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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박근혜 주방집사' 김막업씨가 전한 대통령 일상.."업무시간에도 관저"
세월호 7시간 30분 뒤 -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고 상황 발생을 보고 받은 지 7시간 30분 만에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해 보고를 받고 있는 모습.청와대 제공“박근혜 전 대통령은 철저하게 혼자 있기를 원했다. 최순실도 내실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관저에서 자고 간 적도 없다.”“머리를 올리지 않으면 외부 사람을 만나지도, 외부 활동을 하지도 않았다.”대통령에게도 최소한의 사생활은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달라야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날, 박 전 대통령이 왜 관저에서 보고를 받았는지 국민들은 궁금해했다. 이상하게 생각했다. 온갖 억측이 쏟아졌다.청와대에서 박 전 대통령의 일상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겪은 인물, 요리연구가 김막업씨가 있었다. 그를 통해 박 전 대통령이 수요일이었던 세월호 참사 당일 왜 그렇게 늦게, 관저에서 보고를 받았는지, 그리고 평소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 세상에 드러났다.주간동아는 지난 3월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세월호 보고 시각 조작 사건’ 수사기록에 있는 김막업씨 진술서를 입수해 28일 보도했다.보도에 따르면 김막업씨는 2013년 2월부터 207년 3월까지 청와대 총무비서관실 소속 계약직으로 근무했다. 월급은 300만원대였고, 휴가는 따로 없었다.김막업씨는 “원래 식사를 담당하려 했는데, 관저 내실에서 직접 조리할 형편이 안 됐기 때문에 조리한 식사를 대통령에게 올리는 일을 했다. 그 밖에 24시간 관저에 대기하면서 세탁과 방 청소, 심부름 등 시중을 들었다”고 자신의 업무에 대해 설명했다.김막업씨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관저는 내실과 별채로 나뉘었다. 내실은 박 전 대통령과 김막업씨 및 윤전추 전 행정관이 사용하고, 별채에는 경호관이 상주했다. 적막감 싸여 있는 靑 -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를 하루 앞둔 9일 청와대 관저가 적막에 싸여 있다.정연호 기자 tpgod@seoul.co.kr내실은 침실, 서재, 피트니스룸, 소식당, 한실, 파우더룸 등으로 구성됐다. 여기에 김막업씨와 윤전추 전 행정관의 거주 공간이 더해졌다. 윤전추 전 행정관은 초기에는 본관 부속비서관실에서 출퇴근했는데 점차 관저에서 자는 날이 많아졌다고 한다.대통령 침실에는 침대, 화장대, 서랍장, TV, 책상, 노트북, 인터폰 등이 비치됐다.피트니스룸에는 러닝머신 등 운동기구를 들여놓았다. 박 전 대통령은 여기서 윤전추 전 행정관 도움을 받아 매일 한 시간씩 운동했다.6인용 식탁과 TV를 갖춘 소식당에는 전자레인지, 커피메이커 등 간단한 조리기구가 비치됐다. 박 전 대통령은 이곳에서 혼자 식사하면서 TV를 봤다고 했다.한실은 청와대 무단출입 논란을 불러왔던, 또 ‘무속 신앙’ 의혹을 일으킨 단초가 됐던 ‘기 치료’를 받는 곳이었다고 한다.파우더룸은 정송원, 정매주 자매가 와서 박 전 대통령의 ‘올림머리’ 등을 해주던 곳이었다. 이 곳에서 의무실장과 주치의로부터 치료를 받기도 했다.별채에는 경호실 외에 조리실, 대식당, 접견실 등이 있었다. 회의용 탁자(8인용), 원형 식탁(6인용), TV 등이 설치됐다.이 곳이 ‘비선 실세’의 회의가 이뤄진 곳이었다. 최순실씨가 접견실에서 정호성 전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전 제2부속비서관, 이재만 전 총무비서관 등 이른바 ‘문고리 3인방’과 회의했던 곳이다.정작 ‘청와대의 주인’인 박 전 대통령은 이 회의에도 길게 참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김막업씨는 “박 전 대통령도 더러 이 회의에 참석했지만 오래 있지는 않았다”고 증언했다.오히려 최순실씨가 접견실의 주인 같았다. 김막업씨 기억에 최순실씨는 2014년부터 주말마다 관저를 방문했다. 그렇지만 “박 전 대통령이 철저하게 혼자 있기를 원했기에 최순실씨도 내실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관저에서 자고 간 적도 없었다”고 김막업씨는 전했다고 한다.박 전 대통령의 ‘혼자 있기’는 업무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막업씨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주로 침실에서 업무를 봤다. 서류가 놓인 침실 책상에서 노트북을 사용했다는 것이다.“평일에도 본관 집무실에서 근무하지 않고 관저에 머물렀다. 특별한 행사가 없는 경우 대부분 관저 침실에 있었다. 일주일에 4일은 관저에서 일을 보고, 3일은 외부 활동을 했다. 외부로 나갈 때나 본관 집무실에 갈 때는 반드시 정씨 자매를 불러 머리를 올리고 화장을 했다. 머리를 올리지 않으면 외부 사람을 만나지도, 외부 활동을 하지도 않았다. 본관에 출근하더라도 볼 일만 보고 바로 관저로 돌아왔다.”김막업씨가 전한 박 전 대통령의 일상 업무 모습이었다.김막업씨는 “대통령이 관저에 머물 때 보좌진이 내실까지 와서 보고한 적은 없다”면서 “대통령은 최순실이 와서 비서관들과 회의할 때를 빼고는 접견실에 거의 가지 않았다”고 전했다.또 “관저에서 대통령에 대한 업무 보고는 거의 없었지만, 보고할 일이 있으면 서면으로 이뤄졌다”고 기억했다.서면으로 이뤄지는 과정도 간단하지 않았다. 김막업씨는 “경호실 직원이 내게 인터폰으로 연락해 ‘보고서 갖다 올려놓으라’고 하면 내가 밀봉된 서류봉투를 들고 가서 대통령 침실 입구 팩스가 놓인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면 대통령이 나와서 들고 들어갔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 때 외에는 보고 서류가 올라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전했다.또 박 전 대통령이 평소 오후 11시쯤 취침에 들어가서 오전 5시쯤 일어났다고 김막업씨는 전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https://news.v.daum.net/v/20180729101101014 교도소에 에어컨이 없어서 그렇지 청와대나 교도소나 별 차이 없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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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상담] 이혼 - 아래글이 핸드폰으로 써서 읽기 불편하시다는 분들을 위해 다시 작성했습니다.
아래 글이 읽기 불편하시다고 하셔서 고치려 했으나, 고쳐지질 않아 다시 적습니다. 이혼 소송을 당하는 입장 입니다. 저. 47세 처. 44세 자녀 중,1.2 남아 2명 짱공엔 현명한 분 들이 계셔서...부디 한 말씀씩 부탁 드립니다.욕하셔도 됩니다. 사실 정해진거 같긴한데....혼란합니다일기나 전기는 이런데 쓰는게 아니데, 죄송하고요부디 조언 부탁드립니다 어느게 현명한지요.. 이건 수정이 가능해서 오늘 변호사 사무실 근무하시는 사무장님께 쓴 글을 올립니다. [ 내용증명 내용]1.귀하와의 이혼을 결심
본인은 귀하와 1998년 12월
경 처음 통신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귀하와 연애 및 동거 도중, 귀하와의 성격과 가치관이 맞지 않아
귀하와 헤어지자고 말씀 드리고, 헤어지려 하였지만, 귀하께서
저에게 결혼 후, 며느리 생활이며, 아내로써도 제대로 잘
하겠다고 하여, 그 말에 믿음을 갖고 결혼을 결심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혼 전 귀하의 댁에 인사 드리러 간 저에게 귀하의
부친께서 상당한 모멸감을 주셔서 파혼을 말씀 드렸으나, 기거하고 있는 여관까지 찾아오셔서 같이 살고
싶다고, 귀하의 부모님을 설득 시켜 달라고 했던 걸 기억하실 겁니다.
여하간,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아래에 기재한 내용과 같이 귀하는 결혼 생활에 있어서 저희 가족과 저에게 과도한 거리감과 육아에 너무도 무관심하므로
저는 설득과 이해를 시키며 무지 애를 썼지만, 이를 무시하여 잦은 부부싸움이 있었습니다.
저의 계속되는 설득과 이해를 무시하고, 계속되는 저희 가족과의
과도한 거리감 및 무시, 육아에 대한 유기 등이 있었지만, 한
번 맺은 가정 꼭 지키고 남 부럽지 않은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기 위해 인해하고 설득을 시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귀하는 아래 기재한 결혼 1기, 2기, 3기 초반기까지 유기에 가까운 육아와 본인 가족과 저에 대한
무시, 집안 경제에 대한 일방적 통제 및 배임 등이 극에 달 하였습니다.
결국, 저는 공황장애, 우울증, 홧병 증세를 보이기까지 하여, 결코 저질러서는 안되는 가정 폭력이라는
행위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귀하가 내용 증명으로 보낸, 사안 중 2007년 부터 2009년 경 사이에 거짓말을 자꾸하고 외출이 잦아졌다는
것은 하등의 대꾸할 가치가 없는 사안입니다.
오히려 귀하는 00 어학원 원장으로 제직 시, 외국인 강사와의
은밀한 카톡이 저에게 발각되자, 프라이버시라는 이유로 핸드폰에 잠금 장치와 보지 못 하게 하였던 것으로
기억 합니다. 또한, 과도(칼)의 사건은 제가 너무 힘들어서 도와 달라고 하였으나, 계속된
저희 가족에 대한 거리감과 방임에 가까운 육아를 참다 못하여, 차라리 이렇게 나를 피 말려 죽일 거면, 이걸로 나를 찌르라고 과도를 준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2018년 2월 9일 23시경 다툼은
아래에 기재한 내용과 같이 귀하의 무시를 참다 못해 찾아가 따지던 저에게 귀하가 한 언행에 화를 이기지 못해서 그러한 것이며, 2018년 4월 26일 23시경 발생한 가정 폭력은 변론한 가치도 없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고,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귀하의 폭력에
대한 사항은 제가 모두 잘 못하였으므로, 법원이 판결하는 데로 따르려 합니다.
하지만, 제가 큰 아이를 침대에 눞혀서 때려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제가 큰 아들과 이야기하기 전부터 큰 아들이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겁니다.
다음 날 출근을 뒤로 하고, 아이들에게 사과하기 위해서 작은
아이를 기다리던 중 귀하가 저에게 오려던 작은 아이를 귀하가 근무하는 학원으로 오라하고, 저에게 오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귀하의
학원으로 오라던 큰 아들은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 저에게 “어제는 제가 잘 못 했다. 시험을 망쳐서 맘이 너무 아픈데, 아빠가 장난을 쳐서 화가 났었다”고 용서를 빌었고, 저는 큰 아이에게 “아빠가 나빴다. 큰 아들이 나를 용서해줘..”라고 사과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믿음도 사라지고, 더 이상 귀하에게 믿음이 가지 않아, 귀하가 준비 중인 이혼 소송에
변호사를 선임하여 맞소송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2. 귀하에게 요구하는 사항
가. 귀하와 원만한 이혼이 조만간 진행 될 수 있도록, 현재 시세에 맞게
살고 있는 집을 처분하고 싶습니다.
귀하는 4억 9천에 내어 놨지만, 현재
시세는 4억 1천 정도 입니다.
나. 부모의 갈등으로 인해 죄 없는 아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협조하여 주십시오.
다. 장기 출장 중 아이에게 출장기간을 설명 할 터이니, 그 동안만이라도
아이를 보살펴 줄 것
라. 귀하가 법률 사무소 브라이트를 통하여 요청한 내용은 모두 수용 합니다.
3. 결론
조속한 이혼이 원만하게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협조 부탁 드립니다.
부첨. 만남부터 이혼 결심까지의 과정 ? 1 부
만남부터 이혼 결심까지의 과정
너무 긴 여정이므로 결혼 1,2,3기 로 나누고, 각 결혼 회기 별로 육아, 부부유착, 친가와 처가, 경제 순으로 그간 있었던 일 들을 나열 합니다.
1.만남과 연애
1998년 경 PC 통신 시절 천리안에서 만나서 연애를 하게 되었습니다.
연애 도중 처는 경기지역, 저는 부산이라 거의 만나지 못 하였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처는 캐나다에 어학 연수 차 약 10개월 가량
다녀오면서 서로 약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처가 한국에 와서 사귀는 중, 가치관이 너무 맞지 않아 고민
끝에 “마음은 아프지만, 우리는 맞지 않다. 미안하다. 헤어지자”고 하였습니다.
처는 자기가 잘 할 자신 있다고, 잘하겠다고 계속 해서 저에게
구애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나와 결혼하기 위해서 캐나다 생활도 접고, 서울 생활도 접었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끝까지 밀어내던 저는 정도 들었고, 처의 잘하겠다는 약속도 있고, 혼기가 차서 결혼을 결심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2002년 4월 7일 혼인을 하였습니다.
2.결혼 생활
2-1결혼초기.2002. ~ 2010
[신혼집]
본인 사업처에 가까운 곳인 영도에 기거를 원하였으나, 처가 해운대 신시가지에 살고 싶다 하여 장거리 출.퇴근 임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원하니 아내가 원하는 신시가지로 정하였습니다.
당시 출, 퇴근 시간이 각각
40분에서 1시간 정도가 소요되었습니다.
[신혼여행선물]
본인은 편모 슬하에 육 남매 중 막내이고, 처는 부모슬하에 오누이
입니다.
신혼여행지에서 처가 및 본가의 선물을 구입할 때 처는 시댁 식구가 많고,
처가 식구는 적으므로 형평성에 맞지 않으므로 모두 하지 말자 하였으나, 그건 도리가 아니라고
하여, 결국 옥신각신 끝에 가격에 맞춰서 본가 형제들
미화 US100에 선물 다섯 개. 처가 미화 US100에 한 개로
하기로 하여 진행 하였습니다.
[육아]
큰 아이가 생겼을 때(2003년), 출근 길 제일 먼저 장모에게 전화 해서 고맙다고 전화 드리고, 차
안에서 고마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육아는 본인이 90 프로 이상하였습니다. 세탁,
식사, 청소, 설거지, 아이들 목욕 및 돌보기가 모두 저의 몫 이였습니다.
첫 아이가 태어나 산후 조리원에서 퇴원하여 집에서 육아를 시작하는데, 제가
아이를 침대에 눕히자, 처는 아이와 같이 자는 거 아니라고, 아이를
바닥에 혼자 재우려 하였습니다. 저는 아이는 부모 심장소리 듣고 스킨쉽이 있어야 된다고 설득 하였으나, 처의
완강한 거부로 제가 혼자 애와 함께 바닥에서 잠을 청하였고, 둘째가 태어나 우유를 떼기까지 아이 둘을
데리고 약 4여년간 새벽수유를 하였습니다.
[처가 및 친가]
용돈;
처가는 부모 모두 생존해 계시고, 본가는 늙으신 모친 혼자입니다.
당시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 저는 처가와 본가에 각각 십 만원씩
용돈 드리자고 이야기 하였으나, 처는 처가는 두 분이니 “이십만원”이고 본가는 편모이니 “십만원”이
타당하다고 이야기 하기에 이건 사람 숫자가 아니라, 집안에 드리는 거라 설명하며 옥신각신하다가 그래도
장인 장모에게 가는 돈이니 집사람이 원하는 데로 진행 하였습니다.
부양;
결혼 전부터 처에게 이야기 한데로 저희가 사는 곳과 저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 머니, 두 달간만 모친을 모시자 했다가, 단칼에 거절 당하였습니다. 저는 너무 서운하여 처에게 한 달 넘게 설득했으나 요지부동인 처에 더 이상 설득할 힘이 없어 포기 하였습니다. 그 모친은 2005년 경 치매 판정을 받으시고, 현재까지 요양원에 계셔서 이제는
모시려고 해도 모실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죽기 직전까지 한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본가 가족 방문
또한, 막내 아들 장가 갔다고 신혼 집 구경 오신 본가 가족들에게
불손한 태도로 일관하여 2박 3일을 계획한 형제들은 1박만 하신 채, '처남, 다시는
너희 집 안 온다'는 말씀과 함께 각자 집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처가 여행
처남이 캐나다 밀입국하여 장모가 십 년 넘게 아들을 못 만났다 하여. 그간
모아 논 사업 자금의 일부를 사용하여 장인, 장모, 처 이모, 처와두 아이를 캐나다에 보내 드렸습니다. 당시 통신이
발달하지 않아, 여행 전 통신비를 아껴야 하니, 전화는 너무
비싸니, 문자나, 전자우편 혹은 천리안 채팅으로 연락하자고
하였으나, 잘 도착했다는 연락이 없어, 제가 먼저 전화하여
도착을 확인 하였습니다. 또한, 제가 보낸 메일에 답장이 딱 한 통만 왔습니다.
장모님의 대처
결혼 전 장모님께서 말씀 하시길 “만약, 처와
저 둘 사이의 문제가 있으면, 장인 장모가 이야기 하라” 하셨습니다. 그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집사람과 아이 육아 문제 및 살림 문제로 다툰 후 장모님에게 상의 드렸으나, 장모님
왈 "우리 딸이 뭐 잘 못 했는데, 이 따위로 이야기하냐, 너희 가정 교육이 잘 못 되었다"고 호되게 꾸지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다시는 장인, 장모님에게 이야기 저희 집안 일에 대해서는 일절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처 이모와의 동거
일본에 살고 계시던 처 이모 방한 후. 약 한 달여간 같이 저희 집에서 기숙하였습니다. 저는 처 이모이기에 별 꺼리낌 없이
잘 해드렸습니다. 처 이모는 떠나실 때, 신세 잘
지내고 간다고 고맙다고 하시면서, 용돈을 주셔서 뿌리치고, 오히려
제가 얼마 안되지만, 차비 챙겨 드려서 보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처 이모와 장모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아, 이제는 연락이 되질 않습니다.
[부부유착]
본인.
위 상황과 같이 지내다 보니, 자꾸 지침. 혼자 자취를 오래해서 결혼 전부터. 조식은 꼭 같이 함께
먹기를 약속하고, 원 하였으나, 결혼 후, 밥 아침 식사는 차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차려서 불러도 침대에서 나오질 않고, 쟁반에 아침밥을
차려서 침대에 가져다 줘도 귀찮다고 안 먹습니다.
그럼 제발 부탁이니, 나 밥 먹을 때 식탁에 앉아서 같이 얼굴 보면서 커피나 차라도 마시라고
부탁했으나 이마저 거절 당하였습니다. 그 이후, 결국 아침 저녁
모두 혼자 식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매년 봄, 가을 2차례에 걸쳐 여자는 옷 잘 입어야 된다고 용돈 모아 각 분기 백 만원 상당의 의복을 구매하게 해주었습니다.
처.
계속 사회생활 핑계로 애 들보지 않았습니다. 또한, 늦은 시각 집에 들어오지
않아, 연락을 하여도 답이 없습니다.
또한, 저의 십년지기 친구 중 몇몇을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다며, 만나지 못 하게 하였습니다.
처와 처가 집 근처 스키장에서 스키 타다가 처가 무릎 미세골절 발생 하였습니다. 입원 후 병간호 도중, 십여 년 만에 오는 친구를 만나러
잠시 나갔다고 온다고 이야기 했다가. "넌
부인보다 친구가 더 중하냐"는 핀잔을 들었습니다.
[경제]
사업 자금 이외에 제가 벌어들인 돈은 모두 처의 통장으로 송금 하였습니다.
저의 용돈은 제가 알아서 사용 하였습니다.
+ 첫번째 부부 싸움 ++++++++++++++++++++++++++++
아이가 없을 때, 사업초기에 거래처 확보를 위하여 저녁 접대가 길어 지다 보니, 처가 외로움을 호소하여 어떠한 접대자리라도 24시 이전 귀가를 약속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사업상 중요한 손님과 접대 약속이 있어 제 사정을 이야기하고, 저희 집과 가까운 곳에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시간을 보니 아내와 약속을 지킬 시간이 되어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간신히23시 57분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지만 처는 “시간 딱 맞춰서 오는 당신 같은 사람 어쩌고 저쩌고…” 바가지를 약
한 시간 정도 긁었고, 저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이러 저러한 상황 이였다. 사업상 중요 손님이다. 등등 설명하던 중 처는 내 이야기는 전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빈정거렸습니다.
하도 답답해서 설명하던 도중 책상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다가 실수로 장모가 사준 스캐너 커버가 망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처의 말이 "우리 엄마가 해줄 걸 부순다"고 더 공격적으로
저를 대하였고, "그게
아니라 답답해서 탁자를 친다는 게 실수로 스캐너를 쳤다. 의도 한 게 아니다"라고
설명과 백배 사과하여도 막무가내로 "넌 폭력적이고, 우리
집에서 해준 건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 두번째 부부 싸움 ++++++++++++++++++++++++++++++
손님과 저녁. 약속이 있어 처에게 아이(당시 1,2살로 기억)놀이방 픽업을 부탁 하였습니다. 손님과 한 참 술자리와 업무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놀이방 원장님께서 전화 하셔서 애 엄마가 연락이 안 된다고 어서 아이 데려가라 하셨습니다. 우선 처에게 전화를 해 봤으나, 연락은
되지 않아,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놀이방 이동 중 처에게 계속 전화 했으나 역시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이 픽업 후 집에 도착하여 분유를
찾았는데 집에 분유는 없었고, 놀이방 원장님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놀이방에도 역시 분유가 없었습니다. 당시 본인에게 분유 살 돈이 없어 보리차 끓여 먹이게 되었습니다.
약 새벽 한 시쯤 작은 애 포데기로
업어 재우기 시도 중 처는 술 냄새와 함께 귀가 하였습니다.
너무 심하지 않냐고 이야기 하면서 목소리
커졌고, 결국 큰 아이 깨서 나와서 울게 되었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도대체 정신이 있냐 이게 무슨 꼴이냐, 집에 분유는 없고 엄마는 연락도
안되고, 술 마시고 새벽 한시 넘어서 들어오는거 너무하지 않느냐” 하니까
처는 대꾸도 없이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궜습니다.
얼굴보고 이야기 하자로 문 열라고 소리치다가, 열지 않아서 소화기로 문 손잡이 내려쳤으나, 분말형 소화기
터지고 말았습니다. 정신 없는
와중에 분말을 치우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려 문을 열어보니, 경찰이
와있었습니다. 처는 현관문 열리자마자
바깥으로 나가서 그날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상황도 설명하지 않은 채 그렇게 부부싸움은 끝 났습니다.
아마도 이 때부터 처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거 같습니다.
+ 세번째 부부 싸움 ++++++++++++++++++++++++++
싸움의 윈인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아마도 이번에도 아이 문제였던 걸로 생각 됩니다.
부부싸움 도중에 첫 번째 싸움에 처가 했던 말이 생각 났습니다.
“우리 엄마가 해 준 것만 부순다.”
그래서, "그럼, 내가 산 건 부숴도
되지?" 하고, 내가 구매한 어항, 냉장고, 티비 다 박살 손괴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 때부터 부부싸움 시 폭력적인
성향으로 변하게 된 거 같음
2.결혼중기. 2011 ~ 2014
[육아]
본인이 여전히 70 ~ 90프로
여전 수행 하였습니다.
계속되는 사업과 육아에 지쳐 처에게 휴직을 하고 양육을 부탁 하였으나, 커리어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거절 당하였습니다.
그러면, 내가 사업 접고 애를
돌볼 테니, 당신이 돈 벌어 오라고 했으나, 처는 거절하였습니다.
특히, 처의 지인인 처의 사수
에게 사주하여 처의 휴직을 적극 말리고, 집요한 설득 끝에 사수가 경리 이사로 전직한 회사(00 어학원)에 5시 퇴근 조건으로 취업에 동의 하였으나, 9시 전, 후 퇴근은 여전 하였고,
당연히 아이들 돌보는 것과 가사는 제 몫 이였습니다.
맞벌이의 특성상 아이를 낮에 돌보는
것이 불가능 하여 아내는 아이들을 학원으로 로테이션 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아직도 늦지 않았다. 지금 이 시기(아이 나이 7~8세)에 가정의 따스함이 중요하니, 그러지 말고 육아에 전념해주면 안되겠나.”라고 부탁 하였으나, 처는 일방적으로 학원들을 등록 시킨 후 아이들이 저녁 늦게(약 7~8시) 귀가 하도록 하였습니다.
큰 아이를 유심히 관찰하던 끝에
아이의 상태가 좋지 않은 걸 눈치 채고, 큰 아이와 이야기 해 본 결과, 학원 때문에 너무 지쳐있고, 부모 사랑에 너무 굶주린 것을
알게 되어, 집사람의 만류에도 본인이 일방적으로 학원 모두 퇴원 시킨 후, 아이가 원하는 것 위주로 방과 후 수업진행 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들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고 계속 이상하고,
본인도 심리 상태가 이상해서 가족 모두 정신과 진료 받았고, 정신과 진단 결과 아이들은 ADHD증후군 초기 증상이 발견 되었고, 본인은 화병에 우울증, 처는 우울증 초기로 진단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덕망 있고, 진료를 잘 할 수 있는 병원을
선택하려 하였으나, 처는 집과 가까우니, “남들 눈이 무섭다”며 반대를 하였습니다. 저는 “현재 남의 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아이가 가장 중요하다. 남들은 우리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우선은 명망 있는 의사에게 진찰을 받자”고
설득하여, 집 근처 명망 있는 병원에서 정신분석 진료를 받았습니다.
처는 의사가 권고하는 약을 아이에게 투여하길 원하였으나, 본인은 정신과 약물은 아이에게 매우 좋지 아니하니, 우선은
처의 휴직은 권고하고, 본인도 아이에게 유대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면 더 나은 방법이라고 이야기 하고, 그래도 안 되면, 그 때 약물에 의존하자고 하였습니다.
처.
처는 정신과 진료 이후, 울면서 퇴직하고 아이를 잘 키우겠다고
약속 하였습니다.
본인.
본인은 아이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부모와의 바람직한 유착관계
형성을 위하여, 자전거 여행. 농구, 축구, 직소퍼즐, 레고, 크레시오브 클래, 크래쉬 로얄 등 매주 같이 하며 돌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시기 아이들 담임 면담은 제가 진행 하였습니다. 4학년 둘째가 담임 때문에
너무 힘들어 하던 시기. 처는 담임을 만나지 않고, “다른
언니들 이야기 들어보니, 자기 성격에 그 여자하고 말하면 폭발 할 거 같다”고 해서 제가 상담 하였습니다. 그 후, 둘째 아이 담임은
더 이상 둘째를 편향적인 시선으로 보지 않고, 학교 생활에 현재까지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 처가 및 친가 ]
처가.
왕래 업슴.
처와 장인과 사이가 좋지 않아 “그러지
마라 부모 병 나시고 돌아가시면, 다 헛 거다. 부모자식간에
그러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장인과 처의 관계가
회복되길 바라며, 이야기 하였습니다. 또한, 장모님 가끔
생활이 힘들다고 금전 요청 시 처 모르게
도와 드렸습니다. 그리고 장인이 특정한 직업 없이 브로커 생활을 하시는데,
어느 날, 좋은 땅이 나왔으니 땅을 구매하라고 하시였습니다.
처음에 경제적 사정이 넉넉하지 않거니와 땅의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했지만, 장인 장모의 집요한 설득으로 빚내어 처의 명의로
구매 하였습니다.
본가. 왕래 없슴
[ 부부유대 ]
여전히 늦은 시각까지 오지 않아 걱정되어
전화해도 반응 없었습니다.
주로 결혼 초반기 사수인 사람
만난다며, 늦기 일수였습니다.
처의 사수는 여자인데, 남편과 별거하는 사람 이였습니다. 처의 사수는 어느 날 저에게 “우진이 아빠 내가 외롭고 한데, 진이하고 나 다른 남자 만나도 이해
해줄 거죠?” 라는 질문을 저에게
하였습니다. 나는 당황도 하고, 어이가 없어 대답을 못 하였습니다. 제 맘에 들진 않지만, 처가 좋아하는 사람이라 '처형'이란 호칭과
함께 잘 대해줬던 게 착각이라 생각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하여도 아무래도 처가 이 처형이라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감정이 전이 된 걸로
생각하여, 만나지 않았음 했으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 왜 못 만나게 하냐"는 핀잔을 듣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이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다.
여전히 밖에 나가면, 연락이 되지 않아, "사람이 연락이 안되면 얼마나 걱정되는 줄 아느냐, 제발
죽었는지 살았는지 좀 알게 해달라"고 통 사정을 해도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결국 처가 하는 말은 '전화기를 핸드백에 넣어놨네, 전화기를 신경 쓰지 않았네, 주변이 시끄러워 몰랐네'가 주요 답변 입니다.
한 날 집에서 울부짖으며, "내가 어떻게 일하는지 네가
현장에 와서 보면, 나한테 이러지 못 할건데... 내가
너한테 바라는 게 큰 것도 아니고, 그냥 따스한 밥 한끼 먹고, 애들
잘 키우고 하는 건데, 너무 서운하다." 통
사정하였는데도 별 반응도 하지 않고 완전히 돌 부처처럼 사람을 내려 보더군요. 저는 이때 "집사람에게는
아예 미련을 접어야지. 아이들이나 신경 쓰자"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부부관계]
세 차례 거부 당하여 그 뒤로 없습니다.
본인 만나는 여자나, 성 매매 경험 없습니다.
성욕은 자위행위로 해결합니다.
이런 생활 도저히 견디지 못 할거 같아서 이혼서류 작성 후 처에게 내밀었다가 결국은 잘해 보자고 화해를 하였습니다.
본인.
2010년경 발생한 전세계적인 리먼 사태로 사업에 큰. 타격을
입어씁니다.
직원은 2억대 횡령 후 자살을 하였고, 거래처의 부도로 약 8억대의 금액을 손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혼란한 시기에 혼자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고, 대인 기피증까지 생겨, 처에게 너무 힘들다 괴롭다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돈 만들어
오라는 게 아니라, 나 좀 따뜻하게 대해달라 요청하였으나, 애정결핍이라고 무시 당하였습니다.
그 당시, 친하게 지내는 후배에게 아내와의 사이의 고민을 털어
놓으며, 연락 닿지 않는 부인에 대해 고민 이야기
하던 중. 후배는 “형수 생각에 형님이 형수 걱정에 시간
불문하고 연락하는 거 자체를 구속이라 생각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하지만, 같이 사는 사람인데. 그것도 아닌가? 처의 입장에서는 그도 그렇겠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처에게도 “그거 마저도 구속이라고 당신이 느끼면, 연락하지
않으마” 하고 그 뒤로는 신경 안 쓰기로 하였습니다.
본인 치질 수술 후, 병원에 입원 중 처는 병원에 단, 한 차례도 들르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꾸 피가 나와 생리대
착용법을 알려 달라 했으나 무시 하여, 엉덩이에 붙이는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친 누나에게 물어보고서야
착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생각을 하면서 나중에 혼자 킥킥거리기도 하였습니다.
처.
집에 있으니 스트레스가 심하다며, 직장 갖기를 원 하였습니다. 직장을 갖는 이유는 "집에 기여하는 것과 자기 만족"임을 이야기해주고 격려해 주고, 그래도 아이들과 가정은 돌봐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흔쾌히 처의 공부(아동 심리 자격 및 외국인을 상대로하는 국어 강사 자격증)를 도왔고, 처도 방과후 교사로 재직하게 되었습니다.
계속 전세(당시 39평)로 거주하였으나, 이제 이사가 싫다며, 집을 갖고 싶다고, 아파트를 사자고 하여 그러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처는 50평형을
원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나이나 형편으로는 너무 벅차다.”며 누차 만류 하였으나, 처의 "젊었을 때 살아보지 늙으면, 이런데 살지도 못한 다고, 우리 집 갖게 되면, 더 잘하겠다"고. 집요하게 요청하여 모기지론을 이용해서 현재 거주지를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거주지 구매 전에 저는 처에게 “이사
갈 집에 가장 작은 방으로 내 서재 겸 방이 있었으면, 그걸로 만족 한다. 단, 이사를
가면, 모기지론 할부에 돈이 많이 들어가니, 생활비 아껴서
알뜰하게 살자”고 당부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사 후 두 달도
안되어 결국 저의 조그마한 기대는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저의 공간은 안방에서 화장실 가는 사이 전실의
일부(옷장)가 되었고, 처는
새 집에 새로운 가구를 들여 놔야 한다며, 사전 협의 없이 가구를 몽땅 맞춤하여 새 걸로 바꿨습니다.
[경제]
회사 운영비 빼고, 벌이는 모두 처의 통장에 입금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도 미래에 대해서 설계를 해야 하니, 급여 통장을 보고 싶다”고 이야기 했으나, “나를 못 믿냐”는 답을. 듣고, “너 믿지만, 그래도 세세한
거 보다는 전반적인 걸 알고 싶다”고 이야기 했지만, 끝내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도표 만들어서 처가 가입한 보험 금액만 적어 달라 해도 무시 당하였습니다.
3.결혼후기. 2015 ~ 2018
[육아]
본인이 40프로 정도 진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잔소리를 하지 않으면, 여전히 냉장고는 비어 있고, 밥솥은
일주에 두 번 정도는 밥 한지72시간이 넘었다는 표시가 들어 오기 일쑤였습니다.
큰 아이 사춘기가 도래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사춘기의 에너지를 폭발 시키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이와 상담한 후에 드럼을 하도록 유도하였고,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축구부에 입단하여, 체육 선생님(김경석)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여 아이가 삐뚤어지지 않도록 지도를 부탁
드렸습니다.
큰 아이 중학교 때, 축구 선수 하고 싶다고 해서 겨울방학 내내
제가 개인 트레이닝 시킨 후, 00 FC의 입단 TEST를 통과 시켰습니다.
큰 아이 중 1학년 주말 연습 경기에 저는 거의 관람가서 응원하고
처는 3회 정도 참가하였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어 주말
리그 선수인데, 일 없으면 무조건 제가 경기장까지 가서 돌보았고, 집사람
단 한 차례도 오지 않았습니다.
중국 출장 중 한 겨울에 보일러 소리가 너무 크다며, 보일러를
다 꺼 놓았다고 하기에, 아이들 방에 전기 장판도 없으니, 안방으로
불러 같이 자라고 하였는데, “지들이 아쉬오면, 오겠지”라는 답장이 왔습니다.
[부부유착]
여전히 공허한 메아리로 늦은 시각 들어오지
않아 연락해도 반응이 없거나, 연락 후 한 시간 정도가 지나서 “어, 지금 가고 있어.”라는 식의 답이 옵니다.
결국 12시 이전까지 집에 못 온다면 서로 미리 안전만 확인하기로
연락하기로 하였습니다.
살아 있다는 거만 아는 걸로...
한 날 이렇게 나를 피 말리게 할 거 같으면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과도를 던져 줬습니다. 이건 사는 게 아니라 죽자는 건데, 그러려면 차라리 니 손에 죽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 이혼 소송 예정 내용증명을 봤는데,
이걸 내가 칼로 위협한 걸로 기재하였습니다.
[ 본인 ]
경기가 힘들지만 열심히 해서 전세지만 건물을 통째로 빌려 공장을 제대로 꾸미고 새로운 마음으로 힘차게 출발 하였습니다. 처에게 공장 옮겼으니, 같이 가주면 안되냐고, 응원해달라고 했으나, 두 달간 응답이 없어 결국, 가족에게 응원 받기 위해 외식을 핑계로 공장에 데려가 구경 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공장 견학 감상을 부탁한 저에게 처는 “공장이 좀 낡았네” 라는 답만 왔습니다.
정신과 상담.
한 날 너무 답답하고 기분이 우울하여 정신과에 진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진단 결과는 공황장애. 우울증. 화병 이였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서 처에게 이야기하고 도움요청 하였으나, 역시, 무시 당하였습니다.
또한, 한 달에 70만원
정도하는 아파트 관리비 문제로 관리사무소와 다툰 후, 관리실 통하여 자재만 구입한 후 제가 직접 수리하였습니다. 자재비가 좀 많이 나와서 처에게 현금
영수증 받아 두라고 부탁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관리 사무실에서 현금 영수증은 불가하고, 세금 계산서 발행만 가능하다고 하여 처와 협의 후 저의 회사로 세금 계산서를 끊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처는 저에게
"내가 당신 회사 여직원이야?"라고 따지더군요. 정말 이해하기 힘 들었습니다.
결국, 별거를 하는 게 어떤지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집에만 가면 죽을 거 같다고, 숨이 턱턱 막힌다고. 처는 나도 죽을 거 같으니 그러라고 하였습니다.
[ 처.]
학원을 해야겠다 하여, 좋은 생각이다 격려하고 학원이름 로고 같이 고민하고, 대출 받아서 차려주고 대출금은 다 갚았습니다.
학원에 행사 있을 때 마다(영어 학원이므로 크리스마스 데코, 할로윈 데코, 수업 교재 준비 등)
적극 도와 주었습니다.
[본가와 처가]
본가. 왕래 거의 업슴.
유일하게 모친 생신 날, 저희 가족과 형제들끼리 전라북도 진안에 모여
놀았습니다
처가. 왕래 거의 업슴
처가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던 중, 동네 크린토피아에서 옷을 찾아 오던 중 운영권을 내 놓아야겠다. 는 운영자 말에 그거 다른 사람에게 말씀 마시고, 저에게 주시라고
빨리 결정하겠다고 하고 처와 상의하여 장인 장모님 내려오셔서 저거 운영하시게 하면, 노동의 강도도 크지
않고, 양쪽 모두 편안할 거 같다고 하고 돈은 어떻게든 마련해 보자고 했으나, 장인 장모님의 의견을 존중하여 포기 하였습니다.
[ 경제.]
통장 카드 계산해보니, 2015 년 부터 집에 정식으로 가져다
준 게 세 후 연봉 개념으로 약 칠천~팔천이고, 본인이 회식이나 아이들 의복, 아이 선수 장비, 여행 경비 등등 합하면, 약 9 천
언저리 연봉으로 계산 되었습니다.
저는 처에게 이정도 연봉이면 우리는 대한 민국에서 상위 5% 이내의 삶이데, 내 생각엔 가정 경제가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제발 통장 좀 보고 같이 머리 맞대고 상의 하자고 하였으나, 처는 여전히 집안 통장 열람 거부 하였습니다.
결혼 생활 중기에 이야기한 내용 데로 빈칸 채워달라 통사정 하였으나, 여전히 무시하여 본인이 보험 약관 통 다 뒤져서 보험사 알아내고 보험사 전화해서 도표를 완성 하였습니다.
도표 보내면서 집에 너무 많은 금액이 들어가니 조금 아끼자고 검토 부탁했으나, 식대와 외식대가
작게 책정 되었다고 답이 왔습니다.
나도 살고 싶다고 살려달라고 부탁했으나, 관념적이 이야기로든 어떠한 형태로의 회신 없었습니다.
큰 아들 훈련 중 다쳐서 병원 응급실 치료 후, 제가 직접 보험금
청구해 보니, 그간, 아이들 보험만 들었지, 보험금으로 지급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보험금 청구에 신경을 써서 잘 청구하라 하였더니, 알아서 잘 챙기겠다고 하더니, 이런 경우가 생겼습니다.
[처가.]
장모의 금전요구 한 차례 도와 드렸으나, 두 번째는 회사 사정
말씀 드리고 거절 하였습니다.
장모가 처에게 재차 요청 하였고, 처가 속상했던지 울며불며 난리를 쳤습니다.
오빠는 캐나다에 있어서 자기가 다 해야 하는데, 미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 그래도, 할
수 있는데 까지 해보자고 달랬습니다.”
+ 네번째 부부싸움 +++++++++++++++++++++++++++++++++
발단,
2월 6일 23시경 접대 후 귀가 하였습니다.
과음에 너무 피곤하여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물 한 잔만 달라고 하였으나, 아무도... 아무도 물 한 잔 안 주더군요. 물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역시
난 이 집에서 이런 대접이군.’ 하며, 한 숨을 뒤고 있는데, 너무 조용한 집 화장대에서 처가 크림 바르는 소리만 들리더군요. '톡, 톡, 톡......'
그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처에게 가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서운하다 했더니, 니가 떠다 먹음 되지 왜 나한테 그러냐...
말문이 막혀서 우이씨~~ 소리와 함께 문을 화장대쪽으로 팍 밀쳐서 화장대와 문이 손상을
입었습니다.
처가 말하기를
"그래 다 때려 부셔라! 너는 내가 이혼 해주길 바라잖아! 지금 꼬투리 잡으려는 거잖아. 니가 잘하는 것처럼 다 부셔!"
그래서 문짝 잡아 뜯고 화장대를 드라이기로 쳐서 상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처는 이불 가지고 안방에서 나가서 거실 소파 기거하였습니다.
계속되는 휴전 상태
본인은 2월 10일에 타 지역 장기출장 (약 25일반)으로 명절에
집에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처와 아이는 미리 예약한데로 구정 연후 기간 중 처의 사수, 사수 아들과 함께 일본 여행을 하였습니다..
여행 경비 중 항공 숙박은 본인이 부담 하였습니다..
여행지에서 아이들이나 처에게서 단 한 통의 문자나 카톡도 없었습니다.
겸언적은 마음에 처에게 “잘 지내냐”라고 톡을 날렸지만, 답이 없었습니다.
추후, 가족 톡방에서 서운하다고 이야기하니, 큰
아들만 '할라고 했는데.. '라는 답장 왔습니다.
별거(여건이
되질 않아 5월 경) 하겠다고 이야기 하였고. 집사람도 동의 하였습니다.
4월 26일경
지인과 음주 후 귀가 하였습니다.
큰 아들과 이야기하던 중 버릇 없는 행위에 훈계하다가 아이의 행위에 화가 돋아 손찌검 하였습니다. 처는
큰 아이 방에 들어와 말리다가 저에게 손찌검 당 하였습니다.
처는 경찰에 신고 후 아이들과 함께 집을 나 갔습니다.
혼자 있는 집에서 에어컨. 거실 대리석. 티비
손괴 하였습니다..
중국출장 후 귀국하니, 장모 와 계셨습니다.
장모에게 그간 사정 다 말씀 드렸습니다.
장모는 딸과 이야기 하겠다고 처와 함께 나가셨습니다.
이야기하고 들어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자기 딸은 하나도 잘못 없다 하십니다.
5월 5일 찬거리가 없어 찬을 만들던 도중 00경찰서에서 출두명령 조서 쓰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5월 6일 집사람 간단한 카톡 왔습니다.
"당신도 알겠으나, 제 짐을 다 빼서 나왔어요."
저는 모두 포기 하였습니다.
현재 ++++++++++++++
처 폭행으로 고소장 접수. 전치 2주 : 6월 27일 가정법원에 소환 됨.
폭행으로 의한 이혼 소송 준비 중(등기 받아 봄)
[ 본인 생각 ]
폭행
무조건 잘 못함. 생각할 가치도 없슴 모두 인정하고 법이 시키는 데로 할 생각.
이혼
지쳐서 더 이상 혼인 생활 못 하겠슴.
가장 공포스러운 게 처가 미워졌음
가끔 얼굴만 봐도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라옴.
양육권 친권 포기
사유.
장기출장 중 아이에게 만일 일이 생기면 출장 시 돌보기가
불가능 함.아이들은 도우미를 원하지 않음.
본가 형제는 너무 멀리 살고 있슴. 출장 후 저녁 열시 경, 둘째아이 저녁 밥.... 및 집 냉장고이게 계속 이럽니다. 카톡 내용중국 출장 중 한겨울에 방안 보일러 꺼놓고 대처하는 자세 정말 힘들다고 도와 달라고 했을 때 이마트 장보러 갔는데.. 큰 아들 신발이 찢어진거 발견하고....신발 사줌
쉽짱작성일
2018-05-1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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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 문 '활짝'..공개 첫날부터 발길
전시관으로 바꿔 5월부터 매일 개방..박물관 등록 준비(김해=연합뉴스) 정학구 기자 = '느리게 살고, 적게 쓰고, 부끄럼 타는 지붕 낮은 집'퇴임 후 귀향을 결심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야, 기분좋다"며 돌아와 짧은 세월 지냈던 경남 김해 봉하마을 '대통령의 집'이 1일 활짝 문을 열었다.노무현재단은 이날 오전 11시 첫 시민 방문객을 맞는 것으로 시작으로 앞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집을 개방한다.2년 전 잠시 특별개방한 적이 있지만 이젠 매주 월·화요일과 설·추석, 매년 노 전 대통령 기일을 제외하면 매일 개방한다.생전 '이 집은 내가 살다가 언젠가는 국민에게 돌려줘야 할 집'이라고 했던 노 대통령의 뜻에 따른 것이다.재단 측은 일반 인에 정식 개방하기 1시간 전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사저 개방행사를 마련했다.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돌출된 지하 1층 차고에서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탔던 에쿠스, 대선 때부터 당선인 시절 탔던 체어맨 등이 방문객을 맞는다.승용차 옆엔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마을에서 손녀를 태우고 화포천 주변을 나들이할 때 탔던 자전거도 그대로 있었다.정원에 들어서 앞을 내려다보면 집터를 그곳에 정한 이유가 자연스럽게 나온다.멀리 산 쪽으로 노 전 대통령 가족들이 생계에 보탬이 되라고 감나무를 심었던 곳, 부친이 고시 공부하는 막내아들을 위해 몸만 건사할 정도의 작은 토담집 마옥당(摩玉堂)을 지었던 터 등이 있다.재단 측은 앞으로 마옥당은 복원해볼 계획이다.사저는 크게 노 전 대통령 부부가 사용하던 곳(100평)과 경호원과 보좌진들이 머물던 곳(80평)으로 나뉜다.정원과 뒤뜰, 집 뒤와 옆엔 키 큰 소나무와 단풍나무, 대나무를 비롯해 꽃나무들이 곳곳에 있어 편안한 느낌을 준다.원래 지붕엔 기와를 올리려 했지만 노 전 대통령이 산에서 들판 쪽으로 내려다보아 거스름이 없고 주위와 잘 어울려야 한다고 해 '지붕 낮은 집'으로 바뀌었다.안채 안쪽 주방 식탁엔 노 전 대통령 내외가 창밖으로 봉화산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 식사하던 그 모양대로 목기와 수저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거실 벽면에는 고 신영복 선생이 쓴 '우공이산(愚公移山)' 액자와 원불교 종법사가 그린 달마도가 걸려 있었다. 액자 옆 벽엔 노 전 대통령 손자·손녀들의 낙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창틀엔 손녀가 쓴 '할머니 사랑해요'란 글이 보였다.노 전 대통령은 서재에서 업무를 보던 중 봉하마을을 방문한 시민들이 "대통령님 나와주세요"라고 소리치면 대문을 나서 시민들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많을 땐 하루 13차례 불려 나갈 때도 있었다고 재단 관계자는 귀띔했다.책장에는 919권의 책이 서거하기 직전까지 꽂혀있던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서재 옆 벽에는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취임 선서 액자가 걸려 있고 옷걸이에는 시민들과 만날 때 사용했던 밀짚모자가 걸려 있었다.비서실과 경호대기실은 서재 겸 회의실과 붙어 있었다.애초 경호요원들은 집 밖에 거처를 마련하려고 했지만, 대통령이 '한 식군데 그럴 필요 있느냐'고 하는 바람에 한 건물처럼 연결된 공간에서 '불편하게' 대기하게 됐다고 한다.언론인 개방행사를 마친 직후 11시가 되자 정식 개방 첫 방문객이 된 시민 25명이 대통령의 집에 들어섰다.신기한 듯 조심스럽게 정원과 서재, 안채, 사랑채 등을 둘러본 방문객들은 가끔 질문을 던지면서도 한편으로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현장 접수로 사저를 구경한 한 방문객은 "몇 번 묘역을 찾아온 적은 있지만, 사저 안엔 처음이다"라며 "너무 영광스럽기도 하고 이런 기회를 갖게 돼 감사하다"고 말했다.부산에서 왔다는 70대 방문객은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이런 좋은 날도 볼 수 있었을 텐데…"라며 최근 남북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노 전 대통령과 함께 떠올린 듯 아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노무현 대통령의 집은 지상 1층·지하 1층 규모로 생태건축의 대가인 고 정기용 건축가가 흙, 나무 등 자연재료를 사용해 설계했다.노무현재단은 애초 지난 1월부터 일반에 공개하려고 했다가 주택을 전시관으로 바꾸고 장애인 편의시설, 통로 확장 등 공사에다 행정처리에 시간이 걸려 추도식이 열리는 5월 초로 연기했다.재단 측은 대통령의 집을 박물관으로 등록하기 위한 준비와 절차를 진행 중이다. 장기적으로는 등록문화재로 관리하는 방안도 추진한다.노무현 대통령의 집은 홈페이지(http://presidenthouse.knowhow.or.kr) 사전 예약과 현장 접수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회당 관람 인원은 25명(온라인 예약 15명, 현장 접수 10명)으로 약 45분간 전문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각 공간을 둘러보게 된다.평일(수·목·금) 하루 5차례(오전 10시·11시, 오후 1시 30분·2시 30분·3시 30분), 주말(토·일)은 오후 4시 30분이 추가돼 하루 6차례 관람할 수 있다.현재 오는 4일까지 접수가 벌써 마감됐고 어린이날은 현장 신청만 받기로 했다.b940512@yna.co.kr http://v.media.daum.net/v/20180501133653353?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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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수억 인민을 버리고, 수십만 유물을 택하다
때는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군은 국공내전에서 승리를 앞두고 반대로 패배를 앞둔 장제스에겐 도망밖에는 답이없었다.어디로? ▲1950년 대만 전경 정성공이 터 닦고 청과 일본이 지배하다 무주공산이 된 섬 타이완으로.그래서 한창 짐꾸리고 남아있는 군대 데리고 타이완으로 향하는 준비하느라 분주한데그와중에 탈출 도와주고있는 미국에게 “피난선으로 쓸 군함 큰거 몇척 빌려주시오.”미국: 오 그래도 자기 따르는 인민은 챙겨주네? ㅇㅋㅇㅋ그렇게 미국이 빌려준 피난선도 타이완으로 향했다.그런데 피난선에 타고있는 사람은 선원과 보조원뿐이고 나머지 공간엔 중국 대륙 각지에서 긁어모운 유물 60만 8천점 가량이 실려있었다.왜 그랬을까? 아마 장제스의 눈에는 너저분한 인민 따위보다 유물이 자기를 빛나게한다 여겼기 때문이리라.떠나지 못하고 남게돼버린 인민들은 국민당 부역자 반동으로 몰려 갖은 고초를 겪게 되었다.여기까지만 보면 장제스는 그저 인간쓰레기로 보일 것이다.실제로 그렇게 불러도 무방하고.그런데 1966년대륙에 붉은 책 든 청년무리가 거리로 쏟아져나갔다.나가서 마음에 안드는 사람이나 아무 사람이나 트집잡아 그냥 사냥하고 다녔으며 유서깊은 곳, 물건이라면 어디든지 파괴하고 다녔다. 그 행적의 극히 일부 목록 1. 염제릉(炎帝陵)의 주전(主殿)은 불에 타고, 능묘는 파헤쳐졌으며, 뼈는 태워져서 뿌려짐. 2. 창힐의 능원은 훼손되고, “열사능원”으로 개조됨. 3. 산서성의 순제릉(舜帝陵)은 훼손되고, 무덤에는 큰 나팔을 꽂아놓음. 4. 절강소흥 회계산의 대우묘(大禹廟)가 훼손됨. 우임금의 조각상은 머리와 목이 잘림. 5. 세계불교의 최고보물이라고 불리는, 석가모니가 살아있을 때 친히 개광(開光)했다는 전설이 있는 상(三聖像) 중의 하나인 팔세등-신상의 얼굴이 훼손됨. 6. 공자의 묘가 파헤쳐져 편평(扁平)하게 됨. 대성지성선사문선왕(大成至聖先師文宣王)이라는 비석도 부서져 가루가 됨. 묘비도 부서짐. 공묘(孔廟)[2]의 이태소상(泥胎塑像)도 훼손됨, 공자의 76대손 공령이(孔令貽)의 분묘도 파헤쳐짐. 7. 화현(和縣) 오강(烏江)변의 항우의 패왕묘(?王廟), 우희묘(虞姬廟: 사당)와 우희묘(虞姬墓: 무덤)도 천여 년을 내려왔는데, 묘들이 모두 파헤쳐져 폐허가 됨. 문혁(文革) 이후 패왕묘에 남은 것은 반쯤 땅에 묻힌 석사자(石師子)뿐임. 8. 곽거병의 곽릉(?陵)도 재난을 벗어나지 못함. 향촉(香燭)과 첨통(簽筒)이 부서진 외에 곽거병의 소상(塑像)도 하루아침에 훼손됨. 9. 이화원(?和園)의 불향각(佛香閣)이 부서지고, 대불(大佛)이 훼손됨. 10. 왕양명의 문묘(文廟)와 왕문성공사(王文成公祠)의 두 개의 건축과 왕양명의 소상(塑像)이 전부 훼손되고 남지 않음. 11. 고성태원(古城太原)의 신임 시위원회는 첫째 묘우(廟宇: 사당)를 부수어 전시의 190여곳의 묘우 고적(古蹟)을 10여개를 남기고 모두 부수고 훼손함. 그의 명에 따라 100여곳의 고적이 하루아침에 훼멸됨. 산서성박물관 관장이 급히 방림사(芳林寺)로 가서 겨우 이소인두(泥塑人頭: 흙으로 빚어 구운 사람의 머리 형상)를 한 무더기 구해냄. 12. 의성(醫聖) 장중경(張仲景)의 소상이 훼손됨. 묘정(墓亭), 석비(石碑)도 부서짐. 장중경기념관의 전람품은 하나도 남지 않음. 의성사(醫聖祠: 의성을 모신 사당)는 이미 존재하지 않음. 13. 하남 남양의 제갈량의 제갈초려(諸葛草廬)(혹은 무후사武侯祠)의 천고인룡(千古人龍), 한소열황제삼고처(漢昭烈皇帝三顧處), 문도무략(文韜武略)의 세 개의 석방(石坊)과 인물소상, 명나라 성화연간(成化年間)에 만든 18개의 유리나한(琉璃羅漢)이 모두 훼손됨. 전각의 장식물도 모두 부서짐. 청나라 강희(康熙)가 지은 《용강지(龍崗志)》, 《충무지(忠武志)》 등의 목각본도 불에 탐. 14. 한중 면현(勉縣)의 고정군산(古定軍山) 석비는 제갈량이 지주(地主)분자라는 것 때문에 훼손됨. 마오: 뽕나무밭 있으니 지주 맞잖음? 15. 서성(書聖) 왕희지의 능묘와 20무(畝)[3]에 달하는 금정관(金庭觀)이 거의 평지화됨. 남은 건 서성(書聖)의 망혼(亡魂)이 떠난 우군사(右軍祠) 앞의 오래된 몇 그루의 측백나무뿐. 16. 문성공주(文成公主, 당대의 공주)가 친히 주재한 송찬건포(松贊乾布)와 문성공주 두 사람의 소상(塑像)이 각랍사(覺拉寺)에 있었는데, 훼손됨. 17. 합비에서 대대로 보호해오고 매년 제사지내오던 포청천묘가 하루아침에 훼손됨. 18. 하남 탕음현 중학생이 악비 등의 소상, 동상, 진회 등 오간당(五奸黨)의 철궤상(鐵?像), 사실 진회상은 한족이라면, 홍위병 아니더라도 많이 부수고 싶어 한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비각(碑刻)까지 모두 없애버림. 19. 항주혁명청년이 악묘(岳廟, 악비의 사당)을 부수고, 악비의 묘도 파헤쳐, 악비의 유골을 태워 재로 만듦. 20. 아라텅간더리[阿拉騰甘得利] 초원에 있는 징기스칸의 능원(陵園)이 부서짐[4] 21. 주원장의 거대한 황릉석비(皇陵石碑)가 쓰러짐. 석인(石人), 석마(石馬)가 폭약으로 파괴됨. 황성(皇城)도 깨끗하게 철거됨. 22. 해남도의 천애해각(天涯海角)에 명나라 때 해서[5]의 묘가 부서짐, 청백리의 유골도 파헤쳐짐. 23. 호북강릉(湖北江陵)의 명재상 장거정의 묘도 홍위병에게 파헤쳐지고 뼈가 불태워짐. 24. 북경성 내의 원숭환의 분묘가 파헤쳐져 평지가 됨.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목을 맨 회나무 또한 베어버림. 25. 여평고리(黎平故里)에 안장되었던 명나라 말의 명신 하등교(何騰蛟)의 사당에 있는 불상이 부서짐. 여평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하등교의 묘도 파헤쳐짐. 26. 《서유기》의 작가 오승은의 옛집은 강소성 회안현 하하진 타동항에 있었는데, 폐허로 변함. 이 집은 세 개의 담으로 구분되어, 남쪽은 객청(客廳), 가운데는 서재(書齋), 북쪽은 침실[?室]로 구성된 단출한 집이었고, 수백 년간, 회안현에는 많은 절경이 있으나 사람들이 가서 문안하는 곳은 이 오래된 집과 그의 묘밖에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27. 홍위병이 《요재지이(聊齋志?)》 작가인 포송령(蒲松齡)의 묘를 파헤침. 묘에는 담뱃대와 머리맡의 책 한 권뿐이었는데 네 구절의 문장이 써져 있었다. 이것이 포송령의 글인지 알아보거나 하지도 않고, 들판에 마구 흩어버린 후, 시체는 불태움. 28. 1959년에 세워진 청나라의 문인 오경재(吳敬梓)기념관이 문혁 때 부서짐. 29. 산동 관현중학 홍위병들이 교사의 선동 하에, 천고의개(千古義?) 무훈(武訓)의 묘를 부수고 유골을 파헤친 후, 모여서 비판하고 태워 재로 만듦. 30. 북경 교외의 은제장(恩濟庄)에 묻힌 동치, 광서 양황제의 궁정대총관(宮廷大總管) 이연영의 묘를 파헤침. 31. 장지동(張之洞, 청나라 말기의 개혁가)의 묘가 파헤쳐졌는데, 청백리여서 보물이 없자, 홍위병의 수장(首長)인 장 씨 부부는 시체를 나무에 매달고 수 개월간 방치하여, 개가 뜯어먹기도 함. 32. 하남 안양현의 조간왕(趙簡王) 주고수(朱高燧)의 묘가 파헤쳐짐. 33. 흑룡강 흑하현에 있던 장군분(將軍墳)은 제왕장상(帝王將相)의 묘라는 이유로 파괴됨. 34. 송나라 때 시인인 임화정(林和靖, 967~1028)의 묘도 파헤쳐짐. 35. 청나라 말의 장태염(章太炎), 서석린(徐錫麟), 추근(秋瑾) 및 양내무(楊乃武)와 소백채(小白菜)의 사건에 관련된 양내무(楊乃武)의 묘도 모두 파헤쳐짐. 소의 귀신과 뱀의 요괴를 모조리 없애버린다는 구호를 외쳤다고 함. 36. 강유위(康有爲, 변법자강운동을 양계초와 함께 주도함)의 묘도 파헤쳐짐. 시신을 꺼내 조리돌림하며 여기저기 거리에 끌고 다녔고, 강유위의 시신의 머리를 잘라, 따로 청도(靑島)시의 조반유리(造反有理) 전람회에 보내 전시함. 37. 절강성 봉화현 계구진의 장개석의 옛집, 장개석 생모의 묘도 파헤쳐짐. 38. 남장현의 항일명장 장자충(張自忠)이 건축한 장공사(張公祠), 장씨의관총(張氏衣冠?)과 3개의 기념정(紀念亭)이 파괴됨. 39. 양호성[6]장군도 국민당반동파로 몰려 묘와 묘비가 훼손됨. 40. 신강 투루판의 화염산에 있는 천불동(千佛洞)의 벽화도 파괴됨. 41. 산서 운성박물관은 원래 관제묘였으므로 부수어버림. 42. 안휘 곽저현 문묘(文廟), 산동 래양 문묘, 길림시 문묘도 모두 파괴됨. 43. 당대(唐代)의 고승(高僧) 포선(褒禪)이 말년에 머문 곳이 현화산(縣花山)으로, 그의 사후(死後), 제자가 개명하여 포선산이 되었는데, 송왕(宋王) 안석(安石)이 유람하고 《유포선산기(游褒禪山記)》를 지은 후, 포선산은 유명해졌는데, 문혁 때 이를 사구(四舊)라 하여, 포선산에 있던 대소(大小) 두 개의 탑이 모두 훼손됨. 44. 전국최대의 도교성지인 노자강경대(老子講經台)와 주위 근 백 여개의 도관(道館)이 훼손됨. 45. 송대 대문호(大文豪) 구양수(歐陽修)의 《취옹정기(醉翁亭記)》는 송대 서예의 대가, 소동파(蘇東坡)가 글을 썼고, 비석에 새겨져 안휘 제현에 있었는데, 근 일천 년을 이어온 이 석비(石碑)를 넘어뜨리고 소동파의 글을 파내고 훼손했으며, 취옹정(醉翁亭) 안에 보관되어 있던 역대 명가(名家)들의 서책과 그림들을 모조리 훼손, 지금까지도 뭐가 훼손되었는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음. * 그나마 둔황석굴, 자금성, 티벳 달라이 라마가 대대로 머물던 포탈라궁 등은 나름대로 개념있는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보호로 무사하였다. 그렇다.이들은 굳지 말하지 않아도 유명한 홍위병이다.마오쩌둥이 주도한 소위 문화대혁명을 집행한.이러한 참변으로 중국의 유구한 문화유산은 심각한 피해를 입어현재까지도 중국 역사학계에 적잖은 후유증이 남아있다. 반면, 장제스가 실어간 유물은 아무 해를 입지 않았다.청나라 시대 제작된 수려한 도자기들 상당수도 대만 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전시 중이다.만약 피난선에 유물이 아닌 피난민을 실었으면 저 유물 상당수는 불태워지고 가루가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인민을 선택했다면 정치인으로서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조금 더 호의적으로 바꼈겠지만.이 사례만 봐도 역사는 결코 간단하지 않으며 사람이 꾸미는 일에 대한 결과 또한 반드시 진행 과정에서 선의를 품었다고 잘되거나 악의를 품었다고 못되지 않는 복잡성을 띔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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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
서재를 정리하다 보면 '내가 대체 이 책을 왜 산 거지?'라는 생각이 드는 책 만큼 성가신 존재도 드물다. 그래서 집안을 정리할 때 퇴출 1순위에 주로 그런 책들이 물망에 오른다. 부지런하고 알뜰한 사람은 헌책방에 내다 팔기도 하지만 헌책이 어디 팔아서 돈이 되는 물건이어야 내다 파는 수고를 감수하지 않겠는가? 나 같은 경우는 공공도서관에 기증을 하거나 재활용품으로 버리는 쪽이다.일주일에 수백권의 책이 쏟아지는데 아무리 열독가라고 하더라도 읽어봐야 얼마나 읽을 수 있겠는가? 만만찮은 책값도 책값이려니와 80년 남짓한 인간의 수명을 고려할 때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도 중요하지만 가급적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누구라도 좋은 책을 고르기 위해서 애 쓰지 않는 사람은 또 어디 있겠는가?따지고 보면 서점에 가서 '요새 어떤 책이 잘 나가나요'라고 주인에게 묻거나 '베스트셀러' 코너를 눈여겨 보는 것도 좋은 책을 고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본다. 내가 말하려 하는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이란 것도 어차피 절대적이지 않고 다만 개인적인 체험의 소산에 지나지 않으나 혹여 독서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적어본다.우선 베스트셀러보다는 스테디셀러 코너를 유심히 지켜봐야 한다.물론 베스트셀러도 좋은 책이 많다. 그러나 아무래도 스테디셀러에 비해서는 '검증'이 덜 된 책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 우려 된다. 실제로 세월이 지나서 버려야 할 책을 추려낼 때 가장 흔히 보이는 책들이 '한 때 베스트셀러'에 해당되는 경우가 많다. 스테디셀러는 꽤 오랫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책들이 많아서 아무래도 베스트셀러보다는 좀 더 오래두고 읽을 확률이 높다고 말해야겠다. 화려한 반짝 스타보다는 조용하지만 꾸준한 강자를 선택하는 편이 좀 더 낫다는 생각이다. 물론 베스트셀러도 옥석을 잘 고르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둘째 고전을 무서워 하지 말아야 한다. 안전성을 고려하면 고전만큼 좋은 선택도 드물다. 길게는 천년이 넘도록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목록이니 당연하다. 고전이 생각하는 만큼 어렵고 지루한 책만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라든지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박지원의 <양반전> 따위는 일단 읽기 시작하면 무서운 몰입감을 발휘하는 '재미 있는' 책들이다. 고전도 그 시대에는 '대중적인' '베스트셀러'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 인생의 소설'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 드는 멜빌의 <모비딕>같은 소설은 난해하다고 느끼는 독자도 있겠지만 하루에 몇 페이지를 읽어서 완독하는 데 몇 달이 걸리더라도 웬만한 다른 책 열댓권을 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는데 기능이나 디자인이 큰 차이가 없는데 단지 명품이라는 이유만으로 몇 갑절 비싼 경우가 허다한 다른 물건에 비해서 내용이 명품이라고 해서 딱히 비싸지 않은 고전은 매력적인 것이 분명하다.셋째 출판사에도 전문 영역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가령 순수문학에 '창작과비평사', '민음사', '문학동네'가 있다면 인문 관련으로 '소명출판사'라는 거대한 산맥이 있다. 독자들에게 덜 알려져서 그렇지 당장이라도 인터넷서점에서 소명출판사의 출간 목록을 검색하면 신세계가 보이리라. 표지디자인은 다소 촌스럽지만 '까치출판사'도 굉장히 훌륭한 인문서적을 많이 낸다. 해외문학은 단연 '열린책들'이 돋보인다. 이 출판사는 애초에 러시아문학전문을 표방했는데 다른 해외문학도 눈여겨볼 만하다. 장정과 표지디자인 그리고 번역이 수준급이다. 과학분야에서는 '사이언스북스'가 선두주자인데 출판사의 이름에 사이언스를 표방한 만큼 오로지 과학분야의 책만 내는 고집쟁이다. 젊은 감각과 과학적 사고로 지식과 문화의 크로스오버를 지향하는 '동아시아사'도 주목할만하다. '동아시아사'는 주로 출간하는 과학책 말고도 인문 관련 서적도 출간하는데 모두 진국이다. '지호'는 미시적인 관점의 흥미로운 책을 많이 낸다. 사진과 예술분야에서는 '열화당'과 '눈빛'이 양대 산맥이다. 특히 눈빛출판사는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라는 기치하에 사라져가지만 소중한 장면을 담은 사진집들이 매우 훌륭하다. 역사쪽으로 넘어가면 '푸른역사'가 원탑이다. 그 외에 에세이는 '마음산책'이 경제경영 쪽은 '더난'이 선두주자다.넷째, 책도 충동구매가 심한 품목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물건값이 비싼 다른 취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단가인 책은 의외로 충동적으로 구매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책을 살 때는 한발짝만 뒤로 물러서서 생각을 다시 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다섯째, 일단 깊게 생각해서 꼭 필요하고 두고 두고 읽을 책이다라는 판단이 서면 미리 사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당장 다른 읽을 책도 있고 시간이 없더라도 사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우리나라 출판계는 절판이 너무 잦아서 나중에 생각이 나서 사려고 챙기면 사고 싶어도 사지 못하는 절판본이 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좋은 책을 곁에 두면 언젠가는 읽게 된다는 격언은 틀리지 않다.여섯째,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제목'에 끌려 책을 사는 경우가 많은데 주의해야 한다.나만 해도 그렇다. 야구를 좋아하는 내가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라는 소설을 무심결에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같은 야구에 관련된 재미난 소설인 줄 알고 샀는데 적잖이 실망한 경우가 있다. 물론 20세기 일본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소설이긴 하지만 애초에 기대했던 내용은 아니었다. 또 일반적으로 자기계발서적에 독자의 이목을 끄는 '요상한' 제목이 많은데 제목보다는 내용을 요모조모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일곱번째, 종이신문이나 서평잡지를 구독해야 한다.요즘 시대에 누가 종이신문을 볼 시간이 어딨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종이신문은 좋은 책을 소개 받는 가장 편리한 매체다. 물론 인터넷에서도 서평기사를 검색해서 읽을 수 있지만 일삼아 찾는 경우와 자연스럽게 펼치면 보이는 경우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 종이신문의 서평기사를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독서트렌드와 좋은 책을 고르는 눈이 길러진다고 믿는다. 종이신문이나 서평잡지를 읽지 않고 책을 고르는 것은 마치 나침반 없이 항해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주목할 만한 서평잡지로는 <기획회의>, <책 Chaeg>, <비블리아>가 있다.여덞번째,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독서모임에 참가해보자.때로는 전문가나 대단한 독서고수보다는 평범한 다른 동료 독서가에게서 추천받는 책이 눈높이도 맞고 읽기에 적합하다고 느껴진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자신이 이해하기 어렵다든지, 관심 분야가 전혀 아닌 책은 읽기에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또 독서모임을 통해서 같은 책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읽히는지 확인하는 일은 독서의 또다른 즐거움이다.아홉번째, 만화나 자기계발서라고 무작정 무시할 일은 아니다.만화는 텍스트로 된 매체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고 장점이 많은 매체다 나만해도 조선시대에 대해 궁금한 것이 생기거나 의문이 생길 때 제일 먼처 펼쳐보는 것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고 파우스트 같은 난해한 고전의 워밍업으로 <만화로 읽는 불멸의 고전시리즈>를 들쳐본다. 아무리 자기계발서라도 해도 <카네기 인생론>같은 책은 꼭 한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알이즈웰작성일
2017-09-18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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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세타가야 일가족 살인사건
안녕하세요 엠제이입니다~~~~ㅎㅎ오늘은 아침부터 조금 으스스한 얘기를 해보려 하는데요일본 5대 미제사건중에 하나인 세타가야일가족살인사건 입니다한국에도 미제사건이 있지만일본 세타가야일가족살인사건은 증거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범인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본미제사건이 되어버린거죠..일단한번 보실게요~~ 이 단란한 가정은 일본도쿄의 세타가야구에있는 회사원 가족입니다 아빠(44세 미야자와 미키오),엄마(41세 야스코),딸(8세 니이나), 아들(6세 레이)이 가족은 사건이 발생한 시각은 2000년 12월 30일 입니다 저녁11시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범행이 일어났는데요무슨일이있던것일까요? 2000년 12월31일 오전에 옆집에 사는 엄마 야스코의 모친이 딸의 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않아 찾아갔을때 이 4가족의 시체를 보게되어 신고를 하게된것이죠..미키오의 집을보여드리겠습니다 미키오의 자택은 3층 주택으로 지어진 집이었구요 이 옆집엔 부인의 모친과 언니 부부가 살고있었다고합니다. 그런데 왜 바로옆집인데 살인사건이 일어났어도 몰랐을까? 생각하실텐데요당시 이 주택지는 30채정도의 집이 모여있었지만 공원 토지 확대 사업으로 재개발이 확정되어 다른 주민들은 이사를 간 상태였고 피해자 일가도 4개월 후 2001년 4월까지 사이타마현으로 이사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자택 주변은 이미 집을 허문 곳도 있어 을씨년스러웠고 밤이 되면 아주 조용했다고 합니다. 1층에는 아빠 미키오가 사용하고있는 서재와 응접실 그리고 차고가 있었구요2층에는 욕실과 화장실 아이들의 방과 작은 베란다가있구요3층에는 엄마 야스코와 딸 니이나가 침실로 사용한 다락방이있었습니다이 집의 뒷편에는 공원이있구요범인은 공원의 펜스를올라타고 2층 욕실 창문을 통해 침입했다고 추정됩니다방에서자고있던 아들레이를 목졸라 죽입니다.1층에서 서재에 있던 아빠 미키오는 께름칙한 소리를 듣고 2층으로 올라가는데요가는 도중 아들을 질식사시키고 내려오던 범인에게 회 칼로 머리,얼굴등 상반신과 엉덩이 다리를 포함한 하반신을 칼로 난도질당합니다.이 때 부러진 앞 칼날은 미키오의 머리 부근에서 발견되었으며 범인은 미키오의 몸싸움으로 상당한 상처를 입고 출혈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미키오를 살해한 뒤 범인은 다락방으로 올라가 자고있던 아내 야스코와 딸 니이나를 덮쳤지만 두사람은 경상을 입고 도망치게 되었는데요. 범인은 앞이 부러진 칼날을 버리고 부엌에서 쓰던 식칼을 가져와 도망간 두사람을 쫒아가 마구잡이로 난도질해 살해했습다. 야스코와 니이나는 2층에 쓰러져있었으며 얼굴과 목등 상반신을 중심으로 위에서아래로 앞니가 부러진 식칼로 수십번을 찔린 상태였다고합니다.보통 영화에서 보는 칼로 푹푹찌르는 그런살인법이아니라 왜 서든어택 칼전할때나 군인들이 쓰는 칼사용법있잖아요 위에서 찍어서 쭉-내리는 그런형태였다고해요후에 다락방에서 장녀의 피가 묻은 휴지가 발견되었는데, 도망간 사이 부인이 장녀의 상처를 치료하던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특히 부인은 얼굴 부근을 칼로 파낸 듯한 깊은 상처가 있었으며 장롱에서 꺼낸 듯한 옷이 얼굴에 덮혀있는 등 제일 참혹했다고합니다.일가족은 평화롭게 살던 자신의 집에서 갑자기 침입한 살인범에 의해 공포에 떨며 참혹하게 명을 다한 것이죠.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이제부터 정말 미스테리를 알려드릴텐데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증거가 수두룩한데 아직까지도 범인을 못잡았다고 말씀드렸죠?그 증거들을 알려드리려고해요~범인은 살해 후!! 냉장고에서 차음료와 메론을꺼내서먹습니다 그리고 냉동실에있던 아이스크림을4개이상 꺼내 먹습니다 그 흔적들은 집안곳곳에서 발견되었구요 사람을 죽이고 사건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던거구요 범인이 남긴 혈액검사를했는데요 음주나흡연의 증거가 없었다고합니다. 집안에있던 서류를 찢어서 욕조에 뿌리고 나갔다고합니다. 우발적으로 들어왔던거라면 서류를 찾아내서 찢어버릴 이유가있었을까요??손으로 찢은 서류도있었지만 가위로 자른 서류도 있었다고합니다 살인을 저지르고 왜 일을 두번이나 했을까요범인이 집안의 물건을 뒤질때 아래에서부터 위로 서랍을 연 흔적이 있다고해요 이건 전문빈집털이범의 패턴과 똑같다고합니다.그리고나서 전화선을 뽑아버리는데요 그래서 야스코의 어머니가 전화를했지만 전화가 안됬던거죠또한 범인은 살해를 저지르고나서 살해현장에서 컴퓨터로 인터넷을 썼는데요그 접속시간이 31일 새벽 1시 18분 , 오전 10시 5분에 기록이 남았습니다. 장모가 현장에 도착한시간은 오전10시 30분이었구요사람을 죽여놓고 컴퓨터까지하고 아침10시까지 그집에 있었다는 얘기죠..소름돋지않나요??컴퓨터를 썼으니까 키보드나 마우스에 지문이 검출될꺼라고 예상하시죠?? 네 키보드에서는 지문이 검출되지 않았지만 마우스에서는 지문이 검출됐다고합니다.인터넷은 오랜시간이아닌 5분정도씩 접속을했는데요 미키오의 회사홈페이지를 접속했고 또 대학교연구소사이트에들어갔구요 과학기술부에도들어갔다고합니다. 범인은 연극표를 예매하려고 예매사이트를 즐겨찾기를 해두었구요 그런데 연극표사는것자체는 실패하거나 하지않았던것으로 추정됩니다.범행 후 집에서 대변을 본것으로 확인됬는데요 변기에 물을 내리지않았다고합니다. 그런데 DNA검사를했지만 별다른것이 나오진 않았다고합니다약10시간동안 살인현장에있던 범인은 수면도 취했는데요 2층에있던 거실 소파에서 수면의 흔적이 있었다고합니다. 또한 범인은 자신의 피가묻은 티셔츠를 벗어서 개놓고 미키오의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약품상자를 뒤져서 반창고를찾고 생리대로 지혈을 했구요 저도 얼마전에 알았지만 생리대의 용도가 원래는 군대에서 지혈대로 사용했다고합니다.그게 개발이되서 현재의 여성용품이 된것이죠. 제일중요한 목격자 정보 인데요 사건 발각 당일 오후 5시 20분경 토부 닛코역 도착 토부 열차 안에서 손에 상처를 입은 남성이 타고있다 는 목격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처음엔 '반창고를 붙이고 있을 정도의 상처'로 정보가 들어왔으나 조사 본부의 추적으로 '오른손에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은 것임이 밝혀졌구요 남성은 아사쿠사발 쾌속 열차에서 같은 역에 하차한 승객 20명 중에 한명으로 사무실에서 역무원에게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으며 치료를 받았다고합니다. 역무원이 상처의 원인을 묻자 "열차 안에서 칼을 떨어뜨려 손이 베였다"고 얘기했는데, 열차 안에서 혈흔은 발견되지 않았다고합니다.남성의 외형은 30세 정도의 신장 약 170cm, 말랐으나 몸집이 컸으며 녹색의 힙색을 메고 검은다운자켓 에 청바지와 하얀 운동화를 신었다고 진술했습니다.하지만이 정보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 조사 본부에 들어왔지만 묵살당해버려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 건 10개월이나 지나서였다고해요10개월이 지나서 조사하면..뭐가나올까요?-_- 이 사진은 범인이 착용하고있던 옷들인데요L사이즈의 나그랑티셔츠와 유니클로의 검은점퍼를통해 신장 170cm전후, 허리 둘레는 83cm 전후 추정되고요범행시 미키오씨와의 몸싸움으로 손을 다쳐 묻은 혈액으로 A형인 것이 판명났구요.경시청 추정 1965년에서 1985년생(사건 당시 15세~35세). 범행 방법으로 보아 대담하며 뻔뻔함. 윗옷을 벗어 가지런히 접어놓은 곳으로 보아 꼼꼼한 성격.피해자 자택에서 수십개의 지문이 남겨져 있었으며 지문은 소용돌이형이었으며 과거 범죄자들의 지문 데이터와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전과자는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범인은 너무나도 많은 유류품들을 남겼지만 범인 검거의 실마리는 찾을 수 없었다.계단에서 검은 장갑, 녹색 머플러, 모자, 흉기로 사용된 21cm 식칼, 검은 손수건 2매, 힙색, 족적에서 한국의 슬래진져운동화를신은 것이 판명났습니다범인의 이상점 요약 범인은 범행 후 자택에 있던 물건들을 사용하는 등 극히 대담하고 엽기적인 행동들을 보였었는데요제가 글을 요약하자면1. 일가족을 살해한 뒤 피해자의 자택 냉장고에서 플라스틱 용기에 들어있던 음료와 멜론, 아이스크림 4개 가량을 꺼내어 먹은 흔적이 발견.2. 범행 중에 껌을 씹고있었다.3. 오른손에 상처로 생긴 출혈을 자택에 있던 생리대를 이용해 막는 방법을 썼다.4. 범행 후 자택에서 대변을 본 것으로 확인됐다. 심지어 변기를 내리지 않아 대변이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시사통신의 2010년 12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대변에서 검출된 야채를 참깨로 무친 음식은 피해자들의 위에 있던 내용물과 식사에는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5. 2층 거실 소파에서 수면을 취한 것으로 확인되었다.6. 2층 거실 소파에서 신용카드와 수첩, 은행 예금통장, 운전면허증 등 생년월일이 표시된 서류가 분류되어있었다. 7. 찬장과 책상의 거의 모든 서랍은 아래서부터 열려있었고 욕실의 욕조 안에는 영수증이나 서류, 타올, 쓰레기 등이 난잡하게 어질러져있었다. 집 안을 탐색하고 쓸모없는 물건은 욕조에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욕조에 어질러져있던 서류와 광고지들은 가위나 손으로 찢겨진 상태로 발견되었다.8. 1층 서재에 있던 컴퓨터로 인터넷을 한 흔적이 발견. 아이스크림은 인터넷을 하는 중에 먹은 것으로, 스푼을 사용하지 않고 컵 용기를 손으로 움켜쥐며 입으로 먹었다는 특이점이 보였다. 인터넷 기록은 피해자의 회사 사이트와 대학 연구실 홈페이지 등이었으며 극단 사계의 무대 티켓을 예약하려다 실패했을 가능성. 인터넷을 한 뒤 콘센트를 빼서 전원을 껐다. 9. 인터넷에 접속한 기록은 2번으로 첫번째는 오전 1시 18분경, 두번째는 같은 날 오전 10시 5분경 야스코의 모친이 전화를 걸기 직전까지였기때문에 범인은 바로 도주하지않고 10시간 정도의 장시간동안 집 안에 머물러있었다.이렇게 요약해드릴수 있겠네요 그러나 최근 조사결과를 보면 인터넷접속시간이 오전1시18분경과 오전10시경으로 추정되어왔으나, 두번째 인터넷 접속에 대해서는 컴퓨터의 오작동이라는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첫번째 인터넷 접속이후에 도주한 것으로 수사방향으로 수정하였다고합니다.재현 실험 결과에 따르면, 마우스가 어떤 충격이나 움직임에 의해서 떨어지는 바람에 컴퓨터의 접속이 가동된 것으로 보고 있답니다. 또한, 31일 새벽에 피해자 집의 불이 소등되었다는 증언도 나왔구요새벽에 수상한 사람이 있었다는 목격담이 나오고 있어 새벽시간대에 도주한 가능성을 두고 수사를 하고 있다고합니다. 일본 경찰의 감식 결과로 서울에 거주하는 한국인 남성의 지문과 범인의 지문이 일치했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사건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 한국으로 조사원을 파견보냈지만 사건 조사 협력을 한국 정부측에서 거부했기때문에 확실하지 않다고 일본 경찰 측은 얘기했다.범인이 신고있던 신발은 영국 브랜드 슬래진져로 한국의 메이커가 1998년 10월부터 2000년 11월 사이에 4530켤레를 제조하여 판매했었다. 신발이 만들어진 곳은 중국 길림성 연변의 조선족 자치주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유류품으로 남겨진 힙색이 한국제였는데, 판매는 관동지역의 할인 매장에서 판매된 것으로 확인. 그러나 가방 표면에 묻어있던 세제가 일본 내에서 판매하지 않은 종류에 옷안에서 검출된 모래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모래일 가능성이 높게 나타나 미국인이거나 미국과 관계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보고있다. 그리하여 범인은 '일본 이외의 나라에 갔다온 적 있는 인물'로 추산되기도 했다.범인이 신고있던 신발 사이즈는 한국 사이즈로 28cm, 또는 일본 사이즈 27.5cm이며 당초 28cm 사이즈는 일본 내에서 판매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지만 신발 외곽이 한국 사이즈 28cm와 같은 27.5cm의 물건은 일본 내에서도 판매한 것으로 확인되었다.최근에 발매된 '세타가야 일가 살인사건, 15년째의 새로운 사실'의 저자인 저널리스트 히토츠바시 후미야의 말에 의하면 한국으로 건너가 남성의 족적을 직접 취재, 지문을 채취한 결과 범인의 지문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또한 군인이었으며 현 사건을 필요 이상으로 잘 알고있었다고. 이 한국인의 가명은 이인은(李仁恩)으로 조사에 따르면 이 남성은 실행범이며 살인을 사주한 사람은 '카네다'라고 하는 제 3의 인물이었다고 자백했는데 부동산 브로커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자라고 한다. 사건 당시 미야자와 가족은 카미소시가야의 공원 확장으로 토지를 도쿄도에 매각하여 1억 수천만엔이 넘는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이 돈을 노리고 한국인 이인은(가명)을 이용해 범행을 사주 했다는 것이 이 저널리스트의 주장이다.조금 황당한 것은, 미해결 사건의 범인을 추측하는 방송 프로그램 'TV의 힘'에서 일본에 대해 전혀 모르는 미국의 초능력 조사관(?)을 불러 용의자의 몽타주를 그려보게 했는데, 얼굴의 형상이 '광대가 진 일본인 얼굴이 아닌 한국계 얼굴'이라는 주장이 나왔다고합니다 신기하면서도 황당하네요오늘은 일본미제사건 세타가야일가족살인사건에 대해 포스팅했는데요한국의 3대 미제사건도있지만 일본미제사건도 정말 미스테리하고요 정말 저널리스트가 조사한 한국인 이인은(가명)이 범인일까요??아니면 또다른 범인이 우리주위에 있을까요...[네이버]블로그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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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친일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6.6사건
흔히 6월 6일은 사람들에게 현충일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지난 역사 속에서 6월 6일은 치욕적인 사건의 날로 기록돼 있다. 1949년 6월 6일, 이날은 친일경찰들이 주도해 '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습격한 날이다. 이 사건으로 친일파 청산을 위해 구성된 반민특위는 두 달여 뒤인 1949년 8월 31일 자로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8일 친일기업인 박흥식(전 화신 사장)을 시작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검거에
나섰다. 이에 맞서 이승만 정부와 친일세력들의 방해 공작도 날로 심화되어 갔다. 친일기업인들이나 경찰들은 광범위한 정보조직을 동원하여 방해 공작을 전개하였는데 그들은 특위
요원들에 대한 중상모략은 물론 관제 데모 조장이나 테러, 암살모의도 서슴지 않았다. 그해 5월 하순, 이승만 정부는 이문원, 최태규, 이구수, 황윤호 의원 등 4명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전격 구속하였다. 정부는 이들이 남로당 프락치라고 발표했다. 6월에는 다시 김약수 국회부의장을 비롯해 노일환, 서용길 의원 등 13명을 구속했다. 소위 ‘제2차 국회프락치사건’이다. 이들 소장파 의원들은 외국군 철수 등을 주장한 진보 성향이었는데, 노일환, 서용길 의원은 반민특위
위원이기도 했다. 구속 의원들에 대한 석방결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국회는 크게 위축되기 시작했다. 반민특위가 활동하던 1949년 당시 남대문로 2가(현 롯데백화점 맞은편 명동쪽)에 있던 반민특위 청사. 특위
해산 후 국민은행 건물로 사용되었다.
이런 가운데 친일세력들의 기세는 날로 높아갔다.
6월 2일 친일세력들의 사주를 받은 관제 시위대가 국회 앞에서 특위 요원들을 비방하고 체포된 반민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튿날 6월 3일, 이들은 특위 습격을 시도하였으나 특경대 요원들이 공포탄을 쏘며 해산시켰다.
시위 주동자는 친일경찰 출신의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로 밝혀졌다.
최운하가 구속되자 서울 시내 각 경찰서의 사찰경찰 150여 명은 특경대 해산을 요구하며 집단사표를
제출하였다.
이들은 반민특위와 일전불사를 밝혔다.
사태는 날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6월 5일, 서울 중부서장 윤기병, 종로서장 윤명윤 등은 “실력으로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시키자”고
뜻을 모은 후 시경국장 김태선을 통해 내무차관 장경근의 허락을 얻어냈다.
장경근은 이승만 대통령의 사전 양해를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이승만은 AP 기자에게 특경대 해산은
자신이 지시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경향신문, 1949.6.8.)
이날 밤, 반민특위 습격 사건을 사전 모의한 이들은 이튿날(6.6) 새벽 중부서에서 선발한 50여
명을 두 대의 쓰리쿼터에 태워 남대문로에 있던 특위 본부로 출동시켰다.
이것이 소위 ‘6.6사건’, 즉 반민특위 습격 사건의 시작이다. 반민특위 습격 다음 날인 6월 7일 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관련 기사. 제목에서 특위 '습격' 대신
'돌연수색'이라고 쓴 것이 이채롭다.
이 사건을 지휘한 행동책임자는 중부서장 윤기병이었다.
그는 장탄한 권총을 꺼내 들고는 경찰들을 지휘하며 출근하는 특위 요원 35명을 쓰리쿼터에 강제로 태워
사라졌다.
이들은 모두 중부서에 감금돼 심한 가혹 행위를 받았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자행됐다.
반민특위 각 도 지부 사무실의 전화선이 모두 절단되었는데 경기도지부 사무실은 경찰에 의해 봉쇄되었다.
이날 권승렬 특별검찰부장은 경찰들에 의해 차고 있던 권총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합동 통신사의 반민특위 출입 기자였던 오소백은 그때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사건 직후 내가 권승렬 특검부장(검찰총장 겸임)을 만난 것이 특위 청사 2층에서였다.
온건한 인상을 풍기는 권 총장의 이날 모습은 상기되어 있었다. 권 총장이 차고 있던
권총도 경찰에 빼앗겼다는 정보를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확인할 길이 없었다. 입을 꽉 다문 권 총장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생각
끝에 인터뷰를 걸었다.
- 총장께서 권총을 차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까? “틀림없다.”
- 그럼 총장께서 차고 있던 권총을 자진해서 누구에게 건네준 일은 없습니까?
“그런 일은 없다.”
- 그렇다면 총장의 권총이 지금 경찰 손에 들어가 있는 게 사실입니까?
“그렇다. 그건 사실이다.”
- 그렇다면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닙니까? “상상에 맡기겠다.”
인터뷰는 끝났다. 어쩔 수 없이 통신(합동통신)에도 이렇게 문답식으로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권승렬 특검부장
그때의 일을 두고 오 선생은 생전에 필자와의 인터뷰(1999년 봄)에서 권 총장이 권총을
‘빼앗겼다’는 식으로 쓴 것을 두고 “‘빼앗겼다’는 말은 없지만 읽어보면 결국 그런 얘기죠. 그때 통신에도 그렇게 보도했는데 왜냐하면 빼앗는 걸
보지도 않고 빼앗겼다고 하면 만일 ‘너 빼앗는 거 봤느냐?’고 하면 제가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그래서 당시 상황을 문답 형식으로 쓴 거죠.
그때 살벌한 분위기여서 내가 그건 생각해서 쓴 거죠”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사건은 곧 국회로 비화되었다.
국회에 불려 나온 장경근 내무차관은 뻔뻔하게도 “특경대 해산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국회는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내각 총사퇴를 결의했으나 이미 국회는 힘을 잃은 상태였다.
결국 협상 결과 특위가 구속한 최운하, 조응선(종로서 사찰주임) 등 친일경찰과 연행된 특경대원들을
교환, 석방하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그 와중에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하면서 반민특위는 극도로 위축되었고 국회
내에서 특위 운영에 회의론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AP 기자에게 특경대 해산은 자신이 명령한 것이라고 말한 내용을 다룬 6월 8일 자 경향신문
기사.
이런 틈을 타서 친여 세력들은 반민법 개정을 들고 나왔다.
때마침 법무장관을 마치고 국회도 돌아온 이인을 비롯하여 곽상훈 등은 1950년 6월 20일까지로
규정된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31일까지로 단축시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어수선한 틈을 타 개정안은 7월 6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개정안이 통과되자 김상덕 위원장 등 반민특위 위원 전원은 항의 차원에서 그다음 날로 일괄 사퇴하였다.
반민특위 2기 위원장에 선임된 이인은 반민법 제정을 반대했던 장본인이었다.
결국 2기 특위는 잔무처리를 한 후 그해 8월 31일로 문을 닫았다.
반민특위는 반민법 공포(1948.9.22.)로부터 채 1년도 안 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특위 업무는 형식적으로는 대법원과 대검찰청에 이관되었으나 대부분이 무죄 또는 가벼운 자격정지형으로
끝나 결과적으로 친일파 척결은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출범 당시 특위는 7천여 명의 반민족행위자를 파악해 놓고 있었으나 실지로 특위가 취급한 건수는
682건(여자 60명 포함)에 불과했다.
채 1할도 다루지 못한 셈이다.
그나마 검찰에 송치한 건수는 559건, 석방 84건, 영장취소 30건, 기소 221건, 그리고 재판을
종결한 건수는 고작 38건에 불과했다.
원문: 보림재 - 임종국을 보배로
받드는 서재
참고 <증언 반민특위-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 정운현, 삼인,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