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검색 결과(3,274);
-
-
-
-

[엽기유머] 의외로 자식이 7명이나 되는 다르빗슈.jpg
다르빗슈 유 외모와 실력. 그리고 친한파와 팬에 대하는 매너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선수. 다만 의외로 사생활은 한국에선 그닥 유명하지 않다. 우선 대단한 게 아직 30대 후반의 나이에 무려 자식숫자가 7명 (…) 이라는 것. 정확히 말하면 의붓 자식 1명, 친자식 6명이다. (6남 1녀) 우선 2007년. 당시 만 21세의 다르빗슈는 빠르게 동갑인 여배우랑 결혼. 아들만 2명을 낳는다. 하지만 성격차이로 3년 반만에 이혼. 아내가 의부증이란 소문이 있을 정도로, 주변 평판이 좋지 못했다고 한다. 위자료는 없이, 양육비만 아이들이 어른이 될때까지 (2030년) 매월 200만엔씩 지급 (아들 2명은 전처가 키움.) 그리고 이혼 후. 외모답게 AV배우, 모델, 골프 선수, 아나운서, 유명 레슬러의 전 아내 등등 수많은 염문설을 쌓던 다르빗슈는 만 28세가 되던 해. 재혼을 발표하는데… 무려 상대가 6살 연상의 전 국가대표 레슬러였다. 그것도 1번 이혼해 자식도 있는 돌싱녀이자, 이전 염문설이 터진 ‘유명 레슬러의 전 아내’. 그 레슬러의 여동생이었다(…) 즉, 그 레슬러는 자신의 전 아내가 다르빗슈랑 염문이 퍼졌고 이젠 여동생이 결혼한다고 하는 것. 사람들이 ‘다르빗슈의 여자 취향은 도저히 모르겠다’고 말한 것은 덤이었다. 당시까진 사생활이 좋다고는 절대로 못하는 다르빗슈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오래 못 갈거라고 했지만… 다르빗슈는 완전히 현 아내에게 정착. 불화설 하나 없이 그 후로 자식만 4명을 더 낳고 (아들 3명 딸 1명) 현 아내의 아들도 의붓자식으로 삼아 무려 7남매. 6남 1녀의 아버지가 되어 사생활 잡음 하나 없이 성실하게 지내고 있다. 다만 아내가 이제 40대 중반이라, 아마 애는 더 늘어나지 않을 것 같다고… + 현 아내의 오빠. 그러니까 유명 레슬러였던 처남은, 6년 전. 41세의 나이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연히 처음엔 다르빗슈를 반대하던 처남이었지만 (자기 전 아내랑 연애하던게 이젠 여동생?) 다르빗슈가 마음으로 다가간 결과 둘은 굉장히 사이가 좋아졌다고 한다. 암으로 몸이 반쪽이 되고 거의 사망하기 직전. 처남을 위해 의료용 전세기도 빌리고, 레슬러 대회도 사비로 다 열어줘서 죽기전에 진심으로 감동했다고. 그리고포스트시즌에서 호투한 다르빗슈는 전성기 시절의 처남이 프린팅 된 셔츠를 입고 기자회견을 했다. 가족은 영원히 잊지 않는다면서.
-
-
-
-

[자동차·바이크] 현존하는 세계 자동차 브랜드들의 첫 자동차 모음 1886-1920
메르세데스-벤츠 벤츠 파텐 모터바겐 너머 아인츠 (특허 자동차 1호)1886년 독일의 발명가 카를 벤츠가 개발한 세계 최초의 내연기관차. 특허 1호차라고도 불림. 카를 벤츠는 1886년 7월 3일 첫 시운전을 했으며 이후 1886년 11월 2일 독일제국 특허 36435호로 등록, 세계 최초의 내연기관차 타이틀을 가져가게 됨. 0.954 리터의 4행정 단기통 엔진으로 400 rpm에서 0.75 마력을 발휘했고 프레임은 강철을 용접해서 만들어짐. 휠은 아들러 자전거 공장에서 구매해 사용했고 자전거를 연상시키는것 만큼 엔진에서 바퀴까지 동력도 체인을 통해 전달 됨. 사진은 레플리카가 아닌 단 1대 존재하는 실차. (이외 차량은 전부 벤츠에서 2000년대에 제작한 레플리카라고 생각하면 됨) 이후 자녀 이름인 Mercedes를 붙혀 Mercedes-Benz. 푸조 푸조 Type 1 1886년 푸조는 증기자동차를 1886년에 제작하면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음. 푸조 가문은 원래 1810년 철강업을 시작한게 시초인데 자동차는 사실 아르망 푸조가 아닌 레옹 세폴레라는 증기기관 발명가에 의해서 개발, 이후 파리시에서 주행 허가를 받고 16 km/h의 속력으로 달림. 아르망 푸조는 이에 감명 받아 레옹 세폴레와 손잡고 푸조자동차를 창립, 그러나 물을 보일러로 끓여 증기를 생산해 1기통 엔진를 구동하는건 너무 시간이 오래걸렸고 나중에 메르세데스-벤츠가 되는 다임러사의 내연기관차를 보고 증기기관 방식을 포기, 다임러사와 제휴를 해서 내연기관을 받아옴. 푸조는 몇번 망할뻔 하다가 시트로엥과 합병 이후 PSA 그룹을 창립, 지금은 스텔란티스의 일부임. 르노 르노 브와뛰레뜨 Type A 1898년 드 디옹사가 개발한 273 cc 1.75 마력의 단기통 엔진에 독일 컨티넨탈사의 타이어를 탑재한 이 자동차는 르노사 최초의 자동차임. 1898년에서 1903년까지 생산된 이 차량은 르노사의 창립자 루이 르노가 설계를 당담, 르노의 부모의 친구에게 처음 판매 됨. 초반부터 32 km/h의 고성능으로 어필을 해 자동차가 생소하던 시절 출시 첫날에 무려 12대나 팔았고 이후 엔진 배기량을 늘리고 실런더를 추가해 2기통 엔진으로 적지 않은 판매량을 달성함. 이후 르노자동차는 소형 히트작 르노 5이나 F1에서 터보 첫 엔진을 선보이는등 활약하다 1999년에 닛산과 얼라이언스 그리고 삼성자동차의 지분을 인수해 닛산으로 르노가 철수한 북미시장을 재진출했고 이후 닛산이 미쓰비시자동차를 인수해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를 설립함. 2차 대전 나치와 협력한 탓에 프랑스 정부에서 지분을 소유하게 되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반 공기업 수준의 자동차 회사임. 피아트 피아트3 ½ HP 1899년 참고로 FIAT는 약자로 Fabbrica Italiana Automobili Torino, 토리노 이탈리아 자동차 제조) 아담 오펠 오펠파텐 모터바겐 시스팀 루츠만 1899년 현재 PSA와 스텔란티스의 일부. 한때 GM의 소유라 GM과 많이 콜라보를 했고 대우자동차도 오펠 차량을 기반으로 생산함. 스카니아 스카니아 A1 1901년 스웨덴의 트럭 버스 제조사인 스카니아가 Vabis와 합병전에 생산했던 승용차. 이후 스카니아는 화물차와 버스만 제조하는 회사로 바뀜. 현재 폭스바겐 그룹의 산하임. 캐딜락 캐딜락런어바웃 모델 A 1902년 첫 캐딜락은 1902년 4분기에 출시된 2인승 런어바웃 모델. 브러쉬사에서 개발한 1609 cc 10 마력 1기통 엔진에 리랜드사에서 조립을 한 모델임. 사진은 1903년 토뉴 모델. 원래 캐딜락은 헨리 포드 모터컴퍼니이었지만 포드가 경영진과 싸우고 나간후 핸리 리랜드가 지분을 인수, 원래 주주들은 설비를 매각할 생각이었으나 리랜드가 자동차 생산을 설득해 첫 자동차를 탄생시킴. 사명은 디트로이트를 최초로 발견한 프랑스 탐험가 앙투안 드라 모스 카디약을 영어로 읽은 캐딜락. 이후 GM의 고급 브랜드가 되었고 50년대 GM을 빛낸 디자이너 할리 얼이나 빌 미첼의 손에 의해 우주시대를 테마로 한 엄청나게 화려한 디자인으로 유명했고 대한민국 대통령도 캐딜락을 80년대까지 애용함.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독일이나 영국 고급차에 밀리게 되었고 경영진의 판단미스와 오일쇼크로 하락새를 타다가 다시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 뛰어난 디자이너와 설계를 바탕으로 재건중임. 포드 모터 컴퍼니 포드모델 A 1903년 포드가 첫 자동차 회사 실패 이후 설립한 포드 모터 컴퍼니의 첫 자동차. 핸리 포드는 이전에 Henry Ford Motor Company라는 회사를 설립했으나 실패했고 다시 Ford Motor Company를 설립했는데 크게 성공하게 됨. 모델 A는 이전의 핸리 포드사에서 설계된것과 엔진과 일부 부품을 제외하면 완전 똑같은 수준이라 위에 캐딜락과 매우 유사함. 2기통 1668 cc 엔진으로 8 마력을 발휘, 엔진은 앞좌석 밑에 위치한 미드쉽 방식이며 슬라이딩 기어가 아닌 유성기어를 사용한 2단 수동변속기임. 의외인게 고종 황제가 구매해 탔던 첫 어차가 포드 모델 A으로 추정된다고 함. 이 차량에 들어간 기술을 바탕으로 포드는 세계 최초의 대량양산차 모델 T를 개발함. 뷰익 뷰익모델 B 1904년 캐딜락 보다 한급 낮은 GM의 브랜드. 뷰익 모델 B는 세계 최초의 OHV 엔진 차량인데 당시 차량들은 모두 L 헤드라고 캠축이 위에 위치한 푸시로드를 밀어 밸브를 개하던 심플한 방식이었음. 그러나 OHV 기구는 밸브가 헤드 상단에 위치하기 때문에 연소실을 축소화해 열효율을 올려 출력과 연비, 냉각성능이 뛰어남. 그래서 고작 2기통 엔진이지만 당시 경쟁차종에 비해 2배 높은 출력인 21마력을 발휘. 뷰익은 할리 얼 시절 세계 최초의 컨셉카를 출시하는등 한때 자동차 디자인을 선두했지만 지금은 본국보다 중국에서의 판매량이 대부분인 중국 전략 브랜드로 바뀜. 롤스로이스 롤스로이스10HP 1905년 Charles Rolls와 Henry Royce가 회사명을 Rolls-Royce로 합의한후 생산한 첫 차. 1800 cc 2기통 엔진으로 1000 rpm에서 12 마력과 최고 시속 63 km의 차량. 샤시나 브레이크는 당대 흔한 방식인 트랜스미션 밴드 브레이크나 마차형 설계를 유지함. 롤스로이스는 당시에는 차체를 제작하지 않아서 차체 제조사를 소비자가 따로 선택해야 했던지라 같은 모델이라도 차체 제조사마다 형상이 조금 달라짐. 현재 4대가 생존중이라고 하며 가장 최근 낙찰가는 세전 55억이었다고.. 지금은 독일 BMW의 고급차 산하 브랜드임. 부가티 부가티Type 10 1908년 독일 퀼른에 위치한 부가티의 창고에서 단 한대만 제작된 프로토타입. 당시로선 엄청나게 혁신적인 OHV 밸브기구를 탑재한 1200 cc 4기통 엔진으로 12 마력을 발휘, 4단 변속기를 탑재해 420 kg의 차량을 시속 88 km에 도달하게 했음. 다른 회사들이 전부 목재로 차체를 만드는 상황에서 무려 알루미늄 차체를 사용했고 이후 부가티는 모터스포츠에 참여할 차량을 고향인 프랑스에서 생산하게 됨. 부가티는 자동차보다는 바퀴 달린 예술품을 목표로 제작한 최고급 자동차를 지향했는데 그래서 고객들과 트러블도 많았던 모양. 그러나 그 덕분인지 세계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높은 가치를 가진 차량으로 전 세계에 명성을 떨침. 그러나 에토레 부가티 사망 이후 50년대까지 가다가 경영 악화로 부도, 부가티라는 명성에 이끌려 이탈리아에서 부가티 이름을 부활시켜 EB110라는 하이퍼카를 생산했지만 실패한 이후 VW 그룹 밑으로 들어가서 출시한 W16 엔진의 부가티 베이론으로 상업적으로 성공, 재기 이후 리막그룹의 산하에 들어감. 란치아 란치아알파 12 HP 1908년 현재 FCA 스텔란티스의 일부임. 과거에는 상용차에서부터 경주용차까지 다양했지만 지금은 승용차만 생산중. 모건 모건런아바웃 1909년 영국 클래식카 제작사 모건의 첫 자동차. 모건은 아직도 나무 차체를 사용하는 클래식 자동차를 생산중임. 알파로메오 알파로메오24 HP 1910년 첫 자체개발 알파 승용차, ALFA는 Anonima Lombarda Fabbrica Automobili, 무명 롬바르디아 (밀라노) 자동차 제조의 약자에 투자자 로메오의 이름이 들어간 A.L.F.A 로메오. 쉐보레 쉐보레시리즈 C 클래식 식스 1911년 1911년 등장한 클래식 식스는 4,900 cc라는 거대한 배기량과 T형 헤드의 직렬 6기통 엔진을 탑재, 40마력을 발휘했음. 당시 기준으로는 포드 모델 T와 같은 대중 브랜드가 아닌 고급차이었고 무게도 그 당시 기준으로 무거운 1.7톤에 시속 104 km/h의 고성능 차량이었음. 쉐보레는 원래 GM 경영진 자리에서 �i겨난 윌리엄 듀란트가 스위스 이민자인 루이 쉐볼레이와 공동 창업한 회사인데 이를 통해 듀란트는 나중에 GM의 경영진으로 복귀함. 이후 알프레드 슬로안에 의해 GM의 대중 브랜드로 자리잡게 됨. 미국에서는 쉐볼레이라고 발음함. GMC GMC모델 H/K 1912년 2기통 2행정 혹은 4기통의 수냉식 엔진을 탑재한 2.5톤에서 5톤 트럭. 변속기는 뒤에 위치하지만 체인도 사용하는 독특한 방식임. 원래 릴라이언스 모터 컴퍼니를 윌리엄 듀란트가 인수하고 GMC로 개명함. 이 모델은 가솔린과 전기 모델이 있었지만 배터리 기술이 열악하던 시절이라 전기 모델은 전부 폐기되었고 가솔린 모델들만 남게 됨. 원래 GMC는 트럭 브랜드이었지만 지금은 GM의 고급 SUV와 픽업트럭 브랜드. 닷지 다지30-35 투어링 1914년 원래 포드에 엔진과 샤시를 공급하던 다지 형제가 자동차 기업을 설립하고 처음 생산한 자동차. 3475 cc 직렬 4기통 수냉식 엔진을 탑재해 최대출력 35마력, 정격출력 30마력을 발휘, 3단 변속기와 조합되어 경쟁사의 포드 모델 T보다 스팩적으로 우수했음. 6볼트 전장을 쓰던 당시로는 엄청나게 혁신적인 12볼트 전기 시스템, 전기 시동모터 제너레이터를 사용했고 속도계와 포드 모델 T는 목조 차체를 사용할때 강철 차체를 사용하는등 포드를 저격해 만들었던 탓에 포드와 사이가 틀어지고 1919년 포드와 소송전 끝에 포드자동차의 주식을 전부 매각하게 됨. 국내에도 일제시대때 택시나 승합차로 많이 들어왔던 차량. 현재 스텔란티스의 일부이지만 이 차량을 생산했던 공장 부지는 아이러니하게도 허머나 실버라도 EV를 생산하는 GM의 전기차 생산공장임. MAN MAN자우어 1915년 MAN은 세계 최초로 디젤 엔진을 선보인 기업임. 원래 U보트와 같은 해양디젤 엔진을 생산했지만 당시 트럭을 생산하던 스위스의 자우어(현재 총기제조 업체로 유명한 SIG 사우어의 전신)와 협력해 디젤 트럭을 생산함. 사진은 1924년에 직분사 디젤엔진으로 개량된 체인구동 트럭. 40마력 4기통 엔진에 직접분사 방식을 적용한 디젤 엔진으로 세계 최초임. 지금은 VW 그룹이 지분을 인수해서 VW 그룹의 트럭, 버스, 그리고 가스터빈 전문 제조사로 활약하고 있음. 대한민국 시장에도 화물차에서 버스, 선박 엔진까지 다양한 산업 분야에 진출해 있음. 시트로엥 시트로엥 Type A 10 cv 1919년 프랑스 자동차 제조사 시트로엥의 1.3리터 4기통 엔진의 10마력 자동차. 공차중량 810 kg에 최고시속 75 km/h의 당시 기준으로 준수한 성능을 가진 자동차이었음. 시트로엥은 앙드레 시트로엥이 1913년 설립한 업체인데 원래 톱니바퀴를 생산하다가 1차 대전때는 탄약을 생산하다 종전후 1919년 자동차 생산을 시작함. 당시 압도적인 점유율을 가진 포드 모델 T의 유일한 프랑스 경쟁자로 1차 대전 이후 시대상을 반영함. 국내에서는 생소하지만 유럽에서는 여전히 큰 인기가 있는 브랜드임. 최초로 전륜구동 자동차 트락숑 아방이나 SM의 시대를 앞선 기술등으로 한때 유명했던 회사이지만 과거에 비해 쇄락한 브랜드. 현재 PSA 그룹과 스텔란티스 산하. 링컨 링컨 모델 L 1920년 링컨은 포드 모터 컴퍼니의 고급 브랜드이지만 한때는 독립된 자동차 업체이었음. 디트로이트에서 창립한 링컨은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성씨를 따와 헨리 M. 리랜드가 창업한 기업임. 리랜드는 원래 캐딜락을 창업했는데 GM에 1909년 매각하면서 GM의 경영진으로 등극했으나 1917년 윌리엄 듀란트와 불화로 회사를 나갔고 링컨자동차를 창립함. 링컨이라는 이름을 쓴 이유는 본인이 처음 투표한 대통령이 링컨이라서.. 당시 최고급차이던 메르세데스-벤츠, 롤스로이스, 패커드와 경쟁하기 위한 고급 모델이었고 1920년대에 V8 5.9 리터 엔진에 3단 수동변속기를 조합함. 그러나 모자 제조업을 하던 사람을 고용해 디자인한 탓에 구식 디자인이라고 혹평 받았고 전후 경재가 악화되면서 헨리 포드의 포드자동차에 매각하게 됨. 출처 - 개냥이산책시킴
-

[엽기유머] ‘54억 래커 피해’가 뭐길래…갈등 부추기는 동덕여대 보도.jpg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한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이 화제입니다. ‘동덕여대 공학 전환’ 관련 보도 흐름을 보며, 저는 언론계 종사자로서 해당 시국선언의 문장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역시 부끄러움을 원동력으로 이번 칼럼을 쓰게 됐다는 점을 먼저 밝힙니다. 무엇이 부끄럽냐고요? 언론 기사 제목을 몇 개만 추렸습니다. 비슷한 제목이 많습니다. ‘동덕여대 “시위로 54억 피해” vs 총학 “돈으로 학생 겁박”’처럼 학교 쪽과 학생 쪽 의견을 나란히 쓴 제목이 그나마 양호한 편입니다. 54억 원이 ‘큰돈’이라서일까요. 그런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면 발 빠르게 사 쪽의 피해액을 계산하고 시위의 ‘과격함’을 부각하는 언론의 ‘습관성’ 보도 프레임이 연상됩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나서야 했는지, 문제의 본질은 무엇이어서 갈등을 해결하려면 어떤 게 필요한지에 대한 보도는 이러한 보도 흐름에 파묻히기 일쑤죠. 동덕여대 학생들이 시위에 나선 가장 큰 이유는 “대학본부와의 ‘불통’을 더는 참을 수 없어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번 시위는 앞서 7일에 총학생회 등 학생 대표들이 학교 쪽의 공학 전환 논의 사실을 공론화한 뒤 학교 쪽에서 별다른 입장 발표가 없자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나선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학교 쪽 입장 발표를 조금 더 기다릴 수 없었을까’, ‘(학생 목소리를 전달할)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궁금하실 수 있습니다. 저도 물어봤습니다. 학교 쪽의 소통 방식 또는 학생 의견 수렴 절차에 대한 불만이 누적돼 불신이 깊은 상태였습니다. 지난 몇 년 치 이야기를 들었지만, 일단 올해 상반기에 벌어진 사건을 ‘대표 사례’로 전합니다. 일명 ‘비민주적 학사제도 개편 논란’인데요. 학교 쪽이 3월11일 학사제도 개편 공청대회를 열었고, 참여 학생들이 우려와 반대 의견을 표명했는데요. 학교 쪽은 별다른 ‘피드백’ 없이 공청회 나흘 뒤인 15일 대학평의원회에서 개편안을 가결했습니다. 학생들은 이때도 ‘비민주적 학사제도 개편 규탄 연대 서명’ 운동을 벌이고, 대학평의원회 개최 전날 비상집회도 열었는데요. 학생들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찬반 표결로 밀어붙인 결말을 목도했죠. 학생들은 이때도 ‘비민주적 학사제도 개편 규탄 연대 서명’ 운동을 벌이고, 대학평의원회 개최 전날 비상집회도 열었는데요. 학생들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찬반 표결로 밀어붙인 결말을 목도했죠. 학생들이 ‘여대’ 정체성을 뒤흔드는 공학 전환 논의도 비슷한 방식으로 처리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고 더 격한 시위에 나서게 된 이유, ‘아예 교무위원회가 열리기 전에 학생 목소리를 세게 전달하자’며 행동에 나선 이유입니다. 지난 2023년 한 학생이 교내에서 쓰레기 수거 트럭에 치여 사망한 사고를 빼놓지 않고 언급합니다. 총학 등 학생들이 최소 5년 이상 안전 문제를 지적한 바로 그 장소에서 벌어진 사고여서 그렇습니다. 대학본부가 학생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은 결과로 친구를 잃어야 했던 학생들이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지난 2023년 6월12일 동덕여대 학생들이 등교 중 교내에서 트럭에 치여 숨진 이 학교 학생 ㄱ씨를 추모하는 집회를 열었다. 여러 언론이 21일 면담 속기록 일부를 발췌해서 ‘동덕여대 총학 “래커칠, 총학과 무관… 솔직히 통제력 잃었다”’, ‘래커칠, 우리와 무관… 동덕여대 총학, 선 그었다’ 따위의 보도를 내놓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갈라치기’ 보도 역시 저를 더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혹여 판단이 어려우시면 왜곡 보도를 보느니 차라리 면담 속기록을 직접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해당 속기록은 동덕여대 총학생회 에스엔에스(SNS)에 공개돼 있습니다. (총학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dongduk_chonghak/) https://www.instagram.com/dongduk_chonghak/ https://www.hani.co.kr/arti/society/women/1168851.html “동덕여대 학생들이 시위에 나선 가장 큰 이유는 “대학본부와의 ‘불통’을 더는 참을 수 없어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수 년 동안 누적된 학생들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대학본부의 불통이 자리하고 있네요
-
-
-
-
-

[정치·경제·사회] “망할 것들, 권력 쥐었다고 못된 짓만”…연세대 교수 시국선언
https://v.daum.net/v/20241121114018631 결국 연대 교수들도 시국선언을 했네요. <연세대학교 교수 시국선언문>당신은 더 이상 우리의 대통령이 아니다“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 나 야훼가 선언한다. 나 이제 이런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거기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말라. 머리를 들고 다니지도 못하리라. 재앙이 내릴 때가 가까웠다.”(『공동번역 구약성서』 미가 2장 1, 3절)불의한 권력에 대해 성서는 이처럼 준엄한 경고를 내렸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정의로운 권력 아래 살고 있는가?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는 과거 어떤 취임사보다 거창했다. 이른바 ‘적폐 청산’과 ‘조국 수사’를 발판 삼아 정치에 뛰어든 30년 경력의 검사 출신 대통령은 “자유, 인권, 공정, 연대의 가치”를 내걸고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불과 2년 반 만에 빈껍데기만 남았다. 경제적 양극화와 민주적 제도들의 훼손으로 실질적 자유의 기반이 약화되었다. 민주, 평등, 평화를 열망하는 주권자 국민의 정당한 요구는 묵살 당하기 일쑤고, 가장 기본적인 언론과 표현의 자유조차 위협받고 있다. 인권과 생명권을 짓밟는 각종 사회적 재난이 벌어져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꼬리를 무는 정권의 비리와 권력 사유화 의혹에 국민 누구도 더 이상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신뢰하지 않는다. 편 가르기와 파행적 인사,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정치로 인해 연대 의식은 사라지고 공동체는 무너지고 있다. 이것이 불과 2년 반 동안 우리가 겪은 윤석열 정부 치하 한국 사회의 처참한 모습이다.윤석열 대통령이 집권 초반 국민에게 약속했던 것들 가운데 무엇이 이루어졌는가? 우리는 아직도 그에게 기대와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역대 최소의 득표율 차이로 당선된 윤석열 대통령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국민통합이었다. 그에게 표를 던지지 않은 이들도 그가 ‘모든 국민을 위한 대통령’이 되어 공존의 지혜와 기술을 발휘하길 열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그런 기대를 접었다. 우리가 이제껏 윤석열 대통령에게서 본 것은 다른 의견을 무시하고 반대 입장을 배척하며, 편협한 이념 타령과 뒤틀린 진영논리로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모습뿐이다. 야당과 협치하고 국민을 섬기기는커녕, 비판이 듣기 싫다고 국민의 입을 틀어막고 언론을 겁박하며 국회 연설조차 거부하는 대통령에게 우리가 무슨 기대를 걸 수 있을까?윤석열 정권이 임기 절반의 기간 동안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무능력하고 무책임하고 무도한 권력의 민낯이었다. 이태원 참사에서부터 채 상병 사건, 노동계와 언론계 탄압, 역사 왜곡, 대미·대일 굴종 외교, 호전적 대북정책, 부자 감세, R&D 예산과 각종 연구비 삭감 등 이 정권의 실정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제는 대통령 부인과 정치 브로커의 국정 농단 의혹까지 점입가경으로 펼쳐지는 중이다. 특히 ‘의료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빚어진 ‘의료 대란’은 정권의 무능을 그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드러냈다. 현실적 여건에 대한 세심한 고려도, 치밀한 중장기 계획도 없이 단행된 마구잡이식 개혁은 환자들의 불편과 희생, 보건의료 제도와 의학 교육의 혼란만을 초래하고 있다. ‘개혁에 대한 저항’이라는 변명으로 덮어 감추기엔 정권의 독단과 불통의 그림자가 너무도 길고 선명하다.그럼에도 이 정권의 현실 인식은 안이하기 그지없다. 대부분 시민이 경제 위기와 경기 침체에 하루하루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음에도 정부는 국정 성과에 자화자찬을 늘어놓는다. 대통령실은 명확한 비전과 목표 아래 정책과 민생을 책임 있게 관리하기는커녕, 끊임없는 대내외적 사건 사고에 지리멸렬한 대응과 거짓 해명을 일삼는다. 그 정점에 ‘모든 책임이 거기서 멈춰 선다’는 대통령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정치적·정책적 실패와 무도함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도, 사과도 할 줄 모르는 대통령에게 우리가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현대사의 수많은 시련을 이겨내면서 우리 국민은 피땀 으로 민주적 제도들을 성취했다. 온 국민이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에 감동했던 가장 큰 이유도, 이 수상이 우리가 겪은 고난과 아픔의 문학적 기록에 세계인이 공감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통으로 쌓아 올린 우리의 민주주의가 윤석열 정권의 실정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국회 청문회를 완전히 무시한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는 상식적 기준에도 못 미치는 사람들을 권력자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채 상병 사건’과 ‘영부인 특검’ 논란에서 보듯, 권력 분립을 위한 대통령의 ‘거부권’은 그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자기 주변의 잘못을 감추기 위한 사적 도구로 변질되었다. 감사원, 국가인권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 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 자유와 공익의 보루가 되어야 할 기관들은 어느새 정권의 방탄 조직으로 전락했고, 존립의 정당성까지 의심받는 형편이다. 성평등 정책을 총괄하는 여성가족부는 혐오와 분열의 정치 아래 철저히 무력화되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 상황은 악화일로에 있다. 검찰은 대다수 국민이 납득하지 못하는 정치적 법 집행을 일삼으며,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마저 위협하고 있다. 어느 틈엔가 대한민국이 ‘검찰국가’로 전락해버렸다는 자조가 국민들 사이에서 터져 나온다. 이렇듯 권력을 사유화하고 정치를 사법화하며 갈등과 대립을 조장하는 대통령이 우리가 기대한 대통령인가?우리는 지금 전 지구적인 기후 위기, 치열한 기술 경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지역의 전쟁, 북·러 군사협력,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미중 갈등, 보호무역 강화와 새로운 냉전 체제 등 나라 안팎으로 예측할 수 없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국제정치와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온 국민이 힘과 생각을 모으지 않고서는 제대로 대처하기 힘든 상황을 맞고 있다. 이런 중대한 시점에 우리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무엇을 희망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다. 어느새 무능과 무책임, 불공정과 몰상식의 화신이 되어버린 윤석열 정부는 정치·경제·사회·문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갈등과 반목을 확산시킴으로써 국민적 역량을 약화시킬 뿐이다.“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이 외침이 거리와 광장을 메웠던 때를 기억한다. 우리는 거리의 정치와 탄핵의 반복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상적인 정치다. 하지만 제도권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정치는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주권자인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의롭고 지혜롭게 행사할 수 없는 윤석열에게는 대통령 자격이 없다. 지난 2년 반 동안 윤석열 대통령이 보여준 분열과 대립의 정치, 무능과 무책임의 국정 운영에 많은 국민은 이미 등을 돌린 지 오래다. 또다시 ‘국민 주권’의 외침이 거리를 메우기 전에, 탄핵의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기 전에 우리는 윤석열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나는 결단을 내리길 촉구한다.윤석열 대통령은 그동안 저지른 불의와 실정에 대해 사죄하고 하루빨리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라.2024년 11월 21일연세대학교 서명 교수 177명 일동강승혜, 강연아, 강정한, 고영석, 공지현, 권수영, 김광숙, 김도형, 김동노, 김동혁, 김동환, 김보경, 김상희, 김선아, 김성보, 김성수, 김성조, 김수, 김수정, 김영근, 김영희,김예림, 김왕배, 김용민, 김은주, 김은희, 김재완, 김정형, 김종철, 김준혁, 김창훈, 김창희, 김춘배, 김태선, 김태은, 김태환, 김택중, 김한성, 김현미, 김현숙, 김현일, 김현주, 김형순, 김형종, 나윤경, 남석인, 남형두, 도현철, 류정민, 류훈, 문창옥, 민경식, 민철희, 박경석, 박덕영, 박돈하, 박명림, 박미숙, 박상영, 박성호, 박애경, 박영준, 박응석, 박찬웅, 방연상, 배성주, 백문임, 변용익, 서보경, 서상규, 서유진, 서이자, 서현석, 서홍원, 석정호, 설혜심, 손인혁, 송아영, 송진영, 신상범, 신지영, 심보선, 안상현,안석균, 안재준, 양인철, 양혁승, 여인석, 염연수, 염유식, 예병일, 오은하, 오진록, 왕현종, 원재연, 유예진, 유준, 윤석진, 윤세준, 윤이실, 윤태진, 이경원, 이기훈, 이상국, 이상길, 이상인, 이석영, 이솔암, 이수홍, 이안나, 이윤석, 이윤영, 이재경, 이재원, 이종수, 이진용, 이태훈, 이한주, 이향규, 이현진, 이혜민, 이혜연, 이희경, 임성모, 임웅, 임이연, 임일, 장민석, 장연수, 전수연, 전수진, 전현식, 정경숙, 정대경, 정대성, 정애리, 정용한, 정용현, 정원균, 정재식, 정재현, 정재현, 정종훈, 정희모, 조대호, 조문영,조미연, 조원희, 조태린, 조현모, 조현상, 조효원, 주일선, 주재형, 지용구, 차혜원, 최건영, 최모나, 최성록, 최성수, 최영준, 최윤오, 최종건, 최종철, 최준용, 최준호, 최진영, 하문식, 하일식, 한봉환, 한인철, 한재훈, 홍길표, 홍윤희, 홍창희, 홍훈, Em Henry
-
-
-

[TV·연예] 랩으로 쏟아낸 '혀끝'이란 한방…82메이저는 이렇습니다[EN:박싱]
'날 담아내기엔 모자란 display' '블링블링한 외관에' '내 손끝도 네 동공에 꽂혀버릴걸' '지나가는 사람마다 내게 박수 oh my god' '지나가는 사람마다 물어봐 내 어깨 size' '난 뿌리부터 너와 다른 놈' 중독성 있는 비트 위에 재치 있는 가사를 얹은 '혀끝'(Stuck)은 신인 보이그룹 에이티투메이저(82MAJOR, 이하 '82메이저')의 '외모 자신감'을 주제로 한 흥미로운 노래다. 데뷔 당시부터 포지션 구분 없이 멤버 전원이 랩 퍼포먼스를 보여준 바 있는 82메이저는 멤버 모두가 랩을 하는 노래를 타이틀곡으로 세웠다. 자신감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하기 어려운 시도다. 지난해 10월 데뷔해 이제 막 데뷔 1년을 맞은 82메이저는 '엑스파일'에서 착안한 'X-82'라는 두 번째 미니앨범에 "지금 82메이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음악"을 담으려고 했다. 가장 주목도가 높은 타이틀곡으로 '82메이저는 이런 아이들이구나' 하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는 '혀끝'이 선정된 이유다. 'X-82'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X-파일과 같이 새로운 음악과 모습을 보여드리겠다'라는 앨범으로 소개됐다. 회사가 세운 중심 목표를 묻자, 제작진은 "'현재 이 시점에서 82메이저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음악을 선보이자'가 저희 팀의 목표였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현재 멤버들이 표현할 수 있는 음악적 세계와 내용"이라고 답했다. 이어 "82메이저가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팬분들과 함께 기록하고 공유하는 앨범이라고 생각하며 준비했고, 82메이저가 아직 선보이지 못한 매력을 솔직하게 보여드릴 수 있는 곡들을 앨범에 수록했다"라고 전했다. 타이틀곡 '혀끝'부터 '가시밭길도 괜찮아'(Thorns) '페이스 타임'(Face Time) '가십'(Gossip)까지 수록곡 수는 4곡이다. 첫 번째 미니앨범 '비트 바이 82'(BEAT by 82)와 같은 수다. '지금 이 시점의 82메이저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음악'이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추렸더니 4곡이 됐다. "저희만의 독특함을 확실하게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멤버 전원 랩 구성을 통해 82메이저의 랩 실력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물어봐 내 어깨 size' 같은 익살스러운 가사로 저희 자신감을 재미있게 표현했습니다. 직설적인 가사에 직설적인 퍼포먼스까지 더해져 저희의 강렬한 '한방' 같은 곡이 되는 거죠. 팬분들과 대중분들께 '82메이저는 이런 아이들입니다!'라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남성모) 82메이저 멤버들의 '외모 자신감'이 타이틀곡 가사의 주제다. 제작진은 "비트가 반복적이면서도 강렬하기 때문에 가사는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에둘러 표현하기보다 82메이저의 매력을 확실하게 대중에게 각인하겠다는 자신감과 의지를 표현하고자 했다"라며 "기존 음악 색깔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혀끝' '동공' 같은 과감한 단어를 선택했고, 멤버들이 잘 소화해서 좋은 곡이 탄생한 것 같다"라고 바라봤다. '혀끝'은 전작 '촉'을 작업한 파익스퍼밀과 다시 한번 의기투합한 타이틀곡이다. 제작진은 "멤버들과도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이고, 전원 랩이 가능한 82메이저만의 자신감을 보여줄 수 있는 곡"이라고 소개했다. 이번 앨범에서 음악적으로 가장 새로운 부분을 물었을 때도 '혀끝'을 꼽았다. "멤버 모두 래핑·보컬 측면에서 새로운 느낌을 시도했어요. 성빈이는 랩의 발성과 뱉는 부분을 연구했고, 도균이는 메인보컬이지만 이번 타이틀곡에서 랩을 맡아서 랩 연습을 많이 했어요. 다들 곡 분위기를 살리면서 본인의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 다양한 도전을 했습니다. 특히 '페이스 타임'에서 그 점이 잘 담긴 것 같아요. 6가지의 '여유로움'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윤예찬) 수록곡 중 '페이스 타임'과 '가십' 작사·작곡에는 멤버 전원이 참여했다. 우선 '페이스 타임'에 관해 윤예찬은 "저희 두 번째 콘서트 '비트 바이 82'에서 저랑 성빈이랑 '웨이크 업'(Wake Up)이란 곡으로 먼저 선보였었다. 이번 앨범 준비하면서 그 곡을 82메이저 완전체 버전으로 새로 만들었다"라고 소개했다. '혀끝' MV 속 '비밀 요원' 82메이저에게 '분홍 빗'이란[EN:박싱] 꽃분홍색 천에 둘러싸인 여섯 형체, 심상찮은 효과음, 돋보이는 금빛으로 된 '혀끝'이라는 단어. 게임 시작 화면처럼 시작해 B급 코믹 영화를 연상케 하는 무드로 흐르다가도, 멤버들의 여유로운 표정 연기와 안무까지 두루 포착하는 영상. 지난달 15일 공개된 그룹 에이티투메이저(82 MAJOR, 이하 '82메이저')의 신곡 '혀끝'(Stuck) 뮤직비디오다. 아이유, 크러쉬, 밴드 혁오, 그룹 방탄소년단(BTS) 등 수많은 아티스트와 작업해 온 김성욱(Woogie Kim) 감독이 연출한 이번 뮤직비디오는 이른바 '야구르트 아줌마'로 불리는 판매원 등 다채로운 모습으로 변한 멤버들의 재기발랄한 매력이 가득 담겼다. '혀끝'이란 곡의 매력을 잘 표현한 대표적인 콘텐츠로 뮤직비디오를 꼽는 팬들도 많다. 8일 밤 11시 기준 '혀끝' 뮤직비디오 조회수는 1112만 회에 달한다. 아직 공개 한 달도 되기 전인데 천만 뷰를 넘겼다. 6개월 전 나온 전작 '촉'(Choke)의 875만 회를 훌쩍 뛰어넘은 수치다. 이 정도 반응을 회사나 멤버들은 과연 예상했을까. 제작 당시 김성욱 감독에게 '이런 점을 부각해달라'고 한 요청 사항이 있었는지 질문에, 제작진은 "멤버들이 비밀 요원으로 전 세계 리스너(청자)들의 마음에 음악을 꽂는다는 콘셉트를 가지고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겁게 회의를 진행했다. 김 감독님과는 '퍼스트 클래스'(FIRST CLASS) '촉'(Choke) 이후 '혀끝'이 세 번째 작업인데 인제 서로 몇 마디 안 나눠도 의도와 마음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온 것 같다"라고 답했다. '비밀 요원'이라는 콘셉트 아래 꽃거지(조성일), 파일럿(황성빈), 요리사(김도균), 요구르트 배송 직원(윤예찬), 벨보이(남성모), 공사 노동자(박석준) 등으로 변신한 멤버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조성일은 "감독님께서 각자 매력이 돋보이는 캐릭터를 선정해 주셨다. 비밀 요원으로서 본래 모습을 숨길 수 있도록 더욱 파격적인 분장을 했다. 처음에 콘티를 받았을 때도 신선해서 놀랐는데, 피팅 때 각 분장을 한 멤버들 모습을 보고 서로 재밌어했던 기억이 있다. 저희의 익살스러운 매력이 잘 드러나는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개성 넘치는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묻자, 김도균은 "저는 요리사 역할에 맡게 화려한 기술을 선보이기 위해 촬영 전에 칼질 연습을 했다. 사실 요리를 해 본 경험이 거의 없어서 칼을 잡는 것조차 어색했다. 그렇지만 역할을 잘 소화하기 위해서 잠깐이라도 열심히 연습을 했다. 또, 김 감독님께서 칼질하는 방법을 알려주시기도 했다. 덕분에 뮤직비디오 속에서 제 칼질이 아주 멋지게 나온 것 같다"라고 돌아봤다. '혀끝' 뮤직비디오에는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크기가 다양한 빗이 등장해 눈길을 끈다. 제작진은 "처음 '혀끝'을 들었을 때 긴 코트를 입고 머리를 빗어넘기는 멤버들의 모습이 바로 떠올랐다. 곡 전체에서 주는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면서 유머를 섞고 싶었다. 비밀 요원이라는 앨범 전체 콘셉트를 매치하면서 권총 같은 무기로 적을 제압하는 것은 너무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분홍 빗을 사용하는 멋있는 비밀요원들이면 어떨까 하면서 준비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뮤직비디오에서 비밀요원으로 등장할 땐 너무 가벼워 보이지 않도록 클래식한 수트핏과 코트, 선글라스로 전체적인 균형을 맞췄다. 아무래도 82메이저 멤버들이 키가 크고 모델 같은 신체를 가지고 있어서 더 잘 소화한 것 같다. 트레이닝복도 자칫하면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아이템이지만, 뮤직비디오 감독님과 전체적인 색감과 톤을 의논하면서 준비했다. 82메이저 팀명에 맞게 한국적인 느낌과 유머를 적절하게 표현하고자 했다"라고 부연했다. 82메이저는 이번 '혀끝' 음악방송 활동에서 뮤직비디오에 나왔던 의상을 비롯해 다양한 스타일링을 선보이고 있다. 제작진은 "멤버들 비주얼이 워낙 훌륭해서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링이 과하지 않고 덜어낼수록 매력이 더 드러나는 점을 보여드리고 싶었다"라고 운을 뗐다. 제작진은 "일상생활에서 성별 무관 모두 좋아하는 진짜 남자들의 스타일을 기본으로 하되, 흔히 남자다운 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핑크색 등을 함께 매치하면서 유머러스함을 보여드리고자 했다. 발견해 주길 바라는 숨은 1㎝는, 혀끝을 자수로 조그맣게 넣은 무대 의상들이다. 찾아보시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라고 귀띔했다. '혀끝' 안무와 퍼포먼스 소화력을 어떻게 보는지 물었다. 제작진은 "강한 래핑과 단어 포인트를 재치 있게 몸으로 표현한 안무다. 직설적으로 표현된 '혀끝' '동공' '꽂혀버릴걸'이라는 가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표현했고, 멤버들이 매우 잘 소화했다고 생각한다. 안무가 쉴 틈 없이 계속 빠르게 움직이는 구성이 고난도인데 멤버들이 라이브 하면서 안무까지 소화하는 모습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이번 활동으로 82메이저를 향한 주목도가 높아진 게 사실이다. 회사와 멤버들은 체감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제작진은 "멤버들을 비롯해 많은 제작진이 정말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앨범인지라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희가 알고 있는 82메이저 멤버들의 매력을 더 많은 분들이 알아봐 주셔서 기쁘기도 하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해외에서 다양한 러브콜이 회사로 직접 연락이 오기도 하고 다양한 매체에서 82메이저와 함께하고 싶다는 연락도 많이 받고 있다. 이번 활동을 통해 더욱 많은 분들이 82메이저 음악을 들어주시고 함께 응원해 주셨으면 한다"라고 바랐다. https://m.entertain.naver.com/article/079/0003957152 https://m.entertain.naver.com/article/079/0003957153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