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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수다] 간편 종합 뉴스?
12월 30일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이야기들
1. 일본 언론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향후 양국 정부의 합의 이행이 새로운 한일관계 구축의 관건으로 평가했습니다.
특히 요미우리는 ‘한국 정부가 합의안에 반대하는 한국 내 세력을 설득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고 위안부 소녀상 철거도 중요한 시금석’이라며 위안부 관련 자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는 위안부상 설치 등에 대해서도 우려를 제기했습니다.
국민의 공분이 장난이 아닌데 말입니다. 이쯤 되면 보수를 자처하시는 분들이 앞장서야 하는 건 아닌지... 아~ 연말이라 바쁘시다고?
2. 한·일 정부가 28일 위안부 문제에 합의하자마자 일본 정부와 언론이 이번에는 독도 문제 해결과 일본산 수산물 금수 해제 조치에 대한 기대감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익명의 일본 정부 고위관료는 ‘다른 사안도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지 모른다’면서 높은 기대감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프로야구 선수 계약금 정도로 퉁쳤으니... 나머지도 싸게 싸게 가는 건 아니겠지?
3. 앞으로 외국에서 영주권을 취득한 재외국민과 거주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기초생활 급여를 받지 못합니다.
외국의 영주권을 취득했거나 영주할 목적으로 외국에 거주하면서 영주 귀국신고를 하지 않은 사람, 거주지가 불분명한 사람은 수급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외국 영주권자가 기초생활 수급자라는 건 어째 부조화스럽다. 영주권 받으신 분... 거기서 열심히 사는 걸로~
4. 지난해 국내 자동차의 하루 평균 주행거리는 43.9㎞, 연평균 1만6천24㎞로 나타났습니다.
차종별 하루 평균 주행거리를 보면 승용차는 37.6㎞, 승합차 62.2㎞, 화물차가 51.5㎞로 나타났습니다.
100리가 약 40킬로니까, 건강 삼아 살살 걸어 다닐 거리네... 어릴 적 학교 다니던 생각 납니다. 걸어다녔다는 거 아님... ㅎ~
5. 햄, 소시지 등 육가공품 발암물질 논란으로 지난달 대형마트의 매출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편의점 매출은 지난달에도 두 자릿수의 증가율을 보이며 고공 성장세를 이어갔습니다.
아마 편의점 매출의 최대 효자는 담배 아닐까요? 도시락이 한몫 거들고...
6. 대법원은 이른바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당한 박노수 교수(1933∼1972)와 김규남 의원(1929∼1972)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1972년 사형이 집행된 지 43년 만이고, 당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김판수(73) 씨도 무죄가 확정됐습니다.
이러고도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범죄 아닐까요? ‘그때는 그랬으니까’라고 한다면 우리가 일본하고 뭐가 다른 건지...
7. 부산교통공사 노사가 정년보장형 임금피크제 도입에 마지막으로 합의했습니다.
이에 따라 전국의 142개 지방공사·공단 모두가 내년부터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게 됐습니다.
임금피크제로 절감된 인건비로는 정규직 1천10명을 추가로 채용할 방침이라고 합니다.
기존의 월급 깎아서 1천 10명 거저먹기 한다는 얘기지요... 이게 희망이야?
8. 2015년이 사흘밖에 남지 않은 가운데 올해 역시 해가 바뀌면 소멸되는 통신사 포인트의 규모가 막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 통신 3사는 모두 포인트 유효기간을 1년으로 정해놓고 있어 사흘 후면 2015년분 포인트가 모두 사라집니다.
절대 날려버리지 마시고, 데이터 충전, 제휴 할인 등으로 최대한 소진합시다~ 오케이?
9. 고교생의 절반 이상이 10억 원의 거액을 가질 수 있다면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상관없다고 여긴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또 고교생의 절반가량은 이웃의 어려움과 관계없이 '나만 잘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뭘 보고 배웠겠어... 우리 어른들의 죄가 크다면 크지요... 에휴~
10. 내년 하반기부터 음란·퇴폐 광고물 단속 효과가 커질 것으로 보입니다.
자치단체가 광고물에 쓰인 전화번호 사용정지를 통신사에게 요청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기 때문입니다.
전화번호만 사용금지가 아니라 음란 퇴폐 행위도 못하게 해야는 건 아닌지요?
11. 내년부터 하도급법 보호를 받게 되는 중견기업에 거래대금을 제대로 주지 않는 대기업은 큰코 다칠 것으로 보입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하도급업체들이 대금을 못 받는 문제만큼은 확실히 해소될 수 있도록 강도 높게 대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워낙 콧대가 높으셔서 과연 그 큰코가 다칠지는 미지수 같은데~
12. '2015년 국민통합 국민의식조사' 결과, 응답자의 51.8%가 사회 갈등을 악화시키는 가장 큰 요인으로 '여야 정치갈등'을 선택했습니다.
이어 '경제적 빈부 격차'와 '개인 이기주의'가 사회 갈등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꼽혔습니다.
그 책임이 여에 더 있다, 야에 더 있다 싸우지 마시고 꼭 투표로 심판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정신들 차립니다.
13. 응급실에 지나치게 많은 환자가 몰리는 현상을 줄이기 위해 응급하지 않은 환자가 대형병원의 응급실을 찾을 경우 중소병원으로 돌려보내는 방안이 추진됩니다.
복지부는 구급대가 비응급환자를 대형병원에 이송하지 못하도록 응급의료법을 개정하기로 했습니다.
진짜 응급한 환자를 위해 양보하세요, 그래야 당신이 응급할 때 빈자리가 있습니다. 아셨죠?
14. 내년에 새로 가입하는 실손 의료보험부터 정신과 질환에 대한 보장 범위가 확대됩니다.
새로 보장되는 주요 정신과 질병은 기억상실, 편집증, 우울증, 공황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틱장애 등입니다.
정신과 병원 문 두드리기가 쉽지 않았는데... 병은 숨기는 게 아니랍니다~
15. 컴퓨터 워드프로세서에 쓰이는 글꼴의 무단 사용으로 서울과 인천지역 초·중·고 300여 곳이 8억 원대 규모의 저작권 분쟁 송사에 휘말릴 상황에 놓였습니다.
컴퓨터 글꼴 ‘윤서체’의 개발업체인 그룹 와이는 해당 학교에 저작권법 위반에 의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경고문과 함께 '원만한 해결을 위해 윤서체 유료 글꼴 프로그램을 학교당 275만 원에 구입하면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저작권. 중요하지요... 근데 어째 덫에 걸린 분위기라 좀 찝찝하다...
16.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 여성이 장기 기증으로 생명을 선물하고 영면했습니다.
18년 전 이 여성은 만성신부전으로 투병하다가 신장 이식을 받아 건강을 되찾았었습니다.
받은 사랑 만큼 돌려주고 가셨네요... 명복을 빕니다. 영면하시길...
17. 우리나라 미혼남녀가 원하는 1등 배우자감은 공무원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상적인 배우자 연봉은 남성 5,417만 원, 여성 4,631만 원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봉 5천만 원이 넘는 공무원은 직급이 3급쯤 되나? 별정직이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한 50세쯤 될 텐데... 그래도 괜찮아?
18. 한 축구 선수가 FC바르셀로나에 영입된 지 몇 시간 만에 쫓겨나는 봉변을 당했습니다.
2년 전 자신의 트위터에 바르셀로나를 욕하는 글을 쓴 것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과거 청산 확실히 하셨네... 근데 이건 좀 속 좁아 보인다는...
19. 롯데월드 측은 오는 2016년 1월 한 달간 이름에 '병' 혹은 '신'자가 들어간 사람들에게 자유이용권을 할인해 주겠다는 계획입니다.
'병'과 '신' 중 한 글자가 이름에 포함돼 있으면 2만 5,000원에, 두 글자가 모두 포함돼 있으면 2만 원에 자유이용권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두 글자 다 들어가려면 병신이 되어야 하는데... 진짜 있을라나? 궁금하네...
20. 새해마다 나이를 한 살씩 먹는 '한국식 나이 계산법' 무용론이 연말연시를 맞아 다시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한국식 나이 계산법에 따르면 12월 31일에 태어난 아이도 하루 만에 한국 나이로 2살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게... 괜히 한 살 더 먹는 게 나이 들수록 몹시 억울하다는... 이거 바꿉시다~~
21.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유전자 중 건강은 미미한 것으로 밝혀졌답니다.
해넘이, 해맏이 인파에 134만 명이 몰릴 것으로 예상된답니다.
위안부 할머니를 만난 외교 1차관이 ‘연휴라 미리 말씀 못 드렸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가디언지가 위안부 합의는 일본과 미국의 승리라고 했답니다.
인기 배우 ‘잭 블랙’이 무한도전에 출현한답니다.
인생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지요.
아마 한해 한해가 그럴지도 모릅니다.
2015년 한해가 온통 힘들고 어려웠던 일로만 기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혹 매일 아침 제가 전하는 소식들이 한몫 거든 건 아닌지 송구합니다.
시간으로 따져도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올 한해.
기쁘고 즐거운 일만 넘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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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뇌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가(약스압)
뇌는 정말로 필요할까?다윈은 죽음 직전에 쓴 편지에서"하등한 동물의 마음으로부터 발전된 인간의 마음이 과연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과연 신뢰할 수 있는 존재인지 이에 대한 불쾌한 의구심이 항상 떠나지 않을 것이다.원숭이의 마음에 어떤 확신이 존재한다고 하자. 이런 원숭이의 마음의 확신을 과연 누가 신뢰할 수 있겠는가?"라고 편지에 썼다고 한다.영국의 진화론자인 할데인은 이러한 난제에"만일 나의 정신적 과정이, 나의 뇌 속에 있는 원자들의 운동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면나의 신념이 참이라고 가정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따라서 나의 뇌가 원자로 구성되었다고 전제할 이유도 없어진다." 라고 말했다고 했음.말년에 들어서서 "다윈"과 "할데인"의 이 고민은 왜? 생긴 걸까?정상인의 뇌뇌는 없지만 IQ가 126당신의 뇌는 정말로 필요할까?1980년도 “당신의 뇌는 정말로 필요할까(Is Your Brain Really Necessary?"라는 제목의 사이언스지 기사야말로이런 종류의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기사를 잠깐 살펴보자. 영국의 세필드대학의 소아과의사인 존 로버에게 한 학생이 찾아왔다.학생을 담당했던 의사가 학생이 보통 사람보다 머리가 큰 것을 보고 존 로버교수를 찾아보라고 권했던 것이다.담당의사는 학생의 머리가 지나치게 큰 것을 보고 뇌수종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던 듯하다.뇌수종이란 두개내강(頭蓋內腔)에 다량의 수액(髓液)이 괴는 질병이며 로버박사는뇌수종 연구의 최고 권위자였다.뇌수종 환자의 뇌학생의 뇌를 스캔해본 로버 박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4.5센티의 뇌조직이 있어야할 부분에 1밀리 남짓한 막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뇌가 있어야 할 부분에는 유체로 가득찬 공동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의 검은 부분이 유체로 가득찬 공동이고공동 주변의 희게 보이는 부분이 뇌이다)이 학생은 존 로버 박사의 표현을 빌자면 사실상 뇌가 없는 상태였다.뇌가 거의 없는 수학과 우등생뇌가 사실상 없음에도 이 학생은 평소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을 뿐만아니라 아이큐도 126으로 높은 편에 속했다.게다가 우등상을 받은 적도 있는 우수한 수학 전공 학생이었던 것이다.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해부학 교수인 패트릭 월은 인터뷰에서 이런 결과에 놀랄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예는 과거의 문헌을 뒤져보면 널려 있다는 것이다.단지 로버교수의 경우 체계적인 데이터를 갖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로버교수는 뇌수종을 앓고 있는 253명의 환자들의 뇌를 600장 스캔해 다음과 같은 4그룹으로 분류했다.(1) 거의 정상적인 뇌를 갖고 있는 그룹(2) 두개강의 50~70%가 뇌척수액으로 차 있는 그룹(3) 두개강의 70~90%가 뇌척수액으로 차 있는 그룹(4) 두개강의 95%가 뇌척수액으로 차 있는 그룹마지막 그룹의 경우 그 숫자가 가장 적어 전 샘플의 10% 미만인 9명에 불과했다.하지만 이들은 극적인 결과를 보여주었다.정상인의 5% 정도의 뇌조직을 가졌을 뿐인 이들 가운데 4명은 IQ가 일반인의 평균인 100을 넘고 있었다.게다가 4명 가운데 2명은 정상인보다도 IQ가 높아 IQ가 126을 기록했다.반면 나머지 5명의 경우는 IQ가 낮았을 뿐 아니라 심각한 장애를 보여주기도 했다.로버교수는 이러한 결과를 발표하여 대논쟁을 일으켰다, 비판자들은 스캔 결과를 해석하는 데에 오류가 있었다고 비난했다. 로버교수는 스캔 결과를 해석하는 것이 쉽지 않은 작업임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그 수학과 학생의 뇌가 50그램인지 150그램인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정상인의 뇌무게인 1.5킬로그램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라고 잘라 말하며 비판을 일축했다.27년 후에 다시 확인된 뇌가 거의 없는 남성사이언스기사가 발표된지 27년 후인 2007년, 임상의학의 권위지 랜싯(Lancet)에 흥미로운 논문이 게재되었다.프랑스의 지중해대학의 교수들이 작성한 이 논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3년 전에 44세의 남성이 프랑스의 마르세이유에 있는 지중해대학(Mediterranean University)의 병원에 내원했다.왼쪽 다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을 느껴 병원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 환자의 뇌를 CT촬영해본 의사들은 경악했다.뇌가 있어야 할 장소의 대부분을 사진과 같이 유체로 가득 찬 공동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사진의 중앙에 있는 검은 부분이 액체로 가득찬 공동부분이고, 그 주변에 하얗게 보이는 것이 일반적인 의미의 뇌이다그림에 나타나있듯이 남성의 뇌는 얇은 막에 불과했다.담당했던 의사 Linoel Feuillet는 그 환자의 뇌는 표준보다도 아주 작아 뇌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존 로버가 보고했던 수학과 학생의 뇌보다 약간 나은 상태였던 것이다그 후의 테스트에서 남성의 IQ는 75인 것이 확인되었다. IQ 75는 낮은 편이긴 하지만 정상인의 하한에 속한다.이 남성은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결혼해 아이들 둘을 둔 가장이기도 했다.이 남성은 병원의 치료로 완치되어 퇴원했으나 뇌의 크기에는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의사들의 설명으로는 뇌의 변형이 서서히 진행되면서, 뇌의 한 부위가 다른 부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고그 덕분에 남성은 지극히 작은 뇌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했다는 것이다.뇌의 영역들세포 기억설 Cellular Memory세포 기억설(Cellular Memory)이란 장기 이식 수혜자에게 기증한 사람의 성격이나 습관이 전이되는 현상을 말한다.세포 기억설은 애리조나 주립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인 게리 슈왈츠(Gery Schwartz)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개요게리 슈왈츠 교수는 인간의 장기 속의 세포는 기억 기능이 있어 이 기억이 전이될 수 있다는 세포 기억설을 주장한다.그는 사람의 생활 습관, 식성, 관심분야, 일종의 단편 기억 등이 뇌 뿐만 아니라 인체의 세포속에도 저장된다고 주장한다.실제로 게리 슈왈츠 교수는 20년간 장기이식을 받은 사람을 연구하여 70여건의 사례를 발견한다.실례다음은 게리교수가 작성한 실례이다.#실제 사례 1 - 제니퍼(7세)심장 이식 수술 후 알수 없는 악몽을 꾸게 되었다. 제니퍼가 꾸는 꿈은 살인자에게 살해 당하는 꿈이었다.정신과 치료도 소용없어 제니퍼의 부모는 제니퍼를 경찰에 데려 가게 된다. 그리고 꿈속의 살인자의 몽타주를그려 결국 자신이 이식받은 심장의 주인인 랄프라는 소년의 살해범을 잡게 된다. - 게리 슈왈츠 교수의 논문 중 발췌#실제 사례 2 - 윌리엄 쉐리던(63세)심장 이식 수술후 그림에 대해 월등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이전에는 거의 초등학생 수준이었던 윌리엄은 심장 이식 수술후 창조적인 그림 실력을 보여 주기 시작한다.놀랍게도 월리엄에게 심장을 이식해준 사람은 교통사고로 숨진 케이스 네빌이란 사람으로 그는 24세의 젊은 아마추어화가였다. - 뉴욕포스트 중 발췌#실제 사례 3 - 쉐릴 존슨(37세)신장 이식후 독서 스타일이 변화하였다. 평소 연예인이나 가쉽거리 관련 잡지만 좋아하던 쉐릴은 신장 이식 후도스토예프스키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즐겨 읽게 되었다. - 데일리메일UK 중 발췌#실제 사례 4 - 소니 그레엄소니 그레엄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테리 코들의 심장을 이식 받게 된다. 시한부 삶을 살던 소니는 새로운 심장을 이식 받고 건강을 회복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13년후 소니는 돌연 자살을 하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살한 방법이 테리 코들과 동일한 방법이었다. - 데일리메일UK 중 발췌과학적 소견그러나 세포 기억설에 대한 의학적, 과학적 소견은 아직 냉담하다.심리학자들은 이런 셀룰러 메모리를 인식하고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아직 과학적 결론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그렇다고 셀룰러 메모리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오늘날 의학계에서는 인간의 내장 조직에서도 어느 정도 정보처리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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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고인이 되신 안병하 경찰국장 아시나요.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시민들을 구해낸 안병하 전라남도 경찰국장
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신군부의 강경 진압에 반대하다 해임된 후 계엄사의 고문 후유증으로 숨진 안병하 전 전남도경찰국장이 순직경찰로 공식 인정했다.
출처 : 5·18 강경진압 거부 경찰국장, '순직' 인정 - 오마이뉴스
지난 93년 7월 중순 이색적인 한 사람이 5·18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로 신고서를 접수시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화제의 주인공은 이미 작고한 남편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며 신고서를 낸 전임순씨(全任淳, 62). 전씨의 남편은 80년 5월 전남의 치안총책임자였던 고 안병하(安炳夏, 1988. 10. 사망)전남도경국장이었다. 당시 치안유지 차원에서 ‘시위진압’임무를 수행했던 현지 경찰책임자가 ‘민주화운동 피해자’라니? 전씨의 남편에 대한 명예회복 요구는 바로 이런 점에서 세인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그로부터 꼭 5개월 후인 지난해 12월 초, 전임순씨는 또 한번 화제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서울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셋째아들(안호재, 35)부부와 함께 아예 광주에서 살겠다고 내려와 또 화제가 된 것이다. 그녀는 지금 광주 구 시청 사거리 시민한의원 옆 골목에다 ‘도궁회관(광주 동구 광산동 100-18)이라는 자그마한 식당을 차려 광주생활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도대체 무슨 힘이 이 여인을 광주로 끌어들였을까? 남들은 광주에서는 먹고 살기 힘들다면서 어지간하면 서울로 서울로 떠나는 마당에 무슨 사연 때문에 이 여인은 고향 서울을 버리고 늘그막에야 ‘광주의 품’으로 찾아든 것일까?“광주분들이 너무 좋아서 무작정 내려왔습니다. 이 늙은 나이에 생활의 근거지를 옮긴다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편을 여의고 지병까지 겹쳐 삶을 포기하다시피 한 상태였는데 광주에 와서 다시 활기를 찾게 됐습니다. 어디 간들 이렇듯 마음 푸근하고 ‘사람 사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싶습니다. 정말 이곳에 오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합니다. 지하에 계시는 남편도 우리가 광주로 왔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틀림없이 기뻐하실 겁니다.”부인의 완강한 반대를 뿌리치고 안정된 직장마저 버린 채 6살바기 딸과 부인을 데리고 어머니와 함께 ‘광주행’을 감행(?)했던 전씨의 막내아들 안호재씨. 그의 ‘광주 감회’는 어머니와 또 다르다.“솔직히 저는 이곳에 내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진실’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광주에 와서야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됐고 더불어 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 비로소 깨닫게 됐습니다. 이곳에 계신 아버지의 옛 직장 동료분들을 만나보면서 5·18당시 아버님의 행적을 자세히 알게 됐지요. 그렇게 훌륭한 분인줄도 모르고 지금까지 제가 아버지에 대해서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동빙고로 끌려간 전남도경국장‘80년 5월의 진실’과 ‘아버지(혹은 남편)의 진실’. 그들의 운명적인 ‘광주행’혹은 ‘광주사랑’은 이말 한두마디로 압축된다. 그들이 광주에서 발견한 ‘진실’과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80년 5월 역사의 그늘에 가리워진 고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의 당시 행적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전임순씨는 ‘광주’와 맺은 첫 인연은 어쩌면 지극히 ‘우연’이다. 광주를 처음 알았던 것은 남편 안병하씨가 전남도경국장으로 부임하면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편이나 전씨에게 광주는 특별한 연고가 없는, 그저 한번쯤 거쳐갈 수 있는 평범한 근무지에 불과했다. 남편은 강원도 양양 출생으로 육사 8기생(김종필 민자당대표위원, 윤흥정 5·18당시 호남지역 계엄사령관 등과 육사 동기)이었다. 5·16때 경찰로 들어가 강원도경국장과 경기도경국장을 거쳐, 79년 2월 20일 전남도경국장으로 부임했고 치안본부장 자리가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만큼 탄탄하게 공직생활을 해오던 터였다.그러나 운명의 거친 손길은 80년 5월 ‘민주화운동’의 태풍이 거세게 몰아칠 때 그를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몰아넣었다. 1980년 5월 27일자 중앙의 일간지들은 일제히 제1면에 ‘안(安) 전 전남도경국장 지휘포기혐의 연행’‘안 전 전남도경국장 직무유기혐의 연행’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광주 현지에서 임무수행 도중 갑자기 치안본부로 연행된 것이다. 그직후 악명 높은 ‘동빙고’등지를 전전하며 14일간의 조사를 거친 다음 ‘자진 사표’를 조건으로 석방됐다. 그는 죽는 날까지 일체 당시 일에 대해서 ‘함구’했다. 심지어는 부인 전임순씨에게까지도 자세한 이야기는 피했다.“80년대 후반 한때는 평민당에서 남편에게 입당하라는 요청이 있었지요. 저는 그때 짧은 소견으로 이런 억울한 사정을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게 아니냐면 내심 입당을 원했지만 남편은 한사코 반대했습니다.”임종 직전에 기록한 ‘광주비망록’전씨는 남편의 그런 속사정을 광주에 와서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때 남편의 부하직원으로 근무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서야 가족에게까지 숨겨야 했던 남편의 ‘말 못할 사연’을 짐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 시점에서 자신이 입을 열면 엄청난 파문이 일 것이고 그 여파는 또 한번 가족들의 피해로 이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5·6공 시절 사찰기관에서 “요즈음 잘 계시느냐”고 간간이 안부를 묻는 ‘협박성’전화가 심심찮게 걸려오곤 했다는 것이다.도대체 무슨 말 못할 사연 때문에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입을 열지 못했을까?1988년 10월 안병하씨는 오랜 투병 끝에 한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죽음을 예감했던지 그는 운명하기 얼마전 고통을 무릎쓰고 5·18당시 광주에서 진행됐던 상황을 개략적으로 정리한 ‘광주비망록’을 작성했다. ‘광주청문회’를 한두 달 앞둔 시점이었다. 아마도 청문회가 열리면 혹시 증언석에 서야 할 상황에 대비해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며 작성했는지도 모른다. 이 육필원고 ‘광주비망록’은 그동안 한번도 공개된 일이 없었다. 이번에 전씨 가족들이 광주로 이사오는 과정에서 발견됐는데 병마의 고통에 시달리면서 작성한 탓인지 일반인들은 글씨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의 육필원고는 미완인 채 끝났다. 하지만 당시 광주 전남지역 일선 치안책입자였던 그가 광주상황을 어떻게 파악했으며 이 자신이 ‘직무유기 혐의’로 연행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데모 저지에 임하는 경찰의 방침’·절대 희생자가 발생않도록(경찰의 희생자 있더라도)일반 시민 피해 없도록·주동자 외는 연행치 말 것(교내서 연행금지)·경찰봉 사용 유의(반말, 욕설엄금)·주동자 연행시 지휘보고(식사 등 유의)이런 방침으로 시위 저지에 임하던 안 국장은 5월 16일 당시 전남대학생회장 박관현(사망)과 만났다. 박관현이 그를 찾아와 학생들의 ‘야간 횃불시위’를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때는 참으로 난감했다고 한다. 하지만 “만약 허락치 않는다면 평화스럽게 횃불시위를 끝내겠다”는 학생회장의 설득을 받아들여 횃불시위를 허락했다. 그로서는 지휘책임의 범위를 넘는 문제였지만 약속대로 학생들은 아무 불상사 없이 평화스럽게 시위를 마쳤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셈이었다. 그 후 학생들은 약속대로 그 다음날부터 더 이상 시위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치 않았던 계엄령확대와 더불어 군대가 투입되고 강경진압이 진행됐다.따라서 그는 만약 군이 투입되지 않고 끝까지 경찰에 치안 책임을 맡겼더라면 “광주사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런 인식 아래에서 ‘광주사태 발생동기’를 ‘과격한 (군의)진압으로 인한 유혈사태 시민자극, 악성 유언비어 유포 시민들 극도로 자극, 김대중씨 구속으로 자극’등이었다고 진단했다. 치안 책임자였던 안 국장의 이런 상황진단은 5·18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안 국장이 직위해제 당한 직접적이 이유는 군 계엄당국이 경찰에게 내린 ‘발포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안 국장은 ‘경찰 및 예비군 무기 탈취에 대해서’라는 작은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지서 1∼2명 인원(경찰)으로 무장 시민군 몇 백명 대항 불가 시민군이 적이 아닌 이상 사실상 무기 탈취당하는 과정에서 사격 불가발포명령 순간 4·19를 떠올려“남편은 발포명령을 지시받는 순간 4·19때 경찰이 국민을 향해 발사한 총탄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더 이상 경찰이 역사의 죄인이 돼서는 안된다. 당신 한몸 희생해서 무고한 광주시민의 생명을 해치지 않고 나아가 경찰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을 수만 있다면……’하는 생각에서 그런 선택을 하셨다는 겁니다.”역사적 순간 안 국장의 결단은 80년 5월 26일 ‘직무유기’라는, 공직자로서는 씻을 수 없는 ‘명예훼손’과 함께 연행. 고문, 사직으로 이어졌다. 당시 5·18과 관련해 책임선상에 있었던 공직자 중 누구도 그만큼 책임추궁을 당하지 않았고 스스로 도덕적 책임도 지지 않았다. 오히려 신군부에 협조했던 상당수의 인사는 5·6공 아래에서 출세가도를 달렸고 그들은 지금도 광주의 진실에 대해서 ‘함구’하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안병하 국장의 당시 행적은 그들과 극명하게 대비를 이룬다.또 그의 결단은 광주민주화운동의 대치선을 ‘경찰·계엄군 대 광주시민’에서 ‘계엄군 대 경찰·광주시민’이란 구도로 바꿔놓았다. 경찰간부가 광주시민 편을 든다는 이유로 계엄군에게 심하게 구타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반대로 광주시민들은 경찰서가 파괴되지 않도록 항쟁기간 동안 시민군이 철저하게 보초까지 섰다. 80년 5월 24일 상무대에 경찰지휘본부를 설치했던 안 국장이 임무수행을 위해 직접 도경에 들어가보니 ‘경찰국장실의 명패, 모자, 정복, 서류 등은 물론 관사도 그대로 보존돼 있어 깜짝 놀랐다’고 육필원고에 적었다.안 국장의 부하직원으로 근무했던 경찰들은 오늘날 누구나를 막론하고 ‘그의 결단’이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경찰 전체를 구했다’고 평가한다. 만약 그때 안국장이 계엄군의 지시대로 발포를 명령했더라면 경찰 손에 의해 많은 시민들이 희생됐을 것이고, 경찰은 영원히 오명을 씻을 수 없었을 것이며, 광주지역의 경찰가족들은 광주에서 발붙이고 살 수조차 없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광주 한’안고 단칸 셋방에서 숨져그러나 안 도경국장의 ‘공적’(公的)인 결단은 ‘사적’(私的)으로 엄청난 희생을 요구했다. 연행되었던 치안본부에서 나오면서부터 그는 급격히 건강이 악화됐다. 5·18이전까지 입원 한 번 한 적 없이 건강했던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혈압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지고 신장에까지 이상이 생겨 합병증으로 번졌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적 고통도 심해져갔다. 가세 또한 급속히 기울었다. 오랜 공직생활에도 불구하고 청렴한 그의 성격 때문이었는지 재산이라곤 서울 방배동 집 한 채가 고작이었다. 밑빠진 독에 물 붓듯이 들어가는 치료비 때문에 오래지 않아 그 집마저 팔아치워야 했다. 4천만원만 있으면 신장이식 수술이 가능해 정상인으로 생활할 수 있다는 의사의 언질도 있었지만 그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부인 전씨가 직접 생활전선에 나섰다. 세를 얻어 식당을 차리고 직접 일을 했다. 그러나 경험없이 시작한 장사는 오히려 큰 빚만 남겨 단칸 셋방으로 옮길 수밖에 없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던 것이다.이런 물질적인 고통보다 참기 힘들었던 것은 5·18의 진실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던 자녀들에게 남편이 ‘무능한 존재’로 비쳐진다는 점이었다고 한다. ‘광주의 진실’로부터 차단된 서울지역의 ‘냉담한 분위기’도 인내하기 힘들었다. 누구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는 울분의 세월을 스스로 삭여야 했다. 자연히 주변 사람들을 만나기도 꺼져졌고 간혹 광주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만 서로 속마음을 주고 받는 정도였다. 이런 상황속에서 지난 88년 10월 마침내 안 국장은 운명하고 말았다. ‘광주의 한’을 안은 채 고통속에서 죽어가며 ‘광주비망록’을 작성한 것으로 미루어 그는 ‘광주청문회’에 한가닥의 기대를 걸었는지 모른다.안 국장이 사망할 무렵 ‘광주사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평가가 바뀌었다. 그러나 그의 명예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광주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실시하자 전라도에서 남편과 함께 근무하다 해직당한 부하직원(경찰서장)4명이 부당한 강제해직에 소청을 냈다. 그들은 자신의 상사였던 안병하 국장도 명예가 회복돼야 한다면서 함께 상신했으나 기각돼버렸다. 그가 죽는 순간까지 걸었던 기대는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만 셈이다. 80년 이후 그렇듯 치열한 광주 진상규명투쟁 중에도 그는 이상하리만치 국민들의 뇌리에서 까마득히 잊혀진 존재였을 뿐이다.남편을 여의고 통한의 세월을 살아온 미망인 전씨는 명예회복마저 좌절되자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 큰 병을 얻었다. 물론 군사정권 하에서 남편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으리라고는 당초부터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혈압이 높아지고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두문불출한 채 삶을 거의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광주시민이 회복한 안국장의 명예바로 이때 ‘광주’에서 구원의 가느다란 불빛이 비쳐오기 시작했다. 지난해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5·18피해자 신고가 시작되면서 당시 광주에서 함께 근무했던 사람들이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을 명예회복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들고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안국장의 명예회복은 비단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경찰 전체의 명예일뿐 아니라 광주시민의 긍지가 걸린 문제라는 주장이었다. 만약 정부가 명예회복을 시켜주지 않으면 ‘광주시민’이 앞장서서 그분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광주 분들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어 ‘해직공무원’으로서가 아니라 당당하게 ‘5·18피해자’로 인정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신고하기로 맘 먹었던 거죠. 또 제 개인적으로는 광주 분들이 너무 고맙고 좋아서 아예 광주로 내려와 살기로 결심한 겁니다.”그러나 광주시의 5·18관련자 심의위원회는 제1심에서 안병하 국장을 비롯, 윤한봉씨(5·18관련 수배자로 미국에 망명했다 작년 5월 귀국)등을 5·18관련 피해자의 범위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뚜렷한 이유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경우 현행 5·18피해보상법에 명시된 관련자 범위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기각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광주지역 여론이 거세게 반발하며 들꿇었다. 결국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재심에서 안 국장을 비롯해 1심에서 ‘실정법상의 한계’ 때문에 제외된 대부분의 인사들이 ‘5·18관련 피해자’에 다시 포함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아무튼 고 안병하 국장은 ‘광주에서, 광주사람들에 의해’5·18관련 피해자로 공식 인정됨으로써 비로소 ‘명예회복’의 첫 단추를 끼운 셈이다. 실로 14년 만의 일이다.“이제 한많은 세월을 고통속에서 살다 돌아가신 그 분(남편)의 시신을 하루 속히 떳떳하게 망월묘역에 안장하고 싶습니다. 광주는 나와 우리 가족에게는 제2의 고향인 셈입니다. 비록 우리는 고통속에서 살았지만 자식이나 후세들이 그 분에 대해 ‘무능한 공무원’이 아니라 ‘자랑스런 민주경찰의 표상’으로 여겨주었으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아직도 부기가 빠지지 않은 전임순씨의 얼굴에서는 회한으로 얼룩진 세월과 광주시민에 대한 고마움 등 복잡한 감정의 편린들이 역렬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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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터] 5.18 과 경찰진압
찰카닥 기타동영상에 5.18관련 동영상이 올라온걸 보았습니다
찰카닥 메인에 진압군과 맨뒷쪽 진압경찰들의 모습도 보이구요..
혹시나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 글을 남깁니다
안병하 전남도 경찰국장을 알고 계십니까..
그분에 대한글을 남기고자 합니다
안병하 도국장님은 육사 8기생(김종필 민자당대표위원, 윤흥정 5·18당시 호남지역 계엄사령관 등과 육사 동기)이었다. 5·16때 경찰로 들어가 강원도경국장과 경기도경국장을 거쳐, 79년 2월 20일 전남도경국장으로 부임했고 치안본부장 자리가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었고 그만큼 탄탄하게 공직생활을 해오던 터였습니다
하지만 80년 5월 그는 5.18이라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습니다
그는 5.18 당시 경찰관들에게 진압방침을 내립니다
데모 저지에 임하는 경찰의 방침’·절대 희생자가 발생않도록(경찰의 희생자 있더라도)일반 시민 피해 없도록·주동자 외는 연행치 말 것(교내서 연행금지)·경찰봉 사용 유의(반말, 욕설엄금)·주동자 연행시 지휘보고(식사 등 유의)
하지만 계엄군은 안병하 도국장님에게 경찰 발포명령을 내립니다
이에 도국장님은 거부 의사를 밝히게 되죠..사격절대불가...
더 이상 경찰이 역사의 죄인이 돼서는 안된다. 당신 한몸 희생해서 무고한 광주시민의 생명을 해치지 않고 나아가 경찰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을 수만 있다면……’하는 생각에서 그런 선택을 하셨습니다(광주비망록중..)
하지만 이는 80년 5월 26일 ‘직무유기’라는, 공직자로서는 씻을 수 없는 ‘명예훼손’과 함께 연행. 고문, 사직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5·18과 관련해 책임선상에 있었던 공직자 중 누구도 그만큼 책임추궁을 당하지 않았고 스스로 도덕적 책임도 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신군부에 협조했던 상당수의 인사는 5·6공 아래에서 출세가도를 달렸고 그들은 지금도 광주의 진실에 대해서 ‘함구’하고 있었고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안병하 국장의 당시 행적은 그들과 극명하게 대비를 이룹니다
그의 결단력은 경찰간부가 광주시민 편을 든다는 이유로 계엄군에게 심하게 구타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반대로 광주시민들은 경찰서가 파괴되지 않도록 항쟁기간 동안 시민군이 철저하게 보초까지 섰으며 80년 5월 24일 상무대에 경찰지휘본부를 설치했던 안 국장이 임무수행을 위해 직접 도경에 들어가보니 ‘경찰국장실의 명패, 모자, 정복, 서류 등은 물론 관사도 그대로 보존돼 있어 깜짝 놀랐다’고 육필원고에 적었습니다
만약 그때 안국장이 계엄군의 지시대로 발포를 명령했더라면 경찰 손에 의해 많은 시민들이 희생됐을 것이고, 경찰은 영원히 오명을 씻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당시 경찰들은 입을 모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군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다는 이유로 모진고문을 당하고 연행되었던 치안본부에서 나오면서부터 그는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오랜 공직생활에도 불구하고 청렴한 그의 성격 때문이었는지 재산이라곤 서울 방배동 집 한 채가 고작이었고 밑빠진 독에 물 붓듯이 들어가는 치료비 때문에 오래지 않아 그 집마저 팔아치워야 했습니다 4천만원만 있으면 신장이식 수술이 가능해 정상인으로 생활할 수 있다는 의사의 언질도 있었지만 그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습니다
결국 무능한 존재..직무유기라는 공직생활의 불명예를 안고 단칸방에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다 88년10월 숨을 거두셨습니다
가족들에게는 유언으로 신 군부에 동조하지 않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으며, 언젠가는 역사가 나를 알아줄 날이 반드시 올 것이며, 가족들 모두 국립묘지로 나를 반기러 오는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는 말씀을 남겼다고 합니다.
후에 몇번의 민주화운동 희생자로 신청되었지만 매번 기각되었습니다..
우리의 무관심속에 진정 국립묘지에 묻히실분은 쓸쓸이 어느 산귀퉁이에서 자리를 하고 계셨고 5.18의 군부책임자들은 국립묘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005년에서야 국립묘지로 이장하셨고..2006년 순직경찰로 인정받으셨습니다...
5.18 이후 25년이 지난후에서야...불명예를 벗으실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고통속에서 살았지만 자식이나 후세들이 그 분에 대해 ‘무능한 공무원’이 아니라 ‘자랑스런 민주경찰의 표상’으로 여겨주었으면 더 바랄 게 없다는 가족분의 말씀이 더욱더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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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멀쩡히 살아 있는 몸에서 신장 떼고 간 뺀 뒤 화장터로...실화...ㄷㄷ..ㅜ.ㅜ;;
"멀쩡히 살아 있는 몸에서 신장 떼고 간 뺀 뒤 화장터로…" [주간한국 2006-08-17 12:48] 국제 인권단체, '중국의 파룬궁 생체 장기 적출' 보고서서 충격 주장 “처음에 의사들은 각기 다른 수술실을 이용했다. 그러나 의사들이 보다 많은 장기를 적출함으로써 겁이 없어졌고, 그후 의사들은 함께 장기 적출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의사는 각막을 적출하고, 다른 의사는 신장을 적출하고 또 다른 의사는 간을 적출했다. 그때 남편은 이 신체를 처리하는 다음 절차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만약 희생자의 피부가 벗겨지지 않고 내부 장기들만 적출되면 신체의 절개된 부위를 봉합하고 화장터로 보냈다. 피부까지 벗겨졌을 때는 병원 보일러실에서 소각했다. 수술대에서 (마취로) 희생자들의 심장은 멈춰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는 상태였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잔혹한 내용이다. 납량특집 영화나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얘기지만, 공포용 창작극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한다. 중국 내에서 생체 장기들을 강제로 적출하는 ‘반인륜 범죄’가 진행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 보고서의 일부다. "중국 보건당국이 지휘·거래" 데이비드 킬구어 전 캐나다 국회의원과 국제 인권변호사 데이비드 마타스는 최근 ‘중국 파룬궁 수련생 생체 장기 적출 고발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믿기 어려운 이상의 충격적인 증언은 “중국 외과의사인 전 남편이 살아있는 파룬궁 수련자 2,000명의 각막을 적출했다”고 밝힌 애니(가명)의 인터뷰 녹취록 중 일부이다. 킬구어 등 조사단과 접촉한 애니는 실로 충격적인 내용을 쏟아냈다. 애니의 인터뷰는 특히 중국 보건당국의 명령으로 대규모 강제 적출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 수술을 담당한 의사도 결국 희생자로 전락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남편과 동료 의사들은 적출 수술만 했다. 전체적인 계획과 장기 거래는 정부 보건 당국이 결정했다. 그러나 2003년 정부 보건당국이 장기 적출과 관련된 많은 의사들을 베이징 근처 사스(SARS) 격리지역으로 보냈다. 정부가 이미 장기 적출에 관련된 초기 그룹을 비밀리에 죽이기를 원했다는 의미다. 그때 남편은 이것을 하는 것이 상당히 위험하고 언제든지 공범자로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듬해 남편이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사직서를 제출한 뒤 정부 보건당국이 고용한 청부 살해업자의 습격을 받았다.” 보고서가 밝히는 충격적인 조사 내용은 이뿐이 아니다. 조사단은 중국 장기이식 관련 주요 병원들과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생체 장기 적출 의혹을 뒷받침하는 끔찍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주장한다. D장기 이식센터의 관계자는 자발적으로 자기 병원에 “심장이 뛰는 것을 10개 이상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조사단이 ‘살아있는 신체’를 의미하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했다. 또 다른 D병원도 마찬가지. “우리는 신장 공급자가 살아있는 사람이길 원한다. 이를 테면 파룬궁을 수련하는 건강한 수감자로부터 가능한가”라고 묻자 D병원의 한 직원은 “문제도 아니다”고 답변했다고 보고서는 밝힌다. 보고서는 또 “중국에서 파룬궁 박해가 시작된 1999년 이후 장기이식 수술량이 크게 증가한 것과 관련 현재까지 약 4만1,500건에 달하는 이식에 사용된 장기의 출처에 대해 중국측에서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강조했다. "박해 시작 99년 이래 4만 건" 보고서는 국제인권감시기구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기록을 근거로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중국에서 매년 평균 처형된 사형수 숫자인 1,616명을 제시하면서 이는 같은 기간에 실시된 장기이식 수술 수치와 비교할 때 턱없이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중국에서는 자발적으로 장기를 제공하는 사례가 극히 드물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의혹은 더욱 커진다고 분석했다. “1971년부터 2001년까지 중국에서 진행된 총 4만393건의 신장이식 수술 가운데 가정에서 자발적으로 장기를 기증한 사례는 겨우 227건으로 전체의 0.6%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왜 파룬궁을 대상으로 이런 끔찍한 의혹이 일고 있는 것일까? 알려진 바에 따르면 파룬궁은 어떤 재산이나 조직이 없는 평화적인 심신 수련법의 하나. 하지만 98년 중국 정부가 파룬궁 수련생이 7,000만 명에서 1억 명에 달한다고 추산할 정도로 세가 불어나면서 위협을 느낀 중국 정부가 99년 7월 파룬궁 수련을 금지시키며 전세계적으로 떠들썩한 박해가 시작됐다. 살아 있는 사람의 장기를 적출하는 목적에 대해 최근 미국, 프랑스, 영국 등 해외 언론들은 “중국 및 해외 장기 구매자들에게 판매 목적으로 이 같은 불법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고 의혹을 제기한다. “(중국) 쑤자툰 수용소에는 수용 인원 6,000명의 약 75%에 해당하는 사람이 사망ㆍ소각되었고, 그들의 장기는 판매되었다” (프랑스 AFP 통신, 3월 31일) 미국 워싱턴타임스 역시 4월 “사람의 장기를 이용하여 중국 및 해외 장기 구매자들에게 판매하고 있다”는 중국인 저널리스트 진중과의 인터뷰를 인용해 진?규명을 촉구했다. "한국인도 수혜자 가능성"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반인륜적 범죄의 폐해가 결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정체 불명의 장기를 공급 받기 위해 중국으로 원정을 가는 국내 이식 환자들이 갈수록 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이식학회에 따르면, 중국에서 원정 장기 이식 수술을 받은 환자의 수는 1999년 2명, 2001년 4명, 2002년 24명, 2003년 73명, 2004년 124명 등으로 급증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박재완 의원실 관계자는 “해외 언론보도와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면 중국 생체 장기 적출과 장기 매매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며 “한국인들이 이러한 장기 적출의 상당한 수혜자일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서 우리나라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며 진상 규명을 위한 관심을 촉구했다.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