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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일반] 문화 대혁명(중국 인민의 역사-마오쩌둥) 1962~1976 3부
프랑크 디쾨터 저/고기탁 역 누가 동지이고 누가 적인가? 이는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다. - 마오쩌둥 연대표 1956년 2월 25일제 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 정권 때 재판 없이 행해진 잔인한 숙청과 대대적인 추방, 처형 비난함. 1956년 여름제8차 중국 공산당 전국 대표 대회 중 당헌에서 <마오쩌둥 사상>에 대한 부분이 삭제되고 개인숭배가 비난받음. 1956년 겨울 ~ 1957년 봄마오쩌둥이 대다수 동료들의 조언을 무시한 채 백화제방 운동을 통해 보다 열린 정치 풍조를 부추김. 중국 전역에서 시위와 저항 운동, 파업이 일어남. 1957년 여름비난 공세가 거세지면서 당의 지배권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등 백화제방 운동이 역화를 일으킴. 방침을 바꾼 마오쩌둥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이들을 향해 당을 무너뜨리려는 <불순분자>라고 비난함. 덩샤오핑을 책임자로 임명한 반우파 투쟁에서 50만 명이 박해를 받음. 당은 주석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몇 개월 뒤 대약진 운동이 시작됨. 1958년 ~ 1961년대약진 운동이 기간 중 모든 농민이 인민공사라고 불리는 거대한 집단 농장에 소속됨. 이후 몇 년 간 고문과 과로, 질병, 굶주림 등으로 수천만 명이 사망함. 1962년 1월수천 명의 당 간부들이 참가한 베이징에서 열린 확대 회의에서 류사오치가 기근을 인재로 서술. 마오쩌둥에 대한 지지가 사상 최저 수준에 이름. 1962년 여름마오쩌둥이 집단 농장의 토지가 재분할되는 상황을 비난하고 <계급투쟁을 잊지 말라>라는 슬로건을 내세움. 1962년 가을사회주의 장점을 대중에게 교육하고 계획 경제 테두리 밖에서 일어나는 경제 활동을 탄압하기 위해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 시작됨. 1963년 ~ 1964년류사오치가 사회주의 교육 운동에 거세하고 자신의 아내 왕광메이를 시골로 보내 공작대를 이끌게 함. 거의 모든 성이 <자본주의 노선>을 택했다는 비난을 받음. 500만 명이 넘는 당원이 처벌 받음. 1964년 10월 16일중국 최초 핵실험이 성공함. 1964년 10월 ~ 11월모스크바에서 일어난 무혈 쿠데타로 흐루쇼프가 실각함. 몇 주 뒤 크렘린 궁전 환영 연회에서 만취한 소련 장관이 저우언라이가 이끄는 대표단에게 마오쩌둥을 제거하라고 조언함. 1965년 1월마오쩌둥이 사회주의 교육 운동의 지침을 개정하고 <자본주의 노선을 취하는 당내 고위 인사들>을 겨냥함. 1965년 11월 10일야오원위안이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베이징 부시장인 우한의 희곡 [하이루의 파면]을 대약진 운동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논설을 발표함. 1965년 12월 8일 ~ 15일마오쩌둥이 린뱌오의 조언에 따라 뤄루이칭을 인민 해방군 참모 총장직에서 해임함. 1966년 5월 7일마오쩌둥이 린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군과 인민이 구별 없이 융화되는, 요컨대 군사조적 조직과 정치적 세뇌를 아우르는 유토피아적 전망을 제시함. 이 편지는 후에 5.7지시라고 불림. 1966년 5월 4일 ~ 27일우한의 상관인 베이징 시장 펑전과 뤄루이칭, 루딩이와 양상쿤이 반당 범죄로 고발됨. 당과 국가의 고위층에 침투해 있는 <부르주아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5.16통지문으로 알려진 당 내부 문서를 통해 고발됨. 1966년 5월 25일네위안쯔가 베이징 대학교의 수뇌부를 <흐루쇼프 같은 수정주의자 집단>이라고 고발하는 대자보를 교내에 붙임. 1966년 5월 28일천보다가 이끌고 마오 부인(장칭)과 캉성,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가 참여하는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구성됨. 1966년 6월 1일전 국민에게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라고 촉구하는 글이 [인민일보]에 발표됨. 전국 곳곳에 휴교령이 내려짐. 1966년 6월 ~ 7월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중등학교와 대학교에 공작대를 파견해 문화 대혁명을 이끌게 함. 공작대는 곧 보다 급진적인 학생들과 충돌하면서 학생들은 <우파>라고 비난함. 1966년 7월 16일마오쩌둥이 양쯔 강에서 수영을 하며 문화 대혁명을 완수하겠다는 투지를 드러냄. 1966년 8월 1일5.7 지시에 고무된 일단의 학생들이 중국을 자본주의로 되돌리려는 공모한 자들과 싸울 것을 다짐하면서 자칭 홍위병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마오쩌둥이 그들에게 지시 서한을 보냄. 중국 전역에서 학생들이 홍위병을 조직하고 출신 성분이 불량한 사람들을 공격함. 1966년 8월 5일마오쩌둥 본인이 직접 쓴 대자보 <사령부를 포격하라>가[인민일보]에 실림. 마오쩌둥은 공작대를 파견한 <지도자 동지들>이 <반동적인 부르주아 노선>을 취하고 조직적인 <백색 테러>를 가했다고 비난함. <우파>로 낙인찍힌 학생들이 구제를 받음. 1966년 8월 12일중앙 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린뱌오가 류사오치를 대신해 2인자 자리에 오름. 1966년 8월 18일군복을 입고 홍위병 완장을 두른 마오쩌둥이 톈안먼 광장에서 100만 명의 학생들을 사열함. 마오쩌둥은 이후 수개월에 걸쳐 총 1200만 명의 홍위병을 사열함. 1966년 8월 23일[인민일보]가 홍위병의 폭력성과 그들이 벌이는 구사회의 모든 잔재를 파괴하려는 운동에 찬사를 보냄. 1966년 9월 5일홍위병에게 교통과 숙박이 무료로 제공됨. 많은 홍위병이 마오 주석의 사열을 받고 베이징을 찾는 가운데 다른 홍위병들은 혁명적 조직망을 수립하기 위해 전국을 종횡하며 지역의 당 권력자들<자자파>라고 공격함. 1966년 10월 3일홍위병에게 공격을 받은 당내 조직들의 지원 요청에 천보다를 주간으로 둔 당 기관지 [붉은 깃발]이 그들을 두둔하기는커녕 오히려 사설을 발표하고 <부르주아 반동 노선>을 따르는 당 내부의 <반혁명 수정주의자들>을 비난함. 1966년 11월 1일<대중을 마치 무지하고 무능력한 존재처럼 취급한다. 라며 고위 당원들을 비난하는 사설이 또다시 [붉은 깃발]에 발표되면서 일반 대중에게 당 지도자들에 대한 반감을 촉발하고 저항 조직 결성을 부추김. 1966년 12월 26일마오 부인이 새로 결성된 전국 임시 노동자 연맹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문화 대혁명이 시작된 이래 당 지도자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사람들을 모두 복직시키라고 요구함. 일흔 세 번째 생일을 맞은 마오쩌둥이 그날 저녁에 <내전의 전국적인 확산>을 환영하며 축배를 듦. 1967년 1월 6일장차 <1월 폭동>으로 불리게 될 사건에서 100만 명의 조반파 노동자들이 상하이 당 위원회 권력을 박탈함. 마오 주석이 다른 지역의 조반파도 <탈권>하라고 촉구함. 1967년 1월 23일<혁명 대중>을 지원하라는 명령이 군에 하달됨. 1967년 2월 11일과 16일저우언라이의 주재로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원로 사령관들이 중앙 문화 혁명 소조원을 비판함. 마오쩌둥이 곧장 이들 사령관들을 맹렬히 비난하고 나서면서 린뱌오와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보다 막강한 힘을 갖게 됨. 1967년 4월 6일<프롤레타리아 좌파>를 지원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역에서 군이 오히려 당 지도자들 편에 섬. 4월 6일 군에 하달된 새로운 지시에 따라서 조반파에 대한 발포가 금지되고 군 사령부를 습격한 이들에 대한 보복이나 대중 조직을 해산시키는 것이 금지됨. 1967년 5월대개는 군까지 개입된 파벌 간의 폭력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됨. 1967년 7월 20일우한의 두 대립 세력을 중재하기 위해 파견된 중앙 문화 혁명 소조원 두 명이 조반파를 편드는 듯 한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지역 군인들에게 납치됨. 린뱌오는 이 사건을 지역 군 사령관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비밀리에 우한을 방문 중이던 마오 주석에게 즉시 상하이로 떠날 것을 권유함. 1967년 7월 25일우한에 억류되었던 중앙 문화 혁명 소조원들이 환영을 받으며 베이징으로 귀환하고 베이징 시민들이 해당 사건을 <반혁명 폭동>이라며 규탄함. 린뱌오가 군에 대한 장악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됨. 1967년 8월 1일린뱌오를 마오 주석의 가장 충직한 부하로 묘사하며 군대에서 <주사파>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설이 [붉은 깃발]에 살림. 서로 다른 파벌의 무력 충돌이 여름 내내 전국으로 확산됨. 1967년 8월 22일저우언라이에 비판적인 조반파가 외교부를 장악하고 베이징 소재 영궁 공관에 불을 지름 1967년 8월 30일마오 주석이 폭력을 제지하고 나서면서 중앙 문화 혁명 소조원 몇 명에 대한 체포를 명령함. 며칠 뒤 대중 조직이 군대의 무기를 탈취하는 행위가 재차 금지됨. 1967년 9월마오쩌둥이 전국을 순회하며 모든 혁명 세력의 위대한 동맹을 촉구함. 1968년 3월 22일린뱌오가 군 지도자 여러 명을 체포하도록 명령하며 자신의 군대 장악력을 더욱 확고히 함. 1968년 7월 27일 칭화 대학교에 파견된 마오쩌둥 사상 선전대가 홍위병들을 굴복시키고 징계함으로써 홍위병 시대가 막을 내림. 1968년 9월 7일모든 성과 주요 도시에 혁명 위원회가 수립되고 저우언라이가 전면적인 승리를 선언함. 1968년 여름 ~ 1969년 가을새로운 혁명 위원회가 <당원 정화> 운동을 기회 삼아서 그들의 적을 <스파이>와 <반역자>라고 고발함. 1968년 12월 22일도시 학생들에게 시골로 내려가 재교육을 받으라는 마오 주석의 지지가[인민일보]에 발표함. 1968년과 1980년 사이에 모두 1700만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도시에서 추방됨. 1969년 3월제9차 중국 공산당 전국 대표 대회가 개최되기 몇 주 전 중국과 소련 군대가 우수리강 유역에서 충돌함. 린뱌오가 중국을 더욱 무장시키는 계기가 됨. 1969년 4월제9차 중국 공산당 전국 대표 대회에서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됨. 1970년 2월 ~ 11월<일타삼반>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전개된 두 개의 운동이 <반혁명 활동>과 <경제 범죄>를 공격 대상으로 삼고 쉰 명 중 한 명꼴로 관련 행위에 연루되었다며 대중을 겁박함. 1970년 여름마오쩌둥이 국가 주석직을 둘러싼 쟁점을 이용해서 린뱌오의 충성을 시험함. 1971년 4월마오 주석이 미국 탁구 대표팀을 중국에 초대함. 1971년 여름남부 지방 순회에 나선 마오 주석이 린뱌오의 이름을 한 번도 거명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권위를 약화시킴. 1971년 9월 12일마오쩌둥이 베이징으로 돌아옴. 자정이 막 지난 시간에 린뱌오와 그의 아내와 아들이 베이다이허 여름 휴양지 외곽에서 서둘러 비행기에 탑승함. 비행기가 몽골에서 추락하면서 탑승자 전원이 사망함. 1972년 2월 21일 ~ 28일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함. 1972년 8월군대가 병영 복귀함. 이후 수 개월 동안 다수의 정부 관리자와 당 간부가 복권됨. 1973년 11월 ~ 1974년 1월마오 부인과 장춘차오, 왕홍원과 야오원위안이 단결하여 저우언라이에 대항하면서 얼마 뒤 <사인방>이라는 이름을 얻게 됨. 저우언라이를 겨냥한 전국적인 규모의 정치 운동이 시작됨. 1974년 4월마오 주석이 덩샤오핑을 승진시켜 유엔에서 중국 대표단을 이끌게 함. 1975년 1월마오 주석이 승인 아래 저우언라이가 중국의 농업과 산업, 국방과 과학 기술을 개선하기 위한 <4대 현대화> 계획에 착수함. 1975년 11월 ~ 1976년 1월마오쩌둥이 자신이 죽고 나면 덩샤오핑이 자신의 유산을 훼손할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힘. 덩샤오핑이 여러 당 대회에서 비판을 받으면서 맡고 있던 대부분의 공직에서 해임됨. 1976년 1월 8일저우언라이 총리 사망. 1976년 4월 4일 ~ 5일저우언라이에 대한 대중의 폭발적인 지지가 톈안먼 광장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고 경찰과 군대가 폭력으로 진압함. 1976년 9월 9일마오쩌둥 사망. 문화 대혁명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노쇠한 마오쩌둥은 잃어버린 자신의 위상을 회복하고 정적들을 제거하고자 한다. 자본주의적 시장 정책이 공산주의 이념의 순수성을 위협한다는 주장과 함께 문화 대혁명이 일어났다. 마오쩌둥을 숭배한 홍위병들이 득세했고, 라이벌 당파와의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순수성이라는 이름 아래, 거리는 반자동 무기를 든 군인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인민의 50분의 1을 짓밟은 피의 숙청이 이어졌다. 디쾨터는 이 책을 통해 마오쩌둥의 마지막 시기와 격동의 중국을 교차함으로써, 문화 대혁명의 전모를 밝혀낸다. - 본문 발췌 “우리는 홍위병이다. 당신에게 혁명적 조치를 취하러 왔다!” - 본문 중에서 1966년 6월 1일 [인민일보]에 실린 한 성동적인 사설이 독자에게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라고 촉구했다. 문화 대혁명의 신호탄이 된 이 글은 <반동적인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자를 속이고, 기만하고, 무력하게 만들려는> 부르주아 계급의 앞잡이들을 고발하라고 요구했다. 스탈린을 닮고자 했던 마오쩌둥은 비스탈린화 움직임에 개인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아울러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위대한 소련에서 흐루쇼프가 어떻게 그처럼 단독으로 완전한 정책적 반전을 꾀할 수 있었는지 의아했다. 공산주의 논리에 따르면 생산 수단의 소유 문제를 둘러싼 사회주의식 개혁이 일단락된 다음에는 개인주의적인 사고부터 민간 시장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 문화의 모든 흔적을 영원히 제거할 새로운 혁명이 필요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데 혁명이 필요한 것처럼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갈 때도 혁명이 필요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문화 대혁명이라고 불렀다. 1부 초기 (1962 ~ 1966) 7,000인 대회 1962년 1월, 약 7,000명의 당 간부들이 인민 대회당에서 역대 최대 규모로 열린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 각지로부터 도착했다. 대약진 실패에 대한 성토를 하기 시작했다. 류사오치, 린뱌오 등은 마오쩌둥의 잘못을 당의 잘못으로 돌려 마오쩌둥은 7,000인 대회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당에 대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될까 봐 그 어느 때보다 전전긍긍했다. 1934년 당시 소련에서 열린 일명 승자들의 대회 즉 제17차 소련 공산당 전당 대회는 결국 희생자들의 대회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4년에 걸쳐 2,000명의 대의원 중 절반 이상이 처형되거나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스탈린은 대공포 정치를 통해 자신의 적을 사냥하는 데 더욱 박차를 가했다. 사회학자 로버트 서비스의 말처럼 <스탈린의 잔인성은 마치 오소리 덫처럼 기계적으로 작동했다>. 마오쩌둥의 경우는 변덕스러운 쪽에 훨씬 가까웠다. 그는 자신의 주도적인 지위를 유지하고자 일부러 사회를 뒤집어엎고 수많은 사람에게 폭력을 부추겼다. 더 이상 대기근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마오쩌둥이 취한 첫 번째 행보는 기근의 책임을 계급의 적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 <계급 투쟁을 잊지 말라>라는 표어와 함께 시작되었다. 빈농과 중산층 농민들로 이루어진 다양한 위원회가 활용되었다. 허베이 성 싱타이 지구에서는 수천 명의 농민들이 조직되어 <자본가>와 <독자적으로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들>을 공격했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교육 운동은 농촌의 일반 서민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수정주의가 중국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요직에 있는 권력자들을 공격해야 했다. 류사오치는 민초를 조사하도록 자신의 아내를 파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국의 대규모 공작대에 합류해서 그녀를 따르라고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이 같은 하향식 접근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공작대를 잇는 지도자가 일반인의 표적이 되는 상향식 운동을 선호 했다. 그리고 1965년 1월 사회주의 교육 운동 지침을 새로 만들었다. 핵심 내용 중 하나는 <당내 요직에 있는 주자파를 잡아라.> 라는 것이었다. 바로 1년여 뒤에 홍위병은 문화 대혁명에서 이 구절을 철저히 이용하고 문화 대혁명은 사회주의 교육 운동으로 계승하게 될 터였다. 마오쩌둥의 오른팔 린뱌오 1959년 여름 루산 회의에서 린뱌오는 마오 주석을 옹호하는 대열에 합류해서 특유의 가늘고 높은 목소리로 <오직 마오쩌둥만이 위대한 영웅이며 그 같은 위치는 그를 제외한 누구도 감히 탐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그 보다 한참 부족하니 아예 넘볼 생각도 하지 말라!> 린뱌오는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비밀 일기장에 대약진 운동이<환상에 기초하고 있으며 완전히 실패>라고 털어놓았을 정도로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주석을 최대한 추켜세우는 것이 권력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마오쩌둥을 우상화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터였다. 린뱌오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을 마스터하는 지름길로써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하도록 장려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마오쩌둥 전집에 나오는 짧은 구절들을 암기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1961년 4월부터 [인민일보]는 가장 눈에 잘 띄는 1면에 주석의 말을 인용해서 게재하기 시작했다. 독자들은 인용구를 잘라 내 차곡차곡 수집하기 시작했다. 1964년 1월 그동안 게재된 인용구를 등사판으로 인쇄한 요약집이 출간되었고 5월에는 개정판이 인민 해방군에 배포되었다. 개정판은 조야한 빨간색 비닐 표지가 적용되었고 일반적인 군복 주머니에 쉽게 들어가도록 손바닥만 한 크기로 제작되었다. 헌사에는 린뱌오가 레이펑의 일기에서 고른 문구가 들어갔다. <마오 주석의 책을 읽고, 마오 주석의 말을 듣고, 마오주석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고, 마오 주석의 훌륭한 투사가 되자.> 1965년 8월에 개정판이 나왔을 즈음에는 일명 <작은 붉은 책>으로 알려진 [마오쩌둥 어록]이 군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백만 권이나 배포된 상태였다. 마오쩌둥 어록집 군사적 모델을 향한 열정은 정식 교육에 대한 경시로 이어졌다. 린뱌오의 표어 <정치가 최우선>이었다. 내내 지식인을 헐뜯어 왔던 마오쩌둥은 이제 교육 제도 전체에 대한 의구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63년 2월 13일은 온 국민이 중국 설날을 기념하는 춘절 행사에서 그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험을 팔고문에 비유했다. 팔고문이란 청나라 때 과거에 응시한 지원자들이 논증을 펼치기 위해 익혀야 했던 문체였다. <나는 이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방식은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문제를 사전에 공개하고 학생들에게 관련 내용을 공부하게 한 다음 책을 참고해서 답을 적도록 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다.> 심지어 더욱 도발적인 견해를 내놓기도 했는데 커닝에도 장점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만약 당신이 올바른 답을 적고 내가 그 답을 베낀다면 내가 쓴 답도 옳은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교사가 지루한 강의 내용을 장황하게 이야기할 때 조는 학생들의 손을 들어 주기도 했다. <허튼소리는 들을 필요가 없다. 그 시간에 차라리 머리를 식히는 편이 낫다.> 일부 학생들은 곧장 마오쩌둥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교사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 생각이 필요 없는 이론 교육, 암기에 의한 학습 등을 중시하는 억압적인 교육 제도에 짓밟힌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그들을 위해 마오쩌둥이 편을 들고 있었다. 또 다른 미래의 홍위병 말처럼 <수업은 내 시간을 낭비했고 선생님들도 내 시간을 낭비했다.> 많은 학생들이 주석이 불러 줄 때를 기다렸다. 미래의 홍위병들 마오쩌둥은 문학계와 예술계를 향해서도 비난을 쏟아 냈다. 이 축제의 진정한 스타는 그의 아내였다. 마오쩌둥의 4째부인 장칭은 야망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성까지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62년 9월 29일 수카르노 대통령의 방문을 받았을 때 장친이 함개 있는 사진이 [인민일보]를 통해 공개되고 본격적으로 정치 입문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녀는 정치에 점점 깊이 개입할수록 건강 염려증과 신경 쇠약증이 호전되었다> 마오쩌둥 주치의가 언급했다. 1963년 질투에 사로잡힌 잔인한 군주에게 처형당한 첩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사극은 마오쩌둥의 심기를 건드리고 이에 본격적인 행동에 나선 장칭은 자칭 문화 감시자로서 연극과 음악, 영화 등의 제작에 관련된 지침을 내놓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의 <계급 투쟁을 잊지 말라>라는 슬로건 아래 단결한 류사오치도 문화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힘을 보탰다. 문화계에 혁명사상을 고취하고자 당이 조직한 문화 혁명 오인소조라는 단체에 장치 장칭이 합류 단지 희곡 작가 몇 명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닌, 문화부보다 더 높은 곳을 겨냥한 훨씬 중요한 임무를 맡길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1965년 2월 그가 비밀 임무를 위해 장칭을 상하이로 보내면서 문화는 다음 단계의 혁명을 시작할 무대가 될 터였다. <4인방>으로 대활약할 마오쩌둥의 4째 부인 장칭 1957년 초 주석이 지식인들을 향해 불만을 표출하며 당원들이 업무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했을 때 펑전은 베이징 시장으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이 운동을 저지했다. 베이징에서 본사를 둔 [인민일보]는 백화 운동과 관련한 마오쩌둥이 가장 중요한 연설을 몇 주가 지난 다음에야 보도했다. 이 공식 당 기관지의 편집장 덩퉈가 시장의 지시를 따른 까닭이었다. 펑전은 당이 1954년 7월에 문학계와 예술계에 대한 정화 임무를 맡기기 위해 조직한 오인소조도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반당 파벌]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며 숙청하기에 이른다. 2부 적색 시대 (1966 ~ 1968) 5월 16일에 당 고위층 인사들 사이에서는 펑전이 수도인 베이징을 수정주의 요새로 탈바꿈 시켰다는 공지문이 회람되었다. 마오쩌둥은 당 전체에 <당과 정부 기관, 군부대를 비롯한 문화계 전반에 스며든 이런 부르주아의 대변인들과 연을 끊어라>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혁명에 반대하는 수정주의 세력>이었다. 정권을 잡고 조건이 무르익는 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르주아 독재 체제로 바꾸려는 자들이다. 마오쩌둥은 끔찍한 경고를 내놓았다. <그들 중 일부는 우리가 이미 파악했고 일부는 그렇지 못하다. 일부는 우리가 여전히 신뢰하고 우리 후계자로 훈련시키고 있는 사람들이다. 요컨대 여전히 우리 곁을 바싹 달라붙어 있는 흐루쇼프 같은 자들이다.> 마오쩌둥의 메시지는 당내 고위층 인사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유력한 베이징 시장이 실각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도 이내 그의 뒤를 따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당원들은 주석의 발언을 놓고 회의하는 자리에서 테이블 너머로 서로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주석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이 자신의 안위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마오 주석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주석을 제외한 모두를 의심해야 한다. 주석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의심해야 한다.> [인민일보]를 읽는 일반인들은 권력의 회랑에서 모종의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마오쩌둥이 한동안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의혹을 더욱 부추겼다. <문혁 초기 중앙문혁소조의 영도자들: 왼쪽부터 장칭(江靑), 천보다(陳伯達), 캉성(康生), 장춘차오(張春橋). 마오쩌둥은 1966년 천보다를 중앙문혁소조의 조장으로 임명했다./ 공공부문> 그사이 마오쩌둥은 펑전이 이끌던 오인소조의 해체를 위해 움직였다. 오인소조 대신 마오쩌둥의 심복들로 구성된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등장했다. 중앙 문화 혁명 소조는 곧 문화 대혁명의 전 과정을 지휘하면서 모든 상위 결정이 내려지는 가장 중요한 정치 기구가 되었다. 황제가 대신들의 반대를 우회하기 위해 만든 내부 조직처럼 중앙 문화 혁명 소조는 당과 정부와 군대 위에 군림할 터였다. 중앙 문화 혁명 소조에는 장칭과 캉성,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를 비롯한 주석의 몇몇 심복들이 포함되었다. 국제 어린이날이기도 한 6월 1일에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첫 번째 폭탄을 투하했다. 천보다는 [인민일보]에 발표한 선동적인 논설에서 서민들을 향해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자신들의 반동적인 공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자를 속이고 기만하고 멍청하게 만들려는 하는> 부르주아의 대변자들을 척결하라는 외침과 함께 문화 대혁명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천보다의 논설은 <사상계와 문화계> 전반에 자리 잡고 있는 <부르주아 출신의 전문가들>, <학술계의 권위자들>, <신망 있는 대가들>을 콕 찍어서 지목했다. 이제 중국은 곳곳에서 발견되는 반혁명적인 음모에 맞선 공격적인 정치 운동에 휘말려 있었다. 1966년 6월 1일 베이징 대학교를 고발하는 네위안쯔의 글이 전파를 타자마자 전국의 사무실과 공장과 학교에 대자보가 붙기 시작했다. 수만 명에 달하는 당 간부들이 중학교부터 출판사에 이르기까지 수도 전역의 교육 기관 내 공작대에 합류하도록 보내졌다. 전국의 다른 지역들도 수도와 경쟁에 나섰고 서둘러 공작대를 파견했다. 공작대가 어디를 가든 그들의 관리 아래 있는 학교나 대학은 온통 대자보로 도배되어 있었다. 공작대는 <괴물과 악마>를 비난하도록 학생들을 부추겼다. 앞서 [인민일보]에 발표된 논설에 따르면 그들은 문화계를 독점해서 노동자들을 억압하려 했다. 일부 학생들은 이미 자신들을 가르치는 교수들 중 몇몇의 출신 배경에 대해 면밀한 조사를 시작하였다. 공작대의 자극에 고무된 학생들은 초기에 교사들을 비난했다. 증오로 가득한 분위기가 고조되자 설전은 공작대에 의해 지목된 표적을 향한 물리적인 공격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어떤 희생자는 바보 모자를 쓰고 다녀야 했고 어떤 희생자는 목에 <자본주의 앞잡이>나 <흑방 분자>, <제국주의 스파이> 또는 그 밖의 죄목이 적힌 팻말을 매달고 다녀야 했다. 학생들에게 떠밀려서 때로는 잉크까지 뒤집어쓴 채 학교 안에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교사들도 상당수 목격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보 모자는 더욱 길고 무거워졌고 목에 매다는 팻말도 더욱 크고 묵직해졌다. 때로는 팻말이 돌멩이를 가득 채운 바구니로 대체되기도 했다. 링컨이 다니던 학교의 교장의 목에 깊은 상처를 냈을 정도였다. 교장과 다른 교사들은 부서진 징이나 냄비를 치면서 그리고 자신의 죄를 외치면서 맨발로 학교 안을 행진해야 했다. <나는 흑방분자다!> 공작대는 공장도 엄하게 단속했다. 상하이 제 17방적 공장에서는 조만간 사인방 중 한 사람으로 영전할 왕훙원이라는 젊고 잘생긴 보안 책임자가 문화 대혁명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는 생산량을 늘릴 목적으로 고정급이 아닌 능률급을 지불하는 행태를 비난했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8,000명의 공장 노동자에게 불만을 부추겼다. 6월 말이 되자 반격을 위한 공작대가 파견되었고 불만을 제기했던 사람들을 핍박했다.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반당 분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왕훙원에게는 <이기적인 출세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류사오치는 단시간에 중국에서 가장 미움 받는 지도자로 전락했다. 휘하의 공작대들은 수많은 사람을 순교자로 만들었다. 마오쩌둥이 베이징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문화 대혁명을 완수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며 양쯔 강에서 수영하는 마오쩌둥. 1966년 7월 16일 마오쩌둥은 세간의 이목을 피해 몇 달 동안 연속으로 아주 은밀하게 전국을 여행하는 등 수수께끼 같은 행보를 보였다. 동료들조차 그가 어디에 있는지 항상 알지 못할 정도였다. 사회주의 교육 운동 기간에 <아버지는 가깝다, 어머니도 가깝다, 그래도 마오 주석이 제일 가깝다>라는 짧은 노래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 속의 그 지도자는 먼 사람이었다. 라디오에서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고 공개된 자리에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1966년 7월 16일 주석은 양쯔 강에서 그 유명한 수영을 함으로써 공적인 생활에 복귀할 거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양쯔 강의 거센 물살을 타고 하류로 떠내려가다가 한 시간 뒤 강 건너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붉게 상기되고 잔뜩 들뜬 얼굴>이었다. 마오쩌둥은 공작대를 견제하기 위해서 중앙 문화 혁명 소조 원들을 파견했다. 베이징으로 복귀하는 길에 난징에 들른 마오쩌둥의 부인은 공작대를 지지하는 수뇌부가 꼭 주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경고했다. 그녀는 <공작대를 맹신하지 말라>라고 설명했다. <근본적으로 우리 편인 이들 공작대의 지휘자들은 권한이 강화되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반대하는 지휘자들의 권한은 몰수되어야 한다.> 7월 24일에는 하얀색 잠옷을 입은 마오쩌둥이 거처로 사용하는 다오위타이 국빈관 1층에서 당 지도층 인사들을 맞이했다. 그는 <대중을 두려워하고 학생들을 탄압한다.> 라며 그들을 질책했다. 주석은 공작대를 해체하라고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해방자로 여겨졌다. 총회 중에 중앙 위원회가 내놓은 가장 주목할 만한 성명은 8월 8일에 대대적으로 홍보된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에 관한 결정문>이었다. 결정문은 주된 공격 목표가 <자본주의 노선을 선택한 당내 권력자들>이라고 선포했다. 그럼에도 진짜 권력은 지도부가 문화 대혁명을 재가하자마자 중앙 문화 혁명 소조에게로 넘어갔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의사 결정 기관들을 사실상 완전히 장악했다. 여름 동안 <우경 세력>과 <반동분자>로 고발되었던 사람들이 이제 주석을 중심으로 뭉쳤다. 8월 8일 문화 대혁명 지침을 방송하면서 라디오는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비롯한 전문학교와 대학교 학생들에게 불리한 어떠한 조치도 없을 거라고 강조했다. 마오쩌둥은 학생들에게 직접 다가갔고 그들에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협력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은 쉽게 외부의 영향을 받았고 조종하기가 쉬웠으며 싸우고 싶어 했다. 무엇보다 보다 능동적인 역할을 열망했다. 주석은 자신의 주치의에게 <반란을, 혁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의존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들 악마와 괴물을 굴복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라고 털어놓았다. 8월 1일 마오쩌둥은 칭화 대학교의 한 부설 중학교에 다니는 일단의 어린 학생들에게 친전을 보내서 그들을 지지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들에게 <저항은 정당한 행위다>라고 조언했다. 해당 학생들은 두 달 전에 자체적으로 조직을 결성하고 홍위병이라는 이름을 지은 터였다. 이제 주석의 허락까지 얻자 홍위병 그들은 죽을 때까지 마오 주석과 혁명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아울러 충실한 투사를 자청한 까닭에 사복을 버리고 군복을 입기 시작했다. 몇몇은 가족 중에서 나이 든 구성원이 입었던 군복을 찾아 입었다. 지나치게 딱 맞는 군복이나 때깔이 좋은 옷은 부르주아적이라는 이유로 못마땅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언제든 계급의 적에게 쉽게 채찍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죽 허리띠는 필수였다. 붉은 면직물에 황금색으로 <홍위병>이라고 적힌 완장까지 더해지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모든 사람이 홍위병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순수한 혈통을 가진 사람들만이 홍위병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원로 혁명가의 자식인 그들만이 문화 대혁명을 이끌기 위해 꼭 필요한 계급적 배경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애초 공산주의자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부르주아에게 저항하고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지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권력은 아들에게로 이어져야 한다. 이른바 세습이라는 것이다.> 출신 배경이 나쁜 사람은 누구든 배제할 것을 요구하는 한 쌍의 대구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아버지가 영웅이면 그 아들도 영웅이다. 아버지가 반동이면 그 아들도 잡종이다.>혈통을 바탕으로 한 이 배타적인 조직의 회원 자격을 갖춘 중학생은 베이징에서 다섯 명 중 한 명꼴도 되지 않았다. 홍위병은 마오쩌둥의 <저항은 정당한 행위다>라는 선전 포고를 듣자마자 교사들과 관리자들을 향해 물리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마오쩌둥의 격려문을 받은 지 3일 뒤인 8월 4일 칭화 대학교 부설 중학교 학생들은 그 학교 교장과 교감을 <흑방의 우두머리>라고 비난하며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웠다. 뒤이은 며칠 동안 홍위병들이 돌아가면서 그들을 폭행했다. 어떤 학생은 곤봉을 사용했고 어떤 학생은 채찍이나 구리 버클이 달린 허리띠를 선호했다. 누군가가 교감의 머리에 불을 질렀다. 베이징 사범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어떤 여학교에서 첫 번째 사망자가 발생했다. 볜중윈 교감은 이미 6월 말에 공작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차례 고문을 당한 적이 있었다. 학생들은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고, 흙을 먹이고, 머리에 바보 모자를 씌우고, 손을 등 뒤로 묶은 채 피멍이 들도록 때렸다. 공작대가 물러난 뒤로 홍위병은 부르주아 세력을 학교에서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8월 5일 오후가 되자 홍위병은 <흑방>을 조직했다는 이유로 학교 관리자 다섯 명을 고발했다. 볜중윈은 몇 시간에 걸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기절했다. 그리고 그대로 쓰레기차에 버려졌다. 두 시간 뒤에 마침내 길 건너편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는 그녀에게 사망 진단이 내려졌다. 중앙 문화 혁명 소조원들은 내내 홍위병들을 만나고 돌아다녔다. 이 학교에서 한 팀을 만난 다음에 저 학교에 가서 또 다른 팀을 만나는 식이었다. 이미 7월 28일에 마오 부인은 베이징 대학교를 방문해서 군중을 향해 <우리는 사람을 때리는 행위를 옹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설령 사람을 때린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라고 말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에게 맞으면 맞을 만하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에게 맞으면 칭찬은 선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선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때리면 그것은 오해 때문이며 반드시 풀어야 한다.> 8월 13일이 되자 베이징 공인 체육관에 군중 집회가 준비되면서 부추김은 더욱 심해졌다. 수만 명의 학생들이 운집한 가운데 몇 주 전에 홍위병을 위협했다는 일반인 다섯 명이 무대 위로 끌려 나와서 <무뢰한>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구타와 허리띠를 이용한 채찍질도 가해졌다. 투쟁 대회를 지켜보던 저우언라이와 왕런중은 폭력을 중단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마오주석에게 완장을 채워주는 쏭야오 가장 큰 지지 행사는 8울 18일에 열렸다. 100만 명이 넘는 어린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에 쏟아져 나온 날이었다. 그날 행사의 절정은 쑹빈빈이라는 한 여학생이 주석의 소매에 홍위병 완장을 채워 주는 특별한 영광을 누린 순간이었다. 그녀는 한원로 장군의 딸이었고 2주 전에 볜중윈이 고문으로 사망한 학교의 학생이었다. 쑹빈빈을 비롯하여 홍위병을 이끄는 지도부 학생들은 베이징 시 당위원회에 해당 사실을 개인적으로 보고한 터였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마오쩌둥이 그녀에게 빈빈이라는 이름이 무슨 뜻인지 물었다. 그녀가 <우아하다>라는 뜻이라고 대답하자 주석은 <군인답다>라는 의미의 야오우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제안했다. 쏭야오는 단박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홍위병에 둘러싸인 마오쩌둥 린뱌오 문화 대혁명의 초기 단계에서 수도를 제외한 대다수 지역의 많은 학생들은 아직 어느 수준의 폭력까지 용인될 것인지 확인이 없는 상태였다. 홍위병의 진정한 조직으로서 행동에 나선 것은 구사회의 유물을 파괴하려는 운동을 통해서였다. 8월 18일에 마오 주석과 나란히 연단에 모습을 드러낸 린뱌오는 학생들에게 <착취 계급의 모든 낡은 사고와 낡은 문화, 낡은 전통, 낡은 관습>을 타파하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촉구했다. 봉건적 이념이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생각을 구속해 온 상황에서 이제 중국의 혁명적인 색깔이 결코 바래지 않도록 확실히 하려면 이런 문화적 유물이 청산되어야 했다. 전통이란 산 사람에게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과거의 죽은 손이었고 완전히 박살 내야 할 어떤 것이었다. 해방 전부터 공산당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했고 당 지도층 인사들과도 많이 알고 지내던 미국인 시드니 리튼버그는 이런 분노 섞인 메시지에 깜짝 놀랐다. <온통 박살 낸다는 말뿐이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이 지난 20년 동안 이룩한 모든 것을 정말로 파괴하려는, 산산이 부수고 새로운 어떤 것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낡은 세상에서 전쟁을 선포한다 린뱌오의 호소는 널리 퍼져 나갔고 이튿날이 되자 베이징의 홍위병은 낡은 세상에 전쟁을 선포한다는 대자보를 당당히 내걸었다. <우리는 모든 낡은 사고와 낡은 문화, 낡은 관습과 낡은 습성을 비난하고 박살 내고자 한다. 이발사와 재단사, 사진사와 거리에서 책을 판매하는 행상을 비롯해서 부르주아 계급에 봉사하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우리는 낡은 세상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고자 한다!> 홍위병은 하이힐과 화려한 헤어스타일, 짧은 치마, 청바지, 볼온 서적이 즉시 사라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8월 19일에 이런 선동적인 발언이 실린 신문 수천 부를 찍어 유포했다. 8월 20일 저녁이 되자 홍위병들이 여러 무리로 나뉘어 베이징 거리를 배회하면서 구체제의 냄새를 풍기는 대상을 닥치는 대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존의 표지판 위에 새로운 혁명적인 이름을 써 붙이면서 기리 이름도 바뀌었다. 양복점이나 이발소처럼 서비스 업종에 속하는 가게들이 공격받으면서 가게 주인들도 모욕을 당하거나 때로는 폭행까지 당했고 강제로 가게를 닫아야 했다. 8월 22일 오전이 되자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홍위병이 강제로 머리를 깎고 바지통을 찢거나 하이힐 굽을 자르면서 일반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같은 날 신화 통신은 <마오쩌둥의 어린 장수들>이라며 홍위병을 열렬히 지지하고 나섰고 낡은 문화를 청산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칭송했다. 그 결과 8월 23일부터 26일까지 전국에서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홍위병은 과거를 상기시키는 모든 대상을 향해서 폭력을 휘둘렀다. 그로 인한 여파는 장차 수개월 동안 지속될 터였다. 1966년 8월 말부터 폭력 사태가 진정되었다. 상하이에서는 시 당국이 홍위병을 좋아하지 않으며 시 차원에서 홍위병을 진정시킬 거라는 소문이 퍼졌다. 학생들은 여전히 무리를 이루어 거리를 행진하면서 혁명가를 부르고 심벌즈를 울렸지만 불같은 열정은 이미 죽어 있었다. 많은 표어들이 담장과 창문에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상점들은 다시 문을 열었다. 집을 습격당했던 다른 많은 희생자들처럼 정녠은 엉망이 되어 버린 자신의 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살인 사건이 집중되어 발생한 베이징에서는 9월 초부터 홍위병의 공공연한 폭력 행위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완전히 중단된 듯 보였다. 경찰도 다시 본연의 임무에 복귀했다. 시민들은 10월 1일 국경절 행사에 맞추어 도시를 단장하느라 바빴다. 3부 암흑 시대 (1968 ~ 1971) ……… 4부 잿빛 시대 (1971 ~ 1976) ……… 로 이어집니다. Epilogue 수천만 명이 죽어 가는 동안에도 중국이 붕괴되지 않았던 이유 중 한 가지는 공산당 이외의 가능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재한 비밀 종파든 제대로 조직되지 못한 지하당이든 간에 기존 정권을 제외한 무엇도 이 광대한 땅덩어리를 통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군 내부의 쿠데타 가능성은 1959년 루산 총회 뒤 린뱌오가 실시한 광범위한 숙청으로 미연에 방지 되었다. 공산주의 역사는 숙청의 역사이기도 하다. 끝없는 숙청을 통한 견제 세력의 약화, 공포를 통한 시민들의 우민화를 꾀한다. 마오쩌둥 사상 학습반부터 5.7 간부 학교에 이르기까지 끓임 없는 재교육 운동은 물론이고 가택 수색과 분서, 공개 굴욕, 수많은 숙청 등에도 불구하고 낡은 습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문화 대혁명은 개인의 가장 내밀한 생각과 사사로운 감정을 비롯하여 개인의 삶을 둘러싼 모든 측면을 개조하고자 했지만 많은 경우에 표면적인 순응을 이끌어 냈을 뿐이었다. 대중은 기만에는 기만으로, 거짓에는 거짓으로, 공허한 빈말에는 공허한 표어로 맞섰다. 그들은 순응하는 척 연기하면서 주어진 순간에 자신에게 기대되는 대사를 정확히 읊을 줄 아는 뛰어난 배우들이었다. 마오쩌둥 사망 후 개방, 개혁, 서방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덩샤오핑은 민주사회로 가는 듯 했으나…….1989년 6월에 덩샤오핑은 군대를 동원했다. 베이징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위대를 진압하라고 직접 명령했고 그에 따라 탱크가 톈안먼 광장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날의 학살은 야만적인 힘과 철권통치에 대한 의지를 보여 주었고 오늘날까지도 생산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일당 국가의 독재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 이상 인민 3부작을 완료 하였습니다. 중국의 역사 지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로오데작성일
2021-09-30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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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지구본 연구소 - 19. 아르헨티나 개관 (2)
오래간만입니다.직업 특성상 8월에는 한가해지기 때문에,이렇게 한가할 때 한편 깔끔하게 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이렇게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늘 시작할 때마다 언급하지만이 게시글은 유튜브 “3프로 TV”의 코너“최준영 박사의 지구본 연구소”를 토대로 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이 게시글의 원전이 경제 유튜브다보니 아무래도 경제 이야기가 나오곤 합니다.아르헨티나도 경제 관련해선 언급할 구석이 꽤나 있는 편이에요. 짱공이 연식이 꽤 된 사이트다보니재태크에 관심 있는 분들도 솔찬이 있고재태크 게시판 가보면 나름 고수분들도 계신 것 같아서어느 정도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 경제에 관심 있으신 분들에게 아르헨티나 하면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실 겁니다. “8번의 디폴트에 이어, 9번의 디폴트 직전까지 경험한 빚잔치계 고인물”“사람보다 소가 더 많은 농업대국” 약간 놀리는 듯한 말이지만사실 아르헨티나의 경제에 대해 경제계의 거인사이먼 쿠즈네츠 할아버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경제계의 거인 사이먼 쿠즈네츠 “세계는 선진국과 후진국, 그리고 일본과 아르헨티나로 나눌 수 있다.” 으응?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일단 선진국과 후진국은 알겠어요.근데 “일본과 아르헨티나는 왜 한 세트로 묶이지?” 싶을거에요. 그 말을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여담으로 이런 말을 한 “사이먼 쿠즈네츠”가 어떤 인물인지간단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1-1. 쿠즈네츠, 그가 알고싶다. 쿠즈네츠라는 이름을 보면 짐작하시겠지만이 사람은 러시아 출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경제학자입니다. 이 사람은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할 정도로경제계에서는 힘깨나 주는 사람인데요경제계에 크게 두 가지 업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첫 번째는 그 이름도 유명한 “GDP”였습니다.쿠즈네츠는 1901년에 태어나서우크라이나 지방 통계국 국장까지 지내다가22살에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대체 통계국 국장을 몇 살때 했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네요.그렇게 미국에서 공부 좀 하면서 한가하게 잘 살고 있었는데미국으로 건너간 지 7년 만에 미국에 큰 일이 벌어져 버렸지요.바로 1929년 경제 대공황이었습니다. 미국의 경제 대공황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미국 사람들은포드의 모델 T를 타고말보로 담배를 피면서주말이면 가족들과 교외로 피크닉을 가는 게 기본 옵션이었는데하루아침에 쓰레기통을 뒤지며 음식물 쓰레기를 주워 먹는 상황이 되어버린 겁니다. 쿠즈네츠로서도“아니 X발 세계 최고의 경제 강국이라며!”를 외칠 상황이었지요. 그 이후에 대통령이 된 루즈벨트는“자유롭게 방치해놨더니 경제가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졌습니다.”“이제는 국가가 나서겠습니다!”라며 뉴딜 정책을 꺼내들었지요. 하지만 미국은 1776년 독립 이후로국가가 경제에 개입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즉 루즈벨트의 뉴딜은건국 이후로 국가의 방향을 180° 전환하는큰 도전이었던 것이자 사람들로서는“아니 X발 나라가 왜 개입해? 이거 빨/,/갱이 판 다됐구만!”이라고 생각할 일이었던 거지요. 뉴딜 정책을 바라본 당시 미국인들의 반응 즉, 루즈벨트로서는 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라도사람들을 설득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야 이 빨/,/,갱이 새기야 니가 그러고도 대통령이냐?”“워워 캄다운 캄다운 진정하시고 내 말 들어보세요.”“니 말 듣게 생겼어? 당장 총 들고 백악관 간다?”“총은 잠깐 내려놓으시고 이거 보시죠.”“이 종이 쪼가리가 뭔데?”“그래프입니다.”“그래 나도 눈깔 있으니 그건 알어.”“오른쪽으로 갈수록 그래프가 올라가죠?”“그래 우상향 그래프구먼. 근데 그 올라가는 게 뭔데?”“여러분들의 호주머니죠.”“?!?!?!?” 즉, 루즈벨트의 뉴딜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잘 보세요. 우리가 이렇게 정책을 하니까.”“우리 호주머니가 두둑해진다?”“댓츠 롸잇!”이라고 제시 할 만한 지표가 있어야 한다 이거에요. 루즈벨트에게 필요했던 것 문제는 그게 대체 뭐냐 이거였죠.그래서 미국 재무부, 통계청 관계자가“미국 X발!!”을 외치며 쓰레기통을 뒤적거리던 쿠즈네츠를 찾아갔습니다. “굿모닝 써~얼.”“굿모닝? 헬모닝이 아니라?”“에이 지금 대통령 각하께서 뉴딜이란걸 하고 있으니까.”“그래 뉴딜 거 잘봤소. 내가 빨/,/,갱이 새기들이 싫어서 미국으로 왔더니똑같은 짓거리를 하데?”“에이, 빨/,/갱이 짓거리라뇨, 수정자본주의죠.그렇게 싫으시면 다시 돌아가시는 방법도 있긴 한데……”“용건을 말해보시게.”“뉴딜을 하는 거에 대해서 설득을 하려면.”“설득할 자료가 있어야 한다?”“오오 눈치 빠르시네요?”“그거 만들어 달라고 쓰레기통 뒤지던 30대 백수한테 왔겠지 뭐.”“생각해 놓은거 있으세요?”“내가 도라에몽 주머니도 아니고, 일단 요구사항 읊어봐. 최대한 맞춰 줄 테니까.”“일단…… 뭐가 얼마만큼 좋아졌는지 직관적으로 알았으면 좋겠어요.”“‘뭐가’라는 건 경제랑 관련된 거겠구먼.”“그렇죠.”“그럼 그 ‘뭐가’를 만들어내면 되겠고.”“댓츠 롸잇이죠!”“좀만 기다려봐 기가 멕히는 거 뽑아놓을 테니까.” 쿠즈네츠의 피조물 (1)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GDP였습니다.① 일정 기간 동안 (기간)② 한 나라의 영토 안에서 (장소)③ 최종 생산된 제품 (눈에 보이는 거) 이걸 가지고 평가하면 일단 명확하고수치로 나타낼 수 있으니 직관적이고그래프로 나타낼 수 있으니 가시적이겠죠. 우리가 $30,000를 넘었다고 좋아하는 바로 그 GDP는뉴딜정책을 홍보하지 않으면백악관으로 레드 넥들이 쳐들어와서스폰지 밥으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루즈벨트와 경제 각료들의 걱정 그리고“미국 X발”을 외치며 쓰레기통을 뒤적거리던쿠즈네츠가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다음으로 그가 만든 업적은 “쿠즈네츠 곡선”이에요. GDP라는 개념을 발명한 그는자신의 피조물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GNP등 다양한 바리에이션을 만들었고 마치, 줄자나 돋보기를 가지고 노는 꼬맹이 마냥모든 것에 그것들을 들이대 보는 걸 낙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아무래도 소련 출신에다우크라니아 지방의 통계청장을 할 정도로 소련 고인물이었던이 사람은 “불평등”에 관심이 많았고그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불평등은 잘 살든 못 살든 항상 존재하더란 말이지.”“그렇죠?”“그런데 말이야.”“네?”“잘 사는 나라한테 불평등이 심할까, 못사는 나라한테 불평등이 심할까?”“글쎄요? 아무래도 잘 사는 과정에서 불평등이 심해지는거 아닐까요?”“한번 체크 업 해 보자고.” 쿠즈네츠는 그래프를 그려봤더라 이겁니다.X축에는 1인당 국민소득Y축에는 지니계수(소득 불평등 지수, 0이면 완전 불평등, 1이면 완전 평등임)를 놓고 그래프를 그려보니까이런 그림이 나왔습니다. 쿠즈네츠의 피조물 (2) “엥? 종 모양이 나오네요? 이게 무슨 의미에요?”“뭐긴 뭐야. 소득이 늘어나면서 불평등은 늘어나지”“그런데 고점 찍고 난 다음에는……”“소득이 어느 구간을 통과한 뒤에는 불평등이 줄어든다는 거야.”“아하!” 이게 쿠즈네츠의 곡선, 그리고 그걸 해석한 게 쿠즈네츠의 가설이었습니다. 『소득이 늘어나는 과정에서 불평등이 늘어나긴 한다.그러나, 임계치를 넘어서면, 소득이 늘어나면서 불평등이 감소한다.』 1-2.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가서 다시 논의를 처음으로 돌려서선진국과 후진국은 서로 반대급부일테니 그러러니 하겠지만일본과 아르헨티나? 얘들은 왜 세트메뉴로 묶일까요? A BA B의 대구 구조를 들어보셨겠지만대구 구조 이렇게 세트 메뉴로 묶일 만큼일본과 아르헨티나는 20세기를 기준으로정반대의 행보를 보여왔습니다. 20세기를 기준으로 일본은『후진국 → 선진국』으로 레벨 업을 해왔다면쿠즈네츠의 눈에 보인 일본의 모습 아르헨티나의 경우에는『선진국 → 후진국』으로 레벨 다운을 경험했다는 겁니다.쿠즈네츠의 눈에 보인 아르헨티나의 모습 쿠즈네츠가 볼 때는일본과 아르헨티나의 경우는자신이 아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두 사례”였던 겁니다. 있을 수 없는데 일어나 버린 일 이 말을 들으면 우리 짱공인들은 물음표가 뜰거에요. “아니 그래, 레벨 다운한 아르헨티나는 우리가 봐도 물음표가 뜨긴 해.”“하지만 일본처럼 레벨 업 하는 게…… 어렵나?” 사실 아는 만큼 보인다고,우리도 그랬고, 오른쪽의 일본도 그랬고왼쪽의 중국도 그러니까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싶겠지만그건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입니다. 예전에 중동을 이해해야 세계를 이해한다 특집 때민족주의 관점에서 한 ․ 중 ․ 일 3국은 매우 특이한 케이스다.라고 말씀드렸는데요경제 성장 과정에서도 한 ․ 중 ․ 일 3국은 매우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일본은 19세기 말 ~ 20세기 초한국은 20세기 말 ~ 21세기 초중국은 한타임 늦은 20세기 말 ~ 21세기 중반이 시기를 거쳐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했지요. 이런 과정을 거친 우리나라 사람들로선“옆 동네 쪽/.발이랑 짱./개도 하고 심지어 우리도 했는데 그게 뭐 어렵나?”하겠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응 그거 X나 어려워” 할 일인 거에요. 시기를 어떻게 나누냐에 따라 다르겠지만100년도 안되는 시기 (50~60년) 동안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후진국에서선진국으로 도약한 사례는 딱 두 케이스입니다. 그 힘든 걸 해낸 두 나라 한국과 대만이죠.여기까지 들어보면 “쿠즈네츠 아재! 왜 한국은 뺏소?” 라고 할 텐데요. 쿠즈네츠가 그 말을 할 때는 한국과 대만은 해당 사항이 없었어요.(이분은 1985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쿠즈네츠가 기준을 삼은 기간은19세기 말~ 20세기 초였기 때문에그 기준 시점에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간 건일본뿐이었으니 그가 그 사례로 일본을 언급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소리겠습니다. 자, 이제 국뽕이 차오르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고“그래 뭐 그 힘든 걸 일본이 했다 ㅇㅋ 인정 그럼 아르헨티나는?” 하실 겁니다. 지금으로선 도저히 믿기지 않겠지만,아르헨티나는 한때 선진국이었습니다.그것도, 그냥 선진국이 아니었어요. Case 1.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풍경 20세기 초반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아르헨티나의 백화점 유럽에도 몇 개 없던 “백화점”이 있었습니다.아르헨티나의 지하철 거기에 1913년에는 지하철이 지나다니고 있었지요. 우리나라가 이제 경성에 “슬슬 민간에서 전기 좀 만들어 볼까” 하던 시기에 아르헨티나는 “잠시 후 지하철이 들어옵니다.노란색 안전선 뒤에 서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방송을 듣고 있었던 거지요. 그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별명은남미의 ‘Paris’였다고 하는군요. Case 2. 엄마 찾아 삼만리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동화책을 읽어보거나만화영화로 보신 적이 있을겁니다. 이걸로 눈물 깨나 뺀 분들 있는 거 다 압니다. 엄마 찾아 삼만리는 이탈리아의 아동문학 작가“에드몬도 데 아미치스”의 작품여러분들의 눈물도둑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 “사랑의 학교”라는 단편집의 일부였어요. 대충 줄거리는 알고 계시겠지만이탈리아 제노바에 사는 소년 마르코는어려운 형편이었지요. 아버지는 몸이 불편해서 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터라어머니가 가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이때 어머니는돈을 벌기 힘든 이탈리아를 떠나서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가정부를 했어요.마르코의 가정은 어머니가 보내주는 돈으로 생계를 꾸려나갔죠. 그런데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마르코는 어머니를 찾아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여행을 떠났다……라는 줄거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르코의 눈물어린 여정 저번 편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알겠지만아르헨티나는 백인 비중이 높은 국가고그중에서도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들이 많다고 했죠? 엄마 찾아 삼만리는 바로 그 사회상을 반영한 동화라고 할 수 있을거에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렵겠지만아르헨티나에는 일자리를 찾는이탈리아 출신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은 나라였던 겁니다. Case 3. 아르헨티나 농담 한때지만 잘 살았던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자부심이 담긴농담 한 토막이 있습니다. 신이 인간 영혼들을 줄 세우고이고깽류 만화들의 스타팅 포인트 “자 너는 A 나라에서 태어나라.”“너는 B 나라”“너는 C” 이런 식으로 태어나야 할 나라들을 할당하고 있었어요.그때 한 영혼이 멍 때리는 동안다른 영혼들은 다 배당이 끝나고 자기만 남았더라 이거죠. “어? 저는 어디로 태어나요?”“음…… 다른 데는 다 배정이 끝나서, 너는 남미에 태어나야 되는데?”“엑? 남미요? 싫어요. 안 돼요. 안 갈 거에요.” 이렇게 영혼이 개기고 있으니까 신이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아르헨티나인데?”“아 그럼 갈게요.” 이런 식으로 여느 유럽 선진국에 못지 않다라는 게아르헨티나의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럼 대체 어느 정도로 잘 살았길래 저런 식으로 하냐 싶을텐데요.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수치로 말씀드리자면,20세기 초에는 세계 5위의 경제 부국이었습니다.이게 어느 정도냐...... 이 당시 아르헨티나는 미국보다 1인당 GDP가 더 높았대요. GDP를 비교해 보면『아르헨티나 > 미국 > 영국』 수준이었다고 하니당시 아르헨티나가 얼마나 잘 나갔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2. 대체 왜 저렇게 잘 나갔던 거야?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성공에 있어서 운의 기여도가 70%인간의 노력이 30%라는 것인데요. 아르헨티나도 여러모로 운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Phase 1. 산업혁명 코인 일단 제일 먼 과거로 돌아가자면하필 아르헨티나가 차지한 땅이소 키우기 좋은 초지였고냉동선이 개발되기도 했습니다. (다윈 : ㅠㅠ) 하지만 수요가 있어야 공급도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아르헨티나에서 소고기를 만들고냉동선으로 날라도사줄 곳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을 거에요. 아르헨티나 입장에선 다행스럽게도냉동선이 개발될 때아르헨티나의 소고기를 찾는 곳이 있었으니대서양 건너 유럽대륙이었습니다. 그 시기에는 유럽에선 산업혁명이 한창이었거든요. 아르헨티나의 1차 기회 산업혁명은1차 산업 위주의 경제구조에2차 산업이 끼얹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2차 산업이 늘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은 토지적인 측면에선100% 농업용으로 쓰던 토지의 일부가공장 짓는데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 노동력적인 측면에선농업에만 종사하던 사람들의 일부가농업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그렇다면 당연히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지 않겠습니까? 이럴 때 선택은 두 가지가 될 겁니다.Option 1. 덜 먹다 보면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기겠지? 그럼 인구 조절이 된다고Option 2. 먹는 걸로 꿀리면 안 되지.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 오면 된다고 당연히 Option 1.을 선택할 멍청한 정치적 지도자는 없을 테니유럽은 먹을거리를 찾아 나섰고,마침 그걸 제공해 줄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였습니다. 그렇게 산업혁명 시기 동안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국가들은유럽의 빵 바구니를 자처하면서산업혁명 코인을 달달 하게 빨아 제낄 수 있었습니다. Phase 2. 세계대전 코인으로 가버렷! 안 그래도 산업혁명 코인을 빨며 단맛에 취하던 아르헨티나에게“입 벌려! 당뇨병 진단 받을 때 까지 들이붓는다!!”라며치사량의 코인이 강제 주입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두 번에 걸쳐서요.1914년 ~ 1918년의 1차 세계대전과1939년 ~ 1945년의 2차 세계대전이 그것입니다. 아르헨티나의 2차 기회 2차 세계대전은 그 이름에 걸맞게유럽 ~ 아프리카 ~ 아시아 ~ 태평양 오만데서 다 싸우긴 했지만1차 세계대전은 주요 무대가 사실상 유럽이었죠. 그러다보니 유럽에선 특히 농사를 짓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고아르헨티나 입장에선 “님님 소 있음?”“소야 있죠.”“당장 계약 합시다.”“가격 제시점.”“킬로당 만원이면 됨?”“어…… 아까 독일은 킬로당 5만원 부르던데?”“그래? 그럼 걔한테 줄 꺼 까지 주는 걸로 킬로당 10만원 콜?” 아르헨티나의 배짱 장사 공급자 우위의 시장이 열리면서‘돈이 이렇게까지 들어와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미친 듯이 흘러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코인판으로 치면일론 머스크가“이제부터 비트코인도 받아요.”라는 그 한마디 트윗에미친 듯이 가격이 솟구친 것과 같은 떡상의 시간이 찾아온 거지요.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얄미운 명제를 온몸으로 증명해 보인 셈이었지요. 인류 역사의 비극이라는 1~2차 세계대전은아르헨티나에는건국이래 최대 호황의 시절이었고전쟁의 소용돌이에서도 단 한 발의 포탄도 떨어지……기는 했다고 하네요? 2차 세계대전 말미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흐르는라 플라타 강 앞바다에서 독일과 영국의 해전이 벌어지긴 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사건을 다룬 영화 독일과 영국이 대서양에서 해전을 벌였는데알다시피 영국 해군은 세계 최강이었습니다. 독일로서는 “하필 만나도 영국을 만나냐 ㅜㅜ”하는 상황이었죠.당연한 이야기지만 한참 영국에게 쥐어터진 독일은 영국을 피해 ㅌㅌ를 시전했고영국은 “저놈 잡아라”하며 추격을 시작했는데……. 그게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이어진 거라고 합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앞바다에서 독일은“아이고 이 독한 놈들아. 아무리 우릴 족치고 싶어도 그렇지 지구 반 바퀴를 쫓아오냐?”“그러게 적도 넘기 전에 진작 고기밥 됐으면 서로 좋았던 거 아님?”“어차피 더는 못 튄다. 여기서 쇼부치자.” 하면서 둘은 최후의 한판을 부에노스아이레스 앞바다에서 벌였습니다만쫓는 쪽이든 쫓기는 쪽이든지구 반 바퀴를 넘게 추격전을 했으니뭐 싸움이 제대로 되기나 했겠습니까? 어쨋거나 둘은 목숨 걸고 치열하게 대포를 쏘며 난리를 치는 동안전투의 무대가 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님님 들음?”“뭔데?”“지금 라 플라타 앞바다에서 독일하고 영국하고 한판 붙는다고 함.”“아 진짜? 재미있겠다! 구경 갈래?”“ㅇㅇ 안 그래도 같이 가자고 님한테 이야기 한 거임.” 둘이서 한판 붙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고 해요. 싸움구경하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민들 예나 지금이나 최고의 구경은불구경과 싸움 구경이고 독일과 영국은 서로에게 날아오는 포탄 피하랴,몰아치는 남대서양의 거친 파도를 피하랴 고역을 치르는 동안아르헨티나 사람들은 팝콘에 마른오징어 씹으면서 “우와~ 진짜 포탄 쏘네?”“오와~ 우와 소리 진짜 커!”“오! 맞았다 맞았어!” 하며 환호성을 질렀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아르헨티나는 양차 세계대전 동안세계의 식량창고로서, 연합국과 독일 측 모두에게 식량을 팔아넘기면서달달~한 코인을 흡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예전에 『북유럽의 허와 실』편에 이야기했던스웨덴과 비슷한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77ㅓ억 3. 달도 차면 기운다고 생각해보면 양차 세계대전 이후에아르헨티나의 몰락은 예견되어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식에 담가보신 분들은 알지 않습니까?피크를 찍고 난 뒤에 성장동력이 사라지면장기적인 침체가 뒤따른 것을 말이지요. 사실 우리나라와 정반대의 행보를 걸은 걸지도 모르겠습니다.우리나라는 2차 세계대전 ~ 6.25를 최저점으로 해서상승 반전 후, 그 기세를 쭉 이어왔다면아르헨티나는 2차 세계대전을 최고점으로 해서하락 반전 후, 그 기세를 쭉 이어왔던 거니까요. 대체 왜 그랬는가……여기엔 여러 요인들이 복합되어 있습니다. 일단, 아르헨티나의 명과 암의 교차점에 있는‘페론’이라는 인물이 실시한 정책적인 미스도 있겠고 아르헨티나가 선택한 최대실책‘내수진작 정책’도 한 몫 했습니다. 내수진작 정책이란 것은제 뇌 내 망상으로 만든 용어구요.정확히 말하자면, 『수입 대체 산업화』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수입 대체 산업화사실 『수입 대체 산업화』라는 것은당시 신생 국가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트렌드였습니다.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음 일리 있는 말이야!” 싶기도 해요. 가상의 신생 독립 국가 A국을 생각해봅시다.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나서위정자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국민들을 “먹고 살 수 있게 해야겠지요?”먹고 산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겠지만우선은 문자 그대로 “먹고, 마실 것”을 마련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신생 독립국가들은 제일 먼저농업, 축산업, 식료품업 등을 육성했어요.우리나라도 50년대에 밀가루, 제분, 제당 산업을 육성했습니다.그로 인해 만들어진 게 제일제당지금의 삼성과 CJ의 모태가 된 기업이었지요. 한국판 수입 대체 산업화의 수혜자 이제 이런 기본적인 산업을 퍼니시 한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일단 이를 닦을 치약, 칫솔 등이 필요할 것이고입고 다닐 옷이나 신발도 필요할 것이고문화 생활을 즐길 라디오도 필요하겠죠? 이런 애들은 공산품입니다.즉, 공업기반이 필요한 제품들이지요.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런 것들은신생 독립국 보다는 선진국들에게 우위가 있는 제품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 방향성 (수출 중심의 공업전략)을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우리나라로서는 “일단 우리한테 우위가 있는 걸 팔고, 선진국 우위의 제품은, 수입하면 되잖아?”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우리나라가 특이한 선택을 한 거구요.당시의 트렌드는 정 반대였습니다. “아오, 선진국 저놈들이 만든 걸 언제까지 수입 할 거야?”“그래도 뭐 어쩌겠어? 쟤들이 만든 제품이 성능도 좋고 값이 싼걸.”“안돼. 이대로 살 순 없지. 우리도 메이드 인 아르헨티나 라디오를 쓰고 싶지 않음?”“누군 그걸 몰라서 안하냐? 아까 말했듯이 쟤들이 만든 게 성능도 좋고 값도 싼……”“만약에.”“?”“쟤들이 만든 제품이 더 이상 싸지 않다면?”“?!?!?” 당시 대부분의 국가들은선진국에서 수입하던 공산품들을 자국에서도 만들자고공장을 만들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능은 아득히 선진국보다 떨어지겠지요.그런 불리한 상황에서 자국산 제품이 경쟁력을 얻으려면? 물론 품질을 향상 시키는 방법도 있겠지만그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효과가 빠른 방법이 있었습니다.앞서의 다이얼로그에서 나온 것처럼상대 제품의 가격을 올려버리는 방법이 있죠. 즉, 관세장벽을 높~이 높이 쌓은 겁니다. 그들의 솔루션 그렇게 되면, 자국의 국민들은『품질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은 국산제품을 쓰겠지그럼 우리나라가 다른나라로부터 수입을 하지 않게 될거야.』라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꽤나 그럴듯해 보이는 생각이었지만이런 정책은 결과가 보여주듯이 몇 가지 한계가 있었습니다......만제가 지금 두 번째 수정을 하는 중에이걸 다 다뤘다가는 분량이 폭발할거다(지금 A4기준 30장) 라는 판단이 있어서다음 게시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야 3천만 한테 1원씩만 팔아도 3천만 원 밖에 못 벌어.”“그래서 어쩌게요?”“그냥 우리나라는 외국에 수출하는 걸로 전략을 삼는다.”라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제도 취약성이 있긴 해요.세계 경제가 휘청이면 우리나라도 휘청이긴 하죠. 반면, 어쨌거나 기술 경쟁력이 확보만 된다면혹은경제 상황과 상관없이 어쨌거나 외국에서 우리의 제품을 사야만 한다면안정적인 캐시 플로우를 외부에서 확보할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선택을 한 국가들과우리나라와 반대 선택을 한 국가들은 초기의 작은 차이가나비효과를 일으켜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나비효과 생각해보면우리나라는 독립 직후에 GDP가 477억원이었어요. (국가 전체가)수출을 하즈아! 할 때의 GDP는 2499억원이었고요. (국가 전체가) 그때의 선택이 나비효과가 되어2019년 기준 GDP가 1919조390억원으로 껑충 뛰었습니다.이런걸 보면MCU의 멀티버스가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작은 차이가 만든 멀티버스 만약 우리나라가 수출주도 산업화가 아니라수입대체 산업화를 선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선택지네요. 어쨌거나 우리나라같이전교 꼴지를 달리던 애들이 전교 10위권으로 부상하면“우와 얘네 뭐야?” 하겠지만 아르헨티나같이전교 4등, 5등을 달리던 애들이 갑자기 전교 꼴지로 굴러떨어지면“우와 얘네 뭐야?”를 하면서선생님들이.“야 너 왜 그래?”“집에 무슨 일 있니?”“갑자기 생각이 바뀌었어?”라며걱정해주기 시작하겠죠. 그게 쿠즈네츠 아저씨 눈에도 너무 이상해 보였기 때문에 “세계는 선진국과 후진국, 일본과 아르헨티나로 나눌 수 있다.”라고말 한 것이겠습니다. 대체 어느 정도로 굴러 떨어졌길래 저러냐? 싶을 텐데요. 2,000년대 초반에는1인당 GDP가 $3,000까지 떨어진 적이 있었어요.이때 원자재 가격이 훅 떨어졌기 때문입니다.(물론 반대급부로 우리나라는 꿀을 제법 빨았겠지만)동일한 기간, 우리나라는 GDP가 $13,000으로 올라간 걸 생각하면극적인 반전이 벌어진 거죠. 그래서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2002년 한일 월드컵 때아르헨티나 대표팀이 한국으로 날아갈 비행기 값한국에 있는 동안 체류할 호텔 숙박비 및 식비경기를 뛸 때 입어야 할 유니폼 값 같은 기본적인 비용을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에서 댈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지역 예선에서 통과했지만돈이 없어서 월드컵을 못 갈 상황이 되자 당시 아르헨티나의 축구영웅이던마라도나를 비롯한 축구 레전드들이아르헨티나의 축구영웅 마라도나 “돈이 없어서 월드컵을 못 가는 게 말이 되냐? 우리가 돈 대줄 테니까 일단 가봐!”라며아르헨티나 대표팀에게 돈을 갹출해서 제공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F조에서1승, 1무, 1패로 조별 예선에서 3위로 탈락하게 되었고탈락이 확정되었을 때 선수들이 그렇게 서럽게 울었다고 합니다. 탈락 후 눈물을 흘리는 아르헨티나 선수 뭔가 이거라도 해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최선을 다했는데 잘 안된 거죠.당시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심정 5. 너무 까면 미안하니까 좋은 이야기를 해주자면 안습스러운 행보를 이야기했지만그래도 아르헨티나는 남미로만 따지면 2위,중남미 통합 3위의 경제 수준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1인당 GDP는 2020년 기준 $8,433이래요. (PPP로는 $20,370)전체 GDP는 $9,425억 이구요. 이쯤 되면 중남미 통합 1위는 누구인가 싶을텐데요.1위는 브라질입니다. 1인당 GDP는 2020년 기준 $6,450이고 PPP는 $14,563이지만전체 GDP가 $1조 3,637억입니다. 그럼 중남미 통합 2위는?멕시코입니다. 1인당 GDP는 $8,069이고 PPP는 $18,804이지만전체 GDP가 $1조 403억 이니까요. 제가 예전에 카타르 이야기 하면서PPP 이야기를 해드린 적이 있었는데요 복습 차원에서 다시 한번 설명해 드리자면PPP는, Purchasing Power Parity한국말로 구매력 평가입니다. 즉, GDP에 구매력, 즉 물가를 고려해서 나온 지수에요.같은 GDP여도, 물가가 싸면실제적으로 가용한 자금이 더 많아진다는 이야기죠. 이걸 미루어 볼 때, 아르헨티나는돈 버는 건 저 위에 두 나라보단 적지만물가가 더 싸기 때문에 삶의 질 차원에선 더 높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삶의 질 차원 이야기가 나와서 하자면아르헨티나는 먹거리가 진짜 풍족한 나라입니다.우리나라에선 김치 반찬을 공짜로 주듯이아르헨티나 식당에선 빵을 공짜로 줍니다.우리나라에선 눈 튀어나오게 비싼 소고기도아르헨티나에선 그냥 퍼주다시피한 가격으로 팔고 있고요. 거기에 아르헨티나는 정말로 깔고 앉은걸로 따지면어디 하나 빠질게 없는 나라입니다.아르헨티나 하면 떠오르는 ‘팜파스’라는 대 평원 덕분에밀 농사, 소 목축은 말할 것도 없고 밀이 재배되는 팜파스 지하자원으로 따져도 엄청나요.금, 은, 동, 납, 아연, 리튬 이런 광물 자원이세계 5~6위 정도의 수준입니다. 남미 리튬 3대장 이건 캐고 있는 녀석들 기준이고아직 캐고 있지는 않지만“저 언저리에 삽 들고 파면 나올 거 같애.” 하는 것들이전체 자원 보유량의 80% 수준이라고 합니다.즉, 아르헨티나는 묻혀있는 것에 1/5만 파서 팔고 있는데도세계 5~6위를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ㅎㄷㄷ하죠? 그리고 요즘 핫한 ‘셰일 혁명’과 관련해서도아르헨티나가 제법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핫하다는 셰일 자원 셰일에서 꺼낼 수 있는 건셰일 가스셰일 오일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제일 많이 묻혀있는 나라가 어디인가......“미국에서 시작했으니 미국이 제일 많은 거 아녀?”하겠지만순위는 다음과 같아요. 이 두 가지를 모두 퉁치면아르헨티나는 세계 2위의 셰일 자원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입니다.심지어 이런 셰일 자원들이 국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게 아니라30,000㎦ 정도의 땅에 다 몰려있어요. 거기에 어렸을 때 공룡에 관심이 있거나자녀분들이 한창 공룡 좋아할 나이인 짱공인이면 아시겠지만아르헨티나는 공룡 화석들이 정말 많이 발견되는 국가입니다. 가장 유명한 녀석이‘아르헨티노사우루스’입니다.이런 거에 가슴 떨렸던 거 다 압니다. 세계 최대의 공룡 화석으로 알려져 있지요.얘는 전체 뼈가 발견 된게 아니라허벅지 뼈 같은게 발견됐습니다.그걸 가지고 전체 크기가 얼마나 될까 라며6학년 1학기 “비와 비율” 단원을 활용해 유추해본 결과몸무게 80t, 몸길이 40m의 괴물 같은 크기를 가진공룡이란 걸 추정했다고 해요. 공룡조차도 이곳이 명당인 걸 알았던 모양입니다. 아 여담으로,“이야 공룡이 많이 살아서 셰일이 많구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석유의 재료는 공룡이 아닙니다. 석유와 석탄은 본질적으로 같은 재료에서 만들어졌어요.석탄기라고 해서지구에 육상 식물이란게 처음 생겼을 때그때 만들어진 식물들이 탄화된 거라고 합니다. 석유와 석탄이 만들어진 바로 그 시기 석탄기 이전의 지구에서 식물 이란 건이끼, 풀 요정도 수준이었습니다.얘네들이 죽으면, 그걸 박테리아와 곤충들이 신나게 분해했더랬지요. 그런 상황에서 석탄기 나무의 등장은당시엔 엄청난 혁신이었어요. 이끼는 높이 자랄 수 없으니2차원 적으로만 햇빛을 쏘일 수 밖에 없었지만나무는 리그닌이라는 분자구조를 만들어 냄으로써높이 자랄 수 있었고 그 덕분에3차원 적으로 햇빛을 활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만 봐도 나무가 얼마나 효율적인지 알 수 있음 문제는 당시의 미생물들은이 리그닌 구조를 분해할 능력이 없었던 거에요.즉, 석탄기 시기에 나무들은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친 뒤에 죽고난 뒤에도이걸 분해할 녀석들이 없어서 썩지 않고 쌓였고몇 억년에 거친 시간 동안 누적되어가히 엄청난 양이 쌓인 겁니다. 이것들이 지각변동 과정에서 땅 속으로 들어가열과 압력을 받으면서 (탄화작용)일부는 석탄으로, 일부는 석유로일부는 셰일가스로 일부는 셰일 오일이 된 것입니다. 귀엽게 1억년 정도밖에 살지 않은 공룡들로는지금의 석유가 나올 수 없다고 해요. 6. 마치며 어후…… 그냥 가볍게 쓱 해야지~ 했었는데이제까지 녹취한 그 어떤내용보다양이 어마무시하게 많아져 버렸습니다. ㄷㄷㄷ 이젠 분량 조절 실패는 참..... 일단 이로서 아르헨티나의 개관에 대해서 끝났구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정말저도 미치겠네요.엄청난 수렁에 발을 디뎌버린게 아닌가 싶습니다. 최준영박사의 지구본 연구소에서도아르헨티나는 6편에 걸쳐있는 장기 특집인데저는 이제 1편을 끝냈거든요 ㅠㅠㅠ 일단 최대한 마음에 드는걸 골라야 할 것 같긴한데하고 싶은 이야기가 반대로 또 산더미긴 합니다. 독재자인지, 지도자인지 그 경계가 모호한 페론이라던지영국과 한판 붙은 ‘포클랜드 전쟁’이라던지 흠...... 가볍게 시작했는데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것 같습니다. 일단 정말로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게시글을 마치기 전에, 이 게시글은유튜브 “3프로 TV”의 코너“최준영 박사의 지구본 연구소”를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갑과을작성일
2021-08-05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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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 07/13 주요뉴스
07/13 주요뉴스 * 뉴욕증시, 7/10(현지시간) 코로나19 치료제 및 백신 개발 기대감 등에 상승… 다우 +369.21(+1.44%) 26,075.30, 나스닥 +69.69(+0.66%) 10,617.44, S&P500 3,185.04(+1.05%), 필라델피아반도체 2,069.79(-0.33%) * 국제유가($,배럴), 원유 수요 회복 전망 및 코로나19 치료제 기대감 등에 상승 … WTI +0.93(+2.35%) 40.55, 브렌트유 +0.89(+2.10%) 43.24 * 국제금($,온스), 코로나19 백신 기대감 및 증시 강세 등에 하락... Gold -1.90(-0.11%) 1,801.90 * 달러 index, 코로나19 치료제 기대감 등에 하락... -0.04(-0.05%) 96.65 * 유럽증시, 영국(+0.76%), 독일(+1.15%), 프랑스(+1.01%) * 트럼프 "중국과 2단계 무역협상 생각 안해…관계 심각하게 훼손" * 테슬라 주가 급등에도 숏베팅 규모 200억 달러 육박 * 코로나19 우려 속 12년 만에 최악의 실적 시즌 돌입 * 무디스 "봉쇄 조치, 경기 회복에 방해할 수 있어" * 바이오엔테크 CEO "코로나 백신, 연말에 사용 승인 준비될 것" * 길리어드 "렘데시비르, 코로나 환자 사망 위험 62% 줄여" * IEA "하반기 원유 수요 하루 510만배럴 감소 예상" * 한은 "美 일부주 경제활동 재개 중단에 경기회복 지연 우려" * 文대통령, 한국판뉴딜 전략회의 직접 챙긴다 * 전국에 비…남부지방은 300㎜ 물폭탄 미국 어닝시즌과 코로나 추이 주목주 초반 한국 증시는 길리어드 사이언스 치료제 관련 데이터에 대한 재해석과 7만명을 넘어선 미국의 신규 코로나 확진자 급증, 중국의 수출입 통계 결과 등에 의해 변화가 예상. 주 중반에는 크게 부진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의 2분기 본격적인 실적 발표가 주요 변수. 주 후반에는 EU 정상회담 결과와 넷플리스 등 일부 기업들의 실적 발표에 따라 변화 예상되는 등 변화 요인이 많은 한 주 특히 미국 신규 확진자 수가 급증함에 따라 글로벌 교역량 축소로 미국과 중국의 경제지표가 부진할 경우 경기 회복 지연 우려 속 외국인의 매물 출회는 불가피.더불어 EU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우려가 확산될 경우 유로화 약세에 따른 달러 강세도 외국인 매물 출회 가능성을 더욱 높임. 이는 한국 증시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 더불어 금요일(17일)은 미국의 옵션만기일임을 감안 미 증시 변동성 확대 가능성 또한 부담. 이를 감안 KOSPI는 2,080~2,180pt, KOSDAQ은 750~790pt 등락 예상.. 키워드 : 램데시비르, 미중분쟁, 장마, eu정상회담 [기업/산업] * 삼성바이오, 에스티큐브와 면역항암제 추가 CDO 계약 * 한중 항공 노선 최대 주 20회까지 확대…이달부터 일부 재개* 대한항공 주주배정 유상증자 청약에 1.1조 들어와(항공주 다시 활력 찾나? 그래도 코로나 확진자가 너무 늘어나고 있음) * "세계자동차 생산-판매, 2023년 돼야 회복" * 삼성전자, 5G 구축 비용 낮추는 기술 개발 * "베트남 2공장 가동…반도체패키징 수주 기대" 반도체패키징 업체 하나마이크론 * '수소차株 톱10' 한 달간 50% 질주 * 2차전지장비 국산화…대보마그네틱 '쑥' * 5월 산업용 전력판매량, 전년대비 10% 감소...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대 낙폭 * 상하이증시, 中 경기부양책 힘입어 상승기조 기대 * '한국판 뉴딜' 진두지휘…범정부 전략회의 출범(한국판 뉴딜 관련주) * '대선급 4월 재보선' 커지는 관심…野잠룡 안철수·오세훈 등판하나(오늘도 정치관련주 - 안철수 써니전자, 안랩 오세훈 - 누리플랜, 진흥기업 ) * 코로나 혈장치료제 임상돌입(녹십자) * 렘데시비르 국내 환자 27명 중 9명 호전…악화는 3건(램데시비르 - 신풍제약, 파미셀) * 한국 온 미군 이틀새 16명 확진… 한미훈련 무산 위기 * 대학들 "2학기도 온라인 수업"…학생들 "차라리 휴학" * 폼페이오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 열려 있어"(대북주는 아직 살아있다) * WHO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23만명"…일일 기준 최다 * 日코로나 신규확진 또 400명 넘어…대형행사 속속 재개 * 중국 홍수 피해 14조원…시진핑 "지금은 결정적 시기" ■실외기 품으니 대박···이동식·창문형 에어컨 "이제 대세는 우리야"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1/0003767171?sid=101 ■오늘 다시 열리는 韓·中 하늘길… 벼랑끝 항공업계 ‘숨통’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3106830?sid=101 ■"워렌 버핏도 잃었다"…전대미문 유동성 장세에 가치株 고개 푹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119/0002414238?sid=101 ■마이너스 유가 이제 없다? OPEC, '감산 완화' 추진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8/0004438725?sid=101 ■[단독]자영업 줄폐업… 점포철거비 지원자 작년 3배로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3297294?sid=101 ■양극화되는 언택트와 콘택트, 어닝시즌 후 더 벌어지나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8/0004688018?sid=101 ■테슬라 잡아라, 아우디·BMW도 전기차 쏟아낸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5/0003016847?sid=101 ■5G ‘세계 최초’에 목맨 정부… 가입자만 속았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417/0000567094?sid=105 ■코로나19 증상부터 실시간 상태 확인까지… 작은 패치 하나로 OK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3297356?sid=105 오늘시장에 영향을 줄 전일 마감시황- 정치/인맥(안철수,오세훈,이재명) - 박원순 서울시장 사망 속 일부 정치인 관련주 상승. ▷경찰은 금일 언론을 통해 박원순 서울시장이 오전 0시1분경 서울 성북구 북악산 성곽길 인근 산속에서 숨진채 발견됐다고 밝힘. 한편, 박원순 시장은 전일 오전 시장 공관을 나섰고 이후 딸이 경찰에 연락을 통해 아버지가 유언 같은 이상한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선 뒤 전화기가 꺼져 있다며 실종 신고를 한 바 있음. ▷이 같은 소식에 차기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대권 후보자들이 주목을 받으며 써니전자, 안랩, 진양산업, 진양화학, 오리엔트정공 등 일부 정치/인맥(안철수,오세훈,이재명) 관련주가 상승세를 기록. 코로나19(진단/치료제/백신 개발 등) - 코로나19 글로벌 확산 우려 지속에 상승. ▷존스홉킨스대 코로나19 집계에 따르면, 9일(현지시간) 기준 미국에서 모두 6만5,551명이 코로나19에 새로 감염된 것으로 알려짐. 이는 일일 최대 확진자 수임. 이에 미국은 지금까지 코로나19 확진자가 310만명을 넘어섰으며, 사망자는 13만명을 넘어섰음. 한편, 앤서니 파우치 美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은 현재 코로나19 발생이 극심한 주들은 재봉쇄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언급했음. ▷아울러 일본에서는 9일 하루 동안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355명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짐. 하루 신규 확진자가 300명을 넘어선 것은 지난 5월2일 이후 처음인 것으로 전해짐. 아울러 금일 도쿄에서는 243명의 확진자가 발생했으며, 전일 224명을 넘어서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함. ▷한편, 중앙관리본부 중앙방역대책본부는 이날 오전 0시 기준 국내 신규 확진자가 45명으로 집계됐다고 발표. 이중 해외유입은 23명이며, 지역발생은 22명임. ▷이 같은 소식에 EDGC, 씨젠, 휴마시스, 랩지노믹스 등 코로나19 테마가 상승세를 기록. 7월 14일 (화) 文 대통령,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 발표 예정 7월13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국민보고대회를 개최해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을 직접 발표할 예정. 태양광에너지, 풍력에너지 , 통신장비 , 5G(5세대 이동통신) 7월 14일 (화) 식약처, 메디톡신 3개 제품 취소유예 마감일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메디톡스의 메디톡신 3개 제품의 품목허가를 6월25일 취소할 예정이었지만, 법원의 결정으로 7월14일까지 제품 취소를 유예했음 7월 16일 (목) 셀트리온, 코로나19 항체치료제 인체 임상시험 예정 이번 임상시험은 질병관리본부가 지난 6월 셀트리온 항체치료제를 가지고 시행한 중화능 평가시험에서 나온 결과 등을 바탕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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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 06/26 개장전 주요뉴스
2020-06-26 오전 6:38:53 * 뉴욕증시, 6/25(현지시간) 코로나19 재유행 우려에도 은행규제 완화 등에 상승… 다우 +299.66(+1.18%) 25,745.60, 나스닥 +107.83(+1.09%) 10,017.00, S&P500 3,083.76(+1.10%), 필라델피아반도체 1,961.05(+0.86%) * 국제유가($,배럴), 美 경제지표 및 자동차 통행량 회복 등에 상승… WTI +0.71(+1.87%) 38.72, 브렌트유 +0.74(+1.84%) 41.05 * 국제금($,온스), 달러 및 증시 강세 등에 하락... Gold -4.50(-0.25%) 1,770.60 * 달러 index, 코로나19 재유행 공포 속 상승... +0.25(+0.27%) 97.40 * 美 주간 실업보험청구자수 148만명…월가 예상 상회 * 美 1분기 GDP 성장률 확정치 5.0%↓…월가 예상 부합 * 美 5월 내구재수주 15.8%↑…예상 상회·기업투자도 증가 * 美 당국 볼커룰 완화로 은행주 급등…뉴욕증시 반등(구체적으로 은행들이 계열회사와 스와프 거래를 할 때도 적립해야 했던 개시 증거금(initial margin)을 면제한다.) * S&P "美 경제 길고 더딘 회복…3분기 회복 보류될 듯" * 커들로 "코로나19 확산 일부 주 지역 봉쇄될 수도…강한 V자 회복 가능" * 텍사스, 코로나19 급증으로 추가 경제 재개 중단 * IMF "금융시장과 실물경제 괴리…자산가격 조정 위험" * 출근길 우산 챙기세요…중부지방 낮까지 빗방울 코로나 우려 불구 볼커룰 완화로 상승 확대텍사스, 코로나 신규 확진자 급증으로 추가 경제 재개 중단 발표미 증시 특징: 금융주 강세폭 확대미 증시는 ECB 의 유동성 공급 정책 발표 등에도 불구하고 고용지표 부진과 코로나 재 확산 우려로 낙폭을 키우기도 했음. 그러나 연준이 볼커룰 규칙 수정을 발표한 이후 금융주가 강세를 보이자 상승 전환 성공. 특히 장 후반 금융주 강세가 확대되며 지수 전체를 견인한 점이 특징. 다만, 텍사스의 추가 경제 재개 중단 소식으로 여행, 소매판매 업종이 약세를 보이는 등 종목 차별화를 보임(다우 +1.18%, 나스닥 +1.09%, S&P500 +1.10%, 러셀 2000 +1.70%) 11 월 대선에서 승리 가능성이 높은 민주당의 바이든 후보가 FANG 기업들에 대한 규제는 물론 금융주 규제 강화를 언급해 왔기 때문에 향후 변화가 있을 수 있음최근 오하이오 등 일부 주에서 다시 경제 셧다운으로 돌아 설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미국의 코로나 사태 불확실성은 더욱 확산. 한편, CDC 국장은 미국의 현재 코로나 확진자 수가 240 만명이 아니라 2 천만명이 넘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영향은 크지 않음 한국 주식시장 전망 견고함 속 종목 장세전일 한국 증시는 미국 코로나 신규 확진자 수가 최고치를 넘어서자 매물이 출회되며 2% 넘게 하락했다. 이런 가운데 텍사스 지역이 코로나 확산으로 추가적인 경제 재개를 중단하는 등 관련 우려가 지속되고 있어 부담이다. 그렇지만, 이는 전일 선 반영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ECB 의추가적인 유동성 공급책 발표 등을 감안 조정세가 지속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오늘 미 증시 상승을 이끌었던 금융주가 장 마감 후 연준이 금융주의 코로나 민감도 발표 후 시간 외로 1~3%대 하락 중이다. 한편, 다음 주에는 중국과 미국의 제조업 지표가 발표되는 데 심리지표라는 점을 감안 양호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여기에 개선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미국의 고용보고서 등도 준비되어 있다는 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록 하반기 경기에 대한 불확실성을 언급했던 연준의 FOMC 의사록이 공개되지만 이를 제외하면 발표되는 주요 경제지표가 전월 대비 개선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어 이를 준비하는 하루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시장의 견고함을 보여 줄 것으로 예상한다. 키워드 : 코로나 재확산 주요뉴스 * 이재용의 'K칩 동행'…협력사 손잡고 '반도체 초격차' 나선다 * 코로나로 병원 기피하니…실손보험 청구도 '뚝'(코로나로 보험주 반사수혜?) * 벌크선 운임 3배 폭등…해운 '최악의 바다' 지났다(시장이 반등한다면 다시한번 조선주의 강세) * 두산인프라, 中서 美 꺾고 '굴착기 1위' * KT, 폰 연동 없이 커넥티드카 서비스…르노삼성 신차에 적용* 5배 빠른 '5G급 와이파이' 나온다...16년만에 6GHz 대역 와이파이용 주파수 공급* SKT·KT 치켜세운 폼페이오…"反화웨이는 세계적 추세"* "화웨이는 중국군 소유"…美정부, 추가 제재 시사(5g 화웨이의 반사이익 확정적) * "메디톡신 빈자리 잡아라"…보톡스 시장 '후끈'(휴젤, 대웅제약, 휴온스) * '동박 증설' 속도전…일진머티리얼즈·SKC 강세(2차전지) * '롤러코스터' 탄 원격의료 관련株(오늘도 강세보일듯, 알서포트, 비트컴퓨터, 헬스케어 관련주) * 文 "北과 체제경쟁 끝나…도발땐 단호하게 대응"* 北에 응답하기 바쁜 與…송영길 "인도적 지원 허용을"* 숨 고르는 北…대남 비방도 '올스톱'(남북경협주 다시 분위기 훈풍으로) * 美, 反中 경제블록 EPN 韓참여 압박(슬슬 라인을 잡아야 하는 시기가 왔는데... 이건 어차피 트럼프의 작전이니까 11월까지만 시간끌면서 버텨봅시다) * 펄펄 끓는 시베리아, 한반도 최악의 폭염 오나(여름주 슬슬 재반등 타이밍올듯) * 유럽의약품청, 코로나19 치료에 렘데시비르 조건부 사용 권고(파미셀, 부광약품, 신풍제약) * 미·브라질 연구진, 탈모 치료제로 코로나 잡는다…이달 중 임상 개시(야호) ★ 6월 26일 장전뉴스 ★ ■어린이100명 집단 설사?구토…14명'햄버거병'?https://imnews.imbc.com/replay/2020/nwdesk/article/5822453_32524.html[쎌바이오텍,바이오니아,바이오스마트,서린바이오 등] ■산업부 사업재편 심의10개 중6개가'미래차'진출http://www.epnc.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750[덕양산업,베셀 등] ■美상원, '홍콩자치법'만장일치 통과…中"홍콩보안법, 30일 즉시 시행"https://news.mt.co.kr/mtview.php?no=2020062606292732873&MTS_P[유니온,쎄노텍 등] ■의료법상 금지된‘비대면 진료’…재외국민에 한해2년간 허용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2006252110005&code=920501[네오펙트,비트컴퓨터 등] ■'국산'보툴리눔 톡신들 중 누가 먼저'중화권'주름 잡을까https://www.dailian.co.kr/news/view/900482[휴젤,대웅제약,메디톡스 등] ■셀리버리"코로나19치료신약美영장류 시험서 치료효능 입증"http://www.inews24.com/view/1276646[셀리버리] ■두산인프라코어 굴착기 중국 시장서`승승장구`https://www.mk.co.kr/news/business/view/2020/06/653462/[두산인프라] 위 자료는 구글시트에서 공유됩니다.https://docs.google.com/spreadsheets/d/1mC4mc9BCOx3XUAjHTODva-qtRdeEZvz_ecO1aNx4J7E/edit#gid=1126325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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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 02/03 주요뉴스 및 섹터
* 신종 코로나에 새벽배송 폭증…쿠팡은 마스크 가격 동결(배송이 증가하면 제지업종의 상승세가 기대됩니다.) * 中부품 6일 오후3시 동난다, 현대·기아차 올스톱 위기(쌍용차는 4~12일 공장 가동중단, 현대차도 곧 공장가동 중단 할 수 밖에 없음) * 마스크 대란…'숨쉴 틈 없이' 도는 도레이·휴비스 부직포 공장(휴비스가 마스크 관련주로 주목을 못받았네요) * 신종 코로나 잡아라…진단키트 이달 상용화(티씨엠생명과학, 코젠바이오텍, 피씨엘, 바이오니아, 랩지노믹스) * 우한 폐렴에 마트도 안간다…온라인몰 먹거리 쇼핑 '폭주'(식품 관련주의 매출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 * 車부품 에스엘 '제네시스 효과(자동차 관련주 일단 피하고 보자) * 윤석열 "정치 생각없다, 대선 후보군서 빼달라" 여론조사 기관에 요청(지난 금요일에 관련주들 급등했는데... 하락하겠네요) 오늘의 섹터진단시약* 신종 코로나 잡아라…진단키트 이달 상용화(티씨엠생명과학, 코젠바이오텍, 피씨엘, 바이오니아, 랩지노믹스) (2020-01-28)中 우한 폐렴 공포 확산에 급등(주도주 : 바디텍메드, 파루, 수젠텍, 피씨엘, 진원생명과학) (2020-01-22)미국서 '우한 폐렴' 환자 발생 소식 등에 상승(주도주 : 진원생명과학, 우진비앤지, 진매트릭스) (2020-01-21)中 '우한 폐렴' 4번째 사망자 발생 등에 상승(주도주 : 진원생명과학, 진매트릭스, 엑세스바이오, 고려제약) 마스크* 마스크 대란…'숨쉴 틈 없이' 도는 도레이·휴비스 부직포 공장(휴비스가 마스크 관련주로 주목을 못받았네요) (2020-01-31)국내서 11번째 中 우한 폐렴 확진자 발생 소식 등에 상승(주도주 : 웰크론, 모나리자, 오공, 케이엠) (2020-01-28)中 우한 폐렴 공포 확산에 급등(주도주 : 국제약품, 오공, 케이엠제약, 모나리자, 웰크론) (2020-01-22)미국서 '우한 폐렴' 환자 발생 소식 등에 상승(주도주 : 모나리자, 국제약품, 케이엠) 음식료* 우한 폐렴에 마트도 안간다…온라인몰 먹거리 쇼핑 '폭주'(식품 관련주의 매출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 (2019-10-15)내년 실적 개선 기대감 등에 일부 관련주 상승(주도주 : 롯데푸드, CJ제일제당, 동원F&B) (2019-08-30)日 수입가공식품 방사능 검출 소식에 상승(주도주 : 농심, 코스맥스엔비티, 샘표식품, 현성바이탈) (2019-07-31)日 제품 불매운동 반사이익 기대감에 일부 관련주 상승(주도주 : 푸드웰, 해태제과식품, 보라티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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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결혼·육아] 5년 연애 후 헤어졌네요
예~전에 한번 헤어졌다가 2년 정도 이쁘게 만나다?오늘 이별 통보를 받았네요,2년 전 짱공에 글을 올렸었고,다시 정독 했는데,(닉네임바꿈)지금 헤어짐의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네요 ..결혼을 생각하니 서로에게 부담이 되고, 더 이상 진전이 없어 보였습니다.저희 부모님도 여자 친구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구요 ..그래서 그랬나 제가 좀 소홀했습니다?휴?실감이 잘 나질 않네요 .연애의 발견 첫 화를 보면 에릭이 여자친구에게 관심 1도 없어 너무 나쁜 남자였는데,딱 오늘 제가 그 모습이었네요??오늘 오랜만에 만났는데 손도 잡아주고, 말도 따뜻하게 들어주고, 했어야 했는데,?그렇지 못했네요,뭐 오늘 일이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참 미안하고 그러네요?자꼬 미안한 생각만 들어서 눈물이 나올 것 같네요?올해 30살이 됐습니다 .어렸을때 30살이면 어른이고 아픔도 잘 참고, 다를 줄 알았는데잘 참기는 커녕 너무 힘드네요 .마음은 자꼬 다시 잡아라 질척거리겠지만 하고 싶은 말은 해봐라 하지만 .결혼을 생각하면 서로 진전이 없을 걸 알기에 쉽사리 다시 질척 거리기도 힘이 드네요 ..믿기질 않고 후회도 많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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