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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HID(스크롤압박주의)
HID를 무슨 일개 특수부대인마냥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으로 싸질러놓은 글들과 댓글들이 많길래어느 한 HID요원의 글을 올려봅니다...(원본작성자의 요청에 의해 출처가 불투명한 글입니다) 前hid대원의 글
공작원들의 편제를 무슨무슨부대로 알고있지만, 우리는 민간인이고 군업무와 다른 엄연한 회사편제로되어있읍니다.
사장엔 현역중령, 전무는 소령, 과장은 대위, 계장은 중위 혹은 소위 그리고 회사원의기본조건은
다음과같습니다.1. 체구가 작고 민첩하며 운동성이 뛰어나야합니다. 2. 교육을 소화할수있는
기본적학력(지식)이 있어야합니다.3. 뒷조사에서 배경에 이북에 연고가 전혀없어야합니다. (625때 남하못한
친척이있어도안됩니다)4. 인성교육(평가)때 성격이 과격하거나 우유부단해도안됩니다. (교관들의 안목에서 불합격판정이나면 인사도못하고
소리없이 사회로퇴출당합니다)이런 조건들하에서 선발된 사람들로구성하고 훈련은 자체 유격교육장서받습니다. 지금부터
말해도될것만하겠으며 곤란한것은 (생략)을달겠읍니다.훈련의기본은 긴말필요없이 모래주머니달고 모래조끼입고 일이년동안 첨부터
끝까지 산으로뛰는겁니다. 뛰기를 기본으로 야전삽(작은것 따로있음)으로 잠복호파고 두더쥐숨기, 침투, 지뢰제거, 수영, 살인비술(소리없이
죽이는것), 맨손격투(태권도, 유도, 별의별것) 칼로 목줄따기, 칼던지기, 나무와돌로 무기만들기, 사격, 독도술, 사진촬영술
요인암살(실제 요인암살은하지않고 배우기만한다) 더불어 자물쇠따기, 담장넘기, 식량훔치기,산나물구별하기, 동물산채로 잡아먹기,
잠수3분이상(숨안쉬고 3분은기본이며 4~5분도버틴다), 면도칼 이발기술, 적무기사격과 분해등...(훈련과 실제상황서 아무리 배고파도
민가에침투하여 표안나게 일부분만훔침. 훈련때는 일반민가에 나중에 과장이다니면서 우리가 말해준 민간인들에게 도난품접수받아 넉넉하게
모조리변상해준다)이런것이 공작원들의 교육과정인데 당시 내가맡은 주요임무는 몇번에 걸쳐 목표물근접사진촬영이
주임무였으며 침투는 잠수정2회(돌고래인지 그것보다 작은소형(생략) (서부로 남포) (동부로 함흥) 그리고 휴전선
직접통과2회였으며, 3회는무사했고 1회는 두번째북파때 남포에서 현지고정(생략)과 일하다 경비병에게발각되어(현지고정의 목숨은 우리의목숨보다
중요함) 현지고정 피신완료후 세명이서 필사의탈출을하였는데 이때부터 해주까지 미리 만들어진 탈출로를가늠하여 지그재그로 북상하다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다 내려오고 일주일동안 낮에숨고 밤에만 산으로만 계곡으로뛰기시작한것이다(황해도 해주부터는 생략해야 함) 이렇게
필사의도망으로 적들과 조우하지않고 무조건 도망치는것이다. 이때 평양근교? 에서 적의 수색조에 발각되어 사격을받아 일사분란하게 포위망을
구축한 적들의틈에서 죽음직전에 이르렀으나 잠복과 끈질긴 은밀이동으로 모면하고 도망을친것이다. (우린 적들 근처에선 낙엽도 밟고
도망치는것이아니라 낙엽을 손으로 소리없이밀어내고 발을옮기고 다시 낙엽을 제자리에옮겨 자국이생기지않게 반복적으로한다)발각이던
뭐던, 사격을 해오던말던 우리가 적을 확인만하면 아무리배고파도 절대 잡히지않는다.(만약 잡히면 청산가리캡슐) 이때
기본장비는 소음권총 3인1조에하나, 자동카빈소총1인1정, 실탄100발, 수류탄네알, 단도, 청산가리캡슐응급약(어지간한건 혼자서
꿰메버린다) 만능열쇠, 올림프스망원카메라, 지도, 나침판, 머리빗, 면도칼, 뻰찌, 라이터, 수통, 숨쉬기빨대, 바닥 믿믿한 농구화,
이런것들이고 식량은 날짜계산하여 부족하게가져간다 마른걸로만. (훔쳐먹고 잡아먹고 구해먹고)격투술에있어서는 특전대와 예를들면
맨손이던 무기던, 그들중 누가 무술에 고수일지라도 절대로 북파공작원을 이길수없읍니다. 우린 실제로 목숨걸고, 격투술을 같은수준의
회사원끼리도 1대1부터 5대1의 실전을익히고(여기서 지면 죽기도한다) 깡으로만해도 그누구도 적수가안되며, 뛰기에있어서 산악구보와
험지의구보는 세계적 마라톤선수보다도 훨씬 강인한귀신인것입니다. 이만하면 대체로 설명이되었을것이 생각하고 참고로, 현대의 특수부대일수록
전문성과 장비에 의존하는것이지 무식하게 일반인들이 생각하는것처럼 체력만으로 임무달성하는것이아님을 꼭
기억하시기바랍니다==============================================지난
96년도 동해에서 잠수함좌초되고 승무원들과 공작원들이 산위로 피해올라가서 대책을의논하다 무장공작원아닌 잠수함승무원과 일부 전문공작원들을
일렬로 앉혀놓고 전부사살하고 피해버린일을 기억들하실겁니다. 제생각엔 그들은 사살당한게아니라 전체 의논하에 도망칠능력이나 교육을받지못한
잠수함승무원과잡혀서는 절대안될 비밀요원들은 자발적으로 죽기로결정하고 일렬로 나란히앉아 고향생각에 처자식, 부모님생각하면서
슬픈마음을품은채 무장공작원들로부터 한발씩 총격을받고 죽어간것으로 판단됩니다.지금이야 장비가좋아서 돌핀급이네 뭐네 호사스러운
잠수함으로 침투하고 도망치고하지만 과거로올라갈수록 선배들은 헤엄쳐서 아니면, 고무배로침투해 임무수행하고 몸으로때우며 누가
슬퍼하지도않는 죽음을당하며 사라져간것입니다.우리 회사원들중에도 돌아오지못하는 동료들이 상당히많았고 새벽녁이면 멀리서도 들려오는
북한군 확성기소리에서 어디서 몇넘잡아죽이고 일망타진되었다는 말들이 내귀에 직접 들려오기도합니다.복귀시한에 나타나지않고 이후
회사에서 보이지않으면 그는 죽었다고봐야하고 우린 그저 눈물과함께 말없이 술한잔에 마음을달래는 그런일들이많았습니다.일반인들은
이북의 남파요원들은 장비가 좋고, 우린 알려지지않은 몇몇이서 활동하고 그런줄알지만 제가 회사원이 된 그시절부터는 이북보다 훨씬나은
침투장비가활용되었고 공작원숫자도 일반인들의 상상을뛰어넘는숫자였고 그들이 임무완수후 돌아오지못하고
죽어사라진분들이많습니다.공작조시절 북의 첩첩산중에숨어서 가장 많이나던 생각은 부모님과 가족들입니다.물론 임무를마치고
돌아가야한다는생각으로 정해진 사이클대로행동하지만 어린나이의 우리도 사람이기에 공포와 고뇌가 엄청많습니다. 휴전선근무하던
민정경찰들은 공작조 북파내용에대해 잘알겁니다. 사원들이 침투지역수색대로 파견되어 며칠동안 수색대로부터 침투경로며 제반사항들을 꼼꼼히
숙지하면서 망원경으로 근처를 이잡듯이 살피며관찰하고 며칠후 시시때때로 행해지는 수색대입출과정을 허수로반복하고 어느순간에 민정경찰의
선두안내로 이미 휴전선 깊숙히잠복해있는 수색대에 인계되고 적진을살피고 서로 안타까운마음에 손을만져 인사를나누고 그리고 정해진코스로
침투하고, 복귀때도 휴전선안에서 미리 대기하고있는 수색대도움을받아 그들 인솔하에 오는것이지 람보처럼 헬기타고 기관총날리며
폭탄터트려가면서 요란하게오는것이아닙니다. 우린 성질나면 헌병이고 특전이고 시비걸어패버리는싸움 엄청많이했지만
군인이라도 수색대휴가병들한테는 조그만시비도 하지않았으며 거리에서만나면 그들 델고가서 밥사주고 술사주고 용돈도꺼내주고 항상
감사한마음을 가지고살았으며 회사자체훈련장 주변마을사람들과의 유대도 상당히 좋은편이다.북파출신들이 뭔 살인이나하고 괴물들이나되는걸로
사회적으로 인식들 많이하지만 우린 맡겨진 임무를수행하는 사원인것이지, 깡패나강도같이 그런짓하는사람들이 아니었다는것을
알아야합니다.북의 공작원들이 남파될땐 시기적으로 겨울을택하는데 그것은 그들작전이성공하면 뒤를이어 얼은
임진강을돌파하여 전면침공을하겠다는 배경에서 그러는것입니다.남한의 공작원들은 녹음이 우거진계절에 침투와 탈출을하는것이 그들과
완전히다릅니다.왜 김신조대원들이나 삼척,울진지구에 침투했던 무장공작원들이 그 추운 숨을곳도없고 먹을것도없는 겨울에내려왔을까하는
의구심을 갖게될것입니다그들의 작전목적이 전면남침의 선봉이었기에 그렇게 되었던것입니다.과거에 서부지역에주둔하던 미군들은
평시에도 얼어붙은임진강을 무작위로 곳곳을 폭탄으로터트리곤했읍니다. 미군들에의한 휴전선쪽으로 포병사격연습 또한 사격도하고 임진강얼음을
깨는일이기도했읍니다. 사격도하고 공비침투를 막기위한 얼음을 파괴하는 실제연습도하면서말입니다.우리 남한은 북으로
전면전을시도할 무력침공의사가없기에 침투조를 은신하기 좋은 늦은봄부터 가을이전에 행한다고보면 맞습니다.우리사원들의 군사전술은
상대의 편제와 수법을알고 우리가 피하기위한방편으로 배우는것이지그들과 맞장을떠서 격파하고 섬멸하기위해 배우는것이
절대아닙니다.공작원들의 편제는 세계 어느나라나 거의 같은것이고 공작목적에따라 2인1조부터 칠팔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고정들로부터 전달받는 중요사안은 저와같은 회사원들이침투하여 접선하고 넘겨주고 받아오고더 위중한 굵직한사안들에는 변수는많지만
회사원들이호송하여 현역영관급들을 침투시킵니다.체력과 안전때문에 이런 작전엔 물고기를타고 함흥지역으로 신의주로 침투하는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이미 그들이 00년전부터 알고있는것이라서 지금은 군사기밀도 아닐것입니다.00년대 중반이후부터 장거리침투시엔
물고기(잠수정)를 타고 침투가시행되었다는것은 그들이 더 잘압니다.제가 회사에 들어가기 몇년전 물고기타고 신의주로침투하여 일하던
해군소속공작조가 전원 몰살당했다는것은 우리들에게 너무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당시 대령과 전원 위관급이상의 정보요원들로구성되고
전문공작원들이 호송하여 작전하다 9명이 몰살한이야기는 내부에서는 너무도 잘 알려져있읍니다.실미도친구들은 훈련이끝나면
미군수송기로 평양근교로 낙하산침투시키기로 계획되었던일이고특공작원들이 김일성궁으로 침투하여 깨박살내어 보복한다는
시나리오였던것입니다.일반인들생각엔 북한이 대공시설이 엄청나고어쩌고 부풀려진말에의하여 대단한걸로 평가하지만 남한과 북한 어느곳이던
안전하게침투하고 탈출할수있는 허술한곳이 대단히많읍니다.당시 비행기침투는 허큘리스 프로펠러기가 위성첩보에의한 사전검토된 안내에따라
저공침투하여 낙하산으로뿌리고 남하한다는 치밀한계획이 미리 있었던 것이고 특공작들은 평양서 김일성궁을 습격하여 뽄때를보이고
전원죽음으로 끝난다는 계획이었으나 남북화해분위기로 그들의 문제가 폭발하여 버스탈취하고 전원사망하는
비극을맞은것입니다.당시 공산 개인화기들을 월남에서 무진장들여와 분해결합부터 사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하였으나
공작원들이 지참하는 개인화기는 실미도처럼 전원 카빈소총이었는데 이유는 소형이며 총기휴대가 간편하고 고장이 적으며 자동과 조준사격이
가능하다는 장점등으로 항상 카빈만을 휴대한것입니다.아카보소총이 성능이좋고 발각되어도 이북군인인줄로알게될거고 어떻고하지만 우리가
북에서 모습을 나타내고 백주대낮에 걸어다니는것도 아니므로 침투상황과 교전에 가장 효과적인 성능의총기가
카빈인것입니다.영화속의 독일군이나 미군처럼 기관단총을 휘두르고, 돌아오지않는 해병의 영화주인공들처럼 폭약 잔뜩 짊어지고가서
파괴하고, 수류탄을던져서 살상하고 부수는일을하는것이 아닙니다.공작조는 고정들과 접선해서 주고받고 새로운정보를 가져오고 위성으로
확인했으나 실체구별이 잘안되는것들에대한 세밀한 근접촬영등이 목적인것이지 뭔 이상한 무전기로 이불속에서 소리죽이면서 무전치고
그런일하는것이아닙니다.==================================북파공작원은 키큰
사람을 쓰지못합니다. (기밀이 아님으로 몇가지 조금 쓰겠읍니다)잘 먹지못하고 사는 이북사람들 과거나 현재 평균신장에기준해서
공작원을선발하고 침투시키는것이지 어느 무식한자가 이북사람들 작은체격에 당장 눈에 표가나는 건장한 젊은것을선발해서침투요원으로
쓰겠읍니까. 에베레스트원정대처럼 넘치도록 비행기에 짐을 실어가지고갈수도없고 목숨만 겨우 부지하도록 최소의 분량만휴대하고
민첩한기동성과 은밀이 기본인 침투공작조가 어이 그런애들로 구성이되겠으며, 만약 그런애들 보낸다면 두더지굴파고 숨는데만
몇배의노력이필요한것이다. 잠복호(비트) 파는것이 뒷마당에 김치독묻기위한 굴파듯이 푹푹파고 들어가는것이 아니라 최소한 작게
신속히파고 숨어야하는데 그 과정이 장난이아닌 눈몰속에 이뤄지는겁니다. 야전삽도아닌 모종삽 비슷한 작은삽으로, 적지에서 소리없이파고
준비한 작은자루에 조금씩담아서 먼곳으로가서 사방으로 아주 조금씩 풀밭이나 눈에띄지않는곳에 흐트려서 전혀 표안나게버리고 돌아오는길에
위장용덮개만들 죽은가지들 줏어서 발자국 다 지우면서 다시와서 반복적으로 파고 버리는것이고, 웬수같은 발자국 그거 완전무결하게없애고
밤새도록 구덩이하나만들어 누가 바로 앞에서 오줌누다가도 발견못하게 위장하고 숨는것인데 어이 장대같은애들을 침투공작원으로 이북에
침투를시킨다는건지 웃지않을수없읍니다.김장독묻는것도 힘든일이건만 내목숨유지할 두더지굴파는것이 한두시간에 해결되는게아니고군인들처럼
무지막지한성능의 야전삽으로 부담없이 쉬어가며 잠복호만드는게아닌데... 수색대에섞여서 총과 몸만 들어가고
날이어두워져 배낭이 도착해 잠복하며 운동화로바꿔신고몇시간을대기. 이때는 수색대가 좌우뒤로 이선삼선 초비상경계하고 군인들도
철망밖에서비상대기.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시간이지났는데 언제있었는지 수색대두명이 앞에서기어오고 적시라는 신호에 수색대와 인사나누고
내가 가운데서 기어 침투하였다. 이북쪽은 훈련때보다 침투가 너무허술해서 쉽게넘어갔다. 지뢰밭, 모래밭, 얼기설기된 목책,
철조망(철조망도 아주 허술해서 지뢰지대빼고는 시골목장의 담장과 비슷한수준이라보면 비슷하다)잠시후 배낭벗고갔던 앞에형이 다시돌아와
배낭메고앞서고 초병지대를 비켜 빠져나간것이 침투의전부였다.몇백미터를 조심스럽게 기고 오리걸음하고 이후부터 형을따라 뛰기시작하는데 두형들이
여기서부터 무조건따라서 뛰기만하면 된다고해서 사주경계없이 뛰기만하였다.이때부터 00까지(이런데 강계땅이라고하면
놈들이 좀 헷갈릴건데) 밤에만 산으로, 짧은들판을 달려 5일걸리는데 무풍지대의 험준한산에선 두더지굴이 필요없이 미리부터 나뭇가지꺾어서
옆구리에끼고뛰다가 몇키로 더가서 그걸로 시야가 좀 확보되고 움푹한곳에 깜쪽같이 이리저리걸치고 쉬고 교대로잤다.양말갈아신고
운동화갈아신고 주식은 하나씩포장한 돌처럼 단단하게 눌러말린 라이터만한소고기, 미룩구만하게 육등분으로 떼어서 먹게되어있어 그냥 입에넣고
우물우물거려 녹여먹듯하면된다.절대 배안고프고 (이게 이북촌애들 미숫가루하고달랐다) 이젠 기밀도아니고 다른친구들은 미숫가루 와
볶은쌀가지고 다녔다는데 난 이해가안감. 그거먹고 어캐뛰는지 (하루이삼일 단기공작조는가능)나물은 뛰다가 잠시쉬면서 뜯어먹고,
00형하는말이 너 이거 산나물잘먹어야 오래산다.형, 이짓하면서 오래살거같지않은데 우리 세명모두... 형들이 이때 얼마나 킥킥거리면
웃던지...잠잘땐 약간 경사진위쪽으로 다리를놓고 머리를 낮게하고자면 피로가 확 풀린다. 첨엔 불편하지만 숙달되면
아무렇지도않다. 이렇게 몇날을 낮잠자고 인적이 조금씩 길에보이는 00서 몇키로떨어진곳에 진출하여 위치잡고 두더지굴을만들고
때를기다렸다. 하루를 교대로 실눈뜬채 반잠을자고 (대소변은 상황에따라 쪼그리고앉아서 해결하고 바닥에 흙덮으며, 일반인들은 공작원이 맨날
구덩이나파고다니는줄로 알지만 구덩이는 한번 장거리침투에 두세번이고 그나마 단기공작들은 팔일도없고 잠잘일도없고 그런것이다.)
날이 어두워진 초저녁 모두 밖으로기어나와 형들이 하나씩 비닐과 헝겁에싼 뭉치를 나에게넘겨주며 그걸로 막걸리나 좀 사와라
(웃음) 00시까지 안오면 성공한걸로알고 우린 기다리지않고 떠날테니 그런줄알고 00일에 00서만나고 착오생기면 xx서 몇일몇시, 또
착오생기면 **서 몇칠몇시. 이렇게 세곳을 정해놓고 입을맞추어 숙지하고 형들과 작별하고 은밀과신속으로 나르듯이 목적지로갔었다.
혼자서가니 염려도 덜되고 잽싸게다니고 이렇게좋은데 저 형들이 날 보호한다고 델고다니니 내가 돌지... 씨부렁거리며 그래도 형들이
지리는확실하더만. 한번도 틀린적없이 정확하게. 고참이 달래 고참이겠어...목적지근처에서 산너머쪽으로 빠르게
풀을떠내고 땅을파서 총과배낭감추고(이땐 밟고지나가도모른다) 소음권총한개와 뭉치돈만 가지고 미끄러지듯이 15리정도를 나르듯뛰어 그시각 뭘
끌고 길을 천천히걷는 사람확인. 표식으로 단 한번에 알아보고 미리가서 잠복대기하고 있다가 미끄러지듯 집안으로 잠입성공.(암구호
이런거 필요없음) 돈뭉치전해주고 숫자로알려주고 목욕하고 옷갈아입고 된장찌개에 밥배불리먹고 이틀동안 잠만잤다.형들이떠나는 시각을보고
이젠 형들이 돌아가고있겠구나 무사히 잘가야할텐데...(이번엔 중강진 어느집이라면 이넘들 헷갈리겠지)나머지는 다음에쓰기로하고
여기서 일단 줄입니다.(아무리 이북애들이봐도 내가 어디다녔는지 모릅니다)어디의 어느집을 어떻게가고, 거리가 얼마이고 몇집을가고 이런것은
그냥 알아서 혼자만보시면됩니다.잠을 자던말던 골목길걷던 얘기들이며, 시내구경하던 뭐하던 사실은 말할수없는것이므로 대충 뒤범벅으로
썼음을 이해하시기바랍니다.=============================이틀동안 잠을자고
몸을 추스리고는 날짜와 시간에맞추어 목표를 찾아 다시떠났다.(이때부터 점조직) 북한도 마찬가지지만 접선은 그동안 북파되기전 교육을통해
수없이 완전무결하게 암기한후에 각기 만약의불행을 대비해서 장소와시간을 달리한 1 2 3차로나뉘어 시행되어지는것이다.김신조
개떼들처럼 수십명이 다니는것도아니고 자세한지도가 뭔 필요있으며 달달 외워버린 지형지물에모두 두뇌속 암기력을이용하여 공작이
전달되고받는것이지, 뭔 스파이영화처럼 무전을주고받고어쩌고?허리띠속에 집어넣는 사진필림쪼가리말고 가지고올것은무엇이며, 기밀도아닌 누구나
다아는 공작금전달해주고 오면되는것이고 나머진 갖가지 정해진신호로 그들이 자체적으로 본사와 오가는것인데 ...내가 입고간옷과
신발은 이미 내가 잠들어있는사이 남김없이 아궁이서 소각되고 날이어두워져 한뭉치 지참하고 눈인사후에, 이번엔 산아닌 한적한 들길로
운동선수처럼뛰어 두번째 약속장소근처로 이동해아무도모르는 신호표적확인하고 다시뛰어 두번째 표적확인하고 (압록강옆 어느도시라하면
이놈들이 00년 지난 지금에 이글보고 머리굴리고난리치며 찾으려고 생고생 좀 할거같다) 어느집으로 찾아들어가고 인사나누고 휴대품
전달해주고 나누기곱하기 몇개맞춘다음에 목욕하고 밥먹는사이 옷과신발 소각완료하고 그도시 학생복으로갈아입고 (여기서부터가 기억력이 확실히
필요할때임)조심스레나와 골목길로 골목길로 가방둘러메고 놀면서 천천히걸어 표시된곳으로 가 주위살필것없이 당당하게 들어가서
내방?으로 들어가면 그걸로 임무끝...며칠동안 머무르며 공부? 하고 누나하고 거리구경에, 뭐에 지시된곳을 미리 방문해보고 버스도
타보고다시 이틀머무르며 공부하고 다른방향으로 된 도주로를따라 되돌아가서 숨겨놓은총과 소지품꺼내고 복구해놓은연후에 형들과 만나기로
한 지역으로 이틀밤을 나르듯뛰어 안내를받으며 복귀한걸로 첫번째임무는 종결되었었다. 오고가는데 북한이나 남한은 공작원들이 휴전선까지 도달은
걸릴데없고 허술했던 철조망과 지뢰지대만 잘 빠져나오면되는것이다.이북은 인구밀도가 적고 산악이많고 교통량도적어서 온
사방천지가 무풍지대라고보면맞다.북한의 전방지역은 남한보다 군사시설도많고 북한군이 곳곳에 주둔해있지만 주둔지근처가 남한과 북한의
맹점이라고 이해하면될겁니다. 시간차로 총 한자루만들고 마중나와있는 접선과 연결되어 다시 그의안내로 조심스레 철조망넘어서 들어온것이
나의 첫 임무였다.올때나 갈때 지뢰탐지전문가형이 앞장서고 나머지는 같은행동으로 사주경계하며 소리없이따르면되고 각기 다른
세개의 접선시간중 어느하나에 맞추어 수색대의안내로 재빠르게 따라붙으면 즉각 암구호속에 문안으로 들어오는것이다.장거리공작조는
베테랑중 베테랑에서 선발되고, 어느경우라도 얼굴만기억하는것이지 두번다시 그들을 만나지못하게 조직되어있고 매번 호송담당이 바뀌고
단기공작조처럼 폭파를위한 팀웍이네뭐네 이런것이 존재하지않는것이다. 임무가끝나면 각자 악수하고 안아보고 마음속으로
이별의눈물을흘리고각기 다른차량으로 신속하게 헤어지는것이며 여하한 경우도 두번다시 만날수없는이별을
하게된다.===========================================================일반인들
말하길 주변에 정보부다니고 뭐하고 그런사람이 주변에있다고 말하시는분들있읍니다.그냥 제가 좀 웃어드리고 넘어갑니다.정보부아닌
보안대나 그런 군인출신들이나 대공계 경찰출신들 그런분들이 사회에서말하길 엄청난사람으로 보이려고 정보부가어떻고 간첩이뭐고 대북공작 이런말
과거부터 항상잘하십니다.물론 그중엔 정보부서에서 요원말고 평사무원 혹은 평직에 근무한분들도있겠지만 그들 신원은 확실하지만
정보부사람이 아니라고보면 맞습니다. 정보의 중요요직을 담당하거나 기밀사항을 접하는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자신의 부인한테조차
직업에대해 절대 말하지않습니다. 제가 보증할수있고 그것이 그쪽 밥먹고사는 사람들의 특성입니다.정보부장이나 직급이높고
사회활동접하는 고위층들은 얼굴이 알려져있지만 그외의 사람들은 일반사회에서 어떤사진도 찍지않습니다. (자녀졸업식에가서도 사진을
찍지않습니다)이하 제가 말씀드리는내용들은 이북에서 이미 알고있는지 오랜사항들로 기밀이아닌것만 올립니다정보원들의
사회적 공식직업은 외무부직원, 해외지사, 학원강사, 공무원, 철도국원, 체신부직원, 00체육단체, 00사회단체, 00여행사 등 남북한
모두 이렇게 평범하게 되어있읍니다.그들의 명함이나 증명서도그렇고 사용하는 대표전화도 00학원입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지
뭔...통금 위반으로 경찰서잡혀가서도 큰소리 한번못치고 야단실컷맞고 뇌물주고 나오기도하고 그렇게 철저히 사회속 평범한양민으로
사는것이지, 뭔 때려부시고 경찰서장이와서 굽신거리고어쩌고...남북한 모두 대북과 대남담당공작부서는 정보부내에 이름은있으나
유명무실이고 실질적인것이아닙니다.북한도 철저하게 이 문제를 독자적으로 따로 관리하고 남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기업의 정보요원들도
엔지니어, 컴퓨터프로그래머, 현장소장, 비서, 하청회사직원 등 이런식으로 일반직원들이 전혀 알지못하게 평볌한직함으로있는것입니다.
과거부터 대기업의 정보수집능력이 국가중앙정보부를 상회해서 국가안보에 지대한공헌을하고 직접적 연결고리가되고
그렇습니다.북한의 대남정책은 절대권력자의 후광으로 남한과는 다른 조건이지만 우리도 대북은 별개문제로 정책과 정권의
영향을 받지않으며 지속적이고 독자적인활동을합니다.남북한 모두 대북대남 활동자금은 중앙정보부로부터 오는것이아니라, 일반기업
융자금형식을취하고이부분에서 이북이 남한에 유입시키는 공작금에 훨씬 자유로울것으로판단합니다.만약 이북에가서 정치국외에 대남관련부서에
전화한다고 가정하면 네 00농장입니다. 00사업소입니다.양측 모두 과거부터 앞으로도 이렇게 끊임없이 철저하게 자신들을숨기면서
활동해갑니다.70년대 들어서면서 이상한?무전기의 신호체계는없어졌읍니다. 탐전이 너무 발달하고 위험요소가 큰데다, 근자에
인터넷과 셀룰라폰의 발달로 무용지물이되었다고보면 맞을겁니다.지난 96년도 잠수함침투좌초때 무장공작조가 산으로 북상하면서 비퍼형발신기로
두세번 이북공작부에 이동위치를 알린적있읍니다. 한번누르면 0.1초가 소요되는, 아주 미세한전파도 탐전이되는데 요즘들어 누가
무전기를사용하겠으며 첩자용무전기는 구시대유물로 이미 25년전 박물관에안치됐다고보면 됩니다. 무전기 사용하지 않는
신호전달체계에선 남한이 절대적 우위에있었는데 요즘은 남파공작들이 한국의 인터넷을 통하여 훨씬 자유롭게 직접적전달이 잘 이뤄질것으로
보입니다.과거에 "간첩잡아 용돈쓰자"는 구호가 전국적으로 유행하고 간첩은 걸인차림의행색이 많았지만 요즘은 장,단기 남파공작이나
고정들도 시대의흐름에따라 인텔리젠트한 계층이 대부분일것으로사료됩니다.근자에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교포들속에 상식적으로 상당한숫자가
있을것이고 위급을요하거나 고위층이 직접 개입해야할 그런 사안이아니라면 육상과 해상침투도 삼가할겁니다.북한만이아닌
중국정보부의 대 한국첩자가 조선족들틈으로 상당수 유입되었을것이고 군사뿐아니라 산업에대한 첩보활동 이런것이 활발히이뤄질것으로
판단됩니다.장기적안목에서 중국에의한 대한군사첩보가 이북의 대남첩보수행보다 비중이 많아지고 중대하게될것이며중국을 비지니스때문에 자주
왕래하시는분들은 어느경우도 현지인과의 대화에 자신의 군사경험발설을 삼가해야하고 입단속에 유념해야합니다 (정보는 국가간이면 어떤것이라도
뭐든지 정보가되는것입니다)오늘은 지금 이시간도 남한지역에 상당수 침투하여있을 북한의 남파공작원들에
대해 저의소견을써볼까합니다공작원은 인간의 극한상황을 견디도록 훈련된기계와 같은사람이므로, 이런 남파공작원 포착하기가 수월하지
않습니다. 국내에 이미 들어와 눌러살고있는 고정들이 여행을 가장하여 침투가 용이한지역을찾으러 항상 다니는것이고 남한의 실정을
잘모르는 북한의 정보처에 사진과 도표등 상세한정보가 전달되게됩니다.수십년전부터 남한 전지역을 이잡듯뒤져 휴전선부터 해안일대등 몇천분의
일의 아주 세세한지도로 작성이안된곳이 없을겁니다.고정들의 목표는 군사시설뿐아니라 사회의 일반적인지식도 고정의목표이며,
일반인에겐 전혀 무관심한 도로와 교량부터, 등산로며 등산객출입의 대충적숫자와 등산로파악등 사회일각의 눈엔 스쳐가는 모든것이 대상이
되며 바다낚시꾼으로 가장한 고정의정보를 토대로 해안침투에대한 정보파악, 이렇게 고정들로부터 파악되고 전달된것을 토대로 작전수뇌부에서
계획을세워 남한일대의 고정들에게 명령이시달되고 이차삼차 세밀한분석과 실현가능성을 분석완료해서 성공가능한지역으로
침투하게됩니다.남북한 막론하고 고정의 헌신적정보를 토대로하지않는 침투는 실패확률이 너무 많으므로 공작들의 침투엔
반드시 고정이 있었다고보면 맞을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정들 잡아내기가 하늘의별따기입니다. 요즘은 차량과도로가 발달되고 레져가
발달해서 산으로 들로 해안가로 놀러다니는사람이 너무많아 사실상 특정몇곳을 제외하고는 통제도 어려울겁니다.남한의정보는 북한에 완전히
노출된지 이미 오래전이고, 북한지역은 미국의 정찰위성과 산업위성들의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남북이 대치된 상황에선
정권들의 협약 이런거 상관없이 정보부처단위로 내부적으론 끊임없는침투가 이뤄지고 누가 대통령을하던, 김일성이 죽던, 정보부장이잘리고
이런것은 공작하고는 사실상 무관하다고보면 맞고, 위정자와 국회의원들에의한 정보부의 기밀문제들이 심사되거나
결정되어도안됩니다.4년이나 5년짜리 임기의 한시적월급쟁이인 국회와 대통령이 간여할일이 아니란것이 저의 소견인것입니다.그
애들 세상에 태어나기전부터 각 부서적체계로 연속되어 내려오는 문제들이라 깊은지식없이 권력으로정보처를 좌지우지 결정짓는다면 수십년동안
공들려 쌓아온 적지속의 국방의촉각들이 우수수 무너져내리고 적지의 정보망이붕괴되면 국방의안위와 국민의생존이 즉각적으로 중대한타격을
받게되는것입니다.누가 대한민국의 실권을 잡던지, 정보부장을 자기사람으로 채우던말던 대북공작에관해서는 간섭하지
말아야하고 예산의삭감을하거나 보직을 멋대로 인사처리해서도안됩니다. 대북공작은 몇년임기후 짤리는 대통령의 자리와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면됩니다. 이북에서 남한에 고정만들기는 쉬워도, 남한에서 북한에 고정을 보존하기위하여 자결하고 죽어간 알려지지않은
애국적목숨이 너무도많고, 그들의 첩보를 토대로 국방의지표가되어야 할일들이많습니다. 정권들이 대북업무를 실적도없고 정치에 생색도 안나는
구석이라하여 홀대들 많이했지만 그들이 현재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불가결하게 공헌한것이 대북공작이라고 생각하면됩니다. 신체의
각부분에 있는 말초신경이없으면 감각이둔해져서 위험을 감지못하고 위험대처능력부족으로 반사성이 둔화되어 죽음을 당할 공산이큰것과
같은겁니다.다시 요약해서, 각 부대단위별로 일선의첨병과 수색과 정찰없이 전투를하면, 그 부대의 생존이 있을수없는 것이고 내무반
초병이없이는 잠자는사병들의 목숨이 없는것과같다고 이해할수있습니다.일반인들 생각엔 첩자가 모르스무전기로 소리내어 정보를전달하고 007 처럼
변장에능하고 소음권총을쏴대고 여자를거느리고 이런 환상들을 가지고있을겁니다. 물론 그런경우가 없는것은아니지만 그런일이 발생하는
지역이 따로있을것이지만 전 솔직히 대충 감으로생각은해도 그방면은 전혀모릅니다.침투공작원이 필요한것은 남북한 모두
대체로 공작금전달, 요원호송, 정보반출, 납치, 폭파, 암살등 필요에의해 이뤄집니다.(군장성납치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일이고
이런데 사안을 두는것이아니고 일반인을 납치하여 무장공작원 및 간첩교육용으로 사용한것이 과거엔 많았읍니다) 지금은 탈출한
북한주민만으로도 쉽게 현지실정을 알수있는기회도 많을겁니다. 여하튼, 북한의공작원이 침투하여 그가 사회에서 암약하는 고정이된다면
찾는방법이어렵겠으나 무장공비로 일컬어지는 호송과 정찰 및 파괴를하는, 사회로나오지못하고 산속에서 활동해야하는 남파무장공작원은
일반병사들이 이들을 다루기엔 단수가 너무 모자른것으로서 근래 국가적으로 문제가되고있는 북파공작원들을 활용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고충을 각곳 홈페이지에 들어가 살펴보니 짐승처럼 훈련시켜 국가가 목숨을 저당잡아 이용하고 사용가치가 없어지자 개패듯 패기도하고
보수를 지불않고 부상자에 대한 원호대책도 없고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게 뒷조사를해서 직업을 갖게하지 못하는 방해책동과 여권발급불허해서
해외에나가지 못하게하는 도저히 그런것입니다. 공작원 출신들중에 이 부분에 회의적인분들도 많을겁니다.저는 그런일 당해보지않아서
수긍이안되지만 실제로 그런일을당했으니 사생결단하고 집단시위를벌이는것로판단됩니다.공작원의구성을 특성상 현역군인으로 할수없는것을 국민들이
먼저 이해하셔야하고 국가는 어떤일이있더라도 그들의 임기후 뒷조사를해서는안됩니다. ** 북에 다녔으니 혹시라도 북에
이중등록된 첩자가 아닐까? ** 무장공작원으로 인간기계가 되었으니 퇴직후 사회에나가서 일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저들이 북에서
파괴공작하던경험으로 남한을 부수지는않을까? ** 침투하여 문서절취하던 실력으로 남한의정보를 빼가지않을까?** 직장잡아 일하다가
사회에 문제를 발생시키지않을까?이 외에도 여러가지 염려되는 문제들로 인하여 그들을 이용후에 사회에서 매장시키려는
황당한짓들이 있는것 같은데 간단히 말해서 그들이 폭력성이 좀 있는 사람이라해도 내나라국민이고 그들을 그렇게 훈련시킨것도
대한민국사람이었고 그들이 대한민국의사명을 받고 이북에 침투하여 암살하고 폭파하고 절취한것인데 이후에 그들을
애국지사로받들지는못할망정....단기공작원 그들의 주장도 일리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자세히 각자의주장을
살펴보니...제의견은 가급적 그들을 퇴사후에 대한민국의 인적자원으로 활용을하되 그들의 체력과 절대적경험을
바탕으로 남파 무장공작원을 색출하는 임무를부여하고 활동케하면 합당할것같습니다.직업군인의 보수와 처우로하고 직업군인에 적용되는
혜택을 부여하고 임기중 사망하면 국립묘지안장부터사망시 지급되는 위로금 및 연금등 각종 혜택을 차별없이부여하면 그들 공작원출신들도 좋고
국가도 좋은 방안이되지않을까합니다.근자에 대북단기공작이 축소되었다하더라도 북측에대한 남한의공작은 중지되어서는 안되는것이고,
물론 분위기상 파괴공작은 삼가해야할부분도 더러있을것이나 물색하고 꼬임위주로 하던 과거의행태를 버리고 북파공작원을 사회로부터
공개모집해서지원자에한해 정당한보수를 지불하고 훈련을시키고 그들을 그냥 놀고먹게 버려둘것이아니라 무장공비 출몰가능성있는 해안이나
산악지역에 투입하여 남파공작들을 사전에 분쇄하는방안을 강구하는것이 합당하리라봅니다. 일반 군인들을 현역들이교육하고
남파무장공작을 색출시키는 경계병으로 활용한다는것은 과거 실력이미숙한 국가대표중에 나이든 고참순으로 축구국가대표감독을 연줄로맡으며
허구헌날 같은 수준의 국가대표를 양성하여 단 일승도 하지못했던 월드컵을 상기해야할것입니다.공작에 관하여 히딩크보다도 훨씬 노련한
관록있는 북파공작원출신들을 구제하고 그들을 정착시킬수있도록 지혜를 좀 모아보시기를 권유합니다.큰물에서놀고 목숨을 저당하고
이북의 산하에서 산전수전을 겪어본 백전노장들로 소정의교육을 이수케하고, 그들이 직접 자신의 값진경험을 토대로 현역들을 훈련시킬수있는
교육담당으로 활용도하고 북파공작원훈련을 양성화해서 평시엔 젊은 그들로하여금 남파공작원색출과 기도은닉의 사전분쇄를위한 산악과
해안탐색 및 잠복등으로 민생치안의 안정과 국방의안정을 가져올수있다는 것입니다.저의 오랜경험으로 공작원의 가장
큰적은 공작원인것입니다. 북한은 과거부터 북파공작원이포착되면, 남파공작 전문부대인원이 출격하고 그들의 지시와 참여로
추격전이시작되었던것입니다.일반병사들로는 대량의 인원투입으로 차단과 잠복과 수색이이뤄지지만 공작부대가출격하면 그들은 북파공작을
맞상대로 자신들의 고도화된 훈련방식을적용해 사냥개가되어 추격전을벌입니다.또한 전지역을 꿰뚫어보고 도피가능한지역을 파악하여 북파들을
생고생하게만드는 주요임무를 그들이 맡는것입니다. 그들의 숫자가적어 그들로부터 직접 잡히는 공작들이많지는않겠으나 그들의
지략에포착되어 섬멸된 북파들이많을것입니다.단기파괴공작원들은 포착시 그들과 조우하게될일이 드물겟으나 장거리 침투공작원들에게
가장 치명타가이애들의 두뇌와 체력과 경험입니다. 제가 00년전 몇번째? 침투중 (평양근교라고 하겠읍니다)평양근교의 보통
야산6부능선에서 초저녁 해질무렵에 포착되어 죽음직전에 간적이있습니다. 언제 발각된지는모르나 이상해서 살펴보니 북괴군이 아래에서 수색하며
좁혀오고 시야에 들어온것만도상당한 병력이라 간단히 이제 죽었다고 생각한적이있읍니다. 비트속에선 항상 위급시 어떤 행동방향을 미리
설정해놓고 상황대처를하며 헤어져도 다시 만나는지점들을 여기저기설정해둡니다.이런 상황에선 단독으로 각자 적지를
탈출해야 효율적이지만 동료들과 삶과죽음을 언제나 같이해야기에 머리굴려 일단 남으로뛰고 어느지점?에서 서부해안가로 탈출시도를 노출시키자
결정하고 세명이서 동시에 배낭은포기하고 식량을 주머니에휴대하고 카빈과 실탄과 수통,지도만 소지하고 구르며
뛰기시작한적이있읍니다.이때 상황을 참고적으로 약간 기술한다면, 반잠을 자던 나와 형은 아주 골아떨어졌고 외부를살피던 형이
톡톡 건드려 일어났더니 걸린것같다해서 다릴주므르며 혈액순환을도운며 숙의하고 각자 뚜껑을 조금열어보며 확인후 의견이 걸렸다고결정되어 튀기로
한때입니다.(야산중 시계가 좋은곳이라 6부에 발길닿지않을곳 낮은지점을 보수하여 나무와풀로 깜쪽같이위장하뒤잠을자고있었는데 출발
몇시간전에 발각이된겁니다. 지금도 그때 왜 포착됬는지 이유는모르지만 당시생각에 형하나가 미련하게 대소변때문에 밖으로 기어나갔던것이아닌가
생각이들지만 본인이 아니라해서 덮어두고 모른체했던일이고, 그때 두더지굴도아니고 얕은곳 적지를골라 누워있을정도였는데 대소변도
누운채로해결해서 땅을파고 처리해야하는건데 그게 잘못있던걸로 두고두고 생각나던부분입니다) 이때 기어나와 중턱을
타고달리다 그들의 시야에서 안보이면 산넘어 무작정 남으로튀기로하고 실행하는데산아래서 올라오던 놈들로부터 직접사가 시작되어 총알이
사방에박히는겁니다. 일반병들 그때나 지금이나 뻔한것이 이런상황서 엎드려쏴, 앉아쏴가아니고 자신들 숫자가많으니까 흥분해서 뛰어오며
쏘아댑니다.하도 급해서 뛰며 뒤를돌아봤더니 잘하면살겠다 생각이드는데 딱들어맞았읍니다.모퉁이를 돌아서면서 형하나는
산넘어를살펴 판단하기로하고 00형하고 둘이서 어차피 죽은거 저것들하고 같이가자는맘에 육안으로 들어오는 한놈씩 조준사격으로 사살하고
이때 우리 살겠다고 죄없는 일반북괴군인들 참 많이죽였읍니다.일단 보이는대로 정확하게 잡아버리니 흥분해서 정신없이올라오다가 나중엔
머리도못들고 굴러서도망가는 난리법석떨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선합니다. 일반사병들은 남한이나 북한이나 대체로
마찬가집니다하여간 공작원은 발견즉시 사살못하고놓치면 이후엔 도망치는산짐승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이때 신속히 산넘어
어두워지는 사방을살피고 도피로 정해놓은쪽으로보니 북괴군들이 몰려들고있어 완전히 어두울때까지 산속서 있기로하고 이동중 도피로쪽의 북괴군이
그물망이아닌 분대대형으로 분산되어 수색하며오는 그곳으로 정면돌파로 빠지기로결정하고, 내려가며 그들의 틈새쪽으로 은밀이동하다가
그들을 좌우쪽 이십여미터로 지나게하고 숨죽이다가 빠져나왔었다. (병력이 완전히 오질못해서 5분대기조정도 병력이었기에 살아난것이지만
공작은 죽는 순간도 기도은닉의 대담함이 목숨을지탱해준다) 위험한순간에는 나를 죽이고 숨으면 살수있는겁니다.이곳을
빠지면서 뛰는데 대규모병력들이 차량으로, 구보로집결하는데 과감한 순간적결단이없었으면 분명 죽었을것이다. 이후 사방팔방서 병력이
분산배치되는데 오로지 체력과 죽음을불사한 돌파로살아남은거다.(북한이나 남한이나 현역들이 공작원들의기동성을 간파못해 지나고난뒤에서 찾는건
어쩔수없을때였다)모처로 신속돌파하여 서부로 방향을틀고 서해쪽으로향하여 뛰다가 다시 북쪽으로
새벽까지뛰었다.700고지의 산속으로 숨어들어 도피처구축을 했는데 그때 그 일대를 탐색하던 무리들이있었고 이애들이 분명
북한의 정예남파공작원들로 확신하는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탈출하여 서쪽으로뛰었다 허를찔러 북상했을때 우리의 계산대로는
탈출지점서만 직선거리로 50 키로가넘는 그곳 산악에 수색대가있었다는것은그들이 아니고선 있을수없는것이었기때문인데 어쨌던 수십명이었던
그들에게 발각은안되고 동해쪽으로 방향을틀어 중부전선으로넘어와서 귀환했지만 이렇듯이 공작조를잡는덴 상대의 노련한 공작조의
적중률이높다는것입니다.고기도 먹어본놈이 잘먹는것이고 과부심정은 과부가 홀아비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하면
이해가될겁니다.북한에 침투해보진않았지만 교육을받고있는 사람들이나 경험자들을 사시사철 어느곳에나있는 무장공작원토벌에
사용한다면 그들 사기에도좋고 현역군인들경험에도 좋고 나쁠일은 전혀
없을것으로판단됩니다.=======================================포착때는
나를 죽이면 산다 ! 24시간중 어느때나 깨어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것이 지금도 어느 하늘아래에는
꿏다운청춘이 숨도 제대로쉬지못하고, 음식도아닌거 조금씩 먹어가면서 반잠들어있을것이고 어느 청춘의불꽃은 산비탈 어느곳에서
산짐승이되어 뛰고있을것이다 이런생각 참 많이합니다.산짐승이 그렇듯이 공작원은 깊은잠을들지못하고 아무리 피곤해도 눈을 절반 뜨고자는
반잠이고 그것도 깊은잠들까봐 1시간정도씩 교대로자야하고, 토끼의 귀를하고 사방의소리를 감지하면서수시로 손톱으로 귀를 꼬집어
깨어놔야하고 각자 서로를 잠못들게 고문을해야합니다.비오날은 작업모자하나로 하늘을 받치고 덜덜떨면서 그렇게 반잠을자고 간혹 생각나는것이
언제나 두다리 길게하고 엄마다리베고 늘어지게자볼까나... 이런저런생각이 산중생활의 생각들입니다.** 어제 왜 그들을
죽였지? 내가 조금만 조심했으면 그들과 만나지도않고 죽일일도 없었을텐데 나보다 나이많은형들일텐데 그**들도 부모가있고 형제자매 다
있을텐데... *놈**들 그냥 수풀이나 뒤지면서 옆으로나 다닐것이지 왜 횡렬로 곧장 올라올게뭐냐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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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5.18에 사전적의미~
5월달이 지났는데 짱공유 "정경사"에서 5.18 관련 글이 올라와서 살짝 정리해봅니다~
사전적의미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내용을 꼭 필독 하시길~
사전적의미
5·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혹은 광주민중항쟁(光州民衆抗爭)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돼,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를 주도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다.[1] 당시 광주 시민은 신군부 세력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실행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해 발생한 헌정 파괴∙민주화 역행 조치에 항거했으며, 신군부는 사전에 시위진압 훈련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과격진압했다. 2011년 5월에는 5·18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iac)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에 정식으로 등재되었다.
개요
1979년 10.26 사태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뒤, 같은 해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다. 1980년 초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k-공작 계획을 실행하며 언론을 조종·통제했다. 같은 해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돼 국내의 정보 기관을 모두 장악하며 집권을 준비했다. 1980년 5월부터 정치 참여 의도를 드러내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대한 반발로 전두환, 신현확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같은 달 국회에서는 계엄 해제 논의, 개헌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정국 운영에 방해되는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계엄 포고령 10호를 선포해 정치활동 금지령∙휴교령∙언론 보도검열 강화 등의 조치를 내렸다. 신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의 재야, 야당 인사를 감금하고 군병력으로 국회를 봉쇄했다. 5월 18일 아침부터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김대중∙김영삼 석방과 신현확∙전두환 퇴진을 외치면서 시위를 했다. 전두환∙노태우 등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는 부마항쟁처럼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 공수부대 등의 계엄군을 동원해 진압했다. 신군부는 1980년 초부터 전 군에 충정훈련을 실시했고, 5월 초부터 군을 사전 이동 배치하고 군대를 투입해 신군부에 반발하는 시위를 진압할 준비를 마쳤다.
5월 18일 16시 이후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닥치는 대로 살상·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운동권과 무관한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광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계엄군은 5월 21일 13시경 전남대와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한 후 철수했다. 이 날 저녁 광주광역시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 외곽도로 봉쇄작전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차량 통행자나 지역 주민들의 희생이 발생했다. 5월 27일 0시를 기해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했으며, 무력으로 도청을 점령했다.
10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 운동 결과 사망자 166명, 행방불명자 54명, 상이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 등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후 호남 전역에서 전두환과 신군부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높아졌다. 그 결과 전두환이 창당한 민주정의당은 물론이고, 민주정의당과 연관성이 있는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도 여전히 높다. 당시 신군부는 언론 사전검열을 실시하고 관제보도를 의무화하도록 해 언론을 장악하고 조종했는데, 미국대사과 주한미군 사령관 등의 관련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내 언론이 미국이 신군부의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진압을 승인했다는 왜곡 보도를 쏟아내자 학생운동권 내 미국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이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비롯,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발생한 각종 민주화 혹은 반미 집회와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신군부 인사를 주축으로 한 제5공화국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 또는 김대중의 사주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왜곡했다. 1988년 제5공화국 비리 청산 분위기와 맞물려 열린 국회 광주진상특위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1993년 5월 13일 김영삼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 5·13 담화에서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면서 재평가가 가시화됐으며,[3][4] 1996년 검찰의 수사에 의해 신군부 인사의 쿠데타를 통한 집권 의도와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책임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1997년 대법원이 5·18, 12·12 진압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공식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됐다. 대한민국의 대법원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피고인(전두환 등)의 국헌문란행위에 항의하는 광주시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대법원은 전두환·정호용·이희성·황영시·주영복 등을 5.18 민주화운동 진압 책임자로 판시했다.[5]
대한민국의 신군부 및 일부 반공주의 우익 세력 등에서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혹은 김대중의 사주로 일어난 폭동 내지는 소요사태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6], 일부 조선인민군 출신 탈북자 단체에서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발생한 대부분의 유혈사태가 단순한 계엄군-시민간의 충돌이 아니라 북조선의 조선인민군 특수부대의 공작으로 발생한 계획적인 테러라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설득력이 매우 낮다. 5·18, 광주항쟁(光州抗爭), 광주학살(光州虐殺), 광주사태(光州事態), 광주민중봉기(光州民衆蜂起), 광주시민항쟁(光州市民抗爭), 광주인민봉기(光州人民蜂起) 등의 다른 칭호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편집] 명칭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명칭은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고 군부 발표에서 언급한 것이 처음으로, 이후 신군부와 관변 언론 등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또는 ‘광주사태’ 또는 ‘폭동’ 등으로 보도되면서 일반화됐다.[7][8] 이는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을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왜곡한 신군부의 주장에 근거한 호칭으로 제5공화국 기간 내내 사용됐으며, 현재는 당시 호칭에 익숙한 노년층이나 신군부를 지지하는 일부 우파 인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현재의 명칭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8년 제6공화국이 등장하면서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그렇게 불러 처음 나왔고,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의 공식 언급에서도 이 명칭이 사용됨으로써 공식 명칭화 됐다. 한편, 신군부의 군사독재와 폭력에 맞선 민중항쟁을 광주 민중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 항쟁’이란 명칭도 지역 사회와 5월 단체 등을 중심으로 1980년대부터 사용됐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딴 ‘5·18’도 널리 통용되는 명칭이다. 기타 중립적인 ‘광주 항쟁’, ‘광주 민중 항쟁’,‘광주 의거’, ’광주 자유 민주 의거’, ’광주 민주 의거’, ’광주 자유 의거’,‘광주 인민 항쟁’ ,‘‘광주 학살’, ‘광주 학살사건’,‘5월 항쟁’,‘5·18 민중항쟁’,‘광주 시민 항쟁',‘광주 민중 항쟁’ ,‘광주 민중 봉기’ ’광주 양민 학살사건’,‘5월 민중 항쟁’,‘5.18 민중 항쟁’ 등의 다른 명칭도 존재한다. 한편 일부 반공주의 보수 세력은 광주민주화운동이 민주화 운동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광주사태’, ‘광주사건’, ‘광주반란’, ‘광주소요사태’, ‘광주무장폭동’,‘광주폭동’ 등으로도 부른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광주봉기’, ‘광주인민봉기’, '영웅적 광주인민봉기', '광주폭동' 등으로 평가한다.[9][10][11][12]
[편집] 발생 배경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이후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다. 유신헌법을 개정하고 민주적인 헌법으로 되돌아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고, 11월 7일 최규하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해제해 긴급조치에 의해 금지됐던 개헌 논의를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 정승화(육군 참모총장)를 체포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국민들의 민주 정권 수립 요구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1980년 2월 신군부 세력은 k-공작계획을 실행해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성해 나가고 있었다.
1980년 5월 초순경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는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13]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국가보위 비상기구를 설치해 신군부에 대한 국민의 저항를 탄압하면서 신군부가 정국을 주도하고, 국회 폐쇄와 정치인 체포로 신군부의 안정적인 정국 장악을 담보한다는 것이 시국수습방안 기획 의도였다.
중앙정보부는 일본 내각조사실의 첩보를 토대로 5월 10일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5월 11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북괴남침설’과 같은 첩보는 가치가 없다고 결론내린 상황이였다. 5월 13일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과 미국 국무부의 한 대변인는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해 흘린 정보라고 평가했다.[14] 훗날 남침설을 제보했다고 알려진 당시 일본의 내각 조사실 한반도 담당반장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 적도, 그런 정보도 없었다”고 밝혀 신군부가 집권을 정당화 하기 위해 악용했던 ‘북괴남침설’은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15]
한편 같은해 5월 중순부터 정부와 국회에서는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고 있었다. 5월 12일 신민당과 공화당 양당 총무들은 개헌안 접수하고, 비상계엄 해제 등의 정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5월 20일 10시 임시국회의 소집을 공고했다.[16] 같은날 신현확 총리는 국회와 협의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개헌 일정을 앞당긴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17]
1980년 5월 초부터 신군부 세력의 정치 참여를 반대하기 위해, 지상 서울역 주변에서 학생들의 자발적인 집회가 있었으나 5월 15일 경찰의 진압 소식이 전달되면서 스스로 해산했다. 5월 17일 24시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려 18일 1시 부로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같은 날 새벽 2시 신군부는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해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 26명은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됐고, 6백여 명의 학생·교수·재야인사 등이 체포됐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무장헌병들에 의해 가택 연금됐다. 신군부가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내린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정치 활동 금지·휴교령 등의 민주주의 역행 조치에 항의해, 5월 18일 오전 전남대 학생들은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했고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구타·폭행으로 진압했다. 과격한 부대인 공수부대의 투입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정동의 모략’이란 소주제에서 이미 1980년 1월초 서울 정동 미대사관에서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과 미8군사령관 등이 모여 5·18을 ‘난동’과 ‘소요’로 유발시키려는 음모를 꾸민 뒤 지도인물로 김대중(金大中)씨를 내정했다고 음모 의혹을 제기했다.[18]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과 군부독재자들의 책동에 격분해 들고일어났다.[19] 하지만 1996년 있었던 검찰 수사에 의해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와 시위 진압 계획이 밝혀진 것과 달리[13], 김대중과 미국이 학살의 배후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에 실질적인 증거는 없다.
[편집] 과격진압의 배경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이루어질 조치에 대한 반대 집회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전두환(보안사령관)·황영시(육군참모차장)·정호용(특전사령관) 등 신군부 핵심세력은 진압병력 투입 및 강경진압 방침을 결정했다. 시국수습방안은 계엄 확대와 동시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과감한 방법의 타격으로 시위대를 진압한다는 지침이 즉각 실행될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20]
1980년 3월 4일 ~ 3월 6일 수경사에서는 '제1차 충정회의'에서 군의 투입을 요하는 사태 발생시 강경한 응징조치가 필요하다고 내려졌으며, 이미 80년 초에 학생 시위가 가열될 것을 대비해 전국 군 부대에 충정훈련이 강도높게 실시됐다. 5월 10일부터 2군사령부에서는 광주·대전 등에 제7공수여단을 배치하는 방안을 의논했다. 5월 14일부터 제31사단은 광주 지역의 주요 보안 목표를 점거했기 시작했으며, 5월 15일 제7공수여단은 광주·대전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광주 시내에서의 시위 진압에 투입된 한 공수부대원은 시위진압이 해산 위주가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진압이 발생했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계엄사령부와 2군사령부 등 체포 위주로 진압하라는 상부의 지시는 공수부대원들의 과격진압을 부채질했다. 광주에서 시위가 계속되자 계엄부사령관인 육군 참모차장 황영시는 강력하게 진압하도록 지시했다. 5월 18시 23:00부로 2군사령관의 강조사항이 각 공수부대에 지시됐다. 이 지시는 “공수부대 시내 출동, 융통성 있게 운영”하며, “전 가용 작전부대 투입”하여 “주모자 체포”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같은 날 내려진 지시는 “포고령 위반자는 가용수단 동원 엄중 처리”하며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토록 지시했다. 이같은 지침은 현장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에게 더욱 더 과격한 진압에 나서게 했다.
계엄사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김대중 연행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의 시위를 ‘불순분자’나 ‘고첩’들의 책동으로 몰아갔다. 5. 21.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담화문에서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이다”고 규정했다. 이렇듯 사실을 왜곡한 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시위를 규정하는 상층부의 인식과 지침들은 공수부대원들에게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이 같은 요인들 때문에 현장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를 ‘불순분자’의 소행 또는 시위대를 ‘적’으로 규정했고,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결과적으로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과격진압을 하는 배경이 됐다. [21]
[편집] 전개
광주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던 전남도청 별관
[편집] 전체 개요
[편집] 사건 초기
[편집] 5.17 조치 이전 계엄반대시위
1980년 5월 15일에는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했다. 5월 초부터 신군부 세력은 집권 시나리오를 계획하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해 반대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다. 이에 따라 5월 17일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압력으로 개최된 비상국무회의는 비상계엄령을 내리도록 의결했다. 새벽 0시경 보안사령부는 야당 인사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체포해 감금했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국회를 점령해 국회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자정 이후 전국으로 비상계엄령이 확대됐고 광주에 제7공수부대 33대대, 35대대 병력이 도착했다. 제7공수부대는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을 점령했다. 공수부대원들은 각기 조를 편성해 광주 시내 각 학교의 입구를 지키고 검문검속했다.[22] 계엄포고령 제10호가 선포돼 대학휴교령∙보도검열강화∙정치활동금지 등의 조치가 내려졌다.[13]
[편집] 대학생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5월 18일 당일 아침 9시 이후, 텔레비젼 방송과 라디오, 신문을 통해 비상계엄 전국확대 소식을 보도했다. 18일 오전전남대학교 학생 100여 명은 교문 출입을 저지하는 공수부대원에 항의했다. 이로 인해 대학생과 공수부대원 간 충돌 발생했다. 학생들은 구타당했고 공수부대의 구타에 자극받은 전남대학생 300여명은 교문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투석했고, 일부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했다. 전남대학생 300여명은 가톨릭 회관 집결해 시위했고, 이에 경찰은 최루탄 발사하며 해산했다.
5월 18일 오후 4시 제7공수여단이 시내에 투입됐다.[23] 제7공수여단은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검문검색과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했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24]
이날 희생된 청각장애인 김경철씨는 공수부대에 의한 대표적인 과격진압 사례였다. 그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그는 광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출혈로 이튿날 새벽 결국 사망했다.[25]
[편집] 전개 과정
[편집] 광주 시민의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과 고등학생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학생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으로 폭증했고 계엄군의 진압은 가혹하게 변했다. 공수부대는 학생, 시민, 남녀노소, 행인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가했다. 20일 시위대의 규모는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광주 시내 택시, 일부 시내·시외 버스 200여대가 계엄군의 진입로를 가로막기도 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을 진압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과격진압을 자행했다.[25] 일부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지휘를 맡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를 찾아 직접 항의를 가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20일 24시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를 가했다.[22] 발포 이후 2군 사령부로부터 발포금지와 실탄 배분 금지 명령이 떨어졌지만, 1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하고 실탄을 분배했고, 다음날인 5월 21일에는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연결됐다.[26]
[편집] 계엄군의 발포 및 광주 시민 학살
5월 21일 오전 전남도청과 전남대 앞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21일 오전 시민 대표는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렬됐다. 전남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확*로 21일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공수부대 철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21일 정오 12시경 전남대 앞·21일 오후 1시경 당시 전남도청 앞)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도청 집단 발포 이후,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 빌딩·수협·광주관광호텔 등에 4인 1조로 올라가 조준사격을 가했고 수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25] 이 날 광주시내 120여 개의 병원과 보건소·3개의 종합병원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상자들이 몰려들었다. 정부는 광주 지역의 시위를 ‘광주사태’로 명명하고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했다.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자유 민주화 시위대는 광주mbc 방송국를 방화했다.
[편집] 광주 시민의 항쟁
집단 발포가 일어난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해, 시민군이 결성됐다. 시민들은 광주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인 아세아자동차에서 차량을 탈취했다. 일부 시민군은 260여 대의 차량을 몰고 나주와 화순 등으로 외부에 광주의 소식을 알리러 떠났다. 총과 실탄, 폭약 등 각지에서 탈취된 무기는 시민들에게 분배됐다.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했다. 21일 저녁 시민군은 계엄군이 물러난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21일 저녁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정도영 준장은 자위권 발동을 경고하는 담화문을 계엄사령관 이희성에게 전달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오후 7시 보안사에서 전달한 자위권 발동 경고 담화문이 발표했다.
[편집] 광주외곽봉쇄작전
1980년 5월 21일 19시 30분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가 계엄사령부로부터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내려져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다. 5월 21일 21시 30분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에 방어적 발포을 승인하는 자위권 발동이 고지되고, 실탄이 분배되기 시작하면서 계엄군이 무차별 발포에 나서는데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27]광주외곽봉쇄작전이 실시되는 동안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 송암동 학살을 비롯한 시민 살상 행위가 광주 외곽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편집] 광주 시민의 자치
22일 이후 광주는 군인들에 의해 완전 포위·봉쇄당했다.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됐고 전국 각지에 온갖 유언비어가 확산됐다. 외신기자들에 의하면 계엄군이 물러가고 시민군이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자치질서를 찾아가고 있었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자유 민주화 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자유 민주화 시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시민군 자체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을 보여준다. 다함께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지고 행정력과 치안력 공백상태에서도 큰 사건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광주의 상점가, 금융기관, 백화점에서 단 한 건의 약탈도 없었다.[28]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던 이 기간에 광주 시민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켜나갔으며 대치 상태는 26일까지 계속 이어졌다. 시민 자치 기간에도 광주 시민의 협력으로 행정기관의 역할이 상당부분 유지됐다. 당시 전라남도부지사 정시채를 비롯한 공무원도 전남도청에 정상 출근했다. 공직자들은 5.18 당시 양곡 방출이나 부상자 처리 등의 행정업무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29][30] 이 기간은 ‘광주해방구’ 또는 ‘해방광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부 지식인은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 당시 광주를 프랑스 시민들의 자치가 시행된 파리 코뮌 당시의 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편집] 평화집회
해방광주로 불리는 동안 일부 시민들은 스스로 계엄사에 무기 자진반납을 했으나 일부 시민들은 지속적인 투쟁을 주장하며 계속 무장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수차례에 걸친 내부 대책회의와 협상 끝에 계속 무장을 해야 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평화적 시위는 계속됐고 〈애국가〉와 〈울밑에선 봉선화〉 등을 부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화집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광주 시민은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이 구호는 광주 시민들에 의해 많이 불렀고,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31]
[편집] 광주 재진입 작전
5월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시작됐다. 5월 27일 새벽 2시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아침, 전라남도 도청에서 일방적으로 1만여발을 사격해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살상했다. 도청 내 일부 시민군은 자진 투항하자는 의견과 결사항쟁 의견으로 나뉘어졌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채 날이 밝으면서 계엄군이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시민군 생존자를 체포·연행했고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편집] 미국 측의 반응
대한민국 측은 5월 18일 0시에 시작된 비상계엄 확대 선포 2시간 전에 갑작스럽게 이를 미국에 통보했다. 미국은 한국군 당국이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대학과 국회를 폐쇄하려는 의도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 5월 18일 오전 미국은 서울과 워싱턴에서 계엄령 실시에 대하여 강력하고 맹렬하게 항의했다.[32]
계엄사령부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동원한 특전사 부대나 20사단 부대는 광주에 투입될 당시나 광주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는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하에 있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광주에 투입되었던 한국군의 어느 부대도 미국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 특전사령부 예하 여단은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었던 적이 없다. 20사단의 경우, 10·26 사건에 뒤따를 혼란을 대비한다는 대한민국 측 요청에 따라, 10월 27일 20사단 포병대와 예하 3개 연대의 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에서 대한민국 육군으로 넘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특전사 부대가 광주에 배치된 것을 사전에 몰랐으며, 작전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32]
미국 측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초기에 방관적이었다. 5월 18일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에 주미 대사관으로 부터 미국 국무부로 타전된 전문에서는 광주에 대한 언급이 없다. 5월 20일까지만 해도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미국 측의 인식은 막연한 소문에 불과했고, 공수부대의 광주 과잉진압 문제는 서울에서 일어났던 신군부에 의한 정치탄압 사건에 비해 우선 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미국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건 5월 21일 부터 였다. 이 때는 이미 5.18 민주화운동의 비극의 씨앗이 된, 시위 군중에 대한 강압적인 진압이 이뤄진 후 특전사 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시점이었다. 미국은 이후 광주사태에 대한 평가에서 첫 무력 진압이 이루어진 18일이나 27일의 전면 재진압보다는 5월 21일을 사태의 정점으로 파악하고 있다.[33]
5월 21일 이후 미국은 신군부와 신군부에 반대하는 대한민국 국민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입장 표명의 압력을 받았는데,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에 성명서에 포함시킬 항목을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우리는 광주에서의 시민 분쟁(civil strife)에 경악하고 있음(alarmed)
모든 관련 당사자들이 극도의 자제심을 발휘, 평화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대화를 추진할 것을 촉구함
글라이스틴의 제안대로 이튿날인 5월 22일 오전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글라이스틴의 문안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성명을 발표했으나 언론을 통제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신군부는 미국의 이런 입장이 일반에게 전달되는 길을 봉쇄해 버렸다. 글라이스틴과 위컴의 오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군부 측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위컴은 이 일을 두고두고 비난하게 된다.[34]
5월 22일 오후 미국에서 열린 정책 검토 위원회(policy review committee)는 “지금까지 우리가 취해온 행동 이상의 일은 할 필요가 없다는 데에 동의. 우리는 온건한 방법을 선택할 것을 조언했으나, 대한민국 국민이 질서 회복의 필요를 느낄 경우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았음”이라는 광주 상황에 대한 방침을 정했다.[35]
5월 23일 글라이스틴과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와 첫 회동을 가졌다. 글라이스틴은 대한민국 측에 5월 17일 계엄령 확대 정책이 미국에 충격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 시위를 확고하게 진압하는 것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정치 탄압을 수반한 것은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결국 광주에서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는 데 일조한 것이 틀림없다는 견해를 보였다.[36]
[편집] 날짜별 상세 일지
5월 16일 금요일 이전
5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전국 대학생 10~20만 명이 모여 지상 서울역 광장 주변에서 집회.
5월 15일 대학생단체 간부들에 의해 대한민국 경찰의 출동 소식을 사전에 접하고 서서히 해산.
5월 17일 토요일
21시 40분: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의결
23시 00분: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 검속 실시
24시 00분: 5월 17일 0시부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 신군부 계엄포고 제10호를 통해 정치활동 금지, 언론검열 강화, 대학교 휴교령 선포. 광주 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7 공수여단 33대대, 35대대 등). 전주 전북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까지도 잡아들여 폭행. 이 과정에서 대학생 사망자가 1명 발생했다.
전북대 농학과 2년인 이세종(당시 21세)은 5월 17일 12시께 계엄군에 쫓기다 전북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떨어져 사망(추락사).[37]
새벽 1~2시 경: 보안사령부(사령관 전두환)가 김대중 등 신민당 지도자와 김종필 등 공화당 지도자를 체포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점령. 국회 기능 마비.
5월 18일 일요일
새벽: 계엄군의 무차별 구타와 학살을 일부 시민들이 자진해서 방송으로 알림.
새벽6~8시 경: 계엄군의 구타와 학살에 대항해 학생들이 궐기
오전 08시: 신군부 등이 비상국무회의와 국보위 회의를 개최, 학생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계엄군 투입을 결정
오전 09시: 광주시내에 계엄군 투입 그러나 지연도착
09시 00분~30분: 계엄군의 지연 도착으로 3,7,11공수여단 병력 투입, 전남대학교 교문에 배치
09시 40분: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당함.
10시 00분: 전남대학교 주둔 계엄군을 상대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임
10시 15분: 계엄군(공수부대원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항의 시위 진압.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첫 번째 부상자 발생)
10시 20분: 전남대학교 교문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원과 외부에서 학교로 출입하던 대학생 간 충돌 발생. 공수부대의 대학생 구타에 자극받은 대학생들 800여 명이 교문에 배치된 7공수부대원들을 향해 돌을 투석, 일부 학생들이 교문을 벗어나 광주 금남로로 이동.
오전 11시 00분: 전남대 300여 명 가톨릭 회관 집결,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 시킴
정오 12시 :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옴.
12시 : 광주 시내에 계엄군 도착. 교문 밖을 쏟아져나온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무장충돌, 지나가는 시민 중 일부를 대학생으로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잡아다 구타, 가혹행위로 확대.
오후 : 학생 구타와 시민 구타에 분노한 대학생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함. 계엄군과 공수부대는 오전에 집단 투석당한 병사들로 자극돼 흥분. 대규모 폭행, 구타, 가혹행위 발생.
15시 40분: 금남로 유동 삼거리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강경 진압. 진압과정에서 시위대로 추정되는 시민들을 잡아다가 구타 및 현장 체포함. 광주 공용터미널에서 청각/언어 장애인인 김경철 씨 계엄군에게 전신 구타당함.
19시 02분: 계엄사령부, 통행금지령 확대 국내외 방송을 통해 통금 시간을 저녁 9시로 당긴다고 발표.
20시: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무차별 구타에 불안, 흥분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학생들에게 동조.
21시: 계엄사령부 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방송과 라디오를 통해 해산 경고문 발표.
5월 19일 월요일
오전03시 00분: 11 공수여단이 증원군으로 광주 도착(김경철 씨 병원에서 사망 - 두 번째의 희생자).
09시 30분: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10시 00분: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1공수여단 위력시위 이후 착검한 상태로 진입, 대검으로 인한 자상자 발생. 11공수여단 약 천여 명이 강경 진압을 강행했고, 3~4명이 한 조가 돼 골목마다 누비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행.
오후: 시민군이 본진을 갖추기 시작. 쇠파이프와 각목 등으로 무장했으나 무장력이 현저히 낮았음
오후14시 40분: 조선대학교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돼 무리한 진압 작전 전개
15시 00분: 시내 기관장과 유지들, 회의를 하고 시위 진압을 완화해 달라고 계엄사령부에 건의
16시 30분: 계림 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 고등학생 김영찬이 총격 부상을 당함(최초의 실탄 사격). 광주 적십자 병원에서 5·18 최초 희생자 청각장애인 김경철 사망.
저녁 20시 00분: 시민들이 시위대 합류. 수만 명이 “전두환 타도”와 “신군부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 “신현확 퇴진” 등의 구호를 외침.
20시: 학생들의 처참한 몰골을 동정한 시민들이 시위에 동참, 2백 대의 택시가 전남도청 앞에 결집, 택시 운전사들의 차량 시위가 이어짐.
22시: 도청 주변을 가로막은 택시들과 3,7,11공수부대 및 계엄군이 대치, 실랑이를 벌임.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동참
5월 20일 화요일
08시 00분: 고등학생들의 참여에 자극받은 정부는 문교부를 통해 광주 시내 및 전라남도 광산군, 나주군 일대 고등학교에 휴교 조치 하달.
10시 20분: 가톨릭 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은 채 끌려나와 마구잡이 구타당함. 공수부대와 시민 사이에 공방전 계속.
18시 40분: 택시 및 버스 200여 대가 금남로에서 도청을 향해 차량 경적 시위.
20시 00분: 택시 및 버스 200여 대가 계엄군 및 공수부대원의 진입을 가로막음.
20시 10분: 시위대, 도청으로 서서히 이동. 금남로, 충장로 등에서 택시와 차량에 가로막힌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
20시 00분: 3공수, 11공수 여단장 실탄 분배 지시 (3공수여단장 실탄 장착 지시, 11공수의 경우 각 각 61대대,62대대가 1000여발 분배)
20시 00분: 실탄분배 과정에서 대검을 사용.
21시 00분: 택시 200여 대와 버스들은 진입로를 차단, 공수부대 및 경찰과 충돌. 일부는 우회해서 감.
21시 05분: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해 경찰 4명 사망
21시 50분: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 보도한 광주mbc 방화
23시 00분: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 발포. 시민 김만두, 김재화, 이북일, 김재수 사망. 시민 수십 명 부상.
5월 21일 수요일 (이날부터 광주해방구, 해방광주)
00시 35분: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 광주역에서 철수하던 계엄군, 대검과 곤봉 등으로 시위대 2명 살해. 계엄군 측 부상자 5명으로 보고.
02시 18분: 시외전화 두절
04시 00분: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손수레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
04시 30분: 광주kbs 건물 방화
08시 00분: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진압 명령을 받고 투입된 20사단 병력과 충돌
10시 15분: 도청 앞,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함.
11시 10분: 대형 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
12시 10분: 전남대 진출을 시도한 시위대가 전남대 앞에 배치된 공수부대원들의 저지에 밀려 신안동 굴다리까지 1km 후퇴. 공수부대의 진압 도중 시민 4명 사망
12시 59분: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13시 00분: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됨.
13시 20분: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이때부터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에 올라가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시작
14시 15분: 도지사, 경찰 헬기에서 시위 해산 종용하는 설득 방송
14시 35분: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 트럭, 장갑차 수십대 획득
14시 40분: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15시 48분: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16시 00분: 화순, 나주 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16시 43분: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m2 중기관총 2대 설치
17시 30분: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와 광주교도소로 철수
5월 22일 목요일
광주 시내가 계엄군에 의해 고립됨
09시 00분: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10시 30분: 군용 헬기 공중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 살포
11시 25분: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12시 00분: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
13시 30분: 시민수습위원회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 분소 방문, 7개 항의 수습안 전달
15시 58분: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17시 18분: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 결과 보고
17시 40분: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18시 00분: 20사단이 통합병원 진입로 확보를 위해 1km 전진하며 사격, 작전 중 지역 주민 8명 사망
19시 00분: 동양방송 라디오(현 kbs 제3라디오)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 기상도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중간조사 결과 뉴스를 보도했다.
21시 30분: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 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 금요일
08시 00분: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10시 00분: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
10시 15분: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해 총기 회수 작업 시작
11시 45분: 도청과 광장 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13시 00분: 지원동 주남 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15시 00분: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 전역에 살포
19시 40분: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 토요일
13시 20분: 11공수부대, 원제 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4명 사망.
14시 20분: 송암동에서 11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 사이에 오인 총격전 발생 9명 사망 40여명 부상, 오인 총격전 직후 공수부대원이 주변 민가를 수색해 마을 청년 4명 처형.
14시 50분: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 일요일
11시 00분: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메시지와 함께 광주민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 원 전달
15시 00분: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
21시 10분: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 발생 예방과 식량 공급 청소 문제 등 논의
5월 26일 월요일
05시 20분: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08시 00분: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농성동에서 죽음의 행진 감행
10시 00분: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4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15시 00분: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 상황 브리핑
19시 10분: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 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처
24시 00분: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5월 27일 화요일
02시 00분: 계엄군의 광주 진입
03시 00분: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
04시 00분: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04시 10분: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에게 사격
05시: 시민군 생존자들 자진해서 자수. 자수 과정에서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 3명을 시민군이 자진해서 체포해 계엄군과 경찰에게 넘겼음.
05시 10분: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 장악하고 진압 작전 종료
06시 00분: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무선 방송
07시 00분: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08시 50분: 시내전화 통화 재개
[편집] 피해
광주광역시가 2009년에 29주년을 맞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38][39] 검찰은 1994년 사상자 수를 발표했지만,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와 같은 5.18의 핵심적인 진상은 밝혀지지 않으면서 5.18이 발생한 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경찰 및 군인 중 사망자는 경찰 4명, 군인 22명으로, 이들은 1980년 6월 21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안장됐다. (광주광역시가 발표한 통계는 유족이 보상금을 수령한 사망자 수이다. 확실하게 신원이 밝혀졌지만, 보상금을 수령받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165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5.18민주유공자 유족회와 부상자회, 5.18기념재단 등 4개 단체가 공식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5.18 사망자는 모두 606명으로, 이 가운데 165명은 항쟁 당시 숨졌고, 행방불명이 65명, 상이후 사망추정자는 376명 등이다.[40]
1980년대 중반에는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과 무차별적인 연행으로 인해 사망자가 2천여 명에 달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제로 5.18 종료 직후에 정부에 신고된 사망추정자, 실종추정자는 2천여 명에 달했고, 일부 학생운동권이 이를 인용한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1985년 윤성민 국방부 장관은 1980년 당시 사망자 및 실종자로 신고된 인원은 2천 명이 맞다면서, 그중에는 체포 구금된 자, 사망자, 부상입원자, 피신자도 포함돼 있어, 이들 인원이 사망자로 잘못 전파된 것이라고 답했다.[41]
5.18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다. 연구진은 5.18 유공자 중 부상자와 구속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은 성폭행 피해자나 난민, 고문피해자 등 인권 유린 피해자와 유사한 경험을 한 까닭에 상당수가 ptsd 증상을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연구를 진행한 오수성 전남대 교수는 “5.18 체험자들은 지금도 만성적인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고 있다. 당시 충격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재경험하면서 우울증, 불안장애, 알코올중독을 함께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42] 또한 이들은 당시의 기억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반복되는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다. 2007년 8월 기준, 5.18 피해자로서 사망한 376명 가운데 39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5.18 피해자의 자살률은 10.4%로 일반인의 약 500배다.[43]
[편집] 연행자 고문 피해
한국인권의료복지센터 부설 ‘고문 정치폭력 피해자를 돕는 모임’은 1980년 5.18 당시 연행 또는 구금됐던 피해자가 1인당 평균 9.5회의 고문을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중 물고문, 매달기, 구타, 비생리적 자세 강요, 강제 급식, 밥 굶기기, 의료기회 박탈 등 신체적 고문이 62%를 차지했다. 수면박탈, 복종강요, 지각박탈(암실 가두기) 등 심리적 고문은 38%를 차지했다.[44]
5.18 당시 계엄군에 의해 폭행당하고 트럭에 실려 광주교도소∙상무대에 연행된 광주 시민은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계엄군은“워커발로 얼굴 문질러버리기”,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날로 찍는 ‘닭발요리’”, “사람이 가득 찬 트럭 속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두 사람을 마주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 싸서 먹이기”,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끝에 똥 묻혀오게 하기”, “송곳으로 맨살 후벼파기”, “대검으로 맨살 포 뜨기”, “손톱 밑으로 송곳 밀어넣기” 등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한 고문들을 자행했다.[45]
연행자들은 영창으로 넘겨지기 전 보안대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다. 이미 짜인 각본에 따라 내란음모 선동 등의 죄명으로 수사를 받았다. 특히 신군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상 연관이 없는 김대중과 관련한 내란음모 조작이라는 각본 수사가 이루어졌다. 김대중으로부터 폭동자금을 얼마 받았느냐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며 잔인한 고문, 구타, 심지어 같은 동료끼리 때리게 하는 비인격적 모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폭거를 자행했다.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사람들은 석방이 된 후에도 오랜 시일동안 후유증에 시달려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고,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했다. 이들은 풀려난 후에도 엄청난 공포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46]
정동년 5.18 30주년 기념행사위원장∙고 홍남순 변호사∙고 조아라 광주 ywca 회장∙고 명노근 전남대 교수∙송기숙 전 전남대교수 등의 민주인사들은 상무대 지하 조사실에서 보안대 조사관들의 조사를 받았다. 정동년은 “보안대 조사관들이 잠을 재우지 않고 조사를 하면서 무릎 사이에 곤봉을 끼우고 밟고 군홧발로 짓이기는 등의 고문을 자행했다”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또한 그는 “경찰이나 중앙정보부처럼 기술적인 고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보안대 조사관들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연루 사실을 조작하기 위해 무지막지한 고문을 했다”며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말했다.[47]
[편집] 영향과 평가
광주 민주화 운동은 끝내 전두환 정권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1987년 6월 민주항쟁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전두환 정권의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미국을 한국전쟁 때 같이 싸운 혈맹관계로 이해하던 종래의 대미관과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도 당시 운동권을 중심으로 해 재고됐다.
1980년 7월 4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했다. 서울의 학생시위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이 조종했다는 명목으로 김대중과 민주화 운동가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이는 후에 신군부가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대중 등은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미국의 강력한 사면 요청에 따라 감형됐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과 폭도들의 반란으로 조작했다. 하지만 1988년 5공 청문회를 거치고 1995년 12월 21일 국회에서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을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해, 계엄군의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피해 배상을 위한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1995. 12. 21.)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7. 12. 17.)이 제정[48]되면서 전두환 정권의 비(非)민주성과 폭력에 맞서 싸운 자유 민주화운동으로 다시 평가받았다. 또한, 계엄군이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면서,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광주학살 책임자들은 서훈이 취소됐으며 그 자격도 박탈됐다. 또한, 이 일의 핵심 관련자인 전두환, 노태우는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대법원으로부터 징역형과 2천억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받았다.[48]
광주항쟁은 이후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발생한 각종 반미시위 및 반미주의 확산에도 일부 기여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지역 대학생들에 의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약칭 부미방 사건)에도 영향을 미쳤다.[49][50]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구호 중에는 “민주주의를 원하는 광주시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전두환 파쇼정권을 타도하자.”라는 조항이 제1항 서두에 삽입돼 있다.[49][50] 이후 미국의 광주학살 책임과 전두환 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대학생 및 고등학생, 일반 시민들에 의한 반미 시위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지속됐다. 강원대생 성조기 공개 소각사건(1982년 4월), 광주미문화원 2차 방화사건(1982년 11월),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사건(1985년), 대구 미국문화원 폭파사건(1983년 9월), 부산 미국문화원 투석사건(1985년 4월) 등의 원인이 됐다.
2000년 5월 15일에는 미국의 광주학살 을 규탄하는 서울대학교,고려대학교 등 서울의 여러 대학교 학생 100여 명이 오전 11시경부터 서울 미국 대사관 앞으로 몰려가 항의 집회를 벌렸다.[51] 그들은 미국이 2000년 6월에 열리는 남북최고위급회담에 간섭하고 있으며, 한국전쟁과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때 주민들을 학살했다고 비난하는 프랑카드를 흔들면서 미국 대사관에 기습을 시도, 반미구호를 외쳤다.[51]
[편집] 의의 및 교훈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과 민중의 의지를 대내외에 드러내었고 반민주, 군사독재의 야만성을 세계에 폭로함으로써 군사독재체제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으며,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들의 항쟁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으므로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가열찬 투쟁이 한 지역에 머물지 않고 전국적 저항과 연대로 이어질 때 비로소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기기도 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를 알게 해 주어 통일운동의 계기가 됐다. 미국은 해방 후 줄곧 사실상의 군사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여실히 입증됨으로써, 미국이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팽배해지면서 처음으로 반미 운동이 싹트게 됐고, 자주·통일운동이라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지평이 활짝 열리게 되고, 이후 대한민국 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성을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52]
광주 민주화 운동은 다른 국가의 민주화운동에도 영향을 끼쳣다. 일본의 마쓰나가 세이타로 요미우리신문 홍콩 특파원은 중국의 천안문 민주화 운동과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퇴진의 배경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다고 평가하였다.[53]
[편집] 사건 당시 언론에 의한 왜곡
신군부는 보안사를 중심으로 ‘언론반’을 구성해 계엄사령부 보도처의 신문·방송·라디오·잡지 등 모든 매체에 대한 보도검열해 100만 건 이상을 조종 감독했다. 신군부는 ‘k공작계획’으로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언론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5월 17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와 함께 보안사에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표하면서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조치를 내렸고 기자협회 간부 연행 했다. 또한 관제 보도를 의무화하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이후 동아일보, 동아방송, 중앙일보 등은 5월 20일에 경향신문, 문화방송, 합동통신 등의 양심적 언론인들은 사실 보도를 요청했다. 5월 21일에 조선일보는 5월 22일에 5.18 사실 보도, 보도 검열 전면 철폐를 요구하면서 제작 거부를 시작했다.[54] 하지만 신군부는 철저하게 무시했다.
신군부는 k공작계획에 따라 ‘광주소요사태의 조속한 진정과 질서회복 유지를 위해 중진언론인을 초청, 현지실태를 취재토록 유도하고 국민계도를 촉구토록 유도’한다는 명분과 목적 아래, 신문 방송 통신사의 사회부 기자 32명, 국방부 출입기자 17명 등 합계 49명을 2처 2과장 중령 이용린이 인솔해 1980년 5월 24일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6시 40분까지 광주 일원 소요 현장을 취재하도록 했고, 신문 방송 통신사의 사장, 편집국장, 정치부장, 사회부장 각 16명 합계 64명을 4일에 걸쳐 호텔에 초청해 간담회를 가졌다.[54]
5.18 당시 미국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지지했으나,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을 견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미국이 5.18 당시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의 전모를 파악했을 때 글라이스틴 대사는 특전사의 지나친 반응이 비극의 직접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미국 관리들은 그와는 반대로 정부의 통제를 받는 광주의 라디오 방송이 미국 측이 특전사의 광주 파견을 승인했다고 보도하고 있음을 알았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역정보 행위를 대한민국 정부에 항의하고, 이를 정식으로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를 취소하지 않았다. 또한 보안사의 조종을 받는 대한민국 언론은 미국 관리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전두환을 승인했다”라는 보도를 쏟아내었다. 이러한 신군부에 의한 왜곡 보도는 반미 감정이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55]
[편집] 5·18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은 2011년 5월 25일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 심의를 통과함에 따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결정됐다. 5·18 기록물은 9개 주제로 ▲국가기관이 생산한 5·18민주화운동 자료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료, 군사법기관 재판자료 ▲시민들이 생산한 성명서, 선언문, 취재수첩, 시민들의 5월일기 ▲사진(흑백필름)자료 ▲시민들의 기록과 증언 ▲피해자들의 병원치료기록 ▲국회의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회의록(청문회기록) ▲국가의 피해자 보상자료 ▲미국의 5·18 관련 비밀해제 문서 등으로 총 분량은 편철 4271권 85만8904페이지, 흑백필름과 사진 2017컷이다.[56]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 유산 등재가 최종 심사 결과만을 남겨 두고 서석구, 지만원 등 극우 인사는 5·18이 북한군의 학살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네스코 본부에 반대 청원서를 제출했다.[57] 하지만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는 이들 극우 인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만장일치로 5·18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했다.[58]
유네스코는 5.18 민주화운동이 대한민국 민주화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동아시아 국가들의 냉전 체제를 해체하고 민주화를 이루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59]
[편집] 정치인들의 평가
김대중은 5.18 민주화 운동의 교훈을 “인권침해에 저항한 인권정신, 맨손으로 잔혹한 총칼에 맞섰던 비폭력 정신, 공권력의 공백속에서도 질서의식을 가지고 치안을 지켰던 시민정신, 항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평화정신”이라고 규정하고 “광주의 위대한 정신은 우리만의 자랑이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믿고 숭상하는 전 세계인의 자랑이며 인간승리의 대서사시”라고 평가했다.[60][61]
노무현은 5.18 민주화운동 27주년 기념사에서 “5.18은 역사에 많은 의미를 남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군부와 언론에 의해 폭도로 매도돼 무참히 짓밟혔던 그날의 광주는 목숨이 오가는 극한상황에서도 놀라운 용기와 절제력으로 민주주의 시민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너와 내가 따로 없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주먹밥을 나누었습니다. 시민들의 자치로 완벽한 민주질서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대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세계 시민항쟁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민주시민의 모범을 남겼습니다.”라고 연설하며 광주를 민주주의의 성지라고 높이 평가했다.[62]
김영삼은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라고 하며, “그 비극을 국민들이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 인간으로서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국 국민을 그렇게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나. 우리 역사에 길이길이 크게 기록돼야 한다.”며 강도높게 비판하기도 했다.[63]
2007년 8월 박근혜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했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했다.[64]
2008년 5월 18일 이명박 대통령은 제28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참가해 기념사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8년 전 오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숨져간 민주 영령들 앞에 온 국민과 함께 고개 숙여 명복을 빕니다. 그 날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시는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들께도 충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역사의 고비마다 정의와 진실을 위해 앞장서 온 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을 저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크나큰 아픔으로 남았지만, 우리가 지금과 같은 민주화사회를 이루는 데 큰 초석이 됐습니다.”라고 평가했다.[65]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는 “5.18의 민주화 정신은 많은 국가들에게 표본이 될 수 있다”고 평가하며[66] 광주에 대한 애착이 많다고 밝혔다.[67]
레이건 정권 당시 리처드 앨런 미 전 안보보좌관은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대한민국에서 이와 관련해 잘못 알려진 사실과 전두환 신군부의 역사 왜곡은 놀라울 정도라고 밝혔다.[68]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이정희는 “독재와 불의에 맞서 자신을 희생하고 공동체를 지킨 고귀한 광주정신은 진보의 원천이자 민주노동당의 뿌리”[69]라며 “과감한 변화로 수권정당, 대안정당으로 발돋움해 진보정치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현실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했고[69], “광주의 정치혁명을 전국에서 주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69]
[편집] 일부 극우단체의 주장
1990년대 후반부터 일부 극우단체가 북한의 인민군의 침투 의혹을 제기했다. 지만원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폭동”으로 부르는 한편, 조선인민군 개입설을 주장했다.[70] 조선인민군 특수부대 출신자 출신인 자유북한군인연합도 북한 인민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됐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2006년 12월 20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5·18 광주사태는 (북한의) 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백색테러이자 김정일 정권의 대남전략을 증명시켜 주는 현장”이라고 주장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는 “광주사태의 발단과 *점은 민주화 봉기였다고 인정하지만 수많은 인명이 무참히 살상되고 끔찍하게 도륙당한 유혈적인 사건은 김정일 정권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테러행위”라고 주장하며 의혹을 제기했다. 그들의 주장은 올인코리아, 코나스넷 등의 우파단체들을 통해 선전됐다.[71][72][73] 이날 기자회견에는 지만원, 서정갑 등 올드라이트 인사가 대거 참석했으며, 기자회견 내용을 계기로 '전두환 군부의 명예'가 회복될 것이라는 주장도 기자회견의 정치적 배경을 의심케 한다는 주장도 있다.[73]
2008년 6월에는 뉴라이트 연합의 서양사 전공자인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사태”로 부르며, 북한군 개입설을 언급했다.[74] 2008년 10월 서울교회 이종윤 담임목사는‘양심에 꺼리낌없이 힘쓰라’는 주제로 설교 중 4·3 사태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폭력성과 북한 개입설을 설명하다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75][76] 이에 대해 기독교계 커뮤니티인 대구성서아카데미에서는 광주 민주항쟁을 직접 겪은 광주시민이 광주민중항쟁은 계엄군의 폭력에 맞서 시민군이 벌인 항쟁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을 논거로 해 자세히 기록함으로써 이종윤 목사의 주장을 반박했다.[77][78][79] 광주의 5.18단체들이 10일 성명서를 내고 “주일예배설교를 통해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고 당사자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서울교회 이종윤 담임목사는 공식 사과하라”며 항의했다.[75] 이러한 주장 자체가 상식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주장이라는 반박도 대두했다.[80]
일부 보수단체들이 광주민주화운동 시민들에 대해 북한 개입설을 주장해왔던 것과 반대로, 학살을 자행했던 자들이 북한 특수부대라는 보수 단체들의 주장도 있다. 국가정체성회복국민협의회, 한·미우호증진협의회는 "(5·18 당시) 살인자들은 한국군이 아니라 북한이 파견한 600명의 특수부대 군인이었다"라고 주장한다.[81] 그러나 후에 이루어진 취재에 의하면 북한 특수부대 진압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당시 광주에 있었던 사람이 없고, "평양에서 좌천된 당 간부의 얘기를 들었다"는 등의 말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600명이라는 숫자에 대해서도 이들은 "12.12 5.18 수사기록에 공수부대가 기밀유지하면서 작전을 하는데 정체불명의 300여명 되는 부대가 나타나 군장비와 무기를 빼앗았다. 그리고 비슷한 시점에 300여명이 아시아자동차에서 트럭을 탈취해 무기고를 습격한 사람이 300여명이다. 두 사건을 합하면 600명이라고 추정을 했다."라는 근거를 제시했다. 이들이 북한 특수부대의 진압설을 주장하는 이유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들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북한 특수부대 개입설에 대해 김황식 국무총리는 국회 질답에서 "5.18 민주화운동은 역사적으로 심판이 내려졌고 또 우리 국민들도 대다수가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렇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82]
[편집] 극우단체 주장에 대한 비판 및 반론
일부 극우단체 일각에서는 시민군이 광주민중항쟁을 유혈 진압하는 계엄군의 학살과 폭력에 맞서 무장했다는 사실만을 근거로 5·18 민주화 운동을 북한 인민군의 개입에 따른 폭동사태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인민군이 개입했음을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실질적인 증거가 전혀 없어서 신빙성은 지극히 낮다.
일부 극우단체는 계엄사 및 제5공화국 정부의 발표를 인용해, 5.18 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광주 시민 중에 계엄군이 주로 사용하던 총기인 m16보다 시민군이 주로 사용하던 총기인 카빈에 의한 희생자가 더 많이 있다고 주장한다. 5.18 민주화운동 진압 후 의사·검찰 관계자·보안사 요원이 작성한 사망자 검시 자료 원본에는 m16에 의한 사망자가 카빈에 의한 사망자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6월 중순 보안사 주재로 사체 검안위원회가 열려, 피해자 보상 문제가 제기되면서 공식 발표에서 카빈에 의한 사망자로 분류된 사망자의 숫자가 늘어났다. 당시 군부에서는 m16 총상 사망자는 군에 대항한 것으로 인식돼 폭도로 분류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당시 의사 2명과 목사는 난동자(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 등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양민(비폭도)으로 분류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검안위원회에서 최초로 폭도로 분류된 사람은 20여 명이 조금 넘었으나 군에서는 이 정도의 비율이면 곤란하다고 해 격론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 38명이 폭도로 분류됐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인해 사체 검안위원회 회의 결과 m16보다는 m1이나 카빈로 분류된 사망자가 더 많아진 것으로 밝혀졌다.[83]
5·18 당시 계엄군의 작전보고·전투상보에 광주 시민을 살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국회 광주특위·검찰·국방부는 대한민국 계엄군 기록을 토대로 진상규명을 했다. 진상규명 결과 무차별 연행과 과잉진압에 의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 광주역·전남대·전남도청에서의 집단 발포, 광주외곽봉쇄작전 과정에서 일어난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 통합병원 진로개척 작전, 송암동 학살 사건과 같은 무차별적 발포, 전남도청 재진입 작전 중 무장시위대에 대한 발포 등이 밝혀졌다. 진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군인들에게 훈장이 주어졌으며 심지어 상부의 지시 없이 발포를 한 군인들까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진압된 이후 신군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볼 때 대한민국 계엄군에 의한 광주 시민 살해 행위는 분명히 존재했으며, 북한 인민군 특수부대가 광주 시민들에게 계획적인 테러를 행했다는 주장에는 실질적인 증거가 있을 수 없다.[84]
일부 극우단체는 북한이 5·18을 기념한다는 것을 문제삼고 있다. 북한은 5·18 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 혁명(남조선인민봉기), 6·3 항쟁(남조선청년학생봉기), 6월항쟁(6월 인민항쟁), 부마항쟁(10월 민주항쟁) 등 남한의 주요 민주화운동 기념하고, 사건이 발발한 날을 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5·18 민주화운동 등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왜곡해서 북한 주민에게 선전한다. 북한에 있을 때 ‘5.18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야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85] 광주에 취재를 위해 잡입했던 조갑제는 5·18 당시 많이 불리고 큰 박수를 받았던 구호가 “김일성은 오판 말라”면서 5·18이 반공민주화운동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86]
5.18 민주유공자 유족회의 정수만 회장은 2006년 12월 21일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인터뷰에서 북한군 개입설을 반박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에서 “북한군 사망자가 민주화 투사로 둔갑된 사례가 있다.”면서 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중 한 명이 북한군이라고 지목을 했는데, 정수만 회장은 이날 인터뷰에서 지목된 인물은 1980년 5월 22일 광주국군통합병원 앞에서 20사단 61연대의 작전 도중 사망한 고등학생 임00라고 밝혔다. 당시 사망자 검시 기록을 보면 임00이 끝까지 군을 추격하기에 계엄군이 사살했다고 한다.[87]
5.18 당시 북한의 특이 동향은 없었다. 한미연합사령부와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의 분석에 따르면, 5월 초부터 5월 18일까지 북한의 특이 동향이 감지되지 않았다.[88] 5월 20일 한미연합사령부에서 미국에 보낸 전문을 보면, 그 시점까지 북한군의 어떤 동향도 확인되지 않았다. 5.18을 진압했던 계엄군은 부상자와 연행자 수천명에 대해 조사 과정에서 대공 판단서를 첨부했다. 여기에는 대공 용의점을 철저히 조사해서 대공 유무를 기록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이상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89]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일성이 5.18 민주화운동을 전후해 루마니아를 방문했기 때문에, 북한 당국이 5.18 발발을 사전 예측했다고 보기 어렵다.
1980년 5월 21일 날 오전 8시부로 전라남도 지역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이 됐다. 5월 23일 저녁 전 해양경찰에 해안경계태세 강화지시가 떨어졌다. 전남 일대 전 해안에는 31사단 병력의 이 부대는 대간첩 침투작전 부대 3개 연대가 경계를 했는데, 93연대가 목표지역 해안, 95연대가 고흥 여수 지역 해안, 96연대가 무안 영광 지역 해안경계를 했다. 광주에서 화순으로 빠지는 길은 공수부대 7사단과 11사단이, 나주와 목포, 영광으로 가는 길은 20사단이, 담양 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에는 3사단이 투입돼 광주 외곽을 전부 막고 있었으며 31일에는 해안까지 경계가 강화됐다. 이와 같은 철통경계 속에서 극우단체 주장대로 북한군 600명이 해안으로 침투해서 육로로 빠져나갈 상황이 아니었다.[90] [91]
자유북한군인연합은 탈북자 사이에서 5·18 북한개입설은 상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 조선로동당 비서 황장엽 등 고위급 탈북자들은 5·18 북한개입설을 언급한 적이 없다. 북한 인민군 출신 탈북자 단체 탈북군인협회 심신복 회장은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자유북한군인연합의 주장은 현실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92]
1980년 당시 광주는 전라남도 산하의 일개 시로서 서울에서 남쪽으로 300km 정도 떨어진 소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그다지 큰 가치가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북한 측에서 광주에 개입한다고 해서 별다른 이익을 얻거나 대한민국 정부에 커다란 타격을 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과거에 군사분계선 인근 지역에 무장공비가 출몰했을 때와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 등에서 훨씬 적은 숫자의 병력도 주민신고에 의해 발각되거나 동선이 노출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해안가도 아닌 후방 내륙도시에 상당한 수의 병력을 별 노출없이 침투시켰다는 사실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탈북자 단체의 주장대로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 개입해 시민군과 계엄군 모두에게 피해를 입히는 공작을 자행했다면, 이는 중대한 사안으로서, 당시 신군부가 시민군이 아닌 북한군을 주적으로 삼았어야 한다. 그렇지만 신군부는 시민군의 배후에 북한이 있다는 허위 선전을 계속했다는 점에서 탈북자 단체의 주장 역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당시 계엄군이 무고한 시민들까지 닥치는 대로 사살하는 국가폭력을 똑똑히 목격하고 분노한 광주시민들이 경찰서 등의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저항한 일은 굳이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고도 상식적으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보수단체의 주장에는 논리적인 허점이 있다는 반론도 있다.
무엇보다도 광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전북 군산에 주한 미군 공군 베이스캠프가 있는데다, 시내에서 20~30마일 거리에 위치한 광주광역시 송정동에도 주한 미군이 주둔한 상황에서. 북한군이 정말 개입했다면. 주한 미군 사령부나 미국 정부가 이를 수수방관했을 리가 없었다는 점에서 북한군 개입설은 더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조차도 모르게 북한군이 개입했다면, 오히려 대한민국이 전복될 뻔한 위기를 신군부가 자초했다는 얘기가 되고, 결과적으로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우익 단체가 스스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무능과 직무유기를 증명하는 결함이 된다.
11공수여단에서 복무하던 이경남은 “5월 18일, 5월 19일 양일간에 걸친 7공수, 11공수 부대원들의 진압 작전은 오히려 극중(영화 화려한 휴가) 장면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픽션은 아무리 잘 꾸며놓아도 논픽션만 못하다.”라고 말하며 한 중사가 시민군에게 포위되자 옷을 벗어 학생들에게 총을 쏘라고 하자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을 향해 m16 소총으로 사격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시민군은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대, 광주 민주화 운동은 학살이라고 말했다. 또한, 군부대에서 “좌경용공 빨갱이 새끼들이 공부하기 싫어서 복학생들이 시험 기피하고 그러기 위해서 데모 선동” 등 교육 시켰다고 한다.[93]
[편집] 다른 우파의 주장
2002년 2월 사건의 관련자이기도 한 전두환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라고 규정했다. 전두환은 ‘광주는 어 그것은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라고 규정했으며,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느냐’며 반문했다.
2007년 3월 우파 언론인이며 조선일보 원로 기자인 조갑제는 5.18 당시 현장을 취재했었다. 조갑제는 자신이 직접 5.18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상황과 정황에 따른 논리적 판단을 토대로 5.18을 ‘반공 민주화 운동’이라 평가했고[94], 일부 우파에서 제기한 북조선 인민군 개입설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이러한 주장이 결국 좌파들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95] 이에 대해 북한인민군 개입설을 주장한 탈북자 단체 및 이에 동조하는 우파 세력이 조갑제를 비난하는 등의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조갑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어 애국단체들이 북한군 개입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96]●광주시민 수십 만 명과 진압군이 목격자이고, 기자 수백명들이 취재한 목격자가 많은 사건이다. 5·18을 취재했던 어느 기자도 북한군 부대가 개입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전투를 벌였을 당시 진압군(계엄군)의 장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북한군의 출현에 대해서 보고하거나 주장한 사람이 없다.●전국 비상계엄령으로 해안과 항만이 철저히 봉쇄됐다.●전두환 정권 하에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단서가 나오면 확인했을 것이다.●대대 규모 북한군이 개입다면 무장시민에 의한 국군 사망자가 7명에 그칠리 없다.●탈북자 증언은 전언에 불과하며, '내가 광주에 내려왔었다'고 나서도 믿기 힘든 판에 '카더라'란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선 곤란하다.●김일성이 5월 18일 광주 상황 보고를 받고 특수부대 투입했다고 해도 광주 부근에 나타나려면 빨라도 20일 이후일 것이며, 5월 20일부터 광주가 철통같이 포위됐다.
한편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 2004~2006년에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박근혜는 2007년 8월에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며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97]
이명박은 2008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사에서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온 국민과 함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다 숨져간 민주 영령들"이라고 평가했다.[98]
[편집] 언론 보도
[편집] 대한민국의 언론
조선일보 , 중앙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을 비롯한 대한민국 대부분의 언론사와 방송국은 5.18은 ‘민주화운동’과 ‘민중항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980년 당시 11공수여단 소속 병사였던 이경남 목사는 《당대비평》 1999년 겨울호에 ‘20년 만의 고백-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란 제목의 수기를 통해 “80년 5월21일 도청앞 집단발포는 법원의 최종기록과는 달리 시위대가 아닌 진압군 장갑차가 급히 퇴각하면서 넘어진 군인을 덮쳐 죽게 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99] 또한 진압 당시 죽은 군인들에 대해 “대부분이 동료들의 오인사격에 의해서 죽은 거예요. 두 번에 걸쳐서 오인사격이 있었는데, 광주보병학교와 11공수여단 사이에 5월 24일에 교전이 있었고, 또 한 번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31사단과 교전이 있어서 오인사격으로 죽었지 정작 시위대와 충돌해서 죽은 군인들은 굉장히 소수였어요”라고 증언했다.[100]
지난 1988년 광주 청문회 당시 진압군 부대 지휘관들은 암매장이 없었다고 진술한 것과 다르게, 진압에 참가했던 공수부대원에 의해 2001년 당시 공수부대원이 비무장민간인을사살, 암매장했다는 양심선언이 발표됐다.[101]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 김충근 기자는“젊은 여자,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계엄군의)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가격하는 신체부위가 여체의 특정부위에 집중됐을 때 그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되겠는가? 백주겁탈, 폭력만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등의 표현들이 떠올랐다.”고 회고했다.[102]
국제신문 김양우 기자는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도청진입이 끝난 직후 도청 안 마당에서 포로로 잡힌 시민군을 계엄군 병사가 때려죽이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고 쓰고 있다.[102]
심재훈 뉴욕타임스 서울 주재기자는 “광주항쟁이 없었다면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다. 광주는 세계 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을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증언을 했다.[103]
중앙일보 광주 주재기자 장재열는 5.18 당시 작성한 수첩에서 “대검으로 찌르고... 여자에게는 속옷만 입히고 마구 때리고 폭행. 집까지 쫓아가 폭행, 도망가는 시위대에 칼 던졌다”라고 당시 상황 회고했다.
5·18 민중항쟁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를 지낸 서청원은 9박 10일간 광주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취재한 경험을 바탕으로 〈5·18 광주항쟁 특파원 리포트〉를 공동 발간했다. 그는 “5·18 민중항쟁이 정치에 입문(민한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며 “당시 신문에 5·18 기사가 나가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당시 취재기자들과 함께 책을 발간했다”고 말했다.
[편집] 외신 언론 및 외신 기자
1980년 5월 25일 afp 통신은 “광주의 인상은 약탈과 방화와 난동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라고 전세계에 타전했다.[104]
프랑스의 언론사 르 몽드 지의 기자 필립 퐁스는 1980년 5월 27일의 아침의 광주는 죽음의 도시와 같았으며 그 때 당시 상황을 학살이라고 증언했다.[105]
일본의 마쓰나가 세이타로 요미우리 신문 홍콩 특파원은 “광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진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80년대 후반 민주화가 이뤄진 것은 대한민국 국민과 대한민국 지도자들 마음속에 광주항쟁 정신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항쟁은 필리핀 마르코스 정권의 붕괴와 중국 천안문 사건에도 영향을 주었다.”라고 평가했다.[106][107]
샘 제임슨 미국 ap통신 기자는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1980년 광주의 3일간 군대 만행으로 빚은 희생보다 더 큰 것은 없었다. 군대의 만행은 이내 7일 간의 광주 사태로 치달았다.”라고 보도하면서 “대한민국의 거대 신문들은 광주 소재 (주)한국화약 창고의 다이너마이트 탈취 같은 시위자들의 과격한 행동을 강조했고, 군대의 잔인한 행동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수년 동안 많은 남한인과 몇 명의 미국인은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을 들춰냈다. 미국은 사실상 비난 또는 적어도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라고 5.18을 왜곡한 대한민국의 거대 신문을 비판했다.[108]
블레들리 마틴 미국 볼티모어 선 서울 특파원은 “나는 지난 25년 동안의 기자생활 중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중국의 강청 등 4인방 재판, 그리고 인도의 인디라 간디 수상 암살 이후 폭동과 살인사건 등을 취재해 왔다. 그러나 나는 ‘광주’의 참상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건이 나의 기억 속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느냐고 누가 물어보면, 한 마디로 나는 ‘광주’라고 대답한다.”라고 증언한다 또 “광주항쟁 기간 동안 단 하루밖에 광주에 머물지 않았지만, 1980년 5월 26일 그날 하루만으로도 바로 죽음을 걸고 폭압에 맞서 투쟁했던 용감한 광주시민들의 모습이 나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광주야말로 나의 기자로서의 경력 중 가장 감동적인 경험을 제공해준 곳이었다.”라고 5.18을 높이 평가했다.[109][108]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한 의료관련 연구개발회사 이사인 데이비드 돌린거는 5.18 광주항쟁 당시 외신 기자들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며 “사후 유골이라도 광주에 묻고 싶다”고 밝혔다.[110]
미국의 프리랜서 기자 도널드 커크는 “광주 민주화 항쟁은 대한민국 사회가 겪었던 정치적인 사건의 전환점이기도 하다”고 말한 뒤 “이 사건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높이 평가했다.[111]
독일인 프리랜서 사진작가이자 저널리스트 마티아스 라이는 “나는 외국인지만 역사의 한복판에서 고통받았던 광주 시민을 만났을 때 뜨거운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며 “세계인들도 나처럼 5.18 역사를 배운다면 뜨거운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112]
한국전쟁 이후 서울 상주특파원으로 일한 최초의 서양 기자인 노먼 소프는 “광주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향한 길고 긴 투쟁의 일부분이다. 앞세대가 자유선거를 확립하고 민주주의를 꽃피우려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지금 젊은 세대가 배우고 진심으로 감사하길 바란다”며 “지금은 언론계에서 은퇴했지만 민주화운동 때 대한민국 정부의 많은 압력에도 저를 비롯한 많은 헌신적인 기자들이 외국 독자들에게 대한민국 상황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시민을 진압하던 군인들의 잔혹함이 시위를 촉발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외국 잡지나 신문을 대한민국에 들여오는 과정에서 군 관계자들이 배포 전 모든 자료를 검열했다. 광주에 대한 기사나 전두환을 비판하는 기사 등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가 있을 때는 배포 전 지면에서 빠졌다. 외신 기자들이 쓰는 기사도 감시의 대상이었다. 주거비자가 나오는 것도 몇 달씩 걸려 30일마다 출입국을 반복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113]
독일 제1공영방송 ard-ndr의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그 참상을 서방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또 그 해 9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형판결을 받자 항의표시로 “기로에 선 대한민국”이란 제목의 4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이 비참한 광경을 필름에 담았다. “내 생애에서 한번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베트남전쟁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할 때도 이렇듯 비참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114]
테리 앤더슨 ap 통신 기자 (당시 la타임스 일본총국장)은 5.18에 대해 “5·18은 사실상 군인들에 의한 폭동이었다. 놀라움과 분노로 가득찬 시민들 앞에서 시위대를 추격하며 곤봉으로 때리고, 최루탄은 물론 총까지 쏘았다. 공수부대원들은 상점과 시내버스 안까지 쫓아가서 젊은이들을 잡아 끌어냈다. 광주는 분노로 일어섰다.”라고 진술했다.[115][116]
미국 볼티모어선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1994년 월간 ‘샘이 깊은 물’에 기고한 글에서 윤상원의 외신 기자회견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독일 남부독일신문 기자인 히일셔는 “5.18 당시 부상자들이 너무 많아 부상자들을 수용할 병실이 부족했다”고 회고했다. 전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노먼 누트 타프 역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절박해 보였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117]
뉴욕타임스의 서울 특파원 헨리 스코트 스톡스는 “1415년 아쟁쿠르에서 있었던 육박전을 연상하게 한다”면서 “육군 병사들이 착검된 총을 가지고 인간을 도륙하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500년을 더듬을 수 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118]
[편집] 학계의 평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인류 역사에서 보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지. 무기가 수천 정이 풀렸는데 강도 사건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물자가 부족했지만 아무도 매점매석한 사람이 없었고. 그게 바로 대동세상이죠. 그때를 생각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어요.”라고 강연했다.[119]
조지 카치아피카스 미국 웬트워스공대 교수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미래 사회에 자유라는 빛을 던져준 사건’으로 “광주 민주화운동은 독재정권에서 민주화로 가는 역사의 지렛대였으며, 그 에너지는 전 세계에 강하게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120]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2005년 영국 bbc방송 인터넷판에 보도된 논평에서 “광주에서의 경험으로 한국인들은 독재로부터 탈출과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일을 연관짓게 됐다”는 견해를 밝혔다.[120]
에드워드 베이커 전 미국 하버드대 엔칭 연구소 부소장도 2005년 12월 김대중 도서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독재와 미국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태도를 바꾸는 대한민국 근대사의 전환점'으로 5.18을 기술하기도 했다.[120]
[편집] 인권, 시민운동가들의 평가
광주인권상 수상자인 태국의 시민운동가 겸 인권운동가 앙카나 닐라파이지트씨는 “힘 없는 학생과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이 주는 감동은 믿기지 않을 만큼이었다”며 “5.18과 이후 광주의 인권운동은 세계적으로 본받을 만한 사례”라고 밝혔다.[120]
2005년 수상자인 와르다 하피즈 인도네시아 도시빈민협의회 사무총장은 “5.18 이후 대한민국의 인권발전은 아시아 인권활동가의 표본이자 목표”라고 높이 평가했다.[120] 2003년 수상자인 단데니야 g. 자얀티 스리랑카 실종자기념회 대표는 “나에게 5.18은 인권투쟁을 위한 훌륭한 영감의 원천”이라고 치켜 세웠다.[120]
5.18기념재단에서 국제인턴으로 활동하고 있는 필리핀 인권운동가 페드로 라혼은 “5.18의 역사는 결코 잊혀지지 않고 많은 나라에 전파돼야 한다”며 “광주시민들은 자유를 쟁취한 정신을 마음 깊이 지키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자극할 수 있도록 새로운 도전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120]
바울 슈나이스 목사는 "광주는 깨어 있는 양심과 열린 눈으로 불의와 폭력에 저항하라는 경고인 동시에 격려이며, 폭력, 전쟁,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 함께 뭉쳤던 새 역사의 출발점이었다"며 "이런 광주에 대한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121]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아시아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면서 5.18의 정신과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122]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에도 김 추기경은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가슴아팠던 일은 광주의 5월”이라고 말하며 고통스러운 심경을 밝혀왔다. 그는 언젠가 한 언론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었을 때가 그때였다. 사태가 그대로 알려지지도 않고…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봤지만 먹혀들어가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은 것 같으니까…”라고 안타까웠던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123]
1984년 대한민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방문지는 광주였다. 교황은 경호를 맡은 청와대 경호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5.18의 상징 장소인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을 돌아 미사장소였던 광주 무등경기장으로 이동했다. 교황은 ‘용서’라는 주제의 미사를 통해 “광주시민과 같은 특별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은 용서가 어려울 수도 있다”며 광주시민들을 보듬었다.[124]
[편집] 관련 판결
전·노 두 전직 대통령 법적심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사회 각계 각층에서 불법적으로 집권한 신군부 인사를 고소·고발을 했다. 1995년 7월 검찰은 5.18 사건에 대해 전두환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국을 장악할 의도가 있었고 무고한 시민이 희생된 것이 확인됐지만,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내란죄·반란죄 여부를 따지지 않고 불기소 처분했다. 1995년 12월 헌법재판소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 할 수 있다”는 취지의 인용결정을 내렸다. 같은 달 검찰에 특별수사부가 설치돼 12.21 사건과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고, 국회에서 5·18 특별법이 제정해 12.12 사건, 5.18 사건 공소시효 정지 규정을 두었다. 5.18 사건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인 1996년 1월 23일, 검찰은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을 전격적으로 기소했다.
1997년 대법원은 두 전 대통령 및 다른 피의자들이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했다. 이에 따라 전두환은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 원, 노태우는 징역 17년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김대중 정권에 의해 징역형은 사면됐으나, 추징금은 현재까지 내고 있다.[125]
또한, 광주 민주화 운동의 관련자를 숨겨 준 천주교 신부에 대해 정당행위를 부정, 범인은닉죄로 처벌한 판례(1983년)가 있다. 이회창 대법관이 참여한 재판이며, 황인철 변호사 등이 변호한 사건이 있다.[126][127]
[편집] 5.18 사건 대법원 판결
1997년 대법원은 성공한 쿠데타의 가벌성에 대해 “피고인들의 정권장악을 통해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우리의 헌법질서하에서는 헌법에 의한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한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라고 분명하게 적시했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사실관계를 다음과 같이 확정지었다.[128]
피고인들이 국헌을 문란케 할 목적으로 시국수습 방안의 실행을 모의하고, 모의할 당시 그 실행에 대한 국민들의 큰 반발과 저항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해 ‘강력한 타격’의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도록 평소에 훈련된 공수부대 투입을 계획한 후, 이에 따라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진압봉이나 총개머리판으로 시위자들을 가격하는 등으로 시위자에게 부상을 입히고 도망하는 시위자를 점포나 건물 안까지 추격해 대량으로 연행하는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였으며, 이와같은 난폭한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분노한 시민들과의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함으로써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그후 일부 시민의 무장저항이 일어났으며, 나아가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귀중한 국민의 생명을 희생하여서라도 시급하게 재진입작전을 강행하지 아니하면 안될 상황이나 또는 광주시민들이 급박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있다고도 볼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위를 조속히 진압하여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아니하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계엄군에게 광주재진입작전을 강행하도록 함으로써 다수의 시민을 사망하게 하였다.[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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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만 해도 어마어마한 정보군요~~~
5.18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 하는 분들 적어도 사전적 의미는 읽고 말씀들을 하시는건지.....
그냥 보수 언론이나 카더라~~통신만 읽고 말씀 하시는 건지....
문명이 아니라면 사전검색만 해보세요~~
어설픈 지식으로 폭동으로 몰아세우시지 마시고~~
그거 아시죠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나기 전에 전국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는거~~
에휴 ~~~~이른바 보수를 지향하시는분들 해도해도 너무하시는거 아니신가?
이제는 사전적 의미도 바꿔버리실려고 그러시나??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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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북한이 우리 남한에게 행했던 도발들
58. 2. 15 KNA 납북사건:
부산 수영비행장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KNA(창랑호)가 평택 상공에서
무장 북한공작원들에 의해 납치돼 평양순안 공항에
강제착륙했다. 우리국회는 북만행을 규탄하는
메시지를 6.5참전 16개국에 보내는등
강력 항의하자 탑승자 26명 전원을 돌려보냈다.
67, 1, 19 당포함 침몰사건:
동해 북쪽
해상에서 해군함대 제1전단 소속 당포함이
북한군의 해안포를 맞고 격침된 사건이다.
당포함은 당시 북방한계선 근방에서
명태잡이를 하던 우리 어선을 보호해 남하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이었다.
68, 1. 21 청와대 습격 기도사건:
북한은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124군부대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 31명을 남파하였으나
대부분 섬멸(사살 2 명)되고, 김신조 1명생포
1·21사태 [一二一事態]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民族保衛省) 정찰국 소속의 무장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하여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하였던 사건. 68, 1. 23 미 푸에블로호납치사건: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동해(공해)에서
납치, 12월 23일 승무원 82명과 사체 1구
송환, 선체는 억류
68, 1. 25 미군부대 초소 피습사건:
미군부대 전방 초소근무자 5명이
무장공비 15명 가량으로부터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하였음. 피해(전사 2명, 부상 8명)
68, 6. 17 DMZ 무장공비 사살사건:
연천 북방 DMZ에서 잠복근무중
침투하는 무장공비를 발견, 교전끝에
1명 사살, 잔당 도주
68, 6. 19 DMZ 무장공비사살사건:
철원 북방 D M Z에 무장공비 2개조
7명이 침투한 것을 교전 끝에 모두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4명)
68, 7. 10 전방사단 CP요원 피습사건:
전방사단 CP요원이 잠복근무지로 가던중
무장공비의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하였으나
공비는 도주. 피해(부상 2명)
68, 7. 23 DMZ 투입병력 피습사건:
아군 병력 8명이 DMZ 투입을 위해
진입 중, 공비로부터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4명, 부상 3명)
68, 7. 29 남해 허사도 무장공비 출현사건:
전남 목포시 허사도에 무장공비 2명이 출현,
민간인 1명 살해하고 도주.
68, 7. 31 연천 백학 공비사살 사건:
아군 G P요원 4명이 관망대로 가던중
무장공비 8명과 조우, 교전 끝에 1명
사살 피해(전사 2명, 부상 1명)
68, 8. 3 전방사단 무장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병력이 무장공비와 조우
교전 끝에 2명 사살, 2명 부상 입혔음.
피해(전사 1명, 부상 2명)
68, 8. 4 DMZ GP병력 피습사건:
아군병력 6명이 GP로부터 종격실로
연한 고지로 진입중, 공비로부터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 피해(부상 1명)
68, 9. 4 DMZ GP병력 피습사건:
아군 G P병력 7명이 약 70m 떨어져
있는 우물에서 식수운반중,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2명, 부상 2명)
68, 9. 4 DMZ 작업병력 피습사건:
아군 병력이 크레모아 설치작업을 위해
진입중,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2명, 부상 2명)
68, 9. 5 G P병력 피습 및 납치사건:
아군 G P병력이 잠복근무를 마치고,
철수중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1명, 2명 납치)
68, 9. 5 무장공비와 교전사건:
잠복근무중이던 병력이 공비 3명을 발견,
사격을 가하자 공비도 자동화기로
응사 하며, 수류탄 10발을 투척하고
도주. 피해 (전사 1명)
68, 9. 19 GOP 순찰병력 피습 사건:
GOP 병력이 철책선 순찰중 공비의
수류탄 공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1명)
68, 9. 21 GOP 잠복호 피습사건:
GOP 잠복 근무자가 공비의 기습공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1명, 부상 2명)
68, 10. 16 DMZ 투입시 피습사건:
아군병력이 DMZ로 투입하던 중,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1명)
68, 10. 30 ~11. 2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북한 124군부대 무장공비 126명을
침투시 켰으나 109명 사살,
7명 생포하였음.
피해(전사 38명, 부상 64명,
민간인 피살 23명)
68, 10. 31 전방사단 G P병력
피습 사건: 아군 GP 병력이
수색정찰중,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5명, 부상 4명)
68, 11. 1 서산 무장간첩 사살사건:
충남 서산 성연면 오사리에
무장괴한 2명이 출현하였다는
신고로 작전을 전개 무장간첩
2명 사살. 피해(전사 1명)
68, 11. 2 전방사단 G P
병력 피습사건: 아군 G P병력이
철책선 순찰중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1명, 부상 1명)
68, 11. 8 전방사단 .
피해(전사 2명, 부상 8명)
68, 12. 9 이승복사건: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
이석우씨 집에 무장공비 5명 침입,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한
이승복 형제 3명과 이씨 부인
주씨를 무참히 살해.
공비들에게 가슴을 관통당하는
등 36군데나 칼로 찔린 이승복군의친형만 겨우 목숨을 건졌다.
1968년 10월 30일 3차에 걸쳐「울진·삼척지구」해상으로 침투한120명의 무장공비 잔당 5명이 우리의 군·경·예비군의 추격을 피해 북으로 도주하다 산 속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다급한 나머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 계방산 중턱 이승복군의 집에 침입하여 공산주의를 선전하며 그들에게 동조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승복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항거하자 순식간에 가족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가족 중 이승복군의 친형인 학관(당시 15세)은 공비에게 36곳이나 찔리는 중상을 입고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공비의 만행을 이웃에 알렸다.69, 3. 15 미군부대 병력
피격사건: 미군 병력이 GP 앞의
군사분계선 작업을위해 진입중
공비의 총격을 받았음.
피해(부상 3명) ※ 이틀후 후송하던
헬기추락으로 7명 사망
69, 3. 16 주문진 공비 침투사건:
무장공비 8명이 주문진에 침투,
보안부대원을 사칭, 여인숙 투숙객
검문하고, 수상 파출소에서
경찰관을 납치하려다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1명)
69, 5. 14 전방사단 공비
사살 사건: 연대수색중대 병력이
경계근무중 침투공비 1명 발견하고 사살
69, 5. 15 미군부대 병력 피습사건:
미군 병력이 철책선 점검중 공비의
사격을 받고, 응사하자 도주하였음.
피해(부상 2명)
69, 5. 20 미군부대공비 사살사건:
미군 잠복근무자(카츄사)가 침투하는
공비 3명을 발견, 일제사격을 가하자
응사하며 도주. 수색결과 공비
시체 1구와 기관단총 등
다수의 유기물 노획.
69, 5. 20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잠복조가 침투하는
공비를 발견 집중사격으로 2명을
사살하고 기관 단총 등 다수의
장비 노획. 피해(부상 2명)
69, 5. 23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야간 경계근무자가 3초소 전방에서
공비를 발견하고, 사격으로 1명 사살.
피해(전사 1명)
69, 5. 25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아군 병력이 순찰중 공비로부터
사격을 받고, 즉시 응사하여
공비 3명 사살. 피해(부상 1명)
69, 6. 14 부안 침투간첩 사살사건:
전북 부안 하서면 주민이 해안가에서
고무보트와 배낭 2개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 수색작전 끝에
간첩 3명 사살. 피해(경찰관 4명 부상)
69, 7. 24 GOP 부대 공비 사살사건:
철책 경계병이 약 15m 전방에서
침투하는 공비를 발견,
교전끝에 3명 사살
69, 8. 23 GOP부대 간첩
사살 및 검거사건:
잠복호 근무자가 철책선 남방
5 m지점 능선으로 침투하는
간첩을 발견 교전 끝에 1명을
사살하였고, 9월 8일 경기도
가평에서 조장 김은환을 검거.
피해(전사 3명, 부상 5명)
69, 10. 12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병력이
OP 점령을 위해 전진중 공비의
수류탄 공격을 받고, 즉각 응사하여
공비 3명을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3명)
69, 10. 14 DMZ 침투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잠복호에서 8명이
근무중 전방 10m 지점에서
침투하는 공비를 발견 1명을 사살.
피해(경상 1명)
69. 12. 11 KAL기 납북사건:
KAL(YS-11)기는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 등 51명을 태우고
강릉을 출발해 서울로 가던 중
대관령 상공에서 납치돼 원산으로
기수를 돌렸다. 북한 방송은
창랑호 피랍 때처럼 "자진
입북했다"고 보도했다.
납치 66일 만인 1970년 2월 14일
탑승자 중 승객 39명만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냈으나 승무원·
승객 12명(납치범 포함)의 송환은
지금까지 거부하고 있다.
70, 3. 8 영덕해안 간첩 사살사건:
해안초소 근무병이 해안순찰중,
동력보트와 적탄통을 발견,
수색작전 끝에 해병대 병력이 간첩 2명 사살.
70, 3. 13 DMZ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병력이 GP 동쪽 300m
지점에서 공비 3명을 발견,
교전 끝에 2명 사살. 피해(부상 2명)
70, 4. 8 금촌 침투간첩 사살사건:
경기 파주 금촌 거주 농민이 은신중인
간첩 3명을 발견하고 신고, 군·경 합동작전
으로 전원 사살.
70, 4. 29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사단수색중대 매복조가 100m 전방에서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끝에 2명사살.
피해(부상 2명)
70, 4. 29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매복조가 공비 3명을 발견,
교전 끝에 전원 사살
70, 5. 3 안면도 침투간첩 사살사건:
검거간첩을 역이용, 안면도에서
접선공작을 실시 침투한 간첩 3명을 사살.
70, 6. 13 전방사단 공비사살사건:
연대 잠복초소 근무병이 우측방
개울을 따라 침투하는 공비 2명을 사살
70, 6. 15 미군부대 공비 사살사건:
장단반도 거곡리 제1초소에서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 끝에 1명 사살
70, 6. 18 전방사단 공비 출현사건:
연천군 초성리에서 아군 병력이 잠복근무중
공비 1명이 출현, 권총으로 사격을 가하여
부상을 입히고 도주.
70, 6. 22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
북한 간첩이 국립묘지 참배요인을
살해하기 위해 현충문에 폭발물을
장치하다가 실수로 간첩 1명은 폭사하였고,
잔당은 도주.
70, 6. 28 영흥도 간첩선 격침사건:
아군초소 경비정이 영흥도 북방에서
간첩선을 발견, 합동작전으로
격침시키고 내륙으로 상륙한 공비 6명 사살
70 6. 30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까치봉 서남방 철책선 부근에서
공비를 발견, 교전끝에 1명 사살 피해(전사 2명)
70, 7. 5 김포 계양산 간첩 사살사건:
경기 김포 고촌면 뒷산에서 학생이
거동 수상자를 발견 신고하여,
출동한 군 병력이 3명 사살.
70, 7. 22 영덕 해안 간첩선 격침사건:
경북 영덕 해안초소 앞 50m 해상에서
간첩선을 발견, 사격하자 응사하며 도주,
합동작전으로 격침. 17명 사살 추정
70, 9. 19 영종도 침투 간첩 사살사건:
영종도 중산리 거주 학생이 괴한 2명을
발견하고, 군·경 합동작전으로 간첩 2명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2명)
70, 9. 22 GOP부대 공비 사살사건:
아군 잠복초소 전방 철책선에서 공비가
선제공격하여 교전끝에 3명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1명)
70, 9. 26 부산 가덕도 침투간첩:
사살사건 부산 가덕중학교 학생이
산에서 괴한 2명을 발견, 출동한 경찰·
예비군이 2명 사살. 피해(전사 2명)
70, 10. 6 임진강 수중침투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가 임진강변을
수색중 공비 3명을 발견, 교전끝에 모두 사살.
피해(전사 2명, 부상 6명)
70, 10. 10 거진 간첩선 격침사건:
강원도 거진 북방에서 해군함정이
간첩선을 발견, 해·공군 합동작전으로
휴전선 남방 5마일 해상에서 격침,
4명 사살 추정
70, 10. 11 해남 침투간첩 사살사건:
전남 해남 화산면 거주 박양진 집에
거동수상자 1명 출현, 박씨의 처가 신고,
경찰이 사살
70, 10. 14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가 박달봉 정상 10m 부근에서
공비 2명을 발견, 사살
70 10. 18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GOP에서 소대장 외 1명이 철책선 점검 중
공비 3명을 발견, 교전 끝에 2명 사살
70, 10. 22 GOP 사단지역 간첩 복귀사건:
철책선 순찰병이 이상한 소음을 청취후
수하시 총격을 받고 교전, 수색결과 철책이
절단되어 있어 간첩의 복귀로 판단하였음.
피해(전사 1명, 부상 1명)
70, 10. 22 전방 사단지역 공비 침투사건:
백석산 동북방 GP 외곽 철책부근에서 소음을
청취하고, 접근하다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후
확인한 결과 철책 2개소 절단 및 도주흔적 발견.
피해(전사 1명, 부상 1명)
70, 10. 24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매복조가 향로봉 서북방 8㎞
지점에서 공비 3명을 발견 교전끝에 1명 사살.
피해(전사 2명)
70, 11. 7 인천지역 간첩 생포 및 사살사건:
인천 율도 발전소 예비군 초병이 해안에서
침투하는 괴한을 발견하고 수하하자,
초병을 살해하고 도주. 출동한 군 병력이
1명 사살, 1명 생포. 피해(전사 2명, 부상 2명)
71, 6. 16 전방사단 침투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병력이 철원군 백마고지
서남방에서 매복근무 중, 20m 전방에서
접근하는 공비 3명을 발견 교전 끝에 1명 사살,
잔당은 도주.
71, 6. 18 석모도 침투 공비
사살 및 생포사건: 경찰이 강화 석모도에서
북한장비를 발견, 수색중 공비 3명을 발견,
교전 끝에 2명 사살하고, 1명 생포.
피해(부상 1명)
71 6. 30 임진강 침투 공비 사살사건:
사단수색중대 병력이 임진강변에서 잠복
근무중 공비 3명으로부터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 끝에 2명 사살, 1명 자폭.
피해(전사 4명, 부상 12명, 장갑차 1대 전소)
71, 7. 1 GOP부대 산병호
침투공비사살사건:아군 병력이 산병호
경계근무중 수중철책선 하단부를 굴토하고
침투하는 공비 3명을 발견, 2명 사살
잔당 도주.
71, 8. 16 DMZ 공비사살사건:
아군 병력이 DMZ 수색중 공비 5명을 발견,
교전 끝에 전원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2명)
71, 8. 19 군단 하교대 공비 출현사건:
군단 하교대 부사관 후보생이 보초근무중
괴한 2명을 발견하고 사격을 가하자,
공비는 도주하고 기관단총, 피묻은
붕대,배낭 등을 노획
71, 8. 20 강화도 침투안내원 사살사건:
강화군 길상면 거주 민간인이 괴한 2명을
발견하고 신고. 수색작전끝에 안내원
2명사살. 피해(전사 2명)
71, 8. 21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아군 병력이 매복근무중 괴한 3명을 발견,
교전끝에 공비 3명 사살. 피해(부상 1명)
71, 8. 27 임진강 수중침투 간첩 사살사건:
사단 경계병이 임진강 해안에서 괴물체
4개를 발견, 수색작전을 전개한 군
기동타격대가 간첩 4명 사살.
피해(전사 1명,부상 1명)
71, 9. 13 월성 해안 침투간첩
사살사건: 해병대 병력이 경북 월성 해안에서
공비3명을 발견, 교전 끝에 2명 사살.
피해(경상 2명)
71, 9. 18 해병여단 공비 사살사건:
김포군 양촌면에서 민간인이 괴한 4명을
발견 신고, 출동한 해병과 교전 끝에 3명 사살.
피해(전사 9명, 부상 20명)
71, 10. 25 DMZ 침투공비사살사건:
DMZ 매복 근무자가 철책선 북방 50m
지점에서 공비를 발견, 교전끝에 2명 사살
71, 10. 30 전남 소허사도 간첩 사살
및간첩선 노획사건: 전남 소허사도에
괴선박 1척이 출현하였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산으로 도주하는
간첩 4명을 발견, 교전 끝에 전원 사살하고
유기한 간첩선 나포. 피해(전사 1명)
73, 4. 17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병력이 매복근무중
공비 3명이 침투하는 것을 발견,
교전 끝에 2명은 사살, 잔당은 도주.
73, 5. 5 완도 침투간첩 사살사건:
완도 거주 주민 4명이 괴한 2명을 발견하고
검거하려다 권총에 맞고 부상,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 1명 사살,
1명 행방불명
74, 4. 2 리비교 공비침투 및
복귀사건: 대대 후문 보초병이 도로에서
괴한 3명을 발견하고 수하하자“1 1중대
병력이다”라고 하여 암구호도
확인하지 않고 통과시켜 북상 도주
74, 5. 20 추자도 간첩 사살사건:
간첩 2명이 북제주군 추자면 대서리
본가에 출현한 것을 조카가 신고,
출동한 군·경이 1명 사살, 잔당은 도주.
피해(전사 3명)
74, 7. 20 어청도 근해간첩선 격침사건:
해군 함정이 격렬비열도 25마일 해상에서
의아선박을 발견, 추격하자 사격하며
도주함으로 집중사격으로 격침.
간첩사살 7~8명 추정. 피해(경상 3명)
74.8. 15 육영수 영부인 피살사건:
8.15 경축행사때 재일 한국인 문세광의
저격에 박대통령은 무사했으나
육영수 여사는 목숨을 잃었다.
8·15대통령저격사건 [八一五大統領狙擊事件] 요약 1974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광복 제29주년 기념식에서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文世光)이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에게 권총을 발사한 사건.
오전 10시 23분, 광복절 경축사를 낭독하던 대통령을 향하여 청중석 뒤에서 문세광이 뛰어나와 권총을 발사하였다.
다행히 총탄이 빗나가 대통령은 연설대 뒤에 몸을 피하여 무사하였으나, 이어 발사한 제2탄이 단상에 앉아 있던 대통령 부인 육영수(陸英修)의 머리에 명중하였다. 범인은 계속 2발을 발사, 합창단의 한 여학생이 유탄에 맞아 절명하였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육영수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급송되어 5시간 이상의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오후 7시 사망하였다.
75, 4. 27 동래 침투간첩 검거사건:
부산시 동래구 석대동 거주 민간인이 산에서
거동 수상자 2명을 발견 신고, 출동한
군·경은 간첩 1명 체포, 5월 3일 간첩 추가 검거
75, 6. 28 광주 침투공비 사살사건:
광주시 서구 동운동 뒷산에서 괴한 2명
발견하여 신고, 군·경은 추격 끝에 1명 사살,
1명 도주, 8월 1일 전북 완주에서 사살
75, 9. 11 고창 침투공비 사살사건:
전경대 해안초소 경계병이 순찰중
괴한 2명으로부터 사격을 받고 교전, 1명 사살,
1명 도주 피해(전사 3명, 부상 2명)
76, 6. 19 GOP부대 공비 사살사건:
GOP 근무자가 북한강변 철책선 부근에 서
공비를 발견, 교전 끝에 3명 사살.
피해(전사 4명, 부상 6명)
76, 7. 3 완도 공비 침투사건:
전남 완도군 금일읍 화목리 거주
주민 3명이 약초 채취차 구도(무인도)로
건너간 후, 1명은 공비의 권총에 맞아
살해되고, 2명은 후일 생환.
76, 8. 18 도끼만행 사건:
휴전선에서 인민군이 도끼로 미군장병 2명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때는 한미군 합동으로 전쟁불사 위협으로
김일성의 사과를 받아냈다.
8·18판문점도끼만행사건 요약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에게 도끼로 살해당한 사건.
8월 18일 오전 10시경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4명,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11명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국제연합군측 제3초소 부근에서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는 한국인 노무자 5명의 작업을 지휘 ·경호하고 있었다.
이때 북한군 장교 2명과 수십 명의 사병이 나타나 작업중지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한국측 경비병이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하자 갑자기 수십 명의 북한군 사병들이 트럭을 타고 달려와서 도끼와 몽둥이 등을 휘두르며 폭행,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하고 나머지 9명에게는 중 ·경상을 입힌 뒤 사라졌다.
77, 5. 3 GOP부대 공비 복귀사건:
초병이 철책선 점검중 공비의 기습사격
으로 전사, 수색결과 철책절단 및 복귀흔적 발견
78, 10. 5 GOP부대 공비 강습복귀사건:
병사 4명이 전역 및 휴가신고 차 연대본부로
가던중 공비의 기습사격으로 3명이 사망하고,
생존자 신고로 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철책을 뚫고 북상 도주.
78, 11. 4 광천 침투공비 민간인 살해
도주사건: 충남 광천 말봉산에서 나무하러
갔던 여인 2명이 공비에게 살해되고,
도주하면서 주민 3명을 추가 살해하고 도주.
79, 10. 5 GOP부대 공비 사살사건:
GOP 병력이 철책선 순찰중 철책절단 및
침투흔적 발견, 수색작전을 전개하여
대암산 서남방 2㎞지점에서 공비 1명 사살.
80, 3. 23 한강 수중침투 공비사살 사건:
초병이 경기 고양 법곳리 한강변으로
침투하는 공비 3명을 발견, 전원 사살
80, 3. 27 DMZ 침투공비 사살사건:
아군 병력이 DMZ 수색중 공비 3명을 발견,
교전 끝에 1명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1명)
80, 6. 20 보령해안 간첩선 격침사건:
해안 초병이 괴선박을 발견 사격하자
응사하며 도주, 해·공군 합동작전으로
격침후 간첩 김광현 생포 피해(부상 2명)
80, 11. 3 전남 횡간도 침투간첩 사살사건:
전남 완도군 횡간도 거주 어민이 괴한 3명을
발견하고 신고, 군·경 합동작전으로 전원 사살.
피해(사망 1명, 부상 6명)
80, 12. 1 경남 남해침투 간첩선격침사건:
레이더가 남해 목도 남방 7㎞ 해상에서
괴선박 포착, 육·해·공군 합동작전으로
간첩선 격침, 9명 사살
피해(전사 3명, 부상 3명)
81, 6. 10~6. 21 임진강 수중 침투
공비 복귀사건: 철책선 경계병력이
임진강에서 배낭을 습득 조사한 바,
무장공비 3명이 6월 10일 임진강으로 침투,
구파발 지역에서 군사시설 촬영후,
6월 21일 복귀하다 분실한 배낭으로 확인.
81, 6. 29 필승교 수중 침투
공비 사살사건: 필승교 경계병이
다리 밑으로 떠내려가 는 물체를 발견하고,
사격하였으나 수중 동물로 오판,
그후 공비 유기물이 발견되어
작전 끝에 논두렁에 은신중인
공비 1명을 사살. 피해(부상 1명)
82, 5. 15 해안 침투공비 사살사건:
해안초소병이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지경리 해안으로 접근하는
괴한 2명을 발견, 1명 사살, 잔당은 도주.
83, 6. 19 일월교 침투공비 사살사건:
초병이 파주군 문산읍 임월교
다리 밑으로 침투하는 공비 3명을 발견,
집중사격으로 전원사살
83, 8. 5 월성해안 침투 간첩 사살사건:
해병대 병력이 경북 월성군 양남 수렵리에서
침투하는 괴한을 발견, 해·공군
합동작전으로 5명 사살. 피해(해경정 1척 침몰)
83, 8. 13 독도근해간첩선격침사건:
독도 근해를 초계중이던 강원함이
남하하는 의아선박을 발견,
정선을 명했으나 도주, 함상헬기가 출동 격침,
19명 사살 추정
83. 10. 9 아웅산 테러사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서남아·대양주 6개국 공식
순방 첫 방문국인 버마(현 미얀마)의 아웅산 묘소에서
일어난 강력한 폭발 사건으로 대통령의 공식·비공식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아웅산묘소폭파암살사건 1983년 10월 9일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 있는 아웅산묘소에서 한국의 외교사절 다수가 북한 테러분자의 폭파암살로 사상(死傷)한 사건. 이 날 대통령 전두환의 서남아 ·대양주 순방의 첫 방문지인 이곳에서 대통령의 아웅산묘소 참배행사를 위하여 미리 대기중이던 부총리 서석준 이하 여러 정부요인, 취재차 수행했던 기자 등 17명이 북한 테러분자가 장치한 폭발물의 폭파로 사망하고, 합참의장 이기백 등 13명이 중경상을 입는, 세계 외교사상 유례없는 일대 참변이 일어났다.
83, 12. 3 부산 다대포 침투간첩
생포사건: 해안 초병이 부산 다대포 해안
매복근무 중 침투하는 간첩 2명을 발견,
격투 끝에 생포하고, 해·공군 합동작전으로
간첩선 격침. 3명 사살
84, 9. 24 대구 무장간첩 출현사건:
대구시 동구 신암2동에 무장간첩이 출현,
미용실 여주인과 식당 종업원 등 2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부상을 입힌 후 자살.
84, 10. 19 부산 수영만 간첩선 격침사건:
해안레이더가 수영만 동쪽 1마일
해상에서 의아 선박을 포착,
해군 PK편대가 출동 교전 끝에
격침. 5명 사살 추정
87.11. 29 KAL858기 폭파사건:
주범 김현희로 하여금 중동 건설근로자들이
많이 탑승한 KAL기에 시한폭탄을 장치해
폭팔케한 사건
KAL기폭파사건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근해에서 북한공작원에 의하여 공중폭파된 사건.
사고기는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출발하여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에 기착한 후, 다시 방콕에 기착하기 위하여 비행하던 중이었으며, 기내에는 중동에서 귀국하던 해외근로자가 대부분인 한국승객 93명과 외국승객 2명, 그리고 승무원 20명 등 115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 여객기는 29일 오후 2시경 미얀마의 벵골만 상공에서의 무선보고를 끝으로 소식이 끊겼다. 사건발생 15일 만인 12월 13일 양곤 동남쪽 해상에서 공기주입펌프 등이 파손된 KAL기 구명보트 등 부유물 7점이 발견됨으로써 비행 중 폭발에 의하여 추락하였음이 확인되었다.
92, 5. 22 DMZ 침투공비 사살사건:
무장공비 3명이 아 GP 남방 800m 지점에
침투하는 것을 사전에 발견하고, 전원 사살
95, 10. 17 임진강변 무장 공비 사살사건:
GOP 경계병이 전방 20m 절벽 아래에서
공비 1명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고 사살.
95, 10. 24 부여 무장간첩 사살 및
생포사건: 충남 부여군 석성면 정각사
입구에 무장 간첩 2명이 출현,
교전 끝에 1명을 사살하고, 1명 생포.
피해(전사 2명, 부상 1명)
96, 9. 17 강릉 해안 잠수함 침투사건:
강릉시 강동면 고속도로 상에서
택시 기사가 암초에 좌초된 잠수함을
발견하고 신고 군·경 합동작전으로
공비 25명 소탕, 잠수함 노획.
피해(전사 11명, 부상 41명)
98, 6. 22 속초해안 잠수정 침투사건:
속초 동남방 1 1 . 5마일 해상에서
어민이 어망에 걸린 잠수정을 발견하고
신고,군·경 합동작전으로 잠수정 예인,
자폭시체 9구 인양, 조사결과 무장간첩으로 확인.
98, 12. 18 남해안 침투 간첩선 격침사건:
해안 레이더에서 간첩선 포착, 해·공군
합동작전을 전개, 욕지도 남방 5 6마일
해상에서 격침. 반잠수정 1척, 공작원 1명
포함 사체 6구 인양, 간첩장비 1,209점 노획
99, 6.15 연평해전: 북한 함정 수십척이
NLL을 넘어 우리 해군고속정에 포격을
가해오자 우리 해군 2함대 박정성 사령관이
발포 명령하여 북한함정 2척 침몰 2척 대파
북한해군 수십명 전사하고 퇴각.
훈장을 받아야할 박제독은 북한의 요청에
의해 보직해임 발령을 받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음.
제1연평해전 [第一延坪海戰]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한국 영해를 침범한 북한 경비정을 한국 해군의 고속정이 선체를 충돌시키는 방법으로 밀어내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태였다.
북한측 경비정은 1999년 6월 6일부터 매일 북방한계선을 넘어와 몇 시간씩 한국 영해에 머물면서 반응을 살피고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9일째 되는 날인 6월 15일 80t급 북한 경비정 2척이 꽃게잡이 어선 20척과 함께 NLL 남쪽 2㎞ 해역까지 내려왔으며, 이어서 420t급 2척이 어뢰정 3척의 호위를 받으며 남하하였다.
이에 한국 해군은 고속정과 초계함 10여 척을 동원하여 오전 9시 7분과 9시 20분 두 차례에 걸쳐 선체를 충돌시키는 밀어내기식 공격을 감행하였다. 충돌공격을 받은 북한 경비정은 소총으로 선제 사격을 하다가 25㎜ 기관포를 발사하였으며, 북한 어뢰정 3척도 공격에 가담하였다.
한국 해군은 초계함의 76㎜ 함포와 고속정의 40㎜ 기관포 등으로 응사하여 북한 어뢰정과 경비정을 명중시켰다. 이 교전에서 북한의 어뢰정 1척이 침몰하였고, 420t급 경비정 1척이 대파되었으며, 나머지 경비정 4척도 선체 등이 파손된 채 퇴각하였다. 북한측의 인명 피해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20여 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고속정과 초계함 등 2척도 북한 어뢰정이 발사한 27㎜ 함포를 맞아 선체의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전사자는 없으며, 장병 7명이 부상당해 국군수도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다.
교전이 있은 지 1시간이 채 안 된 6월 15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열린 유엔군사령부와 북한군 사이의 장성급 회담에서 서해상 교전문제가 거론되었지만, 양측의 입장 차이만 드러낸 채 아무런 성과는 없었다. 이 회담에서 북한측은 한국 쪽이 먼저 도발을 해왔다는 억지 주장을 펴는가 하면, 더 나아가 북방한계선과 관련해서도 다른 주장을 들고 나왔다. 즉, 북방한계선이 국제법상 북한에서 12해리 이내이기 때문에 함정이 출동한 지역은 북한 영해라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수십 년 동안 남북한 양쪽 모두가 한반도 동서 해상의 실질적인 경계선으로 인정하여 그 동안 한국의 관할구역으로 인식되어 왔던 북방한계선을 무시하고, 12해리 영해를 주장함으로써 영해문제를 다시금 부각시키려는 북한의 전술적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02, 6. 29 서해교전: 연평해전의 복수극으로
여겨지는 북한함정의 기습포격 공격에
우리해군 전사자 6명 부상자 수십명 발생.
선제공격을 못하게하고 선미추돌(船尾追突)
대응만 하라는 김대중대통령 지시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전투였음.
제2연평해전 [第二延坪海戰] 2002년 6월 29일 오전 서해 연평도 서쪽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의 선제 기습 포격으로 시작된 남북 함정 사이의 해전. 제17회 월드컵축구대회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 25분 무렵, 서해 북방한계선(NLL) 남쪽 3마일,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에서 일어났다. 1999년 6월 15일 오전에 발생한 제1연평해전이 벌어진 지 3년 만에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 남북한 함정 사이의 해전이다. '서해교전'으로 불리다가 2008년 4월 '제2연평해전'으로 격상되었다.
교전에 앞서 북방한계선 북한측 해상에서 북한의 꽃게잡이 어선을 경계하던 북한 경비정 2척이 남한측 북방한계선을 침범하면서 계속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한국 해군의 고속정 4척이 즉각 대응에 나서 초계와 동시에 퇴거 경고 방송을 하는 한편, 교전 대비태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징후도 없이 북한 경비정이 갑자기 선제 기습포격을 가해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의 조타실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이때부터 양측 함정 사이에 교전이 시작되고, 곧바로 인근 해역에 있던 해군 고속정과 초계정들이 교전에 합류하였다. 이어 10시 43분경 북한 경비정 1척에서 화염이 발생하자 나머지 1척과 함께 퇴각하기 시작해, 10시 50분경 북방한계선을 넘어 북상함으로써 교전은 25분 만에 끝이 났다.
이 교전으로 한국 해군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6명이 전사하였으며, 19명이 부상하였다.
또 해군 고속정 1척이 침몰하였는데, 북한 측 피해상황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교전 직후 국방부는 '북한의 행위가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며, 묵과할 수 없는 무력도발'로 규정하고 북한측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강하게 요구하였으나, 북한 쪽의 답변은 듣지 못하였다.
07, 7. 12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주부를 금지구역에
들어왔다고 총격을 가해 사살한 사건
09. 11. 10: 대청도 사건: 북한 해군 선제공격에
집중포화로 적함을 반파시켜 퇴각시킨 사건
10. 3 26: 천안함 초계함 격침사건:
지난해 대청도 사건의 보복사건으로 추정되는 사건으로서
북한 어뢰나 기뢰공격에 천안함이 두 동강난 사건
2010년 3월 26일에 백령도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천안함이 침몰한 사건이다. 사건 발생 직후 출동한 인천해양경찰서 소속 해안경비정에 의해 천안함에 탑승하고 있던 승조원 104명 중 58명이 구조되었으며 나머지 46명은 실종되었다. 이후 실종자 수색과 선체 인양이 진행되면서 2010년 4월 24일 17시 현재 실종자 46명 중 40명이 사망자로 확인되었으며 6명이 실종자로 남아 있다.
사고 원인에 대해서도 초기에는 어뢰설, 기뢰설, 내부폭발설, 피로파괴설, 좌초설 등 다양했으나 조사가 진행되면서 좁혀졌다. 정부와 민군 합동조사단은 어뢰에 의한 피격설을 제기하고 있으며 좌초설도 제기되었다.
그리고..... 2010. 11. 23.
단홍비작성일
2011-07-09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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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북한의 대남 도발일지
58. 2. 15 KNA 납북사건: 부산 수영비행장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KNA(창랑호)가 평택 상공에서 무장 북한공작원들에 의해 납치돼 평양순안 공항에 강제착륙했다. 우리국회는 북만행을 규탄하는 메시지를 6.5참전 16개국에 보내는등 강력 항의하자 탑승자 26명 전원을 돌려보냈다.
67, 1, 19 당포함 침몰사건: 동해 북쪽 해상에서 해군함대 제1전단 소속 당포함이 북한군의 해안포를 맞고 격침된 사건이다. 당포함은 당시 북방한계선 근방에서 명태잡이를 하던 우리 어선을 보호해 남하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이었다.
68, 1. 21 청와대 습격 기도사건: 북한은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124군부대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 31명을 남파하였으나 대부분 섬멸(사살 2 명)되고, 김신조 1명생포
68, 1. 23 미 푸에블로호납치사건: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동해(공해)에서 납치, 12월 23일 승무원 82명과 사체 1구 송환, 선체는 억류
68, 1. 25 미군부대 초소 피습사건: 미군부대 전방 초소근무자 5명이 무장공비 15명 가량으로부터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하였음. 피해(전사 2명, 부상 8명)
68, 6. 17 DMZ 무장공비 사살사건: 연천 북방 DMZ에서 잠복근무중 침투하는 무장공비를 발견, 교전끝에 1명 사살, 잔당 도주
68, 6. 19 DMZ 무장공비사살사건: 철원 북방 D M Z에 무장공비 2개조 7명이 침투한 것을 교전 끝에 모두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4명)
68, 7. 10 전방사단 CP요원 피습사건: 전방사단 CP요원이 잠복근무지로 가던중 무장공비의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하였으나 공비는 도주. 피해(부상 2명)
68, 7. 23 DMZ 투입병력 피습사건: 아군 병력 8명이 DMZ 투입을 위해 진입 중, 공비로부터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4명, 부상 3명)
68, 7. 29 남해 허사도 무장공비 출현사건: 전남 목포시 허사도에 무장공비 2명이 출현, 민간인 1명 살해하고 도주.
68, 7. 31 연천 백학 공비사살 사건: 아군 G P요원 4명이 관망대로 가던중 무장공비 8명과 조우, 교전 끝에 1명 사살 피해(전사 2명, 부상 1명)
68, 8. 3 전방사단 무장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병력이 무장공비와 조우 교전 끝에 2명 사살, 2명 부상 입혔음. 피해(전사 1명, 부상 2명)
68, 8. 4 DMZ GP병력 피습사건: 아군병력 6명이 GP로부터 종격실로 연한 고지로 진입중, 공비로부터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 피해(부상 1명)
68, 9. 4 DMZ GP병력 피습사건: 아군 G P병력 7명이 약 70m 떨어져 있는 우물에서 식수운반중,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2명, 부상 2명)
68, 9. 4 DMZ 작업병력 피습사건: 아군 병력이 크레모아 설치작업을 위해 진입중,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2명, 부상 2명)
68, 9. 5 G P병력 피습 및 납치사건: 아군 G P병력이 잠복근무를 마치고, 철수중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1명, 2명 납치)
68, 9. 5 무장공비와 교전사건: 잠복근무중이던 병력이 공비 3명을 발견, 사격을 가하자 공비도 자동화기로 응사 하며, 수류탄 10발을 투척하고 도주. 피해 (전사 1명)
68, 9. 19 GOP 순찰병력 피습 사건: GOP 병력이 철책선 순찰중 공비의 수류탄 공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1명)
68, 9. 21 GOP 잠복호 피습사건: GOP 잠복 근무자가 공비의 기습공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1명, 부상 2명)
68, 10. 16 DMZ 투입시 피습사건: 아군병력이 DMZ로 투입하던 중,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1명)
68, 10. 30 ~11. 2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북한 124군부대 무장공비 126명을 침투시 켰으나 109명 사살, 7명 생포하였음. 피해(전사 38명, 부상 64명, 민간인 피살 23명)
68, 10. 31 전방사단 G P병력 피습 사건: 아군 GP 병력이 수색정찰중,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5명, 부상 4명)
68, 11. 1 서산 무장간첩 사살사건: 충남 서산 성연면 오사리에 무장괴한 2명이 출현하였다는 신고로 작전을 전개 무장간첩 2명 사살. 피해(전사 1명)
68, 11. 2 전방사단 G P 병력 피습사건: 아군 G P병력이 철책선 순찰중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1명, 부상 1명)
68, 11. 8 전방사단 . 피해(전사 2명, 부상 8명)
68, 12. 9 이승복사건: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 이석우씨 집에 무장공비 5명 침입,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한 이승복 형제 3명과 이씨 부인 주씨를 무참히 살해. 공비들에게 가슴을 관통당하는 등 36군데나 칼로 찔린 장남 승복군만 겨우 목숨을 건졌다.
69, 3. 15 미군부대 병력 피격사건: 미군 병력이 GP 앞의 군사분계선 작업을위해 진입중 공비의 총격을 받았음. 피해(부상 3명) ※ 이틀후 후송하던 헬기추락으로 7명 사망
69, 3. 16 주문진 공비 침투사건: 무장공비 8명이 주문진에 침투, 보안부대원을 사칭, 여인숙 투숙객 검문하고, 수상 파출소에서 경찰관을 납치하려다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1명)
69, 5. 14 전방사단 공비 사살 사건: 연대수색중대 병력이 경계근무중 침투공비 1명 발견하고 사살
69, 5. 15 미군부대 병력 피습사건: 미군 병력이 철책선 점검중 공비의 사격을 받고, 응사하자 도주하였음.피해(부상 2명)
69, 5. 20 미군부대공비 사살사건: 미군 잠복근무자(카츄사)가 침투하는 공비 3명을 발견, 일제사격을 가하자 응사하며 도주. 수색결과 공비 시체 1구와 기관단총 등 다수의 유기물 노획.
69, 5. 20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잠복조가 침투하는 공비를 발견 집중사격으로 2명을 사살하고 기관 단총 등 다수의 장비 노획. 피해(부상 2명)
69, 5. 23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야간 경계근무자가 3초소 전방에서 공비를 발견하고, 사격으로 1명 사살. 피해(전사 1명)
69, 5. 25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아군 병력이 순찰중 공비로부터 사격을 받고, 즉시 응사하여 공비 3명 사살. 피해(부상 1명)
69, 6. 14 부안 침투간첩 사살사건: 전북 부안 하서면 주민이 해안가에서 고무보트와 배낭 2개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 수색작전 끝에 간첩 3명 사살. 피해(경찰관 4명 부상)
69, 7. 24 GOP 부대 공비 사살사건: 철책 경계병이 약 15m 전방에서 침투하는 공비를 발견, 교전끝에 3명 사살
69, 8. 23 GOP부대 간첩 사살 및 검거사건: 잠복호 근무자가 철책선 남방 5 m지점 능선으로 침투하는 간첩을 발견 교전 끝에 1명을 사살하였고, 9월 8일 경기도 가평에서 조장 김은환을 검거. 피해(전사 3명, 부상 5명)
69, 10. 12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병력이 OP 점령을 위해 전진중 공비의 수류탄 공격을 받고, 즉각 응사하여 공비 3명을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3명)
69, 10. 14 DMZ 침투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잠복호에서 8명이 근무중 전방 10m 지점에서 침투하는 공비를 발견 1명을 사살. 피해(경상 1명)
69. 12. 11 KAL기 납북사건: KAL(YS-11)기는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 등 51명을 태우고 강릉을 출발해 서울로 가던 중 대관령 상공에서 납치돼 원산으로 기수를 돌렸다. 북한 방송은 창랑호 피랍 때처럼 "자진 입북했다"고 보도했다. 납치 66일 만인 1970년 2월 14일 탑승자 중 승객 39명만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냈으나 승무원·승객 12명(납치범 포함)의 송환은 지금까지 거부하고 있다.
70, 3. 8 영덕해안 간첩 사살사건: 해안초소 근무병이 해안순찰중, 동력보트와 적탄통을 발견, 수색작전 끝에 해병대 병력이 간첩 2명 사살.
70, 3. 13 DMZ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병력이 GP 동쪽 300m 지점에서 공비 3명을 발견, 교전 끝에 2명 사살. 피해(부상 2명)
70, 4. 8 금촌 침투간첩 사살사건: 경기 파주 금촌 거주 농민이 은신중인 간첩 3명을 발견하고 신고, 군·경 합동작전 으로 전원 사살.
70, 4. 29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사단수색중대 매복조가 100m 전방에서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끝에 2명사살. 피해(부상 2명)
70, 4. 29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매복조가 공비 3명을 발견,교전 끝에 전원 사살
70, 5. 3 안면도 침투간첩 사살사건: 검거간첩을 역이용, 안면도에서 접선공작을 실시 침투한 간첩 3명을 사살.
70, 6. 13 전방사단 공비사살사건: 연대 잠복초소 근무병이 우측방 개울을 따라 침투하는 공비 2명을 사살
70, 6. 15 미군부대 공비 사살사건: 장단반도 거곡리 제1초소에서 공비의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 끝에 1명 사살
70, 6. 18 전방사단 공비 출현사건: 연천군 초성리에서 아군 병력이 잠복근무중 공비 1명이 출현, 권총으로 사격을 가하여 부상을 입히고 도주.
70, 6. 22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 북한 간첩이 국립묘지 참배요인을 살해하기 위해 현충문에 폭발물을 장치하다가 실수로 간첩 1명은 폭사하였고, 잔당은 도주.
70, 6. 28 영흥도 간첩선 격침사건: 아군초소 경비정이 영흥도 북방에서 간첩선을 발견, 합동작전으로 격침시키고 내륙으로 상륙한 공비 6명 사살
70 6. 30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까치봉 서남방 철책선 부근에서 공비를 발견, 교전끝에 1명 사살 피해(전사 2명)
70, 7. 5 김포 계양산 간첩 사살사건: 경기 김포 고촌면 뒷산에서 학생이 거동 수상자를 발견 신고하여, 출동한 군 병력이 3명 사살.
70, 7. 22 영덕 해안 간첩선 격침사건: 경북 영덕 해안초소 앞 50m 해상에서 간첩선을 발견, 사격하자 응사하며 도주, 합동작전으로 격침. 17명 사살 추정
70, 9. 19 영종도 침투 간첩 사살사건: 영종도 중산리 거주 학생이 괴한 2명을 발견하고, 군·경 합동작전으로 간첩 2명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2명)
70, 9. 22 GOP부대 공비 사살사건: 아군 잠복초소 전방 철책선에서 공비가 선제공격하여 교전끝에 3명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1명)
70, 9. 26 부산 가덕도 침투간첩: 사살사건 부산 가덕중학교 학생이 산에서 괴한 2명을 발견, 출동한 경찰·예비군이 2명 사살. 피해(전사 2명)
70, 10. 6 임진강 수중침투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가 임진강변을 수색중 공비 3명을 발견, 교전끝에 모두 사살. 피해(전사 2명, 부상 6명)
70, 10. 10 거진 간첩선 격침사건: 강원도 거진 북방에서 해군함정이 간첩선을 발견, 해·공군 합동작전으로 휴전선 남방 5마일 해상에서 격침, 4명 사살 추정
70, 10. 11 해남 침투간첩 사살사건: 전남 해남 화산면 거주 박양진 집에 거동수상자 1명 출현, 박씨의 처가 신고, 경찰이 사살
70, 10. 14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가 박달봉 정상 10m 부근에서 공비 2명을 발견, 사살
70 10. 18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GOP에서 소대장 외 1명이 철책선 점검 중 공비 3명을 발견, 교전 끝에 2명 사살
70, 10. 22 GOP 사단지역 간첩 복귀사건: 철책선 순찰병이 이상한 소음을 청취후 수하시 총격을 받고 교전, 수색결과 철책이 절단되어 있어 간첩의 복귀로 판단하였음. 피해(전사 1명, 부상 1명)
70, 10. 22 전방 사단지역 공비 침투사건: 백석산 동북방 GP 외곽 철책부근에서 소음을 청취하고, 접근하다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후 확인한 결과 철책 2개소 절단 및 도주흔적 발견. 피해(전사 1명, 부상 1명)
70, 10. 24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매복조가 향로봉 서북방 8㎞ 지점에서 공비 3명을 발견 교전끝에 1명 사살. 피해(전사 2명)
70, 11. 7 인천지역 간첩 생포 및 사살사건: 인천 율도 발전소 예비군 초병이 해안에서 침투하는 괴한을 발견하고 수하하자, 초병을 살해하고 도주. 출동한 군 병력이 1명 사살, 1명 생포. 피해(전사 2명, 부상 2명)
71, 6. 16 전방사단 침투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병력이 철원군 백마고지 서남방에서 매복근무 중, 20m 전방에서 접근하는 공비 3명을 발견 교전 끝에 1명 사살, 잔당은 도주.
71, 6. 18 석모도 침투 공비 사살 및 생포사건: 경찰이 강화 석모도에서 북한장비를 발견, 수색중 공비 3명을 발견, 교전 끝에 2명 사살하고, 1명 생포. 피해(부상 1명)
71 6. 30 임진강 침투 공비 사살사건: 사단수색중대 병력이 임진강변에서 잠복 근무중 공비 3명으로부터 기습사격을 받고, 교전 끝에 2명 사살, 1명 자폭. 피해(전사 4명, 부상 12명, 장갑차 1대 전소)
71, 7. 1 GOP부대 산병호 침투공비사살사건: 아군 병력이 산병호 경계근무중 수중철책선 하단부를 굴토하고 침투하는 공비 3명을 발견, 2명 사살 잔당 도주.
71, 8. 16 DMZ 공비사살사건: 아군 병력이 DMZ 수색중 공비 5명을 발견, 교전 끝에 전원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2명)
71, 8. 19 군단 하교대 공비 출현사건: 군단 하교대 부사관 후보생이 보초근무중 괴한 2명을 발견하고 사격을 가하자,공비는 도주하고 기관단총, 피묻은 붕대,배낭 등을 노획
71, 8. 20 강화도 침투안내원 사살사건: 강화군 길상면 거주 민간인이 괴한 2명을 발견하고 신고. 수색작전끝에 안내원 2명사살. 피해(전사 2명)
71, 8. 21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아군 병력이 매복근무중 괴한 3명을 발견, 교전끝에 공비 3명 사살. 피해(부상 1명)
71, 8. 27 임진강 수중침투 간첩 사살사건: 사단 경계병이 임진강 해안에서 괴물체 4개를 발견, 수색작전을 전개한 군 기동타격대가 간첩 4명 사살. 피해(전사 1명,부상 1명)
71, 9. 13 월성 해안 침투간첩 사살사건: 해병대 병력이 경북 월성 해안에서 공비3명을 발견, 교전 끝에 2명 사살.피해(경상 2명)
71, 9. 18 해병여단 공비 사살사건: 김포군 양촌면에서 민간인이 괴한 4명을 발견 신고, 출동한 해병과 교전 끝에 3명 사살. 피해(전사 9명, 부상 20명)
71, 10. 25 DMZ 침투공비사살사건: DMZ 매복 근무자가 철책선 북방 50m 지점에서 공비를 발견, 교전끝에 2명 사살
71, 10. 30 전남 소허사도 간첩 사살 및간첩선 노획사건: 전남 소허사도에 괴선박 1척이 출현하였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산으로 도주하는 간첩 4명을 발견, 교전 끝에 전원 사살하고 유기한 간첩선 나포. 피해(전사 1명)
73, 4. 17 전방사단 공비 사살사건: 연대수색중대 병력이 매복근무중 공비 3명이 침투하는 것을 발견, 교전 끝에 2명은 사살, 잔당은 도주.
73, 5. 5 완도 침투간첩 사살사건: 완도 거주 주민 4명이 괴한 2명을 발견하고 검거하려다 권총에 맞고 부상,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 1명 사살, 1명 행방불명
74, 4. 2 리비교 공비침투 및 복귀사건: 대대 후문 보초병이 도로에서 괴한 3명을 발견하고 수하하자“1 1중대 병력이다”라고 하여 암구호도 확인하지 않고 통과시켜 북상 도주
74, 5. 20 추자도 간첩 사살사건: 간첩 2명이 북제주군 추자면 대서리 본가에 출현한 것을 조카가 신고, 출동한 군·경이 1명 사살, 잔당은 도주. 피해(전사 3명)
74, 7. 20 어청도 근해간첩선 격침사건: 해군 함정이 격렬비열도 25마일 해상에서 의아선박을 발견, 추격하자 사격하며 도주함으로 집중사격으로 격침. 간첩사살 7~8명 추정. 피해(경상 3명)
74.8. 15 육영수 영부인 피살사건: 8.15 경축행사때 재일 한국인 문세광의 저격에 박대통령은 무사했으나 육영수 여사는 목숨을 잃었다.
75, 4. 27 동래 침투간첩 검거사건: 부산시 동래구 석대동 거주 민간인이 산에서 거동 수상자 2명을 발견 신고, 출동한 군·경은 간첩 1명 체포, 5월 3일 간첩 추가 검거
75, 6. 28 광주 침투공비 사살사건: 광주시 서구 동운동 뒷산에서 괴한 2명 발견하여 신고, 군·경은 추격 끝에 1명 사살, 1명 도주, 8월 1일 전북 완주에서 사살
75, 9. 11 고창 침투공비 사살사건: 전경대 해안초소 경계병이 순찰중 괴한 2명으로부터 사격을 받고 교전, 1명 사살, 1명 도주 피해(전사 3명, 부상 2명)
76, 6. 19 GOP부대 공비 사살사건: GOP 근무자가 북한강변 철책선 부근에 서 공비를 발견, 교전 끝에 3명 사살. 피해(전사 4명, 부상 6명)
76, 7. 3 완도 공비 침투사건: 전남 완도군 금일읍 화목리 거주 주민 3명이 약초 채취차 구도(무인도)로 건너간 후, 1명은 공비의 권총에 맞아 살해되고, 2명은 후일 생환.
76, 8. 18 도끼만행 사건: 휴전선에서 인민군이 도끼로 미군장병 2명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때는 한미군 합동으로 전쟁불사 위협으로 김일성의 사과를 받아냈다.
77, 5. 3 GOP부대 공비 복귀사건: 초병이 철책선 점검중 공비의 기습사격 으로 전사, 수색결과 철책절단 및 복귀흔적 발견
78, 10. 5 GOP부대 공비 강습복귀사건: 병사 4명이 전역 및 휴가신고 차 연대본부로 가던중 공비의 기습사격으로 3명이 사망하고, 생존자 신고로 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철책을 뚫고 북상 도주.
78, 11. 4 광천 침투공비 민간인 살해 도주사건: 충남 광천 말봉산에서 나무하러 갔던 여인 2명이 공비에게 살해되고, 도주하면서 주민 3명을 추가 살해하고 도주.
79, 10. 5 GOP부대 공비 사살사건: GOP 병력이 철책선 순찰중 철책절단 및 침투흔적 발견, 수색작전을 전개하여 대암산 서남방 2㎞지점에서 공비 1명 사살.
80, 3. 23 한강 수중침투 공비사살 사건: 초병이 경기 고양 법곳리 한강변으로 침투하는 공비 3명을 발견, 전원 사살
80, 3. 27 DMZ 침투공비 사살사건: 아군 병력이 DMZ 수색중 공비 3명을 발견, 교전 끝에 1명 사살. 피해(전사 1명, 부상 1명)
80, 6. 20 보령해안 간첩선 격침사건: 해안 초병이 괴선박을 발견 사격하자 응사하며 도주, 해·공군 합동작전으로 격침후 간첩 김광현 생포 피해(부상 2명)
80, 11. 3 전남 횡간도 침투간첩 사살사건: 전남 완도군 횡간도 거주 어민이 괴한 3명을 발견하고 신고, 군·경 합동작전으로 전원 사살. 피해(사망 1명, 부상 6명)
80, 12. 1 경남 남해침투 간첩선격침사건: 레이더가 남해 목도 남방 7㎞ 해상에서 괴선박 포착, 육·해·공군 합동작전으로 간첩선 격침, 9명 사살 피해(전사 3명, 부상 3명)
81, 6. 10~6. 21 임진강 수중 침투 공비 복귀사건: 철책선 경계병력이 임진강에서 배낭을 습득 조사한 바, 무장공비 3명이 6월 10일 임진강으로 침투, 구파발 지역에서 군사시설 촬영후, 6월 21일 복귀하다 분실한 배낭으로 확인.
81, 6. 29 필승교 수중 침투 공비 사살사건: 필승교 경계병이 다리 밑으로 떠내려가 는 물체를 발견하고, 사격하였으나 수중 동물로 오판, 그후 공비 유기물이 발견되어 작전 끝에 논두렁에 은신중인 공비 1명을 사살. 피해(부상 1명)
82, 5. 15 해안 침투공비 사살사건: 해안초소병이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지경리 해안으로 접근하는 괴한 2명을 발견, 1명 사살, 잔당은 도주.
83, 6. 19 일월교 침투공비 사살사건: 초병이 파주군 문산읍 임월교 다리 밑으로 침투하는 공비 3명을 발견, 집중사격으로 전원사살
83, 8. 5 월성해안 침투 간첩 사살사건: 해병대 병력이 경북 월성군 양남 수렵리에서 침투하는 괴한을 발견, 해·공군 합동작전으로 5명 사살. 피해(해경정 1척 침몰)
83, 8. 13 독도근해간첩선격침사건: 독도 근해를 초계중이던 강원함이 남하하는 의아선박을 발견, 정선을 명했으나 도주, 함상헬기가 출동 격침, 19명 사살 추정
83. 10. 9 아웅산 테러사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서남아·대양주 6개국 공식 순방 첫 방문국인 버마(현 미얀마)의 아웅산 묘소에서 일어난 강력한 폭발 사건으로 대통령의 공식·비공식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83, 12. 3 부산 다대포 침투간첩 생포사건: 해안 초병이 부산 다대포 해안 매복근무 중 침투하는 간첩 2명을 발견, 격투 끝에 생포하고, 해·공군 합동작전으로 간첩선 격침. 3명 사살
84, 9. 24 대구 무장간첩 출현사건: 대구시 동구 신암2동에 무장간첩이 출현, 미용실 여주인과 식당 종업원 등 2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부상을 입힌 후 자살.
84, 10. 19 부산 수영만 간첩선 격침사건: 해안레이더가 수영만 동쪽 1마일 해상에서 의아 선박을 포착, 해군 PK편대가 출동 교전 끝에 격침. 5명 사살 추정
87.11. 29 KAL858기 폭파사건: 주범 김현희로 하여금 중동 건설근로자들이 많이 탑승한 KAL기에 시한폭탄을 장치해 폭팔케한 사건
92, 5. 22 DMZ 침투공비 사살사건: 무장공비 3명이 아 GP 남방 800m 지점에 침투하는 것을 사전에 발견하고, 전원 사살
95, 10. 17 임진강변 무장 공비 사살사건: GOP 경계병이 전방 20m 절벽 아래에서 공비 1명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고 사살.
95, 10. 24 부여 무장간첩 사살 및 생포사건: 충남 부여군 석성면 정각사 입구에 무장 간첩 2명이 출현, 교전 끝에 1명을 사살하고, 1명 생포. 피해(전사 2명, 부상 1명)
96, 9. 17 강릉 해안 잠수함 침투사건: 강릉시 강동면 고속도로 상에서 택시 기사가 암초에 좌초된 잠수함을 발견하고 신고 군·경 합동작전으로 공비 25명 소탕, 잠수함 노획. 피해(전사 11명, 부상 41명)
98, 6. 22 속초해안 잠수정 침투사건: 속초 동남방 1 1 . 5마일 해상에서 어민이 어망에 걸린 잠수정을 발견하고 신고,군·경 합동작전으로 잠수정 예인, 자폭시체 9구 인양, 조사결과 무장간첩으로 확인.
98, 12. 18 남해안 침투 간첩선 격침사건: 해안 레이더에서 간첩선 포착, 해·공군 합동작전을 전개, 욕지도 남방 5 6마일 해상에서 격침. 반잠수정 1척, 공작원 1명 포함 사체 6구 인양, 간첩장비 1,209점 노획
99, 6.15 연평해전: 북한 함정 수십척이 NLL을 넘어 우리 해군고속정에 포격을 가해오자 우리 해군 2함대 박정성 사령관이 발포 명령하여 북한함정 2척 침몰 2척 대파 북한해군 수십명 전사하고 퇴각. 훈장을 받아야할 박제독은 북한의 요청에 의해 보직해임 발령을 받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음.
02, 6. 29 서해교전: 연평해전의 복수극으로 여겨지는 북한함정의 기습포격 공격에 우리해군 전사자 6명 부상자 수십명 발생. 선제공격을 못하게하고 선미추돌(船尾追突) 대응만 하라는 김대중대통령 지시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전쟁이었음.
07, 7. 12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주부를 금지구역에 들어왔다고 총격을 가해 사살한 사건
09. 11. 10: 대청도 사건: 북한 해군 선제공격에 집중포화로 적함을 반파시켜 퇴각시킨 사건
10. 3 26: 천안함 초계함 격침사건: 지난해 대청도 사건의 보복사건으로 추정되는 사건으로서 북한 어뢰나 기뢰공격에 천안함이 두 동강난 사건
(출처: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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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前 HID 북파공작원의 글
(펌) 前hid대원의 글
공작원들의 편제를 무슨무슨부대로 알고있지만, 우리는 민간인이고 군업무와 다른 엄연한 회사편제로되어있읍니다. 사장엔 현역중령, 전무는 소령, 과장은 대위, 계장은 중위 혹은 소위 그리고 회사원의기본조건은 다음과같습니다.1. 체구가 작고 민첩하며 운동성이 뛰어나야합니다. 2. 교육을 소화할수있는 기본적학력(지식)이 있어야합니다.3. 뒷조사에서 배경에 이북에 연고가 전혀없어야합니다. (625때 남하못한 친척이있어도안됩니다)4. 인성교육(평가)때 성격이 과격하거나 우유부단해도안됩니다. (교관들의 안목에서 불합격판정이나면 인사도못하고 소리없이 사회로퇴출당합니다)이런 조건들하에서 선발된 사람들로구성하고 훈련은 자체 유격교육장서받습니다. 지금부터 말해도될것만하겠으며 곤란한것은 (생략)을달겠읍니다.훈련의기본은 긴말필요없이 모래주머니달고 모래조끼입고 일이년동안 첨부터 끝까지 산으로뛰는겁니다. 뛰기를 기본으로 야전삽(작은것 따로있음)으로 잠복호파고 두더쥐숨기, 침투, 지뢰제거, 수영, 살인비술(소리없이 죽이는것), 맨손격투(태권도, 유도, 별의별것) 칼로 목줄따기, 칼던지기, 나무와돌로 무기만들기, 사격, 독도술, 사진촬영술 요인암살(실제 요인암살은하지않고 배우기만한다) 더불어 자물쇠따기, 담장넘기, 식량훔치기,산나물구별하기, 동물산채로 잡아먹기, 잠수3분이상(숨안쉬고 3분은기본이며 4~5분도버틴다), 면도칼 이발기술, 적무기사격과 분해등...(훈련과 실제상황서 아무리 배고파도 민가에침투하여 표안나게 일부분만훔침. 훈련때는 일반민가에 나중에 과장이다니면서 우리가 말해준 민간인들에게 도난품접수받아 넉넉하게 모조리변상해준다)이런것이 공작원들의 교육과정인데 당시 내가맡은 주요임무는 몇번에 걸쳐 목표물근접사진촬영이 주임무였으며 침투는 잠수정2회(돌고래인지 그것보다 작은소형(생략) (서부로 남포) (동부로 함흥) 그리고 휴전선 직접통과2회였으며, 3회는무사했고 1회는 두번째북파때 남포에서 현지고정(생략)과 일하다 경비병에게발각되어(현지고정의 목숨은 우리의목숨보다 중요함) 현지고정 피신완료후 세명이서 필사의탈출을하였는데 이때부터 해주까지 미리 만들어진 탈출로를가늠하여 지그재그로 북상하다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다 내려오고 일주일동안 낮에숨고 밤에만 산으로만 계곡으로뛰기시작한것이다(황해도 해주부터는 생략해야 함) 이렇게 필사의도망으로 적들과 조우하지않고 무조건 도망치는것이다. 이때 평양근교? 에서 적의 수색조에 발각되어 사격을받아 일사분란하게 포위망을 구축한 적들의틈에서 죽음직전에 이르렀으나 잠복과 끈질긴 은밀이동으로 모면하고 도망을친것이다. (우린 적들 근처에선 낙엽도 밟고 도망치는것이아니라 낙엽을 손으로 소리없이밀어내고 발을옮기고 다시 낙엽을 제자리에옮겨 자국이생기지않게 반복적으로한다)발각이던 뭐던, 사격을 해오던말던 우리가 적을 확인만하면 아무리배고파도 절대 잡히지않는다.(만약 잡히면 청산가리캡슐) 이때 기본장비는 소음권총 3인1조에하나, 자동카빈소총1인1정, 실탄100발, 수류탄네알, 단도, 청산가리캡슐응급약(어지간한건 혼자서 꿰메버린다) 만능열쇠, 올림프스망원카메라, 지도, 나침판, 머리빗, 면도칼, 뻰찌, 라이터, 수통, 숨쉬기빨대, 바닥 믿믿한 농구화, 이런것들이고 식량은 날짜계산하여 부족하게가져간다 마른걸로만. (훔쳐먹고 잡아먹고 구해먹고)격투술에있어서는 특전대와 예를들면 맨손이던 무기던, 그들중 누가 무술에 고수일지라도 절대로 북파공작원을 이길수없읍니다. 우린 실제로 목숨걸고, 격투술을 같은수준의 회사원끼리도 1대1부터 5대1의 실전을익히고(여기서 지면 죽기도한다) 깡으로만해도 그누구도 적수가안되며, 뛰기에있어서 산악구보와 험지의구보는 세계적 마라톤선수보다도 훨씬 강인한귀신인것입니다. 이만하면 대체로 설명이되었을것이 생각하고 참고로, 현대의 특수부대일수록 전문성과 장비에 의존하는것이지 무식하게 일반인들이 생각하는것처럼 체력만으로 임무달성하는것이아님을 꼭 기억하시기바랍니다==============================================지난 96년도 동해에서 잠수함좌초되고 승무원들과 공작원들이 산위로 피해올라가서 대책을의논하다 무장공작원아닌 잠수함승무원과 일부 전문공작원들을 일렬로 앉혀놓고 전부사살하고 피해버린일을 기억들하실겁니다. 제생각엔 그들은 사살당한게아니라 전체 의논하에 도망칠능력이나 교육을받지못한 잠수함승무원과잡혀서는 절대안될 비밀요원들은 자발적으로 죽기로결정하고 일렬로 나란히앉아 고향생각에 처자식, 부모님생각하면서 슬픈마음을품은채 무장공작원들로부터 한발씩 총격을받고 죽어간것으로 판단됩니다.지금이야 장비가좋아서 돌핀급이네 뭐네 호사스러운 잠수함으로 침투하고 도망치고하지만 과거로올라갈수록 선배들은 헤엄쳐서 아니면, 고무배로침투해 임무수행하고 몸으로때우며 누가 슬퍼하지도않는 죽음을당하며 사라져간것입니다.우리 회사원들중에도 돌아오지못하는 동료들이 상당히많았고 새벽녁이면 멀리서도 들려오는 북한군 확성기소리에서 어디서 몇넘잡아죽이고 일망타진되었다는 말들이 내귀에 직접 들려오기도합니다.복귀시한에 나타나지않고 이후 회사에서 보이지않으면 그는 죽었다고봐야하고 우린 그저 눈물과함께 말없이 술한잔에 마음을달래는 그런일들이많았습니다.일반인들은 이북의 남파요원들은 장비가 좋고, 우린 알려지지않은 몇몇이서 활동하고 그런줄알지만 제가 회사원이 된 그시절부터는 이북보다 훨씬나은 침투장비가활용되었고 공작원숫자도 일반인들의 상상을뛰어넘는숫자였고 그들이 임무완수후 돌아오지못하고 죽어사라진분들이많습니다.공작조시절 북의 첩첩산중에숨어서 가장 많이나던 생각은 부모님과 가족들입니다.물론 임무를마치고 돌아가야한다는생각으로 정해진 사이클대로행동하지만 어린나이의 우리도 사람이기에 공포와 고뇌가 엄청많습니다. 휴전선근무하던 민정경찰들은 공작조 북파내용에대해 잘알겁니다. 사원들이 침투지역수색대로 파견되어 며칠동안 수색대로부터 침투경로며 제반사항들을 꼼꼼히 숙지하면서 망원경으로 근처를 이잡듯이 살피며관찰하고 며칠후 시시때때로 행해지는 수색대입출과정을 허수로반복하고 어느순간에 민정경찰의 선두안내로 이미 휴전선 깊숙히잠복해있는 수색대에 인계되고 적진을살피고 서로 안타까운마음에 손을만져 인사를나누고 그리고 정해진코스로 침투하고, 복귀때도 휴전선안에서 미리 대기하고있는 수색대도움을받아 그들 인솔하에 오는것이지 람보처럼 헬기타고 기관총날리며 폭탄터트려가면서 요란하게오는것이아닙니다. 우린 성질나면 헌병이고 특전이고 시비걸어패버리는싸움 엄청많이했지만 군인이라도 수색대휴가병들한테는 조그만시비도 하지않았으며 거리에서만나면 그들 델고가서 밥사주고 술사주고 용돈도꺼내주고 항상 감사한마음을 가지고살았으며 회사자체훈련장 주변마을사람들과의 유대도 상당히 좋은편이다.북파출신들이 뭔 살인이나하고 괴물들이나되는걸로 사회적으로 인식들 많이하지만 우린 맡겨진 임무를수행하는 사원인것이지, 깡패나강도같이 그런짓하는사람들이 아니었다는것을 알아야합니다.북의 공작원들이 남파될땐 시기적으로 겨울을택하는데 그것은 그들작전이성공하면 뒤를이어 얼은 임진강을돌파하여 전면침공을하겠다는 배경에서 그러는것입니다.남한의 공작원들은 녹음이 우거진계절에 침투와 탈출을하는것이 그들과 완전히다릅니다.왜 김신조대원들이나 삼척,울진지구에 침투했던 무장공작원들이 그 추운 숨을곳도없고 먹을것도없는 겨울에내려왔을까하는 의구심을 갖게될것입니다그들의 작전목적이 전면남침의 선봉이었기에 그렇게 되었던것입니다.과거에 서부지역에주둔하던 미군들은 평시에도 얼어붙은임진강을 무작위로 곳곳을 폭탄으로터트리곤했읍니다. 미군들에의한 휴전선쪽으로 포병사격연습 또한 사격도하고 임진강얼음을 깨는일이기도했읍니다. 사격도하고 공비침투를 막기위한 얼음을 파괴하는 실제연습도하면서말입니다.우리 남한은 북으로 전면전을시도할 무력침공의사가없기에 침투조를 은신하기 좋은 늦은봄부터 가을이전에 행한다고보면 맞습니다.우리사원들의 군사전술은 상대의 편제와 수법을알고 우리가 피하기위한방편으로 배우는것이지그들과 맞장을떠서 격파하고 섬멸하기위해 배우는것이 절대아닙니다.공작원들의 편제는 세계 어느나라나 거의 같은것이고 공작목적에따라 2인1조부터 칠팔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고정들로부터 전달받는 중요사안은 저와같은 회사원들이침투하여 접선하고 넘겨주고 받아오고더 위중한 굵직한사안들에는 변수는많지만 회사원들이호송하여 현역영관급들을 침투시킵니다.체력과 안전때문에 이런 작전엔 물고기를타고 함흥지역으로 신의주로 침투하는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이미 그들이 00년전부터 알고있는것이라서 지금은 군사기밀도 아닐것입니다.00년대 중반이후부터 장거리침투시엔 물고기(잠수정)를 타고 침투가시행되었다는것은 그들이 더 잘압니다.제가 회사에 들어가기 몇년전 물고기타고 신의주로침투하여 일하던 해군소속공작조가 전원 몰살당했다는것은 우리들에게 너무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당시 대령과 전원 위관급이상의 정보요원들로구성되고 전문공작원들이 호송하여 작전하다 9명이 몰살한이야기는 내부에서는 너무도 잘 알려져있읍니다.실미도친구들은 훈련이끝나면 미군수송기로 평양근교로 낙하산침투시키기로 계획되었던일이고특공작원들이 김일성궁으로 침투하여 깨박살내어 보복한다는 시나리오였던것입니다.일반인들생각엔 북한이 대공시설이 엄청나고어쩌고 부풀려진말에의하여 대단한걸로 평가하지만 남한과 북한 어느곳이던 안전하게침투하고 탈출할수있는 허술한곳이 대단히많읍니다.당시 비행기침투는 허큘리스 프로펠러기가 위성첩보에의한 사전검토된 안내에따라 저공침투하여 낙하산으로뿌리고 남하한다는 치밀한계획이 미리 있었던 것이고 특공작들은 평양서 김일성궁을 습격하여 뽄때를보이고 전원죽음으로 끝난다는 계획이었으나 남북화해분위기로 그들의 문제가 폭발하여 버스탈취하고 전원사망하는 비극을맞은것입니다.당시 공산 개인화기들을 월남에서 무진장들여와 분해결합부터 사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하였으나 공작원들이 지참하는 개인화기는 실미도처럼 전원 카빈소총이었는데 이유는 소형이며 총기휴대가 간편하고 고장이 적으며 자동과 조준사격이 가능하다는 장점등으로 항상 카빈만을 휴대한것입니다.아카보소총이 성능이좋고 발각되어도 이북군인인줄로알게될거고 어떻고하지만 우리가 북에서 모습을 나타내고 백주대낮에 걸어다니는것도 아니므로 침투상황과 교전에 가장 효과적인 성능의총기가 카빈인것입니다.영화속의 독일군이나 미군처럼 기관단총을 휘두르고, 돌아오지않는 해병의 영화주인공들처럼 폭약 잔뜩 짊어지고가서 파괴하고, 수류탄을던져서 살상하고 부수는일을하는것이 아닙니다.공작조는 고정들과 접선해서 주고받고 새로운정보를 가져오고 위성으로 확인했으나 실체구별이 잘안되는것들에대한 세밀한 근접촬영등이 목적인것이지 뭔 이상한 무전기로 이불속에서 소리죽이면서 무전치고 그런일하는것이아닙니다.==================================북파공작원은 키큰 사람을 쓰지못합니다. (기밀이 아님으로 몇가지 조금 쓰겠읍니다)잘 먹지못하고 사는 이북사람들 과거나 현재 평균신장에기준해서 공작원을선발하고 침투시키는것이지 어느 무식한자가 이북사람들 작은체격에 당장 눈에 표가나는 건장한 젊은것을선발해서침투요원으로 쓰겠읍니까. 에베레스트원정대처럼 넘치도록 비행기에 짐을 실어가지고갈수도없고 목숨만 겨우 부지하도록 최소의 분량만휴대하고 민첩한기동성과 은밀이 기본인 침투공작조가 어이 그런애들로 구성이되겠으며, 만약 그런애들 보낸다면 두더지굴파고 숨는데만 몇배의노력이필요한것이다. 잠복호(비트) 파는것이 뒷마당에 김치독묻기위한 굴파듯이 푹푹파고 들어가는것이 아니라 최소한 작게 신속히파고 숨어야하는데 그 과정이 장난이아닌 눈몰속에 이뤄지는겁니다. 야전삽도아닌 모종삽 비슷한 작은삽으로, 적지에서 소리없이파고 준비한 작은자루에 조금씩담아서 먼곳으로가서 사방으로 아주 조금씩 풀밭이나 눈에띄지않는곳에 흐트려서 전혀 표안나게버리고 돌아오는길에 위장용덮개만들 죽은가지들 줏어서 발자국 다 지우면서 다시와서 반복적으로 파고 버리는것이고, 웬수같은 발자국 그거 완전무결하게없애고 밤새도록 구덩이하나만들어 누가 바로 앞에서 오줌누다가도 발견못하게 위장하고 숨는것인데 어이 장대같은애들을 침투공작원으로 이북에 침투를시킨다는건지 웃지않을수없읍니다.김장독묻는것도 힘든일이건만 내목숨유지할 두더지굴파는것이 한두시간에 해결되는게아니고군인들처럼 무지막지한성능의 야전삽으로 부담없이 쉬어가며 잠복호만드는게아닌데... 수색대에섞여서 총과 몸만 들어가고 날이어두워져 배낭이 도착해 잠복하며 운동화로바꿔신고몇시간을대기. 이때는 수색대가 좌우뒤로 이선삼선 초비상경계하고 군인들도 철망밖에서비상대기.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시간이지났는데 언제있었는지 수색대두명이 앞에서기어오고 적시라는 신호에 수색대와 인사나누고 내가 가운데서 기어 침투하였다. 이북쪽은 훈련때보다 침투가 너무허술해서 쉽게넘어갔다. 지뢰밭, 모래밭, 얼기설기된 목책, 철조망(철조망도 아주 허술해서 지뢰지대빼고는 시골목장의 담장과 비슷한수준이라보면 비슷하다)잠시후 배낭벗고갔던 앞에형이 다시돌아와 배낭메고앞서고 초병지대를 비켜 빠져나간것이 침투의전부였다.몇백미터를 조심스럽게 기고 오리걸음하고 이후부터 형을따라 뛰기시작하는데 두형들이 여기서부터 무조건따라서 뛰기만하면 된다고해서 사주경계없이 뛰기만하였다.이때부터 00까지(이런데 강계땅이라고하면 놈들이 좀 헷갈릴건데) 밤에만 산으로, 짧은들판을 달려 5일걸리는데 무풍지대의 험준한산에선 두더지굴이 필요없이 미리부터 나뭇가지꺾어서 옆구리에끼고뛰다가 몇키로 더가서 그걸로 시야가 좀 확보되고 움푹한곳에 깜쪽같이 이리저리걸치고 쉬고 교대로잤다.양말갈아신고 운동화갈아신고 주식은 하나씩포장한 돌처럼 단단하게 눌러말린 라이터만한소고기, 미룩구만하게 육등분으로 떼어서 먹게되어있어 그냥 입에넣고 우물우물거려 녹여먹듯하면된다.절대 배안고프고 (이게 이북촌애들 미숫가루하고달랐다) 이젠 기밀도아니고 다른친구들은 미숫가루 와 볶은쌀가지고 다녔다는데 난 이해가안감. 그거먹고 어캐뛰는지 (하루이삼일 단기공작조는가능)나물은 뛰다가 잠시쉬면서 뜯어먹고, 00형하는말이 너 이거 산나물잘먹어야 오래산다.형, 이짓하면서 오래살거같지않은데 우리 세명모두... 형들이 이때 얼마나 킥킥거리면 웃던지...잠잘땐 약간 경사진위쪽으로 다리를놓고 머리를 낮게하고자면 피로가 확 풀린다. 첨엔 불편하지만 숙달되면 아무렇지도않다. 이렇게 몇날을 낮잠자고 인적이 조금씩 길에보이는 00서 몇키로떨어진곳에 진출하여 위치잡고 두더지굴을만들고 때를기다렸다. 하루를 교대로 실눈뜬채 반잠을자고 (대소변은 상황에따라 쪼그리고앉아서 해결하고 바닥에 흙덮으며, 일반인들은 공작원이 맨날 구덩이나파고다니는줄로 알지만 구덩이는 한번 장거리침투에 두세번이고 그나마 단기공작들은 팔일도없고 잠잘일도없고 그런것이다.) 날이 어두워진 초저녁 모두 밖으로기어나와 형들이 하나씩 비닐과 헝겁에싼 뭉치를 나에게넘겨주며 그걸로 막걸리나 좀 사와라 (웃음) 00시까지 안오면 성공한걸로알고 우린 기다리지않고 떠날테니 그런줄알고 00일에 00서만나고 착오생기면 xx서 몇일몇시, 또 착오생기면 **서 몇칠몇시. 이렇게 세곳을 정해놓고 입을맞추어 숙지하고 형들과 작별하고 은밀과신속으로 나르듯이 목적지로갔었다. 혼자서가니 염려도 덜되고 잽싸게다니고 이렇게좋은데 저 형들이 날 보호한다고 델고다니니 내가 돌지... 씨부렁거리며 그래도 형들이 지리는확실하더만. 한번도 틀린적없이 정확하게. 고참이 달래 고참이겠어...목적지근처에서 산너머쪽으로 빠르게 풀을떠내고 땅을파서 총과배낭감추고(이땐 밟고지나가도모른다) 소음권총한개와 뭉치돈만 가지고 미끄러지듯이 15리정도를 나르듯뛰어 그시각 뭘 끌고 길을 천천히걷는 사람확인. 표식으로 단 한번에 알아보고 미리가서 잠복대기하고 있다가 미끄러지듯 집안으로 잠입성공.(암구호 이런거 필요없음) 돈뭉치전해주고 숫자로알려주고 목욕하고 옷갈아입고 된장찌개에 밥배불리먹고 이틀동안 잠만잤다.형들이떠나는 시각을보고 이젠 형들이 돌아가고있겠구나 무사히 잘가야할텐데...(이번엔 중강진 어느집이라면 이넘들 헷갈리겠지)나머지는 다음에쓰기로하고 여기서 일단 줄입니다.(아무리 이북애들이봐도 내가 어디다녔는지 모릅니다)어디의 어느집을 어떻게가고, 거리가 얼마이고 몇집을가고 이런것은 그냥 알아서 혼자만보시면됩니다.잠을 자던말던 골목길걷던 얘기들이며, 시내구경하던 뭐하던 사실은 말할수없는것이므로 대충 뒤범벅으로 썼음을 이해하시기바랍니다.=============================이틀동안 잠을자고 몸을 추스리고는 날짜와 시간에맞추어 목표를 찾아 다시떠났다.(이때부터 점조직) 북한도 마찬가지지만 접선은 그동안 북파되기전 교육을통해 수없이 완전무결하게 암기한후에 각기 만약의불행을 대비해서 장소와시간을 달리한 1 2 3차로나뉘어 시행되어지는것이다.김신조 개떼들처럼 수십명이 다니는것도아니고 자세한지도가 뭔 필요있으며 달달 외워버린 지형지물에모두 두뇌속 암기력을이용하여 공작이 전달되고받는것이지, 뭔 스파이영화처럼 무전을주고받고어쩌고?허리띠속에 집어넣는 사진필림쪼가리말고 가지고올것은무엇이며, 기밀도아닌 누구나 다아는 공작금전달해주고 오면되는것이고 나머진 갖가지 정해진신호로 그들이 자체적으로 본사와 오가는것인데 ...내가 입고간옷과 신발은 이미 내가 잠들어있는사이 남김없이 아궁이서 소각되고 날이어두워져 한뭉치 지참하고 눈인사후에, 이번엔 산아닌 한적한 들길로 운동선수처럼뛰어 두번째 약속장소근처로 이동해아무도모르는 신호표적확인하고 다시뛰어 두번째 표적확인하고 (압록강옆 어느도시라하면 이놈들이 00년 지난 지금에 이글보고 머리굴리고난리치며 찾으려고 생고생 좀 할거같다) 어느집으로 찾아들어가고 인사나누고 휴대품 전달해주고 나누기곱하기 몇개맞춘다음에 목욕하고 밥먹는사이 옷과신발 소각완료하고 그도시 학생복으로갈아입고 (여기서부터가 기억력이 확실히 필요할때임)조심스레나와 골목길로 골목길로 가방둘러메고 놀면서 천천히걸어 표시된곳으로 가 주위살필것없이 당당하게 들어가서 내방?으로 들어가면 그걸로 임무끝...며칠동안 머무르며 공부? 하고 누나하고 거리구경에, 뭐에 지시된곳을 미리 방문해보고 버스도 타보고다시 이틀머무르며 공부하고 다른방향으로 된 도주로를따라 되돌아가서 숨겨놓은총과 소지품꺼내고 복구해놓은연후에 형들과 만나기로 한 지역으로 이틀밤을 나르듯뛰어 안내를받으며 복귀한걸로 첫번째임무는 종결되었었다. 오고가는데 북한이나 남한은 공작원들이 휴전선까지 도달은 걸릴데없고 허술했던 철조망과 지뢰지대만 잘 빠져나오면되는것이다.이북은 인구밀도가 적고 산악이많고 교통량도적어서 온 사방천지가 무풍지대라고보면맞다.북한의 전방지역은 남한보다 군사시설도많고 북한군이 곳곳에 주둔해있지만 주둔지근처가 남한과 북한의 맹점이라고 이해하면될겁니다. 시간차로 총 한자루만들고 마중나와있는 접선과 연결되어 다시 그의안내로 조심스레 철조망넘어서 들어온것이 나의 첫 임무였다.올때나 갈때 지뢰탐지전문가형이 앞장서고 나머지는 같은행동으로 사주경계하며 소리없이따르면되고 각기 다른 세개의 접선시간중 어느하나에 맞추어 수색대의안내로 재빠르게 따라붙으면 즉각 암구호속에 문안으로 들어오는것이다.장거리공작조는 베테랑중 베테랑에서 선발되고, 어느경우라도 얼굴만기억하는것이지 두번다시 그들을 만나지못하게 조직되어있고 매번 호송담당이 바뀌고 단기공작조처럼 폭파를위한 팀웍이네뭐네 이런것이 존재하지않는것이다. 임무가끝나면 각자 악수하고 안아보고 마음속으로 이별의눈물을흘리고각기 다른차량으로 신속하게 헤어지는것이며 여하한 경우도 두번다시 만날수없는이별을 하게된다.===========================================================일반인들 말하길 주변에 정보부다니고 뭐하고 그런사람이 주변에있다고 말하시는분들있읍니다.그냥 제가 좀 웃어드리고 넘어갑니다.정보부아닌 보안대나 그런 군인출신들이나 대공계 경찰출신들 그런분들이 사회에서말하길 엄청난사람으로 보이려고 정보부가어떻고 간첩이뭐고 대북공작 이런말 과거부터 항상잘하십니다.물론 그중엔 정보부서에서 요원말고 평사무원 혹은 평직에 근무한분들도있겠지만 그들 신원은 확실하지만 정보부사람이 아니라고보면 맞습니다. 정보의 중요요직을 담당하거나 기밀사항을 접하는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자신의 부인한테조차 직업에대해 절대 말하지않습니다. 제가 보증할수있고 그것이 그쪽 밥먹고사는 사람들의 특성입니다.정보부장이나 직급이높고 사회활동접하는 고위층들은 얼굴이 알려져있지만 그외의 사람들은 일반사회에서 어떤사진도 찍지않습니다. (자녀졸업식에가서도 사진을 찍지않습니다)이하 제가 말씀드리는내용들은 이북에서 이미 알고있는지 오랜사항들로 기밀이아닌것만 올립니다정보원들의 사회적 공식직업은 외무부직원, 해외지사, 학원강사, 공무원, 철도국원, 체신부직원, 00체육단체, 00사회단체, 00여행사 등 남북한 모두 이렇게 평범하게 되어있읍니다.그들의 명함이나 증명서도그렇고 사용하는 대표전화도 00학원입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지 뭔...통금 위반으로 경찰서잡혀가서도 큰소리 한번못치고 야단실컷맞고 뇌물주고 나오기도하고 그렇게 철저히 사회속 평범한양민으로 사는것이지, 뭔 때려부시고 경찰서장이와서 굽신거리고어쩌고...남북한 모두 대북과 대남담당공작부서는 정보부내에 이름은있으나 유명무실이고 실질적인것이아닙니다.북한도 철저하게 이 문제를 독자적으로 따로 관리하고 남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기업의 정보요원들도 엔지니어, 컴퓨터프로그래머, 현장소장, 비서, 하청회사직원 등 이런식으로 일반직원들이 전혀 알지못하게 평볌한직함으로있는것입니다. 과거부터 대기업의 정보수집능력이 국가중앙정보부를 상회해서 국가안보에 지대한공헌을하고 직접적 연결고리가되고 그렇습니다.북한의 대남정책은 절대권력자의 후광으로 남한과는 다른 조건이지만 우리도 대북은 별개문제로 정책과 정권의 영향을 받지않으며 지속적이고 독자적인활동을합니다.남북한 모두 대북대남 활동자금은 중앙정보부로부터 오는것이아니라, 일반기업 융자금형식을취하고이부분에서 이북이 남한에 유입시키는 공작금에 훨씬 자유로울것으로판단합니다.만약 이북에가서 정치국외에 대남관련부서에 전화한다고 가정하면 네 00농장입니다. 00사업소입니다.양측 모두 과거부터 앞으로도 이렇게 끊임없이 철저하게 자신들을숨기면서 활동해갑니다.70년대 들어서면서 이상한?무전기의 신호체계는없어졌읍니다. 탐전이 너무 발달하고 위험요소가 큰데다, 근자에 인터넷과 셀룰라폰의 발달로 무용지물이되었다고보면 맞을겁니다.지난 96년도 잠수함침투좌초때 무장공작조가 산으로 북상하면서 비퍼형발신기로 두세번 이북공작부에 이동위치를 알린적있읍니다. 한번누르면 0.1초가 소요되는, 아주 미세한전파도 탐전이되는데 요즘들어 누가 무전기를사용하겠으며 첩자용무전기는 구시대유물로 이미 25년전 박물관에안치됐다고보면 됩니다. 무전기 사용하지 않는 신호전달체계에선 남한이 절대적 우위에있었는데 요즘은 남파공작들이 한국의 인터넷을 통하여 훨씬 자유롭게 직접적전달이 잘 이뤄질것으로 보입니다.과거에 "간첩잡아 용돈쓰자"는 구호가 전국적으로 유행하고 간첩은 걸인차림의행색이 많았지만 요즘은 장,단기 남파공작이나 고정들도 시대의흐름에따라 인텔리젠트한 계층이 대부분일것으로사료됩니다.근자에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교포들속에 상식적으로 상당한숫자가 있을것이고 위급을요하거나 고위층이 직접 개입해야할 그런 사안이아니라면 육상과 해상침투도 삼가할겁니다.북한만이아닌 중국정보부의 대 한국첩자가 조선족들틈으로 상당수 유입되었을것이고 군사뿐아니라 산업에대한 첩보활동 이런것이 활발히이뤄질것으로 판단됩니다.장기적안목에서 중국에의한 대한군사첩보가 이북의 대남첩보수행보다 비중이 많아지고 중대하게될것이며중국을 비지니스때문에 자주 왕래하시는분들은 어느경우도 현지인과의 대화에 자신의 군사경험발설을 삼가해야하고 입단속에 유념해야합니다 (정보는 국가간이면 어떤것이라도 뭐든지 정보가되는것입니다)오늘은 지금 이시간도 남한지역에 상당수 침투하여있을 북한의 남파공작원들에 대해 저의소견을써볼까합니다공작원은 인간의 극한상황을 견디도록 훈련된기계와 같은사람이므로, 이런 남파공작원 포착하기가 수월하지 않습니다. 국내에 이미 들어와 눌러살고있는 고정들이 여행을 가장하여 침투가 용이한지역을찾으러 항상 다니는것이고 남한의 실정을 잘모르는 북한의 정보처에 사진과 도표등 상세한정보가 전달되게됩니다.수십년전부터 남한 전지역을 이잡듯뒤져 휴전선부터 해안일대등 몇천분의 일의 아주 세세한지도로 작성이안된곳이 없을겁니다.고정들의 목표는 군사시설뿐아니라 사회의 일반적인지식도 고정의목표이며, 일반인에겐 전혀 무관심한 도로와 교량부터, 등산로며 등산객출입의 대충적숫자와 등산로파악등 사회일각의 눈엔 스쳐가는 모든것이 대상이 되며 바다낚시꾼으로 가장한 고정의정보를 토대로 해안침투에대한 정보파악, 이렇게 고정들로부터 파악되고 전달된것을 토대로 작전수뇌부에서 계획을세워 남한일대의 고정들에게 명령이시달되고 이차삼차 세밀한분석과 실현가능성을 분석완료해서 성공가능한지역으로 침투하게됩니다.남북한 막론하고 고정의 헌신적정보를 토대로하지않는 침투는 실패확률이 너무 많으므로 공작들의 침투엔 반드시 고정이 있었다고보면 맞을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정들 잡아내기가 하늘의별따기입니다. 요즘은 차량과도로가 발달되고 레져가 발달해서 산으로 들로 해안가로 놀러다니는사람이 너무많아 사실상 특정몇곳을 제외하고는 통제도 어려울겁니다.남한의정보는 북한에 완전히 노출된지 이미 오래전이고, 북한지역은 미국의 정찰위성과 산업위성들의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남북이 대치된 상황에선 정권들의 협약 이런거 상관없이 정보부처단위로 내부적으론 끊임없는침투가 이뤄지고 누가 대통령을하던, 김일성이 죽던, 정보부장이잘리고 이런것은 공작하고는 사실상 무관하다고보면 맞고, 위정자와 국회의원들에의한 정보부의 기밀문제들이 심사되거나 결정되어도안됩니다.4년이나 5년짜리 임기의 한시적월급쟁이인 국회와 대통령이 간여할일이 아니란것이 저의 소견인것입니다.그 애들 세상에 태어나기전부터 각 부서적체계로 연속되어 내려오는 문제들이라 깊은지식없이 권력으로정보처를 좌지우지 결정짓는다면 수십년동안 공들려 쌓아온 적지속의 국방의촉각들이 우수수 무너져내리고 적지의 정보망이붕괴되면 국방의안위와 국민의생존이 즉각적으로 중대한타격을 받게되는것입니다.누가 대한민국의 실권을 잡던지, 정보부장을 자기사람으로 채우던말던 대북공작에관해서는 간섭하지 말아야하고 예산의삭감을하거나 보직을 멋대로 인사처리해서도안됩니다. 대북공작은 몇년임기후 짤리는 대통령의 자리와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면됩니다. 이북에서 남한에 고정만들기는 쉬워도, 남한에서 북한에 고정을 보존하기위하여 자결하고 죽어간 알려지지않은 애국적목숨이 너무도많고, 그들의 첩보를 토대로 국방의지표가되어야 할일들이많습니다. 정권들이 대북업무를 실적도없고 정치에 생색도 안나는 구석이라하여 홀대들 많이했지만 그들이 현재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불가결하게 공헌한것이 대북공작이라고 생각하면됩니다. 신체의 각부분에 있는 말초신경이없으면 감각이둔해져서 위험을 감지못하고 위험대처능력부족으로 반사성이 둔화되어 죽음을 당할 공산이큰것과 같은겁니다.다시 요약해서, 각 부대단위별로 일선의첨병과 수색과 정찰없이 전투를하면, 그 부대의 생존이 있을수없는 것이고 내무반 초병이없이는 잠자는사병들의 목숨이 없는것과같다고 이해할수있습니다.일반인들 생각엔 첩자가 모르스무전기로 소리내어 정보를전달하고 007 처럼 변장에능하고 소음권총을쏴대고 여자를거느리고 이런 환상들을 가지고있을겁니다. 물론 그런경우가 없는것은아니지만 그런일이 발생하는 지역이 따로있을것이지만 전 솔직히 대충 감으로생각은해도 그방면은 전혀모릅니다.침투공작원이 필요한것은 남북한 모두 대체로 공작금전달, 요원호송, 정보반출, 납치, 폭파, 암살등 필요에의해 이뤄집니다.(군장성납치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일이고 이런데 사안을 두는것이아니고 일반인을 납치하여 무장공작원 및 간첩교육용으로 사용한것이 과거엔 많았읍니다) 지금은 탈출한 북한주민만으로도 쉽게 현지실정을 알수있는기회도 많을겁니다. 여하튼, 북한의공작원이 침투하여 그가 사회에서 암약하는 고정이된다면 찾는방법이어렵겠으나 무장공비로 일컬어지는 호송과 정찰 및 파괴를하는, 사회로나오지못하고 산속에서 활동해야하는 남파무장공작원은 일반병사들이 이들을 다루기엔 단수가 너무 모자른것으로서 근래 국가적으로 문제가되고있는 북파공작원들을 활용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고충을 각곳 홈페이지에 들어가 살펴보니 짐승처럼 훈련시켜 국가가 목숨을 저당잡아 이용하고 사용가치가 없어지자 개패듯 패기도하고 보수를 지불않고 부상자에 대한 원호대책도 없고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게 뒷조사를해서 직업을 갖게하지 못하는 방해책동과 여권발급불허해서 해외에나가지 못하게하는 도저히 그런것입니다. 공작원 출신들중에 이 부분에 회의적인분들도 많을겁니다.저는 그런일 당해보지않아서 수긍이안되지만 실제로 그런일을당했으니 사생결단하고 집단시위를벌이는것로판단됩니다.공작원의구성을 특성상 현역군인으로 할수없는것을 국민들이 먼저 이해하셔야하고 국가는 어떤일이있더라도 그들의 임기후 뒷조사를해서는안됩니다. ** 북에 다녔으니 혹시라도 북에 이중등록된 첩자가 아닐까? ** 무장공작원으로 인간기계가 되었으니 퇴직후 사회에나가서 일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저들이 북에서 파괴공작하던경험으로 남한을 부수지는않을까? ** 침투하여 문서절취하던 실력으로 남한의정보를 빼가지않을까?** 직장잡아 일하다가 사회에 문제를 발생시키지않을까?이 외에도 여러가지 염려되는 문제들로 인하여 그들을 이용후에 사회에서 매장시키려는 황당한짓들이 있는것 같은데 간단히 말해서 그들이 폭력성이 좀 있는 사람이라해도 내나라국민이고 그들을 그렇게 훈련시킨것도 대한민국사람이었고 그들이 대한민국의사명을 받고 이북에 침투하여 암살하고 폭파하고 절취한것인데 이후에 그들을 애국지사로받들지는못할망정....단기공작원 그들의 주장도 일리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자세히 각자의주장을 살펴보니...제의견은 가급적 그들을 퇴사후에 대한민국의 인적자원으로 활용을하되 그들의 체력과 절대적경험을 바탕으로 남파 무장공작원을 색출하는 임무를부여하고 활동케하면 합당할것같습니다.직업군인의 보수와 처우로하고 직업군인에 적용되는 혜택을 부여하고 임기중 사망하면 국립묘지안장부터사망시 지급되는 위로금 및 연금등 각종 혜택을 차별없이부여하면 그들 공작원출신들도 좋고 국가도 좋은 방안이되지않을까합니다.근자에 대북단기공작이 축소되었다하더라도 북측에대한 남한의공작은 중지되어서는 안되는것이고, 물론 분위기상 파괴공작은 삼가해야할부분도 더러있을것이나 물색하고 꼬임위주로 하던 과거의행태를 버리고 북파공작원을 사회로부터 공개모집해서지원자에한해 정당한보수를 지불하고 훈련을시키고 그들을 그냥 놀고먹게 버려둘것이아니라 무장공비 출몰가능성있는 해안이나 산악지역에 투입하여 남파공작들을 사전에 분쇄하는방안을 강구하는것이 합당하리라봅니다. 일반 군인들을 현역들이교육하고 남파무장공작을 색출시키는 경계병으로 활용한다는것은 과거 실력이미숙한 국가대표중에 나이든 고참순으로 축구국가대표감독을 연줄로맡으며 허구헌날 같은 수준의 국가대표를 양성하여 단 일승도 하지못했던 월드컵을 상기해야할것입니다.공작에 관하여 히딩크보다도 훨씬 노련한 관록있는 북파공작원출신들을 구제하고 그들을 정착시킬수있도록 지혜를 좀 모아보시기를 권유합니다.큰물에서놀고 목숨을 저당하고 이북의 산하에서 산전수전을 겪어본 백전노장들로 소정의교육을 이수케하고, 그들이 직접 자신의 값진경험을 토대로 현역들을 훈련시킬수있는 교육담당으로 활용도하고 북파공작원훈련을 양성화해서 평시엔 젊은 그들로하여금 남파공작원색출과 기도은닉의 사전분쇄를위한 산악과 해안탐색 및 잠복등으로 민생치안의 안정과 국방의안정을 가져올수있다는 것입니다.저의 오랜경험으로 공작원의 가장 큰적은 공작원인것입니다. 북한은 과거부터 북파공작원이포착되면, 남파공작 전문부대인원이 출격하고 그들의 지시와 참여로 추격전이시작되었던것입니다.일반병사들로는 대량의 인원투입으로 차단과 잠복과 수색이이뤄지지만 공작부대가출격하면 그들은 북파공작을 맞상대로 자신들의 고도화된 훈련방식을적용해 사냥개가되어 추격전을벌입니다.또한 전지역을 꿰뚫어보고 도피가능한지역을 파악하여 북파들을 생고생하게만드는 주요임무를 그들이 맡는것입니다. 그들의 숫자가적어 그들로부터 직접 잡히는 공작들이많지는않겠으나 그들의 지략에포착되어 섬멸된 북파들이많을것입니다.단기파괴공작원들은 포착시 그들과 조우하게될일이 드물겟으나 장거리 침투공작원들에게 가장 치명타가이애들의 두뇌와 체력과 경험입니다. 제가 00년전 몇번째? 침투중 (평양근교라고 하겠읍니다)평양근교의 보통 야산6부능선에서 초저녁 해질무렵에 포착되어 죽음직전에 간적이있습니다. 언제 발각된지는모르나 이상해서 살펴보니 북괴군이 아래에서 수색하며 좁혀오고 시야에 들어온것만도상당한 병력이라 간단히 이제 죽었다고 생각한적이있읍니다. 비트속에선 항상 위급시 어떤 행동방향을 미리 설정해놓고 상황대처를하며 헤어져도 다시 만나는지점들을 여기저기설정해둡니다.이런 상황에선 단독으로 각자 적지를 탈출해야 효율적이지만 동료들과 삶과죽음을 언제나 같이해야기에 머리굴려 일단 남으로뛰고 어느지점?에서 서부해안가로 탈출시도를 노출시키자 결정하고 세명이서 동시에 배낭은포기하고 식량을 주머니에휴대하고 카빈과 실탄과 수통,지도만 소지하고 구르며 뛰기시작한적이있읍니다.이때 상황을 참고적으로 약간 기술한다면, 반잠을 자던 나와 형은 아주 골아떨어졌고 외부를살피던 형이 톡톡 건드려 일어났더니 걸린것같다해서 다릴주므르며 혈액순환을도운며 숙의하고 각자 뚜껑을 조금열어보며 확인후 의견이 걸렸다고결정되어 튀기로 한때입니다.(야산중 시계가 좋은곳이라 6부에 발길닿지않을곳 낮은지점을 보수하여 나무와풀로 깜쪽같이위장하뒤잠을자고있었는데 출발 몇시간전에 발각이된겁니다. 지금도 그때 왜 포착됬는지 이유는모르지만 당시생각에 형하나가 미련하게 대소변때문에 밖으로 기어나갔던것이아닌가 생각이들지만 본인이 아니라해서 덮어두고 모른체했던일이고, 그때 두더지굴도아니고 얕은곳 적지를골라 누워있을정도였는데 대소변도 누운채로해결해서 땅을파고 처리해야하는건데 그게 잘못있던걸로 두고두고 생각나던부분입니다) 이때 기어나와 중턱을 타고달리다 그들의 시야에서 안보이면 산넘어 무작정 남으로튀기로하고 실행하는데산아래서 올라오던 놈들로부터 직접사가 시작되어 총알이 사방에박히는겁니다. 일반병들 그때나 지금이나 뻔한것이 이런상황서 엎드려쏴, 앉아쏴가아니고 자신들 숫자가많으니까 흥분해서 뛰어오며 쏘아댑니다.하도 급해서 뛰며 뒤를돌아봤더니 잘하면살겠다 생각이드는데 딱들어맞았읍니다.모퉁이를 돌아서면서 형하나는 산넘어를살펴 판단하기로하고 00형하고 둘이서 어차피 죽은거 저것들하고 같이가자는맘에 육안으로 들어오는 한놈씩 조준사격으로 사살하고 이때 우리 살겠다고 죄없는 일반북괴군인들 참 많이죽였읍니다.일단 보이는대로 정확하게 잡아버리니 흥분해서 정신없이올라오다가 나중엔 머리도못들고 굴러서도망가는 난리법석떨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선합니다. 일반사병들은 남한이나 북한이나 대체로 마찬가집니다하여간 공작원은 발견즉시 사살못하고놓치면 이후엔 도망치는산짐승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이때 신속히 산넘어 어두워지는 사방을살피고 도피로 정해놓은쪽으로보니 북괴군들이 몰려들고있어 완전히 어두울때까지 산속서 있기로하고 이동중 도피로쪽의 북괴군이 그물망이아닌 분대대형으로 분산되어 수색하며오는 그곳으로 정면돌파로 빠지기로결정하고, 내려가며 그들의 틈새쪽으로 은밀이동하다가 그들을 좌우쪽 이십여미터로 지나게하고 숨죽이다가 빠져나왔었다. (병력이 완전히 오질못해서 5분대기조정도 병력이었기에 살아난것이지만 공작은 죽는 순간도 기도은닉의 대담함이 목숨을지탱해준다) 위험한순간에는 나를 죽이고 숨으면 살수있는겁니다.이곳을 빠지면서 뛰는데 대규모병력들이 차량으로, 구보로집결하는데 과감한 순간적결단이없었으면 분명 죽었을것이다. 이후 사방팔방서 병력이 분산배치되는데 오로지 체력과 죽음을불사한 돌파로살아남은거다.(북한이나 남한이나 현역들이 공작원들의기동성을 간파못해 지나고난뒤에서 찾는건 어쩔수없을때였다)모처로 신속돌파하여 서부로 방향을틀고 서해쪽으로향하여 뛰다가 다시 북쪽으로 새벽까지뛰었다.700고지의 산속으로 숨어들어 도피처구축을 했는데 그때 그 일대를 탐색하던 무리들이있었고 이애들이 분명 북한의 정예남파공작원들로 확신하는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탈출하여 서쪽으로뛰었다 허를찔러 북상했을때 우리의 계산대로는 탈출지점서만 직선거리로 50 키로가넘는 그곳 산악에 수색대가있었다는것은그들이 아니고선 있을수없는것이었기때문인데 어쨌던 수십명이었던 그들에게 발각은안되고 동해쪽으로 방향을틀어 중부전선으로넘어와서 귀환했지만 이렇듯이 공작조를잡는덴 상대의 노련한 공작조의 적중률이높다는것입니다.고기도 먹어본놈이 잘먹는것이고 과부심정은 과부가 홀아비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하면 이해가될겁니다.북한에 침투해보진않았지만 교육을받고있는 사람들이나 경험자들을 사시사철 어느곳에나있는 무장공작원토벌에 사용한다면 그들 사기에도좋고 현역군인들경험에도 좋고 나쁠일은 전혀 없을것으로판단됩니다.=======================================포착때는 나를 죽이면 산다 ! 24시간중 어느때나 깨어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것이 지금도 어느 하늘아래에는 꿏다운청춘이 숨도 제대로쉬지못하고, 음식도아닌거 조금씩 먹어가면서 반잠들어있을것이고 어느 청춘의불꽃은 산비탈 어느곳에서 산짐승이되어 뛰고있을것이다 이런생각 참 많이합니다.산짐승이 그렇듯이 공작원은 깊은잠을들지못하고 아무리 피곤해도 눈을 절반 뜨고자는 반잠이고 그것도 깊은잠들까봐 1시간정도씩 교대로자야하고, 토끼의 귀를하고 사방의소리를 감지하면서수시로 손톱으로 귀를 꼬집어 깨어놔야하고 각자 서로를 잠못들게 고문을해야합니다.비오날은 작업모자하나로 하늘을 받치고 덜덜떨면서 그렇게 반잠을자고 간혹 생각나는것이 언제나 두다리 길게하고 엄마다리베고 늘어지게자볼까나... 이런저런생각이 산중생활의 생각들입니다.** 어제 왜 그들을 죽였지? 내가 조금만 조심했으면 그들과 만나지도않고 죽일일도 없었을텐데 나보다 나이많은형들일텐데 그**들도 부모가있고 형제자매 다 있을텐데... *놈**들 그냥 수풀이나 뒤지면서 옆으로나 다닐것이지 왜 횡렬로 곧장 올라올게뭐냐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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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유령부대... 강화도에 존재한 또 하나의 실미도 "까치부대"
강화도에 존재한 또 하나의 실미도 ‘까치부대’
김포저널 발굴 특종 7년간 존재 119명 생존, 8명 정부로부터 보상받아
마니산 정수사 일대, 현재 훈련흔적 그대로 남아
북한 8군단소속 김신조가 청와대를 습격한 1968년이후 74년 남북공동성명이 있기까지 7년간 국내에는 북파공작부대가 존재했었다.
육군은 HID, 공군은 실미도부대, 해군은 UDU, 그리고 해병대가 운영한 MIU부대(해병북파공작대)가 그것이다.
강화도에 존재했던 MIU부대(일명 ‘까치’부대)는 육상침투부대인 HID, 해상침투가 목적인 UDU부대, 공군첩보부대 실미도부대와 달리 육, 해, 공 어느 곳을 막론하고 즉각 침투하여 임무를 완수하는 ‘살아서는 돌아오기 힘든’ 대한민국 최고의 전천후부대로 당시 대원들은 전한다.
까치부대가 주둔했던 강화도 마니산 정수사 부근 일대는 현재 울창한 수목으로 뒤덮혀 있지만 부대의 흔적들은 지금도 찾아 볼 수 있다.
내무실이 있던 축대, 탄약고, 하강 훈련장의 로프매던 지주대, 유격장이었던 암벽교장 등이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채 세상에 알려질 날을 기다리며 침묵하고 있다. 이곳 암벽교장은 떡갈나무 숲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암벽에 올라가면 강화도 남단 갯벌과 인천 영종도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MIU부대’(일명 까치부대‧해병대 북파공작대)는 ‘68년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 사건’ 직후 실미도 부대와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해병대에서 창설한 비편제 특수부대다. 계급은 없었으며 부대장은 회장, 부부대장은 사장, 다음은 전무, 상무, 과장, 직원등 일반회사에서 사용하는 직함을 계급으로 대신했다.
1968년 11월 중앙정보부는 최초 장기하사관 11명과 사병 2명을 차출하여 마니산 서남쪽 정수사아래 텐트를 치고 합숙훈련을 시작하면서 MIU부대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2년후 하사관 15명 사병 15명을 선발하여 2진으로 투입시켰으며 현재까지 밝혀진 총인원은 장교(공작관) 13명, 요원 158명이며 현재 연락이 가능한 요원은 공작관 5명, 요원 114명이다.
그중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자살하거나 혹독한 훈련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요원이 13명, 병원신세를 지고 있는 요원이 4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MIU부대’의 목적은 북한 8군단같은 특수부대를 일격에 격퇴하고 주석궁에 침투할 수 있는 목적으로 이뤄졌다. 따라서 선발은 해병대원중에서 우수하고 강인한 자를 중심으로 선발하였으며 선발기준은 장남과 외아들은 제외하고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과 특히 운동 주특기자를 대상으로 했다.
선발과정에서 외아들과 장남을 제외한 것은 훈련과 작전중 사망해도 전통적인 가족제도를 보호하기 위함이며 당시 고교졸업자 이상을 선택한 것은 북한의 모든 사항을 암기해야 하는 지적능력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선발은 야구선수의 경우 100M 떨어진 곳에서 달려가는 사람을 상대로 돌을 던져 쓰러뜨릴 수 있냐고 질문한 뒤 있다고 하면 확인과정을 거쳐 입대를 결정했다.
복싱선수 출신으로 중1에서 고3까지 6년을 선수 생활한 이질범(해병대북파공작원 회장)씨의 경우 “같은 덩치 3명과 싸워 몇 분내 쓰러뜨릴 수 있냐”고 질문받고 “30분내 자신있다”고 답하자 실제 경기후 입대가 결정됐다. 입대후 요원들은 위장을 위해 머리를 길게 기른 상태였으며 북한군 복장에 무기조립, 북한상황을 숙지‧암기하며 혹독한 훈련에 임했다. 평상시 임무수행 요원은 40-50명을 항상 유지했으며 훈련중 부상을 입거나 사망해 결손인원이 생길 때마다 인원을 보충하여 동일한 능력과 힘을 유지했으며 모든 요원들은 훈련시 “나라를 위해 몸바치는 것이며 따라서 국가에 보상을 요구하지 말라”는 유서를 쓰게 했다.
훈련은 계절별로 내용을 달리했는데 봄에는 강화도내 하수구를 대상으로 생존훈련을 했으며 1주일은 하구수내에서 생활했다. 하수구훈련은 평양시내에 잠입했을 경우 피신과 생존을 위한 유일한 공간이란 점에서 선택됐다. 여름에는 고무보트(IBS)를 이용한 해상침투훈련, 가을에는 공군첩보부대에서 공수훈련을 받았으며 겨울에는 대관령에서 스키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담력훈련을 위해 비오는 날 공동묘지 밑을 파서 관위에서 취침하는 훈련도 병행됐다
침투를 위한 훈련은 대형 에드블룬에 수소가스를 넣어 부공하고 3000M 상공을 유지한 체 북풍을 이용, 잠입하는 훈련으로 에드블룬 2개를 연결하기도 했다. 치악산 정상에서 훈련했을 당시 단양 논에 떨어졌는데 간첩으로 오인, 영주경찰서에 연행되어 중앙정보부 확인을 거쳐 풀려나기도 했다. 모든 부대의 훈련, 특히 북파공작대 훈련에는 침투와 복귀를 위한 기안계획이 있으나 ‘MIU부대’는 투입작전계획은 있으나 돌아오는 계획은 없는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한 훈련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75년10월 부대내에서 사병이 당직사관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해군첩보부대 이관철부대장이 ‘MIU부대’ 김기태회장을 찾아와 ‘북한과의 화해무드’를 말하며 더 이상 특수부대 존재이유가 없다며 해체시킬 것을 명령함에 따라 7년 동안 비밀리에 악명을 떨치던 해병북파특수공작대(해군첩보부대 503기지)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후 ‘MIU부대’ 출신들은 2003년 12월 해병 북파특수공작대본부를 결성했다. 이들은 북파공작대 ‘MIU부대’ 실체를 인정받기 위해 2003년 12월부터국정원, 정보사령부, 해병대를 방문 실체 확인을 어렵게 받아냈다.
북파공작 특수임무자의 특별보상법과 예우법(2004년 1월8일 국화통과)에 따라 보상해줄 것을 줄기차게 투쟁한 결과 121명이 보상을 신청했으며 현재 8명이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았다. ‘MIU부대’ 실체 확인을 위해 홀몸을 동분서주했던 해병 북파특수공작대본부 이질범회장(현재 양평군 거주)은 해병대사령관에게 △실체인정 △해병역사지에 기록 △위령탑 또는 충혼탑건립을 주장했으며 확답을 받은 상태다. 이질범 회장은 인터뷰에서 강화주민께 죄송함을 전했다.
훈련과정에서 다소간 주민들게 피해를 입혔으며 그것은 생존을 위한 절실한 행동으로 “기회를 만들어 사과하고 싶다”고 전했다. 마니산 ‘MIU부대’ 훈련장은 최근 해병대 수색대를 전역한 해병 예비역들이 ‘해병생존훈련단 그린베레’라는 해병대 훈련캠프 를 운영하며 선배들이 훈련했던 곳에서 그 정신을 사회인에게 전하고 있다.
MIU(Mission Impossible Unit)는 ‘불가능이 없는 단체’라는 뜻으로 제2대 회장인 이도형씨가 대한민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로 뻗어가 언제든지 특수임무를 완수하라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청룡특수수색대는 예전 마니산 일대에 일명 "마니산 까치부대"로 칭하는 MIU 의 전신이다
MIU는 HID,UDU와 함께 당시 북파부대로 활동했었으나 불가피한 연유로 인해 이후 해체(684유격부대-실미도 부대관련)되었다 해체이후 MIU 출신(부대장을 제외 1사단특수수색대에서 차출을 통해 전원하사관으로 이루어져 있었슴)들은 해군의 UDU로 해병대의 여러부대로 갈려지게 되었고 남아 있던 잔류인원들이 청룡특수수색대의 창설멤버가 되었다(77.1.13창설-당시 초대 수색대장 대위 박만희)
청룡수색대를 방문하게 되었을때 부대입구에서는 이런 문구가 있다
"하늘!땅!바다! 그리고 지옥에서의 도전!"
청룡특수수색대는 중대급편재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소수의 병력이다 이 부대의 상징은 "흑상어" 모토는 간단하다 "언제 어디서든-Any time! Any where!) "마니산 까치부대"의 후예라는 상당한 자부심을 가진 이들은해병대에서 천리행군을 최초로 실시한 부대이기도 한 이부대는 년 야외훈련만 8개월 이상 이루어져 있다
역사가 짧다는 점에서 전술적인 발전을위해 더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이곳 부대장은 지적한다 하지만 결코 기술적인 측면에서 뒤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오히려 더 나은 점이 많다고 한다 "저희 수색대는 기본 교육장소가 저수지 와 한강 하류 염화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통상 저수지 가 바다보다 훈련하기에 더 쉬울것만 같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반대입니다" 그는 이점에 대해서 설명하며 저수지는 일단 물속에 들어가면 시야 확보가 어렵고 한치 앞도 내다 보이지 않는다며
가장 큰 문제점이 있다고 말한다 특히 염화강 같은 경우 유속이 7-8노트로 빨라 일반인들은 들어가는것조차 엄두를못낼 정도라 한다 또한 수온이 5도 이하로 물에서 교육받아야 하는 부대원들에게는 혹독한 추위와의 싸움도 감수해야 하는 이중고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악조건에서도 대원들은 모든 훈련을 아니 더 강도 높은 훈련을 해내고 있다고 수색대장은 강조한다
"여하튼 적지와의 근접거리로 인해 지속되는 긴장감 속에서도 이러한 강인한 교육을 받고 있는 우리 수색대는 그야말로 언제 어디서건 명령이 떨어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임무완수를 위해 철저히 대비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하는 수색대장은 이렇게 잘 따라주는 대원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또한 "청룡수색대원들은 접적지역 즉 전쟁발발 동시에 가장 집중 포화가 예상되는 중심으로 투입되기 때문에 임무 완수를 위해선 교육훈련의 고통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수색대의 작전명령은 팀이 임무수행을 하는 것인데 이에 따른 팀별 교범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있다 물런 이점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고 다른 부대들 또한 똑같습니다"라고 지적한다 어려운 개념만을 나열하는 것이 교범이 되어선 안된다는 그의 주장은 실제 상황 속에서 습득할 수 있는 것들로 예를 들어 교범이 세부적으로 짜여진다면 부대원들은 손쉽게 소화할 것이며 이해가 빠르다는 것이다
청룡특수수색대의 작전환경은 거야말로 다양하다 이들의 임무가 말해주듯 교육훈련또한 기초교육과정인 특수수색교육에서 과거 MIU부대가 사용하던 마니산 일대에서의 암벽등반과 각종 산악침투,폭파 훈련 서측도서와 서해해상,한강하구와 염화강 일대에서의 잠수,수중폭파와 해상침투,목표타격 훈련,수색매복정찰,생존,도피,저항,탈출,회수,통신,각종화기 조작법등을 실시하며 강원도 00에서는 동계혹한기 일환으로 7주간의 훈련이 이루어 지며 특전사와 해군특수전여단에 기본공수에서 고공침투훈련과 UDT교육등의 위탁교육을 실시하며 1사단,6여단 특수수색대와 미해병 폴스리컨은 물런 특전사,해군특수전여단과의 연합훈련을 통해 전술전기를 연마하고 있다 이부대 이00 하사의 경우 8개월 이상의 야외훈련으로 인해 학교를 잘가지 못해 항상 교수님들께 미안한 맘 가지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끝으로 부대장은"부대에서 고등훈련을 이수한 베테랑 하사관 자원을 잘 활용하여 이를 지휘체계에서도 고급인력의 생생한 현장 체험을 수색대원들에게 전파하여 개선점을 찾아 이끄는 체제가 되었을때 작전 능력은 배가 됩다 그리고 해병대의 하사관 TO관련해서 베테랑 하사관들이 매년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게 되는데 이또한 해병대가 풀어야 될 과제 이기도 하다"라고 전했다
청룡 특수수색대원 들의 아침마다 외치는 구호가 생각난다
"악에서 악으로! 안되면 될때까지! 안하면 할때까지!"
알 림 : 위 사진은 기사내용과 무관함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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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대한민국 군견이야기...
군견훈련소 퇴소식 장면.... 군견을 대신해 군견병이 퇴소식에 참석한다.
군견에도 계급이 있다? 라고 물으면 너도나도 틀린대답이 나온다....
결론부터 말하면 군견에는 계급이 없다....*^^*
군견(軍犬, ARMY DOG)은 이름 그대로 군사상의 목적으로 특별히 사육되고 훈련시키는 개를 일컫는다.
특수한 목적으로 훈련되었기 때문에 그 능력 또한 특별하다. 후각은 사람에 비해 무려 1만 배,
청각과 야간 시간은 각각 40배와 10배에 달하며, 실전에서는 군견 1마리가 적을 수색하고 추적,
제압하는 능력이 1개 중대의 전투력과 맞먹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개 중에서도 용맹하고 충성심 높기로 정평이 난 군견.
육군 제1군견훈련소를 찾아 이들 군견의 세계에 대해 알아보았다.
위사진 : 일년에 1회, 10주 동안 진행되는 군견 보수교육을 수료한 모든 군견과 군견병에게는 소정의 수료증이 수여된다.
현재 우리 군에는 셰퍼드, 말리노이즈, 리트리버 이 세 가지 종이 보급되어 있으며 그 비율은 셰퍼드가 약 80%, 말리노이즈가
20%, 리트리버가 각 2%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군견 중 진도개가 없는이유는?
진도개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과 복종심이 유달리 강하기 때문에 첫 정을 준 주인을 오랫동안 잊지 못한다. 제대한 군견병을 찾겠다고
부대를 나서거나 뛰어난 귀소본능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곳으로 가겠다고 근무지를 이탈한다면 영락없는 탈영견 신세가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위사진 : 군견들의 산후조리원.... 10두 가량의 강아지들이 어미견의 젖을물고 있다.
#2. 개나 소나 ‘군견’이 될 수는 없다!군견들은 순수 혈통의 종모견에서 한 번에 약 5두에서 10두 가량이 태어나게 된다. 3개월이 지나면 중견동으로 옮겨진 모든 강아지들은 사람의 명령에 복종하고
체력과 체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초 군사훈련을 받게 된다. 7개월이 되어 제법 성견이 되면 이때 비로소 ‘군견 적격 심사’를 거치게 되는데,
이 심사를 통과해야만 진정한 ‘군견’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위사진 : 탐지견 훈련장의 모습
#3. 군견 팔자가 결코 상팔자는 아니다! 훈련 과정을 수료하고 일선부대에 배치를 받는 군견은 일 년에 고작 150 마리 정도.
이 일당백의 전사들은 자기의 주특기에 따라 전방 보병사단의 수색중대나 수색대대, 전평시 군의 탄약을 취급하고 보관하는 탄약부대 예하의 폭발물처리반,
특전사와 같은 특수부대 등 전군 각지의 다양한 부대에 배치 받아 평균 8년 정도 현역으로 근무하게 된다.
위사진 : 군견훈련소에는 일반 부대에서 보기 힘든 수의장교가 근무하고 있으며, 군견의 질병을 치료하고 과학적인 건강관리를 위한 초음파 검진기 등의 첨단 의료장비도 보유하고 있다.
위사진 : 애완견이나 군견이나 마찬가지로..... 육포를 보고 침을 흘리고 있는 군견....*^^*
위사진 : 비록 군견에 계급은 없지만 군인과 마찬가지로 식별과 관리가 용이하도록 고유한 견번을 부여하고 있다.
#4. 군견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
군견도 계급이 있다?흔히들, 군견을‘하사’계급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군대에서는 군견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지 않지만 민간에서 군견과 같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순수혈통들은 수 천 만원에 거래되고 있고 거기다 군견과 같이 특수한 임무수행 목적으로 양성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이 소요된다.
그만큼 몸값(?)이 비싸고, 양성이 까다롭기 때문에 ‘하사’라는 간부 계급에 준하여 정성을 기울여 관리한다는 방침이 이러한 오해를 낳았다.
제로 군견훈련소에는‘너보다 계급이 높으니 매일 아침 경례를 하라’라고 주문하는 짓궂은 선임병의 장난에 속아 넘어가는 이등병이 간혹 있다고...*^^*
훈장 받은 군견 들어봤어?우리나라에서 훈장을 받은 군견은 모두 두 마리.첫째는 1968년 1·21 무장공비 청와대 기습기도 사건(영화 실미도의 소재가 된 이른바 ‘김신조 사건’)
당시 무공을 세워 인헌무공훈장을 받은 견번 41번 ‘린틴’이라는 군견이다.
두 번 째 훈장의 주인공은 육군 제 21사단에서 활약한 ‘헌트’.헌트는 쉐퍼드 종으로 90년 3월 제4땅굴 소탕작전 시 북한군이 설치해 놓은 지뢰를 탐지, 자신의 몸으로 지뢰를 터뜨려 1개 분대원의 생명을 구한 명견이다.
말 못하는 짐승이기는 하나 사람의 생명을 구한 혁혁한 공을 인정받은 헌트는 군견으로서는 최초로 ‘소위’라는 장교 계급으로 추서된 선배 전우(?)기도 하니 말이다.
※ 제 1군견훈련소1966년 군견 16마리로 창설된 제 1군견훈련소는 2008년 1월, 사육과 훈련에 들어가는 경비를 절감하고 전국적인 군견 지원 등 운용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육군 제 3군견훈련소와 해군 · 해병대 군견훈련소가 제 1군견훈련소로 통합된바 있다. 현재 이곳은 명실공이 대한민국 최고의 군견 육성의 요람으로써 군견 관리 및 교육,
번식과 진료를 책임지며 연간 80마리의 군견을 배출해 육군, 해군, 해병대 등 전군 각지의 부대로 배출하고 있다.
대한민국 군견들은 1군견 훈련소에서 태어나 각 지역에서 임무수행을 하다가 죽음이 임박하면 다시 이 곳에 들어온다.
이 곳 군견 훈련소는 명실공히 대한민국 군견들의 요람이요 무덤인 것이다.
출처:http://blog.daum.net/armyinside
릴리알렌작성일
2009-12-1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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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박정희 대통령과 한미동맹의 역사
1969년 3월 17일 한미연합훈련의 시초라 할 수 있는 focus retina 공수훈련을 참관중인 박대통령과 스틸웰 주한미군 사령관
1. 한미연합훈련의 시작 focus retina
한미연합훈련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것이 팀 스피리트훈련이고 그 다음이 작년까지
한 rsoi 독수리 훈련이다. 그 훈련이 올해부터는 key resolve 훈련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최초 대규모의 한미연합 기동훈련인 focus retina훈련에 대해선 군사메니아들조차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2008sus key resolve 훈련이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한미연합훈련의 역사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2. focus retina 훈련 실시 배경
1.1969년 3월 17일 여주인근에서 최초의 한미연합 훈련인 focus retina훈련이 개시되었다
1969년의 3월은 한반도에선 한국전쟁 다음으로 가장 긴장된 시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의 북괴 124 특수부대의 청와대 기습사건과 같은해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당시 우리의 안보환경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그런 사건이었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한국 지원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68년도에 당선된
닉슨의 아시아 정책은 강력한 반공정책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이런 태도는
훗날 닉슨독트린으로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일대 변환을 맞게 되었다.
레티나 훈련장을 시찰하시는 박정희 대통령3. 미국 닉슨행정부에 압력을 넣은 박정희 대통령
이를 감지한 박정희 대통령은 닉슨 행정부의 태도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되었다. 박대통령은 미국에 대해서 방위공약 실천을 행동으로 보여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결과 69년3월에 한미연합훈련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focus retina 훈련이었다. 이 훈련의 핵심은 한미 양국이 공동으로 방위체제를 점검하고 신속한 기동력과 막강한 전력을 북한에 보여줌으로서 북한의 오판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 시기는 월남전이 한창이던 시기였으며 군사력은 북한이 한국보다 월등한 시기였다. 그리고 원래는 68년 11월에 연합훈련을 실시할 계획이었으나 ?『疵洸?사건이 발생함으로써 그 협상진행으로 인해 69년 3월에 훈련이 실시되었다. 이 당시 북한의 대남 군사적 목표는 속도전이라는 이름하에 전면남침을 통해서 미국이 참전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짧게는 보름 길게는 한달사이 에 전쟁을 종결짓는다는 북한의 군사적 목표에 대해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생존훈련 과정 시범을 보이는 한국군 공수특전사와 미 82공정사단
4. 포커스 레티나 한미연합훈련 탄생
그 과제의 결과물이 1969년 3월에 실시된 focus retina훈련이었다. 북한이 기습남침하더라도 미본토에서 긴급히 증원군이 파병될 수 있슴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다. 이런 계획이 가능한 것은 병력수송에 대형수송기인 c141이 투입될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인데,
구체적으로는 미 본토와 한국간의 1만3600㎞를 불과 30여 시간에 비행하여 완전무장한 병력 2500여명을 작전지역에 투입하는 사상 최장최대의 공수훈련이 focus retina 훈련의 핵심이었다. 이런 작전의 기본골격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실제로 당시 미최정예 부대인 82공정사단이 이 훈련에 투입되었고, 한국은 공수특전단장 정병주(鄭炳宙)준장을 선두로 한 600명의 공수단이 여주 남한강 일대에서 일제히 낙하했다.
▲한미 연합 공수부대의 낙하훈련을 참관중인 박대토령과 유엔군 사령관 찰스 h본스틸 대장
이 장면을 박정희 대통령과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자 유엔군사령관 찰스 h 본스틸 대장이 이 광경을 단상에서 함게 지켜 보았다. 이 훈련에 동원된 병력은 7000여 명에 달했으며 2700대의 차량과 2900t의 장비가 투입됐다. 그러나 이 훈련이 있은지 얼마 안있어 닉슨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아시아 국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박대통령은 69년 8월 미국을 방문하여 닉슨과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그 분위기는 냉랭 하기 이를데 없었다.
5. freedom bolt ( 주한 미 7사단이 철수하면서 연합훈련의 이름 변경 )
이렇게 시작한 한미연합훈련인 포커스 레티나 훈련은 71년도에 이름이 바뀌었다. freedom bolt로 명명된 한미연합훈련은 당시 월남전에 투입한다는 명분으로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시키는 정책에 대한 한국정부의 불만을 달래려는 의미도 있었고,미 7사단 철수에 따른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 대한 사전경고의 의미도 있었다. 그래서 이름자체도 한미양쪽을 강하게 연결하는 bolt개념이 들어간 freedom bolt이다.
▲창원 현대정공에서 m48탱크 개수작업을 시찰하고 있는 박대통령과 정주영회장
그러나 이 훈련의 이면에는 미7사단의 철수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 박대통령은 미국을 강하게 압박하여 7사단이 사용하던 잉여장비, 특히 m48 탱크등등은 한국에 그대로 남겨두고 떠나게끔 하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박대통령은 자주국방이라는 의지를 굳히고 본격적인 무기개발에 착수 하게 되었다. 여기서 대규모 한미연합훈련의 의미속엔 북한에 대한 경고메시지가 이외에도 내면적으로는 신속기동능력이 있는 미군이란 점을 내세워서 주한미군 감축의 구실로도 이용되었다.
이런 사례는 독일에서도 있었는데, 63년 10월 서독에서 1만8000명의 병력이 참가한 빅 리프트 공수 훈련이 있은 직후 서독에서 미군 1개사단이 감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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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팀 스피리트 훈련 탄생 - 김일성 김정일 전쟁범죄 집단이 가장 두??한 훈련
닉슨독트린으로 말미암아 주한미군은 약 7000여명 감축되었고 박대통령의 자주국방의 기치아래 무기개발과 한국군 현대화 훈련은 가속화 되었다. 70년대는 전체적으로는 북한보다 열세의 군사적 상황이었지만 이 당시 한국군의 지휘관은 상당부분 월남전의 실전 경험이 있었고, 국가안보가 최우선의 국가목표였다. 때마침 1975년 월남의 패망은 전 국민에게 안보가 생명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이르렀다.
▲84년 팀스피리트 훈련 당시 미군의 m60탱크
그러다가 76년 미국에서 카터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또 한번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그는 주한미군 철수를 대선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주한미군 철수정책은 완전히 왕따 취급받았고 실제적으로도 약 1200여명 철수에 그쳤다.
이런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정책 때문에 또다시 한미연합훈련의 이름이 바뀌었는데 그것이 바로 팀스피리트 훈련이다.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의지는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그 후 레이건행정부가 들어서면서 팀스피리트 훈련은 한미양군 약 20만명이 동원되는 아시아 최대의 군사 기동훈련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아마 이당시가 한미 양군의 전술적 차원에서 가장 차이가 없었던 때가 아닌가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군에겐 월남전 실전경험 지휘관과 더불어서 대간첩작전으로 생긴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비나 기술적으로는 미군에 비해 열세지만 군지휘 기동전술등 세부분야에선 서로의 노하우를 주고받는 명실상부한 동맹군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했다.
또한 80년대는 86, 88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준비로서 미국의 한국중시정책은 그 어느때 보다 높았다.아마도 이당시 레이건-대처-나카소네-전두환의 자유진영 라인은 2차대전당시 루즈벨트-처칠-드골로 연결된 자유진영 라인 다음으로 그 연결성이 굳건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78년 t/s 당시 훈련장을 방문한 박대통령
88년 t/s 당시 미군은 험비를 본격적으로 전술 운영하기 시작했다
82년 t/s 당시 b52에서 기뢰를 투하하고 있다.
볏짚으로 위장한 미군 m60-a5 탱크
여주일대에서 기동훈련중인 한국군
팀스피리트 훈련기간 동안 북한 역시 전국 비상령이 발동되어서 군단급 기동훈련이 벌어졌다. 이것은 북한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고 결국 94년 김일성이 죽기직전 김영상대통령의 방문을 수락한기에 이르렀다. 한국에서의 팀스피리트 훈련과 서독에서의 나토 기동훈련과 미국의 스타워즈계획은 결과적으로 구 소련이 몰락하게 된 연결고리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팀스피리트 훈련과정에서 한국군은 미군의 신개념 전술과 신형무기를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미군 역시 월남전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 현재와 같은 미군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준비를 하게 된 계기가 팀스피리트 훈련이었다. 80년대 팀스피리트 훈련때 까지만 하더라도 한미양군의 상호보완적 훈련이 가능하였으나 93년 팀스피리트 훈련이 중단되고 92년 걸프전과 2003년 이라크전을 치루면서 완전히 차원이 다른 미군이 된 현재 한미 양군의 합동훈련은 그 차이가 워낙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현재 c4i체제가 확립되고 실전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 미군과 아직 준비단계의 한국군이 발맞추어 합동훈련을 한다는 것은 다분히 보여주기 위함이 더 크다 하겠다.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과 rsoi훈련 개시
reception, staging, onw ard movement, and integration한.미합동군사훈련인 전시증원연습(rsoi)은 한반도 유사시 전개될 미군증원 전력의 이동과한국군의 지원 절차 등을 익히는 연례 연습.
그러나 이 훈련은 93년 김영상정권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이 팀스피리트 중단 배경엔 북한 핵위기라는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 칼루치가 대북특사로서 북한과 핵동결 협상을 할때 북한의 요구중에 하나가 팀스피리트 중단이었고 그것을 한미양국은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 이후 북한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2006년 2차 핵위기를 초래했다.
결과적으로는 한미양군의 팀스피리트 훈련만 없어지게 된 셈이었다. 이전에는 북한과 한국내 반미단체의 주장은 팀스피리트 중단이었는데, 이것을 달성한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주한미군철수 주장을 표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럼스펠트 독트린과 주한미군 감축
부시2기 행정부와 노무현정권의 불협화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때마침 럼스펠트 독트린으로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대두되는 과정에서 노무현 행정부내 반미자주파의 득세는 아주 손쉽게 미군이 한국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006년이후 12,500명의 주한미군 철수는 7사단 철수이후 가장 대규모이다.
전작권 전환과 key resolve
노무현 정권이 미국과 협의한 전작권전환은 한미연합사 해체를 합의하였다. 한미연합사의 전력이 어느만큼 큰지를 안다면 그렇게 쉽게 할 사항이 아닌데 아무튼 그렇게 결정이 되고 말았다. 그 전작권전환 협상이 이루어 진후 한미연합 훈련의 이름이 또한번 바뀐 것이 올해 진행되고 있는 key resolve 훈련이다. 이름 그대로 [결심의 열쇄]라는 의미에서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미연합훈련의 지나온 역사를 서술해 보았다. 무기체계와 스펙외에도 이런 일련의 역사를 알아야 더 의미있겠다 하겠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한미연합훈련의 역사에 대한 글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글이 없기에 아는 한도내에서 서술해 보았다힘이 없이 외치는 자주는 고립일 뿐이다. 동맹의 가치, 특히 주변에 중국과 일본이 있는 가운데 우리에게 미국이라는 동맹의 가치를 새삼 되세겨 볼 일이다.
< 출처 : 야후 - viggen(비겐)님 블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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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대한민국 군견
군견훈련소 퇴소식 장면.... 군견을 대신해 군견병이 퇴소식에 참석한다.
군견에도 계급이 있다? 라고 물으면 너도나도 틀린대답이 나온다....
결론부터 말하면 군견에는 계급이 없다....*^^*
군견(軍犬, ARMY DOG)은 이름 그대로 군사상의 목적으로 특별히 사육되고 훈련시키는 개를 일컫는다. 특수한 목적으로 훈련되었기 때문에 그 능력 또한 특별하다. 후각은 사람에 비해 무려 1만 배, 청각과 야간 시간은 각각 40배와 10배에 달하며, 실전에서는 군견 1마리가 적을 수색하고 추적, 제압하는 능력이 1개 중대의 전투력과 맞먹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개 중에서도 용맹하고 충성심 높기로 정평이 난 군견. 육군 제1군견훈련소를 찾아 이들 군견의 세계에 대해 알아보았다.
일년에 1회, 10주 동안 진행되는 군견 보수교육을 수료한 모든 군견과 군견병에게는 소정의 수료증이 수여된다.
현재 우리 군에는 셰퍼드, 말리노이즈, 리트리버 이 세 가지 종이 보급되어 있으며 그 비율은 셰퍼드가 약 80%, 말리노이즈가
20%, 리트리버가 각 2%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군견 중 진도개가 없는이유는?
진도개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과 복종심이 유달리 강하기 때문에 첫 정을 준 주인을 오랫동안 잊지 못한다. 제대한 군견병을 찾겠다고 부대를 나서거나 뛰어난 귀소본능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곳으로 가겠다고 근무지를 이탈한다면 영락없는 탈영견 신세가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군견들의 산후조리원.... 10두 가량의 강아지들이 어미견의 젓을물고 있다.
#2. 개나 소나 ‘군견’이 될 수는 없다!군견들은 순수 혈통의 종모견에서 한 번에 약 5두에서 10두 가량이 태어나게 된다. 3개월이 지나면 중견동으로 옮겨진 모든 강아지들은 사람의 명령에 복종하고 체력과 체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초 군사훈련을 받게 된다. 7개월이 되어 제법 성견이 되면 이때 비로소 ‘군견 적격 심사’를 거치게 되는데, 이 심사를 통과해야만 진정한 ‘군견’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탐지견 훈련장의 모습
#3. 군견 팔자가 결코 상팔자는 아니다!훈련 과정을 수료하고 일선부대에 배치를 받는 군견은 일 년에 고작 150 마리 정도. 이 일당백의 전사들은 자기의 주특기에 따라 전방 보병사단의 수색중대나 수색대대, 전평시 군의 탄약을 취급하고 보관하는 탄약부대 예하의 폭발물처리반, 특전사와 같은 특수부대 등 전군 각지의 다양한 부대에 배치 받아 평균 8년 정도 현역으로 근무하게 된다.
군견훈련소에는 일반 부대에서 보기 힘든 수의장교가 근무하고 있으며, 군견의 질병을 치료하고 과학적인 건강관리를 위한
초음파 검진기 등의 첨단 의료장비도 보유하고 있다.
애완견이나 군견이나 마찬가지로..... 육포를 보고 침을 흘리고 있는 군견....*^^*
비록 군견에 계급은 없지만 군인과 마찬가지로 식별과 관리가 용이하도록 고유한 견번을 부여하고 있다.
#4. 군견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
군견도 계급이 있다?흔히들, 군견을‘하사’계급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군대에서는 군견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지 않지만 민간에서 군견과 같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순수혈통들은 수 천 만원에 거래되고 있고 거기다 군견과 같이 특수한 임무수행 목적으로 양성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이 소요된다. 그만큼 몸값(?)이 비싸고, 양성이 까다롭기 때문에 ‘하사’라는 간부 계급에 준하여 정성을 기울여 관리한다는 방침이 이러한 오해를 낳았다. 제로 군견훈련소에는‘너보다 계급이 높으니 매일 아침 경례를 하라’라고 주문하는 짓궂은 선임병의 장난에 속아 넘어가는 이등병이 간혹 있다고...*^^*
훈장 받은 군견 들어봤어?우리나라에서 훈장을 받은 군견은 모두 두 마리.첫째는 1968년 1·21 무장공비 청와대 기습기도 사건(영화 실미도의 소재가 된 이른바 ‘김신조 사건’) 당시 무공을 세워 인헌무공훈장을 받은 견번 41번 ‘린틴’이라는 군견이다.
두 번 째 훈장의 주인공은 육군 제 21사단에서 활약한 ‘헌트’.헌트는 쉐퍼드 종으로 90년 3월 제4땅굴 소탕작전 시 북한군이 설치해 놓은 지뢰를 탐지, 자신의 몸으로 지뢰를 터뜨려 1개 분대원의 생명을 구한 명견이다. 말 못하는 짐승이기는 하나 사람의 생명을 구한 혁혁한 공을 인정받은 헌트는 군견으로서는 최초로 ‘소위’라는 장교 계급으로 추서된 선배 전우(?)기도 하니 말이다.
※ 제 1군견훈련소1966년 군견 16마리로 창설된 제 1군견훈련소는 2008년 1월, 사육과 훈련에 들어가는 경비를 절감하고 전국적인 군견 지원 등 운용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육군 제 3군견훈련소와 해군 · 해병대 군견훈련소가 제 1군견훈련소로 통합된바 있다. 현재 이곳은 명실공이 대한민국 최고의 군견 육성의 요람으로써 군견 관리 및 교육, 번식과 진료를 책임지며 연간 80마리의 군견을 배출해 육군, 해군, 해병대 등 전군 각지의 부대로 배출하고 있다.
대한민국 군견들은 1군견 훈련소에서 태어나 각 지역에서 임무수행을 하다가 죽음이 임박하면 다시 이 곳에 들어온다. 이 곳 군견 훈련소는 명실공히 대한민국 군견들의 요람이요 무덤인 것이다.
[출처 국방부(손민석 KODEF 사무국장)]
저도 GOP에서 근무할 때, 군견병이랑 내무실을 같히 썼는데...군견막사에 짱박혀 낮잠도 자고...
군병견병이 사제로 달고오는 [D.T.C] 마크를 '도그튀김센터' 라며 놀리든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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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떼죽음 당한 간첩들.............
떼죽음 당한 간첩들,1969년 주문진 항
2009/01/06 오후 6:57 | 2009년 1월
떼죽음 당한 간첩들,1969년 주문진
한국은 해방후에 6.25 사변과 월남전외에 또 다른 질긴 전쟁을 했었다.만주에서 유격전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김일성은 북한 정권을 잡자 남한도 그런 방식으로 적화시킬 수가 있다고 믿었다.그는 6.25사변 전후 끊임없이 유격전을 지원하거나선동해서 남한을 괴롭혔다.전쟁이 끝나고 한동안 잠잠하던 그는 60년대 남부 월남이 월맹의 유격전 공세에 휘말려 고전을 하자 또 다시 헛된 야욕을 일으키고 부지런히 남쪽에 무장 간첩들을 보내기 시작했다.김신조의 기자회견 -----------------------------김일성 도당이 남으로 보내는 무장 간첩들은 엄격한 심사를 통해선발되어 강도 높은 특수 훈련을 받은 정예중의 정예들이었다.그러나 이들중에는 남파 기획 단계에서의 실수나간첩들의 어이없는 실수로 토벌 당하는 경우가 자주있었다.멀리로는 1968년 남조선 대통령을 처치하겠다고경계심 높은 수도권의 인구 밀집 지역인 서울 북부에 31명의 대부대 간첩을 보냈다가 청와대 북부에서 발각되어 섬멸당한 속칭 김신조 부대 침투가 있었고 가까이로는 1996년 300톤이나 되는 잠수함을 해안 암초지대에 함부로 몰아 넣어 좌초 시킨 결과로 끝장났던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이 있다. 강릉 침투 북한 잠수함 --------------------------여기서 한마디 하고 가자. 121사태때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무장 간첩중 단 한명만 살아서 북으로 복귀하였다. 내가 군 복무시절 선배로 부터 들은바로는구사일생으로 북으로 돌아간 이자는 이중 영웅의 칭호를 받았고 나중에는 청와대 습격 간첩들이 소속한 124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고 했다.그리고 세월이 흘러 김신조씨는 목사가 되었다.김대중 정부때인 2000년 9월 김정일은 엉뚱한 제안을 하였다.남한에 송이 버섯 4톤[ 8억원 상당]선물을 하겠다고 특별기를 보낸 것이다.
너무 이상한 짓이라 이해가 안갔는데 김신조씨의 말에 의하면 이때 송이 버섯전달의 북쪽 특사 김용순을 수행하고 온 박 재경 대장[재작년 계급]이라는 자가 그 때 살아서 돌아간 무장 간첩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노대통령이 방북했을 때도송이 버섯 선물 전달 심부름꾼 노릇을 했었다. 박 재경 대장 ----------------------------------김 정일이 송이 좀 주고 한국 병신 만드는 기막힌 연출을 했던 것이다.아마 자기들 추종 군부 세력과 함께 송이 버섯 선물을 크게 보도한 한국 tv를 보면서 비웃었을 것이다.김영삼 정부 때도 정말 크게 인심을 써서 비전향 장기수 이 인모 노인을 보내주었는데 김정일은 이 사람을 신병 치료한답시고 미국에 보내서 또 한국 tv에 얼굴을 보이고 김정일의 은덕을 찬양하게 연출했었다. 남쪽 인사들의 인간미를 고마워야 하는데도 이렇게 유치한 연출로 응대하는 북한 정권을 무시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를 모르겠다.---------------------------------------------- 1969년 강원도 북방 동해안 소재 주문진 읍에서 일곱 명의 간첩들이 몰살당한 대 사건이 있었다.이들 무장 간첩들을 토벌해 버린 부대는 대 간첩작전을 위해서특수 훈련을 받은 특전대나 또는 해병 수색대같은 부대도 아니었고더 나아가 출동한 육군 정규군도 아니었다.또 이들 7명의 간첩들을 한 명도 북으로 복귀 못하게 섬멸하는데로케트 포나 기관 총같은 중화기가 사용된것도 아니었다.이미 한 명의 경찰관을 살해한 이들 떼간첩을 섬멸한 용사들은두 명의 경찰관과 집에서 자다가 놀라 뛰쳐 나온 두 명의 예비군들이었다. 사용 화기는 단 네 정의 칼빈 소총이었다.교전 시간도 단지 5분도 되지 않았었다.무장 간첩들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와 남한측의 신속하고 대담했던 대응이 합쳐서 생긴 운명이 이들을 다 물고기 밥이 되게 했던 것이다.1969년 한국 해군 구축함 91함에 나포된 간첩 모선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1969년 3월 16일 00;50분 주문진 읍에 위치한 강남 여인숙에군복과 검은 점퍼차림를 한 한무리의 괴한들이 나타났다.그들은 주인[여]앞 세우고 각 방을 돌며 임검했다.그들은' 우리는 방첩대원이다. 조사 할 것이 있으니 주민 등록증을 내놓으라고 ' 협박했다.자다가 어리둥절하여 일어났던 신갑성씨 형제등을 비롯한 일곱명의 투숙객으로 부터 주민 등록증 넉장,선원증 한장, 그리고 국가 공무원증 한장등을 빼았아 갔다.그 무렵 중앙 정보부와 함께 박정희 정권 수호의 막강한 정보 권력 기관이었던 방첩부대는 일부 조직원들의 몰지각한 행패로 사람들이 두려워 하며 기피하던 존재였다.이들 괴한들은 해상으로 침투한 무장 간첩이었다.30분뒤 간첩들은 여인숙에서 300미터 쯤 떨어진 제 206 전경대소속 주문진 항내 수상 검문소에 나타나 근무중이던 염관수[32세]순경과 이웅재[29세] 순경,그리고 사환 안승철 군[17세]등 세 명에게 " 우리는 방첩대원이다. 근무 태도가 왜 이렇게 소홀하냐?"고 질책했다.이에 두 순경이 반발하자 대위 복장의 무장 간첩이 권총을 들이대고" 우리는 인민 유격대다. " 라고 소리치고 두 순경에게 수갑을 채우고 포승줄로 포박하였다.간첩들이 교신용으로 쓰던 난수표--------------------------------------두 순경이 반발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아무리 위세를 부리던 방첩대라도 같은 국가 기관인 경찰에게까지이런 무례한 태도로 간섭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는데 간첩들은뭘 몰랐던 모양이었다. 포박을 당하면서도 염 순경이 계속 반항하자 갑자기 칼을 꺼내서그의 등과 옆구리등 온몸 8곳을 잔인하게 찔러 죽였다.그들은 사환은 그대로 검문소에 포박한채 검문소에 놔두고 이 순경만 붕대로 눈을 가려 부둣가로 끌고 나갔다.한 명의 간첩이 이 순경을 호송했다.이대로 끌려가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든 이 순경은 50미터쯤 가자비틀거리면서 연극을 했다."앞이 안 보여 걸을 수가 없소. 붕대 좀 풀어 주시오."라고 하자 그 호송 간첩은 붕대를 풀어주었다. 붕대가 풀리는 순간 태권도 유단자인 이 순경을 그대로 호송 간첩을 걷어찼고 간첩으로부터 개머리 판으로 반격당했지만 필사적으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150미터 떨어진 주문진 우체국으로 달려가 본서에 간첩 출현 신고를 하였다.이 때가 01;45분이었다. 한편 포박당한 사환도 인접한 예비군 소대장 집으로 달려가 간첩출현 사실을 알렸고 예비군 소대장은 지서에 신고하고 달려나왔다.급보에 접한 송철호 [36세] 강민순[29세] 두 순경과 예비군 소대장박용무 [38세]씨, 부소대장 엄백헌[39세]씨들은 무장을 하고 즉각 행동을 취했다.지원군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찰라의 지연은 간첩들에게 도주의 여유를 줄 가능성이 있다.하늘에서 본 주문진 어항 ,왼쪽이 방파제-----------------------------네명은 축항의 방파제로 달려나가서 바다를 응시했다.해상에 뜬 검은 덩어리가 방금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순간이었다. 간첩들이 탄 고무보트였다.네명은 약속이나 한듯이 방파제에 엎드려서 즉시 사격을 개시했다.군 복무 시절의 훈련 결과가 본능적으로 나왔던 것이다.적측에서도 즉각 응사가 있었다.그러나 바다의 간첩들 측에서 어두운 방파제에 엎드린 그들을 발견해서 명중시키기는 더욱 힘든 노릇이었다.비명 소리와 함께 간첩들이 모선에 외치는 " 지원 사격을 해라!"하는고함 소리도 들렸다. 사격을 당하면서도 검은 물체는 어둠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검은 물체가 사라지고도 네 사람은 그 방향으로 한참을 더 사격하였다.총격전은 약 5분 간 있었다. 사격을 한참 했지만 적은 이미 도주했으니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네 사람은 아쉬운 대로 파출소로 돌아와서 간첩들에게 살해당한
동료 염 순경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이어서 달려온 지원 부대는 현장을 살펴보고 상부에 간첩 퇴치 보고를 하였다.
상부에서도 그렇게 알고 일부 언론에도 간첩들의 대담한
주문진 항내 침투와 퇴치사실만 보도 되었다.
그런데 날이 새고 현장을 정밀 수색했던 전경 수색대는 네 사람의 사격으로 죽은 대위 복장 1명과 중사 계급 1 명 등 여러 무장 간첩들의 시체가 바닷물에 떠 있거나 바위틈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들이 타고 도주했던 고무보트는 12발의 총탄에 관통 당해
공기가 빠져서 침몰하였고 괴한들 시체 일부는 고무보트 근처에
있는 바위틈에 걸려있었다.
미국 해군 seal 부대가 쓰던 고무 보트-------------------------------------------곧 해저 수색이 있었고 추가 시체들이 더 인양 되었다. 총 7명의 간첩들이 보트 위에 타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
이들은 머리 허리 어깨 등에 총탄을 맞아 보트 내에서 죽고
일부는 일단 상륙했다가 죽었던 것이다. 부상을 안 당했다 해도 간첩들이 수온이 영도에 가까운 바닷물에 빠졌으면 살아날 길이 없었을 것이다.이 정도의 수온이면 저체온증으로 5분이면 의식을 잃었을 것이다.
수색대는 이날 시체와 고무보트 외에 칼빈 총 4정, 기관단총 3정,
권총 2정, 무전기 1대, 라디오 1대, 현금 20만원, 수류탄 5발,
실탄 3,000발, 난수표 3조, 암호문 4조, 주문진 지도 10매,
길이 500미터의 로프 등을 노획하고 이들이 주민들로부터 강탈해갔던 주민 등록증 4장과 선원 승선 증, 공무원증 등도 회수하였다.
이날 간첩 모선이 주문진 앞 1 킬로 해상에 정박하고 있었다.
긴 로프는 간첩들이 탔던 고무보트를 이 모선과 연결했던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간첩들이 탄 고무보트를 견인하다가 총격으로 공기가 빠진 고무보트가 침몰하자 줄을 끊고 도주했을 것이다.
지상 부대와 해군 함정과의 통신이 원활하지 못하여 이 모선을 격침시키는 작전은 실패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긴 로프 줄로 고무보트를 모선이 견인하는 방식은 같은 해인1969년 6월 8일 북평 침투시에도 사용되었었다.모선은 해안선의 초소에 자신들의 존재가 발견되자 비정하게고무보트의 줄을 끊고 도주하고 남겨진 고무 보트의 간첩 세명은상륙후 생포되거나 사살되었다.]
그 때의 신문 사진을 보면 방파제에 인양 되어 올려 진 간첩들의 눈 근처 안면부가 벌써 밤새 수중 물고기들에게 훼손당한 것이 드러나 보였다.
정보당국은 간첩들의 주문진 침투가 정부가 양식을 바꾼 주민 등록증을 입수하는 것이었다고 추측했다. 겸사해서 침투 한 김에 경찰도 납치해서 동해안이나 주문진 일대 경비상황도 탐지 할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간첩 측에서 보았을 때 침투요원 전원 사망의 대 참사로 끝났던
주문진 항 침투의 원인은 몇 가지로 분석할 수가 있다.
첫째로 기본적으로 주민등록증 획득이라는 간단한 작전에 그렇게 많은 인원 즉 떼간첩을 동원한 작전 수립에 문제가 있었다.
두 번째의 실수는 121사태와 같이 인구 밀집지역인 주문진 항의
심장부에 다수의 간첩과 간첩선을 겁 없이 직접 투입한 것이다.
그런 곳은 발각될 우려도 크고 반격을 당할 가능성도 크다.
침투와 이탈은 항상 적의 취약한 지점에서 이루어져야 했는데
이 간첩들은 마치 객선을 타고 주문진을 방문한 여행객처럼
너무 쉽게 도시의 심장부에 침투하고 이탈하는 작전 수행을 했다.
세 번째이며 이번 실패의 최대 원인은 납치했던 경찰이 도주하게 허용했던 것과 결박해서 신고소에 그냥 남겨 놓은 사환의 미숙한 처리다.
여기에 더해서 간첩들의 한국 통신체계의 신속함과 예비군의 존재에 대한 무지함이었다.
네 번째는 물론 그런 취약한 곳에서 적의 사격에 취약한
고무보트를 사용한 점이다. 고무보트는 그 전해인 1968년 울진 삼척지구 간첩 침투 사건
때도 120명의 침투 간첩들에 의해서 사용 되었었다.
이 고무 보트에는 일개 분대가 탈 수가 있다.
한국 해병대도 미국의 영향인지 고무보트를 애용하고 있는데
어느 외국 군사 잡지에서 고무보트가 비밀 침투 작전에 부적합하고
여러 가지로 취약한 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 글을 읽은 일이 있다.
그 글은 그래서 고무보트 대신 최소 현측이 방탄이 되는 접는
보트 개발을 역설했었다.
고무 보트가 아니라 조금 더 큰 목제나 철제 보트를 사용했더라면 , 그리고 분산 탑승했더라면 이런 전멸의 쓴 맛까지는 보지 않았을 것이다.[근래 침투 간첩들이 썼던 북한의 반잠수정이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개발된듯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모든 침투 인원을 사격에 취약한 고무보트에
한 꺼번에 태워서 침투시킨 북한 당국자의 작전 문제점이
더 지적되어야 할듯하다.
북한 측의 보는 문제점보다도 신고를 받자말자 정규군이 아닌
한국 경찰과 민간인 신분의 예비군들이 두려움 없이 방파제로
추격을 나가 적들에게 사격을 가한 용감성은 대 피해를 입은
북한도 어쩔 수없는 실패의 최대 외부 원인으로 들어야 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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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김신조 특수부대의 1.21 사태. 실록 -1
1967년 10월 초 朴正熙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에서 康仁德(강인덕·북한국장,통일부 장관 역임·68) 중앙정보부 분석 과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보고서 제목은 「최근 북한의 對南침투에 관한 분석-북한의 冬季 게릴라 침투 豫想報告」. 朴대통령은 보고를 들으면서 밑줄을 치고 때때로 메모를 했다. 결론 부분에 이르자 朴대통령은 한 문장에 밑줄을 두 번이나 치고 있었다. 「북괴는 내년부터 冬季작전에 돌입하여 본격적인 인민전쟁이 시작될 것입 니다」라는 부분이었다. 북한의 동계 게릴라 침투작전을 예상한 보고가 끝 나자 朴대통령은 인터폰으로 『국방부 장관, 각 軍 참모총장들 다 들어오라고 해』라고 지시했다. 『康君, 이건 게릴라戰이라 중앙정보부 통제능력에서 벗어나는 거야. 그래서 좀 모이라고 했으니까 자네가 다시 한번 설명하게』 이날 오후 국방부 장관과 육해공군 참모총장 및 해병대 사령관 앞에서 康과장의 설명이 끝나자 朴대통령은 『내가 조만간 全軍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 과 기관장들을 다 모아 놓고 對간첩작전 회의를 해야겠으니 자네는 이 내용 을 설명할 준비를 하게』라고 했다. 대통령은 金聖恩 국방장관에게는 『국방부에 對간첩 작전에 관한 모든 권한을 부여할 테니 준비하시오』라고 했다. 「북한의 冬季 게릴라 침투 豫想報告」는 그때까지 중앙정보부에 속했던 對간첩 작전의 권한들을 대부분 국방부로 이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康仁德 과장이 이런 보고를 하게 된 것은 1967년 1월초 휴전선을 침투해 들어온 3인조 간첩을 체포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들은 서울 시내에서 소매치기를 하며 지내다 경찰의 불신검문에 의해 체포되었고 신원조회를 하는 과정에서 특이점이 나타나 對共수사기관에 이첩된 경우였다. 康仁德 前 통일부 장관의 회고. 『세 명은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지 않고 내려 왔습니다. 그저 서울에서 소매치기를 하며 돈을 쓰다가 신분증만 몇 개 구해서 월북하라는 것이 전부였는데, 당시로서는 특이한 경우였지요. 특히 6.25 이후 겨울에 휴전선을 통해 3인조를 내려 보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눈밭에 발자국이 남기 때문에 북한은 극력 피하던 방식이었거든요. 「왜 내려 보냈나」하는 의문을 가지고 다각도로 분석해 보니 冬季작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겁니다』 5·16 당시 康仁德 해병대 중위는 전략정보관으로 해병대 사령부에 근무하 다 중앙정보부에 차출된 경우였다. 그는 중앙정보부에서 군복을 벗고 분석국 과장, 부국장을 거쳐 1970년 12월 북한국장이 된 뒤 1978년에 퇴직했다 . 그는 매월 한 차례씩 북한 동향을 분석 보고하는 과정에서 朴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1967년 9월 초 金聖恩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북한이 게릴라 부대 를 만들었다는 보고를 접했다. 金聖恩씨의 증언. 『9월 초쯤 방첩대장 尹必鏞(윤필용)이 해안으로 침투하던 공비를 생포해 심문했더니 이런 정보가 있더라면서 보고를 해 왔습니다. 「124군 부대」였 지요. 정확한 규모나 위치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북한이 군사도발을 강 화할 것이란 판단을 했습니다』 방첩대의 정보는 비교적 정확했다. 북한은 1967년 8월12일 민족보위성 정찰 국 직속의 對南 공작 특수부대를 창설했다. 「124군 부대」란 명칭을 가진 이 집단은 2400명에 이르는 부대원을 300명씩 8개 基地(기지)로 나누어 對南 유격훈련을 시작했다. 각 基地는 남한의 일 개 道를 담당했으며 제 6기 지는 경기도와 서울 지역을 담당했다. 이해 가을 제 6기지 부대원 중 정예요원 35명이 선발되어 서울 침공 계획 훈련에 돌입했다. 이 중 제1조 15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고 나머지 4개조(각 5명)가 각기 다른 목표를 동시에 타격한다는 계획이었다. 제2조는 美대사관저를 습격하여 대사와 그 가족을 살해할 동안, 제3조는 육 군본부를 폭파해 將星들을 살해하고 제4조는 서울 교도소 정문을 폭파하여 죄수들을 탈옥시키며, 제5조는 서울 서빙고동에 있는 방첩부대의 간첩수용 소를 급습하여 간첩들을 구출해 함께 월북한다는 계획이었다. 훗날 생포된 인민군 金新朝 소위는 자신이 선발되었을 때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임무가 실패하리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부대원들에게는 당과 수령을 위해 죽는 것이 최대의 영광이었으니까요』 1968년 1월6일 오전 10시, 朴正熙 대통령은 특별 기동차 편으로 강원도 원주역에 도착했다. 이날 야전군 상황실인 1군사령부 회의실에서 열린 「對간 첩 非常治安회의」에는 丁一權 국무총리와 全 국무위원, 金炯旭 중앙정보부 장, 任忠植 합참의장, 3군 참모총장 및 해병대 사령관, 사단장급 이상 지휘 관, 知事, 檢事長, 경찰국장 등 173명의 각급 기관장들이 참석했다. 개식사에서 朴대통령은 『북괴 만행을 봉쇄하고 무장 간첩을 섬멸하는 데 있어 유의할 일은 軍官民이 혼연일체가 되어 상호협조체제를 확립하여 汎국민적 對간첩작전을 펴야 한다』고 강조하고, 『정부는 이를 위해 향토방위 법의 제정을 서두르고 있으며 앞으로 이 법을 잘 운용하여 지방 주민의 勝共정신을 강화하고 지역적 방위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말했다. 이 회의에 중앙정보부 康仁德 분석과장도 참석했다. 그는 석 달 전 청와대 에서 朴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을 참석자 전원에게 다시 한번 설명하면서 『이번 1월부터 시작될 북한의 동계 작전은 종래와 다른 대규모 게릴라 작전이 될 것』이라고 단언하고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對간첩 작전시 각종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들어가며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날 특히 朴대통령은 참석한 金炯旭 부장을 향해 중앙정보부의 越權(월권)행위를 거론하며 질타했다. 『서해 바다에 간첩선이 나타나면 정보부가 해군을 지휘해서 해군 사령관 노릇을 하거나, 육지에서 공비가 나왔을 때는 해당 지역 中情 지부장이 軍 사령관 머리 꼭대기에 앉아 병력을 여기 배치하라, 저기 배치하라는 식으로 월권행사를 하는 모양인데 … 중앙정보부는 그런데 나가는 게 아니고 북괴의 정보를 수집해서 제공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거요. 앞으로 軍 작전에 정 보부는 일체 개입하지 마시오』 이날 金炯旭 中情부장은 얼굴이 벌개져 회의 내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고 한다. 金聖恩 당시 국방부 장관의 설명. 『첫째, 朴대통령은 金炯旭이 지휘하여 수사한 「동백림 사건」이 심각한 외교문제를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知識人들을 고압적으로 수사하는 정보 부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듯합니다. 두 번째는 그 날 대통령도 지적 했듯이 對간첩작전이 벌어지면 현지에서 중앙정보부의 월권행위가 하도 심해 군인들이 작전을 제대로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비 두 세명만 출몰해도 군, 경찰, 정보부, 방첩대 등이 서로 다른 명령 계통을 가지고 현지에서 대립하다 초기 대응을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이날 회의에서는 공비가 나타날 경우 상황에 따라 비상경계령을 甲, 乙, 丙 세 가지로 분류하기로 했다. 甲種 비상령은 경찰력만 동원해도 되는 상황 , 乙種 비상령은 군·경찰이 합동 대응해야 하는 상황, 丙種 비상은 전적으 로 軍이 통제권을 가져야 하는 상황으로 구분했다. 대통령 특별지시사항으로 對간첩 작전 기구를 2월 초까지 구성하기로 했다 . 이 기구는 軍을 중심으로 경찰과 정보부가 협조하는 체제로 결정됐다. 朴正熙 대통령은 이날 오후 6시 회의를 마친 뒤 헬기 편으로 서울로 상경했다. 「원주회의」에 참석하고 돌아 온 康仁德 분석과장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 자신의 분석대로라면 북한의 동계침투작전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전방에서 는 아무런 기미가 없었다. 답답해진 그는 매일 아침 출근하면 국방부에 나가 있던 정보부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야, 들어오냐?』라고 물었다. 그때 마다 『아직 별 일이 없습 니다』란 대답이 돌아왔다. 康과장은 속이 탔다. 이 무렵 金新朝가 포함된 124군 부대 35명은 각자 임무에 따른 반복 훈련을 거듭하며 출동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1월13일, 민족보위성 정찰국장 金正泰(김정태)는 공격 목표가 너무 분산되었다면서 기존의 계획을 수정, 공 격목표를 청와대로 한정시키고 朴正熙 대통령만 살해하는 임무로 축소시켰 다. 인원도 35명에서 31명으로 줄였다. 공격시점은 1월21일 20시 정각. 공격목표와 날짜가 정해지자 청와대 내부 구조를 분석하고 주요 지점별 공 격조를 나눠 훈련에 돌입했다. 청와대 습격 D데이에 임박해서는 사리원에 있는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청사를 대상으로 실전 연습을 하기도 했다. 북한의 암살목표로 결정된 朴正熙 대통령은 1월15일 오전 10시부터 11시40 분까지 청와대에서 年頭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朴대통령은 『조국 근대화는 경제건설과 정치, 사회, 문화 등 각 부문의 성장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이 사물에 대해 긍정적이고 善意的 인 관찰과 비판을 하는 것이 제2경제(경제의 윤리적 측면)의 요체』라고 말 했다. 예정시간인 1시간보다 40분이나 길어진 이날 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여 유있게 미소를 섞어가며 답변했던 朴正熙 대통령은 13개의 질문 중 꼭 한번 金正濂(김정렴) 상공부장관의 조언을 얻었을 뿐 정확한 통계수치를 들며 혼자서 답변했다. 朴대통령은 5·16 혁명 이후 4번째 공식 기자회견을 갖는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국제정세에 대한 분석을 하면서 對월맹정책에 대해 서는 평소의 강경론을 다시 강조했다. 이날 오후 朴대통령은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초도 순시를 했다. 오후 4시20 분부터 6시30분까지 재무부에서는 徐奉均(서봉균) 재무부 장관이 재무행정의 9大 목표를 브리핑하는 가운데 京釜고속도로 재원 조달 방안을 보고했다. 1968년 1월16일 朴正熙 대통령이 농림부, 건설부, 상공부를 연두순시하며 특용작물의 중점 지원, 서민 주택 건설에 주력하라고 각 부별로 지시를 하 던 시각, 金新朝 일당은 한국군 26사단 마크가 부착된 국군 복장에 개머리 판을 접을 수 있는 接鐵式(접철식) AK소총과 수류탄 및 對戰車(대전차) 수 류탄으로 무장하고 황해도 연산에 주둔한 부대를 출발했다. 이들은 자정 무렵 開城에 도착, 다음날인 17일 새벽 비무장지대內 최남단 초소가 있는 연천군 매현리에 도착하여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이들은 이곳 에서 야간 침투를 위한 僞裝(위장)을 했다. 이날 국방부는 「原州 회의」에서 朴대통령이 내린 특별지시에 따라 분산된 對간첩 작전을 일원화시키는 새 기구안을 마련해 국무회의에 상정했다. 새 기구안은 대통령 직속으로 對간첩작전을 총지휘하며, 정책을 마련하는 중 앙협의회와 정책을 실천하는 대책본부를 두고 대책본부는 합동참모본부에 설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1월17일 밤 8시, 무장공비들은 美 2사단 지역의 正面(정면)을 향해 포복으로 접근하기 시작, 10시 정각에 철조망이 가설된 철책선에 도착했다. 이들 은 절단기로 철조망을 제거하고 휴전선을 넘어 은밀 침투를 시작했다. 124군 부대 무장공비들은 軍 GP들이 요소 요소에 있는 휴전선 남방한계선부 터 임진강을 건너기까지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은밀 침투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는 물론 숨소리나 냄새까지 죽이며 지형의 그늘진 부분을 이용해 이동 하는 特殊戰(특수전) 기술이다. 초소나 경비병 근처에서는 땅에 납작하게 붙어 한 시간에 수 m 정도만을 이동할 정도로 인내력과 지구력이 요구된다 . 金新朝를 포함한 무장공비들은 이미 훈련과정에서 이런 능력을 배양했고 , 야간 침투중 인기척을 느꼈을 경우 부동자세로 한 시간 동안 버티는 훈련 까지 받았다고 한다. 어둠속에서 상대방이 이 쪽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하 게 하는 훈련이었다. 이들은 美 2사단 구역을 통과하여 고랑포에서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널 때까 지 약 10km의 구간을 엎드리고, 기고, 달리고, 숨고 하며 먼동이 틀 때엔 임진강을 건너 경기도 파주군과 법원리 사이의 작은 산 기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경비병이나 지뢰밭을 만난 적도 없었다. 이들이 선택한 침투로는 임진강과 휴전선이 가장 근접한 지역일 뿐 아니라 얼어붙은 임진강을 도강할 수 있는 특별한 지역이었다. 서해바다로 연결된 임진강의 중·하류가 시작되는 임진각 부근은 海水가 滿潮(만조)때마다 밀 려 올라와 얼음이 비늘처럼 솟아오르고, 얼지 않은 바닷물이 곳곳에 고여 있어 도보로 건널 수가 없는 곳이었다. 대신 고랑포 지역은 상류에 속해 海水의 영향이 없고 겨울에는 단단하게 얼어 있어 이들이 침투로로 선정할 수 밖에 없었다. 휴전선에서 고랑포에 이르는 루트가 美軍이 관할하는 지역이란 점도 고려되 었다. 미군 지역에서는 무장침투 간첩을 한국군으로 誤認(오인)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미군 지역 철책이 舊型(구형) 철조망이었기 때 문이었다. 金聖恩 당시 국방장관의 증언. 『1967년은 유달리 남침 사례가 많아 휴전선 철책부터 보강하기로 했습니다 . 그때까지 휴전선 철책이란 휴전 당시 남북한 군인들이 직접 설치한 원형 철조망 서너 가닥이 전부였습니다. 새빨갛게 녹이 슬대로 슬었고, 가끔씩 보수공사를 한다고 갈아주기는 했지만 인적이 드문 비무장지대에다 예산부 족으로 改修할 생각을 못했지요. 이것을 美 국방성에 부탁해 자재를 공급받 아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철책선을 만든 겁니다. 이 공사는 그 해 겨울, 2 49km의 휴전선 全지역에서 완성을 보았습니다. 단 미군 지역 4km 정도만 제 외되었지요』 美 2사단측은 鐵柱(철주)를 박고 전기 철조망을 쳐 對敵하려는 한국군의 대 응자세를 못 미더워하면서 자신들이 보유한 전자 감응 경보기 등으로 대처 하겠노라며 공사를 거부하고 있었다. 1968년 1월18일 오전 5시, 은밀침투로 법원리 뒷산에 도착한 31명의 무장공 비들은 지쳐 있어 이날 밤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공비들은 假眠(가면)상태 로 휴식하고 있었고 5명이 교대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해 들어온 시각에 朴正熙 대통령은 연두순시에 여념이 없었다. 1월18일에는 외무부, 문교부, 공보부 에 들러 1968년도 시정방침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1월19일, 與野 총무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국회가 2월 중순까지 空轉(공전) 이 확실시 되는 가운데 朴正熙 대통령은 법무 국무 교통 등 3개 부처를 순 시했다. 그는 국군장병의 처우개선, 호남선 複線化(복선화)계획 촉진 및 호 남지방 고속도로 계획을 수립할 것을 관계부처에 지시하고 있었다. 이때가 오후 2시경. 바로 그 시각, 파주군 초리골에 살던 禹聖濟(우성제·현 파주경찰서 보안계 장)를 포함한 네 형제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벼랑 아래에 숨어 있던 공비들의 경계병과 마주쳤다. 『국군 대위 한 명, 소위 한 명, 그리고 사병 계급장을 단 3명 등 모두 5명 이었죠. 우리 국군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신발은 검은 농구화였고 총은 개 머리판을 접을 수 있는 AK소총이었어요. 한 눈에 공비라고 알아 보았지만 도망가기엔 너무 때가 늦었습니다』 禹씨 형제를 본 공비들은 태연을 가장하고 불러 세워 담배를 권하더니 갑자 기 기관총으로 등을 밀며 벼랑 쪽으로 몰았다. 禹씨 형제들이 벼랑 밑으로 와 보니 일개 소대 병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겁을 집어먹은 禹씨 형제들에게 『너, 우리가 어떤 사람들 같아?』라고 물 었다. 『군인 같은데요』라고 하자 공비들 중 한 명이 『우린 혁명당이야』 라며 참깨 섞인 엿과 오징어를 주고 말을 붙였다. 『너 쌀밥 일년에 얼마나 먹어봤어?』 『밥은 하루에 세 번 먹잖아요』 『……』 31명의 공비들은 禹씨 형제들에게 지서의 위치와 문산 동두천 의정부로 가는 방향을 묻기도 하는 등 이런 저런 말을 붙여왔다. 金新朝(現 충남 예산 군 성결교회) 목사의 증언. 『원칙으로는 작전 도중 만나는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무조건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대원들 중 일부가 「죽이면 오히려 문제가 생기지 않겠냐」며 반대를 했습니다. 투표를 했는데 역시 살려두자는 의견이 많았 습니다』 禹씨 형제는 벼랑 아래 덤불 속에서 네 시간여 동안 공비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말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뒤에야 풀 려날 수 있었다. 공비들 중엔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둔 손목시계를 꺼내 선물 로 주며 『만약 비밀을 지키지 않고 경찰에 신고하면 우리 후속 부대가 내 려와서 너희 마을과 가족들을 몰살시켜 버릴거야』라고 위협했다. 禹씨 형제들은 빈 지게를 지고 돌아 나오면서 자꾸만 뒤가 꺼림칙했다고 한다. 『혹시 쏘지나 않을까 겁이 났지요. 우리가 한참 걸어 나오다가 힐끗 돌아 보니 깜깜한 데 뭔가 움직임이 느껴졌어요. 이동중이란 걸 알았습니다』 형제들은 마을 입구 가로등 밑에서 미행이 없는지 살핀 뒤 언제 신고를 하 느냐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이들은 丹陽 禹씨 종가집으로 달려가 어른들과 함께 파주군 법원리 창현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이때가 1월19일 밤 9시경. 국가간의 전투력은 戰場에서 비로소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1·21 사태는 6·25 이후 15년 만에 남북한 전투력을 비교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金新朝를 포함한 중무장한 인민군 1개 소대병력은 휴전선을 넘어 임진강을 건널 때까지 국군 초계병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나뭇군 禹씨 형제와 우연히 부딪친 것을 제외하면 前方 거주 주민들에게 거동수상자들로 몰려 신고된 적도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對간첩 작전능력도 6·25 이후 별로 改善된 적이 없는 상태였다. 통신 계통은 특히 전근대적이었다. 金新朝와 30명의 무장공비 목격 사건은 禹씨 4형제에 의해 1월19일 밤 9시 경 파출소에 신고 접수가 되었지만, 인근 군부대에 전달된 시각은 9시30분 경이었다. 對간첩작전 대책본부가 설치될 합동참모본부에는 세 시간이 지난 자정무렵에 이 정보가 도착했다. 金新朝 목사의 회고. 『자만심 같은 게 있었어요. 훈련을 받을 때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악구보를 매일같이 하면서 교관들은 우리에게 「동무들은 세계 최강의 용사다. 국방 군들이 동무들 을 비행기로도 못 쫓아 오게 만들어 주겠다」며 혹독한 훈련 을 시켰거든요』 1월19일 오후 8시경 禹씨 형제들을 살려 보낸 뒤 거의 동시에 金新朝 일당은 법원리 뒷산을 출발, 서울을 향해 급속 산악행군을 시작했다. 급속행군 이란, 약 30㎏의 짐을 진 重무장한 군인이 시간당 10km를 주파하는 구보이 다. 당시 한국군의 경우 급속행군은 산악이 아닌 오직 도로 위에서만 가능 하다고 믿고 있었다. 한국군의 군사적 상식으로는 야간 산악행군일 경우 시 간당 4㎞를 넘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金新朝 일당은 시간당 평균 10 ㎞씩 주파하면서 법원리-미타산-앵무봉-노고산-진관사-북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달리고 있었다. 비슷한 시각, 중앙정보부 康仁德 과장은 이날도 자신의 분석이 들어맞지 않아 실망한 채 관사로 퇴근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 머리 속은 온통 북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1월20일 토요일 새벽 두 시 경, 전화 벨 소리에 선잠에 빠졌던 康과장이 전화를 받았다. 『예, 강인덕 과장입니다』 『과장님, 새까맣게 들어왔습니다』 『몇 명이나 돼?』 『잘 모르겠지만 30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康仁德 과장은 「게릴라전이 시작됐다. 이젠 정치가 아닌 군사력이 대응해 야 할 때」라고 생각하며 출근 준비를 했다. 이때 金新朝 일당은 앵무봉을 지나 경기도 구파발 부근의 노고산 능선을 타고 있었다. 새벽 4시경엔 노 고산을 주파한 뒤 서울의 경계선이자 북한산으로 접어드는 길목인 眞寬寺( 진관사)를 통과했다. 오전 6시경엔 북한산 碑峰(비봉)에 도착했다. 10시간 동안 거의 휴식없이 全力질주를 해낸 것이다. 1월20일 토요일 오전 9시, 金聖恩 국방부 장관은 청사로 출근해서야 이 사 실을 보고받았다. 오전 9시30분경, 金장관은 차를 타고 청와대로 들어가 朴正熙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朴正熙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어디로 들어왔소?』라고 물었다. 『임진강 상류 고랑포 쪽입니다. 얼음이 얼면 건널 수가 있는 곳이지요』 『그놈들이 뭣하러 들어왔을까?』 『각하, 지난해 놈들은 이미 우리나라의 각종 기간 시설을 파괴하는 활동을 해 오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주한미군의 주둔지 시설 파괴나 테러일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군 부대나 주요시설도 목표가 될 것 같습니다』 휴전 후 연간 最多 도발 횟수인 170회를 기록한 1967년 한해 동안 전방지역 에서는 전쟁에 준하는 북한의 군사도발이 한국군과 주한미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감행됐다. 1월19일에는 동해 휴전선 근해에서 순찰중이던 한국 해군 56함 당진호가 두 척의 북한 砲艦(포함)으로부터 피격받아 침몰했고, 4월12일에는 중부산악 지대 휴전선을 북한군 90여명이 침범해 들어와 국군 7사단과 교전을 했다. 이때 7사단의 3개 포병대대가 북한지역에 휴전 후 최초로 585발의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 4월22일에는 북한군들이 서부전선으로 침투해 미군 막사를 폭파, 두 명의 미군이 숨지고 19명이 부상하는 사건도 있었고 5월27일에는 북한 경비정이 연평도 근해에서 작업중이던 한국 어선단에 포격을 가해 한국 해군이 25분 간 엄호사격을 하기도 했다. 8월7일에는 침투한 북한군이 판문점 남방 대성동 자유의 마을 앞에서 미군 트럭을 습격해 3명의 미군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했다. 사흘 뒤엔 서부전선에서 한국군 트럭이 습격당해 아군 3명이 사망했다. 8월 28일, 북한군은 판문점 동남쪽 30여m에 위치한 미군 막사를 기습, 미군 3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했다. 9월5일에는 경원선 열차 폭파사건이, 13일에는 경의선 열차 폭파사건이 있 었고 동해상에서 조업중이던 어선을 여러 차례 납치하는 등 진행속도가 완 만할 뿐 전쟁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에게 보고하던 金聖恩 국방장관은 그 순간까지도 침투한 무장 공비들이 지난해와 유사한 작전을 펼칠 것으로 짐작했을 뿐 청와대가 목표 인 것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이날 오전 金聖恩 장관은 李世鎬 6군단장을 전화로 불러내 예비사단까지 동원해서 서울 외곽에 집중 배치토록 지시했다. 6·25 당시 해병 전투단장(여단장)으로 한국군 1사단 지역이던 문산 지역에 서 美 해병대와 연합작전을 수행했던 金聖恩 장관은 金新朝 일당이 침투해 들어오는 해당 지역의 지리를 손바닥 보듯이 꿰고 있었다. 金 前 장관은 당시 자신의 추론이 어긋나 있었음을 시인하면서 이렇게 회고했다. 『金新朝 일당이 나무꾼들을 풀어 준 지점에서 서울 眞寬外桐(진관외동)의 眞寬寺(진관사)까지 산악 코스로 행군을 하면 해병대도 이틀은 족히 걸리 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眞寬寺를 거쳐 北漢山 碑峰의 僧伽寺 (승가사) 아래까지 도착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기겁했지요. 중무장 하고 야간 산악행군으로 북한산까지 올 수 있다는건 제 군대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1968년 1월20일 토요일 오전 朴正熙 대통령은 청와대 주변의 병력배치 상황을 보기 위해 金聖恩 장관과 朴鐘圭 경호실장을 대동하고 청와대 정문까지 내려왔다. 이틀 후 월남을 방문하기 위해 전날 청와대에 들러 朴대통령에 게 보고차 인사를 했던 崔宇根(최우근·육사3기) 수경사 사령관이 청와대로 달려왔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양복 차림의 朴대통령이 정문에 서서 수경사 30대대 병력들이 배치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오후부터 朴대통령은 감기를 앓아야 했다. 崔사령관의 인사를 받은 朴대통령의 얼굴엔 긴장감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곁에 섰던 朴鐘圭 경호실장이 『정보부 장보다 빨리 오네?』하며 농담을 했다. 오후 2시경, 6군단 예하 3개 사단과 金載圭(김재규) 중장의 6관구 병력이 동원되어 전방에서부터 서울 외곽에 이르는 수십 겹의 방어선이 구축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장공비들이 이미 통과한 다음 병력을 배치한 것이었다 . 공비들은 자신들이 놓아준 禹씨 형제들의 신고보다 빨리 포위망을 벗어난 셈이었다. 이날 청와대에서 金聖恩 장관은 李世鎬 6군단장에게 『주간에는 정밀 수색 을 실시해 흔적을 찾고 야간에는 매복을 하라』고 지시했다. 朴대통령은 金聖恩 장관과 점심을 함께 들며 『임진강이 겨울에도 얼지 않으면 좋을 텐데 말이오』라며 아쉬워 했다. 金장관은 오후 2시경, 수색대로부터 보고를 접했다. 받아 보니 북한산 북쪽 자락의 경기도 송추 유원지 부근에서 무장공비들의 것으로 보이는 실탄과 탄창 및 흘린 듯한 음식물 약간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설마 거기까지 들어왔을까,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철통 같 은 방어선을 펼쳤는데 하루 만에 그 지역을 통과하면서 유실물 흔적을 남겨 두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朴대통령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보분석을 함께 하고 있었지요』 이때 金聖恩 장관은 결과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결정을 내렸다.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 대통령 집무실에서 전화로 蔡元植(채원식) 치안국 장을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서울 지역에 甲種 비상을 걸도록 하고 세검정에서 정릉과 창동에 이르는 축선에 경찰 병력을 배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월6일 「原州회의」에서 결정된 비상 경계령을 처음 적용한 것이었다. 甲種 경계령이 내려진 서울에서는 경찰들이 비상 근무에 들어갔다. 이무렵 무장간첩들은 북한산 僧伽寺 아래 기슭에 모여 휴식에 들어갔다. 계획대로라면 이날 오후에는 청와대 뒷산인 北岳山까지 가 있어야 했다. 金新朝 목사 의 증언.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4일 동안 강행군했기 때문에 지쳐버렸던 것이죠. 원래 루트는 다음날인 21일 오후까지 북악산을 지나 밤 8시경에는 세검정 쪽으로 빠져 나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북악산을 타려면 공격시간에 제대로 도착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허리까지 눈이 쑥쑥 빠지고 발밑은 미끄럽 고 더 이상 산을 타는 것은 무리였다고 판단해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이들은 마지막 남은 산 하나를 둔 채 휴식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碑峰 에서 세검정 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날 밤 金聖恩 국방부장관 은 저녁 늦게까지 朴대통령과 환담했다. 朴대통령은 감기가 조금 심해지는 듯 밤이 깊을수록 기침을 자주 했다고 한 다. 金장관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한남동 공관으로 돌아왔다. 1월21일 일요일 오전, 金聖恩 국방장관은 청와대로 곧바로 출근해 任忠植 합참본부장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朴대통령은 지도를 펴 놓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金炯旭 정보부장이 드나들었지만 對간첩 작전 권이 국방부로 이첩되고 사건 성질상 자신이 개입할 만한 것이 아니어서 별 말이 없었다는 것이 金聖恩 前 국방장관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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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김신조 특수부대의 1.21 사태. 실록 -2
1968년 1월21일밤 8시경, 朴正熙 대통령은 기침을 심하게 하고 있었다. 강한 체질이어서 감기에 잘 걸리지 않았던 朴대통령은 저녁 식사 후 드물게 감기약을 먹고 9시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 시각, 北漢山 碑峰 밑에서 마지막 공격 캠프를 차린 金新朝와 무장공비 30명은 조용히 개인 장구류를 챙긴 뒤 눈 덮인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각자 기관단총, 소련제 TT 권총, 수류탄 10발 및 對전차 수류탄 2발, 실탄 300발 그리고 대검을 착용하고 있었다. 방한모 차림에 한국군 군복이었으 나 소련군式 장외투에 검은 농구화여서 어딘지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추 위와 어둠이 이를 가려주었다. 밤 9시30분, 이들은 산길을 내려와 내리막인 일반 도로로 접어들었다. 접철 식 AK소총과 수류탄을 숨긴 외투가 밖으로 불룩했다. 이들은 행군하는 군인 처럼 2열 종대를 갖추고 침묵 속에 움직였다. 반짝이는 것은 눈동자뿐. 金新朝 목사의 회고. 『생각해 보세요. 1개 소대가 휴전선을 넘어 4일 동안 한번도 걸리지 않고 서울까지 온 겁니다. 중간에 나무꾼을 살려두어 경계령이 펴진 것을 알게 되었지만 우리는 남한의 경찰이나 군인들을 한번도 겁낸 적이 없었습니다 . 지난 4일간의 경험도 우리가 그들을 비웃는 계기가 되었지요. 검문을 당 한다 해도 해치워버리면 그만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영화라고 해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대범함 뒤에는 한국군의 약한 戰力이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碑峰에 숨어 있을 동안 이들은 세부 작전 계획을 수 립했다. 침투, 습격, 탈출조 등 3개 조로 나누어 3∼4분 만에 끝낼 계획이 었다고 한다. 침투조가 청와대 보초를 제거하고 경계를 펴는 동안 습격조는 청와대 내부 를 공격하고 철수하면 그동안 탈출조는 청와대 경내의 차량을 탈취해 시동 을 걸어 놓고 있다가 임무를 마친 동료들을 싣고 문산 쪽으로 도주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습격조는 목표에 따라 네 개조로 세분되었고 제1조는 청와대 2층을 습격하 여 朴대통령을 살해하고, 2조는 청와대 1층, 3조는 경호실, 4조는 비서실에 침입하여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전원 살해한 다음 도피 및 탈출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청와대 1층 습격을 맡은 2조 조장이 金新朝 인민군 소위였다. 이들이 세검정 길을 2열 종대로 걸어갈 무렵 서울 시내는 甲號 비상이 걸린 상태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무척 뜸해 있었다. 이 괴한들을 처음 확인한 사 람은 李珏鉉(이각현) 서대문경찰서장이었다. 그는 정제불명의 괴한들이 나타났다는 무전보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했다. 李서장은 구평동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세검정길을 따라 걸어내려가는 괴한 들을 목격하고 즉시 세검정 파출소에 들어가 서울시경에 보고했다. 그 직후 李서장은 스리쿼터에 6명의 형사를 태우고 괴한들을 쫓아가 대열 선두에 차를 세웠다. 『당신들 뭡니까』 『우리는 CIC 방첩대다. 훈련 끝내고 돌아가는 길인데 참견 말라』 고압적인 자세로 나오자 李서장은 차를 타고 뒤쫓아 갈 수밖에 없었다. 밤 10시경, 자하문 고갯길로 방향을 돌린 괴한들은 누각이 있는 언덕까지 올라와 청와대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고개 아래 30여m 쯤엔 당시 종로구 청운 동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있었고 그 담을 끼고 종로경찰서 관할의 자하문 임시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날 검문소에서 근무하던 종로 경찰서 수사 2계 朴泰安(박태안), 鄭鍾壽(정종수) 형사가 언덕길을 내려오는 괴한들 을 발견하고 검문소 밖으로 나왔다. 괴한들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연락을 받은 바 없었다. 『당신들 뭐요』 『너는 뭐냐』 『종로서 형사다』 『우리는 CIC 방첩대원들인데 특수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서장에 게 알렸는데 아직 아무 얘기도 못 들었나. 우리는 너희와 상대할 사람들이 아니다. 알려거든 너희 서장에게 물어보라』 공비들은 조금 전 서대문경찰서장을 따돌린 것과 같은 방법을 썼다. 함경도 억양이 묻어 나왔다. 공비들은 긴장해서 과장된 행동을 하는 바람에 외투 속에 숨겨진 총구가 드러나는지도 몰랐다. 朴형사는 살짝 드러난 총구를 순간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는 이들이 경기도 북쪽에서 신고된 공비들이란 직감을 했다. 곁에 섰던 鄭형사가 朴형사의 눈치를 보고 예삿일이 아니란 느낌을 받았다. 두 형사는 서로 거리를 좁혀 이들과 맞섰다. 그러자 공비들은 이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대열이 옆으로 지나가는 동안 두 형사는 崔圭植(최규식) 종로경찰서장에게 「불신검문에 응하지 않는 괴한들이 나타났다」고 무전 보고를 한 뒤 저만 큼 가고 있는 이들의 앞을 달려가 가로 막았다. 『거, 신분증 좀 봅시다』 『신분증 같은 거 없어』 『우리나 당신들이나 비슷한 수사기관에 있는데 피차 고생하는 처지에 서로 신분을 밝히는 게 좋지 않습니까』 『우리 신분을 알려면 계속 따라오면 될 것 아니야』 자하문을 내려가 효자동에 이르면 육군 방첩대 본부가 위치하고 있어 딱히 이들의 말에서 거짓말임을 발견해 내기는 어려웠다. 그만큼 지리를 확실하 게 익히고 들어 온 공비들이었다. 그러나 형사들은 직감을 믿었다. 두 형사는 공비들과 숫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고 자신들은 권총 한 정 없는 상태여서 진땀이 흘렀다. 다시 공비들의 대열이 움직였다. 두 형사는 조 금이라도 시간을 끌기 위해 대열 맨 뒤에 따라가는 공비에게 말을 걸면서 자하문 고갯길을 함께 내려가기 시작했다. 1968년 1월21일 밤 10시5분경, 청와대가 지척인 자하문 내리막길에서 두 형 사는 무장공비의 대열 맨 뒤에 걸어가던 부대장격인 金春植과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金春植은 朴형사에게 『당신 경상도 말씬데, 고향이 어디요?』하고 물었다. 朴형사가 『대구인데요』라고 대답하자 그는 『우리 친척집도 대구인데…』 라며 말을 흐렸다. 朴형사는 이들과 농담까지 주고 받으며 시간을 끌어 보려했으나 기다리던 증원 부대는 오지 않았다. 입안이 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괴한 들은 자하문 고개를 넘어 오는 원효여객 60번 버스를 세웠다. 朴泰安씨의 회고. 『무장공비가 분명한데 그 자리에서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한 명이라도 못 잡으면 우리는 죽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공비들은 이미 7∼8명이 버스에 올라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극성스럽게 저지하기 시작하자 隊長인 듯한 자가 부하들에게 내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두 명이 이들을 다 상대할 수는 없고, 미치겠더라고요. 하지만 그때까지 공비들의 목표가 청와대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버스에서의 시비가 끝나자 대열은 다시 움직였다. 경복고등학교 후문을 지 나 청와대로 꺾어지는 커브 쯤에서 맨 뒤에 가던 金春植에게 朴형사가 끈질 기게 말을 붙이는 바람에 金春植은 어느 새 대열과 7∼8m 떨어지게 되었다 . 朴형사는 속으로 「이놈 한 놈만이라도 잡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밤 10시10분. 朴형사는 길이 꺾어지는 쪽으로 공비들이 빠지면 연락을 받고 달려 올 증원 부대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장공비들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이르자 鄭형사와 함께 승강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헤드라이트 불빛이 길 아래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프차는 괴한들의 대열 앞에 멈춰섰다. 전진하던 대열도 멈칫 했다. 헤드라이트가 이들의 몰골을 기괴하게 비추고 있는 동안 차에서 당당한 체구의 사나이가 내렸다. 崔圭植 종로경찰서 서장이었다. 『나는 종로경찰서장이오. 소속을 밝혀야지요. 외투 안에는 뭐가 들었소?』 『아무 것도 아니오. 우리는 CIC 사령부가 있는 효자동으로 가는 길이오』 『여기는 내 담당구역입니다. 신분을 밝히지 않고는 아무도 못 지나가요』 2조 조장 金新朝는 대열 중간에 서 있다가 지프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 추는 가운데 崔圭植 서장이 권총을 뽑아들고 저지하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남침 후 처음으로 당황했다고 한다. 공비들의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을 때 崔圭植 서장 뒤로 시내 버스 한 대가 올라오다 길을 가로막은 지프차 뒤로 멈춰섰다. 공비들은 버스를 국군의 지원 병력인 줄로 착각했다. 잠시 후 또 한 대의 버스가 커브를 돌아 나오다 앞 차량이 멈춰 서 있자 급 정거를 했다. 공비들은 연이어 두 대의 차량이 도착한 것을 목격하고는 외 투 속의 총과 수류탄을 더듬었다. 그 순간 崔圭植 서장과 시비가 붙었던 공비가 외투 속에서 총을 꺼내 崔서장의 가슴을 향해 연발 사격을 가했다. 『드르륵, 드르륵』 『국방군 출동이닷!』 1·21 사태의 첫 희생자가 된 당시 36세의 崔圭植 서장은 가슴에 세 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밤 10시15분경이었다. 총성이 나기 무섭게 공비들이 일제히 버스를 향해 사격을 가하면서 세 발의 수류탄이 작렬했다. 버스에 타고있던 청운중학교 3학년 金亨基(김형기·1 7)군과 회사원 洪裕敬(홍유경·29)씨가 수류탄 파편을 맞아 그 자리에서 숨 지고 버스 차장 金貞子(김정자·18세)양은 오른 팔에 관통상을 입었다. 버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뛰어 내렸다. 어둠 속에서 공비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국군인 줄 알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대열 뒤에서 부대장 金春植과 말을 걸었던 두 형사가 金春植을 쓰 러 뜨렸다. 朴형사는 오른손으로 金春植의 목을 죄면서 왼손으로는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을 들고 머리를 내려쳤다. 졸지에 돌멩이로 머리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의식을 잃은 金春植을 朴형사는 수갑으로 채워 生捕하는 데 성공했다. 멀리서 동료가 경찰에 의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공비들은 도망가면서 두 형사를 향해 총을 쏘았다. 鄭鍾壽 형사가 쓰러졌고 朴泰安 형사는 왼쪽 귀 위로 총알이 스쳐 지나갔다(鄭형사는 며칠 후 병원에서 숨졌다). 경복고 후문 일대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총성이 퍼지자 청와대 외곽을 경비하던 수경사 30대대(대대장 全斗煥 중령 ) 병력들이 즉시 달려오기 시작했다. 金新朝 목사의 회고. 『한 명이 쓰러지는 걸 보고는 「틀렸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휘부가 무너졌다고 판단하는 순간 휴전선에서 청와대까지 내려왔다는 자부심이고 뭐고 다 없어졌고 동료들이 순식간에 흩어지는 겁니다. 청와대고 작전이고 없었어요. 불과 5분 정도 교전한 것 같은데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던 겁 니다. 일부는 오던 길을 거슬러 세검정 쪽으로 튀었고 일부는 청와대 뒷산인 北岳山을 탔고, 저는 경복고등학교 뒷담을 넘었지요. 인왕산을 타고 北으로 가려고 말입니다』 인민군 소위 金新朝는 동료들이 많이 택하지 않은 루트를 골랐다. 자하문을 넘어 세검정쪽으로 도망가려던 공비들은 뒤따라 내려오던 시내버스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그러나 승객들이 미리 대피한 상태여서 피해는 없었다. 이들은 세검정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두 대의 버스에도 수류탄과 기총소사를 해대며 도망쳤다. 밤 10시30분경이었다. 야간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심장부 부근까지 침투한 것은 성공했지만, 무고한 양민을 학살해 가며 유격전을 벌인 것만큼 어리석은 非정규전 사례도 없을 것이다. 밤 10시 40분경 세검정 길과 북악산 일대는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30대대 병 력들이 투입되어 총격전으로 이어졌다. 30대대 병력이 현장에 투입될 무렵 , 경복궁 옆에 주둔하던 30대대 연병장에서는 대대장 全斗煥 중령과 작전주임 張世東 소령의 지휘하에 81mm박격포 10여 문에서 조명탄이 날아 올랐다 . 조명탄은 밤새도록 세검정과 북악산 일대를 대낮같이 밝혔다. 1968년 1월21일 밤 10시 15분부터 30분 사이 총성이 여러 차례 울린 시각, 朴正熙 대통령은 감기약을 먹고 잠을 자다 깨어났다. 朴鐘圭 경호실장이 제일 먼저 달려왔고 崔宇根(최우근) 수경사 사령관이 그 뒤를 따라 들어와 상황을 보고했다. 비슷한 시각, 金聖恩 국방부 장관도 총성을 듣고 국방부에 비상전화를 걸었 다. 청와대 부근에서 交戰中이란 보고를 받은 金장관은 즉시 차를 타고 청와대로 달려왔다. 朴正熙 대통령은 점퍼 차림으로 집무실로 내려와 있었다 . 金장관이 보니 대통령은 경황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金장관, 내가 감기에 걸려 약을 먹고 자다가 일어났는데 말이야. 거 참, 이놈들이 여기까지 쳐들어 올 줄 누가 생각이라도 했겠소?. 고약한 놈들. 뭐 못하는 짓이 없구먼. 그렇게 파괴하더니 결국 여기까지 쳐들어 왔구먼』 『저도 놀랐습니다. 각하. 괴뢰군 놈들이 神이 아닌 이상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여기까지 오겠습니까』 두 사람은 전쟁을 겪은 군인 출신이어서 그런지 수행하던 경호원들이 보아도 무척 대담했다고 한다. 청와대 밖 하늘은 수경사 30대대에서 쏘아올린 조명탄으로 훤하게 밝아 있었다. 尹必鏞 방첩대장은 金聖恩 국방부 장관에 게 戰果와 피해상황을 수시로 보고했다. 자하문에서 최초 총격전이 벌어져 종로경찰서장이 피격당해 순직했으며, 한 명은 생포했고 현재 청와대 외곽 으로 몰아내며 추적중이라는 내용이었다. 朴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崔圭植 총경이?』하며 몹시 안타까워 했다. 崔圭植 총경은 연세대학교 정치학과 재학중 6·25를 만나 종합학교 31기생 으로 임관했다. 5·16 당시 소령으로 복무중 혁명정부로부터 충청북도 경찰 서 정보과장으로 발령받아 경찰에 투신하게 되었고 능력을 인정받아 釜山市警 정보과장을 거쳐 1966년 8월 용산경찰서 서장으로 승진했다. 1년 뒤인 1967년 10월27일 종로 경찰서장으로 발령받아 근무중 참변을 당했다. 崔圭植 총경의 순직을 가슴 아파한 또 한 사람은 2층 부속실에서 귀를 쫑긋 하게 세우고 앉아 있던 陸英修 여사였다. 이날 밤, 경호실에서 등화관제를 요구해 제2부속실의 洪晶子(陸英修의 조카) 비서관은 불도 켜지 않은 2층 복도를 오가며 陸여사의 심부름을 했다. 총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陸英修는 극도의 침착성을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5·16 혁명하던 날 이모님 인상과 참 비슷했어요. 총성이 나자 어느 새 옷(한복)을 갈아 입고 서재 겸 집무실이있던 방으로 가셔서 촛불을 켰지요 . 경호관들이 오가면서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 崔圭植 총경이 순직했다는 말을 들었던 겁니다』 崔圭植 총경이 용산 경찰서장에서 종로 경찰서장으로 1년 만에 부임하게 된 것은 陸英修 여사의 칭찬이 주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실했던 崔총경은 부산시경 정보과장으로 근무하면서 동아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부산 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던 중 용산서장으로 발령받아 상경했다. 陸英修 여사가 崔총경을 눈여겨 본 것은 해외 순방이나 큰 행사 때 깔끔한 복장에 절도 있는 행동으로 일선 경찰들을 지휘하는 모습에서였다고 한다 . 그 후 관내에 청와대가 포함된 종로 경찰서장으로 발령받게 하는 데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미망인 劉貞和(유정화·67)씨에 따르면 남편 崔총경은 서울 용산으로 올라 와서도 공부를 계속했고 종로경찰서 서장으로 발령받은 뒤로는 너무 바빠 부산대학교 교수들이 상경해서 논문 지도를 했다고 한다. 1968년 1월12일 崔圭植 총경은 부산대학교로부터 논문이 최종 통과되어 석사학위를 받게 되었다는 축하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9일 뒤 자하문 언덕에서 무장공비가 쏜 총탄에 숨을 거두었다. 미망인 劉여사는 그해 2월26일 부산대학교 총장의 초청으로 남편을 대신해 졸업식장에 참석, 학위를 받았다. 陸여사의 조카 洪晶子 비서관의 회고. 『그날 밤 이모님은 눈물을 참 많이 흘렸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는 않았지 만, 崔총경의 죽음이 마치 자기로 인해 벌어진 것은 아닌지 자책하는 듯이 슬퍼했지요. 새벽 2시쯤 되자 「전화를 해야겠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라 며 수화기에 손을 얹고 몇 번이나 주저하다가 종로 경찰서에 전화를 하셨어요. 그리고 유가족들에게 애도를 표한다는 말씀을 꼭 전해달라고 하시면서 울먹이셨지요』 밤 12시가 가까워지자 청와대로 속속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청와대 쪽에서 는 李厚洛(이후락) 비서실장, 金詩珍(김시진) 정보비서관 등이 정부쪽에서 는 丁一權(정일권) 국무총리, 洪鍾哲(홍종철) 공보부 장관, 申稙秀(신직수 ) 검찰총장, 金玄玉(김현옥) 서울시장, 李洛善(이낙선) 국세청장 등이 달려 왔다. 각료들은 朴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던 중 『총성이 난 이상 시민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진상 발표를 신속히 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다음날 아침 6시에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난 朴대통령은 라디오를 켰으나 사 건은 여전히 보도되지 않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申範植 청와대 대변인을 불 러 『왜 방송이 늦어지고 있나』면서 『중계방송 하다시피 소상하게 보도해서 국민의 불안을 덜어주고 간첩 수색에 국민의 협조를 얻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보도 관제는 22일 오전 7시를 기해 해제되었다. 자하문 부근에서 交戰(교전)이 있기 직전인 1월21일 오후 10시 10분경, 蔡元植 치안국장실 무전기로 긴급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세검동 고갯길에서 이상한 옷차림의 군인 30여명이 술에 취해 청운동 쪽 으로 내려가고 있음」 蔡국장이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교전이 끝난 뒤였고 도로에는 수류탄으로 반파된 버스가 팽개쳐져 있었다. 길바닥엔 崔圭植 종로경찰서장의 시체 와 아직 숨이 붙은 鄭鍾壽 형사가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朴泰安 형사가 생 포한 金春植을 지키고 있었다. 蔡국장은 朴형사와 생포 공비를 차에 태워 근처 효자동 파출소로 데려 갔다가 다시 蔡국장 차로 치안국으로 이동했다 . 시간은 21일 밤 11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뒤로 젖힌 양 손에 수갑이 채워진 金春植은 머리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는 소매 없는 등산용 조끼를 입고 양 옆구리에도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조끼 앞가슴엔 작은 주머니 같은 것을 만들어 위, 아래 두 줄로 네 발씩 모두 여덟 개의 수류탄을 넣고 흔들리지 않게 실로 누벼놓았다. 蔡元植 국장은 金의 허리에 찬 권총을 뽑아내고 양 옆구리의 주머니에서 휴대용 식량과 주머니 칼을 찾아냈다. 蔡국장은 칼날에 쓰인 글을 보더니 곁 에 서있던 朴형사에게 보여주었다. 「Made in Japan」이라고 쓰여 있었다. 직원들은 蔡국장의 무장해제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朴형사도 蔡국장을 돕기 위해 金이 입은 조끼 양 옆의 매듭을 풀고 있었다 . 바로 그때 蔡국장이 소리쳤다. 『엎드려!』 몇 초후 「꽝!」하는 폭음과 함께 金春植의 복부는 산산조각 나고 치안국 복도는 피범벅으로 변했다. 朴泰安씨의 회고. 『그때 蔡국장은 조끼 윗줄의 수류탄 네 발을 모두 제거하고 아래쪽의 수류 탄 세 번째 것을 제거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수류탄은 낚시줄 같이 가는 선으로 네 번째 수류탄 안전핀을 물고 있었던 것을 몰랐던 겁니다. 蔡국장이 세 번째 수류탄을 제거하는 순간 네 번째 수류탄 안전핀이 뽑혀 올라온 것이죠』 蔡국장은 안전핀이 뽑힌 채 조끼에 달려 있는 수류탄을 보면서 공비를 복도 한쪽으로 힘껏 밀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때문에 무장해제를 지켜보던 직원 들과 朴형사는 파편상도 입지 않았다. 대신 복도와 수사과장실 유리창이 박 살나면서 벽면 전체가 피범벅이 되었다. 生捕(생포)된 간첩이 爆死(폭사)로 사라져 버렸다. 蔡국장은 차를 타고 나와 종로경찰서를 들러 직원들을 격려하고 치안국 감찰계장 金德中 총경을 임시 종로 경찰서장으로 임명했다. 자정 무렵 蔡元植 치안국장은 청와대 정문을 지나고 있었다. 이 시간에 丁一權 국무총리, 李澔(이호) 내무부장관 등과 군 장성들이 속속 청와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늘에선 수경사 30대대에서 쏘아올린 조명탄이 누런 연기를 흘리며 빛을 발하는 가운데 화약 냄새가 청와대 주위를 애워싸고 있었다. 蔡국장은 청와대를 지나 세검정 쪽으로 차를 몰게 했다. 경찰과 공비들의 격전이 있은 직후 신문, 통신, 방송사 기자들도 취재에 뛰 어 들었다. 그러나 한 시간여가 지나는 동안 사방으로 튀어 달아난 공비들 로부터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자정 무렵 각 언 론사는 현장 취재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기자들을 철수시켰다. 곳곳에 군인과 경찰들이 검문을 하는 중에 중앙일보 孫石柱(손석주·61세· 現 M&R대표) 사회부 기자와 張洪根(장홍근) 사진부 기자는 만하장(現 올림 피아 호텔) 부근에 신문사 깃발을 단 지프차를 세워 두고 검문소 통과를 시 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지프에 무전기가 없어 본사로부터 철수 지시를 받지 못한 채 현장에 남아 있던 중이었다. 군인들은 검문소를 통과하려는 孫, 洪 두 기자에게 『죽고 싶으냐』며 위협해 시비가 일었다. 蔡元植 치안국장은 순찰中 무전을 통해 파주 부근에서 교전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출발을 서두르는 순간에 군인들과 시비가 붙은 두 기자를 발견했다 . 蔡元植 국장은 현장을 기록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들을 불렀다. 『어이! 기자. 이리 와!』 『아, 蔡국장님이십니까. 중앙일보 사회부 孫石柱 기잡니다』 『당신, 나하고 파주에 갈 수 있겠어? 교전중이라는데도?』 『당연히 가야죠』 타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두 기자는 차에 오를 준비부터 했다. 이들을 태운 蔡국장의 차가 구파발을 지나 경기도 벽제 부근에 도착했을 때 蔡국장의 차량 무전기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한 놈 잡았습니다. 홍제동 파출소로 연행중입니다』 즉시 서울로 차를 돌렸다. 당시 홍제동 파출소는 30사단(사단장 許準 준장 )의 임시 작전 지휘본부가 설치된 곳이었다. 시간은 22일 새벽 3시를 넘어 서고 있었다. 蔡국장과 두 기자가 파출소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 30사단 군인들이 민가 부근에서 생포한 공비 한 명을 파출소로 끌고 들어왔다. 여러 사람이 공비의 허리춤과 웃옷을 잡고 있었기에 국방색 군복 상의는 몇 군데 단추가 떨어져 나가고 검은 목면 바지는 앞 단추가 열린 채 무릎까지 흘러 내린 상태 였다. 사진부 張기자가 플래시를 터뜨리며 몇 장을 찍은 뒤 밖으로 튀어 나갔다. 軍에 의한 보도관제가 심한 때여서 언제 필름을 빼앗길지 몰랐기 때 문이었다. 몇 평 안되는 파출소는 일순간 사람들로 붐볐다. 소속을 알 수 없는 군인, 경찰, 中情요원들로 복작거렸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상황에서 孫기자가 공비에게 고압적인 자세로 말을 걸었다. ―너, 이름이 뭐야. 나이는. 『김신조다. 스물일곱 살이다』 ―주소와 계급은. 『군관(장교)이고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 청암동 3반에 가족이 살고 있다』 ―남파 목적이 뭐야. 『청와대를 까러 왔다. 21일 밤 8시에 공격을 개시해 5분 만에 끝낸 후 청 와대 車를 뺏어 타고 문산 방면으로 도망하기로 했다. 이것이 잘 안되면 비봉 쪽으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지휘자의 잘못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몇 명이 왔어? 『31명이 국군 복장을 하고 왔는데, 1명은 대위, 2명은 중위, 3명은 소위 계급장을 달고 나머지는 사병 복장을 하고 넘어왔다』 ―넘어 온 게 언제야? 『16일 평양에서 출발했다』 ―무기는? 『수류탄, 장총, 권총이다. 1인당 수류탄 열 개와 탄알 300개 씩을 가져 왔다. 우리는 결사대 훈련을 받았으며 모두 군관(장교)이다』 ―현재 기분은?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젠 겁도 안 난다』孫기자는 金新朝의 윗주머니에서 「지식인들이여 언론 출판의 활동을 위해 싸우라」는 내용의 삐라를 발견했다. 잠시 후 金新朝는 앰뷸런스에 실려 방첩대로 끌려갔다. 金新朝가 체포된 곳은 자하문 밖 인왕산 기슭에서였다. 1월22일 새벽 1시 30분경, 자하문 밖 세검정 부근에서 잠복 근무를 하던 30사단 공병대 소속 車章錫 이병은 세검천 위쪽 인왕산 기슭에서 계곡 쪽으로 살금살금 기어내 려오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M1소총 자물쇠를 푼 車이병은 검은 그림자를 조 준하려 애썼다. 야간사격은 총열 끝에 붙은 가늠쇠도 잘 보이지 않아 빗나 가기 일쑤다. 車이병의 사격도 빗나갔다. 괴한은 세검천 변 외딴 집 옆에 있는 바위로 몸을 숨겼다. 두 시간 반 전에 경복고등학교 담장을 넘어 도망 쳤던 인민군 소위 金新朝였다. 『한 놈 나타났다!』 소대장 朴源造(박원조) 소위와 소대원들이 달려 와 포위망을 쳤다. 朴소위 가 플래시로 바위 쪽을 비춰보니 짚단 더미 사이로 사람 그림자 비슷한 것 을 보았다. 수하를 위한 암구호를 외쳤다. 『피아노』 『……』 『피아노』 『……』 대꾸가 없자 병사들이 바위 주변에 위협사격을 가했다. 순찰중이던 周喜俊 (주희준) 소령이 트럭을 끌고 와 헤드라이트로 괴한이 숨은 바위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괴한은 그때서야 짚더미를 헤치고 어정쩡하게 두 손을 들고 일어났다. 『두 손을 높이 들어! 안 그러면 쏜다!』 괴한은 주먹쥔 왼손 안에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땅에 떨어뜨렸다. 안전핀이 빠진 채 땅바닥을 구르던 수류탄은 군인들과 괴한을 초긴장 속으로 몰았다 . 그런데 몇 초가 지나도 수류탄이 터지지 않았다. 불발탄임을 감지한 한 병사가 뛰어나가 수류탄을 차 버리고 괴한을 생포했다. 현장에서 몸수색을 한 결과 괴한의 소지품이 쏟아져 나왔다. 참깨 섞은 엿 두 개, 말린 오징 어 한 마리, 아스피린, 소화제, 페니실린, 각성제 등의 약품과 30cm짜리 파 이프를 가지고 있었다. 물이나 흙 속에 몸을 은폐할 때 숨을 쉬기 위한 호흡용 파이프였다. 나머지 공비들 중 일부는 세검정 부근 民家 쪽으로 튀었다. 21일 밤 11시경 홍제동 쪽으로 달아나던 공비 한 명은 지붕을 타고 도망가다 지붕이 내려 앉아 그 집 부엌으로 떨어졌다. 잠을 자던 李翔來(이상래·당시 65세)씨와 아들 容瑄(용선·당시 31세)씨 등 가족 5명이 『도둑이야』라고 소리치며 뛰어나가 몽둥이로 괴한에 달려 들었다. 이들이 괴한과 몸싸움을 하던 도중 괴한의 몸에서 수류탄이 떨어져 나와 가족들은 비로소 무장공비임을 알 게 됐다. 李씨 가족 중 한명이 30여m 떨어진 홍제동 파출소에 신고했으나 경찰이 늑장 출동을 하는 바람에 공비와 격투를 벌이던 아들 容瑄씨는 공비가 쏜 권총에 복부를 맞아 숨졌다. 신고를 받고도 즉시 출동하지 않은 홍제동 파출 소장은 며칠 뒤 파면되었다. 자하문 경복고등학교 후문 부근에서 첫 교전을 벌이고 학교 담을 뛰어넘은 공비는 金新朝뿐 아니라 5명 가량이 더 있었다. 이들은 몰려 다니며 교장 사택으로 뛰어 들어 마당에 수류탄을 던지는 바람에 집안의 유리창이 박살 났다. 폭음소리에 놀라 달려 나온 수위 鄭四永(정사영·당시 45세)씨에게 수류탄을 던져 살해했다. 밤 11시30분 경에는 홍제동 파출소 앞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여 자가 유탄에 맞아 숨지는 등 이날 밤 우리측은 崔圭植 서장과 민간인 6명 등 모두 7명이 사망했고, 朴泰安 형사 등 3명의 경찰관과 민간인 한 명이 부상했다. 공비를 쫓던 수경사 30대대는 22일 오전 8시경 北岳山에서 3명, 오전 11시쯤 다시 한 명의 공비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22일 오전까지 첫 교전에서 金春植을 포함한 다섯명의 공비를 사살하고 한 명(金新朝)을 생포했다. 1월23일 오후 1시쯤 북한산에서 한 명의 공비가 사살된 이후 공비들은 서울 외곽으로 완전히 빠져 나갔다. 이 무렵 생포된 金新朝를 심문했던 방첩대 에서는 「124군 부대」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金新朝에게 북한 전역에 걸 친 부대 위치와 金新朝 자신이 훈련받은 부대의 위치 및 건물 요도를 그리 게 했다. 金聖恩 당시 국방장관은 이 그림을 들고 본스틸 유엔군 사령관을 만났다. 첩보기를 띄워 항공 촬영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金 前 장관의 증언. 『오산 비행장에서 첩보기 SR-71이 이륙하더니 서해안에서 곧바로 北上하다가 평양 부근에 이르러 우회전하더군요. 그리고 원산까지 통과하는 데 정확 히 3분이 걸립디다. 이렇게 해서 얻은 항공사진으로 김신조가 그린 건물과 비교를 해 봤는데 정확했습니다』 방첩대의 조사와는 별도로 공비 소탕에 나선 군경합동 수색대는 1월30일까지 31명의 공비 중 27명을 사살하고(자폭 포함) 金新朝 한 명을 생포했으나 우리측도 민간인 7명이 사망했고, 이익수 대령 이하 23명의 장병이 전사했으며 부상자만도 52명이나 되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행방이 묘연해진 공비 세 명 중 한 명은 2월 중순 경기도 양주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나머 지 두명은 월북한 것으로 판단해 작전을 종결지었다.
펌>>보배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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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죄수출신으로 구성되었던 북파부대 -육군 선갑도부대 비화
-- 1968년 김신조 사건 후 이에 대한 대응으로, 기존의 상설 북파부대인 HID, UDU와는 별개의 보복 목적 북파부대 3개가 새로 창설되는데, 바로 공군의 실미도부대, 해병대의 마니산까치부대(MIU), 그리고 육군의 선갑도부대입니다. 이들 세 부대는 첩보수집 등이 목적이 아니라, 북의 핵심부에 대한 과감한 보복을 크게 한 뒤에 산화하는, 사실상 자살특공대 성격의 부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대북관계 개선기류에 따라 실제 작전 투입이 계속 미뤄지고 훈련 및 대기상태에만 있다가, 결국 차례로 해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북파부대들은 항간의 카더라소문과는 달리 대부분 죄수출신들이 아니었는데, 선갑도부대만은 전원이 실제 죄수출신들로 구성되었었다고 합니다. - -선갑도 부대원 충격증언 “내 손으로 무기수 공작원 목을 졸랐다” ● 1968년 7월5일 안양교도소에서 사라진 무기수 12명 ● 2차대전 당시 ‘사형수 부대’ 영화에서 착안 ● “상부 지시 따라 공작원 3명 살해했다” ● 사망 3명, ‘북한 침투 후 미귀환’ 처리 ● 가짜 사면장 주고 “35년째 복역중(?)” ● 생존자 15명, “부인도 아들도 모른다.” “백곰 동지! 성공적으로 임무 마치고 돌아오갔습네다!” 인천에서 80km 거리. 일반인에게는 지도에만 존재하는 서해의 절해고도(絶海孤島) 선갑도(仙甲島) 해안의 파도 소리를 찢으면서 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백사장에서는 계급과 명찰이 없는 군복을 입은 20대 젊은이들이 우렁차게 부르는 ‘대한 별동대가(歌)’가 파도소리와 뒤섞이고 있었다. “우리는 대한 별동대, 조국의 부름 앞에 목숨을 바친다아.” ‘임무’를 위해 떠나는 전우를 환송하는 대원들의 눈빛에는 지옥훈련을 마치고 ‘실전’에 투입된다는 환희와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뒤엉켜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한국전 휴전 이후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던 1968년 여름이었다. 임성빈. 전우들의 전송을 받으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선갑도를 떠난 그는 황해도 개성 출신의 월남자였다. 당시 나이 28세.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살인 혐의로 15년형을 선고받고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몸이었다. 그는 1968년 1월 북한 김신조 일행의 청와대 기습사건에 대한 보복 공격을 위해 창설된 육군 첩보부대(AIU) 산하 902정보부대 803대, 이른바 ‘선갑도 부대’ 공작원 중 한 명이었다. 자체적으로 부르던 이 부대의 명칭은 ‘대한 별동대’. 임성빈은 창설 당시 12명으로 구성된 공작원 가운데 처음으로 북한 정찰 임무에 나서는 ‘영광’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렇게 임성빈이 ‘임무’를 위해 선갑도를 떠난 지 35년.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북한에 침투해 정찰 임무를 마쳤으나 미처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문에서부터 적에게 투항했다거나 아무도 모르게 바닷속에 수장(水葬)시켰다는 이야기 등등 흉흉한 소문만이 선갑도 주변을 음습하게 떠돌 뿐이었다. ‘북한 간다’며 사라져 그 후로도 비슷한 일은 계속됐다. 선갑도 부대 창설 당시 공작원 12명 중 한 명, 두 명씩 자취를 감추는 일이 잇따랐던 것이다. 1969년 여름 무렵 사라져버린 공작원의 이름은 박두상이다. 당시 25세. 박두상은 군 복무 당시 상관 상해치사 혐의로 무기형을 선고받고 안양교도소에서 복역중이었다. 1970년 봄에는 강도 살인 혐의로 무기형을 선고받았던 최일남이 섬에서 사라졌다. 최일남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북파 임무가 부여되지 않자, 혹독한 훈련을 시킨 기간요원들에 대해 앙심을 품고 도끼를 든 채 교육팀장을 향해 달려들었다가 얼마 뒤 섬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들 2명 역시 임성빈 등 다른 10명의 안양교도소 출신 무기수, 장기수들과 함께 선갑도에 투입된 ‘별동대원’들이었다. 안양교도소 전과신분증 보존 문서와 출소신분장 보존부에는 이들 12명이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갑도 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70년대 초 부대가 해체된 후사회로 되돌아온 사람들 중에도 이들의 소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동료 대원들이나 이들을 훈련시킨 기간요원들이나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과연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의문은 35년 만에 풀렸다. ‘신동아’는 이들이 선갑도에서 사라진 뒤 당시 육군 첩보부대가 운영하던 인천 시내의 한 안가(安家)에서 첩보부대원들에 의해 목졸려 숨진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이들을 교살(絞殺)하는 데 참여한 첩보부대원은 모두 4명. 이들 중 한 명인 김창환씨(가명)는 최근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선갑도에 감금된 상태에서 장기간 훈련이 계속되자 공작원들 사이에 불안감이 고조되기 시작했고 하극상 사건이 발생하는 등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곧 부대장 지시가 떨어졌고 그에 따라 주모자급 한 명을 전화선으로 목졸라 질식사시켰다”고 증언했다. 1969년 여름의 일이었다. 전화선으로 목졸라 살해한 뒤 화장 애초 이 공작원들은 아무도 모르게 선갑도를 빠져나와 인천시 주안에 위치한 첩보부대 안가에 감금되었다. 이 안가는 당시 나포 간첩을 수용할 목적으로 내부에 쇠창살이 달린 영창을 운영하고 있던 곳. 영창에 감금된 공작원에게는 하루 한 덩이의 주먹밥만이 제공됐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나자 감금된 공작원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기진맥진 상태가 돼버리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상부로부터 쥐도새도 모르게 그를 ‘처리’하라는 지시가 하달됐다. 비밀 임무를 맡게 된 4명의 부대원들은 ‘처리’ 방법을 논의한 끝에 우선 전신 마취 유도제인 펜토탈(Pentothal)을 사용하기로 했다. 펜토탈을 주사기로 혈관에 찔러넣자 이내 공작원은 무기력하게 널브러지고 말았다. 1시간쯤 지나 시신을 처리하러 영창으로 들어서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공작원이 쇠창살을 붙잡고 일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겁에 질린 부대원들 중 누군가가 순간적으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안 돼!” 그러나 이내 동료들이 그의 권총을 나꿔챘다. 아무리 안가라고는 하지만 주변에 총소리가 새어나갈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 때 동료 중 한 명이 바깥으로 나가더니 가느다란 전화선을 구해왔다. 가장 손쉽고 빠른 방법을 선택한 것이었다. 김씨는 “이렇게 ‘처리된’ 공작원들의 유해를 당시 주안 신기촌(현 남구 주안8동)의 화장터에서 화장시켜 인근 야산에 뿌렸다”고 밝혔다. 김씨의 증언이다. “목이 졸린 공작원이 질식사한 것을 확인한 후 곧바로 관에 넣어 사전에 만들어놓은 사망진단서를 들고 화장터로 직행했습니다. 그러나 화장터 관계자는 ‘사망 시각으로부터 24시간이 지나야 화장할 수 있다’는 자체 규정을 내세워 난색을 표했어요. 곧바로 권총을 빼들고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고 나서야 화장시킬 수 있었죠. 그 때만 해도 시신이 되살아날까봐 부들부들 떨고 있었으니까요…” 이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후쯤, 이들은 또다른 선갑도 공작원 한 명을 같은 안가에서 교수형에 처했다. 유해는 마찬가지 방식으로 화장했다. 김씨는 “당시 이 같은 방식으로 모두 3명의 선갑도 공작원을 ‘처리’했다”고 밝혔다. 남은 문제는 ‘단순 실종’ 또는 ‘북한 침투’ 등으로만 알려진 이들 공작원의 신원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이었다. 교도소에서 장기수로 복역중이던 수인(囚人)들이었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가족이 나타나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선갑도 부대가 본래 북한 지역 침투를 목적으로 창설된 부대인 만큼 그냥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만 처리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서 임성빈에게 ‘임무 수행을 위해 떠난다’고만 알려준 뒤 본인은 물론 동료 공작원들도 모르게 ‘처리’해버린 것에 미루어 보더라도 당시 부대 고위층이 사전 시나리오 아래 이들의 살해 계획에 가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아직까지 주안의 첩보부대 안가에서 살해된 3명이 1968~70년에 섬에서 사라진 임성빈, 박두상, 최일남씨라고 공식 확인된 것은 아니다. 증언자 김씨가, 살해당한 선갑도 공작원 3명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섬에서 사라진 이들 3명과 시차를 두고 인천에서 살해된 3명은 동일 인물일 개연성이 크다는 게 당시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사라진 3명과 살해된 3명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임무를 수행해보지도 못하고 비참한 죽임을 당한 이들 모두가 일단 ‘임무 수행 후 미귀환’ 형식으로 처리되었다는 사실이다. 선갑도 부대에 참여했던 또다른 관계자 역시 “당시 ‘사상 불순’이나 ‘훈련 불참’ 등의 사유로 처형된 공작원들은 지금도 군 공식기록에는 북한에 파견됐다가 미귀환한 것으로 되어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35년 전 선갑도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일부 공작원 출신들 사이에서만 은밀한 암호처럼 입에서 입으로 오가던 선갑도 부대의 실체에 접근해 보자. 선갑도 부대는 영화 ‘실미도’를 통해 널리 알려진 공군 2325부대 209파견대(일명 실미도 부대)와 동일한 목적 아래 창설됐다. 북한 지역의 후방 침투 및 보복 테러, 그리고 주요 시설물 폭파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특수부대로 정식 명칭은 육군 첩보부대(AIU) 산하 902 정보부대 803대이다. ‘또 하나의’ 실미도 부대, 아니 실미도 부대를 능가하는 ‘원조’ 북파 공작부대가 서해 외딴섬에 아무도 모르게 존재했던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공작과를 모태로 하는 육군 첩보부대(HID : 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는 1961년 AIU(Army Intelligence Unit)로 명칭을 바꾼다.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앙정보부는 김신조 일행이 일으킨 1·21사태 이후 보복공격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이미 알려진 공군의 실미도 부대 이외에도 AIU가 관리하는 선갑도 부대, 해군 첩보부대 산하의 폭파부대인 UDU (Underwater Demolition Unit) 등을 운영해 왔다. 비슷한 시기에 육해공 3군(軍)에 각각 북파공작 부대를 창설해 상호 경쟁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이 중 선갑도 부대는 당시 안양교도소에서 복역중이던 무기수와 장기수 등 기결수들로 창설된, 이른바 수인(囚人) 부대였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경우 사면한다는 조건이었다. 영화 ‘실미도’의 영향으로 공군 실미도 부대가 사형수나 기결수를 대상으로 공작원을 모집한 것처럼 잘못 알려졌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실미도 공작원 명단 중 교도소 출신은 한 명도 없다(‘신동아’ 2004년 4월호 ‘군 수사기록 통해 확인한 실미도 공작원 31명 명단’ 참조). 선갑도 803대만이 첩보부대 사상 유일하게 복역중 기결수들로 구성된 부대인 것이다 . 공군은 실미도, 육군은 선갑도 당초 공군 첩보부대의 북파공작대가 실미도에 자리잡은 것과 비교해 볼때, AIU 산하의 북파공작대가 선갑도에 자리잡은 것은 육지로부터의 거리, 백령도 등 북파 전진기지와의 거리 등을 두루 감안한 조치로 보인다. 선갑도는 인천으로부터 배로 약 3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인천공항과 맞붙어 있는 무의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실미도에 비해 보안 유지가 훨씬 쉬운 절해고도(絶海孤島)에 만들어진 부대인 셈이다. 이 섬에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 8240부대가 주둔한 적이 있다. 따라서 1968년 1·21 사태 이후 급조한 부대를 들여보내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게다가 서해 도서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험한 지형이 사방을 감싸고 있어 첩보부대 자리로 더할 나위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선갑도 부대 창설 당시 섬에 상륙했던 초기 요원들은 짐을 풀어놓자마자 ‘담배 꽁초를 모두 주워 모으라’는 지시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담배 꽁초를 뿌려두면 뱀이 접근하지 못한다는 속설에 따라 막사 주변에 뿌려두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선갑도 주변에는 뱀이 많았다. 미군 첩보부대가 선갑도에 주둔할 당시에도 미군 한 명이 막사 주변을 기어다니던 구렁이를 권총으로 쏘아 죽인 다음날 지휘관이 다른 뱀에 물려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미군 첩보부대가 선갑도를 떠난 것도 이 때문이라는 이야기까지 곁들여져 선갑도는 어느새 ‘저주받은 섬’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68년 여름, 이 ‘저주의 섬’에 상륙한 기결수는 모두 12명. 안양교도소에서 1968년 7월5일 동시에 사라진 무기수들이었다. 평균 나이는 26~ 27세. 실미도 부대원들이 대부분 20대 초반이던 것에 비하면 꽤 많은 나이였다. 또 실미도 부대원들이 전국 각지에서 첩보부대 물색조에 의해 포섭된 데 비해 선갑도 부대원들은 안양교도소에서 한꺼번에 자원(自願) 형식으로 모집했다는 것이 당시 부대 창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물론 말썽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가족이나 연고자가 없는 사람 위주로 선발했다. 당시 이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던 예비역 장교 및 하사관들은 12명 중 가장 먼저 임무 수행을 나갔다가 실종된 임성빈만이 15년형을 받았을 뿐 나머지 11명의 대원은 무기수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12명 전원이 군 복무중 살인, 상관 상해치사 등의 범죄를 저질러 군사재판을 통해 형이 확정된 뒤 안양교도소에 복역중인 기결수들이었다. 그 중에는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현지에서 각종 사건을 저질러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도 있었다. 선갑도 부대원들이 교도소에서 한꺼번에 모집된 데 비해 이들에 대한 교육훈련을 담당할 기간요원, 즉 장교와 하사관들은 철저히 차출된 요원으로 구성됐다. 현지 교육대장은 소령급으로, 대원들과 함께 북파될 팀장급 요원들은 신임 소위들로 진용이 짜여졌다. 다음은 선갑도 부대 창설 요원으로 섬에 투입된 한 관계자의 증언이다. “보병학교 교육이 끝난 뒤 기초 공작교육을 이수하고 청계산 근처의 모 부대에서 대기하던 중이었습니다. 부대에서 북한의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뒷산까지 밀고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리고 얼마 후, 나를 포함한 2명은 ‘남산’으로 옮겨졌습니다.” 여기서 ‘남산’이란 정보사령부 901정보부대를 말하고 ‘청계산 근처의 모 부대’란 경기도 판교 톨게이트 근처에 있는 정보사령부 교육단을 지칭하는 것이다. 교육단은 809 정보부대라고도 불렸지만 흔히 ‘목장’이라는 은어로 알려져 있다. 이 교육단은 공작원들이 당시 육군 첩보부대 산하 전국 각 예하 부대로 파견되기 직전 교육훈련을 받던 곳이다. 당시 공작원들은 선발되면 ‘목장’에 앞서 먼저 영등포구 양평동 해태제과 자리에 있던 첩보부대에 입소했다. 이 부대는 입구에 ‘동북산업사’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는데, 1968년 당시 실미도 부대원들을 모집해간 물색조가 ‘동북산업사’소속이었다는 증언이 최근 나온 바 있다. 중앙정보부에서 운영하던 분실 정도로 추정되는 이 곳에서 일부 공작원들은 기초 군사교육에 해당하는 4주 정도의 훈련을 받고 ‘목장’ 또는 기타 교육부대로 이관됐다고 당시 관계자들은 밝히고 있다. 스카라극장의 ‘특공대작전’ 물론 북파 임무 수행을 위한 작전을 코앞에 두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임무 수행 장소나 목표는 본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남산’에 대기하면서 국내 주요 기간시설물 등을 대상으로 하는 가상 침투훈련만 계속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죠. 느닷없이 나를 데리고 있던 또 한 명의 팀장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더군요. 그는 나를 남산 근처의 스카라극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당시 상영하고 있던 영화는 리 마빈이 주연하고 찰스 브론슨이 함께 출연한 ‘특공대작전’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돌아온 다음날 아침 그는 ‘인천’으로 발령났다는 통보를 받게 된다. 스카라극장에서 본 영화 한 편은 ‘인천’발령을 위한 마지막 시청각 교육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특공대작전’이라는 영화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고 ‘인천’은 또 뭐길래 현지 발령을 코앞에 둔 첩보부대원에게 이 영화를 보여준 것일까. 영화의 배경은 연합군과 독일 나치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2차대전 당시. 미 육군 당국은 군형무소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12명의 흉악범을 석방하고, 이들에게 나치에 대항하는 위험한 임무를 맡도록 고도의 살인 훈련을 시킨다. 살인특공대의 대장이 바로 리 마빈이다. 임무를 완수하면 석방될 수도 있다는 정부의 약속을 믿고 12명의 성난 사형수는 목숨을 걸고 나치와 처절한 전투를 벌인다. 영화 ‘특공대작전’의 영어 원제목은 12명의 사형수를 뜻하는 ‘The Dirty Dozen’이다. 말하자면 선갑도 부대원으로 발령낼 현역 기간요원에게 무기수 위주로 구성된 선갑도 부대의 모델이 된 영화를 미리 보여줌으로써 앞으로 맡게 될 임무를 암시한 것이다. 이 관계자가 ‘인천’ 발령 다음날 새벽 선갑도로 들어가 마주한 대원의 수는 영화속 사형수 수와 같은 12명(Dozen)이었다.이들 대원 중 일부는 교도소로 되돌아갔다. “12명 모두 몸이 불편해 보였어요. 하지만 눈빛부터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처음 섬에 들어오면서 동료들과 ‘이제 우리는 죽는 것 아니냐’고 은밀한 대화를 나눴던 것이 떠오르더군요. ‘올 것이 왔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들 12명의 대원은 어떤 경로를 통해 선갑도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의문을 푸는 열쇠는 당사자들의 증언을 듣는 일이다. 창설 당시 12명의 대원 중 현재 5명이 생존해 있다. 훈련중 살해된 사람이 3명, 그리고 부대 해체 후 실종되거나 연락이 끊긴 사람이 2명이다. 또 다른 2명은 교통사고와 질병 등으로 인해 최근 사망했다. 1969년 이후 섬에 들어온 ‘2기생’들까지 합치면 생존자 수는 더욱 늘어난다. 지금도 선갑도 대원 출신 15명이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선갑도 생존자들의 경우 죽은 자 못지않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우선 자녀들은 물론 부인에게조차 ‘섬 생활’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무기수’라는 원죄 몇 해 전 북파공작원들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가스통 시위’를 벌이면서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피를 토할 때 선갑도 대원들도 현장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찌보면 ‘가스통 시위’를 주도한 설악단 대원들에 비해 고생한 것으로 따지자면 할 말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선갑도 대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신문이나 방송에 나와 큰소리를 낼 수도 불만을 토할 수도 없었다. 단순히 보안을 지켜야 한다는 철칙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기수 출신’이라는 ‘원죄’가 늘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대부분 환갑을 넘긴 노인들인데 과거를 드러내서 뭘 하겠다는 겁니까? 자식들도 내 과거를 모르고 동네에서도 내 과거를 몰라요. 아이들을 결혼시킨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돈댁에서 내 과거를 알아보세요. 그걸 누가 책임질 겁니까?” 선갑도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김광태(가명)씨는 기자가 취재를 요청하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선갑도 출신들은 이처럼 장교나 하사관, 또는 교도소에서 느닷없이 붙들려온 대원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자신들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최근 국회에서 북파공작원 보상법이 마련돼 당시 북한 지역 침투공작에 투입됐던 자신들에 대한 보상의 길이 열렸음에도 ‘보상금에는 관심 없다’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어차피 교도소에서 평생 그러고 있다 죽을 거라면 이북에라도 갔다가 죽으면 죽고, 살면 제대로 살아보자고 생각했죠.” 강귀남(가명)씨 역시 예순이 넘은 지금까지도 자신이 무기수 출신으로 교도소에 복역중 선갑도 부대에 근무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있다. 기자는 그를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부대원 모집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이 안양교도소에서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추정되는 한 남자를 따라 인천행 차에 오른 것은 1968년 7월5일이다. “한 날 한 시에 교도소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누가 누군지 서로 알지 못했어요. 철저하게 개인 면담을 통해서 대원들을 선발했으니까요. 그날 밤 9시쯤 안양교도소에서 눈을 가리다시피 한 채 차에 올랐죠. 한 1~2시간 가량 달린 것으로 생각돼요. 내려보니 인천부두였습니다. 시간은 자정을 조금 지났던 것 같고…. 곧바로 배로 갈아타고 몇 시간을 더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출렁거리는 배 안에서 불안한 잠을 청한 뒤 동틀 무렵 깨어보니 어느 섬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대 자체가 완벽한 보안 속에 창설되었기에 부대 내 누구도 이 곳에서 만난 ‘섬 사람들’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부대장부터 말단 공작원까지 ‘섬 사람들’은 일절 이름을 부르지 못하도록 교육받았다. 대신 이들은 계급과 신분별로 부여된 암호로 서로를 부를 수 있을 뿐이었다. 대장은 독수리, 팀장은 백곰과 흑곰, 그리고 ‘키퍼(keeper)’라고 불린 조교, 즉 공작 하사관들은 부엉이나 사자, 호랑이 등으로 부르는 식이었다. 교도소에서 모집된 무기수들에게도 암호명이 주어졌다. 공작원들에게는 ‘길주’ ‘박천’ ‘남포’ ‘철원’ 같은, 북한의 지명을 딴 암호명이 부여됐다. ‘독수리’ 대장과 ‘부엉이’ 조교 외딴 섬에서 5년간이나 함께 생활했지만 이들은 지금도 자신과 같은 팀에 소속됐던 대원이 아니면 동료의 이름이나 얼굴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상호 차단의 원칙’에 따라 훈련도 따로 받고 식사도 따로 하는 것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다. 백곰팀 6명의 대원과 흑곰팀 6명의 대원도 각각 섬의 남쪽과 북쪽 끝에 분리 수용되어 있었다. 적진에 침투한 뒤 언제든지 생포될 가능성을 안고 있는 침투공작 부대원들에게는 소속부대와 관련한 정보를 최소한만 알려주는 것은 상식이다. 공작원이 생포될 경우 노출될 수 있는 아군측 정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공작원 수칙이 부대원들에게 체질화되어 있었던 것이다.물론 부대 편성 초기에는 공작원들에게 현역 신분에 해당하는 계급을 부여했었다. 주로 상사에서 하사에 해당하는 하사관 계급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내 문제가 발생했다. 훈련 성적이나 태도 등을 기준으로 부여한 계급이 교도소 시절의 복역 경력과 ‘충돌’을 일으키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교도소 신참이 상사가 되고 재소자 시절 고참이 중사가 되는 ‘역전 현상’이 일어난 것. 군인 신분이 아닌 무기수 출신 공작원들이 이런 식으로 통제될 리 없었다. 이 시도는 이내 실패하고 말았다. 정예 침투공작 요원을 양성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선갑도 부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급이 아니었다. 북한 지역의 심장부에 혼자 떨어졌을 때도 주요 시설 폭파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무사히 귀환할 수 있는 강철 같은 체력과 인내심, 그리고 담력이었다. 따라서 부대의 모토는 첫째도 훈련, 둘째도 훈련이었다. 훈련은 낮과 밤을 바꿔가며 진행됐다. 밤새 훈련을 하고 동이 트기 시작하면 개인 비트(은신처)에서 잠을 자는 식이었다. 본격적인 침투 훈련은 칠흑같은 어둠이 섬 전체를 감싸는 밤 9시경에 시작됐다. 새벽 2시까지 진행되는 침투 훈련이 끝나면 쉬지 않고 2~3시간 동안 개인 비트를 파야 한다. 그러다가 해안선을 따라 동이 터올 무렵이면 비트 안에서 잠을 청하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북한 지역에서 혼자 고립되었을 경우 비트를 파고 거기서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예상되는 극한 상황에 대비한 체력훈련은 필수였다. 30kg짜리 모래배낭을 메고 양쪽 발목에는 5kg의 모래주머니를 매단 채 섬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산악구보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기초훈련에 해당했다. 선갑도 부대의 주임무는 북한 지역의 댐이나 발전소 등 기간시설 폭파였다. 때문에 주요 시설물 폭파에 필요한 폭약을 얼마나 많이 둘러멜 수 있는가도 공작원의 능력을 재는 중요한 척도였다. 밤에는 훈련, 낮에는 취침 “대형 자석을 붙인 배낭에 컴포지션 폭약을 잔뜩 넣고 은밀하게 대형 발전소에 침투해 주요 수로관에 배낭을 부착한 뒤 빠져나오는 거예요. 원격조종을 통해 배낭을 폭파시켜 발전소를 파괴하는 것이 당시 임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이들에게는 한 번도 실제 임무가 하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목표물이 무엇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이들은 지휘관과의 대화 속에서 수풍댐이나 함흥발전소 같은 주요 시설물을 폭파해야 한다는 암시를 받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실제 여러 차례 강원도 지역에 있는 수력발전소를 답사한 적도 있었다. “실미도 부대처럼 구타가 많았었냐구요? 구타가 무슨 필요가 있어요? 말 안 들으면 바로 코앞에서 총부리가 춤을 추는데요.” 영화 ‘실미도’를 봤다는 한 대원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기간요원으로 참여했던 다른 관계자 역시 “그들은 맞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라는 말로 당시 훈련 분위기를 넌지시 비쳤다. 이들이 이렇게 다른 북파부대에 비해 훨씬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대북 침투요원으로 양성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50~60년대 내내 계속된 대북 침투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휴전선 인접 지역의 목표물을 폭파하거나 사진 촬영한 후 돌아오는 형태, 즉 전선침투와, 비행기나 기구 등을 이용해 공중으로 북한지역에 침투한 뒤 대형 발전소 같은 목표물을 폭파하는 형태, 즉 고공침투 방식이 그것이다. 따라서 전선침투에 투입될 공작원들은 비무장 지대에 설치돼 있는 다양한 장애물을 통과하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는다. 비무장 지대 안에는 사람이 지나간 조그만 흔적이라도 언제든지 발견할 수 있도록 철조망 뿐만 아니라 모래 장애물, 실 장애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장애물이 설치돼 있다. 이렇게 다양한 장애물을 흔적도 없이 통과하는 것이 전선침투 공작원들의 중요 임무 중 하나다. 그러나 실미도나 선갑도 부대처럼 공중침투를 목표로 하는 공작원들은 팀 단위로 움직이는 전선침투 공작원들에 비해 숫자가 적은 3~4명이 조를 짜서 움직이거나 개인별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들은 장애물 통과 요령과 함께 공중 낙하와 같은 공수훈련도 집중적으로 받아야 한다. 선갑도 부대원들도 부대 창설 후 1년쯤 지난 1969년 여름 경기도 김포의 한 공수부대에서 공수훈련을 받았다. 당시 훈련에 참여했던 한 대원은 “공수부대 출신이 아니었지만 12명이 낙하산을 메고 일렬로 떨어지고 나면 점프 경력이 50회나 되는 공수부대원보다도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반면 부대 임무나 침투 목표도 자세히 모르는 상태에서 훈련에만 열중하다가 공수 훈련이 시작되자 일부에서 동요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는 증언도 있다.“어딘지도 모르고 실려간 곳이 바로 김포 공수여단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아차!’하는 생각이 뒤통수를 때렸죠. 내 임무가 고공침투를 통해 후방에 ‘뿌려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살아 돌아올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후 이들 주변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쫓아다녔다. 당시 훈련에 참여했던 관계자들 중에는 지금까지도 ‘누가 날 죽이러 오지 않을까’ 하는 공포를 떨치지 못해 호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공수 훈련이 끝난 뒤 대원들은 팀을 나눠 덕유산 지역으로 투입됐다. 덕유산을 선택한 것은 산세나 지형이 북한 지역과 유사해 실제와 같은 침투 및 폭파 훈련을 하기에 적당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백곰팀’과 ‘흑곰팀’으로 명명된 침투조는 각각 장교 1명, 하사관 2명, 대원 6명으로 구성됐다. 실미도 부대와 달리 선갑도에서는 장교와 하사관, 대원으로 구성된 팀 전체가 함께 침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기간요원과 무기수 출신의 대원들 모두가 똑같은 공작원이었던 셈이다. 김포비행장에서 출발한 대원들은 덕유산 곳곳에 공중 낙하해 가상 목표물을 찾아낸 뒤 폭약을 설치하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훈련이 끝나면 비트를 파고 은신하면서 오직 디데이(D-day)만을 기다리는 ‘비상대기’ 상황이 계속된 것이다. “침투 명령을 내려달라” 그러나 금방이라도 실전에 투입될 것 처럼 급박하던 분위기는 하루이틀 비슷한 훈련이 반복되면서 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작전 지시가 내려지지 않은 상태로 계속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대원들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두 팀 중 한 팀만 우선 침투한다는 지시가 하달됐다. 12명의 대원은 6명으로 줄었다. 지휘는 백곰이 맡기로 했다. 저주의 섬 선갑도로 되돌아가게 된 6명은 반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역시 오래가지는 않았다. 작전 지시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나머지 6명의 대원도 결국 인천으로 되돌아가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1969년 가을 무렵의 일이었다. 당시 훈련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덕유산 훈련을 전후해서 1968년 김신조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한 건이라도 발생했더라면 우리는 보복 공격을 위해 즉각 투입됐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문제는 덕유산에서 철수한 이후에 발생했다. 실미도가 그랬던 것처럼 ‘침투’를 위해 모인 대원들에게 ‘침투’가 불가능해지자 부대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지휘계통에 있던 한 관계자는 섬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야산에 올라가 대원들끼리 쑥덕대는 일이 늘어났죠. 하사관이 장교에게 흉기를 들고 대드는 일도 발생했고…. 일부 대원들은 ‘6개월만 고생하면 집에 보내준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느냐’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어떤 대원은 죽음을 각오하고 무작정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기간요원들에게 붙잡혀 들어오기도 했다. 섬 생활을 못 견딘 대원 한 명이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불길한 기운이 섬 전체를 감싸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대원들이 섬으로 돌아가고 일부가 인천 시내 야산 지역에 있는 한 안가(安家)에 대기하고 있던 1969년 가을에는 유독 대민(對民)사고도 잦았다. 한번은 인천에 주둔하던 해병대 헌병대와 선갑도 요원간 집단 난투극이 벌어진 일도 있었다. 기간요원 두 사람이 다방에서 차를 마시다가 우연히 옆 좌석 손님들과 시비가 붙었다고 한다. 말다툼 끝에 주먹질이 오갔고 상대방은 인천에 주둔하던 해병대 안으로 도망갔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선갑도 요원들은 해병대측에 이들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고, 이를 거절하는 해병대측과 실랑이가 붙게 된 것이다. 잇따른 자살 시도 결국 이들은 자고 있던 대원들을 모두 깨워 군용트럭에 싣고 해병대 헌병대를 습격하는 ‘사건’을 저지르게 된다. 한 관계자는 “동원할 수 있는 공구란 공구는 모두 동원해서 해병대 헌병대를 박살내버렸다”고 회고했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대원 중 한 사람도 “우리는 당시 누구와 시비가 붙더라도 지고 들어오면 무조건 작살나는 걸로만 알았다”고 말했다. 이유를 불문하고 민간인 또는 다른 부대와 시비가 붙으면 대원들을 모두 끌고 나가서라도 ‘보복’을 하고 마는 것은 선갑도 대원의 자존심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육군 소속의 선갑도 부대가 해병대 소속의 헌병대와 난투극을 벌였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부대원들이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당시 부대장이 해병대 고위 관계자를 찾아가 백배사죄한 끝에 겨우 사태가 수습되었다는 것이다. 선갑도 부대원들로서는 중징계 사유에 해당하는 ‘대형사고’를 저지른 셈이었다. 이 사건 이후 분위기가 크게 가라앉을 줄로만 알았던 섬에는 뜻밖에도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임무 수행이 지연되면서 대원들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술렁이던 섬의 분위기가 갑자기 차분해지고 활력에 넘쳤던 것이다. 한 기간요원은 이 사건을 두고 “매일같이 맞고만 살아온 대원들이 누군가를 원없이 패고난 뒤에 느끼는 쾌감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부대 존속이냐, 해체냐, 아니면 임무 변경이냐. 부대 운명과 관련해 어떠한 결정도 내려지지 않은 채 시간만 흘러갔다. 외딴 섬에서 대원들의 생활은 교도소 생활과는 사뭇 달랐다. 게다가 각종 훈련에 나서면서 사회와 접촉하는 일도 잦아졌다. 장기 복역중이던 기결수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원들에게 마냥 폐쇄적인 생활을 강요할 수만은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무엇보다도 대원들의 성적(性的) 욕구를 해결해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따라서 대원들은 기간요원들의 입회하에 인천에서 가장 유명한 유흥가인 ‘Y하우스’를 찾는 형식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이런 욕구를 해결하곤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상부로부터 한 업소에 미리 얘기를 해놓았으니 대원들의 회포를 풀어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늘 함께 훈련받고 뒹굴던 탓에 대원들과 가장 친숙했던 교관요원 중 한 명이 직속상관에게 ‘2시간 이상을 달라’고 요청해 약속까지 받았다. 어찌 보면 당시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던 대원들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 그러나 상부의 약속이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나는 데는 불과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방 저 방에서 욕지거리를 해대는 여자들의 비명소리와 이에 맞서는 대원들의 거친 고함소리가 터져나온 것이다. “야, ××놈아. 돈 500원 내고 도대체 얼마나 귀찮게 구는 거야?” “뭐? 어디다 대고 욕지거리야? 너 오늘 맛 좀 봐라. 이 ××년.” 그러자 다른 방에서는 핏발선 대원들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뭐야, 이거? 2시간이라더니?” “다 나와! 어떤 놈이야. 우릴 우롱한 게?” 공작원 신세와 ‘몸 파는’ 신세 사태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보안을 생명으로 하는 북파공작 부대가 엉뚱한 일로 인해 존재를 노출하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장교 한 명이 권총을 발사한 뒤에야 겨우 욕설과 함성은 잦아들었다. 그러나 대략 자초지종을 듣고 난 여성들은 그 기막힌 사연에 훌쩍훌쩍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밤. 여기저기서 몰려든 남정네들의 욕정이 할퀴고 간 그 자리에는 난데없는 술판이 벌어졌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공작원들의 신세를 들은 여자들이 오히려 술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여자들의 눈에는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는 공작원들의 불안한 하루하루가 매일같이 몸을 팔아 연명하는 자신들의 신세보다 하나도 나아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날 술자리는 새벽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지루한 시간이 흐르면서 이렇게 선갑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묘한 우정과 동료애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당시 현역 장교 신분으로 섬에 근무했던 한 예비역 중령은 선갑도 부대가 실미도 부대와 달랐던 점은 장교 또는 하사관과 대원들 사이가 ‘교육자-피교육자’처럼 관리하고 감시하는 관계가 아니라 북한 침투라는 동일한 목적 아래 훈련받는 동료이자 공동운명체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1970년을 지나 후반으로 가면서부터는 보급 지원 등이 형편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중간에 섬을 나오게 됐죠. 그때 함께 생활했던 대원들이 ‘줄 것은 이것밖에 없다’면서 ‘건강하라’는 말과 함께 사제 팬티 12장을 종이에 싸서 주는 거예요. 먼저 떠나는 사람을 위해 대원들이 자기가 받았던 팬티 한 장씩을 내놓은 거죠. 그 마음이 지금도 제 가슴속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그러나 임무를 상실한 부대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육지에서 새로 부임해 들어온 부대장의 재임기간도 점점 짧아지기 시작했다. 이미 정치적 상황 변화로 인해 용도 폐기 상태에 놓인 부대를 계속 운영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던 것이다. 애물단지로 전락한 부대를 해체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전 대원이 교도소 출신의 기결수들로 구성된 부대를 어떤 방식으로 해체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정해진 바가 없었다. 실미도 사태 직후 해체 당시 선갑도 부대의 본대격인 인천 902정보부대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부대 내에서도 선갑도 부대를 해체하는 데 따른 불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을 모두 내보내면 보안 누설 등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됐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당시 상부에서는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성공적으로 끝났고 국가 성장도 안정궤도에 접어든 만큼 북한 침투부대를 더 존속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내부의 반발 기류를 잠재웠다고 한다. 그러나 직접 선갑도에 근무했던 관계자들의 증언은 조금 다르다. 당시 지휘계통에 있던 한 관계자는 ‘나중에 당시 부대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부대 창설 초기만 해도 북한 지역 후방 침투는 미군측의 항공 지원 아래 이뤄질 것이라는 게 정설이었습니다. 그런데 곧 침투 임무가 부여될 것 같은 상황이 몇 달째 계속되는 데도 실제 명령이 하달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부대장도 ‘이상하다, 오더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걱정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까 부대 고위층에서는 이미 미군측과 협의를 해왔다더군요. 한때 헬리콥터를 이용해 침투한다는 구체적인 시나리오까지 나돌았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 미군측에서 침투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결정적으로 선갑도 부대의 운명을 재촉한 것은 다름아닌 ‘실미도 사태’였다. 1971년 8월23일 실미도 북파공작원들이 기간요원들을 사살하고 버스를 탈취해 서울시내로 진입하다 자폭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군 수뇌부에서는 비슷한 북파공작 부대에 대한 긴급 점검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실미도 사태가 터진 뒤 한 달쯤 지나 선갑도에도 장성급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이 들이닥쳤다. 이들이 섬에 다녀간 직후인 10월1일, 전격적으로 공작원 4명이 선갑도를 떠나 육지로 되돌아간다. 비로소 본격적인 부대 해체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고조되던 선갑도 대원들의 불만과 험악한 분위기도 이 날 이후로 눈녹듯이 풀어졌다. 이듬해에는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남북간 무력도발을 중지하기로 한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부대 해체 작업은 속도를 더했다. 그렇다면 선갑도를 떠난 무기수 출신의 공작원들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국가의 약속을 믿고 5년 동안 선갑도에 모든 것을 바친 대원들을 교도소로 돌려보낼 경우 이들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사회로 내보낼 경우 합법적인 사면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당초부터 초법적(超法的)인 모집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부대를 상대로 이런 조치를 취한다는 것은 난센스였다. 그러나 국가는 당초 이들과 한 약속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영화 ‘실미도’에 나오는 사살 명령 같은 것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실미도 사태 이후 당황한 중앙정보부와 군 당국이 부랴부랴 이들을 되돌려보내다 보니 명목상으로만 사면장을 만들어주었을 뿐 제대로 사면 절차를 밟지 않은 것이다. 선갑도 부대에 근무했던 또다른 대원의 설명이다. 일부 대원은 다시 교도소로 “선갑도 역시 당시 신속하게 해체하지 않고 시간이 좀더 흘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절망감 끝에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실미도 사태 이후 속전속결로 처리한 것이 잘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죠. 그러나 우리에게 준 사면장은 가짜였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선갑도 대원들은 하나같이 ‘임무에 성공하면 3000만원을 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섬에 들어갔어요. 150만원이면 서울에서 집 한 채를 살 수 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무기수도 공작원도 아닌 사회인 신분으로 가족에게 되돌아가는 마당에 왜 약속을 지키지 않냐고 따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대 해체와 대원들의 사회 복귀가 결정된 뒤에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다음은 1973~74년 선갑도 부대를 최종적으로 해체할 당시 부대장을 맡았던 예비역 대령 A씨와의 일문일답이다. A씨는 7·4 공동성명이 발표된 이후 선갑도에 들어가 1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대원들에 대한 사회적응 교육을 담당했다고 밝혔다. - 부대 해체 직전 1년 동안은 어떤 훈련을 시켰습니까? “훈련은 별로 없었어요. 주로 한 건 ‘새마을 교육’입니다. 돼지도 키우고, 소도 키우면서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죠.” - 임무가 없어진 선갑도 대원들을 통제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당시는 이미 대원들을 사회로 복귀시킨다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순해졌어요.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 - 섬에서 내보낼 때는 어떤 절차를 밟았습니까? “각 대원들의 형량과 행형 성적 등을 평가해서 단계적으로 감형시킨 뒤 내보냈습니다. 삼일절이나 광복절처럼 감형을 시킬 만한 계기가 있을 때마다 감형 조치를 밟은 뒤 8~10명씩 내보냈어요. 5~7년 형량을 받았던 재소자 출신들이 먼저 나가고 15년형이나 무기징역을 받은 재소자들은 나중에 나갔다고 보면 되죠.”- 전원이 다 나갔습니까? “감형 조치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2명이 남아서 이들은 안양교도소로 다시 보내 형기를 마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 감형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2명만으로 부대를 유지할 수도 없어 이런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압니다.” 당시 정보사 고위직에 몸담았던 한 예비역 대령도 “1976년 4월경 선갑도 대원들 중 2명이 마지막으로 만기출소함으로써 이 부대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졌다”고 말해 A씨의 증언을 뒷받침했다. ‘신동아’는 1968년 당시 안양교도소의 전과신분장 보존부와 출소신분장 보존부를 통해 선갑도 창설 대원 12명이 그 해 7월5일 동시에 형집행 정지 형식으로 출소한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안양교도소측 역시 “이들이 사면조치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선갑도 대원들은 섬에서 나올 때 ‘대통령의 명에 의해 사면한다’는 국방부 장관 명의의 사면장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는 이들에게 합법적인 사면 절차를 적용하지 않았다. 선갑도 대원으로 활동했던 한 관계자는 “경찰에서 지문을 조회하면 지금도 ‘군형법에 의거 00년형을 선고받았다’는 내용만 있을 뿐 사면 기록은 물론 형집행정지 기록조차 나와 있지 않다”고 말했다. 형집행정지나 사면과 같은 법률적 절차가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초법적으로 행사되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국방부에 이 문제와 관련해 질의서를 보냈지만 “사안의 성격상 밝히기 곤란하다”는 답변 뿐이었다. 육군 첩보부대(AIU) 산하 902정보부대 803대. 이른바 선갑도 부대는 결국 이렇게 역사에서 스스로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렸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자월면에 위치한 선갑도는 현재 민간인 한 명이 양식장을 운영하고 있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섬으로 되돌아갔다. 뇌관을 제거하다 실미도 부대와 같은 ‘사고’도 나지 않았다. 부대 해체 결정이 난 뒤로도 실미도는 폭발 직전의 뇌관을 건드리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선갑도는 신속하고 안전하게 뇌관을 제거해버렸다. 무기수 출신의 대원들도 35년동안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완벽하게 입을 다물었다. ‘실패’한 부대가 아니라 ‘성공’한 부대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20대 후반의 젊디젊은 나이에 선갑도에 들어가 청춘을 묻었다는 60대 초반의 한 대원은 이렇게 말했다. “농사 잘 짓고 나서 벼가 익을만 하면 쭉정이를 뽑아내야죠. 선갑도를 떠나올 때 우리는 쭉정이였어요, 쭉정이!” (끝)글: 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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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북파공작원의 수기
퍼온 글입니다만..흥미진진하여..출처입니다 : http://blog.daum.net/ahrakfma0101/17954656?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ahrakfma0101%2F17954656
유용원의 군사세계--------------------------------------------------------------------------------------------공작원들의 편제를 무슨무슨부대로 알고있지만, 우리는 민간인이고 군업무와 다른 엄연한 회사편제로되어있읍니다. 사장엔 현역중령, 전무는 소령, 과장은 대위, 계장은 중위 혹은 소위 그리고 회사원의기본조건은 다음과같습니다.1. 체구가 작고 민첩하며 운동성이 뛰어나야합니다. 2. 교육을 소화할수있는 기본적학력(지식)이 있어야합니다.3. 뒷조사에서 배경에 이북에 연고가 전혀없어야합니다. (625때 남하못한 친척이있어도안됩니다)4. 인성교육(평가)때 성격이 과격하거나 우유부단해도안됩니다. (교관들의 안목에서 불합격판정이나면 인사도못하고 소리없이 사회로퇴출당합니다)이런 조건들하에서 선발된 사람들로구성하고 훈련은 자체 유격교육장서받습니다. 지금부터 말해도될것만하겠으며 곤란한것은 (생략)을달겠읍니다.훈련의기본은 긴말필요없이 모래주머니달고 모래조끼입고 일이년동안 첨부터 끝까지 산으로뛰는겁니다. 뛰기를 기본으로 야전삽(작은것 따로있음)으로 잠복호파고 두더쥐숨기, 침투, 지뢰제거, 수영, 살인비술(소리없이 죽이는것), 맨손격투(태권도, 유도, 별의별것) 칼로 목줄따기, 칼던지기, 나무와돌로 무기만들기, 사격, 독도술, 사진촬영술 요인암살(실제 요인암살은하지않고 배우기만한다) 더불어 자물쇠따기, 담장넘기, 식량훔치기,산나물구별하기, 동물산채로 잡아먹기, 잠수3분이상(숨안쉬고 3분은기본이며 4~5분도버틴다), 면도칼 이발기술, 적무기사격과 분해등...(훈련과 실제상황서 아무리 배고파도 민가에침투하여 표안나게 일부분만훔침. 훈련때는 일반민가에 나중에 과장이다니면서 우리가 말해준 민간인들에게 도난품접수받아 넉넉하게 모조리변상해준다)이런것이 공작원들의 교육과정인데 당시 내가맡은 주요임무는 몇번에 걸쳐 목표물근접사진촬영이 주임무였으며 침투는 잠수정2회(돌고래인지 그것보다 작은소형(생략) (서부로 남포) (동부로 함흥) 그리고 휴전선 직접통과2회였으며, 3회는무사했고 1회는 두번째북파때 남포에서 현지고정(생략)과 일하다 경비병에게발각되어(현지고정의 목숨은 우리의목숨보다 중요함) 현지고정 피신완료후 세명이서 필사의탈출을하였는데 이때부터 해주까지 미리 만들어진 탈출로를가늠하여 지그재그로 북상하다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다 내려오고 일주일동안 낮에숨고 밤에만 산으로만 계곡으로뛰기시작한것이다(황해도 해주부터는 생략해야 함) 이렇게 필사의도망으로 적들과 조우하지않고 무조건 도망치는것이다. 이때 평양근교? 에서 적의 수색조에 발각되어 사격을받아 일사분란하게 포위망을 구축한 적들의틈에서 죽음직전에 이르렀으나 잠복과 끈질긴 은밀이동으로 모면하고 도망을친것이다. (우린 적들 근처에선 낙엽도 밟고 도망치는것이아니라 낙엽을 손으로 소리없이밀어내고 발을옮기고 다시 낙엽을 제자리에옮겨 자국이생기지않게 반복적으로한다)발각이던 뭐던, 사격을 해오던말던 우리가 적을 확인만하면 아무리배고파도 절대 잡히지않는다.(만약 잡히면 청산가리캡슐) 이때 기본장비는 소음권총 3인1조에하나, 자동카빈소총1인1정, 실탄100발, 수류탄네알, 단도, 청산가리캡슐응급약(어지간한건 혼자서 꿰메버린다) 만능열쇠, 올림프스망원카메라, 지도, 나침판, 머리빗, 면도칼, 뻰찌, 라이터, 수통, 숨쉬기빨대, 바닥 믿믿한 농구화, 이런것들이고 식량은 날짜계산하여 부족하게가져간다 마른걸로만. (훔쳐먹고 잡아먹고 구해먹고)격투술에있어서는 특전대와 예를들면 맨손이던 무기던, 그들중 누가 무술에 고수일지라도 절대로 북파공작원을 이길수없읍니다. 우린 실제로 목숨걸고, 격투술을 같은수준의 회사원끼리도 1대1부터 5대1의 실전을익히고(여기서 지면 죽기도한다) 깡으로만해도 그누구도 적수가안되며, 뛰기에있어서 산악구보와 험지의구보는 세계적 마라톤선수보다도 훨씬 강인한귀신인것입니다. 이만하면 대체로 설명이되었을것이 생각하고 참고로, 현대의 특수부대일수록 전문성과 장비에 의존하는것이지 무식하게 일반인들이 생각하는것처럼 체력만으로 임무달성하는것이아님을 꼭 기억하시기바랍니다==============================================지난 96년도 동해에서 잠수함좌초되고 승무원들과 공작원들이 산위로 피해올라가서 대책을의논하다 무장공작원아닌 잠수함승무원과 일부 전문공작원들을 일렬로 앉혀놓고 전부사살하고 피해버린일을 기억들하실겁니다. 제생각엔 그들은 사살당한게아니라 전체 의논하에 도망칠능력이나 교육을받지못한 잠수함승무원과잡혀서는 절대안될 비밀요원들은 자발적으로 죽기로결정하고 일렬로 나란히앉아 고향생각에 처자식, 부모님생각하면서 슬픈마음을품은채 무장공작원들로부터 한발씩 총격을받고 죽어간것으로 판단됩니다.지금이야 장비가좋아서 돌핀급이네 뭐네 호사스러운 잠수함으로 침투하고 도망치고하지만 과거로올라갈수록 선배들은 헤엄쳐서 아니면, 고무배로침투해 임무수행하고 몸으로때우며 누가 슬퍼하지도않는 죽음을당하며 사라져간것입니다.우리 회사원들중에도 돌아오지못하는 동료들이 상당히많았고 새벽녁이면 멀리서도 들려오는 북한군 확성기소리에서 어디서 몇넘잡아죽이고 일망타진되었다는 말들이 내귀에 직접 들려오기도합니다.복귀시한에 나타나지않고 이후 회사에서 보이지않으면 그는 죽었다고봐야하고 우린 그저 눈물과함께 말없이 술한잔에 마음을달래는 그런일들이많았습니다.일반인들은 이북의 남파요원들은 장비가 좋고, 우린 알려지지않은 몇몇이서 활동하고 그런줄알지만 제가 회사원이 된 그시절부터는 이북보다 훨씬나은 침투장비가활용되었고 공작원숫자도 일반인들의 상상을뛰어넘는숫자였고 그들이 임무완수후 돌아오지못하고 죽어사라진분들이많습니다.공작조시절 북의 첩첩산중에숨어서 가장 많이나던 생각은 부모님과 가족들입니다.물론 임무를마치고 돌아가야한다는생각으로 정해진 사이클대로행동하지만 어린나이의 우리도 사람이기에 공포와 고뇌가 엄청많습니다. 휴전선근무하던 민정경찰들은 공작조 북파내용에대해 잘알겁니다. 사원들이 침투지역수색대로 파견되어 며칠동안 수색대로부터 침투경로며 제반사항들을 꼼꼼히 숙지하면서 망원경으로 근처를 이잡듯이 살피며관찰하고 며칠후 시시때때로 행해지는 수색대입출과정을 허수로반복하고 어느순간에 민정경찰의 선두안내로 이미 휴전선 깊숙히잠복해있는 수색대에 인계되고 적진을살피고 서로 안타까운마음에 손을만져 인사를나누고 그리고 정해진코스로 침투하고, 복귀때도 휴전선안에서 미리 대기하고있는 수색대도움을받아 그들 인솔하에 오는것이지 람보처럼 헬기타고 기관총날리며 폭탄터트려가면서 요란하게오는것이아닙니다. 우린 성질나면 헌병이고 특전이고 시비걸어패버리는싸움 엄청많이했지만 군인이라도 수색대휴가병들한테는 조그만시비도 하지않았으며 거리에서만나면 그들 델고가서 밥사주고 술사주고 용돈도꺼내주고 항상 감사한마음을 가지고살았으며 회사자체훈련장 주변마을사람들과의 유대도 상당히 좋은편이다.북파출신들이 뭔 살인이나하고 괴물들이나되는걸로 사회적으로 인식들 많이하지만 우린 맡겨진 임무를수행하는 사원인것이지, 깡패나강도같이 그런짓하는사람들이 아니었다는것을 알아야합니다.북의 공작원들이 남파될땐 시기적으로 겨울을택하는데 그것은 그들작전이성공하면 뒤를이어 얼은 임진강을돌파하여 전면침공을하겠다는 배경에서 그러는것입니다.남한의 공작원들은 녹음이 우거진계절에 침투와 탈출을하는것이 그들과 완전히다릅니다.왜 김신조대원들이나 삼척,울진지구에 침투했던 무장공작원들이 그 추운 숨을곳도없고 먹을것도없는 겨울에내려왔을까하는 의구심을 갖게될것입니다그들의 작전목적이 전면남침의 선봉이었기에 그렇게 되었던것입니다.과거에 서부지역에주둔하던 미군들은 평시에도 얼어붙은임진강을 무작위로 곳곳을 폭탄으로터트리곤했읍니다. 미군들에의한 휴전선쪽으로 포병사격연습 또한 사격도하고 임진강얼음을 깨는일이기도했읍니다. 사격도하고 공비침투를 막기위한 얼음을 파괴하는 실제연습도하면서말입니다.우리 남한은 북으로 전면전을시도할 무력침공의사가없기에 침투조를 은신하기 좋은 늦은봄부터 가을이전에 행한다고보면 맞습니다.우리사원들의 군사전술은 상대의 편제와 수법을알고 우리가 피하기위한방편으로 배우는것이지그들과 맞장을떠서 격파하고 섬멸하기위해 배우는것이 절대아닙니다.공작원들의 편제는 세계 어느나라나 거의 같은것이고 공작목적에따라 2인1조부터 칠팔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고정들로부터 전달받는 중요사안은 저와같은 회사원들이침투하여 접선하고 넘겨주고 받아오고더 위중한 굵직한사안들에는 변수는많지만 회사원들이호송하여 현역영관급들을 침투시킵니다.체력과 안전때문에 이런 작전엔 물고기를타고 함흥지역으로 신의주로 침투하는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이미 그들이 00년전부터 알고있는것이라서 지금은 군사기밀도 아닐것입니다.00년대 중반이후부터 장거리침투시엔 물고기(잠수정)를 타고 침투가시행되었다는것은 그들이 더 잘압니다.제가 회사에 들어가기 몇년전 물고기타고 신의주로침투하여 일하던 해군소속공작조가 전원 몰살당했다는것은 우리들에게 너무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당시 대령과 전원 위관급이상의 정보요원들로구성되고 전문공작원들이 호송하여 작전하다 9명이 몰살한이야기는 내부에서는 너무도 잘 알려져있읍니다.실미도친구들은 훈련이끝나면 미군수송기로 평양근교로 낙하산침투시키기로 계획되었던일이고특공작원들이 김일성궁으로 침투하여 깨박살내어 보복한다는 시나리오였던것입니다.일반인들생각엔 북한이 대공시설이 엄청나고어쩌고 부풀려진말에의하여 대단한걸로 평가하지만 남한과 북한 어느곳이던 안전하게침투하고 탈출할수있는 허술한곳이 대단히많읍니다.당시 비행기침투는 허큘리스 프로펠러기가 위성첩보에의한 사전검토된 안내에따라 저공침투하여 낙하산으로뿌리고 남하한다는 치밀한계획이 미리 있었던 것이고 특공작들은 평양서 김일성궁을 습격하여 뽄때를보이고 전원죽음으로 끝난다는 계획이었으나 남북화해분위기로 그들의 문제가 폭발하여 버스탈취하고 전원사망하는 비극을맞은것입니다.당시 공산 개인화기들을 월남에서 무진장들여와 분해결합부터 사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하였으나 공작원들이 지참하는 개인화기는 실미도처럼 전원 카빈소총이었는데 이유는 소형이며 총기휴대가 간편하고 고장이 적으며 자동과 조준사격이 가능하다는 장점등으로 항상 카빈만을 휴대한것입니다.아카보소총이 성능이좋고 발각되어도 이북군인인줄로알게될거고 어떻고하지만 우리가 북에서 모습을 나타내고 백주대낮에 걸어다니는것도 아니므로 침투상황과 교전에 가장 효과적인 성능의총기가 카빈인것입니다.영화속의 독일군이나 미군처럼 기관단총을 휘두르고, 돌아오지않는 해병의 영화주인공들처럼 폭약 잔뜩 짊어지고가서 파괴하고, 수류탄을던져서 살상하고 부수는일을하는것이 아닙니다.공작조는 고정들과 접선해서 주고받고 새로운정보를 가져오고 위성으로 확인했으나 실체구별이 잘안되는것들에대한 세밀한 근접촬영등이 목적인것이지 뭔 이상한 무전기로 이불속에서 소리죽이면서 무전치고 그런일하는것이아닙니다.==================================북파공작원은 키큰 사람을 쓰지못합니다. (기밀이 아님으로 몇가지 조금 쓰겠읍니다)잘 먹지못하고 사는 이북사람들 과거나 현재 평균신장에기준해서 공작원을선발하고 침투시키는것이지 어느 무식한자가 이북사람들 작은체격에 당장 눈에 표가나는 건장한 젊은것을선발해서침투요원으로 쓰겠읍니까. 에베레스트원정대처럼 넘치도록 비행기에 짐을 실어가지고갈수도없고 목숨만 겨우 부지하도록 최소의 분량만휴대하고 민첩한기동성과 은밀이 기본인 침투공작조가 어이 그런애들로 구성이되겠으며, 만약 그런애들 보낸다면 두더지굴파고 숨는데만 몇배의노력이필요한것이다. 잠복호(비트) 파는것이 뒷마당에 김치독묻기위한 굴파듯이 푹푹파고 들어가는것이 아니라 최소한 작게 신속히파고 숨어야하는데 그 과정이 장난이아닌 눈몰속에 이뤄지는겁니다. 야전삽도아닌 모종삽 비슷한 작은삽으로, 적지에서 소리없이파고 준비한 작은자루에 조금씩담아서 먼곳으로가서 사방으로 아주 조금씩 풀밭이나 눈에띄지않는곳에 흐트려서 전혀 표안나게버리고 돌아오는길에 위장용덮개만들 죽은가지들 줏어서 발자국 다 지우면서 다시와서 반복적으로 파고 버리는것이고, 웬수같은 발자국 그거 완전무결하게없애고 밤새도록 구덩이하나만들어 누가 바로 앞에서 오줌누다가도 발견못하게 위장하고 숨는것인데 어이 장대같은애들을 침투공작원으로 이북에 침투를시킨다는건지 웃지않을수없읍니다.김장독묻는것도 힘든일이건만 내목숨유지할 두더지굴파는것이 한두시간에 해결되는게아니고군인들처럼 무지막지한성능의 야전삽으로 부담없이 쉬어가며 잠복호만드는게아닌데... 수색대에섞여서 총과 몸만 들어가고 날이어두워져 배낭이 도착해 잠복하며 운동화로바꿔신고몇시간을대기. 이때는 수색대가 좌우뒤로 이선삼선 초비상경계하고 군인들도 철망밖에서비상대기.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시간이지났는데 언제있었는지 수색대두명이 앞에서기어오고 적시라는 신호에 수색대와 인사나누고 내가 가운데서 기어 침투하였다. 이북쪽은 훈련때보다 침투가 너무허술해서 쉽게넘어갔다. 지뢰밭, 모래밭, 얼기설기된 목책, 철조망(철조망도 아주 허술해서 지뢰지대빼고는 시골목장의 담장과 비슷한수준이라보면 비슷하다)잠시후 배낭벗고갔던 앞에형이 다시돌아와 배낭메고앞서고 초병지대를 비켜 빠져나간것이 침투의전부였다.몇백미터를 조심스럽게 기고 오리걸음하고 이후부터 형을따라 뛰기시작하는데 두형들이 여기서부터 무조건따라서 뛰기만하면 된다고해서 사주경계없이 뛰기만하였다.이때부터 00까지(이런데 강계땅이라고하면 놈들이 좀 헷갈릴건데) 밤에만 산으로, 짧은들판을 달려 5일걸리는데 무풍지대의 험준한산에선 두더지굴이 필요없이 미리부터 나뭇가지꺾어서 옆구리에끼고뛰다가 몇키로 더가서 그걸로 시야가 좀 확보되고 움푹한곳에 깜쪽같이 이리저리걸치고 쉬고 교대로잤다.양말갈아신고 운동화갈아신고 주식은 하나씩포장한 돌처럼 단단하게 눌러말린 라이터만한소고기, 미룩구만하게 육등분으로 떼어서 먹게되어있어 그냥 입에넣고 우물우물거려 녹여먹듯하면된다.절대 배안고프고 (이게 이북촌애들 미숫가루하고달랐다) 이젠 기밀도아니고 다른친구들은 미숫가루 와 볶은쌀가지고 다녔다는데 난 이해가안감. 그거먹고 어캐뛰는지 (하루이삼일 단기공작조는가능)나물은 뛰다가 잠시쉬면서 뜯어먹고, 00형하는말이 너 이거 산나물잘먹어야 오래산다.형, 이짓하면서 오래살거같지않은데 우리 세명모두... 형들이 이때 얼마나 킥킥거리면 웃던지...잠잘땐 약간 경사진위쪽으로 다리를놓고 머리를 낮게하고자면 피로가 확 풀린다. 첨엔 불편하지만 숙달되면 아무렇지도않다. 이렇게 몇날을 낮잠자고 인적이 조금씩 길에보이는 00서 몇키로떨어진곳에 진출하여 위치잡고 두더지굴을만들고 때를기다렸다. 하루를 교대로 실눈뜬채 반잠을자고 (대소변은 상황에따라 쪼그리고앉아서 해결하고 바닥에 흙덮으며, 일반인들은 공작원이 맨날 구덩이나파고다니는줄로 알지만 구덩이는 한번 장거리침투에 두세번이고 그나마 단기공작들은 팔일도없고 잠잘일도없고 그런것이다.) 날이 어두워진 초저녁 모두 밖으로기어나와 형들이 하나씩 비닐과 헝겁에싼 뭉치를 나에게넘겨주며 그걸로 막걸리나 좀 사와라 (웃음) 00시까지 안오면 성공한걸로알고 우린 기다리지않고 떠날테니 그런줄알고 00일에 00서만나고 착오생기면 xx서 몇일몇시, 또 착오생기면 **서 몇칠몇시. 이렇게 세곳을 정해놓고 입을맞추어 숙지하고 형들과 작별하고 은밀과신속으로 나르듯이 목적지로갔었다. 혼자서가니 염려도 덜되고 잽싸게다니고 이렇게좋은데 저 형들이 날 보호한다고 델고다니니 내가 돌지... 씨부렁거리며 그래도 형들이 지리는확실하더만. 한번도 틀린적없이 정확하게. 고참이 달래 고참이겠어...목적지근처에서 산너머쪽으로 빠르게 풀을떠내고 땅을파서 총과배낭감추고(이땐 밟고지나가도모른다) 소음권총한개와 뭉치돈만 가지고 미끄러지듯이 15리정도를 나르듯뛰어 그시각 뭘 끌고 길을 천천히걷는 사람확인. 표식으로 단 한번에 알아보고 미리가서 잠복대기하고 있다가 미끄러지듯 집안으로 잠입성공.(암구호 이런거 필요없음) 돈뭉치전해주고 숫자로알려주고 목욕하고 옷갈아입고 된장찌개에 밥배불리먹고 이틀동안 잠만잤다.형들이떠나는 시각을보고 이젠 형들이 돌아가고있겠구나 무사히 잘가야할텐데...(이번엔 중강진 어느집이라면 이넘들 헷갈리겠지)나머지는 다음에쓰기로하고 여기서 일단 줄입니다.(아무리 이북애들이봐도 내가 어디다녔는지 모릅니다)어디의 어느집을 어떻게가고, 거리가 얼마이고 몇집을가고 이런것은 그냥 알아서 혼자만보시면됩니다.잠을 자던말던 골목길걷던 얘기들이며, 시내구경하던 뭐하던 사실은 말할수없는것이므로 대충 뒤범벅으로 썼음을 이해하시기바랍니다.=============================이틀동안 잠을자고 몸을 추스리고는 날짜와 시간에맞추어 목표를 찾아 다시떠났다.(이때부터 점조직) 북한도 마찬가지지만 접선은 그동안 북파되기전 교육을통해 수없이 완전무결하게 암기한후에 각기 만약의불행을 대비해서 장소와시간을 달리한 1 2 3차로나뉘어 시행되어지는것이다.김신조 개떼들처럼 수십명이 다니는것도아니고 자세한지도가 뭔 필요있으며 달달 외워버린 지형지물에모두 두뇌속 암기력을이용하여 공작이 전달되고받는것이지, 뭔 스파이영화처럼 무전을주고받고어쩌고?허리띠속에 집어넣는 사진필림쪼가리말고 가지고올것은무엇이며, 기밀도아닌 누구나 다아는 공작금전달해주고 오면되는것이고 나머진 갖가지 정해진신호로 그들이 자체적으로 본사와 오가는것인데 ...내가 입고간옷과 신발은 이미 내가 잠들어있는사이 남김없이 아궁이서 소각되고 날이어두워져 한뭉치 지참하고 눈인사후에, 이번엔 산아닌 한적한 들길로 운동선수처럼뛰어 두번째 약속장소근처로 이동해아무도모르는 신호표적확인하고 다시뛰어 두번째 표적확인하고 (압록강옆 어느도시라하면 이놈들이 00년 지난 지금에 이글보고 머리굴리고난리치며 찾으려고 생고생 좀 할거같다) 어느집으로 찾아들어가고 인사나누고 휴대품 전달해주고 나누기곱하기 몇개맞춘다음에 목욕하고 밥먹는사이 옷과신발 소각완료하고 그도시 학생복으로갈아입고 (여기서부터가 기억력이 확실히 필요할때임)조심스레나와 골목길로 골목길로 가방둘러메고 놀면서 천천히걸어 표시된곳으로 가 주위살필것없이 당당하게 들어가서 내방?으로 들어가면 그걸로 임무끝...며칠동안 머무르며 공부? 하고 누나하고 거리구경에, 뭐에 지시된곳을 미리 방문해보고 버스도 타보고다시 이틀머무르며 공부하고 다른방향으로 된 도주로를따라 되돌아가서 숨겨놓은총과 소지품꺼내고 복구해놓은연후에 형들과 만나기로 한 지역으로 이틀밤을 나르듯뛰어 안내를받으며 복귀한걸로 첫번째임무는 종결되었었다. 오고가는데 북한이나 남한은 공작원들이 휴전선까지 도달은 걸릴데없고 허술했던 철조망과 지뢰지대만 잘 빠져나오면되는것이다.이북은 인구밀도가 적고 산악이많고 교통량도적어서 온 사방천지가 무풍지대라고보면맞다.북한의 전방지역은 남한보다 군사시설도많고 북한군이 곳곳에 주둔해있지만 주둔지근처가 남한과 북한의 맹점이라고 이해하면될겁니다. 시간차로 총 한자루만들고 마중나와있는 접선과 연결되어 다시 그의안내로 조심스레 철조망넘어서 들어온것이 나의 첫 임무였다.올때나 갈때 지뢰탐지전문가형이 앞장서고 나머지는 같은행동으로 사주경계하며 소리없이따르면되고 각기 다른 세개의 접선시간중 어느하나에 맞추어 수색대의안내로 재빠르게 따라붙으면 즉각 암구호속에 문안으로 들어오는것이다.장거리공작조는 베테랑중 베테랑에서 선발되고, 어느경우라도 얼굴만기억하는것이지 두번다시 그들을 만나지못하게 조직되어있고 매번 호송담당이 바뀌고 단기공작조처럼 폭파를위한 팀웍이네뭐네 이런것이 존재하지않는것이다. 임무가끝나면 각자 악수하고 안아보고 마음속으로 이별의눈물을흘리고각기 다른차량으로 신속하게 헤어지는것이며 여하한 경우도 두번다시 만날수없는이별을 하게된다.===========================================================일반인들 말하길 주변에 정보부다니고 뭐하고 그런사람이 주변에있다고 말하시는분들있읍니다.그냥 제가 좀 웃어드리고 넘어갑니다.정보부아닌 보안대나 그런 군인출신들이나 대공계 경찰출신들 그런분들이 사회에서말하길 엄청난사람으로 보이려고 정보부가어떻고 간첩이뭐고 대북공작 이런말 과거부터 항상잘하십니다.물론 그중엔 정보부서에서 요원말고 평사무원 혹은 평직에 근무한분들도있겠지만 그들 신원은 확실하지만 정보부사람이 아니라고보면 맞습니다. 정보의 중요요직을 담당하거나 기밀사항을 접하는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자신의 부인한테조차 직업에대해 절대 말하지않습니다. 제가 보증할수있고 그것이 그쪽 밥먹고사는 사람들의 특성입니다.정보부장이나 직급이높고 사회활동접하는 고위층들은 얼굴이 알려져있지만 그외의 사람들은 일반사회에서 어떤사진도 찍지않습니다. (자녀졸업식에가서도 사진을 찍지않습니다)이하 제가 말씀드리는내용들은 이북에서 이미 알고있는지 오랜사항들로 기밀이아닌것만 올립니다정보원들의 사회적 공식직업은 외무부직원, 해외지사, 학원강사, 공무원, 철도국원, 체신부직원, 00체육단체, 00사회단체, 00여행사 등 남북한 모두 이렇게 평범하게 되어있읍니다.그들의 명함이나 증명서도그렇고 사용하는 대표전화도 00학원입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지 뭔...통금 위반으로 경찰서잡혀가서도 큰소리 한번못치고 야단실컷맞고 뇌물주고 나오기도하고 그렇게 철저히 사회속 평범한양민으로 사는것이지, 뭔 때려부시고 경찰서장이와서 굽신거리고어쩌고...남북한 모두 대북과 대남담당공작부서는 정보부내에 이름은있으나 유명무실이고 실질적인것이아닙니다.북한도 철저하게 이 문제를 독자적으로 따로 관리하고 남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기업의 정보요원들도 엔지니어, 컴퓨터프로그래머, 현장소장, 비서, 하청회사직원 등 이런식으로 일반직원들이 전혀 알지못하게 평볌한직함으로있는것입니다. 과거부터 대기업의 정보수집능력이 국가중앙정보부를 상회해서 국가안보에 지대한공헌을하고 직접적 연결고리가되고 그렇습니다.북한의 대남정책은 절대권력자의 후광으로 남한과는 다른 조건이지만 우리도 대북은 별개문제로 정책과 정권의 영향을 받지않으며 지속적이고 독자적인활동을합니다.남북한 모두 대북대남 활동자금은 중앙정보부로부터 오는것이아니라, 일반기업 융자금형식을취하고이부분에서 이북이 남한에 유입시키는 공작금에 훨씬 자유로울것으로판단합니다.만약 이북에가서 정치국외에 대남관련부서에 전화한다고 가정하면 네 00농장입니다. 00사업소입니다.양측 모두 과거부터 앞으로도 이렇게 끊임없이 철저하게 자신들을숨기면서 활동해갑니다.70년대 들어서면서 이상한?무전기의 신호체계는없어졌읍니다. 탐전이 너무 발달하고 위험요소가 큰데다, 근자에 인터넷과 셀룰라폰의 발달로 무용지물이되었다고보면 맞을겁니다.지난 96년도 잠수함침투좌초때 무장공작조가 산으로 북상하면서 비퍼형발신기로 두세번 이북공작부에 이동위치를 알린적있읍니다. 한번누르면 0.1초가 소요되는, 아주 미세한전파도 탐전이되는데 요즘들어 누가 무전기를사용하겠으며 첩자용무전기는 구시대유물로 이미 25년전 박물관에안치됐다고보면 됩니다. 무전기 사용하지 않는 신호전달체계에선 남한이 절대적 우위에있었는데 요즘은 남파공작들이 한국의 인터넷을 통하여 훨씬 자유롭게 직접적전달이 잘 이뤄질것으로 보입니다.과거에 "간첩잡아 용돈쓰자"는 구호가 전국적으로 유행하고 간첩은 걸인차림의행색이 많았지만 요즘은 장,단기 남파공작이나 고정들도 시대의흐름에따라 인텔리젠트한 계층이 대부분일것으로사료됩니다.근자에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교포들속에 상식적으로 상당한숫자가 있을것이고 위급을요하거나 고위층이 직접 개입해야할 그런 사안이아니라면 육상과 해상침투도 삼가할겁니다.북한만이아닌 중국정보부의 대 한국첩자가 조선족들틈으로 상당수 유입되었을것이고 군사뿐아니라 산업에대한 첩보활동 이런것이 활발히이뤄질것으로 판단됩니다.장기적안목에서 중국에의한 대한군사첩보가 이북의 대남첩보수행보다 비중이 많아지고 중대하게될것이며중국을 비지니스때문에 자주 왕래하시는분들은 어느경우도 현지인과의 대화에 자신의 군사경험발설을 삼가해야하고 입단속에 유념해야합니다 (정보는 국가간이면 어떤것이라도 뭐든지 정보가되는것입니다)오늘은 지금 이시간도 남한지역에 상당수 침투하여있을 북한의 남파공작원들에 대해 저의소견을써볼까합니다공작원은 인간의 극한상황을 견디도록 훈련된기계와 같은사람이므로, 이런 남파공작원 포착하기가 수월하지 않습니다. 국내에 이미 들어와 눌러살고있는 고정들이 여행을 가장하여 침투가 용이한지역을찾으러 항상 다니는것이고 남한의 실정을 잘모르는 북한의 정보처에 사진과 도표등 상세한정보가 전달되게됩니다.수십년전부터 남한 전지역을 이잡듯뒤져 휴전선부터 해안일대등 몇천분의 일의 아주 세세한지도로 작성이안된곳이 없을겁니다.고정들의 목표는 군사시설뿐아니라 사회의 일반적인지식도 고정의목표이며, 일반인에겐 전혀 무관심한 도로와 교량부터, 등산로며 등산객출입의 대충적숫자와 등산로파악등 사회일각의 눈엔 스쳐가는 모든것이 대상이 되며 바다낚시꾼으로 가장한 고정의정보를 토대로 해안침투에대한 정보파악, 이렇게 고정들로부터 파악되고 전달된것을 토대로 작전수뇌부에서 계획을세워 남한일대의 고정들에게 명령이시달되고 이차삼차 세밀한분석과 실현가능성을 분석완료해서 성공가능한지역으로 침투하게됩니다.남북한 막론하고 고정의 헌신적정보를 토대로하지않는 침투는 실패확률이 너무 많으므로 공작들의 침투엔 반드시 고정이 있었다고보면 맞을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정들 잡아내기가 하늘의별따기입니다. 요즘은 차량과도로가 발달되고 레져가 발달해서 산으로 들로 해안가로 놀러다니는사람이 너무많아 사실상 특정몇곳을 제외하고는 통제도 어려울겁니다.남한의정보는 북한에 완전히 노출된지 이미 오래전이고, 북한지역은 미국의 정찰위성과 산업위성들의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남북이 대치된 상황에선 정권들의 협약 이런거 상관없이 정보부처단위로 내부적으론 끊임없는침투가 이뤄지고 누가 대통령을하던, 김일성이 죽던, 정보부장이잘리고 이런것은 공작하고는 사실상 무관하다고보면 맞고, 위정자와 국회의원들에의한 정보부의 기밀문제들이 심사되거나 결정되어도안됩니다.4년이나 5년짜리 임기의 한시적월급쟁이인 국회와 대통령이 간여할일이 아니란것이 저의 소견인것입니다.그 애들 세상에 태어나기전부터 각 부서적체계로 연속되어 내려오는 문제들이라 깊은지식없이 권력으로정보처를 좌지우지 결정짓는다면 수십년동안 공들려 쌓아온 적지속의 국방의촉각들이 우수수 무너져내리고 적지의 정보망이붕괴되면 국방의안위와 국민의생존이 즉각적으로 중대한타격을 받게되는것입니다.누가 대한민국의 실권을 잡던지, 정보부장을 자기사람으로 채우던말던 대북공작에관해서는 간섭하지 말아야하고 예산의삭감을하거나 보직을 멋대로 인사처리해서도안됩니다. 대북공작은 몇년임기후 짤리는 대통령의 자리와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면됩니다. 이북에서 남한에 고정만들기는 쉬워도, 남한에서 북한에 고정을 보존하기위하여 자결하고 죽어간 알려지지않은 애국적목숨이 너무도많고, 그들의 첩보를 토대로 국방의지표가되어야 할일들이많습니다. 정권들이 대북업무를 실적도없고 정치에 생색도 안나는 구석이라하여 홀대들 많이했지만 그들이 현재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불가결하게 공헌한것이 대북공작이라고 생각하면됩니다. 신체의 각부분에 있는 말초신경이없으면 감각이둔해져서 위험을 감지못하고 위험대처능력부족으로 반사성이 둔화되어 죽음을 당할 공산이큰것과 같은겁니다.다시 요약해서, 각 부대단위별로 일선의첨병과 수색과 정찰없이 전투를하면, 그 부대의 생존이 있을수없는 것이고 내무반 초병이없이는 잠자는사병들의 목숨이 없는것과같다고 이해할수있습니다.일반인들 생각엔 첩자가 모르스무전기로 소리내어 정보를전달하고 007 처럼 변장에능하고 소음권총을쏴대고 여자를거느리고 이런 환상들을 가지고있을겁니다. 물론 그런경우가 없는것은아니지만 그런일이 발생하는 지역이 따로있을것이지만 전 솔직히 대충 감으로생각은해도 그방면은 전혀모릅니다.침투공작원이 필요한것은 남북한 모두 대체로 공작금전달, 요원호송, 정보반출, 납치, 폭파, 암살등 필요에의해 이뤄집니다.(군장성납치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일이고 이런데 사안을 두는것이아니고 일반인을 납치하여 무장공작원 및 간첩교육용으로 사용한것이 과거엔 많았읍니다) 지금은 탈출한 북한주민만으로도 쉽게 현지실정을 알수있는기회도 많을겁니다. 여하튼, 북한의공작원이 침투하여 그가 사회에서 암약하는 고정이된다면 찾는방법이어렵겠으나 무장공비로 일컬어지는 호송과 정찰 및 파괴를하는, 사회로나오지못하고 산속에서 활동해야하는 남파무장공작원은 일반병사들이 이들을 다루기엔 단수가 너무 모자른것으로서 근래 국가적으로 문제가되고있는 북파공작원들을 활용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고충을 각곳 홈페이지에 들어가 살펴보니 짐승처럼 훈련시켜 국가가 목숨을 저당잡아 이용하고 사용가치가 없어지자 개패듯 패기도하고 보수를 지불않고 부상자에 대한 원호대책도 없고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게 뒷조사를해서 직업을 갖게하지 못하는 방해책동과 여권발급불허해서 해외에나가지 못하게하는 도저히 그런것입니다. 공작원 출신들중에 이 부분에 회의적인분들도 많을겁니다.저는 그런일 당해보지않아서 수긍이안되지만 실제로 그런일을당했으니 사생결단하고 집단시위를벌이는것로판단됩니다.공작원의구성을 특성상 현역군인으로 할수없는것을 국민들이 먼저 이해하셔야하고 국가는 어떤일이있더라도 그들의 임기후 뒷조사를해서는안됩니다. ** 북에 다녔으니 혹시라도 북에 이중등록된 첩자가 아닐까? ** 무장공작원으로 인간기계가 되었으니 퇴직후 사회에나가서 일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저들이 북에서 파괴공작하던경험으로 남한을 부수지는않을까? ** 침투하여 문서절취하던 실력으로 남한의정보를 빼가지않을까?** 직장잡아 일하다가 사회에 문제를 발생시키지않을까?이 외에도 여러가지 염려되는 문제들로 인하여 그들을 이용후에 사회에서 매장시키려는 황당한짓들이 있는것 같은데 간단히 말해서 그들이 폭력성이 좀 있는 사람이라해도 내나라국민이고 그들을 그렇게 훈련시킨것도 대한민국사람이었고 그들이 대한민국의사명을 받고 이북에 침투하여 암살하고 폭파하고 절취한것인데 이후에 그들을 애국지사로받들지는못할망정....단기공작원 그들의 주장도 일리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자세히 각자의주장을 살펴보니...제의견은 가급적 그들을 퇴사후에 대한민국의 인적자원으로 활용을하되 그들의 체력과 절대적경험을 바탕으로 남파 무장공작원을 색출하는 임무를부여하고 활동케하면 합당할것같습니다.직업군인의 보수와 처우로하고 직업군인에 적용되는 혜택을 부여하고 임기중 사망하면 국립묘지안장부터사망시 지급되는 위로금 및 연금등 각종 혜택을 차별없이부여하면 그들 공작원출신들도 좋고 국가도 좋은 방안이되지않을까합니다.근자에 대북단기공작이 축소되었다하더라도 북측에대한 남한의공작은 중지되어서는 안되는것이고, 물론 분위기상 파괴공작은 삼가해야할부분도 더러있을것이나 물색하고 꼬임위주로 하던 과거의행태를 버리고 북파공작원을 사회로부터 공개모집해서지원자에한해 정당한보수를 지불하고 훈련을시키고 그들을 그냥 놀고먹게 버려둘것이아니라 무장공비 출몰가능성있는 해안이나 산악지역에 투입하여 남파공작들을 사전에 분쇄하는방안을 강구하는것이 합당하리라봅니다. 일반 군인들을 현역들이교육하고 남파무장공작을 색출시키는 경계병으로 활용한다는것은 과거 실력이미숙한 국가대표중에 나이든 고참순으로 축구국가대표감독을 연줄로맡으며 허구헌날 같은 수준의 국가대표를 양성하여 단 일승도 하지못했던 월드컵을 상기해야할것입니다.공작에 관하여 히딩크보다도 훨씬 노련한 관록있는 북파공작원출신들을 구제하고 그들을 정착시킬수있도록 지혜를 좀 모아보시기를 권유합니다.큰물에서놀고 목숨을 저당하고 이북의 산하에서 산전수전을 겪어본 백전노장들로 소정의교육을 이수케하고, 그들이 직접 자신의 값진경험을 토대로 현역들을 훈련시킬수있는 교육담당으로 활용도하고 북파공작원훈련을 양성화해서 평시엔 젊은 그들로하여금 남파공작원색출과 기도은닉의 사전분쇄를위한 산악과 해안탐색 및 잠복등으로 민생치안의 안정과 국방의안정을 가져올수있다는 것입니다.저의 오랜경험으로 공작원의 가장 큰적은 공작원인것입니다. 북한은 과거부터 북파공작원이포착되면, 남파공작 전문부대인원이 출격하고 그들의 지시와 참여로 추격전이시작되었던것입니다.일반병사들로는 대량의 인원투입으로 차단과 잠복과 수색이이뤄지지만 공작부대가출격하면 그들은 북파공작을 맞상대로 자신들의 고도화된 훈련방식을적용해 사냥개가되어 추격전을벌입니다.또한 전지역을 꿰뚫어보고 도피가능한지역을 파악하여 북파들을 생고생하게만드는 주요임무를 그들이 맡는것입니다. 그들의 숫자가적어 그들로부터 직접 잡히는 공작들이많지는않겠으나 그들의 지략에포착되어 섬멸된 북파들이많을것입니다.단기파괴공작원들은 포착시 그들과 조우하게될일이 드물겟으나 장거리 침투공작원들에게 가장 치명타가이애들의 두뇌와 체력과 경험입니다. 제가 00년전 몇번째? 침투중 (평양근교라고 하겠읍니다)평양근교의 보통 야산6부능선에서 초저녁 해질무렵에 포착되어 죽음직전에 간적이있습니다. 언제 발각된지는모르나 이상해서 살펴보니 북괴군이 아래에서 수색하며 좁혀오고 시야에 들어온것만도상당한 병력이라 간단히 이제 죽었다고 생각한적이있읍니다. 비트속에선 항상 위급시 어떤 행동방향을 미리 설정해놓고 상황대처를하며 헤어져도 다시 만나는지점들을 여기저기설정해둡니다.이런 상황에선 단독으로 각자 적지를 탈출해야 효율적이지만 동료들과 삶과죽음을 언제나 같이해야기에 머리굴려 일단 남으로뛰고 어느지점?에서 서부해안가로 탈출시도를 노출시키자 결정하고 세명이서 동시에 배낭은포기하고 식량을 주머니에휴대하고 카빈과 실탄과 수통,지도만 소지하고 구르며 뛰기시작한적이있읍니다.이때 상황을 참고적으로 약간 기술한다면, 반잠을 자던 나와 형은 아주 골아떨어졌고 외부를살피던 형이 톡톡 건드려 일어났더니 걸린것같다해서 다릴주므르며 혈액순환을도운며 숙의하고 각자 뚜껑을 조금열어보며 확인후 의견이 걸렸다고결정되어 튀기로 한때입니다.(야산중 시계가 좋은곳이라 6부에 발길닿지않을곳 낮은지점을 보수하여 나무와풀로 깜쪽같이위장하뒤잠을자고있었는데 출발 몇시간전에 발각이된겁니다. 지금도 그때 왜 포착됬는지 이유는모르지만 당시생각에 형하나가 미련하게 대소변때문에 밖으로 기어나갔던것이아닌가 생각이들지만 본인이 아니라해서 덮어두고 모른체했던일이고, 그때 두더지굴도아니고 얕은곳 적지를골라 누워있을정도였는데 대소변도 누운채로해결해서 땅을파고 처리해야하는건데 그게 잘못있던걸로 두고두고 생각나던부분입니다) 이때 기어나와 중턱을 타고달리다 그들의 시야에서 안보이면 산넘어 무작정 남으로튀기로하고 실행하는데산아래서 올라오던 놈들로부터 직접사가 시작되어 총알이 사방에박히는겁니다. 일반병들 그때나 지금이나 뻔한것이 이런상황서 엎드려쏴, 앉아쏴가아니고 자신들 숫자가많으니까 흥분해서 뛰어오며 쏘아댑니다.하도 급해서 뛰며 뒤를돌아봤더니 잘하면살겠다 생각이드는데 딱들어맞았읍니다.모퉁이를 돌아서면서 형하나는 산넘어를살펴 판단하기로하고 00형하고 둘이서 어차피 죽은거 저것들하고 같이가자는맘에 육안으로 들어오는 한놈씩 조준사격으로 사살하고 이때 우리 살겠다고 죄없는 일반북괴군인들 참 많이죽였읍니다.일단 보이는대로 정확하게 잡아버리니 흥분해서 정신없이올라오다가 나중엔 머리도못들고 굴러서도망가는 난리법석떨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선합니다. 일반사병들은 남한이나 북한이나 대체로 마찬가집니다하여간 공작원은 발견즉시 사살못하고놓치면 이후엔 도망치는산짐승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이때 신속히 산넘어 어두워지는 사방을살피고 도피로 정해놓은쪽으로보니 북괴군들이 몰려들고있어 완전히 어두울때까지 산속서 있기로하고 이동중 도피로쪽의 북괴군이 그물망이아닌 분대대형으로 분산되어 수색하며오는 그곳으로 정면돌파로 빠지기로결정하고, 내려가며 그들의 틈새쪽으로 은밀이동하다가 그들을 좌우쪽 이십여미터로 지나게하고 숨죽이다가 빠져나왔었다. (병력이 완전히 오질못해서 5분대기조정도 병력이었기에 살아난것이지만 공작은 죽는 순간도 기도은닉의 대담함이 목숨을지탱해준다) 위험한순간에는 나를 죽이고 숨으면 살수있는겁니다.이곳을 빠지면서 뛰는데 대규모병력들이 차량으로, 구보로집결하는데 과감한 순간적결단이없었으면 분명 죽었을것이다. 이후 사방팔방서 병력이 분산배치되는데 오로지 체력과 죽음을불사한 돌파로살아남은거다.(북한이나 남한이나 현역들이 공작원들의기동성을 간파못해 지나고난뒤에서 찾는건 어쩔수없을때였다)모처로 신속돌파하여 서부로 방향을틀고 서해쪽으로향하여 뛰다가 다시 북쪽으로 새벽까지뛰었다.700고지의 산속으로 숨어들어 도피처구축을 했는데 그때 그 일대를 탐색하던 무리들이있었고 이애들이 분명 북한의 정예남파공작원들로 확신하는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탈출하여 서쪽으로뛰었다 허를찔러 북상했을때 우리의 계산대로는 탈출지점서만 직선거리로 50 키로가넘는 그곳 산악에 수색대가있었다는것은그들이 아니고선 있을수없는것이었기때문인데 어쨌던 수십명이었던 그들에게 발각은안되고 동해쪽으로 방향을틀어 중부전선으로넘어와서 귀환했지만 이렇듯이 공작조를잡는덴 상대의 노련한 공작조의 적중률이높다는것입니다.고기도 먹어본놈이 잘먹는것이고 과부심정은 과부가 홀아비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하면 이해가될겁니다.북한에 침투해보진않았지만 교육을받고있는 사람들이나 경험자들을 사시사철 어느곳에나있는 무장공작원토벌에 사용한다면 그들 사기에도좋고 현역군인들경험에도 좋고 나쁠일은 전혀 없을것으로판단됩니다.=======================================포착때는 나를 죽이면 산다 ! 24시간중 어느때나 깨어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것이 지금도 어느 하늘아래에는 꿏다운청춘이 숨도 제대로쉬지못하고, 음식도아닌거 조금씩 먹어가면서 반잠들어있을것이고 어느 청춘의불꽃은 산비탈 어느곳에서 산짐승이되어 뛰고있을것이다 이런생각 참 많이합니다.산짐승이 그렇듯이 공작원은 깊은잠을들지못하고 아무리 피곤해도 눈을 절반 뜨고자는 반잠이고 그것도 깊은잠들까봐 1시간정도씩 교대로자야하고, 토끼의 귀를하고 사방의소리를 감지하면서수시로 손톱으로 귀를 꼬집어 깨어놔야하고 각자 서로를 잠못들게 고문을해야합니다.비오날은 작업모자하나로 하늘을 받치고 덜덜떨면서 그렇게 반잠을자고 간혹 생각나는것이 언제나 두다리 길게하고 엄마다리베고 늘어지게자볼까나... 이런저런생각이 산중생활의 생각들입니다.** 어제 왜 그들을 죽였지? 내가 조금만 조심했으면 그들과 만나지도않고 죽일일도 없었을텐데 나보다 나이많은형들일텐데 그**들도 부모가있고 형제자매 다 있을텐데... 병신놈**들 그냥 수풀이나 뒤지면서 옆으로나 다닐것이지 왜 횡렬로 곧장 올라올게뭐냐 **새끼들...날이라도 어스름해서 그나마 덜죽고 그정도지, 대낮이었으면 너들 모두죽고 나도죽었다...장거리공작조는 남북한 모두 기본이3인조인데 1인이나 2인보다 가장 효율적이라그렇게한다.앞- 전방침투 중간-전방과 좌우경계 맨뒤- 엄호와 뒤를담당. 철조망 통과도 3인이 가장 효율적이고 유사시 맨앞을달리던 정탐이 정지엄호 중간이 계속달려나가 정탐, 맨뒤가 달려나가 엄호자세. 이렇게 반복행동에 용이하고, 산악곳곳에있는 장애지대들 넘어가고 내려가는데도 가장 효과적이고 누구도 동료를 그렇게는못하지만, 심각한부상시 사살 또는 자결하게하고 나머지 2인으로 공작완료하기 위해서도 3 인이되는이유고, 탈출시 2인을보호하기위해 1인도피로 유인하기위함도있고 등등...그전날 초저녁 북괴군을 처음으로 다수사살하고 북으로 방향을틀어 00지역 700 고지로잠입하여 은신하고 죽은 나뭇가지들 주워모아 풀을덮었는데 이때가 3시경이었고 형의 의견으로 1급지를선택하기로했는데 형의 의견은 누구나 1급지와 3급지는피하고 2급지를 택하는것이 기본이므로 여기 산세도좋고 무성하니까 1급지에 은신하자해 조용히숨어 말린쇠고기를 입에 하나넣으며 풀잎사이로 사주경계속에 눈을 번득이는데 한시간정도후 산중턱을타고 저쪽서 수색하는무리들이보이는데 북괴 남파전문부대애들입니다. (판별교육의 기본사항이고 선임조장이 그렇다면그런겁니다)남북한 일반사병들은 데스캅이 기본이고 공작원은 작업모를사용하므로 단번에 알아봤는데 xx형이 나를 기대누으라고 살그머니 미는것입니다. 얼굴은 진흙을묻혀 위장색해서 뻣뻣한데 눈만 깜빡이고 죽기살기로 도피했을때 그들 지근거리서 수색해오면 단번에 들키는것이 땀냄새때문에위험하고, 이런상황서 발각되면 튀어도 살가망이 적은것이, 우린 지치고 숫자도안되고 실력이 같은상황이라 가장 좋은방법이 공작원들의 은밀은신입니다. 언제나 기억해야하는것은 ("나를 죽이면 살수있다")이말은 위급상황선 내 자신 현재의위치에서 죽은것으로간주하고 아무동작도 취하지말라는얘깁니다.살아서 할수있는 모든것을중지하고, 가렵거나 무섭거나 뱀이 혓바닥으로 얼굴을핥아도 움직이지말고침도 삼키지말고 모든 동작중지하고 죽었다고생각해야 사는겁니다.큰산들이 신기한것은, 사람이 한두명 반듯하게 누울자리가 거의 없다는것입니다. 이삼백고지 야산은 누울자리가 더러 있는데 큰산일수록 그런자리가 없읍니다. 언제나 조금 움푹한곳 찾아 비트를만들지만 칼잠으로 쪼그려눞거나 그런게 전부입니다. 등산좋아하거나 산악훈련뛰어보신분들은 이해할겁니다.이때 몸도힘들고 기어봐야 수색조한테 걸릴수있으니 아예 낮을보내고 행동하기로했는데 그상황서 잠이오겠읍니까. 그리고 평시 산악돌파땐 이렇게 힘들진않았는데 배낭도버리고 총과 실탄만지니고 뛰었는데도 온몸이 너무아픕니다. 긴장이 너무 심한상태서 뛰면 원래 힘든거라고 말해주던 형. 하루온종일 엎드려 위장한 풀잎나뭇잎틈새로 늑대를피해 숨은 산토끼신세로 그렇게 하루를보내고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9시가되니 00형이 손짓으로 나갈 준비하란다. 기어가는뱀처럼 소리없이 나가 살펴보고 다시 기어와 나가도된다고하는, 지뢰에대해선 모르는게없다고 늘 말하던 00형얘들 지뢰를 어디에 깔아놔도 지형을보면 감으로 어디에묻었는지 칼없이도 안다는 전문가인데 침투때 가장 위험한일담당이 전방의 지뢰담당이다.묘향산 줄기를 타고 중부 **로 가서 거기서 지그재그로 남하해서 중부전선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끄덕..지리시간에 배우는 서산대사가 은거하던 그 묘향산자락을 삵괭이처럼 타고넘어 이때 하룻밤뛰는거리만대략 60~80키로정도는되는데 북한전국의 모형물에 무풍지대가 표기돼있어 그 지역을만나면 들길로 뛰어도 조심만하면 별문제없읍니다.남북공작원들 공통된 도피전술이 일직선이아니고 상황판단해서 동서로 헛걸음많이하고 아무리 안전하게갈수있어도 반복적으로 회피운동후에 휴전선에접근합니다.일단 북에서 공작조가포착되어 도피중이면, 북한군의이동과 토벌작전으로, 남한 전 휴전선경계지역에비상걸려 발칵뒤집히고 남한에서 미리 다알고 수색조들 휴전선 내부요소요소에 바글바글합니다.어딘가에있는 고정들로부터 북괴군의 색출작전이 모종의신호로전달되고 어느곳으로 복귀하던 들어오기만하면 안전합니다. (남한서 군대 조금만움직여 휴전선지역으로 작전나가면 낮이던 밤이던 도착하기전에 이북애들이 방송합니다. 00부대장병들 여기까지 오시느라고 수고가많았읍니다 ~~ 슬픈유행가 팡팡 틀고~공작원들 침투전 철망가벙커에서 수색대에섞여, 비무장지대 며칠씩들락거리면서 기회를 포착하러다니다듣게되는데 근처에 작전나온부대며 교체된부대 귀신같이알아내고 이런거 남북이 똑같은겁니다)단기공작들은 휴전선 가까운곳에서 공작완료후에 쏜살같이 남으로만달려 순식간에 넘어가겠지만 장거리공작은 이런 회피도주가 양측 다 기본으로 채택되어 조장형의 움직임에 따르게됩니다.공작침투를 가장 효과적으로 추적하는방법은, 도피가 완전히 확인되면 현역들 다 빠지게하고 공작들을 그자리에 투입시켜 흔적을찾으며 추격하게하여 그들이 육감과흔적으로 추적가능하고 포착시간부터 40키로정도의 동서남북외곽지대에 현역들을 배치해야하고 배치는 분대단위로 들판에하는것이 효율이좋은겁니다. 산에서 수색할것이 아니라 현역들을 산에서떨어진 들판에잠복시키고 산과 산이 이어지는 작은들 이런데 곳곳에 배치하면 이동중 걸리게되어있는데, 전문성이 없이 산짐승의 뒤를쫓고 산속만훑어놓고 지나다니니 잡기가어렵고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게되는것입니다.들로 튀면 산에서봐야하고, 산으로 튀면 들에서봐야 식별이잘되고 들에서 육안수색하면 아무리 우거진 산속에서라도 도피가 쉽지않읍니다. 벌써 오래전이지만 잠수함사건 96년도 북한무장공작원 색출때 특전대들 산속으로 뒤지고다니는걸보고 옛생각 참 많이했읍니다. 공작원들이투입되어 지휘해서 수색하면 저렇게안할텐데... 저렇게하면 모두 놓치는데...장거리공작들은 지도를 소지하지만 지도없어도 지형을보면 대충 어딘지 다알게 교육되있기때문에포착하면 먼거리로 포위망을 구축해야하는건데, 어린애들 물고기잡듯 들어가서 그대로 첨벙거려 흙탕물만들어버리니 공작들이 도주하기에 얼마나 좋을지모릅니다.은신한 공작을 육안으로 숲을뒤져서 잡는다는것은 어불성설이고, 그들이 산을타고 뛰어 지칠만한거리에들판과 산과 산이연결되는 그런곳에 병력을 잠복배치해야하는겁니다.아마 남북한의 경험있는 공작원출신들이 색출을지휘하면 제의견대로할겁니다.지난번, 공작원은 상대공작원으로 추적시켜야한다는글을 보신분은 대충 이해가가실겁니다.북파출신 노련한인원들 썩히지말고 그들이 공비색출을 전담하게해야하는것입니다. 그들중에 부상으로 불구가 되신분은 현역수색부대에 작전지휘를 맡기고 건각들로 수색조편성해서 체력좋은 특전용사들을지휘해 대간첩작전에 운영해보면 좋은결과가있을겁니다.북한 공작부대가하는것을 우리는 따를수없다면 저는 할말이없읍니다. 무장공비는 이시간 우리 대한민국의 산속에 상당수 항시 존재하는것입니다.숫자와 일기예보가뭘까? 뭔 말이지하며 좀 궁금해할수있읍니다.연세가 많으신분들이라면 이북방송중에 밤새 지겹도록 암호를 방송으로 내보내는 "동해바다17호 323726975" 이런 숫자방송을 들어보셨을 겁니다.암호방송용 목소리는 톤이 카랑하고 알아듣기쉬운 여자요원들이합니다.암호방송이라도 상대측 암호해독에 혼란을주려고 헛된 숫자방송이많고 그중 자신의암호가 공작원암호명과 함께 두번씩 반복적으로나옵니다.남북한 암호해독반들이 상당수있는데 해독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항상 철야로 근무하고있읍니다. 암호는 수학계산방법으로 풀수있는것도있지만 도피시 주로 사용하는 암호는 방송자와 청취수신자만이 아는것으로 해독반이 수백명이붙어도 해독불가능한것이있읍니다.암호전담반들이 각군마다있지만 공작암호는 필요에의하여 대낮에도 더러 일반방송으로 아무도 못알아듣게 방송되기도하고 주로 야간특정시간에 암호를 대량으로보냅니다.은문법이던 조합식이던 여러종류가있지만 연연하지않고 공작원들이 다급하게 도피시 방송하는 일기예보암호가있는데 조심스럽게 약간의 혼동을드리면서 올리겠읍니다.간첩이라불리는 고정에가까운 장기숙박자는 일일이 기억을 다 못하기에 난수표-숫자로 0~9번까지 조합해서 숫자로 지령을 받고 숫자로 보고하는데그것을 자신만이 해독하는 수첩을가지고있지만 침투공작원들은 침투전에 암호를 완벽하게 외워야합니다. 누구라도 알아듣지못하도록 약간 변형해서 말씀드리겠읍니다.공작원은 다음 방문예정지가 설정되면, 축소된 입체지형지물표본을놓고 암기교육을받읍니다.작지만 아주 세밀해서 지형이 한눈에들어오고 현지에가보면 정말 똑같을정도로 정교한표본인데 공중촬영을 토대로 입체감을살려 만드는것으로 낙하산부대에서 사용하는것과는 품질이 다른것입니다.이것을 수일동안 세세한지형까지 지도와함께 비교하면서 암기를 시작합니다,1차 침투예정지, 2차 침투예정지, 3차 침투예정지 등 예비로 준비하고 상황에따라 예정지를 변경도하는데 이와 더불어 일기예보를 청취문제로 교육담당이 준비한 지형들을 전부 익혀야합니다.침투목적지(이북)의 침투와 도피가 예상되는 지역곳곳을 뒤바꿔서 이름을 붙여놓는데 묘향산을 개마고원이라하고 금강산지역을 청천강으로 부르기도하는데 모든것을 완벽할때까지 외워야하고 틀리지않아야합니다.이북에 침투한 공작원이 발각되어 도피가시작되면 공중정보로(우주 정찰?) 이후에 도피를 돕는 일기예보가 흘러나오는데 북한군의 공작원보다 우리측공작들의 안전이 좀 나은것은 요것이 결정적으로다릅니다.공작원이 포착되어 신속,은밀한 도피가시작되면 해당기관서는 거의 같은시간대에 공작원이 추적당하는것을알게됩니다남북한고정들이 즉각 군대의이동을 감지하는데 북한에있는 남한고정은 열악하고 남한의 북한첩자들은 숫자도많고 행동자유가많아서 북한이 훨씬 유리하지만 우리는 하늘위에 뭐를 사용할수있어서 서로 장단점이많읍니다공작원은 임무에따라 다르겠지만 발신하는무전기를 저는 지녀본적이 없고 그게 필요하지도않고 작은수신기하나에 의지해서 긴급시 이어폰을끼고서 튀면 되는것입니다60년대에는 남침간첩들이 무식하게 모르스무전기로 소리내다가 걸리기도하고 탐전반에포착되어 체포되고하였지만 그런건 좀 무식한방법입니다.수신기에서 들려주는 일기예보를들으면서 세세하게 구분되어진 이름들중 개마고원쪽으로 비구름이 몰려오고 비구름이 벽산지점으로 이동한다고 방송이나오면 북수색조들이 개마고원이라고 명명된지역으로 오는것이고 공작원은 도피방향을 가짜로 이름붙인 벽산으로알고 그리로 튀어야하는것입니다. (지금은 다른것이 개발되었겠지만 거리를 알려주는방법과 어디로 튀고 이런건 생략하겠읍니다)이때 반드시 상관없는 거짓방송이나오지만 내가 암기한것만듣고 모르는것은 그들을 속이느라 나오는것으로 그냥 지나버리면되고,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방송을하며 어떤상황에선 다급하면 일반방송에서 느닷없이 임시방송처럼 일기예보를하면 그게 그거라고 이해하시면됩니다.장거리 전문 공작원들은 반드시 암기해야하는 일기예보를 만약에 기억못하면적발시 도주중에 죽을확률이 많아지기때문에 필사적으로 달달외워야합니다.공작원들 교육수준이부족하고 흉폭한자들로구성되고 어쩌고 낭설이많지만 일반인들이말하는 새머리와 닭머리들은 절대 공작원을못합니다.과거의 실미도처럼 김일성궁전을 침투하여폭파하고 전원 옥쇄한다는 정해진수순이라면모르지만 장거리전문공작원은 교육수준과 두뇌가 체력과더불어 수준이상이어야만 할수있읍니다.언젠가 제가 어린시절에 형들과도망치던 글쓴걸 기억하시는분계실겁니다.그때 묘향산(개마고원)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방향을틀고 달리던시절에 조장형이 일기예보들으며 앞서달리고 저는 항상 가운데, 다른형이 뒤에서 사주경계하며 달리던시절에 있었던일입니다.(공작원중에 앞사람은 지리를 잘알아서 안내역이고 뒤에 서는사람은 흔적이 생기면 흔적없애는전문가이며 가운데가 기밀중 기밀을요하는요원이됩니다)세세하게 뒤죽박죽으로 지형지물에 이름을붙이고 일기예보를들으면서 튀기에 어느 암호해독가도 풀수없읍니다. 이북 어느곳에서 공작원이발각되어 도망을하게되고 북한군이 추적에동원되면 이게 금새 남한에 정보가들어오고 불과 얼마후부터 일기예보가 흘러나오게됩니다.요즘은 이북일기예보를 하는지는모르지만 과거엔 방송으로 이북일기예보가나오면 북한군도 추적당하는 공작들의 도피안내가 시작된걸 감잡는겁니다.이북의 하늘이멀쩡한데도 황당하게 비구름을동반한 폭풍이 어디서와서 어디로 간다는데 그들이 모를리있나요...이북의 일기에보가나오면 숨바꼭질이 결사적으로 벌어지는것임을 공작원출신들은압니다.해당부서의 기간병들 완전히 비상걸리고 휴전선지역이 긴장으로 숨넘어가고 무사히 도피가완료되어 안전해질때까지 그렇게 지내야합니다.잠수함좌초로 도피하던 북한공작들이 자신들위치가 노출되는 발신기를 왜 사용한건지 이해가안되는데 자신들위치를 보고하고 방송으로 도피위치를 지령받느라그런것같지만 남한의 탐전능력을 잘몰라 그런게아닌가합니다아주 미세한 0.5초의 전파발신도 포착되는건데, 도피하며 자신들을 노출시키며 도망한것이 너무 이상했는데 잠수함사건때 북한방송도 일기예보 아니면 그들의 암호체계로 계속 도피안내방송을 내보냈을겁니다. 안들어봐서 모르지만...일반국민들은 그시간 친구들과어울려 술잔도 기울이겠지만 관련자들에겐 다들 안타까운순간들입니다. 목숨이 경각에달린 그한순간 실수와 방심과 부상이따르면 최후에는 자결해야하고 혹은 동료를 적지에서살해하고 도망해야하는 절대절명의순간들이 너무 많은데 그걸 다 지혜롭게넘기고 지금까지사는걸생각하면 목숨이란게 끈질긴것이라 생각도듭니다.특수부대의 시간당 구보력의신뢰성은? 저의 경험담에기준해서 쓰는것이니 그냥 편하게 보시기바랍니다.전에 김신조124부대 청와대습격사건때 한국군수뇌부들이 북한남파공작들의 기동력을간파못하고 한국군의 구보력에기준해서 시속 삼사킬로로계산하고 포위선을구축하느라 뒷북만치고 청와대까지 진출하게만들었읍니다.당시 김신조가 붙잡히고 티비에나와서 피곤한모습으로 현장서 잠시 중계가 됐었읍니다.청와대를까러오고 박정희목을 자르러왔다고 담담하게 말하던 그모습이 지금도 기억에남아있읍니다.이때 남파된 124군 북괴특수부대원들이 훈련시 완전군장으로 시속 10키로미터를달렸다해서 국군수뇌부들이 아연실색했었읍니다.이유는 불가능한일이었는데 실제로 그들이 휴전선침투후 야간돌파한시간대를재어보니 맞았다는것이지요...토벌이 완료된이후에 이들의 구보력을 따라잡는다고 낙하산부대가 완전군장에 산악훈련으로 불과 얼마후 공식발표로나온것이 시속12킬로가 발표되었읍니다.당시 대략 4키로미터정도가 국군의 구보력인데 이것을 3배의속도로 진전시켰다고 구보하는군인들 사진과함께 국민들 사기진작을위한 기사가 크게 나왔었읍니다.지난 2주전 어느분이 하루 얼마나뛰냐고 물어보시길래 30킬로 군장메고 100킬로뛴적있다햇읍니다. 연속적으로도 가능하다했는데 오늘은 따져가며 구보력에관해 글을 좀 쓸까합니다.잘뛰는 국가대표급 육상선수가 몇십년전 팬티바람으로 10키로미터를 31분에뛰던것이 한국기록이었읍니다. 요즘은 제가 관심을 덜 가져서모르지만 대략 27분대정도나올겁니다.42키로 마라톤 풀코스는 당시 국가대표급선수가 2시간30분대였으면 요즘은 2시간10분대정도 뛰더군요...그런데 낙하산부대가 완전군장을하고 워카신고 군복에 총에 다들고 국가대표 육상선수의 절반속도인 시속 10키로미터로돌파했다 이렇게 나왔읍니다.아마 10키로미터만 아스팔트길에서 실시한다면 거의 가능할수있을겁니다만 연속적으론 절대 될수가없는겁니다.공작원들이 죽기살기로 모래주머니에 쪼끼에 입고 배낭메고서 기본훈련이 주야로뛰는것만하는데 정확한 거리계산은없었고 대략 시간당10키로정도 뛴다이런겁니다. 우월감을갖기위해서 항상 과장된발표가 나오는건데 실제로 산길서는 이런 기록이나올수는없읍니다오르막 내리막길에서 군장을다하고 평지에서달리는 육상선수의 절반속도가나온다는것은 분명히 거짓이지만 그만큼 많이뛴다고 발표가됩니다.일반 아스팔트도아니고 완전군장하고 산악구보가 그런속도로는 이뤄질수없는겁니다한창 훈련받을땐 모래주머니 조끼 다벗고 배낭만 메고뛰면 거의 그정도 속도가붙기는합니다. 독종만든다고 하루에 100키로뛰고 다음날 또 뛴적은 있읍니다. 이런날은 온몸이 너무아파서 잠을못잡니다.그런데 북파되면 속도를 많이 줄이는것은, 오로지 야간 은밀기동으로 돌파를하고 밤시간부터 비트구축하는 새벽3시정도까지만 뛰기때문에 훈련때만큼 계속적으로 뛸수가없고유사시 힘을 비축해야하니까 항상 적게 달립니다. 발소리적게하고 가볍게 달리기위해 운동화를 많이신습니다.보통 하루밤에 오십이나 육십키로쯤 달린다보면되고 그리고 새벽에 은신장소물색해서 위장하는것을 새벽동트기전에 다 끝내야해서 3시정도에 정지하고 주변을 샅샅이뒤져본뒤 적격지를찾아 은신지를구축하는겁니다.새벽까지많을땐 일곱여덟시간 거의 달리기만하는데 이때 거리가 상황에 따라다르긴하지만 대략 50킬로에서 70키로정도잡지만 보통 50키로정도될겁니다.밤길에 익숙한사람들이라 엄청 잘뛰고 인간의한계를넘어선 사람들의 구보라서 야생동물같은 민첩함이나옵니다만 만약 산악구보라도, 길아닌 수풀로돌파한다면 속도는 현저히떨어집니다.산길로 주로 뛰는데 산길은 사람이 다니며 만들어진 자연길이라서 아무리 깊은산이라도 험한길은 많지않다보면맞습니다그리고 제경험으로 시속10키로던 12키로던 이런것이 부질없는게 정해진 코스가아니라서 환경에따라 다른속도가 나오는겁니다급하게 도망할땐 배낭버리고 총하고실탄 이런것만 챙겨서뛰는데 이땐 나르듯 뛰어서 속도가 얼마나왔는진 모르지만 엄청나게 뛴적이있읍니다.하여간 오늘은 군장하고 얼마나뛸수있나에대해서 조금 생각해봤읍니다.북파공작원은 일반군인들과는 너무나 다른훈련을하기에 괴력이생기지만군인들은 불가할텐데 발표는 항상 시속12키로의 속도로 달린다해서 저의의견을 좀 적어보았읍니다낙하산부대던 일반보병들이건 완전군장으로 산악구보하면 실제로 시속5킬로정도일걸로 생각합니다.================================다대포 생포공작원들이 서울까지 삼일에 돌파한다는것은 육로를 지칭한듯하지만 군장을메고는 산악돌파가 절대 불가능하지만 국로를 달렸던 어디를달렸던 자료가 있다하니 그냥 넘어가고, 참고로 비포장과 들길을이용한다해도 삼일은 불가합니다.공작원이 인적이 있을 도로와 들길의 구보로 이동하지않는것은 기본이고 낮시간 행동정지와 반잠을자기때문에 위의 자료에 의한것은 그들말 그대로 믿고 우리측 병사들만 힘들게한것으로 보입니다.공작원들이 말하는 시간당주파는 평균적 산길뛰기를말합니다.또한 임진강을 80키로 수영해왔다는것은 수영이아니고 그냥 물에잠겨서 물 흐르는대로 내려와서그렇읍니다우리 장거리공작들이 경우에따라서 배낭을 부유물로사용해 강의 중간지점을이용해서 내려오고 하류에이르러 아군측에 귀환하는방법이있으나, 유영탈출이 육상탈출과 장단점이 있어 대부분 육상귀환을선호합니다민물에서 80키로수영은 말이안되고 위의 설명을 참조하면 도움이되실겁니다. 유영에 의한 도착지점은 ** 부터 ** 지역까지의 귀환이가능하지만 이하 생략합니다.참고로 인간은 하루에 60키로이상을 연속으로 뛰게되면 전투를 하지못하고 이후 맨몸도주도 불가능해집니다식량의 수급이 원활한? 여름에는 무리해서 단축돌파가 불필요하며 위급시상황을타개하기위해 무리하지않게 돌파를합니다김신조그룹은 단거리 폭파공작조의특성이라 삼일만에 서울로 침투했지만 장거리공작조의 경우는 40키로군장으로 지속적인 침투는불가하며 배낭과 총기휴대는 20키로를 넘지않게합니다김신조경우는 대전차지뢰등 대량의무기를 소유하고 폭파와 살해를 목표로넘어온, 지척으로 침투한 단거리공작조이고다대포의 경우와 그외 이삼인으로 준동하는 공작원은 폭파무기를 소지하지않는 경장비공작원(안내원)입니다.안내와 침투공작원의 기본장비는 소총, 실탄, 수류탄 두개, 구급약, 단도,마른식량 이외 속옷과 양말하나씩 여벌정도로 약간입니다.=============================================00년초인지 겨울 서부전선의 **부대 관할지역 모기지에서 각군 별들이 참관한가운데 공세훈련하는 야전훈련의 본격전이벌어지는데, 그전에 뭔시범을 보인다고가본적이있읍니다. 작전에참가하는 육군보병들의 돌파에비교하여 우리공작조가 차출되어 측정시범을하게되었다우리의 기록과 비교하여 자체적으로 일반보병들의 돌파전투력을 평가해보기위한일에 우리가 먼저 시범을보이게된것으로 이런 강아지같은경우가 전에 없었는데 보통정도의 산정상을뛰는일에 어이 우리를 부려먹는건지...각군의 대규모훈련에 더러 참관한경험자인데, 이때 초저녁 전투훈련장전체를 살펴보니 얕은야산을 뒤로하고 전차들이 줄지어있어 참가한 동료들과함께 개울뚝방으로 차를몰아 돌아보는데 평생 이렇게 많은 전차가 밀집한것을 처음보았다.대충 육안으로 들어온 전차의숫자만 150대가량으로보이고 보병장갑차가 대거 참여하여 진용을갖췄는데 모습은 방어개념아닌 돌격전투대형의 웅장한모습으로 굉음들을내며 전, 후퇴의 훈련이소,중대 단위별로 실시되고있었다.아군측에서 돌파해들어가야 할 목표지점을 쌍안경으로 관측하는데 별다른장애는없고 논두렁밭두렁을 지나 개울건너 거리 대략직선으로 3킬로남짓,험하지도않은 뽀족한 300고지상까지의 산세는 가파르기가 보통이아니었다..군인들이 정상탈환훈련이라서 그들을 독려하기 위한것이겠지만 돌파에부려먹고 일만하다 죽으려나부다 궁시렁거리면서 별로 힘든건아니라서 희희낙락 잡담으로 시간때우면서보내고 한바퀴 빙 돌아 구경하고돌아오며 면소재지로 차를돌려 일찍 저녁식사마치고 돌아와 차안에서 대기하는데 시간은 우리 편한대로하고 돌파예정지와 산정상에 군인들을 곳곳에 보내겠단다.이 사람들이 우리가 헬리콥터타고 올라갈까봐 의심하나 어쩌고 한바탕웃으면서이제 퇴사말년인데 끝까지 우려먹으려는군 우스개소리하며 23시에출발하기로 결정하고 군인들이 길목곳곳에 측정을위한 배치되었다.공작부대가왔다는 소문이들기만하면 군인들은 뭐가 신기한지 근처서 구경거리가 되기시작하는 것은 어제오늘일이아니었다. 장교들이나 사병이나 말은 부치지않고 좀 떨어져서 구경을한다. (우리 무서운사람이아닌데 애들은 늘 저렇더라)몸을 가볍게 하기위하여 작업복에 특유의 운동화를신고 양말속에 아대끼워넣고작은배낭을 어깨에 바짝메고 카빈총을들고 초반부터 빠른속도로 뛰기시작하며 작은 논길을따라 4인조가 뛰고있었다.얼마안돼 큰 개울이 나오는데 이게 문산천일 것이다. 개울은 뛰면서도 밤에 비치는 물결과 물의폭을보면 깊이가나오니 그대로 뛰어들어가 백미터는 될 개울을 통과해 논두렁으로 타고 올라보니 주변에 군부대들어가는 야전도로도 보였으나 원래 길이 체질이아니라서 그대로 논과 밭으로 미끄러지며 뛰었다.시골동네가 나오고 마을뒷편으로뛰는데 산아래턱에 군부대사격장이 나온다.편편한 사격장을 지나 바로 쳐오르며 산을 오르는데 단거리지만 이렇게 힘들기는 정말 드물었는데 그 가파르기가 산짐승도 당연히 거부할 정도였다.(이런 급경사의 야산특징은 짐승이없고 먹을게없으며 누울자리가 없읍니다)이거 수풀이 우거져도 산자락을달리는게 기본인데 오늘은 일직선으로 뾰족한 정상을 다 올라가보고 별 고생한다며 가는데 중턱에이르자 기운이빠지는데 대충 3키로뛰며 이렇게 힘들어보기가 그때 처음이었던것같다.어차피 시범이라서 최선을다해서 뛰어오르긴했는데 산정상에서 군인들이건네주는물을 마시는데 이거 자존심있어서 누워버릴수도없고 그때 난감했던생각을하면...우리는 땀범벅이되어 산아래를향해 널부러져 앉아있는데 군장교들 저들끼리하는말이이거 엄청난 속도네요 32분 나왔읍니다~ 무전으로 들려오는 소리 수고하셨읍니다~ 이어서 한마디씩하는 소리들이... 대단하네요.(이넘들 저들은 시계나 들여다보며 오르지도 못할것들이 병사들 엄청 고생시키겠구나생각하면서 내려왔지만 일반보병들이 군화에배낭메고 오르려면 한시간안에 못올라가고 중간에 쉬면서 물마시지않고는 오르지못합니다)산은 높은데 얼마나 뾰족한지 정상이라야 불과 너댓평정도되는, 고지로서는 용도가없는 산이었는데 왜 그곳을 작전목표의 고지탈환목표로정한건지 이해를못한채 내려온적이있었다.그때 군단장교들이 길목을지키고 손에 클립보드를들고 기록을재느라 서있고 힘은들지 눕지는못하지 이런 황당한기억이있는데, 올라가며 뒤꿈치가 땅에 닿지않아서산을 직선으로올라가며 인대가 늘어나서 좀 고생한 그런추억이었읍니다.(이런 수정합니다. 글을 다쓰고 며칠지나면서 생각해보니 돌파시범 했던 산높이가 300고지였네요 사격장 아래에 175mm인지 8인치 자주포부대있는곳인데... 하도 오래전이라서 지역이 혼동되었읍니다.)
알코오올작성일
2009-01-03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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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1968년1월 21일 청와대 기습사건
1968년 1월 21일은 유명한 김신조의 청와대기습이 있었던 1.21사태의 바로 그날입니다.
1.21사태는 1968년 북괴 124특수군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노리고 청와대를 기습한 사건입니다. 굳이 비교하여 예를 들자면 우리가 겪은 1.21사태 는 미국이 겪은 911사태와 그 성격이 같습니다. 1.21사태를 계기로 하여 한국의 국방정책은 많이 바뀌게 됩니다. 일종의 비정규전(테러)에 대한 대응체제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예비군제도입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한국의 대테러전 개념이 현재 미국보다 앞섰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대한민국이 먼저 겪었기 때문이죠. 1.21 사태를 계기로 한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었더랬습니다. (지금의 미국이 911을 계기로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된 것처럼) 북괴의 청와대 기습테러인 121사태를 겪고나서 우리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던 것입니다.
그 향토예비군은 그후 일련의 테러전인울진 삼척지구무장공비 토벌에 일등공신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최초 도입된 F4-D팬텀을 살펴보는 박대통령(1969년)
그리고 향토예비군만 창설되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박대통령의 불같은 응징의 의지를 달래고자 한 미국의 약점을 간파하여 우리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팬텀기를 토입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일본조차도 F-104를 운영하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거의 F22랩터를 도입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 였습니다. 1969년에 우리가 팬텀기 1개 대대(18대)를 운영하던 시기만 하더라도 미국외에는 영국만 운영하던 시기였습니다.당시로서는 전략적 전폭기 역할을 수행하는 팬텀기를 도입하기 위해서 박대통령은 월남파병에 반대급부적 조건으로까지 이용하였습니다. 당시 우리 측 협상 대표인 최규하 외무부장관을 불러 “팬텀기 지원을 보장받지 못하면 회담을 깨고 나오라”고 지시까지 했던 것입니다.그렇게 해서 우리는 팬텀기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특기할 만한 것으로, 미국 이외로서는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F-4 운용국가가 된 것 뿐만 아니라 동북 아시아 최강의 항공전력을 보유하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한편 일본의 항공자위대는 1970년 도입을 결정하여 1973년에 F-4E를 도입 개시하였습니다
항공자위대의 F-104J 조종성 않좋기로 유명한 기체입니다. 미국에선 과부제조기로 통하던 그런 기체였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미국으로 부터 무상군사원조 1억달라를 추가로 받아내었습니다. 이것의 내막은 북괴의 연이은 테러에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인 미국에 대한 한국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미국의 고육지책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받은 무상원조 1억달라의 용처에 대해서 박대통령은 이렇게 지시하였습니다. “다들 들으시오. 최규하 - 밴스 장관의 회담 내용인데 군사 원조 지원액 1억 달러 중 팬텀기 1개 대대(18대) 구입비와 비행장 개선비(500만 달러)를 포함해 6800만 달러를 공군이 쓰고 나머지 3200만 달러는 육군·해군, 해병대와 경찰이 쓰라는 지시요.” 당시 우리의 경제를 감안하면 1억달라는 천문학적 금액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미국에 대한 엄포로서 1억달라 공짜로 받아냈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런 돈인 1억달라중에 무려 6800만 달라가 공군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때나마 아시아 최강의 공군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그러고 보면 가장 공군을 우선한 정책이기도 합니다. 그 후 미국에 의해 Peace Spectator로 명명된 프로그램의 제1진으로 1969년 8월25일 F-4D Block 24형 4대, 25형 13대, 26형 1대, 총 18대의 F-4D를 인도 받게 되며 이 기체들은 제11전투비행단 제151전투비행대대가 창설되어 배치되었습니다.1972년에 제2진으로 공군 보유 F-5A 36대와 RF-5A 8대의 베트남 공여에 대한 대여분으로 주한 미 공군 제3전투비행단 (3rd TFW) 소속 F-4D 18기 (Block 26형 7대, 27형 6대, 28형 5대)가 이관되어 공군 제110전투비행대가 재편성되었다. 제2진은 미국으로부터의 대여라는 형태를 취했지만 몇 대가 일시 사용 후 반려되었을 뿐 대부분은 그대로 공군의 보유기가 되었다. (한때는 막강 공군이었는데 .......... )그리고 우리는 방위성금을 모아서 팬텀기를 추가로 구입하여 공군력을 확충하였습니다. 지금처럼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국민이 한마음으로 공군력을 강화한 결실이기도 하였습니다.
방위성금을 모아서 구입한 팬텀기와 팬텀기의 폭장능력을 보여주는 사진그리고 우리는 방위성금을 모아서 팬텀기를 추가로 구입하여 공군력을 확충하였습니다. 지금처럼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국민이 한마음으로 공군력을 강화한 결실이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잠간 우리가 어릴쩍 아니 국민학교 다닐쩍에 내던 방위성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우리군은 디지털화 현대화가 됐다고는 하지만.. 킁
개인장비나 후방부대나 혹은 보급부대를 보면.. 이건뭐 이게 어느나라군대인지..
몇년도때 사용하던 장비인지..
지난 30여년간의 팬텀기 활약상을 잠깐 사진으로 볼까요
우리집 상공을 초계 비행중인 공군F-4편대 (ㅋㅋ 우리집이라곤 한건 뻥 ^^)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아버님으로 부터 직접 들은 내용을 전해 드립니다.1968년1월 21일 당시 저의 아버님은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들은 바데로 옮겨봅니다.
김신조를 포함한 북괴 무장공비 침투 모형 인형
남방 한계선 철책선 밑을 통과하는 무장공비의 모습이 당시의 현장감을 더해준다. 이 위치는 김신조씨가 직접 지정한 장소이다.
김신조 일당인 북괴 특수군 124군의 침투로와 교전상황과 故 최규식 총경
순직한 종로 경찰서장 故 최규식총경
당시 김신조일당은 주로 미군이 담당하고 있는 지역과 일부 미군과 국군의 경계지역 접경만을 골라서 침투하였습니다. 그만큼 당시 미군의 경계 태세가 허술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아군 복장이었기 때문에 미군의 의심을 회피할 수 있었기도 합니다. 어쨌든 김신조일당의 청와대 습격조는 아주 유유히 휴전선을 넘어서 서울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 후 미군경계지역을 벗어나서 검문다운 검문을 한 것이 바로 세검정에서 당시 종로경찰서장이시던 최 규식 총경이었습니다.
김신조 일당이 최규식 총장을 총격하고 그곳에서 총격전이 벌어 졌습니다. 물론 그 전에 신고가 접수되어서 우리의 군경이 대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북괴 특수 침투요원이라고는 상상도 못하였던 상황이었습니다.68년 1월21일 저녁 7~8시경이었습니다. 당시 기온은 영하 20도를 헤아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최규식 총경의 검문에 막힌 김신조일당의 총격으로 콩볶는 듯한 소리가 효자동 세검정 그리고 청와대까지 들렸습니다. 우리의 군경과 북괴침투조간의 격렬한 총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그러자 상황실에는 청와대 외곽 경비초소로부터 다급하면서도 지원을 요청하는 경비전화가 빗발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일부 외곽 초소경비요원은 거의 울음 썩인 목소리로 긴급지원(실탄등) 을 요청하는 그런 상황이었다고 합니다.계속 다급한 지원요청은 들어오고 총격전의 소리는 더더욱 커지는 상황에서 당시 저의 아버님은 경비대 본부에서 근무를 하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당시 상황을 그 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고 지금도 당시 말씀을 하실때는 마치 당시로 돌아가서 서 있는듯 생생하게 말씀하십니다그중에서도 박대통령의 모습은 지금도 너무나도 생생하다고 하십니다. 무선과 유선으로 날라오는 상황에 대해서 박대통령께서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진두지휘를 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김신조를 포함한 북괴 특수부대를 최규식 총경보다 먼저 조우한 사람은 서대문경찰서장 이었습니다. 소속을 묻자 특수수부대훈련 마치고 귀대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바람에 의심을 가지면서도 그냥 통과 시키고 말았습니다. 물론 아무래도 미심쩍으니까 서대문 경찰서장은 뒤따라가면서 무전을 날렸습니다. "미상의 부대 이동중, 재 검문요망" 이 무전은 바로 당시 중앙 정보부에 잡혔습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에선 바로 종로 경찰서에 알렸고 그래서 최규식 총경은 부관과 함께 "빽차(당시 경찰차는 새하얀 백색의 찦)" 를 타고 자하문 밖 세검정으로 달려 간 것입니다. 허리에 권총만 찬 총경이 북괴 특수부대를 가로 막고 검문을 하였습니다."소속을 말하시오""방첩부대야! 저리 비켜" (서대문경찰서장을 따돌리는 수법)"난 종로서장이요. 소속을 확인해야 합니다. "
바로 그때 세검정 고개길로 77번 시내버스가 헤드라이트를 키고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김신조를 포함한 북괴특수부대원들은 77번 시내버스를 최규식총경을 지원하러오는 지원부대인 줄 착각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총격을 한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시내버스라는 것을 알았다면 최규식총경 (부관,운전병)일행을 무혈 진압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후 김신조 일당을 잡은 군경은 승진과 포상을 받았지만 제일 처음 김신조일당과 조우하였으나 미처 검거치 못하고 놓친 서대문서는 그 어떤 포상도 못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서대문서장의 자조섞인 말도 있었다고 합니다."죽은 총경보다 산 순경이 낫지 않은가?"어째든 그 후 김신조 외에 1명을 더 생포 했습니다만 그 한명은 후송중에 자폭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한국은 대테러전까지 가미한 국가안보체제를 형성하였습니다. 분명 121사태(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는 국가의 심장부를 노린 테러였고 또 그 테러의 여파는 대한민국을 변화시켰습니다. 대테러전 능력까지 겸비하게 된 대한민국을 보고 당시 김일성은 통탄해마지 않았습니다."앗 뿔사! 내가 실수 했구만" 바로 김일성이가 박대통령이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상대를 잘 못 골른 결과입니다.
1.21사태(북괴의 청와대 기습테러) 후 변화된 대한민국의 안보체제 ★ 북괴의 청와대기습테러(121사태) 이후 변화된 대한민국의 안보체제 ★1. 향토예비군 창설
2. 155마일 휴전선의 남방한계선에 철책설치
3.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 1억달라 긴급 지원 (1967년 한국의 연간 수출액은 3억2천만 달라였으니까 당시 미국이 긴급 지원한 1억달라는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그야말로 천문학적 금액입니다)
4. 미공군의 주력 팬텀기 한국공군에 배치 (아시아에서 최초) ==> 한국공군이 당시 최신예기인 팬텀기를 일본보다 먼저 보유하자 일본이 혼비백산하였슴.
나름대로 여기 저기서 모아본 자료를 각색편집 해봤습니다 ㅡ,.ㅡ;; 뭐 다들 알고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