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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맨체스터 시티 '탈출' 금액 책정됐다...'1350억'이면 이적 허용, 초대형 계약 예고
맨체스터 시티가 훌리안 알바레스(24)의 가격표를 책정했다.맨시티는 다가오는 시즌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5연패에 도전한다. 하지만 시작부터 주축 선수들의 이탈이 우려되고 있다. 일단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다음 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날 가능성이 등장한 가운데 케빈 데 브라이너, 에데르송 등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여기에 알바레스 또한 이적을 원한다는 소식이다.알바레스는 아르헨티나 자국 팀인 CA 리버 플레이트에서 뛰며 주목을 받았고 2022년 겨울 이적시장에서 맨시티 유니폼을 입었다. 맨시티는 작은 체구에서도 강력한 슈팅력과 위협적인 움직임을 가져가는 알바레스 빠르게 선점했다. 알바레스는 뛰어난 활동량과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멀티 능력으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알바레스는 1,400만 파운드(약 233억원)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2022-23시즌부터 맨시티에 합류했다. 알베르스는 첫 시즌부터 리그 31경기 9골을 터트렸다.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 10경기 3골을 포함해 총 49경기 17골 4도움으로 트레블에 힘을 더했다. 올시즌에도 리그에서 36경기에 출전해 11골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이번 여름 이적시장에서 거취가 뜨거워지고 있다. 파리 생제르망(PSG), 첼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등이 알바레스를 원하며 영입 경쟁이 펼쳐졌다. 알바레스도 현재 이적을 고려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알바레스는 주축 자원으로 활약했음에도 여전히 엘링 홀란드에 비해 출전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다고 전해졌다.맨시티는 알바레스를 절대 팔지 않겠다고 강조했으나 최근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스페인 ‘풋볼 에스파냐’를 비롯한 복수의 매체는 23일(한국시간) “맨시티는 기본금 7,000만 유로(약 1,050억원)에 옵션 2,000만 유로(약 300억원)가 포함된 9,000만 유로(약 1,350억원)면 알바레스의 이적을 허용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당초 입장과 달리 구체적인 이적료까지 공개가 되면서 알바레스를 원하는 팀들은 더욱 영입을 검토하고 있다. 매체는 아틀레티코는 현실적으로 해당 금액을 투자할 상황이 아니라고 했지만 자본력이 있는 첼시와 파리 생제르망은 영입이 가능한 상황이다.
해왕고리작성일
2024-07-24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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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아르헨티나, 파리 올림픽 최종 명단 발표.
GK: 레안드로 브레이(보카 주니어스), 헤로니모 루이(아약스, 와일드카드)DF: 마르코 디 카사레(라싱), 훌리오 솔레르(라누스), 호아킨 가르시아(벨레스), 곤잘로 루한(산 로렌조), 니콜라스 오타멘디(벤피카, 와일드카드), 브루노 아미오네(산토스 라구나)MF: 에제키엘 페르난데스(보카 주니어스), 산티아고 에제(올림피아코스), 크리스티안 메디나(보카 주니어스), 케빈 제논(보카 주니어스)FW: 히울리아노 시메오네(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루시아노 곤도우(아르헨티노스), 티아고 알마다(애틀란타), 클라우디오 에체베리(리버 플레이트), 훌리안 알바레즈(맨체스터 시티, 와일드카드), 루카스 벨트란(피오렌티나) https://www.afa.com.ar/es/posts/lista-de-convocados-para-viajar-a-los-juegos-olimpicos-de-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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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마스탄투오노, 레알 마드리드 이적에 매우 근접
레알 마드리드가 4,500만 유로의 바이아웃 조항을 약 2,500만 유로로 낮추기 위해 협상 중이다.프랑코 마스탄투오노는 레알 마드리드로 향하는 길을 계속 걷고 있다. 레알 마드리드는 16세의 젊은 아르헨티나 선수가 단순한 유망주 그 이상이며, 구단이 찾고 있는 유형의 선수에 완벽하게 맞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젊고, 재능 있으며, 1군 팀에서 활약할 수 있는 발전 가능성을 지닌 선수다.리버 플레이트와의 접촉은 이미 시작되었고, 산티아고 솔라리는 유럽으로의 도약 이전에 아르헨티나에서 선수로 활약했던 그의 팀과의 연락 담당자였다. 리버 플레이트의 부회장 이그나시오 비야로엘이 MARCA에 고백한 바에 따르면, 클럽 간의 관계는 훌륭하며, 솔라리가 대사로 있는 것이 큰 역할을 한다.레알 마드리드는 마스탄투오노가 리버 플레이트에서 한 시즌 더 뛰고 나서 이적하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는 몇 달 전 선수와 지도자들이 합의한 4,500만 유로의 바이아웃 조항을 지불할 의향은 없다. 협상은 그 지점에서 진행 중이며, 리버 플레이트의 지도자들은 마스탄투오노의 의지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아르헨티나에서는 맨체스터 시티가 주도하는 레알 마드리드보다 더 높은 제안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맨체스터 시티는 이미 리버 플레이트의 유소년팀에서 훌리안 알바레스와 에체베리를 영입한 바 있다. 레알 마드리드는 차분하고 여유 있게 움직이고 있다. 이미 일부 과정이 완료되었고 이제 거래를 마무리하는 일만 남았지만, 레니 요로의 경우처럼 유리한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다.레알 마드리드는 아르헨티나 시장을 오랫동안 주시해 왔다. 클럽의 일부 부문은 남미 선수 영입에 있어 레알 마드리드의 시장이 브라질에서 시작되고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첫 시도는 훌리안 알바레스였다. 하지만 로드리고, 밀리탕, 비니시우스가 스페인 여권을 받지 못하면서 비유럽 선수 한도를 넘었고, 어린 시절 클럽에서 잠시 시험을 받았지만 미성년자 선수 영입 문제와 관련된 문제로 진행할 수 없었다.2021년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비유럽 선수 한도가 이미 채워져 있어 여지가 없었으나, 현재는 여유로운 상황이다. 다음 시즌에는 단지 엔드릭만 비유럽 선수로 남아 있다.맨체스터 시티는 적절한 시기에 나타나 2,500만 유로를 지불하고 훌리안 알바레스를 데려갔다. 이는 레알 마드리드가 16세의 아르헨티나 미드필더이자 U-20 국가대표를 영입하기 위해 지불할 의향이 있는 금액이다.현재 레알 마드리드는 신속하게 움직여 방해 요소가 없는 상황에서 아르헨티나 축구의 큰 유망주를 빠르게 영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https://www.marca.com/futbol/real-madrid/2024/06/24/66794e61ca4741270b8b45a7.html
해왕고리작성일
2024-06-26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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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우리가 상대해야할 포르투갈,우루과이 엔트리 명단
▲ 2022 카타르 월드컵 포르투갈 최종명단골키퍼 : 디오구 코스타(포르투), 조세 사(울버햄턴원더러스), 후이 파트리시우(AS로마)수비수 : 주앙 칸셀루, 후벤 디아스(이상 맨체스터시티), 다닐루 페레이라, 누누 멘데스(이상 파리생제르맹), 디오구 달로(맨체스터유나이티드), 페페(포르투), 안토니오 실바(벤피카), 라파엘 게레이루(보루시아도르트문트)미드필더 : 마테우스 누녜스, 후벤 네베스(이상 울버햄턴원더러스), 베르나르두 실바(맨체스터시티), 브루누 페르난데스(맨체스터유나이티드), 비티냐(파리생제르맹), 주앙 마리우(벤피카), 주앙 팔리냐(풀럼), 오타비우(포르투), 윌리엄 카르발류(레알베티스)공격수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맨체스터유나이티드), 주앙 펠릭스(아틀레티코마드리드), 안드레 실바(RB라이프치히), 하파엘 레앙(AC밀란), 곤살루 하무스(벤피카), 히카르두 오르타(브라가) ▲ 2022 카타르 월드컵 우루과이 최종명단골키퍼 : 페르난도 무슬레라(갈라타사라이), 세르히오 로체트(나시오날), 세바스티안 소사(인디펜디엔테)수비수 : 로날드 아라우호(바르셀로나), 세바스티안 코아테스(스포르팅), 마르틴 카세레스(LA갤럭시), 호세 히메네스(아틀레티코마드리드), 디에고 고딘(벨레스사르스필드), 마티아스 올리베라(나폴리),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나시오날), 마티아스 비냐(AS로마), 기예르모 바렐라(플라멩구)미드필더 : 페데리코 발베르데(레알마드리드), 로드리고 벤탄쿠르(토트넘홋스퍼), 마티아스 베시노(라치오), 루카스 토레이라(갈라타사라이), 히오르히안 데아라스카에타(플라멩구), 니콜라스 데라크루스(리버플레이트), 마누엘 우가르테(스포르팅)공격수 : 루이스 수아레스(나시오날), 에딘손 카바니(발렌시아), 다윈 누녜스(리버풀), 파쿤도 토레스(올랜도시티), 막시 고메스(트라브존스포르), 파쿤도 펠리스트리(맨체스터유나이티드), 아구스틴 카노비오(아틀레치쿠파라나엔시) 우루과이 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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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12월 22일 지구촌 오늘
프랑스 파리의 실내 경기장인 베르시 아코로텔 아레나에서 21일(현지시간) 지난 파리테러 후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에 나선 익명의 '영웅들' 에 대한 감사 콘서트가 열린 가운데 콘서트에 참여한 사람들이 야광봉을 흔들고 있다. 파리 테러 후 피해자를 지원했던 의료관계자, 보안서비스 요원, 구조요원,소방대원,의사,경찰,군인 등이 포함한 약 12만여명이 참석했다. 파리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21일(현지시간) 노숙자 등이 네덜란드 구세군 주관으로 열린 연례 크리스마스 만찬 행사에 참석해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암스테르담전기자동차로 유명한 테슬라의 CEO 엘론 머스크가 이끌고 있는 민간 우주선 개발업체 스페이스X의 팰컨 9 로켓이 21일(현지시간) 미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네버럴 공군기지에서 소형 위성 11개를 장착하고 발사된 후 1단 추진 로켓이 다시 지상 수직 착륙 성공했다. 플로리다 제프 블래터 FIFA 회장이 국제축구연맹(FIFA) 윤리위원회로부터 '자격정지 8년' 중징계를 받은 가운데 21일(현지시간) 블래터 FIFA 회장이 스위스 취리히의 옛FIFA 본부인 호텔 소넨베르크에서 징계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취리히공익광고 전문가 이제석이 지난 20일 중국 베이징에서 기후변화 방지 대책의 실천을 촉구하는 아트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이번 퍼포먼스는 지난 11일 폐막한 제21차 UN 기후변화총회 이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촉구하고 중국과 미국 등 선진국의 실천과 참여를 강조하기 위해 기획됐다. 하와이에서 연말 휴가를 즐기고 있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카일루아의 미드-퍼시픽 컨트리클럽에서 골프를 즐기 던 중 18번홀에서 칩샷을 성공시킨 후 기뻐하고 있다. 카일루아100여명의 난민을 태운 보트가 리비아 서부 잔주르를 출발해 에게해를 건너 이탈리아로 가려다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한 가운데 21일(현지시간) 트리폴리 서부에서 리비아 해안경비대에 구조된 아프리카 난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20일 실시된 스페인 총선에서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한 집권 국민당이 연립정부 구성 협상에 착수했지만 주요 정당이 참여를 거부하고 있는 가운데 21일(현지시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한 남성이 찢겨진 우파 신생정당인 시우다다노스 당 대표의 선거 포스터 앞을 지나가고 있다. 바르셀로나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 세르즈 사르키샨 아르메니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알마즈벡 아탐바예프 키르기스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에서 열린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회의에 참석해 대화를 하며 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옛 소련권 군사동맹체인 집단안보조약기구(CSTO)는 미국과 유럽이 주축이 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맞서 2002년 러시아 주도로 창설됐다. 모스크바21일(현지시간) 바티칸 클레멘타인 홀에서 바티칸 직원들을 대상으로 연례 크리스마스 인사에 참석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연설을 하고 있다. 교황은 이자리에서 바티칸 관료조직이 갖져야 할 투명성과 겸손, 책임감, 근면성, 성숙성, 맑은 정신 등 '12가지 약'을 제시했다. 바티칸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외곽 자라마나 지구 자택에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레바논 군 사령관 사미르 쿤타르가 사망한 가운데 21일(현지시간) 레바논 남부 항구 도시 시돈의 한 상점 앞 노점상들이 보복 다짐을 하며 연설 중인 헤즈볼라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의 모습이 방영되고 있는 TV를 시청하고 있다. 중국 베이징의 제2중급인민법원에서 22일(현지시간) 중국의 인권 변호사 푸즈창에 대한 선고공판이 열린 가운데 공안들이 외국기자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푸즈창은 이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3년 선고 받았다. 베이징영국으로 밀입국을 하기 위해 영불 해저터널인 유로터널에 진입하려는 난민들이 모여 있는 '뉴정글' 이라고 불리는 프랑스 북부 칼레에 있는 난민캠프 입구에서 21일(현지시간) 한 근로자가 난민들을 위해 만들고 있는 컨테이너 숙소 앞을 지나가고 있다. 이곳에 1500여명 이상의 난민들을 내년 1월 5일까지 수용할수 있도록 약 130여개의 컨테이너를 숙소를 마련. 칼레1988년 런던 히드로 공항을 떠나 뉴욕으로 향하던 팬암 항공기 103편이 스코틀랜드 로커비 마을 상공에서 폭발한 사건 27주년을 맞은 21일(현지시간) 미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알링턴중국 광동성 남부 선전공단에서 발생한 산사태로 건물 33동이 매몰되고 사망자가 처음으로 확인되었으나 실종자의 수가 당초보다 줄어든 85명으로 발표돼 공식 집계에 대한 의혹이 일고 있는 가운데 22일(현지시간) 사고현장에서 수색작업으로 기진맥진해진 구조요원들이 땅바닥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다.산전크리스마스를 앞둔 21일(현지시간) 이라크 바그다드의 자와라 공원에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가 설치되어 있는 가운데 시민들이 회전목마를 타며 즐거워하고 있다. 바그다드프랑스 니스 지중해 해안에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열린 전통 행사에서, 산타클로스가 카약이 끄는 설매에 타고 있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FIFA 클럽월드컵' 결승에서 스페인 프로축구팀 FC 바르셀로나가 아르헨티나의 리버 플레이트를 3대 0으로 누르고 우승했다.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시상식에서 환호하고 있다.러시아 시베리아 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눈사람 대회가 열렸다. 러시아의 산타클로스인 데드모로즈 복장의 남성이 눈사람 사이를 걷고 있다중국 베이징에서 예술가 리우보린의 작품 '동지'를 위해 모델들이 위장색을 칠한 채 서있다. 리우보린은 중국과 중국인, 대기오염에 대한 우려를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Douma의 동네에서 시리아 정부군의 공습에 인해 다친 아이를 안고 뛰고 있는 한 남성 엘론 머스크 진짜 멋지다... 위성까지 쏘네 ㄷㄷㄷㄷ 마지막 사진은 눈물 나네요 ㅜ.ㅜ 나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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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금빛화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길고도 긴 축구역사에서 최고 중에 최고라고 인정받으며 가장 위대하고 존경받는 선수중 한명이자 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 of 레전드인 금빛화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이야기입니다. 그의 위대한 일생을 짧게나마 돌아보겠습니다.
1. 남아메리카 정복기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1926년 7월 4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출생했다. 1943년 만17세에 나이에 리버 플레이트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디 스테파노는 1945년까지 단 1경기만을 뛰었음에도 프리메라 디비시온(아르헨티나 1부리그)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이 우승트로피는 그가 앞으로 얻을 명예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CA우라칸으로 임대를 떠나 재능을 꽃피운 그는 1947년 리버 플레이트로 돌아와 30경기에 나와 27골을 넣어 팀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에 큰 공헌을 했으며 국가대표 마크를 단 채 코파 아메리카에서 6경기 6골로 영웅적인 활약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후 그의 이러한 활약상이 리버 플레이트에서 꾸준히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디 스파테노는 이적을 결정한다. 아르헨티나 프로연맹의 파업으로 인한 여파로 여느 선수처럼 이적을 고려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콜롬비아의 로스 미요나리오스로 떠나갔고 그곳에서도 최고수준의 활약을 선보였다. 그리고 운명의 1953년, 마침내 디 스테파노는 스페인 무대로 진출하게 된다.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남미에서 이뤄낸 것들프리메라 디비시온 아르헨티나: 1945, 1947 총 2회 우승콜롬비아 챔피언쉽: 1949, 1951, 1952 총 3회 우승 코파 콜롬비아: 1953 우승리버 플레이트 72경기 53골CA 우라카 24경기 11골로스 미요나리오스 102+경기(102경기 이상으로 정확한 경기수 측정불가) 100골등등등
(챔피언스리그의 과거이름인 유로피언컵 5연패로 얻은 트로피들)2. 레알 마드리드 CF의 황금기1953년 디 스테파노는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이끌려 레알 마드리드 CF에 입성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디 스테파노의 전설도 막이 오른다. 그는 53-54 데뷔시즌부터 피치치(라리가 득점왕)과 프리메라리가 우승 타이틀을 석권했고 54-55, 56-57, 57-58 시즌까지 4번이나 프리메라리가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거기에 55-56, 56-57, 57-58 유로피언컵을 들어올린 그는 역대 최고의 선수라는 칭송을 받기에 부족하지 않은 커리어를 당시부터 이미 완성해버린다. 그럼에도 디 스테파노는 멈출 줄을 몰랐다. 1958년 레알 마드리드는 '질주하는 소령' 이라고 불리던 최강의 공격수, 페렌츠 푸스카스를 영입해왔고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의 조합은 레알을 단숨에 역사상 최강의 팀으로 만들어 버렸다. 60-61, 61-62, 62-63, 63-64 프리메라리가 4연속 우승과 1960년 인터컨티넨탈컵 우승 그리고 58-59, 59-60 유로피언컵을 싹쓸한 것이다. 이것은 레알 마드리드가 유럽 챔피언을 가리는 유로피언컵에서 전인미답의 5연패를 이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이뤄낸 것들을 보면프리메라리가: 53-54, 54-55, 56-57, 57-58, 60-61, 61-62, 62-63, 63-64 총 8회 우승코파 델 레이: 61-62 우승유로피언컵(챔피언스리그): 55-56, 56-57, 57-58, 58-59, 59-60 5연패인터컨티넨탈컵:1960년 우승피치치(라리가 득점왕): 1954, 1956, 1957, 1958, 1959 총 5회 수상스페인의 올해의 체육인:1957, 1959, 1960, 1964 발롱도르:1957, 1959 총 2회 수상엘클라시코: 18경기 18골(엘클 역대 최다골 타이)총 396경기 307골등등등 으로 그가 진정한 커리어의 본좌임을 알수 있다.
3. 선수생활 은퇴 이후1964년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 잠깐 FC바르셀로나의 지역 라이벌, RCD 에스파뇰에서 두시즌 간 활약한 디 스테파노는 이후 선수생활에서 은퇴할 것을 선언한다. 그는 은퇴 이후 여러팀의 감독을 맡았다. 감독생활 중에 그는 리버 플레이트, 보카 주니어스를 리그우승에 성공시켰고 70년-71 시즌 발렌시아 감독으로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79-80 시즌에 발렌시아로 다시 돌아와 위너스컵을 들어올리기도 했다. 또한 82-83 시즌에는 자신이 전성 기를 보냈던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서 리그와 코파델레이를 전부 2위로 마치며 이름값에 걸맞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결국 다음시즌 도중 성적부진으로 레알 감독직에서 경질되었다. 1991년을 마지막으로 감독생활도 청산한 디 스테파노는 현재는 레알 마드리드의 명예회장으로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그는 때로는 팀을 향해 비난을 서슴치 않으며 반대로는 팀의 중요한 행사에 꼭 참여하며 애정을 들어내고 있다. 가장 최근에 디 스테파노는 5월 5일(한국시간) '문도 데포르티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식들에 반대를 무릅쓰고 50세 연하의 여비서 지나 곤잘레스(36)와 결혼을 선언하여 세간에 충격을 줬다. 문제는 결혼을 반대한 자식들이 그를 감금했다고 여비서가 주장하고 있는 사실...(쩐의 전쟁)
4. 플레이스타일디 스테파노의 포지션은 포워드였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그를 미드필더로 취급한다. 그러나 사실 그의 포지션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디 스테파노가 수비 진영, 미드필더 진영, 공격 진영, 중앙에서 측면까지 어느곳에서라도 자주 볼수 있을 정도로 위치에 구애받지 않는 독보적인인 활동량을 자랑하는 플레이어였으며 어떤 포지션에서라도 해당 포지션이 요구하는 최고 수준의 플레이를 펼치는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경기 내내 미 친듯한 스테미너로 위치에 제약없이 경기를 누비고 위치에 따른 모든 포지션에서 최고였던 그의 플레이스타일은 이제는 전설이다. 그는 또한 빠른 스피드로도 유명했다. 이런 그의 경이적인 능력에는 수많은 찬사가 따라왔으며 펠레나 마라도나의 천재성을 뛰어넘는다는 평가까지도 존재한다.
5. 매우 눈물나는(?) 국가대표팀 경력클럽 커리어는 역사상 어느선수와 비교해도 크게 밀릴 것이 없는 디 스테파노 이지만 그에게도 한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바로 월드컵 우승 경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디 스테파노 본인의 탓으로만 돌릴수는 없다. 그를 둘러싼 상황 자체가 매우 기형적이었고 그로인해 디 스테파노가 희생당했다는 표현이 더 적당하다. 디 스테파노의 첫 월드컵 출전 기회는 1950년 브라질 월드컵이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정부가 출전을 거부하면서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디 스테파노는 콜롬비아 대표팀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단 4경기만을 뛰었을 뿐으로 1954년 월드컵에는 아르헨티나에서 뛰기를 원했으나 그의 조국은 다시한번 월드컵 출전을 거부한다. 심지어 아르헨티나와 콜롬비아 두곳에서 뛰었다며 FIFA가 그의 출전 자체를 불허하면서 디 스테파노는 출전 자격조차 얻지 못한채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불운은 계속되었다. 1957년 스페인 국적을 취득하여 스페인 국대가 되었지만 1958년 스페인이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면서 17세의 펠레가 새로운 영웅이 되는것을 TV를 통해 지켜봐야 했으며 마지막 기회였던 1962년에는 부상으로 인하여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다. 결국 국가대표로서 디 스테파노의 커리어는 코파 아메리카 우승 정도가 전부이다. 어쩌면 평생 3개의 국가대표팀에서 뛴 결과.... 지금은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의 이중국적자로 남아있다.
6. 바르셀로나에서 뛰었던 경력레알 마드리드의 전천후 레전드인 디 스테파노는 사실 FC바르셀로나에서 뛸뻔했다. 아니. 거의 확정까지 갔었으며 실제로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뛴적도 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디 스테파노가 유럽클럽과의 교류전에 나섰을 당시 FC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두팀 모두의 레이더에 그가 포착되었다. 그의 활약에 감탄한 것은 두팀 모두였지만 먼저 선수를 친 팀은 바르셀로나였다. 디 스테파노 영입에 가장 중요했던 부분은 원소속팀이었던 미요나리오스와 그전 소속팀이었던 리버 플레이트가 서로가 디 스테파노의 소유권을 가지고 싸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르셀로나는 리버 플레이트에 주목했다. 그리고 기대했던 대답을 얻었다. 리버 플레이트는 원소속팀이었던 미요나리오스와의 합의를 전제로 이적을 허락했다. 디 스테파노는 계악이 성사되기도 전에 이미 바르셀로나로 건너가있었다.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디 스테파노가 바르셀로나와의 계약서에 사인하면서 이제 캄프 누에서의 입단식 만이 남은 상태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수는 그제서야 등장했다. 스페인 축구협회는 원 소속클럽이었던 미요나리오스와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계약을 승인하지 않았다. 원소속클럽과의 합의는 리버 플레이트가 디 스테파노의 이적을 허락해주는 대신 바랬던 부분이기도 했다.그리고 이런 혼란기에 레알 마드리드가 나타났다. 그들은 미요나리오스에게 이적료를 지불하여 1954년까지 디 스테파노를 소유할 권리를 가졌다. 한 마디로 디 스테파노는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두팀 모두가 디 스테파노에게 이적료를 지불하여 소유권을 얻은 이중계약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는 그를 유벤투스로 이적시키자고 합의를 보았다. 바로 이때 스페인 축구협회가 나타나 이를 만류하며 중재를 하였고 1년마다 번갈아가며 뛰게하자는 계약서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바르셀로나팬들은 계약서에 반발했고 디 스테파노가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 가진 몇차례의 친선전에서 보여준 부진한 모습을 이유로 들며 그를 포기하자는 주장이 나타났다. 이런 주장이 대두됨에 따라 당시 바르셀로나의 회장이었던 카레토는 400만 페세타의 보상금을 받고 디 스테파노를 레알 마드리드로 보내주기로 결정하고 즉시 사임했다. 이후 레알 마드리드는 리버 플레이트에게 이적료를 지급하면서 디 스테파노는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가 되었다.(아직까지도 디 스테파노의 영입과정을 두고 많은 주장들이 있다. 누군가는 독재자 프랑코가 디 스테파노를 영입하려는 바르셀로나의 노력에 방해공작을 펼쳤다고 주장하며 누군가는 바르셀로나 스카우터가 레알 마드리드측에게 뇌물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다른쪽에서는 레알로 가기를 원한 디 스테파노가 평가전에서 일부로 부진한 플레이를 펼쳤다고 주장하며 가장 이상한 주장은 디 스테파노를 프랑코가 협박했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모든게 음모론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확실한건 두팀이 그를 유벤투스로 보내기로 결정했고 이때 스페인 축구협회가 끼어든점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tnPDBLaWufA마지막으로 이건 1959-1960 챔피언스리그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8강전 경기입니다. 디 스테파노, 푸스카스, 헨토 등 올드스타들을 한눈에 보실수 있습니다. 세 선수 모두가 골도 넣습니다.
- 레알매니아 펌.
나딕사작성일
2013-10-02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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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동영상] 바르셀로나가 선택한 미래 - 유망주 백승호
이건 메시 어린시절이라고 하네요...속았네....
레알과 바르샤가 이 한아이를 데리고 가기 위해 경쟁해서 바르샤가
집부터 해서 다 재공하는 걸로 백승호군 부모님을 설득함
바르샤가 가족까지 다 떠안으면서 어린선수를 영입한건
바르샤 역사상 메시를 포함해서 4명뿐인데
우리 백승호가 5번째임...ㄷㄷㄷ
백승호 군은 초딩때 이미 중학리그 까지 평정함
키도 바르샤가 메시를 영입할때와 비슷하고 영입배경도 비슷..ㅋㅋ
바르샤에서는 한국의 메시라고 부름
나이키가 잠재력을 보고 공식 스폰서까지 붙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나라 재목들
1.백승호 축구 신동 백승호.이번에 바르셀로나 FC 유스에 입단한 12살 유망주 스트라이커입니다.입단하게 된 계기는 예전에 우리나라 유스가 카탈루냐 대회인지 뭐시기에 초청받고 거기서 한판 붙었는데 백승호가 혼자서 원맨쇼하면서 해트트릭을 기록했었다고 합니다.그걸 보고 눈이 휘둥그래진 티토 빌라노바 바르샤 수석 코치가 미칠듯한 속도로 필기를 샤샤샥 하면서 점찍어 뒀다더군요.그후 바로 바르샤의 시설을 맛보라고 3일간 바르샤 훈련장에 초청을 하기도 하고..1군 훈련하는거도 보여주면서, 이리로 오라고 살살 구슬렸다고 합니다. 아, 덤으로 레알도 마찬가지로 관심을 가졌었다고...이 상황이 예전에 바르샤가 메시를 데려올 때의 상황과 아주 유사하다고 하네요.키가 146cm, 152cm설이 있는데, 어느쪽이든 그리 큰 키는 아니라는 점까지 메시와 비슷하군요. 하지만 정보를 조합해보면 메시같은 윙어형이라기보단 천부적인 골맛을 아는 스트라이커형으로 보여집니다
(이 동영상은 백승호가 3학년때 6학년 팀원들이랑 같이 할때 당시의 동영상)
2.김로만 고작 13살인데도 벌써 180cm까지 키가 자라있는 장신 골키퍼 유망주, 김로만입니다.워낙 미남이라 나중에 크면 여자 꽤나 울리고 다닐듯 합니다.(꽃미남)러시아 하바롭스크서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 김영식(38)씨와 회사 직원이었던 러시아 출신 김 악사나(40)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네요.'2009년 초등학교 전국 3개 대회(칠십리배,소년체전,화랑대기) 전승 우승! 전 경기 무실점으로 방어!' 이 한마디면 이 유망주의 실력이 대강은 설명이 될 듯 합니다.차세대 국대 키퍼를 맡을수 있는 자질이 보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카시야스도 꽤 어렸을 때부터 키퍼 맡았으니 조기 국대 발탁도 기대해봄직 한데 말이죠. 3.이강인날아라 슛돌이로 유명해진 이강인입니다.인천 유나이티드 U-12 저학년 부에 소속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저 어린 나이에 이미 프로선수급의 테크닉을 익히고 있습니다.앞으로 커가면서 피지컬이 보통정도만 받혀준다면 뭐.. 유럽리그 B급 수준의 선수가 될 자질은 확실해 보이고요.피지컬까지 대박 터져준다면 한국 최초로 S급 선수가 등장할지도 모르겠네요. 한마디로 앞길이 탄탄대로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백승호와 함께 가장 기대하고 있기는 한데, 언제 클려나 모르겠습니다. ^^
참고로 유상철이 해외유학보낼려고 했는데 이강인 부모님이 아직 너무 어린나이라
해외가서 고생할까봐 걱정되서 인천유스 입단했다네요..^^
4.김우홍지단의 아들 엔조 지단과 함께 한국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스페인 프로축구 프리메라리가의 레알 마드리드 유소년팀에 입단했다.현재 지단의 아들 엔조지단과 더불어 유스안에서 TOP3에 드는 실력이라고이상태를 유지 TOP5안에 항상들어가야 레알마드리드 1군에서 들수있다고..그 TOP5중에도 2~3명만 들어간다는 레알 ㅎㄷㄷ꼭 한국인최초 레알마드리드1군에 들어가길.... 이정빈영상으로 유명해진 축구신동 이정빈입니다. 이제 중2 아니면 중3쯤 되었으려나요? 인천 유나이티드 유스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영상밖에 본것이 없어서 골결정력이라던가 판단력이라던가, 세밀한 부분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영상에 나온 장점인 돌파를 잘 살려서 앞으로 클래식 윙어로서 활약해주면 좋은 선수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5.서명원중학생 `축구 괴물' 서명원, 5경기 14골 폭발서명원은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 포츠머스 유스팀에서 활약했던 한국 축구의 기대주다.당진 계성초등학교 5학년이던 지난 2007년 칠십리배 춘계유소년연맹선수권대회 결승에서 경기 시작과 함께 하프라인부터 50여m를 혼자 볼을 몰고 들어가서 수비수 3명을 따돌리고 그림 같은 선제골을 넣었던 서명원은 대회 우승과 함께 최우수선수(MVP)로 뽑혔고 이듬해 제20회 차범근축구상 대상을 받았다.서명원은 지난해 3월 포츠머스 유소년팀에 입단해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포츠머스의 어려운 재정 상황 때문에 계약 유지가 어렵게 되자 9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영국에서 선진 축구를 배운 미드필더 서명원은 이번 금석배에서 진가를 유감 없이 뽐냈다.대회 예선 1차전이었던 경신중과 경기에서 팀이 0-1로 지는 바람에 득점포를 가동하지 못했으나 대구 북중과 경기에선 4골 1어시스트의 눈부신 활약으로 5-1 승리에 앞장섰다.이어 예선 마지막 경기였던 전북 고창 북중과 맞대결에선 혼자 6골을 몰아치고 3개의 어시스트를 배달해 10-0 완승을 이끌었다.골맛을 본 그는 논산중과 44강에서도 해트트릭을 작성하며 어시스트 1개까지 보태 4-1 승리를 주도했다. 하지만 백마중과 32강에서는 전반 15분 선제골을 넣고도 1-1 무승부 대결 끝에 승부차기에 1번 키커로 골문을 가르고도 결국 팀이 2-3으로 지면서 16강 길목에서 탈락하는 아쉬움을 남겼다.예선 3경기를 포함해 총 5경기에서 무려 14골과 4어시스트를 올린 놀라운 성적표다.서명원은 미드필더이면서도 공격수 못지않은 골 결정력을 자랑한다. 182㎝의 좋은 체격 조건에 100m를 11초대에 주파하는 빠른 스피드, 대포알 같은 슈팅,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한 빼어난 경기 조율 능력은 고교급의 특급 스트라이커 못지않다.그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블랙번 로버스와 맨체스터 시티, 버밍엄 시티 등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서명원의 에이전트사는 이들 3개 구단과 유소년팀 입단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남기설 신평중 감독은 "미드필더이면서 웬만한 대학생 스트라이커 못지않은 슈팅력에다 고교급 선수에 버금가는 경기 조율 능력을 가졌다. 약점인 유연성만 보완한다면 18세 이후에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거로 성장할 재목"이라고 칭찬했다.6.석현준석현준!! 이선수도 잘 알려져 있죠..현재 네덜란드리그 아약스에서 1군에서 활약중인 석현준아약스팬들도 많이 기대하는 선수중 한명이라는군요..1군과2군을 왔다갔다 감독도 석현준 기량을 조금더올려 주전 스트라이커로 쓰고싶은 기대주라고 했다는군요.....장신 스트라이커...파워드리블에 피지컬이좋고 탁월한 골결정력,그리고 헤딩슛과 발리슛까지 골고루 실력을 인정받은 공격수입니다 7.남태희 고등학교 중퇴 후 2007년 대한축구협회의 주도하에 추진한 '유소년 축구 유학 프로젝트' 5기에 선발되어 레딩 FC 유소년팀에 입단하였고, 2008년 레딩 FC U-20팀과 입단 제안을 받기도 하였다. 레딩 FC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잠재력을 인정받았으며, 레딩 FC의 핵심 선수인 스티븐 헌트는 "지금껏 지켜본 어린 선수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라고 호평하기도 하였다.2009년 1월 프랑스 리그 앙의 발랑시엔 FC와 아마추어 선수 계약을 맺었고, 리그 규정상 만 18세가 되는 그 해 7월 발랑시엔 FC 1군과 입단 계약을 맺어, 대한민국 축구 선수 사상 최연소로 유럽 리그 1군 무대에 진출한 선수가 되었다. 2009-10시즌 AS 낭시와의 홈 개막전 경기에서 프랑스 리그 앙에 데뷔하여, 대한민국 축구 선수 사상 최연소(18세 36일)로 유럽 리그 1군 무대에 데뷔한 선수가 되었다.8.김귀현 2003년 로돌포 아르만도 코치와 아르헨티나로 유학 아르헨서 크는 '제2 홍명보'… 명문 벨레스 15세 팀 수비수 김귀현아르헨티나 명문 클럽 15세 팀의 주전 수비수로 자리 잡았다. 김귀현(15).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벨레스 사르스필드 클럽의 15세 팀주전 수비수다. 1910년 창단한 벨레스는 지난해 보카 주니어스. 리버 플레이트 등 명문 클럽들을 제치고 아르헨티나 프로리그 우승을 차지한 팀이다. 당시 남해축구교실의 지도자는 아르헨티나 청소년대표팀을 지도했던 로돌포 아르만도(41)였다. 남다른 열정과 재능을 지닌 귀현이를 눈여겨본 그는 2003년 축구교실이 유명무실해지자 귀현이를 데리고 아르헨티나로 갔다. "세계적인 선수로 키워보겠다"고 결심한 그는 귀현이를 3년째 자신의 집에 데리고 있다. 아르만도 코치는 "귀현이는 시야가 넓고 킥이 정확하다. 벨레스 구단에서도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많은 유망주들이 한국을 축구 강국으로 세계에 반열에 올려놓을 것을 의심치 않는다...꼭 더많은 선수들이 그 기량을 인정받아 해외명문팀 레알마드리드,FC바르셀로나,맨체스터UTD,리버풀,아스날,첼시,AC밀란,인터밀란,바이에른뮌헨,등등에서 주전을 꿰어차고전설적인 선수로 살아가길...더불어 한국이 월드컵에서 꼭 FIFA컵을 들어올리는 장면도꼭 볼수있을거라는 즐거운 상상을해본다...
단군조선작성일
2010-06-30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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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동영상] 가슴이 뻥뚫리는 슛팅의소유자 원조득점기계 무결점스트라이커 의리의싸나이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에겐 항상 축구가 있다"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본명 : Gabriel Batistuta)
출생 : 1969년 2월 1일, 신체 : 키 185cm, 체중 73kg 아르헨티나
1969년 2월 1일, 아르헨티나 레꼰퀴스타에서 출생. 1988년, 아르헨티나 1부리그 뉴웰스올드보이스에서 데뷔, 4골 터뜨리며 팀 우승에 기여.1989년, 리버플레이트를 거쳐 보카 주니오스로 이적.1991년, 이탈리아 피오렌티나 입단. 이적료 230만 달러.1992/1993시즌, 16골 터뜨리며 맹활약했지만 피오렌티나는 세리에B로 강등. 바티스투타, 세리에A 팀들의 이적 제의 모두 거절.1993/1994시즌, 26경기 16골. 1년만에 팀을 세리에A로 되돌려놓다. 1994년 6월, 미국월드컵 그리스전에서 해트트릭.1994/1995시즌, 시즌 개막 이후 팀이 치른 11경기에서 모두 득점. 11경기 연속골로 이탈리아 기록 경신. 32경기 26골 세리에A 득점왕.1996년 4월, 볼리비아전에서 1골 추가해 팀의 3-1 승리를 이끎과 동시에 마라도나가 갖고 있던 아르헨티나 역대 A매치 최다골 기록(34골)과 동률을 이루다.1996년 5월, 아탈란타와의 이탈리안컵 결승전에서 1,2차전 모두 골을 터뜨려 우승. 피오렌티나가 모든 대회를 통틀어 21년만에 처음 얻은 트로피이자 바티스투타의 9년간 피오렌티나 생활에서 유일한 우승.1997년 4월, 바르셀로나 누캄에서 열린 UEFA컵 4강전에 동점골 작렬. 당시 골을 넣고 10만 관중을 향해 펼친 '쉿~' 세리머니는 지금까지 이탈리아 축구의 기념비적인 장면으로 남아있다.1997년11월, 10개월만에 아르헨티나 대표팀 재발탁.1998년 6월, 프랑스월드컵 자메이카전에서 해트트릭. 1998/1999시즌, 리그 첫 13경기에서 13골 몰아쳐 피오렌티나를 중간순위 1위에 올려놓음. 그러나 불의의 무릎부상으로 결장하는 사이 팀은 악전고투, 3위로 시즌 마감하다.2000년 1월, 1999년 FIFA 올해의선수상 투표에서 히바우두-베컴에 이어 3위. 피오렌티나 소속으로 152골째를 터뜨려 1950년대 스웨덴 출신의 커트 함린이 갖고 있던 종전 팀내 최다골 기록을 경신하다.2000년 5월, 시즌 마지막 경기서 해트트릭. 피오렌티나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던 탓에 세번째 골을 넣은 뒤 울음을 터뜨리다. 피오렌티나 통산 269경기, 168골.2000년 여름, 3천380만 달러에 AS로마 합류.2000/2001시즌, 20골 터뜨리며 AS로마 우승 진두지휘.2001/2002시즌,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극도의 부진. 불과 6골 득점. 2002년 6월, 한/일 월드컵 16강 진출 실패. 대표팀 은퇴.2002/2003시즌, 벤치 멤버로 전락한 뒤 인터밀란으로 임대.2003년, 카타르 알 아라비 입단.2004년, 첫번째 풀타임 시즌 동안 25골 작렬.2005년 3월, 무릎 부상이 심각해 구단과 상호 합의 하에 계약 종료. 선수 은퇴 선언...
▣ '바티골'의 축구 인생 ▣▶ 바티스투타와 아르헨티나 대표팀가브리엘 바티스투타는 1991년 3월 27일 브라질과의 친선 경기에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데뷔전을 갖는다. 이 때의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루게리, 고이코에체아 그리고 카니자와 같은 주축 선수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티스투타도 선발 명단에 포함 되었으나 골을 기록하진 못했다. 대신 당시 바람의 아들로 불리워졌던 카니자가 결승골을 터뜨리며 아르헨티나의 1 : 0 승리를 이끌었다. 90년대 초반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천하무적의 팀 이었다. 켐페스와 파사레야의 활약으로 자국에서 개최됐던 78 월드컵 우승이나 마리도나의 신들린 활약으로 우승했던 86 월드컵 때와 같이 무척 화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활약했거나 현재 활약중인 재능있는 선수들로 이루어진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국제경기 33게임 무패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바티스투타에게 가장 잊혀지지 않는 첫 대회는 91 코파 아메리카 였다. 이 대회에서 아르헨티나는 우승을 거머줬고, 바티스투타는 6게임에 출장하여 6골을 터뜨리며 대회 득점왕을 차지한다. 이것이 바티스투타가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유럽의 명문 구단들이 바티스투타에게 큰 관심을 보였고, 결국 세리에A의 피오렌티나가 그를 데려갔다. 아르헨티나는 94 월드컵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에 도착했다. 많은 아르헨티나인들은 자국 대표팀이 월드컵을 차지할 수 있다는 야망에 휩싸여 있었다. 비록 피오렌티나는 세리에 B로 강등 되었지만 바티는 자신의 실력을 다시 한번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했고, 월드컵에 대비해 만반에 준비를 했다. 또한 당시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마라도나의 컴백으로 더욱 주목받고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예선 첫 경기에서 바티의 해트트릭과 마라도나의 골로 그리스를 4 : 0으로 대파했고, 두번째 경기에서는 카니자의 2골로 나이지리아를 2 : 0으로 완파했다. 그러나 마라도나가 팀의 상승세에 제동을 건다. 경기 후 실시된 약물 검사에서 마라도나가 양성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이것으로 인해 팀 분위기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마라도나는 팀을 떠나야 했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16강전에서 루마니아에게 2 : 3으로 역전패를 당하며 94 월드컵 우승의 꿈을 접어야 했다.94 월드컵 후 모든 것이 변화하기 시작했고, 그 변화는 다니엘 파사레야가 새 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시작됐다. 이것은 바티의 대표팀 생활에도 변화를 가져다 줬고, 새 대표팀의 앞날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결국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97 코파 아메리카 준준결승에서 브라질에게 승부차기로 패하면서 탈락한다. 그리고 98 프랑스 월드컵 남미 지역예선은 바티에게 고통으로 다가왔다. 바로 예선이 진행되는 약 1년여동안 대표팀을 들락날락 거린 것이었다. 비록 대표팀에 차출 될때마다 골을 기록했으나 파사레야는 바티를 팀의 중심으로 생각치 않는 듯 보였다. 그리고 바로 이 때 바티는 마라도나가 가지고 있던 국가대표 최다골 기록을 깨뜨리며 새로운 기록 보유자가 된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98 월드컵에서 다시 한번 불운을 맛봐야 했다. 비록 바티는 5골을 넣으며 대활약을 펼쳤지만 팀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결국 8강전에서 네덜란드에게 패하면서 탈락하고 만다. 이 경기에서 파사레야는 바티스투타를 크레스포로 교체시키지만 크레스포가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실패로 돌아갔고, 이것이 파사레야 시대의 끝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4년 후, 바티스투타는 2002 월드컵을 앞두고 또 다시 전세계 축구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사람들은 그가 3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 늙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바티가 독일의 게르트 뮐러가 갖고 있는 월드컵 최다 득점 기록(14골)을 뛰어넘을 수 있기를 바랬다. 바티는 94년과 98년 대회에서 각각 4골과 5골씩을 성공시켜 총 9골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었다.대표팀의 지휘봉은 비엘사가 잡고 있었다. 2001년 최우수 감독으로 선정되며 아르헨티나를 남미 지역 예선 1위로 이끌었던 이 명장은 파사레야와는 달리 바티에게 두터운 신임을 보냈다. 절정에 오른 크레스포는 다시 한 번 바티의 아성에 밀려 벤치에 앉아야만 했다. 나이지리아전에서 헤딩슛으로 결승골을 터뜨린 바티는 이때까지만 해도 변함없는 아르헨티나의 수호신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와의 라이벌전에서 그는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고, 스웨덴과의 3차전에서는 조국 아르헨티나의 탈락을 지켜보며 굵은 눈물 방울을 훔쳐야 했다. 많은 축구팬들은 바티의 눈물을 지켜보며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바티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지만 그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스트라이커 중 한명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 바티스투타의 프로 경력다른 축구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바티스투타의 초반 프로 경력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다. 바티는 1년에 $20,000를 받고 1988년 뉴웰스 올드 보이스에서 그의 프로 생활을 시작한다. 바티는 가끔 주전으로 뛰기도 했지만 별로 주목받지는 못했고, 결국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데포르티보 이탈리아노로 임대된다. 임대된 이후 바티는 1989년에 'Viareggio' 대회에 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지만 팀은 아쉽게도 바티의 20번째 생일날 토리노에게 패하면서 탈락하고 만다.그러나 바티는 파워를 이용한 골결정력으로 팀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데는 성공한다. 그 후 바티는 세티미오 알로시오로 팀을 옮긴 후 다시 레이날도 메를로가 지휘하던 리베르 플라테로 이적한다. 팀의 이적은 항상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고, 바티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메를린 감독의 후임으로 관계가 좋지 않던 파사레야가 부임하면서 상황이 다시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바티는 단 한 경기도 출장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침울함이 점차 노여움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마침내 6월 리베르 플라테를 떠나 보카 후니오르스로 이적한다. 그러나 보카에서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면서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고, 팬들의 팀에 대한 압력도 결코 도움이 되지 못했다. 1991년 1월 오스카 타바레즈가 보카의 새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대대적인 팀개편이 이루어졌고, 새 감독은 각 선수들이 자신들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왔다. 보카는 점점 강팀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 진출한다. 비록 아르헨티나 챔피언쉽을 차지하는데는 실패하지만, 바티는 꾸준히 득점을 하며 그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로나, 유벤투스, 레알 마드리드, 피오렌티나와 같은 유럽 구단에서 입단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한다.바로 이 때 바티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일원으로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했고, 팀의 우승을 이끌어 낸다. 피오렌티나의 부회장인 비토리오 세치 고리는 바티의 재능과 엄청난 골 감각을 보고 그를 피오렌티나로 데리고 온다. 피오렌티나에서도 바티는 문화와 언어의 차이 그리고 동료와의 의사소통 문제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그렇지만 바티는 원만한 성격과 성실함으로 장애물들을 넘아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바티는 득점을 하기 시작했고, 그의 골들이 팀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피오렌티나 팬들도 점차 아르헨티나에서 온 재능있고 성실한 이 금발의 젊은이에게 응원을 보내기 시작했다.1992년 2월 26일, 유벤투스전에서 성공시킨 결승골을 시작으로 '바티골'의 신화가 시작된다. 유벤투스전 이후로 아무도 바티의 득점 행진을 막지 못했고, 바티는 제노아전에서 두 골, 포지아전에서 해트트릭 그리고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두 골을 넣는등 골폭풍을 몰고온다. 그러나 이런 대활약에도 불구하고 바티는 어떤 개인상도 받지 못했고, 팀도 리그 12위의 성적에 만족해야 했다. 더욱이 다음 시즌엔 라우드럽과 에펜베르크와 같은 좋은 선수들을 영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리에 B로 강등되고 만다. 그 후 팀의 새 감독으로 클라우디오 라니에리가 들어온다. 라니에리는 바티를 감독했던 6명의 이탈리아 감독들(라자로니, 라디세, 아그로피, 말레자니, 트라파토니)중 한 명 이었다. 그리고, 라니에리의 지도 아래 바티는 그의 첫 리그 개인상을 수상한다. 바티는 팀의 중심이 되었으며, 세리에 B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팀에 남기로 결심한다. 피오렌티나에 대한 바티의 자부심과 애정이 결국 페오렌티나를 세리에 A로 다시 올려놓는다. 바티의 용기와 승리에 대한 집념이 세리에 B에서 뛴다는 수치심을 극복하게 했고, 마침내 피오렌티나를 세리에 A로 다시 복귀시킨다. 다시 세리에 A로 돌아온 바티는 11주 연속골 이라는 새로운 골 기록을 세우며 30년 동안 볼로냐의 파스쿠티가 가지고 있던 연속골 기록을 갈아치운다. 바티의 수준과 재능이 이 도달하기 어려운 기록을 달성하게끔 했다.또한 이 해는 'la bandierina(코너 깃발)'의 해로 기억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골을 넣은 후 바티가 코너 깃발을 이용해 하는 아주 인상적인 골 세레모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95-96 시즌에 다가올 전주곡에 불과했다. 피오렌티나는 돌풍을 일으키며 리그 3위를 차치해 당당히 UEFA컵에 출전했으며, 5월 18일 베르가모에서 아탈란타를 물리치고 '코파 이탈리아'를 차지한다. 4개월 후, 바티는 '산 시로'에서 바레시가 이끄는 밀란 수비진을 농락하며 멋진 2골을 뽑아내 피오렌티나에게 '수퍼 코파'를 선사한다. 또한 이 해에 바티는 그의 세리에 100경기 출장을 달성하고, 101번째 출장인 라치오전에서 2골을 기록하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피오렌티나에서 직접 제작한 실제 바티의 사이즈의 대형 이미지 동상을 받기도 한다. [사진: 피오렌티나의 '신' 바티스투타. 그의 동상은 아직도 피렌체 도시 한 가운데에 우뚝 세워져있다. (게티이미지/유로포토)]코파 이탈리아를 우승한 덕분에 바티와 피오렌티나는 유럽 컵 위너스 컵 경쟁에 뛰어들 수 있었다. 피오렌티나는 다름아닌 바티의 활약으로 글로리아 비스트리아, 스파르타 프라하, 벤피카등을 차례로 물리치고 준결승에서 프리메라 리가의 거물 바르셀로나와 맞닥들이게 된다. 이것은 바티와 호나우두간의 라이벌 관계로 더욱 관심을 끌었다. 바르셀로나에서 벌어진 원정 경기에서 바티가 호나우두가 침묵을 지키는 틈을 타 귀중한 동점골을 터뜨리며 누 캄프에 모인 9만명의 바르카 팬들을 침묵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티는 이 경기에서 경고를 받았고, 이것으로 인해 피오렌티나에서 벌어질 2차전에 출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바티의 결장을 이용해 바르셀로나가 결승에 진출한다. 97-98 시즌이 개막되고 바티는 우디네세 전에서 해트트릭, 피렌체 전에서 2골을 넣으며 2경기 만에 5골을 작렬시킨다. 그리고 바로 이 시즌에 바티는 세리에 A 통산 100번째 골을 성공시키기도 한다.다음 시즌 세계적인 명장 지오바니 트라파토니가 피오렌티나의 새 감독으로 부임했고, 그 덕분에 바티는 계속 팀에 머물수 있었다. 트래파토니는 바티에게 피오렌티나를 세리에 A 우승으로 이끌자고 격려했고, 정말로 피오렌티나는 바티의 활약으로 시즌 중반까지 리그 1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우승을 향해 힘차게 진군하던 바티와 피오렌티나는 거대한 암초를 만나게 된다. 바로 2월 7일 밀란과의 경기에서 바티가 심각한 부상을 입으며, 무려 한달 동안이나 결장해야 했던 것이다.다행히 바티는 부상에서 회복했으나 이미 팀은 주장을 잃은 것에 당황하며 라치오에게 우승을 넘겨준 뒤였다. 이 시즌, 피오렌티나는 리그 3위로 마감하며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따냈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99-2000 시즌, 피오렌티나는 바티스투타를 지원할 미야토비치, 키에사 그리고 발보를 영입하며 다시 한번 세리에A 제패에 나선다. 그러나 이번 역시 그 목표를 이루지 못했고, 바티는 오프 시즌에 정 들었던 피오렌티나를 떠나 AS 로마로 팀을 옮긴다. 그리고 마침내 바티는 프란체스코 토티라는 불세출의 스타와 함께 로마에서 이탈리아 제패의 꿈을 이룬다. 00/01 시즌에 바티는 무려 20골을 폭발시켰고, 올림피크 스타디움에서 펼쳐졌던 최종 라운드에서 팀의 승리를 확정짓는 골을 터뜨리며 감동적인 세레머니를 선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더욱 인상적이었던 사건은 바로 바티가 로마의 유니폼을 입고 피오렌티나의 홈구장을 방문했던 일이었다. 바티는 피오렌티나 팬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고, 종료 직전에 대포알같은 중거리슛으로 오랜 동료 톨도를 무너뜨리며 결승골을 성공시킨뒤 뜨거운 눈물을 훔쳤다.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루이 코스타가 바티를 따뜻하게 안아주었고, 관중들 또한 울음을 참지 못하며 과거의 영웅 '바티스투타'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제 바티는 인터 밀란에서 짧은 시간을 보낸 후, 카타르로 건너가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불태우기를 원한다. 앞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바티스투타의 이름은 서서히 지워져가겠지만, 그가 이탈리아와 세계 축구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영원히 빛나는 업적으로 남게 될 것이다.▣ 바티스투타를 말하는 사람들 ▣"나는 많은 팀의 감독을 맡아봤지만 바티스투타만큼 훌륭한 골잡이를 본적은 거의 없다." - 지오바니 트라파토니(전 피오렌티나, 현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내 소원이 하나 있다면 바로 바티스투타를 포르투갈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 마누엘 루이 코스타(현 AC 밀란/포르투갈 대표팀 미드필더, 98' 프랑스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한 이후 대표팀의 골잡이 부재를 아쉬워하며)"바티스투타는 정말 놀라운 선수다. 그는 항상 어떻게 하면 골을 넣을 수 있을지 깊게 생각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그것을 성공시킬 수 있다. 더욱 놀라운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바티스투타의 컨디션이 불과 20%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 프란체스코 토티(현 AS 로마/이탈리아 대표팀 미드필더, 바티스투타가 AS 로마로 이적해온 직후 기자들이 바티에 대한 소감을 묻자)"바티스투타의 위대함은 그와 같은 팀에서 뛰게 되면 100% 깨달을 수 있다." - 프란체스코 토티(00/01 시즌 세리에A 우승을 달성한 이후 인터뷰 중에서)"내 생애 바티스투타같은 공격수는 본적이 없다. 그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 나카타 코지(현 일본 대표팀/가시마 앤틀러스 수비수, 2002 월드컵 직전에 아르헨티나와 가시마의 연습 경기에서 바티스투타가 혼자 4골을 터뜨리자)"바티스투타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다. 하지만 나 역시 지난 몇년간 유럽 무대에서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왔다. 나와 바티가 함께 뛸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매우 잘 알고 있으며, 투톱으로 뛰게 된다면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거라 확신한다." - 에르난 크레스포(현 인터 밀란/아르헨티나 대표팀 공격수, 2002 월드컵을 앞두고 비엘사 감독이 자신과 바티스투타를 함께 기용하는 전술을 채택하지 않자)"바티스투타와 크레스포가 세계 최고의 공격수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최고의 선수를 갖고 있어도 기용하지를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 디에고 마라도나(전 아르헨티나 대표팀 미드필더/86' 멕시코 월드컵 우승 주역, 2002 월드컵에서 바티스투타와 크레스포를 투톱으로 기용해야 한다며)P.R.O.F.I.L.E성명 : 가브리엘 오마르 바티스투타(Gabriel Omar Batistuta)생년월일 : 1969년 2월 1일국적 : 아르헨티나신장 : 185cm체중 : 73kg주포지션 : 스트라이커클럽 : 뉴웰스 올드 보이즈(아르헨티나), 리베르 플라테(아르헨티나), 보카 후니오르스(아르헨티나), 피오렌티나(이탈리아), AS 로마(이탈리아), 인터 밀란(이탈리아)주요경력 : 1991 아르헨티나 리그 우승, 1991 아르헨티나 리그 득점왕, 1991 코파 아메리카 우승, 1991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1993 코파 아메리카 우승, 1995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94/95 시즌 세리에A 득점왕, 세리에A 연속 경기 득점 기록(11주) 수립, 1996 이탈리안컵 우승, 사상 최초 월드컵 2연속 해트트릭, 00/01 시즌 세리에A 우승- 사커라인(www.soccerline.co.kr) -
정말 인간적으로도 멋있는....그가 진정한 영웅이네요
출처 : 아이러브사커 / Gerrardinho
조운자룡작성일
2010-05-18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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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동영상] 바티골! 바티스투타 스폐셜 & 프로필
1969년 2월 1일, 아르헨티나 레꼰퀴스타에서 출생.
1988년, 아르헨티나 1부리그 뉴웰스올드보이스에서 데뷔, 4골 터뜨리며 팀 우승에 기여.
1989년, 리버플레이트를 거쳐 보카 주니오스로 이적.
1991년, 이탈리아 피오렌티나 입단. 이적료 230만 달러.
1992/1993시즌, 16골 터뜨리며 맹활약했지만 피오렌티나는 세리에B로 강등. 바티스투타, 세리에A 팀들의 이적 제의 모두 거절.
1993/1994시즌, 26경기 16골. 1년만에 팀을 세리에A로 되돌려놓다.
1994년 6월, 미국월드컵 그리스전에서 해트트릭.
1994/1995시즌, 시즌 개막 이후 팀이 치른 11경기에서 모두 득점. 11경기 연속골로 이탈리아 기록 경신. 32경기 26골 세리에A 득점왕.
1996년 4월, 볼리비아전에서 1골 추가해 팀의 3-1 승리를 이끎과 동시에 마라도나가 갖고 있던 아르헨티나 역대 A매치 최다골 기록(34골)과 동률을 이루다.
1996년 5월, 아탈란타와의 이탈리안컵 결승전에서 1,2차전 모두 골을 터뜨려 우승. 피오렌티나가 모든 대회를 통틀어 21년만에 처음 얻은 트로피이자 바티스투타의 9년간 피오렌티나 생활에서 유일한 우승.
1997년 4월, 바르셀로나 누캄에서 열린 UEFA컵 4강전에 동점골 작렬. 당시 골을 넣고 10만 관중을 향해 펼친 '쉿~' 세리머니는 지금까지 이탈리아 축구의 기념비적인 장면으로 남아있다.
1997년11월, 10개월만에 아르헨티나 대표팀 재발탁.
1998년 6월, 프랑스월드컵 자메이카전에서 해트트릭.
1998/1999시즌, 리그 첫 13경기에서 13골 몰아쳐 피오렌티나를 중간순위 1위에 올려놓음. 그러나 불의의 무릎부상으로 결장하는 사이 팀은 악전고투, 3위로 시즌 마감하다.
2000년 1월, 1999년 FIFA 올해의선수상 투표에서 히바우두-베컴에 이어 3위. 피오렌티나 소속으로 152골째를 터뜨려 1950년대 스웨덴 출신의 커트 함린이 갖고 있던 종전 팀내 최다골 기록을 경신하다.
2000년 5월, 시즌 마지막 경기서 해트트릭. 피오렌티나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던 탓에 세번째 골을 넣은 뒤 울음을 터뜨리다. 피오렌티나 통산 269경기, 168골.
2000년 여름, 3천380만 달러에 AS로마 합류.
2000/2001시즌, 20골 터뜨리며 AS로마 우승 진두지휘.
2001/2002시즌,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극도의 부진. 불과 6골 득점.
2002년 6월, 한/일 월드컵 16강 진출 실패. 대표팀 은퇴.
2002/2003시즌, 벤치 멤버로 전락한 뒤 인터밀란으로 임대.
2003년, 카타르 알 아라비 입단.
2004년, 첫번째 풀타임 시즌 동안 25골 작렬.
2005년 3월, 무릎 부상이 심각해 구단과 상호 합의 하에 계약 종료. 선수 은퇴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