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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관련 추천글로 무식한 글이 올라가 댓글도 달고 따로 발췌합니다.

쿠비즈 작성일 19.03.02 09:45:38
댓글 21조회 6,911추천 11

아래는 그 글에 댓글로 달은 내용으로 유관순에 대해 다들 제대로 알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같지 않은 인간이 쓴글에 댓글단거라 조금 건방진 문체로 쓴건 이해해주세요. 페미니즘 반대도 좋고, 정치적 목적에 의해 반대하고자 하는건 좋습니다만... 있는사실을 왜곡축소해가며 선동 좀 하지 않았음 좋겠네요. 거꾸로 유관순이 단순히 옥사한 인물정도로 알려진건 제대로된 교육의 부재인겁니다. 그리고 설사 유관순이 해방이후 친일파들에 의해 자신들의 과오를 감추기위해 신격화된 인물이라는게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과 별도로 유관순열사 자체는 3.1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부각됨이 모자란 인물이 절대 아닙니다. 마치 독재자 박정희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순신장군을 신격화하였다 할지라도 이순신자체는 성웅으로서 가치가 전혀 부족함이 없는것처럼 말이죠. 즉, 3.1운동의 상징으로 친일파가 목적을 가지고 행했다할지라도 실제로 그 인물이 3.1운동에서 일제가 벌인 엄청난 폭압적 탄압을 바로 보여주는 상징으로 차고도 넘칠만한 인물이 바로 유관순입니다. 이런 유관순을 민주화된 정부가 다시 3.1운동의 진정한 상징으로 다시 자리매김하는건 아무 문제가 될게 아닌겁니다. 

 

 

 

  • 사람같지도 않은 인간들에게 알려주니 잘 배우길 바래...

    일단 유관순은 3.1운동 참가자중 너무도 유니크한 존재가 맞아. 일제의 3.1운동에 대한 엄청난 폭력진압의 상징으로 일부러 집대성 한게 아닐까 의문이 들만큼 정말 3.1운동으로 찾아보기 힘들만큼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은 분이야.

    먼저 첫번째로 3.1운동으로 유관순이 겪은 고통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알려줄께. 유관순은 본인이 3.1운동으로 형사처벌받은 인물중 가장 강력한 형사처벌을 받은 인물중 한명이야. 당시 징역형으로 최고형이 7년인 상황이었어. 현대의 장기형에 비해 너무도 짧은 이러한 징역형에 의문가질 사람들 많을텐데... 당시 감옥은 현대의 인권을 감안하고 만들어진 감옥과 비교조차 불가한 열악한 상황과 열악한 대우를 가하는 곳이었어. 감옥에 들어가서 몇년이상 있으면 옥고로 사망하는 사람이 현대 감옥에선 상상하기 힘들만큼 어마어마한 비율이었고, 형기를 마치고 출소를 해도 옥고로 인해 폐인이 되거나 평생 장애나 질병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넘쳐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라 징역형의 최고형을 7년으로도 충분했었던거야. 그러한 상황에서 1심 징역 5년, 2심에서 감형되어 징역 3년형은 현대로 치면 징역 10년이상의 초 장기형과 맞먹는 것이었고, 실제로 유관순은 이러한 가혹한 감옥환경에서 1년반을 못버티고 옥사하였지. 이러한 형벌과 옥사의 과정이 얼마나 유니크하냐면 유관순이 당시 나이가 만16세(정확히는 만16세 3개월이 조금 지난 나이로 갓 만16세가 된거야.)로 당시 법률상 형사처벌이 면제되던 만15세이하를 이제 겨우 벗어난 인물이었고, 형사처벌을 받은 1만여명중 여성비율이 5%남짓(당시 가부장제적 사회가 만연하던 상황이다보니 이건 어찌보면 당연했지)이었던걸 감안하면 얼마나 이례적인지 다 알 수 있는거야. 그러니 만 16세에 형사처벌을 받은 인물이 대단히 극소수였고, 거기에 여성이었다는 것도 너무도 극소수였으며, 심지어 당시 처벌받은 인사중 만세운동과 더불어 살인, 폭행등의 혐의가 추가되어 더 중형을 받은 인물들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만세운동자체만으로 처벌받은 인물중 최고형을 받았다는것도 너무도 특별한 경우인거야. 이러한 너무도 특별한 상황에 심지어 옥사까지도 하게되지.

    그리고 유관순은 본인이 겪은 고문, 가혹한 초 장기 징역형(당시 기준으로 초장기 맞음)으로 옥사를 한것뿐아니라 자신이 주도(이거 아니라고 개소리 하는 인간들... 아래에 왜 유관순이 주도자로 일제가 판단했는지 알려줄께.)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현장에서 유관순 본인이 바로 옆에서 부친과 모친 모두가 일제에 의해 현장에서 사망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일반인은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받았어. 심지어 두분 모두 일제헌병이 휘두룬 칼에 의해 만세운동 현장에서 즉사를 하지. 이것 뿐인지 알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다른지역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사처벌을 기다리던 친오빠까지 만나게되며, 유관순 부모의 사망에 항의하다 일본 순사를 폭행했다는 이유로 작은아버지까지 체포되어 징역3년형을 받지. 즉, 온가족이 풍비박산이 난거야.

    유관순이 수많은 3.1운동 사망자중 한명일 뿐이라는 인간들아. 제발 좀 가져와봐 유관순처럼 3.1운동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이런 처철한 상황을 겪은 경우 좀 가져와봐. 진짜 유관순은 3.1운동에 대해 일제가 얼마나 가혹한 탄압을 했는지를 알려주는 상징과 같은 인물로서 너무도 충분한거야.


    두번째로... 유관순이 수많은 3.1운동 참가자중 한명에 불과하다는 인간들이 많아서 설명해줄께. 일단 유관순은 당시 사회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던 엘리트 여성교육기관에서 수학하던 엘리트 여성으로 3.1운동 참여 자체가 주동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당시 3.1운동이 벌어지자 다른 현대식 학교들의 학생들처럼 이화학당의 학생들도 거리로 뛰어나가려했지만 당시 이화학당의 교장이었던 프란츠가 학생들의 안위를 걱정하여 온몸으로 학생들의 거리진출을 막아서는 바람에 이게 무산되었지. 이런 상황에서 이화학당의 학생들은 자체적으로 회의를 열어 유관순을 비롯한 6명의 대표를 선출해서 이 6명의 대표가 몰래 담장을 넘어 당시 서울 거리에서 벌어지던 운동에 참여할만큼 이화학당내에서도 유관순은 학생들의 대표로 인정받았다는 거야. 그리고 이후에 일제에 의해 휴교령이 내려지고, 유관순은 같이 이화학당에서 수학하던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집이 있는 천안으로 내려가는데... 이때 유예도와 함께 몰래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가져가게되지. 이 몰래 숨겨간 독립선언서를 당시 천안지역에서 계몽운동을 하던 중심인물인 조인원등의 지역 유지들에게 전달하며 3.1운동이 서울에서 벌어졌음을 알리고, 천안지역에서 만세운동을 벌일것을 설득하고 다녀.(당시 일제의 재판기록에도 유관순과 유예도는 조인원과 아버지인 유중권이 주도로 모은 천안지역내 유지들에게 직접 서울에서 벌어진 3.1운동을 설명하고 만세운동을 하자고 주장했다고 나옴. 즉, 사실상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파악한것임.)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계기를 만든거야. 그리고 유관순과 유예도는 당시 개념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태극기(당시 만세운동당시에 태극기는 많이 쓰이지 않았어. 태극기 자체를 잘 몰랐고, 국기라는 개념도 희박하던 시대였으니까. 근데...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서는 태극기가 사용되었지.)를 거사일 전에 직접 대량으로 만드는 준비를 했고, 이를 배포도 했으며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현장에서도 조인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나서 만세운동 전에 별도로 나서 열변을 통해 만세운동을 고취시키기 까지하지.(당시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들어 이걸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당시 유관순은 천안지역에서 초 엘리트중에 한명이었어. 아무리 여성이라도 현대식 교육을 받던 인물이 너무도 적던 시절이라 당연히 대표로 나설만 한거지.) 그러니 유관순이 3000명이 넘는 만세운동가담한 사람들중 최선두에 자신의 부모와 조인원선생등과 함께 섰었던것이고, 최선두이다보니 부모 모두가 현장에서 일제 헌병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는것을 목격한것이며, 현장에서 체포되어 구금까지 된거야.

    아무튼... 이런 과정을 통해 유관순은 조인원등과 함께 주동자로 분류되어 다른 대부분의 단순참가자와 달리 풀려나지 못하고 재판에 회부된 16명에 포함되었고, 이 16명중 최고 핵심인물로 판단되어 가장 중형을 언도받게되지 당시 기록을 보면 1심에서 조인원, 유중무(유관순의 숙부였어. 만세운동 자체의 주동자로 분류된건 아니지만 유관순의 부모의 사망에 분노하여 주재소로 유중권의 시신을 가져가 항의하고 이과정에서 순사를 폭행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지.) 각 3년 형... 김용이, 조병호 각 2년 6개월 형... 김교선, 한동규, 이백하, 이순구 각 2년 형... 김상훈, 백정운 각 1년 6개월 형... 조만형, 박제석 각 8개월 형... 김상철 6개월 형... 박봉래 기각... 신씨(아마도 여성인듯함.) 무죄인데 반해 유관순은 무려 5년형을 1심에서 언도받지 물론... 항소하여 2심에서 3년형으로 낮추어 지기는 하지만 조인원, 유중무와 함께 아우내장터 만세운동혐의로 형사처벌에 넘겨진 인물중 최고형인 3년형으로 확정되었다는거야.

    형사처벌이 가능한 연령인 만16세가 갓 들어선 어린나이에, 부모 모두가 만세운동중 현장에서 사망하였으며, 현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더 극심한 가부장적 사회에서 당연히 처벌이 가볍게 내려지던 여성이고, 또다른 가족인 친오빠와 숙부 모두가 같이 형사재판을 받던 상황(요새도 그렇지만 그때도 가족들 모두를 같은 혐의로 처벌하는 경우는 드물었어)을 고려하면 주동자로 재판에 넘겨진 조인원에 비해 훨씬 감형의 요소가 많음에도 유관순은 1심에서 조인원보다 무려 2년이 높은 5년형이 내려졌던것만봐도 유관순이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수많은 참가자중 한명에 불과하다는 개소리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지 알 수 있을거야.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서울에서 3.1운동이 벌어졌음을 천안지역에 독립선언서와 함께 알렸던것, 조인원과 아버지 유중권과 함께 지역유지들을 모아 만세운동을 설득하였다는점, 사촌언니인 유예도(유예도는 다행히 체포를 피하게되고 해방전까지 체포를 피해 26년 넘게 신분을 속이고 살지. 유관순과 만세운동전까지 같이 움직이던 유예도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단순참가자라면 이런짓을 왜하겠어?)와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여 배포한점,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현장에서 대표자격으로 나와 참가자들 앞에서 연설을 한점등을 들어 일제가 유관순을 주동자중에서도 최고 핵심 주동자로 판단하였기에 참가자중 최고로 강력한 처벌을 받은거야



  • 아참... 한가지 더하자면... 3.1운동의 대표격인 민족대표 33인(또는 민족대표 48인이라고도 하지... 48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야.)중에 가장 중형을 선고받은이가 손병희, 한용운, 권동진, 이승훈, 오세창, 이종일, 최린(얘는 나중에 변절하는 놈이라 거론하기 싫지만... 어쨌든...) 7명이었고, 48인으로 해도 함태영이 추가되니 8명이 징역 3년형이었음. 1심기준으로 보면 민족대표33인 또는 48인보다 더 중형을 선고 받은게 바로 유관순이야. 최종결과로도 이들과 같은 3년형을 받았다는거지.

    유관순이 3.1운동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 된건... 위에서 쓴글과 이 댓글까지 합쳐 고려하면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하다 할만한 거여. 일제의 3.1운동에 대한 탄압을 상징할만큼 어마어마한 처절한 상황(부모 만세운동 현장에서 모두 눈앞에서 일제헌병의 칼에 의해 사망... 친오빠, 숙부등 가까운 가족들도 자신과 같이 형사처벌을 동시에 받는 상황)을 겪었으며, 가장 강력한 처벌을 받았고, 심지어 본인도 끝까지 감옥에서도 일제에 항거하다 지속적인 고문과 괴롭힘을 받다 그 어린나이에 옥사했다는건 3.1운동 희생자중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너무도 특별한 인물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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