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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눈팅 하다가 글 좀 적어 봅니다.
세상 어느 전쟁에서
경계를 실패해서 침몰한 함선과,
그 희생자를 영웅으로 해줍니까?
일단 시작부터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 이번 정부가 극도로 국방을 우대하고,
너그러이 봐주는 정부면 또 모르겠습니다.
국방비를 감축하는데 열을 올리는 정부인데,
전사자의 영웅화?
이거 시작부터 이상하지 않습니까?
경계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서,
뭐에 당했는지도 모르고,
조사단의 발표를 따르면,
어뢰에 맞고도 뭐 때문인지 보고도 못하고,
함장은 부랴부랴 도망쳐 나왔지만,
죽은 사람은 영웅이다?
전사자와 영웅의 개념이 흔들리는 것 아닌가요?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사자들을 욕되게 할 마음은 없지만,
영웅이라..
구조작업에 힘쓰다 사망하신 한준호 준위나,
금양호 선원들을 영웅이라 부르는 것이 맞는거 아닌가 싶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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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금양호 가족대책위 '죄인취급에 협박, 정부시키는대로 했다'
해군 천안함 실종자 수색에 참여했다 사고를 당한 저인망어선 98금양호의 실종 선원 7명 처리
문제가 지난달 30일 타결됐다. 이틀 뒤인 2일 인천 경서동 신세계장례식장에 합동분향소가 차
려져 시신도 없이 5일장의 장례절차가 진행됐다. 6일엔 영결식이 치러졌다. 사고일(4월 2일)부
터 따져 꼬박 35일. 그렇게 98금양호 침몰 사고는 일단락됐다. 그간 98금양호 실종자가족대책위원회 요구는 세 가지였다. 선체 인양과 의사자(義死者) 지정, 진상규명. 타결 직전, 선체 인양
은 포기했다. 의사자 지정은 일단 ‘의사자에 준하는 예우’를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한 발 양보했다. 사실상 대책위 요구 대부분
이 무산된 셈이다.
협상 타결 직후인 30일 오후 5시 인천 연안동 주민센터 2층 사무실에서 만난 이원상(43) 대책위
원장은 자주 눈가가 젖었다. 목소리는 쉬어 자꾸 끊어졌다.
-정부와 한 달 협상했다. 결과에 만족하나. “만족하지 못한다. 시신 없는 장례식 아닌가. 모든 걸 다 양보했다. 어떻게든 선체를 인양해 시신 한 구라도 찾고 싶었다. 그
걸 포기했다. (정부와의 싸움에서) 완전히 진 거다. 희생자 의사자 지정에 정부가 협조해주는 대가로 다 포기한 거다.”
-대책위원장을 맡아 힘도 많이 들었을 텐데(위원장 눈가가 붉어졌다. 담뱃갑에서 마지막 담배를 꺼내들었다).
“여기 와서 골초가 됐다. 하루 반 갑 정도 피웠는데 세 갑이 모자란다(울산 현대중공업 협력업체에서 소장직을 맡고 있는 이
위원장은 형 이용상씨의 사고 소식을 듣고 지난달 3일 밤 12시 무렵 인천에 도착한 이래 한 달 넘게 머물고 있다). 전체 희생
자 9명(시신이 발견된 김종평, 람방 누르카효씨 포함) 가운데 부모가 생존해 있는 사람은 2명, 자녀가 있는 사람도 아들을 미
국에 입양시킨 김씨를 포함해 두 명뿐이다. 김씨는 술 한 잔 걸치면 아들 얘기를 많이 했다더라. 다 힘들고 외롭게 살아온 사
람들이다. 죽음까지 헛되게 해선 안 되는데….”
-결과가 억울한가.
“많이. 망자들에게 미안하다. 일을 원만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 같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이유는.
“실종자 가족 자체가 힘 있는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지 않는가. 국가에 항의할 힘이 없었
다. 그래서 등한시됐고, 홀대 당했고, 죄인 취급을 받았다. 중간에 정부 관계자로부터 협박까
지 당했다. 협조하지 않으면 당신들도 얻는 게 없다, 잃는 게 많을 거다, 하자는 대로 해라, 이
런 내용이었다. 개인적으로 받은 협박이었다. 대책위 다른 가족들이 알면 발칵 뒤집어진다. 그
래서 얘기 안 했다.”
-천안함 사건 처리와 비교해서 불공평했다고 생각하나.
“(천안함 사건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도 슬프다. 희생자 모두 아깝고 젊은 목숨인데 어떻
게 안타깝지 않겠나. 하지만 98금양호가 천안함 관련 사고이다 보니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었
다. 정부 대우부터 처리방식, 자세, 국민적 관심 모든 게 너무 달랐다. 이렇게까지 차별대우를
받나 싶었다. 서글프고, 속상하고, 분했다. 희생자 모두 배우자가 없는데다 가족도 많지 않아
매일 대책위에 나오는 인원이 15명 안팎이었다. 사람도 적고 그만큼 목소리도 작았다.”
-의사자 지정을 위해 다 양보했다는데 그 문제 역시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의사자인가, 의사자에 준하는 예우인가.
“의사자로 지정되면 최고 1억9700만원을 보상금으로 받게 된다. 그게 딱 법으로 정해져 있다.
정부 쪽에서는 의사자에 준하는 예우에는 규정이 없으니까 보상금을 더 줄 수 있다는 식으로
설득했다. 그동안 필요 없다, 무조건 의사자로 해달라고 주장했다. 그러다 정부 얘기를 받아들
였다. 시신이 발견된 2명에 대해서는 의사자 신청이 접수됐다. 이들 건이 받아들여지면 실종자
7명도 의사자로 신청하고, 2명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의사자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 걸로 합의
했다. 보상금도 더 주기로 구두 약속했다. 장례비도 전액 지원하고 백령도에 위령비 건립도 추
진하기로 했다. 그간 심신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협상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대화 통로 자체가 없었다. 인천 중구청 98금양호 사고수습대책본부가 채널인데 해주는 게 없
었다. 우리가 공문을 작성해 어느 부서에 전달해달라고 팩스 넣어주면 그걸 전달해주는 역할밖
에 못했다. 농림수산식품부, 보건복지부, 총리실, 해양경찰청 어느 쪽 하고도 책임 있는 얘기
를 할 수 없었다. 그러다 4월 27일 가족들이 서울 정부중앙청사로 올라가 소란을 피우니까 움직
인 거다.”
인천=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
새터데이작성일
2010-05-06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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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결국, 유가족들 간에 돈싸움 붙이네요
결국, 유가족들 간에 돈싸움 붙이네요
어느 기자가 이정국 천안함 유가족 대표와 동행하여 금양호 장례식장에 조문 갔다가...
봉변을 당하는 해군참모총장(조문왔던)을 보며 현장을 스케치 했던 기사를 소개 했었죠(어제 제 글).
그중 성금관련등... 가슴 아팠던 내용 일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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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까지 포기했습니다..." 천안함 유가족 할말 잃다."선체인양은 결정이 되신건지..." / "포기 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진행시키기 너무 역부족이고, 정부측에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힘들다,어렵다,비용이 많이든다,기간이 오래걸린다 ... 심지어 시신까지도 포기했습니다.." 이말에 이정국 천안함 유가족 대표는 할말을 잃었습니다.천안함 국민성금에 대해서 이정국 천안함 가족대표는 장례식장 현관에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던
금양호 상주에게 처음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국민성금을 함께 탈수 있도록..토론회에 같이 갈수 있도록
정부측에 건의해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화내용은 혼자 촬영 했는데 영상 보시면 나옵니다.TV뉴스에서 보는거와 달리 실제 이곳에 와서 유가족의 말을 들어보니 이해할 수 없었다는 이정국 천안함 유가족 대표. 좋은일을 하다 희생되었는데 정부측의 금양호에 대한 무관심과 외면에 할말 잃었다는 그는 어딜 가든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적극 돕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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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뉴스에 생색내기 바쁘네요. 금양호장례식... 수협장(례)에 의사자 예우 장례비용 일체 부담 해준다구요.
그런데 금양호 유가족들은 선체는 커녕 시신도 못찾고 그야말로 개죽음 초상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나마 네티즌들과 유가족들이 항의한게 고작 이모양). 상황이 이러하니, 성금이라도(KBS성금 등) 나눠 줄수
없겠냐고...천안함 유가족들에게 구걸을 해보는 것이죠.개죽음 초상을 치르는 금양호 유가족들이 말입니다.
국민들이 거둔 성금이라도 나눠 받으려면, 금양호 유가족들은 찍소리 못하고... 또 정부 눈치나 봐야겠군요.
돈을앞세운 초법적 무소불위 정부앞에,유가족들은 그저 꿀먹은 벙어리가 될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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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잔병 = 전사자, 영웅, 훈장, 해군장, 국립묘지안장,
금양호 = 익사자, 어민, 상처, 수협장, 개죽음→수장,
그리고 출장중 음주운전으로 사망 한 농림부 직원들은
순직처리,국가보상 하였다. 이 무슨 개같은 경우인가?
-펌-
닫힘학원작성일
2010-05-04추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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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이건아닌것같네요
먼저 천안함장병들이게 진심으로 애도를 표합니다
천안함 희생장병, 1계급 특진과 화랑 무공훈장 수여
뉴스엔 원문 기사전송 2010-04-26 16:52
[뉴스엔 이성원 기자]천안함 희생장병 전원에게 1계급 특진과 화랑무공훈장이 수여된다.해군 관계자는 26일 "고인들의 영해 수호에 대한 의지와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고(故) 남기훈 상사의 시신이 발견된 지난 3일부로 추서진급 발령을 했다"고 밝혔다.29일 2함대에서 열릴 영결식에서는 희생자 전원에 대해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되며 유해는 이날 국립 대전 현충원 합동묘역에 안장된다. 또 이날은 '국가 애도의 날'로 정해 관공서는 조기를 달고 오전 10시에 1분간 추모 묵념을 갖게 된다.이성원 taipei@newsen.com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newsen@newsen.com손에 잡히는 뉴스, 눈에 보이는 뉴스(www.newsen.com)copyrightⓒ 뉴스엔.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이런 기사를 봤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예비역으로서 이번 천안함 사건은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수 없지만
그래도 이거는 아닌것 같네요
군인이 군복을 입고 죽었으면 그 자체로 명예로운 일이고 숭고한 일인데..무슨 난민 구호하듯이 전 국민 성금 모금하고...국가가 주는 포상금이 군인에게는 더 명예로운 건데 당연히 국고로 보상해야 마땅한 일인데 천재지변에 부모형제 잃은 사람들 성금 모아 주듯이 이건 좀 ....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알겠지만 군대에서 죽는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이분들도 보상을 해야되는거아닌가요?
오발사고로 사망하고 낙하산이 안 펴져서 사망하고 유격구보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작전도중에 사망하는경우가
허다한데 이분들은 그대로 짬시켜버리고... 군대가 복불복은 아니잖아요 매일 메스컴에 나오고 핫이슈되니까
천안함 장병들은 영웅이 되어버리고 그간 죽어간 많은 장병들은 개죽음이 되는겁니까? 이건 아니잖아요
정부가 합당한 예우를 한다고 하는데 정말 합당한 예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동네방네 온통 "천안함 장병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000당 일동"" 이런 현수막이
상당히 많이 있는데 참 아이러니 하네요
천안함 침몰원인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거의 결정이 나는것같은데 만일 북한의 공격이 었다면
천안함 장병들은 패잔병들일 것입니다 어디서공격한지도모르고 무슨공격에당했는지도 모르고 손도못쓰고
총도 못쏘고 침몰을 해버렸는데 화랑무공훈장은 왜 수여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무공훈장은 국가에 공헌을 세운사람들에게 수여하는게 아닌가요? 2002년연평해전때 전사한 용사들은 뭐가되는건가여?
저는 이번사건에서 가장 불쌍한 분들이 금양호 선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되는건가여?
이분들은 군인신분이 아니라서 순직도 아니고 전사도 아니고 어떻게 되는 겁니까?
천안함장병들의 빈소에는 정치계의 인사들 유명인사들이 끊이지 않고 조문을 하고 있고 한달동안 천안함침몰이 핫이슈가되서 방송이 되고 있는데 농림부음주운전으로사망한공무원들 위로금 줄 돈들 금양호실종자 가족들에게 지급 해줘야 되는거 아닌가요? 금양호선원들은 이대로 잊혀지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 천안함 사건에서 실질적인영웅은 금양호선원들과 한주호준위님이지 천안함 장병들은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기에는
조금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니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해봐라 이런소리가 나오나", "자기일아니라고 너무 막말하지마라", "죽은장병중에 한명이 니 동생이었다고 생각해봐라 이런 소리가나오나" 이런말들을 많이 하는데 우리 국민들은 안보의식이 참으로 낮은것같습니다 단 5분만에 서울을 증발시킬수있는게 북한인데 아직도 북한의 한반도공산화, 한반도 적화통일은 아직도 바뀌지 않았는데 우리나라국민들은 우리가 소도 갖다주고 식량퍼주는것을 많이 봐서 그런지 북한을 너무 안일 하게만 생각 하는것 같네요
자주국방,스스로나라를지킬수있는힘, 국방력, 즉 군대가 나라를 보존시킬수있는 힘인데 이번 천안함 사건으로인해서 우리나라의 군대의 위신이 완전히 땅에 떨어진것 같네요 특히 이번사건을 계기로 해군의 사기와 명성은 완전히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한주호준위님은 아마도 땅에 떨어진 해군의 위상을 살릴려고 잠수를 했을 것입니다
"군대에서 죽었는데 이런 개죽음이 어디있나?", "이사람들이 군대가고싶어서 간것도 아니고 징병도아니고 끌려가서 개죽음 당한거랑 무슨 차이가있나?", "이래서 맘놓고 군대를 보내겠나?"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
우리나라는 전쟁휴전상태입니다 언제 발발할지모르는 분단국입니다 우리나라 군대는 다른나라 땅따먹기 할려고 존재하는게 아닙니다 한반도에전쟁이 발발하지 않게 전쟁을억제할려고 존재하는겁니다 대한민국의젊은이들이 군대를 안가면 누가 가나요? 우리아버지들이 가야하나요? 우리나라사람들은 옆사람이 그렇다 그렇다 하면 조금만 일리있는말이면 아 그런가부다 이해를 해버리는데 참으로 안타깝네요
이번에 순직한 천안함 장병들은 군대를 다녀온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고 안타깝고
유가족들을 보면 정말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전역을한달 앞둔 병장이건 입대안지얼마안된 이등병이건 정말로 안타깝지만
이들은 군복을 입은 국방의의무를 해야하는 군인들입니다
군인으로서 이해를 해야합니다
엔터키★작성일
2010-04-2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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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한국전쟁때 학도소년병들의 전차중대 이야기VOL3- 입대와 훈련
서기1950년6월25일
서기1950년 봄
그 해의 사회상은 잘 알 수 없다, 신학기가 된 나는 중학 3학년이 되어 부모님 밑에서 평화롭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우리집은 용산역 뒷편 신계동이었다. 조용한 일요일 새벽 멀리서 은은한 포성이 들리면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과 함께 우리가족은 피난봇다리를 짊어지고 피난준비를 해야했다. 집앞 제방 뚝에 (현 용산 전자상가) 올라 한강다리쪽으로 갔다. 많은 사람이 피난 보따리를 갖이고 간다. 강뚝 따라 용산철도 기지창 가스탱크 옆을 가다가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유는 다리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 은 피난을 포기 했다...
그리고 피 비린내 나는 동족상쟁의 남침전쟁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피난도 못가고 인민군을 만났다 그리고 빨간완장을 찬 사람에게 이끌려 김일성 歌를 배우기도 했다. 우리 큰 형님은 인민보안대에 의해 이북으로 끌려 가신후 소식이 없다 경찰관이었다는 이유로....
1950년 8월15일경 이다 동내 친구들과 함께 대문앞에서 전쟁 이야기와 잡담을하다가 하늘을 보니 B-29 폭격기가 하얗케 떠서 오더니 폭탄이 쏟아진다 어느 순간에 우리위로 떨어젔다 목표는 용산역 이지만 역에서 가까운 우리 동내도 오폭을 맞았다 나는 우리 집 안방에 엎드렸다 친구는 건너집 으로 들어갔다 순간 큰 폭음 소리에 사방이 먼지로 뒤덮이고 집이 무너지 는 소리와 내 등 뒤에 장롱이 덮여 있고 잠시후 밖을 보니 앞이 훤히 트이고 바로 집앞에 큰 웅덩이가 생겼다. 그 후 앞집으로 들어간 친구는 영원히 보지 못하였다...
나는 무서움에 용문동쪽을 지나 금양초등학교쪽으로 가는 도중 서적 인쇄소가 폭격을 맞았다 길위에 사람이 엎드려 있는데 등에 커다란 구멍이 뚫여있고 피가 땅바닥에 낭자한 것을 보기도 했다. 또한 피를 흘리고 우왕 좌왕 하는 사람들 을 보며 여기저기 사람의 살점들이 흩어져있고 동내에서 키우는 개들은 인육을 먹는 것도 보았다 나는 놀랜 남어지 가족도 생각지 않고 효창공원을 지나 마포 형무소를 거처 마포 경찰서 뒷편 감 나무밭 뒤로새로지은 개와집 동내를 지나 외갓집이 있는 뒷산으로 도망을 하여 산위에서 용산원효로 우리집 쪽을 보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시간이 지나 조용하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보니 앞집으로 들어간 친구는 앞집 식구와 함께 어디로 혼적도 없이 살아졌다. 내 누이동생은 폭격에 맞은 옆집 흙더미속에서 살아 나왔다. 그리고 그후 나는 국군이 공격해오는 김포 상공을 보고 인민군들이 서울 시가를 떠나는 모습도 보았다 그런 환경에서 국군이 들어와 수도가 탈환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랴.....그러나 그것도 잠시일뿐 다시 1950년 12월 26일경 소위 1.4 後退로 서울를 떠나 피난을 갔다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때가 봄쯤이었을 것이다 ,1951년도의 사회상은 피난갔던 서울 시민들이 5월경 돌아 왔다 페허된 수도서울 곳곳이 파괴되어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였다 간간히 서있는 건물 우리 학생들은 누군가에 의해서 연락을 받아서 학교 등록을 했다..
당시,광화문 경기고녀 자리에 서울 시내 학생들이 모였다 우리들은 집이 원효로 2가 학교로 가려면 먼 거리를 걸어다녀야 했다, 원효로에서 광화문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때때로 군용트럭이나 화물차를 타기도하고 달려가는, 화물차를 올라타면 운전기사님에게 쫓겨나기도하고 낮설흔 여학생집도 기웃거리면서 학교에다녔다 저녁이면 이발소에서 친구들과 잡담도하고 시간있으면 소공동 미공관에 가서 공부할수 있는 책을 찾아 보기도 하고 교과서가 없는 터라 시장에서 일본책을 사서 보면서 열심히 수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9월 우리는 한학년씩 진학 하고 다시1952년3월 에 다시 진학했다 학년 제가 중등, 고등으로 나눠젔다 그리고 그때부터 중등,고등학교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우리 서부훈육소 뿐만 아니라 동부훈육소 북부훈육소도 있었다 (訓育所란 각 학교 학생을 모아 놓고 붙인 학교 명칭임) 때때로 길건너 서울고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학도 호국단 결성과 어떤구호를 외치기도 하면서 수업을 했다 그때 나는 고 1이고 함께 입대한 우리들 네명은 (그중 두명은 우리보다 한학년 위로서 기갑장교로 갔다)가끔씩 저녁에 만나서 앞으로의 진로도 걱정을 하면서 어수선한 시절을 보내던중 서울지구병사구사령부(병무청)군인이 각 교실에 다니면서 모병을 했다. 그리고 게시판 에도 붙여 있었다, 소년전차하사관 후보생모집 이라고 또 일본에가서 교육을 6개월 마치고 한국전선에 온다고 했다,
우리들은 신체검사를 마치고 합격된 사람만 5월초 병무청앞 여관에 투숙 그 이튿날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줄 알었다. 그러나 기차는 대전에서 우리를 내리고 떠났다. 그리고 버스에 오르니 논산 제2훈련소가 아니가? 모두 실망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 도망했다는 소문도 들었으나 우리 일행중에는 아무도 없었다 각지에서 온 학생들 책가방을 들고온 학생도 많이 있었다. 훈련소에 도착 천막속에 임시 가마니를 깔고 지냈다. 편성되기전 보충대 역할인 것 같다. 음식은 입에 맞을리가 없다 처음에는 모두 남겼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배가 고파 밥알 하나 남긴사람이 없었다 며칠후 우리는 콘세트 건물로 이동 정식으로 군번(0817577 ~ 0817680 대략,가나다順으로)을 받고 第 23 연대 第 2 중대로 배속되었다,第 1 중대는 장교 후보생들이었다.
.......훈련이 시작 되었다......
1952년7월20 일
제2훈련소를 수료후 육군보병학교 전차교육대를 입학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다행히 선배들이 거쳐간 것일까? 교육과정은 그런데로 진행되는 것 같다, 또 우리는 소년전
차하사관 후보생이란 기대도 있었다. 그리고 훈련때 소년전차병가를 부르기도 하였으나
어느새 흐지부지 되었다. 이때 받은 교육이 일생동안 나에겐 많은 상식을 갖게
되었으니...
조종, 통신, 포수, 탄약 이렇게 과를 나누어 교육을 받기 시작 하였다 학과는 흥미를 갖게 했으며 모두 열심히 하였다 얼마쯤 지나, 우리는 적성과 희망순으로 과를 결정하고, 다시 전문교육을 받고 장성 비야 사격장에서 실습도 하면서 기술을 습득하였다. 점점 교육과정이 끝나감에따라 마지막 행군은 담양읍으로 목적을 두고 행군을 하였다. M-24 경전차로 그때의 행군은 멋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1952년10월25일 보병학교 전차교육대를 졸업하였으나 모두 하사관 대우가 없어 불만을 갖기도 하였다. 어쩔 수 없었다.(그래도 가슴속에는 소년전차하사관이란 자부심을 갖고 복무 하였고 모두 제대후모임 명칭을 57 소년전차 전우회로 모임을 갖고 해마다 2회씩 모임을 갖고있다)일주일 휴가를 얻어 집으로 갔었다 집에 부모님은 반가워 하시면서도 내 모습을 보시고 눈물를 흘리셨다 어린 것이 고생을 사서 한다고 또 미안해 하시는 것을 간신히 이해시키고 돌아 왔다. 우리는 그때도 얼마든지 군을 포기할 수 있는 어린나이다 그러나 군에서 생활하는동안 우리는 군인이 무엇이란 것을 배웠고 또 한편으로 자랑스러운 느낌도 있었다.
글출처: DEFENCE KOREA 김수영님.
사진출처: 하늘대장군의 잡탕 블로그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네이버 블로그
수기입니다. 수기를 관련되어서 나온 것이라서.. 좀 어설픈게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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