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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청산리 전투-체코슬로바키아
[주간조선] [발굴특종] 체코슬로바키아 신문, 3·1운동 잇따라 보도
조성관 편집위원 maple@chosun.com
입력 : 2010.02.23 16:37 / 수정 : 2010.03.01 11:18
독립군에 무기 팔아 청산리전투 승리 기여<이 기사는 주간조선 2094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서울의 봉기’ 블라디보스토크, 3월 6일.한국인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한국의 독립을 요구했다고 서울발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시위 군중은 황제의 시신이 안치된 왕궁까지 행진했다. 서울 거리는 국장(國葬)에 참석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혼잡했다. 경찰과 군은 봉기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다. -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 1919년 3월 18일자(제331호), 노보니콜라예브스크에서 인쇄3·1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17일이 지난 3월 18일, 체코슬로바키아 신문인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에 실린 보도 내용이다.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군대의 신문인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는 로이터통신의 블라디보스토크발(發) 3월 6일 뉴스를 토대로 이 기사를 작성했다. 3·1독립운동이 중국, 미국, 터키 언론에 보도되었다는 사실은 언론학자들에 의해 밝혀졌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신문이 3·1독립운동을 보도했다는 사실은 이제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같은 사실은 주한체코대사 야로슬라브 올샤 2세(Jaroslav olsa jr)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를 주간조선에 공개하면서 밝혀졌다.
▲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데일리)와 3·1독립운동 관련기사. / photo 김승완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이 신문이 두 번째로 한국의 3·1독립운동을 보도한 것은 첫 번째 보도가 나가고 열흘 뒤였다. ‘일본과 한국의 운동’ 만주, 3월 22일.일본의 조선총독은 “한국은 일본 통치 아래에 남을 것이며 한국의 국익은 존중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총독은 “역사가 보여주듯 한국은 스스로 혼자서는 문명화될 수 없으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면서 “한국은 인접한 강대국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어야 하며 한국은 일본의 영향력 속에서 큰 성공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다. 감옥에 수감된 1000명의 한국인 중에서 600명 이상이 석방되었고, 나머지는 현재 조사를 받고 있다.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 1919년 3월 28일자(제340호), 이르쿠츠크에서 인쇄세 번째 보도가 나간 것은 두 번째 보도가 나간 지 46일 만이었다. ‘한국에서’ 블라디보스토크, 4월 7일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일본 경찰은 혁명 잡지를 인쇄한 비밀 인쇄시설을 찾아냈다. 모든 인쇄기계는 즉각 군법회의에 귀속됐다. 도쿄발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일본 당국은 무력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진압할 것으로 보인다. 2000명의 한국 노동자가 무자비하게 검거되었고 그중 절반은 재판에 회부된다. -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 1919년 5월 13일(제377호), 이르쿠츠크에서 인쇄독자들은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데일리)가 인쇄된 장소에 대해 의문을 가질 것이다. 왜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의 인쇄 장소가 체코슬로바키아가 아닌 러시아였을까? 러시아에서도 왜 인쇄처가 날짜별로 다를까 하는 의문이다.무소속 부대로 전락한 체코 망명군대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는 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에 의해 창간되었다. 1917년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여전히 오스트리아 제국의 식민지에 놓여있을 시점.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는 1차대전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를 위해 싸우기를 거부한 체코슬로바키아 군인들이 1916년 러시아에서 창설한 군부대.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는 1차세계대전 중 연합국(영국·프랑스) 편인 제정(帝政) 러시아군대의 일원으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6만명 규모.
▲ 열차로 이동 중인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 이 군대는 이동 중에 전투를 벌이고 신문을 발행했다. / photo 주한체코대사관 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러시아의 정치상황은 복잡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공산혁명이 성공하면서 제정 러시아가 붕괴됐다. 러시아 전역은 적군(赤軍)의 수중에 하나씩 떨어지고 있었고 또 외국군대가 러시아에 속속 상륙하면서 상황은 혼미해졌다.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활동하던 체코슬로바키아군은 졸지에 ‘무소속 부대’로 전락했다. 이에 미국에 본부를 둔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는 프랑스 측과 협의해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를 프랑스군에 배속시킨다.문제는 우크라이나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를 어떻게 프랑스 전선으로 이동시키느냐 하는 것. 우크라이나 서쪽은 볼셰비키 적군에 의해 완전 장악된 상태였다. 거리상으로는 서쪽으로 가는 게 가까웠으나 그것은 볼셰비키 적군의 심장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를 시베리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우회시키기로 결정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무장을 해제하라는 소비에트정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중무장한 상태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올샤 대사는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시베리아횡단철도로 이동하면서 반(反) 볼셰비키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면서 “러시아 서쪽에서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 중에 전투를 하면서 신문을 편집 인쇄해 배포했다”고 말했다.1919년 3월 13일자 이 신문은 아무르강 지방의 볼셰비키와 일본군의 움직임을 다루고 있다. 이날자 신문은 옴스크(Omsk)에서 인쇄되었다. 옴스크는 시베리아 한복판에 있는 도시다. 이후 신문은 동시베리아 노보니콜라예브스크(Novonikolayevsk)에서 발행되었고 다시 바이칼호 인근 도시인 이르쿠츠크(Irkutsk)에서 찍는다. 신문의 인쇄처가 옴스크→노보니콜라예브스크→이르쿠츠크로 바뀌고 있다는 것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블라디보스토크, 체코와 한국의 첫 만남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의 제1진(약 1만5000명)이 체코슬로바키아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이용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은 1918년 4월 말. 소비에트정권이 극동 러시아까지 장악한 상태였지만 망명군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도착했다. 배편을 이용해 프랑스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시차를 두고 속속 시베리아에서 극동 러시아의 부동항(不凍港)으로 집결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1918년 4월부터 1920년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대기하며 유럽행 배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 1918년 10월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했고 망명군대의 최종 목적지는 프랑스 전선이 아닌 막 탄생한 체코슬로바키아민주공화국이 됐다.역사적으로 아무런 교류가 없던 한국과 체코슬로바키아의 첫 접촉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뤄졌다. 1918년이면 이미 러시아 연해주와 간도지방에 많은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던 시점. 간도는 당시 한국인 약 100만명이 거주하고 있어 해외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한국·체코 접촉과 관련된 연구는 체코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프라하의 역사학자 즈덴카 클로슬로바(Zdenka Klosl쮤v쮅)는 2002년과 2003년 프라하에서 발행된 계간지 ‘아시아와 아프리카 연구’에 ‘러시아의 체코 군대와 한국 독립운동’과 ‘한국독립투사에 들어간 체코무기’를 각각 게재했다. 클로슬로바는 체코 기록보관소의 자료와 러시아 측 자료를 수집했다. 여기에 한국 측 자료로 역사학자 신용하의 ‘북로군정서 항일 민족독립운동사 연구’와 ‘한국근대 민족운동사 연구’, 역사학자 박용석의 ‘일제하 만주·노령 지역에서의 독립군의 연구’, 이기백의 ‘신한국사’를 참고했다. 클로슬로바의 연구 논문을 보면 체코신문이 어떤 경위로 한국의 3·1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보도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체코군, 같은 식민지 한국에 연민 느껴”러시아 연해주의 한국 독립투사들은 블라디보스토크항에 대기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의 무기가 우수하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었다. 성능 좋은 무기로 무장이 절실했던 독립운동조직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로부터 무기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1920년 2월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소비에트 적군과 휴전협정이 성립된 이후 서둘러 무기를 팔고자 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무기를 팔기로 한 데는 러시아를 떠나는 데 드는 비용을 마련하는 한편 무기가 소비에트 군대로 들어가는 것을 막자는 이유도 있었다. 러시아 연해주와 인접한 간도지방에서 활동하던 의병과 독립투사들에게도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의 무기가 절실했다.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대일투쟁의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무기 확보가 가장 중요했다. 간도지방의 최대 독립운동조직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역시 러시아연해주에서 무기를 구입했다. 북로군정서 대장 이범석(李範奭)은 자신의 회고록 ‘우등불’에서 한국 독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무기 구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1차대전 중 독일·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해 자유민주국가가 되었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전쟁에 참전하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동유럽의 최전선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서유럽으로 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서유럽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투를 벌이면서 독립을 되찾은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이었다. 이것이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러시아를 가로질러 우랄산맥을 넘어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한 이유였다. 블라디보스토크항에서 서유럽행 배편을 기다리고 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한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제국 식민통치 아래서 겪어온 노예 상태를 떠올렸고 우리에 대해 연민을 표시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무기를 북로군정서에 판매하기로 했다. 무기 거래는 깊은 숲에서 한밤중에 이뤄졌다. 이러한 무기들은 우리 진영으로 옮겨져 숲속에 무더기로 쌓아놓았다.”
▲ 시베리아 횡단철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 권총 200정 등 무기수송에 230명 동원이범석 대장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한국 독립투사에 무기를 팔기로 결정한 주된 이유가 같은 피압박 민족인 한국에 대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범석 외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대 무기 구입과 관련한 증언자는 이우석이 있다. 당시 북간도에서 북로군정서에 참여하고 있던 이우석은 25세였다. 이우석은 1920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슬로바키아군으로부터 사들인 무기를 간도로 수송하는 부대의 책임자로 있었다. 이우석은 85세이던 1980년, 역사학자 박용석에게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이 작전에 동원된 한국인 230명은 200정의 권총, 기관총, 탄약을 옮겼다.”러시아 연해주에서 벌어진 비밀스러운 무기 거래는 여러 방면에 영향을 미쳤다. 무기 거래는 무엇보다 일본군을 자극했다. 특히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에 이와 관련된 소식이 보도되었다는 사실은 일본 정부에 매우 심각한 상황을 불러왔다. 1920년 3월 7일자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일본군 이나하기 대장이 러시아 당국에 항의 서한을 보내 “일본에 예속된 한국이 러시아 영토에서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무기와 군수물자를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이나하기 일본대장은 이 서한에서 “1월 20일 (소련)임시정부가 한국인들의 무기 구입을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 명령은 여전히 서류상으로만 남아있다”고 주장했다. 이나하기 대장은 “만일 러시아 당국이 조치를 취하기를 꺼리거나 할 수 없다면 일본군이 어쩔 수 없이 상황 통제를 감독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서 유럽으로 떠나는 배에 오르는 체코슬로바키아 군인들. / photo 주한체코대사관 러시아와 일본군 사이의 긴장 고조는 일본군이 4월 4~5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침공해 점령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일본군은 이러한 군사적 조치가 만주와 한국에서 반일 선전활동을 지원한 러시아의 공격적 행동과 관련이 있다고 정당화했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집단 거주지역인 신한촌에 대한 공격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한국인 130명이 사망하고 250명이 부상한 신한촌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청산리전투의 승리 공신은 체코군 무기무장독립운동사의 자랑이 1920년 10월 21~26일의 청산리 전투다. 김좌진, 이범석, 홍범도가 이끄는 무장독립군 2500명은 일본군 5000명을 몰살했다. 신용하, 박용석 등 한국 역사학자들은 러시아 연해주로부터 구입한 고성능 신형 병기로 인해 북로군정서가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는 요인이 됐다고 강조한다. 청산리전투의 빛나는 승리의 일등공신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로부터 사들인 무기였다는 얘기다.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면서 종간(終刊)됐다. 올샤 대사는 “1919년 당시 미국 시카고에는 최대의 체코슬로바키아 코뮤니티가 있었다”면서 “여기서 체코신문이 두 개가 발행되고 있었는데 이 신문들도 3·1독립운동을 보도했다”고 말했다. 한국과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1918년 10월 민주공화국으로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은 당시 미국에 망명해 있던 지도자 토마시 마사릭(Masaryk). 마사릭 박사는 미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곧바로 조국으로 가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를 격려했다. 올샤 대사는 “마사릭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로 한반도를 종단해 부산항을 통해 일본을 거쳐 체코슬로바키아로 갔다”고 말했다. 이는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주한체코대사 야로슬라브 올샤 2세대사 내정된 후 프라하도서관·고서점 뒤져 한국자료 수집
▲ photo 김승완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 원본은 현재 주한체코대사인 야로슬라브 올샤 2세가 소장하고 있다. 올샤 대사는 프라하 카를대학 출신으로 올해 46세. 2008년 9월 한국에 부임한 올샤 대사는 2007년에 한국대사로 내정되었다. 한국은 올샤 대사의 두 번째 대사 부임지. 한국에 오기 전 올샤 대사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잠비아·말라위 3국 대사로 6년간 근무했다. 2008년에 체코에서 ‘짐바브웨·잠비아·말라위의 역사’라는 책을 출간했다.대사로 내정된 직후, 올샤는 프라하도서관과 고서점을 뒤져 한국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이렇게 수집한 서적은 100권이 넘는다. 이 과정에서 올샤 대사는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의 1919년 신문을 구할 수 있었다.올샤 대사의 부친 역시 대사를 지냈다. 부친은 16세 때 처음 인도네시아어를 접했고 1960년대부터 대학에서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부친은 벨벳혁명으로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93년 첫 주인도네시아 체코대사로 부임했다. 당시 하벨 대통령은 대사를 발탁하는 과정에서 외교관 경력보다는 주재국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최우선의 기준으로 삼았다. 부친은 인도네시아어 전문성을 인정받아 초대 주인도네시아 대사로 6년간 근무할 수 있었다. 부친은 2003년 체코·인도네시아어 사전 제1권을 펴냈다. 올해 체코·인도네시아어 사전 2권을 출간했다.올샤 대사는 아시아에 관심이 많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아시아와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져왔다. 1989년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1992년부터 외교부 근무를 시작했다
-청산리 대첩의 승인중 이런 배경이 있는건 이 기사 보고 첨 알아서 흥미로웠어요
메리아독작성일
2010-03-1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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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근현대사 인물] 건국의 아버지?? 민족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이승만
건국의 아버지, 또는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호불호가 갈리는 우남 이승만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 입니다.
그는 임시정부 시절 자신이 대통령이 아니라면 참여하지 않겠다고 윽박을 질러 결국 초대 대통령을 지내며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갑니다. 하지만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에는 단 한번도 온 적이없고 국내외에서 백성들이 임시정부에 보낸 독립자금으로
미국 호텔방에서 호위호식 하며 지냈고 당시 고가였던 자동차를 타며 스피드를 즐기다 범칙금을 많이 물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승만이 쓴 하루 식비와 호텔 사용비를 합치면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의 1주일 식량치를 확보 할 수 있었다고 하
니 독립자금으로 얼마나 사치를 부리고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써 최악의 일을 저지르게
되는데, 바로 미국 대통령에게 "위임통치청원서" 제출한 것 입니다.
이에 단재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 먹었는데 이승만이라는 작자는 없는 나라까지 팔아 먹으려 한다"며
신채호
분개 했고 곧바로 1923년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게 됩니다. 이에 이승만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탄핵 된 대통령이 되고
임시정부는 신채호와 이회영을 중심으로 한 창조파와 안창호,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개조파로 나뉘게 됩니다. 현상유지파 김
구가 없었다면 임시정부는 이승만에 의해 자멸할뻔 하게 됩니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권한을 잃고 홀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
다 이후 하와이에서 의형제인 박용만과 대립하여 조선인들 끼리 박용만파와 이승만파를 만들어 지역감정을 일으킵니다.
이에 안창호가 중재에 나섰지만 실패하며 당대의 지성인인 안창호 입에서 "이승만은 미치광이다" 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고 박
용만은 "이승만과 같은 작자가 나라의 지도자가 된다면 그보다 불행한 나라는 없을 것이다"라며 독설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그는 독립후에 1945년 9월 7일 여운형의 요청에 의해 조선건국준비위원
왼쪽부터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과 가족
회를 조직하지만 당시 정치적 거물들이였던 김구(한국 광복군, 임시정부), 여운형(건준), 김규식(미군정), 박헌영(좌익세력)
등에 비해 국내에서 정치적 기반이 약해 현 민주당의 전신인 한민당을 조직한 친일파들과 북한에서 탄압받아 월남한 기독교
인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닦습니다.
모스크바 3상 회의 당시 사진
같은 해 12월 좌익과 우익의 대립을 폭발하게 만든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립니다. 미국과 소련은 일정기간 신탁통치 뒤 조
선의 정부수립과 자유 선거를 지지 하였으나 미국은 즉각독립, 소련은 신탁통치를 하려고 한다는 동아일보의 오보(세계 3
대 오보중 하나로 지정 됩니다.)로 좌익과 우익 둘다 반탁운동을 전개하였고 소련은 민심을 잃게 됩니다. 이 때문에 소련에서
는 회의 내용을 전문 공개하며 미국과 같은 입장이라 밝히자 좌익은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선회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아일보의 내용만 알고 회의 내용은 전혀 몰랐던 민중들은 좌익을 비난하며 완전히 등을 돌립니다. 그에 반해 우익
은 반탁, 반소련 입장을 확고히 하며 반공 = 애국자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독립군이 대부분이였던 좌익들을 빨갱이라 탄압 하
고(이때 임시정부에서 조선의용대를 이끌던 김원봉이 독립군 고문 담당이였던 친일파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하고 분개하여 월
북하게 됩니다.) 친일파가 대부분이였던 우익은 애국자로 변하게 되는 말도 안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때 김구는 자신이 평생에 가장 후회한다는 반탁에 가담하여 이승만과 손을 잡게 됩니다. 이에 여운형과 김규식이 김구에게
찾아가 반탁을 하는것은 좌우합작에 반대되어 민족이 분열될 수 있다고 설득하지만 김구는 그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계속 반
탁을 지지 하게됩니다. 다음해 1946년 3월 제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려 미국은 좌우합작 단체에 의한 조선의 정부 수립
을 내세웠고, 소련은 찬탁 단체에 의한 정부를 수립을 내세워 서로의 입장차가 생기자 결국 5월에 휴회하게 됩니다.
이때 이승만이 친일파와
정읍발언 당시 이승만
기독교인들을 앞세워 전라도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우자며 정읍발언(1946. 6)을 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당시 민족분단의 위기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에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 좌,우익 사이에서도 절대 발언하지 않았던
민감한 사항이였지만 이승만은 그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발언을 해 엄청난 파문을 일으킵니다.(미국에게 관심조차 못
받자 이승만이 위기감에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에 여운형과 김규식이 민족 분열 위기를 느껴 미군정의 지지를 받으며 좌
우합작운동(1946. 7 ~ 1947. 12)을 벌이고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여운형이 직접 북한에 가게 됩니다. 하지만 1947년 3월 트루
먼독트린에 의해 냉전이 시작되어 좌우익 또한 사이가 벌어지고 5월에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과 여운형의 암살(194
7. 7)로 실패하게 됩니다. 이후 조선의 문제는 유엔 총회(1947. 11)에 넘어가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정하지만 북한의 거부로
민족분열의 분위기는 더욱 더 커지게 됩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김구는 반탁입장을 철회
하고 김규식과 함께 김일성을 만나 남북협상운동(1948. 2~ 4)을 전개하지만, 남한에서는 이미 5월 10일 제헌국회로 불리는
단독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주도에서
방북하는 김구
남한 단독선거 반대 평화 시위를 벌였고 이를 막기 위해 이승만이 보낸 시라소니 이성순의 서북청년단과 경찰의 좌익분자 색
출 명분하에 무차별 민간인 테러를 가하자 제주도민들이 분노하여 민중봉기를 일으킵니다. (1948년 4월 3일 ~ 1950년 초)이
에 미군정은 군대를 보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여 당시 제주도민 13만명 중에 6~7만명이 학살당하는 최악의 사건이 벌어집니
다. (이 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기 전까지 정부에서 쉬쉬 되어 왔습니다.) 이때 4.3이라는 숫자를 말 만
해도 잡혀갔다고 하니 어느정도로 탑압을 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제주도민들 중에 좌익세력을 추려내는 모습
제주에 파견되기 전에 서북청년단과 경찰을 위로하는 이승만
최근에 발견된 학살된 유골들
민족분열 때문에 단독 선거 반대의 의견이 많았으나 결국 남한에서 1948년 5.10 총선이 실시되고(김구, 김규식, 좌익세력 불
참) 7월 17일 헌법 제정, 결국 독립한지 3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수립됩니다. 이로써 통일 정부는 사실상 물거품이 됐
으며 다음달인 9월 9일에 북한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워 분단이 되고 맙니다. 미국과 소련의 지지로 민족통일 정
부를 세울 수 있었으나 이승만의 주도하에 여운형, 김구 암살과 박헌영과 좌익세력에게 테러를 앞 세워 방해 결국은 지금까지
도 분단된 민족을 만드는데 김일성과 함께 1등 공신이 됩니다. 이후 친일파 청산을 위해 반민족 행위 특별 위원회(1948. 9)
를 만들어 박흥식, 최린, 이광수, 최남선,노덕술등을 체포하지만 이승만은 좌익 잡는 애국자들을 왜 잡아가냐며 화를 냈고 국
회에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있다며 국회의원들을 고문하고 사형 시키는 국회 프락치 사건을 일으키고 노덕술 휘하
의 경찰들은 국회를 습격하는등 친일파들의 입김에 의해 결국
우리 민족의 염원이였던 과거 청산을 실패하게 되며 이후 이 친일파들은 정치, 경제, 역사, 예술, 문화등등 사회 곳곳에 뿌리
를 내려 지금
반민특위원회
까지도 우리나라의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후 한달 뒤 1948년 10월 19일 이승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벌어지
는데 남한단독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었던 제주도민 토벌대를 강화하기 위해 여수와 순천의 14연대에 제주도
출동 명령을 내리지만 당시 경상도 지역은 좌익 세력이 경찰과 군대 곳곳에 있었고 좌익세력이 주 인원이였던 14연대 군인들
은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 반대와 남북통일을 앞 세워 좌익단체와 동맹휴학에 들어간 학생 청년들과 함께 오전 5시 여수 읍
내를 장악하고 우익세력을 색출한 뒤 곧바로 순천을 오후 3시경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이에 이승만은 21일 10개 대대 병력
을 보내 여수와 순천을 포위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여순사건 희생자들
진압 작전을 펼치게 되고 대대적인 시가전이 펼쳐지지만 화력과 진압군의 병력 앞에서 반란군은 대부분 진압되 일부는 지리
산과 산악 지역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게됩니다. 여순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민간인들이였고 특히 무고한 청년들이 단
지 학생복을 입은 죄, 흰 운동화를 신은 죄, 국방색 런닝 셔츠를 입은죄, 머리를 짧게 깎은 죄, 과거에 좌익단체에 가입한 적
이 있다는 죄, 가족과 친구 가운데 좌익에 가담한 사람이 있다는 죄 아닌 죄로 삶을 마감하게 되었고, 남한 좌익 최고의 단체
였던 남로당원 박정희의 배신 활약으로 좌익 세력이였던 많은 군인과 경찰들이 숙국작업으로 대부분 사형됐습니다. 이후 미
국에서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라인이 선포되고 공산당에 의해 중국 본토가 장악 되자 자극을 받은 김일성은 소련에 무기
를 원조 받고 남한을 공산화 하기 위해 조선의용군과 김원봉을 선두로 하여 6월 25일 남침을 합니다. 이승만과 신성모 국
방부장관은 당황하게 되고 이승만은 라디오를 통해 "우리 국군이 북한군을 막고 있으니
북한을 민주기지로 하자며 북한을 도발했던 이승만(오른쪽)과 아침은 서울 점심은 평양에서라며
자신만만했던 낙루장관 신성모(왼쪽)
안심 하라며 민심을 추스리곤 정작 자신과 대부분 정치인들은 대전까지 내뺐고, 북한군은 미아리까지 치고 내려왔다는 소식
에 민중들은 급히 피난을 가게 됩니다.. 이때 정부는 한강다리를 건너는 민간인을 무시한체 폭파를 감행하여 많은 민간인 사
상자를 냈고 너무나 이른 시간에 폭파로 라디오만 믿다가 미쳐 피난가지 못한 민간인과 전방 전투에서 후퇴한 군인들은 북한
군에게 많은 피해를 받습니다.
폭파된 한강다리, 부교가 놓이고 나서야 피난을 가는 민간인들
이윤열 당시 사회부장관의 회고록에는 이승만이 이범석 국무총리의 의견을 받아 들여 남하하는 북한군을 막기위해 한강 다리
를 폭파 시켰다고 주장하여 윗선에서 결정 됐음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애꿎은 채창식 공병감만 사형 당한 체 아직도 누가 명
령했는지 확실한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까도까도 양파같은 인물이라는...
출처 : I Love Soccer- 孔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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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한국군 내 광복군, 중국군 출신 장군 명단 (총23명) 그외.
광복군 출신들이 국군에서 홀대 받은 것 같지만 순수 일본 육사 출신도 전체 명단을 놓고 보면 잘나가는 사람만 잘나갔지 그렇게 후대 받은 것은 아닙니다. 아래 어느 분이 쓰셨지만 새까만 후배들 밑에서 지휘 받는 식으로 수모를 당한 경우도 많지요. 이응준은 5사단장으로 채병덕에게, 김석원은 수도사단장으로 김백일에게 질책을 받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만군출신들도 한직에 맴돌던 사람은 맴돌았구요. 단순히 친일파 중용- 독립군 출신 홀대라는 도식적 이해는 한국군의 초기 역사를 오해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많은 광복군 출신자들이 대한민국을 선택했고, 대한민국을 위해 죽음을 불사했습니다. 광복군 출신인 장철부 소령 같은 경우 중국에서 같이 독립운동을 한 조선의용군 출신 장교가 많았던 북한 제766부대와 제12사단과 교전할 때 투항권유를 끝까지 거부하고 목숨을 던졌죠. 독립운동을 같이했던 766부대의 인민군 장교들이 경북 산악지대에서 격전 중에 장철부 지휘하의 독립기갑연대 제2기병대대를 포위한 상태에서 장철부 소령에게 "망할 한국을 위해 헛된 목숨을 버리지 말고 조국을 위해 같이 일하자"고 지속적으로 투항을 권유하는 중국어 무전을 보냈음에도 장철부 소령은 투항을 거부하고 대한민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받쳤습니다. 당시의 군인사는 주요 인사권자와의 친소관계, 출신지역 문제, 미 고문단이 통제하기 어려운 고급장교들에 대한 전반적 홀대(이건 광복군이건 일본군이건 구별이 없었죠),이승만과 결별한 이범석에 대한 견제라는 구도하에 이루어진 정치적 고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입니다. 일본군 출신이나 만군 출신들이 국군의 주축이 된 것은 아쉬운 점이기는 하지만,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일본군 출신 고급 장교중에 상당수는 임정 출신 군정청 통위부장인 유동열 (일본 육사 출신, 중국으로 탈출. 광복군 및 임정에서 활동)씨가 간곡하게 입대를 권유해서 입대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보여주기 위한 쇼든 어떻든 간에 이응준, 안병범, 김석원, 이용문, 이종찬을 비롯한 상당수 일본 육사 출신들은 광복후 자숙하는 의미에서 침거한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은 최소한 외면적으로는 타의에 의해서 군에 입대했습니다. 사람의 재능이 아쉬울 때니 일본 고등계 경찰 출신만 아니라면 순수 군출신인사들에 대해선 어느 정도 관용의 분위기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국군의 정통성을 확립한다는 차원에선 아쉬운 점이 있는게 사실입니다. 최소한 상징적으로라도 초대 참모총장들은 독립운동 경력자들을 등용했어야 했는데 그런 모양새 갖추기가 부족했던 것은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겁니다.안춘생 장군을 육사교장에 임명한 것은 일본군 출신 이종찬 장군이고, 이 장군은 독립운동경력자가 육사교장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었죠. 김홍일 장군을 육군종합학교교장으로 임명한 것은 한직으로 몰아냈다는 측면도 있지만 교육기관만이라도 독립운동경력자를 중용했던 측면도 있습니다.개인적으로는 한국군 초기 장성들의 면면에서 가장 불만스러운 점은 일본군 경력자의 등용이라기보단 연배나 경력에 대한 고려가 너무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한국전 발발당시 육참차장 김백일 장군이나 작전국장 장창국.. 기타 연대장,사단급을 많았던 고급장교 중에 다수는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거 군경력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나이도 겨우 20대 중반에 불과하면서 단지 국군입대 시기가 빨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젊은 나이에 자신의 능력을 초과하는 직책을 맡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초창기 장교를 단기간에 육성한 탓에 군영출신부터 육사8기까지 나이 차이로는 3~4살 내외 정도 차이 밖에 없었는데도 기수에 묶여 엉망진창의 인사가 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만주군 동기인 이한림 장군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국군 경력을 보면 군영출신인 이한림과 육사출신인 박정희 입대연도 1년여 정도의 차이가 거의 7~8년 정도의 승진 계급 격차로 나타납니다) 없던 군대를 갑자기 만들어낸 터라 이해는 되면서도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은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특임으로 몇몇 일본군이나 광복군 고급 장교출신을 구제하는 시도도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고, 차라리 초창기 기수를 무시하고 전면적인 인사 재편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여간 그래도 아래에 나오는 분들이라도 있었으니, 국군이 체면치례라도 겨우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왕정위 군 출신이야 사실 떳떳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두명을 제외하곤 중국 중앙군 장교들입니다. 김홍일 장군을 비롯해 중국 중앙군 출신들은 대부분 독립운동에 기여한 바가 많습니다.-김홍일 중장 (중국 귀주강무당과 중국육군대학 졸업, 중국 중앙군 제19사단장 대리, 중국군 소장, 중국군 근무시 윤봉길 의사에게 도시락 폭판을 제조해 줌 / 광복군 참모장으로 계급은 광복군 참장) 국군에서 장성급으로 특별임관, 국군에서 육군 중장으로 시흥지구전투사령관, 제1군단장, 육군종합학교장 역임-최용덕 중장(청국 육군사관학교 및 중국육군대학 졸업, 중국군 상교 / 광복군 총무처장으로 계급은 광복군 참장) 국군에서 공군간부후보생 1기로 장교임관, 공군 중장으로 공군사관학교장 및 제2대 공군참모총장 역임-김신 중장(중국항공사 졸업, 중국군 소교, 김구 선생의 자제분)국군에서 공군간부후보생 2기로 장교임관, 국군에서 공군 중장으로 공군참모총장 역임-최덕신 중장(황포군관학교 제10기 졸업, 유동열 사위, 중국군 중교 / 광복군 계급은 정령)국군에서 육사3기, 국군에서 11사단장, 보병학교장, 군단장 역임하고 육군 중장까지 승진, 후에 월북-안춘생 중장(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분교 출신, 중국군 소교 / 광복군 남원지대장으로 계급은 광복군 정령, 안중근 의사와 가까운 친척) 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육군사관학교장, 군부사령관을 역임하고 육군 중장까지 승진. 독립기념관 관장-이준식 중장(운남강무당 출신, 중국군 상교 / 광복군 지대장 역임, 광복군 계급은 정령)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육군 중장으로 육군대학총장 역임-유해준 소장(황포군관학교 제15기 졸업, 중국군 상위 /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계급은 광복군 부령) 경비대 시절 군사영어학교 졸업, 국군에서 육군 소장으로 군부사령관 역임-이성가 소장(남경군관학교 졸업, 왕정위 정권하 중국군 소교)경비대 시절 군사영어학교 졸업, 국군에서 제8사단장, 육군대학 총장 역임하고 육군 소장까지 승진-권준 소장(황포군관학교 제4기 졸업, 중국군 상교 / 광복군 무한지대장 역임, 광복군 정령)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육군 소장으로 수도경비사령관 역임-박영준 소장(황포군관학교 제17기 졸업, 중국군 상위 / 광복군 개봉지구 특파단장, 광복군 부령)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육군 소장으로 사단장 역임-박시창 소장(황포군관학교 제5기 졸업, 중국 육군대학 졸업, 중국군 상교)국군에서 육사3기, 국군에서 육군소장으로 부군단장 역임-장흥 소장(황포군관학교 제5기 졸업, 중국군 강서사령관 역임, 중국군 상교)국군에서 육사7기 특별임관, 육군 소장으로 관구부사령관 역임-김국주 소장(광복군 서주지구 특파단장, 광복군 참령)국군에서 육사7기 특별임관, 육군 소장으로 관구부사령관 역임-김관오 소장(운남강무당 출신, 중국군 상교)국군에서 육사7기 특별임관, 육군 소장으로 관구부사령관 역임-송호성 준장(하남군관강습소 출신, 중국군 상교/ 광복군 지대장, 광복군 편련처장, 광복군 계급 참장) 경비대 총사령관 역임. 육군 준장, 한국전 때 월북 혹은 납북 -오광선 준장(보정군관학교 중퇴, 중국군 상교 / 신흥무관학교 졸업, 광복군 국내지대장, 광복군 참장)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육군 준장으로 호국군여단장(현재의 예비군) 역임-전성호 준장(동북구국의용군 소장)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6.25개전시 제1사단 12연대장. 1950년 9월 전사- 김동수 준장 (황포군관학교 제10기 졸업, 중국군 중교 / 광복군 서안지대 근무, 계급은 광복군 정령) 국군 장교로 특별임관, 국군에서 육군 준장으로 사단장 역임-김응조 준장(왕정위 정부의 중국 화북군 참장) 국군 장교로 특별임관, 국군으로 육군 준장으로 군정보처장 역임-이종국 준장(중국 9집단군 정보처 근무, 중국군 상위)국군에서 육사2기, 국군에서 준장으로 합참 국장 역임-고시복 준장(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분교 출신, 중국군 중교 / 광복군 참모처 과장, 광복군 정령)국군에서 육사2기, 국군에서 육군 준장으로 병사구사령관 역임-박기성 준장(황포군관학교 11기 졸업, 중국 육군대학 졸업, 중국군 중교 / 광복군 서안지대에서 근무)국군에서 육사3기, 국군에서 육군 준장으로 육군 군사감 역임-장호강 준장(광복군 제남청도지구 특파단장 역임, 광복군 참령)국군에서 육사8기 특별임관, 육군 준장으로 군수기지사령부 부사령관 역임이외에-이범석 초대 국방부 장관(운남강무당 출신, 중국군 소장 / 광복군 부장)-유동열 초대 통위부장 (군정청 시절의 국방장관 격)(대한제국 장교로 복무중 일본 육사 유학, 일본 육사15기, 한일합방후 일본군 소좌, 중국으로 탈출 / 대한제국군 참령, 임시정부 초대 참모총장, 광복군 정장)영관급 에는 장철부 소령, 채원개 대령, 오동기 중령, 고개옥 중령,윤태현 소령등..
출처: 디펜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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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은 단순히 명분으로만 광복군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적 구성을 통해서도 광복군과 적지 않은 관련이 있었다. 광복군 출신 창군 원로들은 수적으로는 많지 않았지만 구한말 의병에서 광복군으로 이어지는 조국 수호의 영광스러운 전통이 국군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군 출신인 이범석(李範奭·1900~1972) 장군과 최용덕(崔用德) 장군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더불어 초대 국방부 장·차관에 임명됨으로써 독립운동가 출신이 창군 초기 국방 수뇌부를 형성한 것은 우리 군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남아 있다. 이범석 장군은 “국군의 육성에 있어 군의 정신은 광복군의 독립투쟁을 계승토록 한다”고 강조하는 등 광복군의 정통성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제3대 육군 정훈감에 임명된 박영준(朴英俊) 장군 또한 광복군 출신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장병들의 정신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정훈병과의 경우 특히 광복군의 영향이 컸다. 미군에는 없는 정훈병과가 국군에 설치된 것도 광복군의 영향 때문이다. 호국의 간성을 양성하는 사관학교나 각급 군 교육 기관에서도 국군이 광복군의 후예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 주기 위해 광복군 출신이 집중 배치됐다. 김홍일(金弘壹·1898~1980) 장군을 필두로 7, 8, 9대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모두 광복군 출신이었으며 이준식(李俊植) 장군 등 역대 육군대학 총장 중에도 광복군 출신이 적지 않다. 최용덕 장군도 국방부차관 퇴임 이후 공군에 재입대, 공군사관학교 교장·공군참모총장을 지냈다. ‘하늘에 살면서 하늘에 목숨 바친다’는 감동적인 구절로 끝나는 현재의 공군사관학교 교가를 지은 주인공이 다름 아닌 광복군 출신의 최장군이다. 군 교육 기관 곳곳에 광복군의 발자취를 남긴 것이다. 건군과 국군의 발전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으나 이들 광복군 출신 군 원로에 의해 광복군의 기백과 혼이 국군으로 계승될 수 있었던 것이다. -광복군 출신 국군 주요 원로 이범석·김신·안춘생 장군 등 독립투쟁사에 큰 족적 청산리 대첩의 주역 중 한 명인 이범석 초대 국방부장관,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金信·예비역 중장) 전 공군참모총장, 안중근 의사의 조카 안춘생(安椿生·예비역 중장) 전 육군사관학교 교장,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를 위해 유명한 도시락 폭탄을 제조해 준 김홍일(金弘壹·예비역 중장) 전 육군1군단장. 광복군 출신 국군 원로들의 면면은 이처럼 화려하고 다채롭다. 1932년 4월29일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 공원에서 일본군 고위 장성을 향해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우리나라 독립투쟁사에 길이 빛날 쾌거다. 윤의사의 의거는 김홍일 장군이 제공한 고성능 소형 폭탄 덕에 완벽히 성공할 수 있었다. 중국군에서 사단장(중국군 소장)으로 근무하면서 독립투쟁을 지원하던 김장군은 44년 임시정부 군무부(軍務部) 차장 겸 광복군 참모장(광복군 참장)을 지냈다. 중국군 소장·광복군 참장을 거쳐 국군 중장으로 예편한 탓에 별이 다섯 개라는 의미의 ‘오성장군’(五星將軍)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김장군은 6·25전쟁 당시 북한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지켜 내는 데도 큰 공헌을 했다. 김장군은 50년 6, 7월 육군 시흥지구전투사령관·1군단장을 역임하며 한강 남쪽 일대에서 지연전을 전개, 반격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김장군은 5.16후 박정희 정권시대에 외무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대한민국 국군에서 활약한 광복군 출신 원로 중에는 저명한 독립투사의 친인척도 적지 않다. 광복군과 중국 공군 복무를 통해 독립투쟁에 헌신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제6대 공군참모총장에 임명된 김신 장군은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 선생의 둘째 아들이다. 광복군 지대장(광복군 정령)으로 활약했고 육군야전군 부사령관을 역임한 안춘생 장군은 안중근 의사의 조카다. 안장군은 전역 후 초대 독립기념관장을 맡기도 했다. 김신 장군과 안춘생 장군은 안타깝게도 최근 건강이 악화된 상태다. 제3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은 지낸 박은식 선생의 아들 박시창 장군(박유철 현 보훈처 장관 부친)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할때까지 국군에서 활약했다.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로 항일 전선에서 활약하다 광복 후 국군에 입대, 육군1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등을 역임한 유해준(兪海濬·예비역 준장) 장군도 강직한 성격과 투철한 애국심으로 지금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특히 유장군이 전역사에서 “통일의 성업을 완성할 때가 오면 계급에 상관없이 백의종군, 1군에 복귀하겠다”고 말한 것은 유명하다. 이 외에도 국군에서 육군소장급으로 전역한 장군들 중 권준 장군, 김관오 장군, 김용관 장군, 김영일 장군, 장흥 장군 등이 광복군이거나 혹은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광복군과 밀접하게 협조했던 인물들이다. 육군준장급으로는 고시복 장군, 김동수 장군, 박기성 장군, 이종국 장군, 오광선 장군, 장호강 장군, 전성호(육군준장 추서) 장군과 민용구 해군 제독도 광복군 출신이다. 광복군동지회 회장을 거쳐 현재 독립운동 유공자를 대표하는 광복회의 현 회장인 김국주씨도 광복군 지대장을 거쳐 육사 8기 특별기수로 입대, 1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고 예비역 소장으로 예편했다.6·25전쟁 당시 국군 기병대대장으로 신화적인 활약을 펼치다가 50년 7월 청송지구 전투에서 전사해 지금도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장철부 중령 등 광복군 출신 중 국군 위·영관급 장교로 활약한 인물도 200명이 넘는다. 출처-국방일보 2004년 광복군 특집
출처: 네이버카페 Military Figure Mania(M.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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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왼쪽부터 노능서-김준엽-장준하 광복군 독수리 요원들이십니다. 한번 한국군에서도의 광복군과 혹은 중국군 출신분들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더군요. 마침 구하게 되어서 올려보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아래 있는 오동기 중령의 경우 14연대 반란사건이후 반란을 진압하고도.. 악질 친일파 김창룡에게 억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윤태현 소령의 경우에는 즉결처분건 문제로 명예회복되신 걸로 압니다. 윤태현 소령 문제건은..(http://www.cbs.co.kr/Nocut/Show.asp?IDX=997295) 여기서 확인하세요.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움이 있다면.. 초기 국방경비대 시절.. 광복군 출신들이 본위를 주장하여 입대를 거부한 것이 참 역사적으로 어떻게 보면 결과론적으로나 당시관점으로나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본적인 군복무자 출신이 한명이라도 더 필요했던 상황에서의 건군 초기의 군상황에서 본위주장에 의거해서 거부당한 것이 말이죠. 더욱이 광복군같이 미군의 거의 레인저급(당시) 이상의 훈련을 받은 베터랑 수준들의 병력은 더 그렇다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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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14연대 반란사건이후의 한국군의 숙군작업과 폐해.
사진은 14연대 반란사건이후 여수에서의 진압군과 진압군에 항복하는 시민인지 반란군 협조자인지 모르는 부녀자들 입니다.
숙군.. 소위말하면 군에서 있는 숙청을 이야기합니다. 한국군에서의 숙군은 14연대의 좌익들의 여수반란사건이후 에 명령불복종및 사상문제에서의 대두가 되면서의 숙군작업이 진행됩니다. 물론 그 숙군작업에서 글에서 나타나겠지만.. 김창룡이라는 아주 미친놈이 발광을 해대서.. 지휘관 인재들 죄다 참살하는 경우로 나가게 됩니다. 암튼 관련글이니 참고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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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군의 배경>
숙군의 주요 목표는 군부내의 좌익세력들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숙군을 초래하게 된, 원인은 미군정의 오판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미군정은 한국인들이 현 정부보다는 그들 개개인이 밑고 있는 각 정당들에 대한 충성심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이유로 미군정은 한국인들이 단결하여 강력한조직을 만들기 힘들다는 이유를 들어서 군인들을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평가나 제약을 두지 않았다. 군사국 고문인 이응준이 이러한 것에 제동을 걸고, 신원조회와 조사를 통하여 군인들을 받아들이고자고 주장하였으나,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미군정에 의해 거부된다.
그 결과, 좌익군사 사설단체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대규모로 군에 입대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국군준비대 부산지대 부위원장인 오덕준이 장교로 임관할 당시에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병들이 함께 입대했으며, 국군준비대 경북지부 간부였던 하재팔이 창설요원으로 입대하자 그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가 또다시 군에 입대한 사실이다. 이밖에도 좌익반란 혐의를 띈채, 국군과 경찰로 부터 수배를 받던 수많은 사람들이 국군의 근간이 되는 국방경비대에 입대하게 된다.
이렇듯, 자신들의 입지를 마련한 이들 좌익세력들은 군부내에 점조직화하며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947년 미소공회가 결렬된 후, 미군정은 산하의 방첩대에게 명령을 하달하여, 국군내에 있는 남로당 세력들의 활동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 이유는 국방경비대내의 좌익세력들이 확장하게 되면, 좌익에 의한 혁명적 상황이 발생했을 때, 자칫 국방경비대를 동원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숙군의 전개>
1948년 11월, 제주도에 있던 제 11연대의 연대장 박진경 대령의 암살사건이 군부내 좌익세력의 숙청에 대한 시발점이 된다. 우선 전군을 상대로 하여 구체적이고 대규모적인 사상검열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부산지역에 있던 11명의 장교들이 조사끝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제 10연대에서는 총 68명이 체포되었고, 제 1연대에서는 총 89명이 체포되었다. 뿐만 아니라 제 15연대에서는 총 102명을 체포하였으며, 제 4연대 소속의 하사관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당시 이범석 국방장관은 군인들의 사상에 매우 큰 관심을 가졌으며,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 끝까지 항거하는 자세를 가진 군대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당시 군부내에서 이루어진 대규모의 숙군은 당시 출범한지 얼마되지 않은 정부의 가장 큰 과제 중 하나였기 때문에 숙군은 신속하게 전개되었다. 1948년 9월까지, 총 1,600여명의 군부내 공산주의자들과 좌익세력들이 검거되었다.
이렇듯 대규모의 숙군이 점차 확대되자 미 군사고문단은 서한을 통해, 혐의를 받은 이들에 대해서, 경찰이 아닌 군이 직접 조사, 처리하라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주한미군방첩대를 이양하기 위해서 국군방첩대의 창설을 권고한다. 이러한 이유로 1948년 9월 부터, 국군의 장교들과 사관후보생들을 상대로 1개월 간의 특무교육을 실시하였으며, 그 결과 총 40여명의 인원이 교육을 수료한 뒤, 각 부대로 돌아가 부대내에서 방첩대를 창설하게 된다.
또한 원활한 신원 조회를 위해 1948년 8월 부터, 경찰의 협조를 받아 지문 채취를 실시하였으며, 근 한달만에 전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에 대한 지문채취를 끝내게 된다.
제주도에서 있었던 제 11연대장의 암살사건이 숙군의 시발점이었다면, 1948년에 있었던 여수 10 . 19 사건은 숙군이 대규모로 확대된 전환점이었다.
당시 이범석 국방장관은 10월 22일 연설에서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선동과 반동을 일삼는 무리들에 대해서 정부는 엄격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고 밝힌다. 이어서 10월 24일 이승만 대통령도 "공사주의자들이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만큼,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11월에는 채병덕 총참모장이 "군부내의 사상이 불순한 장병은 물론, 물질적으로 좌우되는 장병과 장교들도 적발할 것이다"라고 밝히며, 곧 있을 대규모의 숙군을 천명한다.
이렇듯 정부가 군부의 숙군을 주장하던 당시, 정부와 대립하고 있던 국회도 숙군의 문제에 있어서는 한목소리를 내어 정부의 숙군에 대해서 힘을 실어주었다. 당시 국회에서는 국군이 공산주의자들과 좌익반란 혐의자들의 피난처가 되고 있다고 성토했다.
여수 10 . 19 사건에서 토벌에 회의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를 가진 자들이 대규모로 포착되고, 심지어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제 4연대의 병력들 중 반란군에 합류하는 자들이 나타나자 곧 육군 정보국 산하의 조사반이 숙군을 위한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총 1천여명이 조사를 받아 이 가운데 150여명에 달하는 남로당 인원을 적발하였다. 또한 제 1여단에서도 대규모의 숙군이 실시되어 불순분자 600여명이 검거되었으며, 그 외에도 100여명의 장교와 1천여명의 병사들이 조사를 받았다.
1949년 3월 채병덕 총참모장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건전한 사상과 우수한 장비이다. 과거 3년간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군부내의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잠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10 . 19사건을 계기로 대규모의 숙군을 실시한 결과, 반란에 참가한 이들을 제외한 총 326명의 장교와 병사 1,170명을 처벌하였으며, 이중 이재복, 이용수, 김영식, 김종석, 최남근, 오일균 등을 체포하여 그 조직이 완전하게 드러나, 숙군은 완벽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발표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지속적인 숙군은 전쟁발발 전까지 계속되었다.
<숙군의 결과와 평가>
대대적인 숙군사업은 1949년 7월에 표면적으로 종결되었다. 이 숙군 기간동안 총 4,000여명에 달하는 장교와 장병들이 처벌을 받았으며, 이들 병력은 당시 전체 군병력의 5%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숙군의 대상자 중에서 반란주모자와 적극적인 가담자, 폭력. 파괴 혐의자는 엄중한 처벌에 처해 졌으며, 소극적 가담자나 과거 좌익경력이 있는 자들은 정상을 참작하였다. 그 결과 전체 숙군 대상자의 90%는 불명예 제대하는 차원에서 일단락 되었으며, 나머지 10%는 사형과 징역형 등에 처해졌다.
공산좌익세력들은 전군에 대해서 점조직화된 세포망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과정에는 난관이 많았다. 하지만 꾸준히 계속 되어진 숙군결과 이들 군부내의 공산좌익세력들이 모습을 감추게 되었으며, 이후 벌어진 전쟁에서 국군 부대들의 성공적인 전투수행과 전쟁 과정에서 북한에 귀순한 부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숙군의 의의는 크다고 볼 수 있다.
출처: Daum 카페 THIS IS TOTAL WAR - [유틸의 한국전쟁사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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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신상철은 숙군 과정이 무리했음을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당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급히 숙군을 끝마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명백한 물증이 없었던 만큼
자백이 증거의 대부분이었다. 반대로 '누가 누가 보장하면 빼준다'는 것이 하나의 원칙처럼 돼 있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다'고 보증해 풀려난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박정희 소령이 대표적인 예).
국방부 발행의 《한국전쟁사》1에서도 "조사 방법이 증거주의가 아니고, 심문하여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문의 결과 동기생이나 또는 술친구들의 자백에 말려
끌려 들어간 무고한 장병들이 고생을 해야 하는 실례가 있었다"
"사형을 당한 사람들이 처형장 마당에서도 애국가를 부르는가 하면,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부르고 총살을 당했다"고 언급함으로써 숙군 과정에 무리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렇듯 엄청난 문제가 있었던 숙군 과정에서 김창룡이 보인 병적인 행동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김창룡은 당시 창립 준비 중인 공군을 40명이나 체포했는데 이는 당시 공군의 거의 전원을 의미했다.
이와 관련하여 박원석 중위(1965년 공군 참모총장)의 경우, 박 중위를 잘 알던 김정렬 대령이 나서
그 검거 경위를 묻게 되었다. 김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김창룡은 박 중위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없으나
앞으로 접촉할 가망성이 있는 것 같아서 우선 잡아둔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이 정도면 그는 정신과 상담치료를 받아야 하는 좌익 강박증 환자였지,
차가운 이성과 냉정함을 갖춰야할 수사관은 아니었던 것 같다.
김 창룡이 주도한 숙군이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가장 결정적인 반증은
다음해 한국전쟁 발발 시 국군의 행태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개전 당시 국군의 어처구니없는 행태 속에는 군내 일부의 교묘한 사보타지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개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주요 야전지휘관을 교체한 것도 모자라
최전선 부대의 배치마저 바꾸는 상식이하의 행동을 기획한 자가 누구인지를 이제는
밝혀내야 하지 않을까? 왜 하필 비상경계령이 개전 하루 전에 갑자기 해제되고 장병들의 외박과
휴가마저 허락되었을까? 24일의 육본 파티는 누가 계획했던 걸까?
이 형근장군등 상당수의 야전지휘관들이 의심했던 군내 제5열의 흔적이 이렇게 곳곳에서
묻어났다는 것은 군내의 숙군이 정작 잡아야 할 좌익프락치가 아니라 숙군대상자 거의 대부분이
무고했던 사람들만 잡아다 처벌했기 때문이었다.
숙군은 좌익을 색출한 것이 아니라 친일매국세력들이 자신들의 눈에 거슬렸던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솎아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당시 숙군과정에서 처형된 사람들 중에는 미군에서조차 ‘설마 그 사람이 공산주의자일까‘라고
의구심을 드러내며 아쉬워하던 인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유능한 인재들이
없어진 상황에서의 한국군이 전투에서 곤혹을 치룬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김창룡의 최대 업적인 숙군의 가장 큰 혜택을 입은 것은 역설적으로 인민군이 아니었을까?
숙군에도 불구하고 군내에는 여전히 제5열이 존재했다는 방증이 너무 여러 곳에서 보인다.
출처:네이버 밀리커리 군사카페 andie0712님의 -다시 쓰는 한국 전쟁사(40)/인물평전(3) 이승만의 수족 김 창룡-글 일부 발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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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군 과정에서 떨친 악명
그러나 군 내부에서 진행된 숙군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다. 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신상철은 숙군 과정이 무리했음을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당시 가장 중용한 것은 시급히 숙군을 끝마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명백한 물증이 없었던 만큼 자백이 증거의 대부분이었다. 반대로 "누가 누가 보장하면 빼준다"는 것이 하나의 원칙처럼 돼 있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다"고 보증해 풀려난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군대좌익 조직의 비밀 명단이 입수된 뒤에 암호를 풀어 해당자를 잡아오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동명이인으로 엉뚱한 사람이 걸려 들어오는 예도 있었다. 또 한 명을 잡으면 "아는 놈 이름을 대라"고 때려가며 조사를 했는데 급한 김에 마구 불다보니 엉뚱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한편 국방부 발행의 《한국전쟁사》1에서도 "조사 방법이 증거주의가 아니고, 신문하여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문의 결과 동기생이나 또는 술친구들의 자백에 말려 끌려 들어간 무고한 장병들이 고생을 해야 하는 실례가 있었다" "사형을 당한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는 마당에서도 애국가를 부르는가 하면,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부르고 총살을 당했다"고 언급함으로써 숙군 과정에 무리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이렇듯 문제가 있었던 숙군 과정에서 김창룡이 보인 병적인 행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김창룡은 당시 창립 준비중인 공군을 40명이나 체포했는데 이는 당시 공군의 거의 전원을 의미했다. 이와 관련하여 박원석 주위(1965년 공군 참모총장)의 경우, 박 중위를 잘 알던 김정렬(金貞烈) 대령이 나서 그 검거 경위를 묻게 되었다. 김정렬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김창룡은 박 중위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없으나 앞으로 접촉할 가망성이 있는 것 같아서 우선 잡아둔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백선엽 회고록 《실록 지리산》에 쓰여진 또 하나의 사건 또한 당시 김창룡의 다소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한번은 김창룡이 잡아들인 수백 명의 영등포 특별부대 장병들이 재판에 회부됐다 . 사건을 담당한 이운기(李雲起) 법무관은 이들의 진술서가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아 이상하다고 내게 문의해 왔다. 알아보니 김창룡이 부평을 순찰하는데 술집에서 인민군 노래가 울려 퍼져 즉각 술집을 포위해 잡아들이고 보니 특별부대 장병들이었다. 중대장인지가 무조건 한 곡씩 노래를 하라고 시켰는데 한 병사가 노래를 못한다고 극구 사양하면서 "아는 노래는 월남하기 전 이북에서 배운 노래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하라"고 해 생긴 소란이었다. 김창룡은 이들을 잡아들여 "친한 놈 이름을 대라"고 족쳤는데 그래서 수백 명이 검거됐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책임질 테니 무조건 무죄로 상신하라"고 했는데 이 일로 이운기 법무관은 김창룡으로부터 "너도 빨갱이다. 꼭 잡아넣겠다"는 위협을 받았고 나와도 몇 달간 신경전을 폈다.이 시절 무리한 조사로 인해 세간에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사건도 발생했었다. 1949년 9월 하순, 동대문 일대의 권력가인 고희두(高羲斗, 당시 47세)가 방첩대에서 고문 치사된 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으로 취조자 도진희(都晉熙)는 9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복역 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석방되었고, 방척대장인 김창룡은 전속 명령을 받았다. 당시 방첩대는 빨갱이를 조작하는 곳이라는 일반의 혹평을 받고 있었을 정도였다. 이 문제를 계기로 항의와 변명이 오가는 사이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반공은 더욱 강고(强固)해졌고, 나아가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의 이름으로 자신의 독재를 강화시켰다. 전쟁의 발발과 이를 통한 이승만 독재의 강화는 김창룡의 활동 여지를 보다 넓혔고 이에 그는 다시 한 번 물을 만난 듯했다. 그러나 그의 남용된 권력 행사는 점차 곳곳에서 적을 만들기 시작했다.
출처:디펜스코리아 hero님 -악질중의 악질 김창룡..- 글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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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볼수 있듯이 악질친일파였던 김창룡이 숙군작업을 하면서 다수 피해를 보게 만든건 독립군 출신들 특히 광복군 출신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범석 장군마저도 국방장관에서 실각하게된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그래도 숙군작업을 거쳤어도 영관급에서나 위관급에서는 다수의 광복군 출신도 볼수 있었습니다) 이 숙군의 무리한 문제로 다수의 억울한 군에 필요한 지휘관 인재들이 증거도 없이 희생당했고 미군에서조차도 이사람은 아니다 싶은 사람조차도 죽여댄 일자무식의 악질친일파 김창룡의 숙군작업덕에 한국전쟁에서 우리군의 일부 지휘관의 무능력도 한몫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혀질수 없게된 사실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숙군작업을 했어도 위 글에 있듯이 진짜 간첩을 제대로 잡지 못한 것이 바로 한국전쟁 직전인 육군본부 하달에 있어서의 모습이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김창룡의 무식함 덕에 큰 혜택을 본건 인민군이니까요.
김창용 사후에 있었던 한가지 후일담을 소개합니다. 60년대의 어느 해인가의 육사 입학 시험에 김창용의 아들이 응시를 하여 면접 시험까지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의 용모가 죽은 김창용을 너무도 빼어 닮아, 육사 교장을 포함한 면접관들이 혼비백산하였다는 이야기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비화 제1공화국에 나옵니다. 이 일화만 보아도 김창용의 무자비했던 숙군 작업에 장교들이 얼마나 공포심에 시달렸고 치를 떨었는지 엿볼수 있습니다. 김창용의 아들은 당시 육사 시험에 최종 낙방 하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의 숙군의 악행이 심각했는지를 알수 있고 지금도 군에서 기무사하면 장교들이 두려워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으로 압니다. 배우지도 못한 무식한놈이 헌병되어서 아부로 특진해서 숙군작업해서 국군을 망친 장본인입니다.
p.s 참고로 김창룡이 암살당했을때 이승만 대통령이 국장에 현재 국립묘지에 묘소되었다고합니다. 당장 끌어내야할 존재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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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청산리전투, 일본 격파한 기병총
청산리 대첩의 영웅 - 백야 김 좌진 장군 10년 뒤 1930년 공산당 박상실에게 암살 당했다
1920년 10월 29일 이른 아침.
만주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 계곡
계곡을 덮은 숲은 완연한 겨울을 예고하는 짙은 갈색을 띄고 계절을 마감하고 있었다.
이 고요함의 깊숙한 곳에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다가올 전투를 기다리는 300여명의 젊은이들이 숨어 있었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 군정서 소속 독립군들이다
몇 시간을 기다렸을까?
아침 아홉 시경,
드디어 계곡 안에 들어서는 일단의 일본군들이 보였다.
콧수염 달린 소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정찰대였다.
독립군 선봉격인 연성대장 이 범석은 아연 긴장하여 이들의
행보를 주시했다.
소좌는 길 옆의 말똥을 보자 장갑 낀 손으로 이를 만져봤다.
그 온도로서 승마자의 통과 시각을 어림짐작 할 수가 있다.
그는 다시 천천히 이범석이 잠복한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뒤를 따라 수많은 일본 병들이 줄을 이어 계곡을
들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콧수염이 이범석의 유효 사거리에 이르자 이범석은 가늠쇠를
소좌의 가슴에 얹고 조준선 정렬 유지를 했다.
소좌는 이 범석의 불과 몇 십 미터 앞에까지 다가 왔을 때
이 범석은 조용히 방아쇠를 당겼다.
“ 탕-! ”
콧수염 소좌는 비명소리 한마디 지르지 못하고 고꾸라지며 즉사했다.
그 것이 신호였다.
독립군들의 사격이 불벼락일듯 시작되었고 이어서 기관총과 박격포 공격이 이에 합세했다.
방심하고 계곡에 들어섰던 일본군은 무리로 쓰러졌다.
계곡 안은 연속적인 천둥소리로 가득했다.
기습을 당해서 혼란 속에 우왕좌왕 했던 일본군은 다시 전열을 다듬고 역습을 시도했지만 이미 늦었다.
전투가 파장을 이루자 독립군은 재빨리 진지를 이탈하여
다음 전투지로 이동했다.
이날 청산리 전투와 그날 밤의 천수평 전투 등으로 이어진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은 가노 연대장을 포함해서 무려 900명의
전사자를 내는 대 참패를 겪었다
청산리 대첩비 - 너무 높이 설치 되어 있어 올라 가기가 너무 힘들다.격전장 백운평은 이 비 왼쪽 계곡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왼쪽을 보면 많이 훼손되여있다
이 시기 일본군이 청산리에서만 대패를 한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독립군 단체인 대한 정의부 소속 홍범도 부대가 그 해 6월에
별도의 작전을 펴서 청산리에서 멀지않은 봉오동에서 야쓰가와 소좌가
지휘하는 일본군을 공격해서 140명의 전사자를 내게 했었다.
이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이 사용했던 총기는 다양하다.
38식 기병총, 모시 나강 소총, 나강 권총, 맥심 기관총--
이 글에서는 지휘관들이 사용했던 38식 기병총과 모시 나강 소총
(다음 포스팅)만 이야기 해보기로 한다.
약관 20세의 나이인 연성대장 이범석이 일본군 소좌를 향해
청산리 전역에서 첫 총성을 울린 총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저격당해
죽은 소좌의 나라인 일본에서 만든 38식 6.5mm 기병총이었다
38식 기병총, M-16과 비슷한 길이다. 무게도 M-16과 비슷하다M-16A1
38식 소총은 그 후신인 99식과 함께 오랫동안 우리 민족과
일제 통치와 함께 같이 있었기 때문에 나이 드신 분 중에 이 총을
아시는 분들은 매우 많다.
청산리에서 역사의 총성을 울린 38식 기병총의 자취를 밟아가 보자.
이 총은 일본의 고쿠라 병기창에서 만든 총으로 일본이 근대화하고
채택했던 소총 중에서 제일 오래 동안 제식 총기로 사용되었던
군국 일본의 대표 총기였다.철기 이범석장군 - 광복군 참모장 시절의 사진으로 보인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 한 후 무엇보다도 제국주의 서구와 대결하기 위한 군사력 증강에 나섰다.
메이지 유신의 국가구호가 ‘부국강병’임이 이를 증명한다.
국방의 우선순위는 각종 병기의 국산화였다.
군용총은 이의 우선순위가 안 될 수가 없었다.
여기에 역사적 배경이 있다.
도쿠가와 막부를 쓰러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세력은 전국 60여개의 번에서 일본 서쪽 끝에 위치한 사스마와 조오슈가 주동이 되고 여기에 시코쿠의 도사가 합류한 단 세개 변이었지만 이들이 도쿠가와 막부군을 이긴 내면에는 그런만한 이유가 있었다.
주동을 한 사쓰마 조오슈 두 번들은 실패로 끝난 임진왜란 뒤
도요도미가 죽자 정권을 탈취를 노리는 도쿠가와에 반대하던
도요도미가의 이시다 진영에 가담했다가 300년 동안 엄청나게
냉대를 받은 번들이었다.
게다가 일본의 중앙에서도 멀리 떨어진 변방인 일본 국토 서쪽 끝에
위치에 있던 터라 이래저래 여러 가지로 찬밥을 먹어오던 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서세 동진의 세계 조류에 따라 서양의 각국이 일본을
기웃거리기 시작하자 형편이 달라졌다.
별 볼 일이 없었던 변방이었던 두 번이 거꾸로 서구 문물이 일본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입구가 된 것이다.
이들 두 번은 일찌감치 중국을 통한 밀무역을 통해서 서구 문물을
받아 들여서 군대를 근대식으로 개혁했다.
더해서 때는 이들을 도왔다.
두 번(藩),특히 사쓰마는 임진왜란 때 납치해간 조선인 도공들이
일으킨 도예 산업이 흥성했었다.
그러나 유럽에 대한 주요 도자기 공급처는 여전히 중국이었었고
일본인 도자기는 아직 유럽에 잘 알려지지가 않았었다.
이런 판에 중국에서 홍수전이 주도하는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고
주요 경덕진이 쑥밭이 되는 바람에 그만 대유럽 도자기 공급이
힘들게 되었다.
유럽 도자기 수입업자들은 꿩 대신 닭이라도 하고 일본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도자기를 대량 공급할 능력을 가진 일본의 번은 오직 사쓰마 조오슈 두 번뿐이었다.
사쓰마 도자기 -납치 조선 도공들이 정착하여 발전 시킨 것이다
양 번에서 도자기가 정신없이 제조되어 수출되기 시작했다.
사쓰마에서는 지금 유명한 도예가 심 수관 씨 고조부의 역할이 무척 컸다고 한다.
사쓰마와 이를 따른 조오슈에 돈이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 돈으로 여러 근대식 시설도 수입해서 세웠지만
군비부터 개혁하기 시작했다.
그간 번들이 장비하고 있던 잡다한 구식 전장총등을 전부
처분하고 신식 후장총인 게베르 소총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대량으로 장비한 이들 신식 무기들이 막부 타도의 전쟁인
무진 전쟁에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고루한 병법과 정신에 잡혀 칼을 휘 두르며 처들어 오는
고루한 부대도 아직 섞여있는 막부 군들에게 퍼부어지는 신식 총기의 총탄에 마구 죽어 나갔다.
순식간에 정권을 잡고 유신을 단행한 뒤 정권을 잡은 사쓰마 조오슈
두 번은 이런 과거의 기억 때문에 근대적 화기의 국산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무엇보다도 앞서서 알고 있었다.
국산품 개인화기의 개발을 여러 가지로 도모 하던 중 무라다(村田) 중좌라는 군인이 개발한 무라다 연발총이 결국 메이지 육군의 제식화기로 등록 되었다.(이 총의 초기 형은 단발총이었다.)
무라다 11미리 유연화약 소총
구경 11미리 였던 무라다 총은 그 무렵 세계 최신의 독일제
모젤 88을 모방한 것이었다.
이 총은 한발 쏘고 다시 노리쇠를 뒤로 당겨서 탄피 방출과 장전을 같이 하는 볼트 액션 총이다.
볼트 액션총은 이차 세계 대전 때 미군이 M1 총을 내 놓을 때까지
세계 군용 총 시스템의 기본 형식이었을 뿐더러 지금도 세계 각국의
저격용 소총이나 맹수용 라이플의 거의 전부가 이형식이다
무라다 총의 개발자 무라다 중좌
견고할뿐더러 구조가 간단해서 고장이 없고 또 명중률이 자동 소총을 비롯한 타 형식의 총기를 압도한다. --------------------------------------------------
총기에 대한 규제가 세계 유래가 없었던 한국인지라 이 총의
공식적인 번역 명칭이 지금도 없다.
옛날 우리 포수들은 볼트 엑션 총을 비녀다리 총이라고 불렀었다.
볼트가 꼭 옛날 여인들의 비녀를 닮았다고 해서 나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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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군은 이 무라다 소총을 가지고 청일 전쟁에서 싸워서 이겼다.
그러나 무연화약의 시대가 열리면서 무라다 총은 구식이 되었다.
일본은 국가 차원의 새로운 총의 개발을 실감하고 병기 장교
아리사카 대좌를 책임자로 하는 개발 부서를 만들어서 이를 추진하였다.
노력 끝에 나온 총이 30년 식 아리사카 소총이다.
30년식 아리사카 소총- 노일 전쟁 때 일본이 사용했다.용산 전쟁 기념관에도 한 정이 전시되어있다.----------------------------------------------- 이 총은 남 아프리카의 보어 전쟁과 미국과 스페인의 산후안 언덕 전투에서 성가를 성능을 천하에 알린 독일 모젤 93 7 mm소총을 모방한 것이었다.축소지향의 일본은 우수한 7mm 탄을버리고 유럽의 각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탄중에서 제일 구경이 작은 6.5mm를 채택했다. 6.5mm 탄은 스웨덴 이태리 오스트리아 등이 채택하고 있었다
38식 소총의 6.5mm탄--------------------------------일본도 이들 소구경 채택국가의 예를 받아들여 자신들만의 실탄을 개발해냈다.30식 소총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힘겨운 전쟁을 해서 승리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 소총도 얼마 가지를 못해서 후배 모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모젤이 그의 결정판 모델 모젤 98을 개발해서 세계 병기계를 뒤 흔들어 놨기 때문이다.
이 모델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과 남미 그리고 중국등에서
군용총으로 채택한 월드 모델이었다.
독일은 이 총으로 세계 1차 및 2차 대전을 다 치루었다.
독일과 함께 세계 총기 산업을 이끌던 미국도 자존심을 버리고
모젤 98을 거의 복사한 스프링필드 소총을 채택했다.
모젤 98소총의 디자인의 우수함은 오늘날 윈체스터70이니
레밍턴 700이니 하는 수렵 총기의 디자인이 기본상 독일의
기본화기였었던 이 모젤 98 소총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가 있다.
돌아가는 세계 병기상황을 살펴 본 일본은 다시 개발에 착수해서
모젤 98을 변형시킨 38식 소총을 내놓았다. (1905년)
38식 아리사카 소총- 기병총은 이 소총을 짧게 단축한 형이다.-------------------------------------------------38식의 내부 구조는 모젤 38식에서 온 것이지만 총 뒷부분의 안전 장치에서 일본은 차별되게 디자인 된 구조를 가지게 되어 외견상 38식과 모젤은 다르게 보인다.
모젤이 날개 형으로 상하로 조작되는 안전장치를 갖추었다면 38식은 뒤의 큰 볼트 머리 같은 버턴을 좌우로 돌려서 조작하는 안전장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구조의 기본은 모젤 98과 동일하다.
이 38식이나 그 후신인 99식은 동시대의 서방 선진국 소총과 비교해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 뛰어난 명중률을 가지고 있다.
더해서 일제 38식이나 99 식은 철이 단단하기로 명성이 높다.
전쟁이 끝나고 미군 병기부서에서 2차 세계 대전 때 사용되었던 일제, 영제, 소제,이태리제, 미제등의 소총을 모아서 소위 영어로 TORTURE TEST, 다시 말하면 고문 테스트라 부르는 총기 폭파 파괴 실험을 해보았다.
총신을 막고 탄약에 한도를 넘는 강력한 화약을 장약하여 발사하는 실험이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른 총들은 총신이 두 동강 나거나 기관부가 파괴되거나 볼트가 튕겨져 나왔는데 99식 소총만은 끄덕 없더라는 것이다.
러시아 나강 피스톨 7.65mm- 이범석 장군이 다음날 새벽천수평의 적 기병중대를 급습했을 때 휘드른 권총이다.--------------------------------------------------------99식의 총신을 청소하고 보통 탄을 발사하니까 전혀 이상 없이 발사가 되어서 시험자들을 놀라게 했다.
더구나 이 99식 총은 전쟁 말기에 좀 허접스럽게 만들어진 소총인데도 그런 놀라운 강인성을 발휘했었다.
내심 일제 총을 낮게 평가하던 미 병기 전문가들은 이후로 일제 총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다.
38식의 총신은 아직도 유연 화약 시절의 유산인 29인치나 되는 긴 것이었다. (한국 M16소총이 20인치)
그 긴 총신의 덕분에 키 작은 일본 병사가 들고 있으면
마치 난쟁이가 바지랑대를 들고 있는 듯해서 반일 사상에
편승한 서구의 풍자 만화에 자주 등장 하곤 했었다.
그러나 이 긴 총은 일본군 보병 전술 교리의 기본 바탕이고 또 일본 병사의 주특기인 총검돌격에 아주 알맞다.
이 덕분에 일본군은 어느 군대보다도 격심한 총검술 훈련을 받았고 전투에서는 적의 화력을 무시하고 긴 38식의 소총을 전국시대의 창처럼 사용하는 총검 돌격을 해야 하는 돌격 명령도 수시로 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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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검돌격이라는 이 전술은 일본군의 기본 전술로서 한국 전쟁 중 일본군 대좌 출신 김석원 장군이 자주 쓰던 공격 방법으로 포항에서 그가 지휘하던 수도 사단의 학도병들이 다수 전사했다. 이 큰 피해가 그를 인책 사임하게 했었다. ----------------------------------------------------
그러나 월남전에서도 한국군에 의해서 가끔 사용 되어 한국군의 용명(勇名)을 세계에 알렸지만 내부적인 논란도 많았었다.
용감하기는 하지만 자동화기의 시대에는 맞지않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38식은 한 민족과 긴 인연을 맺는다.
38식은 한일 합방이 됐을 때 의병들의 진압에 사용된다.
합방과 군대 해산령이 내려지자 시위대 대장 조성환 참령은 자결을 하고 이에 분개한 병사들이 거리를 뛰쳐나와 일본군들을 공격한다.
이 때도 시위대 진압에 38식이 사용된다.
그 뿐이 아니다.
조금은 안 맞지만 평화 시에도 어떤 일화가 있다.
38식은 식민지 조선의 경찰에게도 지급되었다.
1920년 경주에서 호랑이가 느닷없이 출현하여 경찰들일 총 동원되어 수색에 나서 어느 대밭에서 호랑이를 발견하고 난사를 햐여 이 호랑이를 죽인다.
이 호랑이는 남한의 마지막 호랑이었다.
한국의 마지막 호랑이를 죽인 것이 38식 이었던 것이었다.
--------------------------------------------이 점 논란의 여지가 있다. 지금은 월출산 호랑이가한국의 최후 호랑이로 이야기 되고 있다.----------------------------------------------
그리고 만주사변에 이어서 중일 전쟁에서도 38식은 동원된다.
중일 전쟁이 격화되면서 일본군은 조선의 남자 고등 보통학교에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지원병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인들을 전장으로 대량 끌고 갔다.
덕분에 학교나 징집된 군대에서 38식을 사용해본 조선인들이 다수 있어서 이 총을 잘 알고 있는 나이 드신 어른들이 아직도 생존해 계신다.
99식 볼트부분 --------------------------------일본군은 중일 전쟁에 돌입해 들어가자 38식 총에서 문제점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전선에서 소모하는 개인 화기의 수요와 소모가 너무 많아졌다.
일본은 이에 대비해서 일본에 있는 고쿠라 조병창에 이어 한국의 부평과 만주의 목단강에 조병창을 더 열었지만 그래도 38식 소총자체에 좀 더 값도 싸고 대량 생산이 가능한 디자인의 변경이 필요했다.
전선에서 독일제 모젤 98을 사용하는 장개석 군대에 대항하는 병사들로부터 38식의 구경 6.5밀리 살상력이 모젤 98의 8밀리탄[ 정확히 7.92밀리 탄] 에 비해서 뒤진다는 지적이 올라왔다.
여기에 더해서 기관총 사격시 6.5밀리 탄의 예광탄이 소이제가 소량이라서 예광의 길이가 생각보다는 짧다는 불평과 함께 구경도키우고 구경도 크게 확장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총신의 길이도 줄여야했다.
미국 독일 영국 그리고 러시아가 일차세계 대전의 소총들의 총신을 줄인 짧은 총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 들 소총들은 38식보다 한 뼘이나 짧은 모델들이었다.
이런저런 모든 사항을 종합하여 38식을 개량해서 탄생 한 것이99식이다. [일본의 기원 2599년- 서기 1939년] 에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총은 우선 생산의 간략화를 위해서 방아쇠 울을 철판을 구부려 만드는등의 방법을 취했고 구경을 7.7밀리로 키웠다.
99식 소총의 7.7mm 탄 ----------------------------------총신도 짧게 해서 24인치 수준[미군의 M1총신길이와 비슷]으로 줄였다.
그러나 이총은 여전히 성능에서 38식의 성능을 그대로 이어 받았고
개량 된 점도 있었지만 싸구려의 냄새가 나서 일본 병사들로부터
별로 좋은 사랑을 받지를 않았다.
99식 소총과 대검 총신이 과거 M1총 수준으로 짧아지고 구경이 커졌다.-----------------------------------------------두 총을 다 쏴 본 일본군 복무자 분의 이야기를 들어본즉 38식이 월등히 명중률이 좋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6,5탄이 반동이적고 또 총신이 38식이 가늠자와 가늠쇠가 길이가 길어서 정확한 조준이 가능했었기 때문이지 성능과는 무관 한 것이었다.
99식은 역사의 현장에 끌려 들어가 미군을 적으로 힘겨운 전투를
거듭하다가 멸망하는 일본군과 그 국가적 소명을 다했다.
밀림 전투에서 이 총은 미군을 저격하는데 공헌을 세워 미군에게
미움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99식은 그 존재가 아예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항복한 일본군으로부터 압수한 99식 총이 무기가 부족한 모택동 군에 의해서 대량 사용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인민공사에 지급되어 80년대까지도 훈련에 동원되었었다.
해방 한국도 건군을 이 99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시작했다.
진주한 미군은 일본군이 두고 간 99식의 구경이 자기들의 제식탄인
30-06탄[-7.62밀리]과 비슷함을 발견하고 이 폐기해야 할 일본군의 소총을 활용 할 방법을 찾았다.
즉 부산의 조병창에서 99식의 7.7 미리탄을 미군의 7.62밀리 탄을
발사할 수 있게 개조한 것이었다.
개조된 99식은 미군에 의해서 M1이나 카빈같은 미국제 무기가 전적으로 공급되면서 다시 퇴출되었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공산세력의 손에 들어가 활용 되었다.
제주도의 4.3폭동 때 일본군이 바다에 버리고 간 99식을 인양한 반도측이 대거 이 총을 사용하였다.
우리에게 유명한 남부군의 저자 이 태 씨의 수기에도 보면 무기 손질이 힘들었던 지리산 빨치산 시절에 그는 구조가 간단해서 고장이 잘 안 나는 이 99식 소총을 애용했다는 회상을 적기도 했다.
이날 청산리 전투에서 첫 탄을 발사한 38식 기병총은 총의 길이만 빼고 나머지는 위에서 소개한 38식과 거의 꼭 같다.
기병총[귀에 익은 카빈이란 기병총을 뜻하는 말이다.]은 원래
19세기부터 발전해온 개념이다
격전지 청산리 전장------------------------------말을 타고 때로는 한 손으로 말을 조종하며 한 손으로 무기를 사용하며 돌격도 하고 사격도 해야 하며 승마와 하마를 되풀이해야 하는 기병들에게 보병들의 소총은 아무래도 불편한 점이 많았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총신을 짧게 자른 기병총이 출현했다.
일본군은 서양의 군사제도를 받아드리면서도 기병에 대해서는
별다른 무게를 두지를 않았었다.
그래서 국가 총력전인 러일전쟁 때도 기병은 단지 두 개 여단만을
보유했었지만 그 때의 기다란 보병 소총 30식 소총을 그대로 썼을 뿐이지 기병총의 개발이나 보급은 생각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기병들은 본연의 임무인 정찰과 수색뿐만 아니라 정규 전투에서도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기병대가 확장되었음은 물론 서구와 같이 38식 기병총이 만들어져
지급되기도 하였다.
38식 기병총은 38식 보병총의 총신 길이가
29인치인데 비해 20 인치로 짧아 휴대가 간편하다.
일본은 38식에서 한발 더 나아가 44식 기병총을 만들어냈는데 이것은 38식 기병총에 대검을 부착해서 승마 중에도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44식 기병총 -길이가 38식 기병총과 같고 대검이 붙어있다.---------------------------------------------하지만 기병총의 생명인 간편성을 크게 희생한 것이라 별로 인기가
없었고 생산도 많이 되지를 않았었다.
그때 독립군은 러시아제 소총과 기관총을 사용했었는데 이범석 장군이 이 소총을 어디서 났는지는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이 범석 장군은 체코제 모젤 98소총과 함께 다시 소개하겠다.)
사실 38식 기병총은 이 범석 장군보다도 몇 달 빨랐던 봉오동 전투로
유명한 홍 범도 장군의 무기로 더 유명하다.
홍 장군은 전직 포수답게 장총을 좋아해서 총 대장이면서도
병사들처럼 긴 소총을 메고 다녔다.
그는 소총이라야 실전에서 적을 죽일 수 있지 권총은 실전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말도 남겼었다.
그러나 그가 애용한 소총의 정체를 찾아내기가 힘이 들었었다.
그의 부하들이 썼던 긴 러시아제 모신 나강 소총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분에 관한 책이라면 책은 다 섭렵했지만 이 범석 장군처럼
자기가 사용한 총의 종류를 뚜렷이 기록한 것이 없었다.
그러다 추리의 단서를 줄만한 유일한 기록을 발견했는데
그의 소총이 봉오동 전투 한참 전에 함경도 후치령에서 수송대를호위 하던 세 명의 일본 기병들을 처치하고 노획한 것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일본 기병들이 소지했다면 가능성 있는 군용총은 두 가지다
그 것은 38식이나 44식 기병총이다.
나는 이 점으로 고민했는데 더 알아보니 그가 후치령에서일본군을 기습했다는 해가 1907년이었다.일본 연호로 따지면 메이지 40년이다.그러니까 44식이 나오기 전이다.
그의 총기 역시 38식 기병총이었던 것이다.더구나 44식은 거추장스러운 긴 대검이 부착되어 있어서
소지하기가 불편하니까 38식 소총의 가능성을 더 높여 준다고 하겠다
한카호 인근에서 은퇴 생활을 할 때의 홍범도 장군크질오르다에 있는 그의 동상 차고 있는 권총은 러시아제 나강 권총------------------------------------------------홍범도 장군은 이 봉오동 전투에서 사용했던 38식 소총은
나중에 그가 러시아로 대피해서 한카 호수에서 사냥을 하며
유유자적 은퇴 생활할 때도 사용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이 총을 사랑하여 30년이 넘게 그의 말년에까지 소지했었다.
그러다가 극동 동포들이 다 쫓겨간 크질오르다에서 이 총을 소련 당국에 압수당했다.
그 때 그 긴 시간을 사랑했었던 총과 헤어져야 하는 비통함을
홍장군이 토로했던 사연이 생각난다.
독립지사들이 원수로 생각했던 일본의 소총이 한국 독립 운동사의 중요한 대목에서 등장하는 것은 이색적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자료제공 : 야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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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한국전 초기 남한이 대패한 이유?
한국전쟁 당시 개전 사흘만에 서울을 내준 것을 두고 흔히 기습남침이었기 때문이었다고들 한다. 우리는 한 대도 보유하지 못한 탱크를 북한군이 무려 수백 대나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그러나 정작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역시나 기습남침에 의해 전투가 벌어진 동부전선을 보면 역시 독립전차연대의 지원을 받으며 2, 7, 15사단의 세 개 사단이 기습적으로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지만, 정작 북한군 7사단이 6사단 7연대가 지키고 있던 춘천에 진입한 것은 개전 이틀뒤인 6월 27일이었고, 홍천에서도 역시 6사단 2연대가 6월 30일까지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함으로써 1사단과 8사단이 각각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전선을 구축하기까지 시간을 벌어주었었다. 이로써 국군의 주력을 한강 이북에서 포위 섬멸하겠다던 최초의 계획이 결정적으로 틀어지니, 김일성 자신이 바로 이곳에서의 작전실패가 전쟁의 결과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음을 인정했을 정도였다.같은 기습남침이고, 같은 전차의 지원을 받는, 같은 화력과 병력에서 우세한 적을 맞아 싸운 전투였다. 그러나 서부전선은 한 순간에 뚫려 버렸고, 동부전선에서는 오히려 서부전선의 붕괴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후퇴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큰 차이를 불러온 것일까?가장 결정적인 것은 역시 개전 몇 달 전부터 전방으로부터 계속해서 보고되고 있던 개전쟁후에 대한 대처였다. 당시 6사단장은 김종오 소장이었는데, 역전의 노장이기도 했던 김종오 소장은 이러한 보고들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당시 국군은 군량미의 부족을 이유로 병사들의 외출외박을 적극 권장하고 있었는데, 그런 이유로 서부전선에서는 상당수 장병들이 외출과 외박을 나가 있던 6월 23일, 예하 지휘관들에게 "상황이 긴박하다. 모두 복귀하여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라!"고 명령하여 개전 5시간 전 병력을 모두 부대로 복귀시켜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실 이게 가장 컸다. 당시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대해 완편된 부대를 가지고 조직적인 방어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이들 6사단이 전부였으니.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미리 병력을 복귀시켜 전쟁발발을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서울이 함락당하기까지 사흘이면 외출외박을 나가 있던 병력을 복귀시키고, 부대를 정비하여 방어전을 펼치기에 빠듯하지만 충분한 시간이다. 더구나 서울로 이어지는 통로라 이쪽에는 1사단과 7사단이 주둔하여 서울을 방어하고 있었고, 서울에는 다시 수도경비사령부가 있었으며, 후방으로는 대전의 2사단, 광주의 5사단, 대구의 3사단이 유사시 서울을 지키기 위해 예비대로서 투입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히려 전력만 놓고 보자면 동부전선보다도 훨씬 유리한 조건에 놓여 있던 곳이 바로 개성, 의정부, 서울로 이어지는 서부전선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당시 서울 북쪽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한 마디로 뻘짓들 하고 있었다. 다른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뻘짓. 비슷한 말로 삽질이랄까?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당시 6월 25일에서 6월 28일 사이 서울 북쪽에서 일어나고 있었다.임진교 폭파 실패하든가, 외출외박을 나간 병력의 미복귀로 인한 전력의 열세에 따른 후퇴 같은 것은 사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다. 전력에서도 우세했고, 더구나 북한군의 주력은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소속되어 국공내전을 치른 바 있던 역전의 정예들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6월 25일 새벽 6사단 7연대장이던 임부택 중령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투덜거리며 잠에서 깬 채병덕은, 의정부에 있던 7사단 사령부에 도착하여 북한군의 전면남침을 확인하자마자 수경사 예하로 배속되어 있던 5연대와 18연대, 여기에 육본의 배속명령을 받고 서울로 올라와 있던 2사단 5연대를 7사단에 배속시켜버린다. 얼핏 가용한 전력을 집중하여 방어전을 펼치고자 하는 꽤나 합리적인 명령으로 보일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당황한 마음에, 하여튼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7사단에 몰아주어 상황을 모면하고자 했던 - 말 그대로 묻지마 명령에 불과했다.그것은 당시 전쟁발발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와 있던 이형근 2사단장을 만나고서도 바로 드러나는데, 그 자리에서 채병덕이 내린 명령이 2사단으로 하여금 의정부로 향하게 해, 거기서 반격작전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광주와 대구의 각 5사단과 3사단에도 출동명령을 내리고 있었는데, 한 마디로 되는대로 가용한 병력을 불러들여 전선으로 밀어넣는 -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축차투입의 명령이었다.군을 주둔지에서 이동시키고 작전에 투입하는 데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특히 원래 주둔하던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생소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조건과 제반환경, 그리고 전장상황등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와 더불어 구체적이고 상세한 작전계획이 뒤따라야 한다. 다른 부대가 더 있으면 이들과의 유기적인 작전을 위한 계획 역시 필수적이고. 특히 우세한 적의 기습적인 선제공격에 대해 방어전을 펼칠 것이라면 더욱 병력을 집결시켜 전력상의 격차를 최소화시키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작전계획과 실행을 통해 전술적, 전략적 상황을 최대한 유리하게 이끌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채병덕의 저러한 명령은 그러한 군사상의 상식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그냥 알아서 이동한 다음 알아서 투입되어서 알아서 막으라는, 묻지마 방어작전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미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고 있는 바다.당연히 이형근 준장은 그러한 채병덕 참모총장의 명령에 반대했다. 이형근만이 아니라 김석원, 이범석, 김홍일 같은 군의 숙장들도 대부분 채병덕의 명령이 축차투입을 명령하는 잘못된 것임을 들어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채병덕은 그러한 자신의 명령에 반대하는 제장들에게 "대통령의 명령"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뽑아들었다.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명령을 들어 권위로서 압박하여 강제로 따르도록 한 것이다. 어리고 경험없는 놈일수록 뒷배만 믿고 설친다더니 채병덕이 딱 그 꼬라지였던 것이다. 결국 군법재판까지 나오고, 계급이 깡패라고 계급에서까지 밀리면서 이형근 준장은 의정부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서 유재흥이 당시 7사단 3연대장으로 있던 이형근 준장의 동생 이상근 중령을 들먹이며 재차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그토록 반대했던 축차투입에 자신의 2사단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처음에는 좋았다. 7사단이 동두천을 점령하기까지 북한군의 움직임은 상당히 소극적이었고, 그래서 단 몇 시간만에 동두천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을 때에는 "국군의 총반격으로 북한군이 물러가고 있다.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것이다."라며 기세등등 언론을 통해 큰소리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완편된 전력도 아닌 2사단이 포천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지리멸렬 패주하면서, 퇴각하는 2사단의 꼬리를 물고 의정부로 진입한 북한군에게 그만 오히려 의정부를 점령당하고 만다. 7사단의 주력이 동두천에 남아 있는 상황에 그 퇴로랄 수 있는 의정부가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다. 그 뒤는 그야말로 지리멸렬, 의정부를 뚫고 창동으로 탈출한 이외의 나머지는 삼송리로 퇴각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국군 7사단은 사실상 해체되어 버린다. 참고로 당시 7사단장 유재흥은 2군단과 3군단도 역시 해체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는데, 그 공을 인정받아 국방장관에까지 오르고 있기도 하다. 물론 저 두 개 군단은 국군 군단이다.아무튼 이렇게 어이없이 의정부가 함락당하자 채병덕은 그때 막 청주에서 올라온 2사단 25연대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의정부 탈환을 명령한다. 축차투입의 결과 의정부까지 잃고 두 개 사단이 사실상 와해되었음에도 또다시 한 개 연대로서 축차투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두 개 사단으로도 불가능했던 일이 한 개 연대로 가능할 리 없어, 이미 연이은 패전으로 공황상태에 있던 이들 병력은 그대로 패주하여 미아리까지 후퇴했다가 미아리마저 잃으면서 서울을 완전히 적들에 내주게 된다.물론 그럴 수도 있겠다. 축차투입이 문제가 아니라 당시 서울을 점령하자고 투입한 북한의 주력이 너무 강했기에 그런 것이라고. 축차투입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불시에 기습남침을 한 데다, 전차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실제 그런 식으로 채병덕을 옹호하는 사람도 있는데, 당시 미아리가 무너진 뒤에도 김홍일 소장을 중심으로 패주한 1, 2, 7사단, 수도사단의 병력을 규합하여 7월 3일까지 서울방어선을 유지했던 시흥전투지구사령부 앞에서 그러한 주장은 전혀의미가 없다. 이미 사기가 꺾이고 기세가 몰린 상황에서 패잔병을 이끌고도 그만큼 전선을 유지하며 유엔군이 개입할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면, 그 전에 아직 병력과 전력이 건재할 때 그들을 집결하여 더욱 효과적으로 더 오래 방어전을 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한강대교를 폭파할 일도 없었을지 모르고, 북한군과 남한군이 번갈아 점령하면서 그 점령지에서 끔찍한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잘만 풀렸다면 바로 서울에서 북진하여 통일을 이루었을 수도 있고. 최소한 춘천 - 홍천지구에서 6사단이 보였던 만큼만 선전을 보였어도 한국전쟁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그러지 못한 것은, 당시 군을 움직이는 명령권자, 채병덕의 무능 때문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이제 서른 갓 넘은 애송이를 오로지 자기에게 듣기 좋은 말 잘 한다고 국방장관이라는 중요한 자리에 앉힌 이승만의 노망이었다. 그래놓고는 고작 한다는 소리가 기습남침이고 탱크가 없어서 졌다? 그러면 김홍일은 뭐고, 김종오는 뭔가? 임부택 중령의 6사단 7연대는 또 뭐고? 당시 기습선제공격을 받고 있던 국군의 입장에서, 더구나 전력의 열세가 확실하던 상황에서, 국군의 최우선목표는 적을 격퇴하는 것이 아니라 반격을 위한 준비가 갖추어질 때까지 전선을 유지하고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어차피 당장 이기기 힘들다면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여 적당한 곳을 골라 전선을 형성하고 후방의 병력이 증원되고, 외교적인 노력으로 다른 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이끌어낼 때까지, 그럼으로써 적과의 전력적인 격차를 최소화하고 초반 기습공격으로 인한 충격이 상쇄될 때까지 버티면서 시간을 버는 것이 당시 국군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설사 그 전선이 적에게 돌파된다 할지라도 적에게 막대한 시간적 물적 피해를 강요함으로써 장차 전황을 국군에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었다. 춘천 - 홍천지구 전투가 바로 그 예가 될 것이다. 공격받는 입장에서는 적을 무찌르지 못해도 적의 진격을 지연시켜 작전계획 자체를 틀어놓는 것만으로도 전략적인 승리가 될 수 있을 테니까.그러나 당시 국군의 수뇌부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현실성 없는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같은 구호나 외칠 줄 알았지 당시 최전선에서 병사들이 느끼고 있던 당황과 공황과 그리고 전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무력하게 패주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오로지 적을 격퇴해야 한다는 유아적인 사고만으로 병력을 축차투입하여 나중에는 방어전을 수행할 병력마저 없어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도주하는 지경에 놓이고 말았다. 분명 이것은 국군의 전략적 실패였다. 나아가 군 수뇌부, 국가 수뇌부의 전략적 실패이자 무능이고 무책임이었다.역사상 하나의 전쟁이 어떠한 한 가지 무기에 의해 결정된 바는 없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는 미국조차 한동안 일본을 상대로 수세에 몰려야 했을 정도이지만, 그렇더라도 이미 전부터 수차례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결국은 지휘부의 무능이다. 무책임이다. T-34가 아니다. 권력에 아부할 줄이나 알았던 정치군인과 보급품 빼돌리는데나 열심이던 부패한 관료들이 저러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저들이야 말로 T-34나 야크전투기보다 더 위협적인 적이었다고나 할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소중한 목숨들이 그들으 무능과 무기력으로 인해 의미없이 죽어가야 했던가.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나서 더욱 출세하여 높은 자리에 올랐던 자들이 바로 그런 주제들이었기에 여전히 T-34가 무섭고 기습남침이 비겁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야 할 테니까. 그래야 자신들이 한 짓거리들이 지워질 테니까. 그래서 6월이면 슬프면서도 우습다. 과연 지금은 얼마나 다를까? 설마 아니기를 바라면서도...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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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고구려의 특수전부대
한단고기자료도 있습니다만.. 고구려에도 신라의 화랑도같은 무예수련집단이 있습니다.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조의선인이라고 나오고 위 글에서도 조의선인이라고 나옵니다만.. 아직 고구려와 백제의 무예수련집단의 명칭은 사료에 명칭이 나오지 않은관계임을 분명하게 말합니다.암튼 제가 갖고 있던 자료중 하나이니 도움이 되시길..조의선인(早衣仙人)이란 '검은 빛깔의 조복(早<검은 비단 조, 검을 조, 사실은 白밑에 十또는 七임>服) 을 입은 선인'이란 뜻으로 선배 또는 선비라 불렀다. 선배는 고구려의 10월 제사에 모인 군중 앞에서 무예를 선보인 데서 비롯되었고 선인(先人 또는 仙人)은 선배의 이두(吏讀)식 표기이다. 사냥과 가무, 무예 등의 여러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을 선배라 불렀고 이들은 국가에서 급료를 받아 생활하면서 무예와 학문을 갈고 닦았다. 전시에는 이들이 자체부대를 조직하고 전장에 나가 정예군으로 활동했다. 선배는 머리를 박박 깍고 검은 옷을 입었으므로 전형적인 무사를 연상시킨다. 선배는 화랑보다도 훨씬 오래되었다. 화랑은 원화(源花)라는 여성에서 비롯되어 나중에 좋은 가문의 청년 중에 덕행 있는 자를 곱게 치장하여 화랑으로 만든 것에서 보듯이 외모와 몸치장을 중시하여 여성적인 반면 선배는 매우 남성적이다. 선배의 독특한 외양 때문에 고구려와 전쟁을 하였던 수, 당의 병사들은 이들을 승군(僧軍)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구려를 숭상(崇尙)한 고려의 최영 장군조차 '당이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하나 고구려는 승군(僧軍) 3만을 내어 이를 대파하였다.' 라고 선배를 찬양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 원명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송(宋)나라 휘종(徽宗)이 고려에 국신사(國信使)를 보낼 때 수행한 서긍(徐兢)이 송도에서 보고들은 것을 그림을 곁들여서 기록한 책>에 나오는 재가화상(在家和尙)은 선배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조의선인의 눈부신 활약이 기록으로 보이는 것이 안시성 전투였다. 당태종의 당군(唐軍)은 요동의 여러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많은 공성기구(攻城機具)를 사용해 안시성을 맹렬히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그래서 당태종은 60일 동안 50만을 동원하여 성을 내려다보고 공격하기 위해 성의 동남쪽에 높은 토산을 쌓게 했는데 토산이 무너져 안시성 성벽을 치는 바람에 성벽 일부가 붕괴되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이때 고구려군 결사대가 일제히 돌격하여 당군을 물리치고 토산을 점령해 버리고 주변을 깎아 나무를 쌓아 불을 놓고 지키니 얼씬도 못했다고 한다. 기록은 이 장면을 '이때 성안에서 검은 옷을 입은 백 명의 용사가 뛰어나와 천장의 거미줄을 걷어내듯 당나라 2만 기병을 산 아래로 팽개치고는 오히려 토산을 차지해 버렸다' 라고 적고 있다. 이 검은 옷의 용사(勇士)들을 조의선인이라 부른다. 당시 고구려의 조의선인은 3만여 명에 달했고, 그 수장은 연개소문이었다고 한다.. 조의선인은 선비제도라는 특별한 교육체계에 의해 양성되는 문무겸전의 인재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유년의 어린 나이에 선발되어 신체발달에 부응하는 매우 정교한 지적, 정서적, 신체적 훈련과 교양을 통하여 보다 완벽한 심신의 능력을 갖게 된다. 조의선인은 누구보다도 사물과 현상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들이 부딪치는 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며, 이를 해결할 심리적, 물질적 능력을 갖도록 조련된다. 을파소나 명림답부, 을지문덕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도 모두 조의선인들이었고, 우리 문화전통에서 말하는 선비란 바로 이들이 가지고 있는 덕성과 실천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구려 제22대 안장왕(安臧王)때의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던 을밀선인(乙密仙人) 문하에는 조의선도 3,000명이 다물방지가(多勿邦之歌)를 부르며 심신을 수련했다고 한다. (다물:"되물린다"라는 뜻으로 단군조선시대의 태평성국으로 복고하겠다는 의지를 뜻함)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혹은 천지화랑제도가 고구려에 와서는 조의선인 제도로, 백제에서는 무절(武節-일본의 사무라이(武士)로 이어짐)로 발전했으며, 신라에서는 화랑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신라의 화랑제도가 시작되기 2,500여 년 전인 단군조선 시대에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며 심신을 단련하던 미혼의 자제들을 국자랑(國子郞) 이라 했으며(11대 단군인 도해단제 재위 57년 -단기 3891년, 서기 전 1891년), 그들이 출행할 때에는 머리에 천지화(天指花: 무궁화)를 꽂았기 때문에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도 했다한다..(13대 홀달단제 20년- 단기 3763년, 서기 전 1763년). 조선상고사에서 단재 신채호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구려의 강성은 선배제도의 창설로 비롯된 것인데 그 창설한 연대는 전사에 전해지지 아니하였으나 조의의 이름이 태조왕 본기에 처음으로 보였으니 그 창설이 태조, 차대 두 대왕 때가 됨이 옳다. '선배'는 이두자로 선인(先人), 선인(仙人)이라 쓴 것으로써 여기서의 선인(仙人)은 선배의 소리말 '선'이요 인은 '선배'의 배를 빌려 쓴 이두문이며, 백의 (帛衣), 조의(早衣)는 우두머리 <上首>의 옷과 빛깔, 예속은 무사 모의 깃 절풍(折風)에서 유래한 것이다. 학자들간의 선인(先人, 仙人)을 관직으로만 보는 견해가 있으나 발해사에 선인을 '사 정병(士正兵)'이라 하고, 삼국 사기에 '선비는 싸움에 당(當)하여 물러서지 아니한다'고 한 것을 보아도 선인이 '선배'라 부르던 무사단(武士團)에서 유래한 이름을 알 수 있다. '선배'는 원래 신수두(臣蘇塗) 교도의 보통 명칭이었는데 태조왕 때에 와서 해마다 3월과 10월 신수두《臣蘇塗: 신수두는 하느님(天帝,天神)을 모신 대신단(大神壇)이 있는 가장 신성한 숲(樹林)인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마니산 참성단이 이에 해당한다. 수두(蘇塗)는 신수두(臣蘇塗)의 대신단(大神壇) 을 본받아 각지방에 만든 신단(神壇)으로 마을마다 남아있던 당산(堂山)의 당집,신목(神木)등은 그 유물들이다.》 대제에 모든 사람을 모아 혹은 칼로 춤을 추고 혹은 활도 쏘며, 혹은 깨금질도 하고, 혹은 택권(택견)이도 하며, 혹은 강의 얼음을 깨고 물 속으로 들어가 물싸움도 하고 혹은 가무(歌舞)를 연(演)하여 아름다움과 추함<美惡>을 보며, 대수렵을 행하여 그 잡은 양<射獲>의 많고 적음을 보아 그 내기에서 승리한 사람<一者>를 ' 선배'라 칭하고 선배된 사람에게는 국가에서 녹(祿)을 주어 그 처자를 먹이어 가실(家室)에 누(累)가 없게 하였다.(온달과 평강공주에 보면 온달은 3월3일 낙랑언덕에서의 사냥대회에서 1등을 함으로써 선배로 뽑힌다.) '선배'가 된 사람은 각기 편대를 나누어 한 집에서 먹고 자며, 앉으면 고사(故事)를 외우고<講> 학예를 익히며 나가면 산수를 탐험하거나 성곽을 쌓거나 도로를 닦고 군중을 위하여 강습(講習)하거나 일신(一身)을 국가와 사회에 바쳐 모든 어려움<困苦>을 사양치 않았다.' 선배중에서 선행과 학문과 기술이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서 스승으로 섬긴다. 일반 선배들은 머리를 깎고 조백(早帛)을 허리에 두르고 그 스승은 조백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스승 중의 제일 우두머리는 '신크마리'-두대형 혹은 태대형-이라 일컫고, 그 다음은 '마리'-대형-이라 일컫고, 맨 아래는 소형이라 일컬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신크마리'가 모든 '선배'들을 모아 스스로 한 단체를 조직하여 싸움터에 나아가서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싸우다가 죽기를 작정하여 죽어서 돌아오는 사람은 인민들이 이를 개선하는 사람과 같이 영광스런 일로 보고, 패하여 물러나오면 이를 업신여기므로 '선배'들이 전장에서 가장 용감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여러 가지 지위는 거의 골품(명문)으로 얻어 미천한 사람들이 높은 지위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오직 '선배'의 단체는 귀천이 없이 학문과 기술로 자기의 지위를 획득하므로, 이 가운데서 인물이 가장 많이 나왔다. 해상잡록(海上雜錄)에서도 '명립답부(明臨答夫), 연개소문( 淵蓋蘇文)은 조의 선인 출신이다.' 라고 하였고 또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男生)이 '총명하여 9세에 선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하였으니 그 사실로도 선인(先人)이 단순한 관직명이 아니고 무사단 '선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 함경북도 재가화상(在家和尙)이라는 것이 곧 고구려의 선배의 유종(遺種)이니 고려도경에 "재가화상은 화상(和尙:중)이 아니라 형(刑:형벌)을 받고 난 사람으로 중과 같이 머리를 깎았으므로 화상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실제와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형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 것은 서긍(徐兢)이 다만 지나(支那 china:중국) 한대(漢代)의 죄인을 머리를 깎고 노(奴:노비)라 일컫는 글로 인하여 드디어 재가화상을 형벌 받은 사람이라 억지 판단을 한 것이다. 대개 고구려가 망한 뒤에 선배의 남은 무리들이 오히려 구 유풍(遺風)을 유지하여 마을에 숨어서 그 의무를 수행하여 왔는데 선배란 명칭은 유교도(儒敎徒 -글읽는 사대부를 선비라함)들에게 빼앗기고 그 머리를 깎은 까닭으로 재가화상이라는 가짜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이고 후손이 가난해서 학문을 배우지 못하여 조상의 옛 일을 갈수록 잊어 자기네의 내력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한 것이다. 송도(고려수도 개경)의 수박(手搏)이 곧 선배 경기의 하나이니, 수박이 지나(支那)에 들어가서 권법(拳法)이 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유도(柔道)가 되고 조선에서는 이조에서 무풍(武風)을 천히 여긴 이래로 그 자취가 거의 전멸하였다. 고구려의 선배제도는 조선의 선비정신으로 이어져 나라에 국난이 일어날 때마다 분연히 일어서 외적을 물리쳤다.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 권율, 김시민, 곽재우, 김덕령 등 여러 장군들과 그 외 크고 작은 의병들을 이끌고 왜병을 공격했던 의병장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평소에 학문과 무예를 부지런히 갈고 닦아 국난에 대비했던 것이다. 흔히 권율 장군은 문과에 급제했으니 문관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는 항상 병법을 연구하고 나라안의 여러 지역들을 두루 유람하며 지형과 지세를 면밀히 살폈으며 검술에도 아주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행주대첩에 앞서 1592년 남원에서 1천여 명의 전라도 의병(義兵)들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무주로 넘어가는 배고개(梨峙)에서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왜군 정예부대를 맞아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1진을 용감하게 지휘하던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이 격전 중에 적탄을 맞아 중상을 입고 쓰러져 사기가 떨어지고 1진의 전열이 무너지자 2진에 있던 권율장군이 벽력같이 호령하며 도망치던 군사들을 베면서 독전(督戰)을 계속하여 왜군을 크게 격파하고 호남을 보존하였다. 권율장군의 군영(軍營)은 군기(軍紀)가 매우 엄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투 중에는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군사들을 독려하는 한편, 제대로 싸우지 않는 비겁한 병사들은 벙거지에 칼끝으로 표시해 두었다가 전투가 소강상태에 이르면 즉시 끌어내 즉결처형을 했다 한다. 선비정신은 일제하의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말타기와 사격을 잘 했는데 뛰어난 명사수였다고 한다. 청산리대첩으로 유명한 김좌진장군은 어려서부터 병법서를 즐겨 읽고 말타기와 칼쓰기를 부지런히 익혔는데 나라가 망해가자 15세에 종들을 해방시키고 재산을 모두 나누어 준 뒤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만주에서 그를 만나본 독립운동가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동서양의 군사학에 통달해 있었다고 한다. 청산리 야간전투 때 독립군이 산정에 먼저 올라가서 양쪽으로 포위해 들어오는 일본군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한 후 일본군이 거의 올라왔을 때 살짝 빠져나감으로써 일본군들끼리 싸워 많은 사상자가 났는데 이를 두고 이범석 장군은 회고록에서 김좌진 장군의 뛰어난 전술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고구려는 망했지만 그들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나라를 구했다. 이제는 이 정신을 계승하여 국가를 발전시키고 강대국들을 누르고 또한 잃었던 옛 땅도 되찾아 다시는 중국인들의 망언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다. 더 나아가 단군 할아버지의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을 구현시켜 모든 나라들이 더불어 잘 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