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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코인과세 확정기사
좀전에 민주당 당론에서 코인과세를 내년부터 하겠다는 당론 확정 기사가 났습니다. 몇년간 마이너스였다가, 이제 트럼프 당선되고 한달도 안된 시간에 마이너스 좀 회복되고 있는데, 매년 결손금 이월공제도 없이 과세를 한다면 과세형평성에 맞지도 않습니다. 2년만 더 유예해주고 시스템좀 갖추고 제대로 과세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과세 기준점도 국세청도 없어요. 또 내년부터 몇년 가까이 기다려왔던 대세 상승장이 예상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5천만원 이상의 수익을 낼거로 기대하는데, 민주당은 많은 사람들이 5000만원 이상의 수익을 낼 사람들이 적기 때문에 실제 과세 효과가 없다는 아마추어적 오판을 하고 있고요.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장기 홀더들은 분명히 해외거래소로 유출될게 뻔해요. 그리고… 지금 민주당은 한표라도, 특히 젊은 20~30대 표가 필요한 당 아닙니까? 코인판은 800만 이용자중, 20~30대가 절반을 넘어요. 코인쪽 게시판 텔레그램쪽은 엄청난 분노와 반발이 넘치고 있습니다. 당장 힘모아서 적폐를 몰아내야하는데, 왜 이렇게 힘을빼는지요. 이번 트럼프 대선에서도 트럼프가 크립토쪽에 적극적인 지지를 받은 이유, 해리스와 민주당이 크립토를 적대시했던 거에 비해서, 선거전략의 일부 승리원인으로 분석도 있잖아요. 심지어 트럼프는 세금을 철폐한다고 하고요.. 참 답답합니다. 아니 새롭게 고성장할수 있는 시장이나 사업분야에 세금을 면제하거나 유예해주는 당근정책을 안쓰고, 왜케 징벌식으로 다루는지 너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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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세계 여자축구 발전을 이끌어낸 용감한 노르웨이 전사들
“나는 매우 화가 나서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1986년, 엘렌 빌레가 분노한 대상은 세계 축구 관리 기관 국제축구연맹(FIFA)이었다. 당시 노르웨이축구연맹(NFF) 집행 위원인 그는 “FIFA 보고서에는 여성 축구에 대한 언급이 단 한 줄도 없다”며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BBC는 1일 이 연설이 이후 여성 축구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돌아보며 “1970년대 초 비로소 잉글랜드축구연맹은 여성 축구에 대한 50년 간 금지령을 해제했다”고 회고했다.1970년 이탈리아에서 첫 번째 비공식 여자 월드컵이 열렸다. 이듬해에는 멕시코에서 다른 비공식 세계 대회가 개최됐다. 대회는 관중 10만 명을 끌어들였지만, FIFA 지원은 전혀 없었다. 아마추어 축구 선수이기도 했던 빌레는 1976년 NFF에 합류했고 그 해 노르웨이에서도 여성 축구가 승인됐다.빌레는 당시 멕시코 시티에서 열리는 FIFA 총회에서 연설했다. 빌레는 BBC에게 “내가 도착했을 때, 여자 통역사들 외에는 모두 남자들뿐이었다”며 “FIFA 총회에서 여성이 발언한 것은 내가 처음”이라고 말했다.그는 키가 147㎝에 불과했다. 무대에 올라갔지만, 얼굴이 마이크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연설을 시작했다. BBC는 “연설의 정확한 내용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고, 연설 기록이나 녹음본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하지만 연설을 직접 목격한 이들 중에는 당시 FIFA 회장인 주앙 아벨란제와 사무총장 제프 블래터가 있었다”고 전했다. 빌레는 이들에게 “심판과 국제 토너먼트에서 여성 축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요청했다.1986년 총회 공식 FIFA 보고서에 따르면 아벨란제는 빌레에게 직접 감사를 표하며, FIFA가 해당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1988년에 여성들을 위한 첫 번째 세계 대회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빌레에 따르면, 아벨란제 발언 후 모든 시선은 그의 오른팔인 블래터에게로 쏠렸다. 블래터는 아벨란제의 뒤를 이어 1998년부터 2015년까지 회장직을 맡은 인물이다. 빌레는 “블래터가 연단에 올라와서 내 의견에 동의하는 발언을 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라고 말했다.여성 축구 발전에 10년 넘게 힘써온 또 다른 노르웨이 인물은 페르 라브느 옴달이다. 전 축구 선수였던 그는 1987년에 NFF 회장이 됐다. 그는 “FIFA는 매우 빠르게 반응했고, 중국에서 시범 월드컵을 개최했다”며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말했다. 오랜 로비 활동 끝에 FIFA는 월드컵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1991년 첫 번째 토너먼트는 ‘제1회 FIFA 여성 축구 월드 챔피언십’이라는 긴 이름을 받았으나, 이후 월드컵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95년 스웨덴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90분 경기가 치러졌고 당시 노르웨이가 우승했다.이후 NFF 최초 여성 회장이자 노르웨이 대표팀 출신인 리세 클라베네스가 바통을 이었다. 클라베네스는 카타르 월드컵이 열리기 몇 달 전, 도하에서 열린 2022년 총회에서 거의 모든 남성 청중을 향해 연설했다. 클라베네스는 “엘렌이 1986년 FIFA 무대에 올랐을 때부터 우리는 아주 멀리 왔다”며 “여성 축구에 아무것도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누군가가 여러분을 위해 싸워줘야 했고, 우리는 여전히 그 싸움을 하고 있다”며 “여전히 대부분 국가에는 여성 회장이 없고, 이사회 여성 대표, 여성 코치가 적으며 최상위 리그가 프로 선수들이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2023년 여자 월드컵이 관중 약 200만 명을 끌어들였다. 수백만 명이 TV로 월드컵을 시청했다. 여자축구가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끌기 시작한 증거다. 클라베네스는 “여자 축구를 활성화하는 것은 여성의 싸움이 아니라, 인류의 싸움”이라며 “여성 축구가 가진 힘을 반영하는 프로 환경이 될 때까지는 아직 갈 길이멀다”고 말했다.
도지페페작성일
2024-11-01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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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전처와 아내가 함께, 6남 1녀도...남다른 다르빗슈의 '행복한 일주일'
일본인 투수 다르빗슈 유(38ㆍ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특별한 일주일을 보냈다. 전처와 둘 사이에서 난 두 아들을 불러 함께 지낸 것이다. 장소는 미국 집이다. 지금 부인과 자녀 5명이 살고 있는 곳이다.다르빗슈는 28일 자신의 SNS를 통해 “얼마 전에 전처와 아들 2명이 샌디에이고에 놀러 왔습니다”라고 공개했다. 이어 “일주일 정도 집에 머무르며 (지금) 아내와 4명의 아들, 딸 하나도 함께 지냈습니다”라고 밝혔다.그는 “(아이들이) 첫날부터 헤어질 때까지 함께 지내면서, 많은 추억이 생겼습니다. 정말 행복한 일주일이었습니다”라고 전했다.게시물에는 사진 하나가 보인다. 7명의 실루엣이 그려진 이미지다. 그는 “(지금) 아내가 만들어준 일생의 보물입니다”라고 자랑했다.다르빗슈는 21세 때인 2007년 10월 모델 겸 배우 사에코와 결혼했다. 결혼 발표 당시 임신 중이었고, 이듬해(2008년) 봄에 첫아들이 태어났다. 2년 뒤에는 둘째 아들도 생겼다.둘은 2011년부터 별거에 들어갔고, 2012년 1월에 합의 이혼했다. 아버지가 아이들에 대한 친권을 포기하는 대신, 위자료 없이 양육비로 매달 200만 엔(약 1800만 원)씩 지급하는 조건이었다.2년 뒤인 2014년, 다르빗슈는 두 번째 결혼을 발표했다. 상대가 지금 아내인 야마모토 세이코다. 6살 연상으로 세계선수권 대회를 3연패 한 아마추어 레슬링계의 스타다.그녀 역시 이혼 경력이 있다. 전 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데려와 가족을 이뤘다. 이후 둘 사이에는 4명의 자녀(아들 3, 딸 1)가 더 태어났다. 합해서 4남 1녀의 다복한 가정을 이뤘다.다르빗슈의 가족에 대한 각별함은 남다르다. 얼마 전 디비전 시리즈(다저스전) 때는 사망한 처남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기자회견장에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야마모토 키드(KID) 노리후미라는 인물인데, 일본에서는 ‘천재’라고 불리던 파이터다. 2018년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위암이었다.그 여동생이 지금 다르빗슈의 부인 세이코다. 재혼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오빠의 투병 사실을 알게 됐다. 그때는 이미 손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의료진은 “임종을 준비하라”라고 권했다.안타까운 소식에 처남 다르빗슈가 나섰다. “남은 시간 1분, 1초라도 가족들과 함께 마음 편하게 지내시라”며 고인이 평소 좋아하던 괌에 안식처를 마련했다.병이 깊어 여객기를 이용하기 힘들다는 얘기에 의료시설을 갖춘 전용기(에어 앰뷸런스)까지 동원했다. 24시간 돌볼 전담 의료진도 곁에 두게 했다. 가족(아내와 3자녀)들의 숙소와 머무는 데 필요한 일체의 경비도 부담했다.그렇게 3~4개월을 보낸 후 세상을 떠났다. 다르빗슈는 이후에도 고인이 후배들을 위해서 준비하던 이벤트 대회를 전액 후원하면서 차질 없이 치를 수 있도록 했다. 또 현재까지 유족들의 생계에도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크42작성일
2024-10-29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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