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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삼은 작품들 ft. 1946년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 끔찍한 실화를 다룬 내용도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압록강은 흐른다' The Yalu Flows Der Yalu fließt (1946) 일제와 나치에 맞서 저항 활동을 한 이미륵 선생님의 자전 소설격 작품으로 독일에서 출판된 후 한국에서도 2008년에 실사판 미니시리즈로 제작된 바 있으며, 이 글을 올린 시점 기준으로 SBS 홈페이지에서 무료 공개 중입니다. https://programs.sbs.co.kr/drama/mirokli/vods/74328 아래 내용은 교보문고에서 인용한 원작 소설 작품 소개입니다. 소박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찬사 받으며 독일 교과서에도 수록 인간 내면의 순수성을 담아낸 이미륵의 대표 자전 소설『압록강은 흐른다』 말과 문화가 낯선 독일에서 우리 정서를 담은 작품을 발표해 유명해진 작가가 있다. 그의 작품을 읽은 많은 독일 평론가들은 경쟁하듯이 찬사를 담은 서평을 잡지에 실었고, 독일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다. 그 작가는 바로 이미륵이다.『압록강은 흐른다』는 이미륵의 어린 시절을 담은 자전 소설로, 한국 근대사를 배경으로 인간 내면의 순수성을 세밀하게 담아낸 수작이다. 독일 유명 작가인 슈테판 안드레스는 작품을 읽고 매료되어 작가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당신 작품에 아이들이나 어른들 모두가 똑같이 매료되었습니다. 모두 그토록 즐거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수용폭이 얼마나 넓은가를 잘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당신 문체의 간결성과 평온한 분위기, 작가적인 재능을 자극시키는 묘사와 인간미를 풍기게 하는 면면들은 마치 비단 두루마리를 차근차근 풀어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합니다. -슈테판 안드레스 (독일 작가)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미륵은 아름다운 산천에서 사촌 수암과 장난을 치며, 곧은 선비였던 아버지의 자애로운 가르침을 받으며 따스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어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커서는 신식 중학교를 다니며 의사가 될 꿈을 키웠다. 학창시절에는 3?1운동에 가담하며 조국의 현실에 울분을 품기도 했지만 결국 압록강을 건너 저 먼 유럽으로 향한다. 수암은 모든 면에서 나보다 활달했다. 붓글씨에서도 나보다 재치가 있었는데, 그 성질 탓으로 밝은 회색 바지에다 검은 먹물을 몇 배 더 그어 놓았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분홍색 옷소매도 점점 더 검게 물들어 갔다.k 우리의 첫 습자 공부가 끝난 후, 집안의 여자들은 모두들 깜짝 놀랐으나, 우리는 벌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는 우리를 감싸 주기까지 했고, “이게 바로 젊은 서예가의 명예 훈장이니라.” 하며 웃으셨다. 나는 한 번 더 압록강을 구경했다. 강은 언덕과 저녁 노을 빛 속에서 모래사장 위를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강은 여기서 좁아져서 그 폭이 반 킬로미터도 안 되는 것 같아 보였다. 맞은편 언덕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거의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중략) 오랜 옛날부터 우리 고국을 이 무한한 만주 벌판과 분리시키고 있는 국경의 강은 쉬지 않고 흐르고 흘렀다. 이쪽은 모든 것이 크고 어둡고 진지했으나, 저쪽은 모든 것이 작고 맑게 보였다. -본문 중에서 작가는 소박하면서도 간결하고, 또 친근감 있는 문체로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국이 아닌 독일에서 잠든 작가가 늘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와 따뜻한 인간애다. 이 작품의 곳곳에서도 작가의 그런 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 집 정원에는 꽈리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 빨간 열매가 햇빛에 빛났다. 우리 집 뒷마당에 서 그렇게도 많이 보았고, 또 어렸을 때 즐겨 갖고 놀았던 그 식물을 나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마치 고향의 일부분이 내 앞에 실제로 와 있는 것 같았다.……(중략) 어느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자 성벽에 흰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하얀 눈을 보며 행복감을 느꼈다. 나의 고향 마을과 송림에 휘날리던 바로 그 눈과 같았다. -본문 중에서 일제의 탄압을 받았던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며 결국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 그러나 조국이나 전통을 부정하지도, 인간에게 절망하지도 않았던 사람, 그래서 그는 머나먼 이국땅에서도 조국의 정서와 문화를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들을 써 왔다. 그리고 그 작품이 가진 따스한 생명력은 문화와 시대를 초월해 많은 독자들의 가슴을 두드리며 공감을 얻고 있다. 이미륵은 고결한 인격과 휴머니즘을 통해 동양인의 정서를 서구에 전달하였고, 특히 한국인을 위해서는 돋보이는 문화 사절 역할을 하였다. -정규화 (전 성신여자대학교 독문과 교수,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회장) 이 소설은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인간 내면의 순수성을 과장 없이 나타내고 있는 데에 그 강점이 있다. 그것이 독일인의 가슴에 진한 감동을 준 것이 아닐까. -김승옥 (고려대학교 독문과 교수) · 6학년 2학기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 수록 ·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 수록 · SBS와 독일 방송사 BR 공동 제작하여 방영된 2008년 드라마 ‘압록강은 흐른다’ 원작 '맨발의 겐' Barefoot Gen はだしのゲン (1973) 실제로 원폭에서 살아남은 만화가 '나카자와 케이지'가 자신의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연재 만화 작품으로 반전, 반핵, 반전체주의를 주제로 삼아 호평을 받았으며 이후 실사판 영화, 애니메이션 영화, TV 시리즈, 무대극 작품으로도 각색됐습니다. 아래 내용은 교보문고에서 인용한 원작 만화 작품 소개입니다. [맨발의 겐]은 원폭을 실제로 체험한 필자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핵의 파괴력, 인류를 전멸케 하는 힘의 공포를 알리기 위해 내놓은 작품으로서 반전 반핵 평화를 주제로 하는 만화이다. 아버지와 누나, 동생이 집채에 깔린 채 불길에 휩싸여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저자의 체험이었기에 도저히 상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원폭의 실제 상황이 아주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주제가 반핵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책의 장점이 있다. 평등과 박애의 사상을 생활의 신조로 하여 부지런히 사는 주인공, 겐의 아버지는 몇 안 되는 부자들을 위해 대다수 가난한 서민들을 죽음과 빈곤으로 내모는 전쟁에 반대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국민이라는 꼬리표와 이웃의 따가운 눈총, 경찰의 조사, 그리고 감옥이었다. 또 그의 다섯 아이들도 학교나 공장, 동네에서 비국민 자식으로 손가락질과 누명을 뒤집어 쓰기 일쑤였다. 전쟁이 누구를 의한 것인지도 모른 채 대일본제국이라는 허울아래 전쟁에 미쳐 가는 소시민들의 모습과 애젊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자식의 목숨마저 천황을 위해 바치는 걸 영광으로 여기기까지 하는 전쟁의 비인간성, 그리고 아시아를 침략한 일본의 죄행을 남김없이 보여 주는데 이 책의 진솔함이 있다. 또한 히로시마의 잿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빠지고 살이 곪거나 흐물흐물 흘러내려 보기 흉한 몰골로 먹을 것을 찾아 헤맬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원폭 피해자들을 도둑으로 내몰고, 그들에게 돌팔매질을 하고, 괴물 취급 하는 일본인들의 박해, 그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처절한 삶의 몸부림까지 이 책은 소화해 내고 있는 것이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시리즈 Astonishia Story (1994) 주인공이 왕가의 보물인 지팡이를 운송하다 기습당해 뺏기자 이를 다시 찾으러가며 벌어지는 내용을 다룬 한국의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 작품으로 당시 '손노리' 사의 '이원술' 대표가 작 중 '패스맨'이란 이름의 캐릭터로 등장해 불법복제 여부를 확인하는 캐릭터로 나왔으며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 제작하는 한계 속에서도 분발해 흥행에 성공해 이후에도 리메이크작들이 제작됐습니다. '폭락' 'Death Business' 'Pongnak' 'Crypto Man' (2025) 故 '송재림' 배우의 유작으로, 현실의 테라 및 루나 코인 사태 및 관계자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으로 이와 관련해선 아래 기사도 참고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테라·루나 폭락 사태 다룬 영화 '폭락' 가상화폐 청년사업가, 괴물로 변하다 https://www.mindgil.com/news/articleView.html?idxno=84535 아래 내용은 KMDB에서 인용한 작품 소개입니다. “기대에 부응해야지?” 엄마 옥자의 열성과 본인의 타고난 욕심으로 교육 1번지 서울 대치동으로 위장 전입한 도현. 벤츠타고 다니는 부자이면서 장애 혜택을 받아먹던 친구에게 교환학생의 기회마저 뺏기고, 그 친구가 진짜 장애인이 아니었단 걸 알게 된 그 때부터 정부 지원금의 맹점에 눈을 뜬다. 대학교 창업동아리에서 만난 동기 지우와 함께 청년·여성·장애 등의 가산점을 악용해 청년 창업 지원금을 수급하고, “창업 지원금은 나랏돈으로 망해 보라고 주는 눈 먼 돈”임을 간파해 의도적으로 고의부도와 폐업을 전전한다. 투자자 케빈에게 억대 후원을 받는 암호화폐 벤처를 창업한 도현은 야망에 이끌려 ‘MOMMY’ 코인을 개발해 역대 최고치의 실적을 내지만, 알고리즘과 불완전 이자 수익 등 금융기관으로부터 모니터가 들어오게 되는데… (출처 : kobis)
콩라인박작성일
2025-01-15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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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재벌회장이 그냥 만들고 싶어서 만들어버린 문화재 기반 랜드마크
황룡사 9층 목탑 지금으로부터 무려 1,500년전에 만든 건축물이 최대치 81미터 (현대식 빌딩 20층 높이) 최소치 66미터 (롯데월드 자이로드롭 높이가 70미터) 고려시대 문인 김극기가 황룡사 9층 목탑 정상에 올라가서 내려다 본 당대 경주의 장관 80미터 높이의 건축물이 층계로 이루어져서 현대의 랜드마크처럼 정상에서 경주 시내를 내려다보는것 가능 그 위에서 내려다보면 경주 시내의 여러집들이 개미집처럼 보일 지경 그 거대한 건물의 기와 끝 하나하나 있던 어지간한 사람 키보다 더 거대한 화려한 치미들 조선시대 경복근 근정전 (왼쪽) 그보다 거대한 신라시대 황룡사 금당 (오른쪽) 양쪽에 동서 금당이 추가로 있어 총 3개의 금당이 존재했음 목탑과 금당 그 곳에 남아있던 무수한 불교 유물들 가장 크고 웅장한 유물들은 철저하게 약탈당하고 파괴당했지 남은것만 해도 엄청나게 나옴 현재 남아있는 불두(불상 머리파편)과 불두 받침석의 추정되는 당시 황룡사 장륙삼존불상의 크기는 무려 5미터 수준 황룡사 들어가면 5미터가 넘는 부처님 얼굴이 사람 반겨주는 셈 정설로 추정 5미터, 그런데 저 불두로 보면 불두가 너무 커서 머리만 잡아도 4~5미터라 종종 최대치로 11미터까지 추정하는 사람도 간혹 있는 삼존불과 십대제자, 기타 불상을 통틀어 총 19좌에 이르는 대형 불상들이 일렬로 배치되어 이뤘을 장관들 황룡사 들어서는순간 5~11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던것 천사옥대, 황룡사 9층 목탑과 더불어 이 장륙삼존불상을 합쳐 신라를 수호하는 신라삼보新羅三寶라고 함 신라삼보 중에 두개가 황룡사에 있던것 새들도 진짜 나무인줄 알고 착각할 정도였다는 신라 화가 솔거率居의 그림 같은것도 황룡사 현존했다면 황룡사 금당 벽에 다 남아 있었을것 현존하는 최대 크기의 신라 범종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높이만 3.75미터 그런 에밀레종의 무려 4배였다는 충격적인 스케일의 황룡사 대종皇龍寺 大鐘 황룡사 자체만 해도 남았다면 대단한 랜드마크지만 근처 분황사까지(분황사는 지금 남아있긴 하다만 당시는 당연히 훨씬 컸음. 전성기때는 황룡사 3분의 2 정도) 남았다면 그야말로 불교 테마파크 그 자체 또 황룡사 남쪽으로 현재 광화문 광장 크기 정도로 잘 다져진 대로가 있어서 서쪽으로는 동궁 및 월지, 동쪽으로는 명활산성 방향으로 동서로 이어지는 도로 역시 조사결과 발견됨 잘 정비된 도로를 통해 서쪽으로 몇백미터 정도 산책하듯 걸어가면 나왔을 동궁과 월지 동쪽길로 걸어가면 한때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할 당시 방위에 취약한 수도에 머물면 적의 기습 공격에 무력해질 수 밖에 없어서 (갑자기 수도 공격당해서 죽은 백제 개로왕처럼 될까봐) 신라 왕실이 대신 머물던 전문적인 방위시설 명활산성이 나옴 황룡사가 남았다면 이렇게 동서로 경주 전체를 가로지르는 한반도 전체, 아니 동아시아를 놓고 봐서도 인상적인 역사문화 랜드마크의 중심이 되었을것 목조 건축물이니 당연하게도 화재등에 취약해서 여러차례 벼락 맞고 불나고 손상 되긴 했지만 그래도 꾸준히 보수 되면서 버티고 있었는데.. 1238년 고려 몽골 전쟁 무렵때 몽골 병사들이 와서 80미터짜리 건축물들 싸그리 불태워 버렸고 불만 태웠을리도 없고 약탈도 하고 다 떄려부수면서 남아 있었을 온갖 유물, 유산들도 전부 능욕당하고 박살나버림 물론 내버려 두어도 조선시대 쯤 되면 어차피 목조 건물에 필연적으로 났을 화재 나거나 하면 불교에 호의적이던 고려시대처럼 보수는 안했을테니 자연스레 쇠하였을테지만 최소한 그렇게 자연적으로 쇠하면 복구 등에 참조할 자료도 더 많이 남고, 황룡사 대종 같은 유물은 남아 있었을만한데 걍 몽골 병사들이 가서 약탈한거라 건물들 사라진건 둘째치고 유물들도 무수하게 사라짐 그 거대한 황룡사 대종 같은 유물도 다 약탈해갔는데 옮기다가 바다에 빠졌는지 행방이 묘연해짐 남아 있었다면 두 말할 것도 대한민국 최대의 랜드마크,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 및 자랑스러운 상징으로 남았을게 분명한 황룡사 소실된 문화재터를 공구리쳐서 복구한걸로 유명한 일본 다만 덕분에 관광 명소, 랜드마크화 되어서 지역명물이 되어서 관광객들이 미친듯이 찾아옴. 비슷하게 복원만 되면 가히 한국 최고의 역사적 랜드마크가 될 황룡사 복원 문제에 대해서도 "가만히 두면 뭐하냐. 복원해서 사람들이 탐방하고 해야 새삼 문화재 애호라는 가치가 살아나는거다"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는데 복원 들어가면 실체하고 다르다. 절대 안된다." 논쟁이 극심하며 복원 관련 이야기는 항상 나오지만 십수년이 지나도 크게 진전되는게 없다. 그런데... 경주에 가면 뜬금없이 이런게 있다 무슨 미니어쳐가 아니고, 진짜 건축물임. 당연한 소리지만 목재 건물은 아닌데, 높이는 꼭대기까진 68미터, 건물 위의 꼭지까지 따지면 85미터라 황룡사탑의 추정치인 60~80미터와 유사하다. 탑만 있는거니까 황룡사 다른 기반시설은 없는거지만 아무튼 탑은 있다.. 대체 뭘까? 이 건물의 정체는 '황룡원' 이라는 시설. 연수시설로 활용되지만 연수기간이 아닐때는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되는 시설이다. 그런데 대체 이 황룡원이라는 시설은 뜬금없이 왜 황룡사탑의 모습일까? 설명에 따르면 '동국산업' 의 회장이었던 '장상건' 회장이 평소부터 황룡사지를 10여년 이상 오고가면서 항상 황룡사 복원에 대한 뜻이 있었고 현실적으로 무리인 상황에서 그 대신 그대로 본딴 황룡원을 만들었다는것 심지어 이 건물은 장상건 회장 본인이 자기 사비 털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그냥 본인이 본인 돈으로 짓고 싶어서 지은 셈. 그렇게 장상건 회장이 쓴 사재가 500억 이상인데 본래 불심이 깊었던 장상건 회장이 "곧 있으면 죽을 나이인데 돈 관속에 넣을것도 아니고 뭔가 좋은 일 해보고 싶다" 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아무튼 황룡사의 모습을 본따서 만든 건물이지만 당연하게도 실제 황룡사는 아니고 실제 황룡사지에 있지도 않은 건물이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황룡사가 없는 상황에서 경주에 온 사람들이 대충 '황룡사 봤다' 는 느낌 낼 수 있는 랜드마크 중에 하나로 취급되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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