁무니에 입 맞춘 죄, 얼음같이 차디찬 성기를 지닌 남성 악마인 인쿠비(Incubi)와 성교한 죄, 여성 악마인 수쿠비(Succubi)와 성교한 죄 등이다. 악마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공중을 날아다닌 죄, 단 하나만 으로 도 수많은 마녀가 화형 당했다. 마녀에 대한 ‘고백서’는 많지만 자신이 정말 마녀라고 자인한 사례는 실제 역사 속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고백서’와 관련한 불행한 사실은 그 고백서들이 대개는 마녀 피의자들을 고문해 받아썼다는 것이다. 마녀들이 악마와 계약을 맺고 하늘을 날아 악마연회에 참석했다고 고백하기까지 고문은 계속되었다. 또 악마연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할 때까지 고문은 계속되었다. 처음 자백한 것을 번복하려 하면 그 자백을 재확인할 때까지 더욱 악랄한 고문이 가해졌다. 즉 고통을 덜 받고 화형주에서 조용히 죽어갈지 아니면 몇 번이고 고문을 당할지 선택해야 한다. 피의자 대부분은 화형주를 선택했다. 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회개한 마녀들은 그 대가로 장작더미에 불이 붙기 전에 교살당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종교재판 사실 지구상의 어느 사회에서나 어떤 형태로든 마법 개념이 존재한다. 그러나 유럽에 있던 마녀광란처럼 그렇게 격렬하고 오랫동안 지속된 것은 없었다. 어느 사회의 마법처형에서도 유럽에서 만큼 그렇게 많은 희생자를 내지 않았다. 원시사회에서는 누가 마귀에 씌었다고 의심받으면 고문이 죄의 유무를 밝히는 수단의 하나로 사용되기는 했어도, 내가 알기로는 고문으로 조작된 마녀의 입에서 다른 마녀의 이름을 끌어내는 사례는 하나도 없었다. 유럽에서도 다른 사람의 이름을 고백하게 하는 데 고문이 이용된 것은 1180년 이후부터였다. 11세기 이전에는 악마와 함께 있었다는 누명을 쓴 사람이 처형되는 경우가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 마법사니 마녀니 또는 마법을 사용하는 초자연적 능력이 있느니 하며 비난했다. 사실 초기에는 가톨릭교회는 하늘을 나는 마녀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기원후 1000년에는 그렇게 날아다니는 존재가 있다고 믿는 것을 금지했다. 1480년 이부터는 날아다니는 존재가 없다고 믿는 것을 금지했다. 기원후 1000년경 교회는 날아다니는 마녀라는 말은 악마가 조작해낸 환영에 불과하다고 공식 발표했다. 500년 후 교회는 날아다니는 마녀는 환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악마와 손잡은 사람들이라고 공식 표명했다. 13세기에 마녀사냥제도는 성숙되었고 완성단계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당시까지만 해도 마녀사냥제도는 마녀와 투쟁하는 단계는 아니었다. 교회는 초기에는 마녀의 고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고문은 유럽 전역에서 새로 일어나는 로마의 십일조와 성례독점권을 위협하기 시작한 불법적인 교회조직 구성원들에 대해서만 허용되었다. 교회는 이런 체제 전복적인 움직임을 제거하기 위해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다. 이 종교재판소는 이교도를 근절하는 단 한 가지 기능을 하는 준군사적인 특수기관이었다. 이교도들이 비밀단체로 변하자 수사가 여의치 않음을 깨달은 교황의 수사관들은 이교도들에게 자백을 강요하고 연루자들의 이름을 말하도록 고문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했다. 13세기 중엽 교황 알렉산더 4세는 고문권을 인정했다. 악마연회는 이교종파들의 비밀집회와 아주 흡사했다. 다른 이교들에게 한 것처럼 마녀들을 고문하면 그들의 자백으로 광범위하게 비밀 음모집단을 색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로마교황은 굴복했다. 교황 이노센트4세는 1484년 교서를 내려 독일 전역의 마녀들을 근절하기 위해 완전한 종교재판권을 사용하라고 허락했다. 인스티토르와 스프렌거는 그들의 저서 [마녀들의 망치]를 통해 교황을 납득시켰다. 이 책은 그 후 오랫동안 마녀사냥의 지침서가 되었다. 그들은 상상만으로 악마연회에 참석하는 마녀들도 있지만 실제로 많은 마녀가 물리적으로 참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사람이 마녀들의 위해한 일들을 입증해 분명히 감지했다고 주장하는데, 그 마녀들의 모든 마법과 위해한 행동을 환상이라고 주장하고 마녀들을 두둔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사람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불운, 가축과 곡식의 손해, 아이들의 죽음, 질병, 아픔과 고통, 무신앙, 불임, 정신병 등은 마법 때문에 생긴 것이 되었다. [마녀들의 망치]는 마녀 색출방법, 소추방법, 재판방법,고문방법, 유죄판정방법, 선고방법 등을 소상히 설명하며 끝맺고 있다. 이제 마녀사냥제도는 이후 200년 동안 전 유럽을 휩쓸 수 있는 완벽한 제도가 되었다. 카톨릭 마녀사냥꾼 들이나 프로테스탄트 마녀사냥꾼들 모두 사냥제도에 따라 무자비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해마다 투옥되어 화형당한 마녀들의 자리를 충원할 새로운 마녀들을 끊임없이 공급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녀광란 교회가 15세기 전투적 메시아니즘 전통의 대변란들을 진압하기 위해 자원이 밑바닥이 났을 때에 마녀 진압 같은 일에 노력한 까닭은 무엇인가? 체제유지와 이단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항거하는 격렬한 메시아니즘적 저항과 더불어 마법신앙이 점점 널리 퍼져나갔던 사실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직전 교황은 마녀들에 대한 고문을 허용했고 이 마녀광란은 통일된 기독교가 종지부를 찍고 전쟁과 혁명이 계속되는 16세기와 17세기에 절정에 달했다. 유럽 대중은 봉건주의가 붕괴하고 강력한 민족국가들이 출현함으로써 가장 억압받는 시기를 맞게 되었다. 무역과 시장경제, 금융제도의 발달로 토지 소유자와 자본가들은 최대 이윤을 얻기 위해 기업을 키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봉건제 장원의 사유지와 성곽도시의 특징이었던 소규모 부권주의적 관계가 붕괴해야만 성취될 수 있었다. 토지 소유권은 분할 되고 농노와 가신 대신에 지주와 소작인이 생겼다. 영주 대신 상품 작물을 경작하는 기업농이 생겼다. 농민들은 거주지와 주택을 잃었고 수많은 무산농민은 도시를 떠돌아다니며 임금노동자로 전락해 일거리를 찾았다. 11세기부터 인간의 생활은 경쟁적이고 비인격적으로 변하면서 상업화되었다. 즉 전통보다는 이윤에 지배되었다. 빈곤과 소외가 늘어나자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은 교회의 죄와 사치, 부의 집중, 굶주림와 질병, 이슬람제국의 확장, 귀족 간의 끊임없는 전쟁등 으로 이 세계의 종말이 눈앞에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결국 마녀광의 실제적인 의미는 마녀광란을 통해 중세 후기 사회의 위기에 대한 책임을 교회와 국가에서 인간의 형태를 취한 가상의 괴물에게 전가 시켰다는 데 있다. 이 괴물의 환상적인 행위 때문에 고통 받고 소외되고 영세화된 대중은 부패한 성직자들이나 탐욕스러운 귀족들을 저주하는 대신에 미쳐 날뛰는 악마들을 저주하게 되었다. 교회나 국가는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대중과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가 되었다. 성직자와 귀족들은 도처에 흩어져 있지만 간파해내기 힘든 적들에게 인류를 보호해주는 위대한 보호자로 등장했다. 결국 이 때문에 십일조를 바치고 세리들에게 군소리를 말아야할 이유가 생겼다. 소란과 분노, 화염과 연기 속에서 내세보다 현세의 삶을 보존해주기 위한 것들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마녀광란은 저항할 수 있는 모든 잠재 에너지를 분산시켰다. 마녀광란은 가난한 자와 무산자들의 저항운동의 가능성을 박탈하고 이웃끼리 서로 싸우게 하며 모든 사람을 소외 시키고 공포에 몰아넣었으며 불신을 고조 시켰고 무기력하게 했다. 그 결과 지배계급에 의존하게 했으며 단순한 지역적인 문제에 모든 사람이 분노하고 좌절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마녀광란은 가난한 자들에게서 부의 재분배와 사회계급 타파를 요구할 수 있는 능력과 교회 및 사회제도에 대결할 수 있는 능력을 점점 더 박탈했다. 마녀광란은 과격한 전투적 메시아니즘을 거꾸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마녀광란은 사회특권층의 마법적 총탄이었다. 바로 이것이 마녀광란에 감춰진 비밀이었다. 마녀의 복귀 반문화는 원시인들의 삶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삶을 예찬한다. 반문화인들은 염주를 목에 걸고 머리띠를 두르고 문신하고 울긋불긋한 옷을 입는다. 오래전부터 서구 과학기술의 발달과 모순된 것으로 간주되었던 태도와 어른들이 예기치도 않게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은 ‘반문화’라는 생활양식의 전개와 관련이 있다. 반문화라는 생활양식에서는 감정, 자발성, 상상력 등이 선한 것이고 과학, 논리, 객관성 등이 악한 것이다. 반문화라는 생활양식을 주장하는 자들은 ‘객관성’에서의 도피를 역병이 창궐하는 지역에서 빠져나오기나 한 것처럼 자랑스럽게 여긴다. 반문화의 주된 모습은 의식이 역사를 지배한다는 신앙의 형태로 나타난다. 인간이란 자신의 마음속 생각대로 행동하는 존재다. 인간을 더 선하게 만들려면 그의 의식 속에서 더 선한 이념을 불어 넣어주면 된다. 객관적 상황이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전 세계는 ‘의식의 혁명’ 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범죄를 증식 시키고 빈곤을 타파하고 도시 환경을 개선하고 전쟁을 없애고 평화를 누리고 인간과 자연을 조화 시키며 살기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단 한가지는 제3의 의식에 마음을 열어 놓는 것이다.“의식은 구조에 우선한다...... 전 국가연합체는 오직 의식에 의존하고 있다.” 반문화운동의 목표는 의식을 표현하고 과시하고 바꾸고 끌어 올리고 확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식을 객관화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다. 즉 이성이란 쓸모없는 ‘쇠부스러기’처럼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3의 의식에 도달한 사람들은‘사실’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사실을 알 필요가 없다. 사실을 알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출판된 시기가 1975년이라는 것을 어느정도 감안 하셔야 합니다. 히피 문화가 퍼지고 반문화 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현시대도 무시 할수는 없을듯 합니다. 책은 [문화의 수수계끼], [식인문화의 수수께끼],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총 3권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슬람, 유대교 에서는 돼지를, 흰두는 소를, 기독교는 말을 먹지 못하는 이유, 전쟁이 일어나면 인구수가 감소해야 되지만 줄지 않고 폭증하는 이유, 식인 문화와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등 다양한 인류학적 궁금증을 유물론적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오데작성일
2023-02-19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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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일반] 인문학 기초 18 - 러셀 <서양철학사> 정리
1부 고대 철학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의 각각 그리스 철학자들에 대해 다루고,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찾아낸 중요한 주제의 일부가 어떻게 중세 카톨릭 철학에 편입되고, 근현대까지 살아남아 근현대 철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분명하게 보여 준다. 러셀에 따르면 철학은 그리스 문명 속에서 처음 과학과 분리되지 않은 형태로 탄생했고 두 가지 경향이 그리스 문화를 지배했다. 하나는 정념을 중시하고 종교에 몰입하며 신비를 표방하고 내세를 믿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을 중시하고 합리주의를 내세우며 다양한 사실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려는 경향이다. 전자의 경향은 오르페우스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피타고라스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를 거쳐 헤브라이즘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한 축으로 편입된다. 후자에는 헤로도토스와 초기 이오니아 자연철학자들을 비롯해 어느 정도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도 포함된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경험을 중시하고 합리주의를 내세우는 경향은 중세에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다가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 철학에서 되살아난다. 말하자면 그리스 문명은 철학을 처음 탄생시켰고 중세 그리스도교 문명의 출현에도 일조했으며, 중세 말 르네상스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철학의 사상적 원류다. 다만 러셀은 그리스 문명이 근대 철학의 원류라는 해석에 대해, 그리스인의 기여는 수학과 연역 기술을 발명했다는 점에 국한한다. 특히 기하학은 그리스인의 독창적 발명품인데, 기하학이 없었다면 근대 과학은 성립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특정한 사실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하여 귀납적으로 추론하는 과학적 방법은 근대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단서를 붙인다. 근대에 이르러서야 과학적 지식은 사실을 관찰하고 가설을 수립하며, 수립된 가설을 시험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2부 가톨릭 철학 카톨릭 철학이 중세를 어떻게 지배했는지 보여준다. 러셀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구별에 따르면 카톨릭교회는 세 가지 근원에서 유래한다. 성스러운 역사는 유대교에서, 신학은 그리스 사상에서, 지배 방식과 교회법은 최소한 간접적으로라도 로마법에서 생겨난다. 종교 개혁은 로마적 요소를 거부하고 그리스적 요소를 완화했으며 유대교적 요소를 강화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역사적 한계를 뛰어넘어 각각 중세 교부 철학자들과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해 다시 수용되어 독특한 신학 체계로 발전했다. 중세 카톨릭 제도는 세속 국가와 대립하는 일종의 정치권력으로서 힘을 발휘했는데, 중세 카톨릭 제도는 세속 국가와 대립하는 일종의 정치권력으로서 힘을 발휘했는데, 카톨릭 철학은 신학의 기초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정치철학의 기초도 제공했다. 당시 카톨릭 철학은 유럽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을 했으며, 카톨릭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정통 신앙과 이단 사상의 충돌은 카톨릭 제도 개혁의 계기인 동시에 개신교 성장의 계기를 만든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러셀은 초기 교부들이 어떻게 플라톤의 철학을 카톨릭 교리에 맞춰 편입시켰는지 설명한다. 또한 교회가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굳게 믿은 세속 군주와 평신도는 교황권을 강화시켰고, 중세 교회 제도가 안정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어떻게 교회가 공인한 철학 속에 편입되었는지 명퀘하게 풀어낸다. 무엇보다 카톨릭교회가 외경으로 분류한 자료도 광범위 하게 다루며, 공의회 운동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카톨릭 철학으로 공인한 배경이 되었다는 점도 증명했다. 따라서 중세 교회는 순수한 종교 체계가 아니라 일종의 권력 기구로서 당대의 사회, 정치, 문화를 지배했다. 가톨릭 철학은 바로 중세를 지배한 사고방식이자 지배 이념이었다는 말이다. 중세 카톨릭 철학은 일정한 시기 동안 사회 통합에 기여했으나 사회, 정치, 환경이 바뀌면서 영향력이 약해졌다. 그리스 철학이 로마 시대에 적합하지 않아 버려졌듯 카톨릭 철학도 유사한 운명을 맞이했다. 어느 시대든 사회를 통합하는 요소와 해체하는 요소를 둘 다 내포하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은 로마 시대에 더는 효력이 없어져 쇠퇴했고, 로마의 행정 제도를 모방한 중세 카톨릭 제도의 출현과 더불어 카톨릭 철학이 발전했으며, 상업 도시와 속인의 세력이 강해지고 카톨릭교회가 쇠퇴하면서 르네상스 운동과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곧이어 근대 자연과학과 근대 철학이 발전했다. 3부 근현대 철학 근대 철학의 주요 흐름을 명확하게 짚어내고, 현대 철학의 흐름을 미리 보여 준다. 근대 철학은 종교의 권위를 거부하고 과학의 권위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다. 교회의 권위에서 해방되면서 개인 주의가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무정부주의도 등장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은 스콜라 철학을 지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구속으로 느꼈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사회, 정치적 상황은 무정부 상태와 다름이 없었으며, 이를 배경으로 마키아벨리의 정치 학설이 출현했다. 사회는 불안정했으나 예술과 문학 분야에서 천재들의 활동이 왕성한 시대였다. 17세기에 이르러 데카르트를 시작으로 개인주의와 주관주의 경향이 뚜렷한 근대 철학이 등장했다. 이후 근대 철학은 주관주의를 극단까지 밀고 나가거나 주관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근대 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사유가 존재한다는 근본적 확신에 입각하여 외부 세계를 추론했다. 이것은 버클리와 칸트를 지나 피히테로 발전해 나가는 첫 단계일 뿐이며, 피히테에 이르면 모든 존재가 단지 자아에서 유출될 따름이다. 이러한 주관주의 경향은 분명히 불건전해 보이며, 이후 철학은 이러한 극단적 입장에서 벗어나 상식적 일상 세계로 탈출하려는 시도로 점철된다. 철학에서 근대 합리주의와 경혐주의는 중세의 신중심주의에서 탈출하여 인간중심주의의 길을 열었다. 신중심주의는 인간 밖에 실존하는 절대 존재인 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인간에게 계시를 내리고, 인간이 그것을 객관적 기준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믿는 견해다. 반면에 인간중심주의는 모든 것의 기준이 바로 인간 자신의 주체성이라고 주장한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합리주의는 객관주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으나, 결국 인간의 이성이 신의 자리를 대체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베이컨과 로크, 버클리, 훔으로 이어진 경혐주의 철학의 끝은 이성으로도, 경험으로도 현실을 객관적으로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이자 완벽한 주관주의로 귀결되었다. 회의주의를 극복하고 이성으로 객관적 지식이 가능함을 보여 주려고 했던 마지막 근대 철학자가 바로 칸트였다. 그러나 이성에 대한 불신은 19세기 이후 점점 깊어졌다. 물론 프랑스에서 합리주의를 여전히 지지한 프랑스 계몽철학자들과 실증주의자가 있었고, 영국에도 여전히 경험과 이성을 신뢰한 공리주의자들이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루소 같은 계몽철학자는 이성보다 심정에 따른 감정의 언어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독일 철학의 합리주의 경향은 관념론으로 발전했고, 비합리주의 경향은 감수성과 의지의 힘을 예찬한 낭만주의로 발전했다. 18세기에 감성을 앞세운 루소는 낭만주의의 선구자였으며, 의지를 형이상학적 근원으로 보았던 쇼펜하우어와 권력의지로 새로운 세상을 구축하려는 니체는 주의주의(主意主義)를 대표한다. 19세기 말에 낭만주의와 주의주의에 맞서 합리주의를 재건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현대 합리주의자들은 수학과 논리에 근거한 객관적 방법으로 주관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러셀은 이러한 흐름을 명쾌하고 흥미진진하게 서술한다. 러셀에 따르면 19세기를 지나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과학기술은 실용성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마음속에 새로운 사고방식을 심어 놓는다. 기술 발전은 힘에 대한 감각을 일깨웠는데, 인간이 자기 환경의 처분에 맡겨져 있지 않고 오히려 환경을 적극적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형성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영감을 받은 철학이 바로 힘을 강조하는 철학이며, 인간이 아닌 모든 존재를 단지 가공되지 않은 재료로 생각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러셀은 이러한 경향이 일종의 광기요 바보짓이라고 단언하고, 건전한 철학이라면 이에 대한 해독제를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러셀이 제시한 해독제는 합리적 회의주의자의 태도로 직시하고,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사회를 다듬고 재편해 나가자는 것이다. 철학자, 수학자, 사회운동가, 교육자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 버런트 러셀. 생각만하고 글만적는 여타 철학자들과는 달리 사회에 사회에 참여하며, 아인슈타인과 함께 핵무기의 위험을 알리는 ‘러셀 아인슈타인 성명’을 발표하고 군축 평화 문제를 논의, 베트남 전쟁, 캐네디 암살 조사, 인도 중국 국경 분쟁, 쿠바 미사일 위기 등 당대 많은 현안에도 적극적을 참여했다.
로오데작성일
2022-11-13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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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일반] 인문학 기초 17 - 러셀 서양철학사 (서론)
철학이란? ‘철학’은 넓든 좁든 여러 방식으로 써온 말이다. 철학은 신학과 과학의 중간에 위치한다. 철학은 신학과 마찬가지로 명확한 지식으로 규정하거나 확정하기 힘든 문제와 씨름하는 사변적 측면을 포함한다. 그러나 철학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전통을 따르든 계시를 따르든 권위보다 인간의 이성에 호소한다. 명확한 지식은 무엇이든 과학에 속하는 반면, 명확한 지식을 초월한 교리는 모두 신학에 속한다. 신학과 과학 사이에 자리 잡고 양측의 공격에 노출된 채,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 이 무인지다(No Man’s Land)가 바로 철학의 세계다. 사변적 정신의 소유자가 대체로 흥미를 느낄 만한 문제에 대해 과학은 거의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며, 신학자의 확신에 찬 대답도 이전 세기와 달리 확신을 주지 못하는 듯하다. 세계는 정신과 물질로 나뉘는가? 만일 그렇다면 정신은 무엇이고 물질은 무엇인가? 정신은 물질에 의존하는가, 아니면 독립된 힘을 가지는가? 우주는 통일성 혹은 목적을 가지는가? 우주는 어떤 목표를 향해 서서히 진화하는가? 자연 법칙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오직 질서에 대한 선천적 사랑 때문에 자연 법칙을 믿게 되는가? 인간이란 천문학자의 눈에 보이듯 작고 전혀 중요하지 않은 행성 위로 무력하게 기어 다니는, 불순물이 섞인 탄소와 물로 구성된 조그마한 덩어리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으면 [햄릿]에 등장하는 고뇌에 찬 존재인가? 혹시 인간은 두가지 면을 다 지닌 존재인가? 고귀한 삶의 방식과 비천한 삶의 방식이 따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모든 삶의 방식이 다 헛된 것에 불과한가? 만일 고귀한 삶의 방식이 있다면 무엇이 그러한 삶을 이루며, 우리는 어떻게 고귀한 삶을 성취하는가? 선은 진가를 드러내려면 영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우주가 엄연히 종말을 향해 가도 선이란 추구할 만한 것인가? 지혜란 존재하는가, 아니면 지혜란 최고로 세련되게 포장된 어리석음에 불과한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실험실을 뒤져 봐야 소용없는 노릇이다. 신학 분야에서는 이러한 모든 질문에 명확한 답변을 주겠다고 공언했으나, 바로 명확성이야 말로 근대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이 의혹을 품게 된 원인이었다. 정답이 없더라도, 앞서 열거한 질문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철학의 일이다. 한 시대와 한 민족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각각에 속한 철학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철학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어느 정도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인간과 환경의 상호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철학을 거의 결정하며, 거꾸로 사람들이 형성한 철학이 환경을 거의 결정한다. 수 세기이 걸친 철학과 환경의 상호작용이 앞으로 우리가 다룰 주제다. 과학은 우리가 무엇을 아는지 말해 주지만, 우리는 아주 조금만 알 따름이다. 또 만일 우리가 얼마나 많이 모르는지 망각한다면, 엄청나게 중요한 많은 일에 무감각해지고 만다. 다른 한편 신학은 사실상 무지의 영역까지도 안다는 독단적 믿음을 이끌어 냄으로써, 우주를 향한 일종의 주제넘고 오만한 태도를 양산한다. 생생한 희망과 공포 앞에서 맞닥뜨린 불확실성은 고통스럽지만, 위안을 주는 동화에 의지해 살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그러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철학이 제기하는 질문을 망각해서도 안 되고, 철학적 질문에 대해 의심할 수 없는 답변을 찾았다고 자신을 설득해서도 안 된다. 확실한 진리는 없다고 주저하며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지 않고 의연히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철학이 지금도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철학의 변화 신학과 구별되는 철학은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제 1기 철학은 고대에 철학의 길로 들어선 후 그리스도교가 발전하고 로마가 몰락했을 때 신학의 영향으로 수면 아래 가라앉았다. 11세기부터 14세기에 걸친 제 2기 철학의 위대한 시기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비롯한 몇몇 위대한 반항아를 제외하면 카톨릭교화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는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 절정에 이른 혼란 속에서 파국을 맞았다. 17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제3기 철학은 선대 철학자들이 활동한 이전 어느 시기보다 과학의 지배를 많이 받는 형국이다. 전통으로 자리 잡은 종교적 믿음은 계속 중요한 가치로 수용되지만, 정당화가 필요하다고 느껴지거나 과학이 정당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면 교정되거나 수정되어 왔다. 근현대 철학자 가운데 카톨릭교회의 관점에서 정통 신앙을 대변한 철학자는 거의 없으며, 철학자들의 세속화 경향에 큰 영향을 미치고 중요한 역할을 한 쪽은 교회보다 세속 국가였다. 철학의 역사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는 시기까지 그리스 사상은 도시국가에 대한 거의 종교에 가까운 애국적 헌신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리스 사상의 특징인 윤리 체계는 시민들의 생활에 알맞았으며, 대부분 정치 활동과 관계가 있었다. 그러다 더 개인적이고 덜 사회적인 윤리 경향이 출현했다.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유덕한 삶을 시민과 도시국가의 관계가 아니라 영혼과 신의 관계로 생각했다. 이로써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삶을 위한 길을 미리 준비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스토아학파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정치적 성향이 없었기 때문에 초창기 3세기 동안 정치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긴 시기 동안 자유 시대로부터 전해진 그리스 사상은 점차 변형되었다. 옛 시대의 사상 가운데 몇몇은, 특히 종교적 색채를 띤 사상은 상대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획득했다. 합리적인 사상은 시대정신에 더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이 과정에서 로마 후기에 등장한 이교도는 그리스의 전통을 그리스도교 교리 속에 편입하려고 적정 수준까지 다듬고 수정해 나갔다. 5세기 말부터 11세기 중엽에 이르는 암흑기 동안, 서로마 세계는 꽤 흥미로운 변화를 겪었다. 그리스도교 때문에 발생한 신에 대한 의무와 국가에 대한 의무의 갈등은 교회와 왕이 벌이는 갈등 형태로 변모했다. 서유럽 전역에서 성직자 계급은 로마의 지시를 받는 단일 조직을 형성했다. 교회는 과거의 전통을 계승한 곳이자 당대의 가장 뛰어난 문명을 대표하는 조직이 되었다. 반대로 세속 권력은 튜턴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과 귀족이 장악했지만, 모든 군대가 왕들 편에 섰는데도 교회는 마침내 승리했다. 교회가 승리한 이유는, 일부는 교회 성직자들이 교육을 거의 독점했기 때문이고, 일부는 왕들이 끊임없이 서로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된 이유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지배자와 민중이 다 같이 교회가 바로 천국의 문을 여는 힘을 가졌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왕이 영원한 시간을 천국에서 보내야 할지, 지옥에서 보내야 할지를 결정하기도 했다.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할 의무를 면제해 주는 동시에 반기를 들도록 선동하기도 했다. 게다가 교회는 무정부 상태의 혼란 속에서 질서를 상징하는 대표 조직이었으므로, 떠오르는 신흥 상인 계급의 지지를 얻어 승리를 거두었다. 중세의 공인된 철학은 시대를 비추는 정확한 거울이 아니라 한쪽의 생각만을 비추었을 뿐이다.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카톨릭교회의 철학을 해설되어지고, 50년 후 단테는 두 극단의 문화를 종합하여 완벽한 의미에서 중세 사상계를 포괄하는 유일하게 균형 잡힌 해설을 내놓았다. 단테 이후 정치적 이유와 지적인 이유 때문에 중세 철학은 더는 종합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의 대분열과 공의회 운동, 르네상스기의 교황 제도는 종교개혁 운동을 초래했고, 이는 전 그리스도교의 통일과 교황 중심의 스콜라식 통치 이론을 훼손했다. 르네상스가 예술은 여전히 질서와 규칙을 추구했지만, 사상은 오히려 무질서와 혼란을 추구함으로써 상대적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16세기 이후 유럽 사상사는 종교개혁이 좌우한다. 종교는 유럽 세계를 복종시킨 힘이었지만, 정작 이탈리아에서는(교황) 종교가 붕괴되었다. 군주들은 영토 내 교회가 민족적 색채를 띠게 되면 교회를 지배하기 쉬워져, 교황과 지배권을 나눠 가질 때보다 자기 영토 내에서 힘이 훨씬 강력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러한 이유로 루터의 혁신적 신학 사상은 북유럽의 광대한 지역에 걸쳐 지배자와 민중에게 두루 환영을 받았다. 카톨릭교회는 세 가지 근원에서 유래한다. 성스러운 역사는 유대교에서, 신학은 그리스 사상에서, 지배 방식과 교회법은 최소한 간접적으로라도 로마 법제에서 유래한다. 종교개혁은 로마적 요소를 거부하고 그리스적 요소를 완화했으며 유대교적 요소를 강화했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처음에 로마제국이, 다음으로 로마 교회가 만들어 낸 사회 결속을 원상태로 돌려버린 민족국가 세력과 협력했다. 카톨릭 교리에 따르면 신의 계시는 성서에서 끝나지 않고 교회를 매개로 대대손손 이어지며, 교회의 가르침에 복종할 의무를 개인에게 부여했다. 반대로 개신교도는 교회가 계시의 매개자라는 설을 거부했다. 진리는 오로지 성서 속에서 찾아야 하며, 저마다 단독으로 성서를 해석해도 되었다. 사람들이 성서를 해석할 때 서로 차이가 나더라도 이러한 논쟁을 해결하도록 지명된 신성한 권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실생활에 서는 국가가 이전에 교회에 속했던 권리를 주장했지만, 이것은 권리의 침해이자 남용에 불과했다. 개신교 이론에서 영혼과 신 사이에 어떤 매개자도 존재해서는 안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심상치 않은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다. 진리는 더는 권위자에게 묻지 않고 내면을 성찰함으로써 확인했다. 더불어 정치계에서는 무정부주의로, 종교계에서는 신비주의로 빠르게 발전하는 경향이 생겨났지만, 이러한 경향은 언제나 카톨릭교회의 정통 체계 속에 편입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또한 개신교는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여러 종파로 갈라졌다. 사상 면에서도 주관주의가 계속 심화되어, 주관주의는 초창기 다방면으로 정신적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자유를 부여했지만, 결국 건전한 사회생활에 적대적이고 해로웠으며 개인을 사회에서 분리하는 데까지 거침없이 나아갔다. 근대 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는 그 자신과 그의 사유가 실존한다는 근본적 확신에 입각하여 외부 세계를 추론했다. 이것은 버클리와 칸트를 지나 피히테로 발전해 나가는 첫 단계일 뿐이며, 피히테에 이르면 모든 것이 단지 자아에서 유출될 따름이다. 이러한 경향은 분명히 불건전해 보이며, 이후 철학은 이러한 극단적 입장에서 벗어나 상식적 일상 세계로 탈출하려는 시도로 점철된다. 현대에 이르러 제정신을 잃어버린 극단적 형태의 주관주의에 반대하는 다양한 반동이 일어났다. 첫째, 중도적 타협 철학인 자유주의 학설은 정부와 개인에게 각각 영역을 정해 주려 했다. 현대적 형태의 자유주의는 로크와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로크는 절대적 권위와 전통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배격했을 뿐만 아니라 ‘광신’, 다시 말해 재침례교의 개인주의도 거부한 인물이다. 더욱 철저한 저항은 국가 숭배 학설을 탄생시켜 카톨릭교가 교회에, 혹은 때에 따라 신에게 부여한 지위를 국가에 돌렸다. 홉스와 루소, 헤겔은 국가 숭배 이론의 상이한 국면을 각각 보여 주며, 그들의 학설은 실제로 크롬웰과 나폴레온, 현대 독일의 상황 속에 구현되었다. 공산주의는 이론상 국가 숭배 이론과 거리가 멀지만, 실제로는 국가 숭배에서 비롯된 유사한 공동 사회로 빠져버린다. 자율과 규율 기원전 600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발전을 거듭하면서 철학자들은 사회 결속을 강화하려는 자와 풀려는 자로 나뉘었다. 규율주의자는 구식이든 신식이든 상관없이 특정한 교의 체계를 지지하고 따라서 정도가 크든 작든 과학에 적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규율주의자들이 받아들인 교의가 어쨌든 경험적으로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의 변함없이 행복은 선이 아니며 ‘고결함’과 ‘영웅적 행동’을 선호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인간 본성의 비합리적 측면에 공감하면서 이성이 오히려 사회 결속을 해친다고도 생각했다. 다른 한편 자유주의자들은 극단적 무정부주의자를 제외하면 과학과 공리주의, 합리주의로 기울었으며, 격렬한 정념에 냉담하고 심오한 종교라면 전부 반대했다. 이러한 갈등은 우리가 인정한 철학이 출현하기 전 그리스에서 생겨났으며, 그리스의 초기 사상 속에 벌써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규율주의와 자유주의의 갈등은 모습을 달리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졌고, 수세대에 걸쳐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내용이 방대하여 1편으로는 부족할듯 싶습니다. 인문학 기초에 차근 차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책이 훌륭한 작품인것도 있겠지만 번역 또한 만족 스럽습니다. 저도 아직 정독중에 있는 책이여서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제가 읽어본 철학 관련 서적중 가독성이 좋은 책입니다. 이전에 올린 철학 관련 인물들만 대충 보시고 이 책을 보셔도 어려움은 없을듯 합니다.
로오데작성일
2022-08-22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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