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얀 (Dejan | Dejan Damjanovic) / 1981년 7월 27일 (몬테네그로) / FC 서울 소속, 포워드
전쟁으로 상처받은 아이
“1992년 혹은 1993년의 일이었어요.
당시 저는 구 유고슬라비아연방 중 하나인 보스니아의 모스타르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의 유소년 팀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어요.
저의 삶은 평범했고 평온했지요.
남들보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지만,
제가 좋아하는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살았어요.
그러나 1991년 일어난 전쟁이 제 모든 일상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습니다.
유고슬라비아에 내전이 일어난 겁니다.
전쟁은 절 보스니아에서 떠나게 만들었고, 낯선 땅에서 낯선 삶을 시작하도록 강요했어요.
제 축구 인생은 그 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로의 피난
“물론 세르비아라고 해서 마음 놓고 축구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곳도 엄연히 전쟁 중인 나라였으니까요.
그렇다고 축구를 그만 둘 수는 없었어요.
그냥 공을 차는 것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축구를 하는 시간만큼은 전쟁의 아픔을 잊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함께 공을 찼던 친구들도 그 시간을 가장 행복해 했죠.
아마 제가 너무 어려서 그랬을 수도 있어요.
조금만 더 나이가 많았더라면 축구 대신 전쟁에 참가했다던가 다른 일을 했을지도 모르죠.
그만큼 그 때 저는 어렸고 그래서 더더욱 공을 놓을 수 없었어요.”
축구 노예로서의 삶
“프로에서의 시작은 좋았습니다.
기량도 어느 정도 인정받았고요.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어요.
프로팀을 축구인이나 기업인이 아닌 조직폭력배 같은 사람들이 인수하기 시작하면서였죠.
당시 세르비아-몬테네그로는 내전 수습으로 나라 전체가 어수선했어요.
경제적으로도 대단히 힘들었고요.
그래서 실업자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 적잖은 이들이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는 조직폭력배 생활을 했죠.
그 중에는 전직 축구 선수도 많았지요.
그 중 많은 돈을 번 이들이 축구판에 발을 들여 놓았는데, 정말 자기들 마음대로 팀을 운영하기 시작한 거예요.
선수들은 정당한 이적이 아닌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팀을 옮겨야 하는 일종의 ‘노예’로 전락했죠.”
선수 은퇴의 기로에서 K리그와의 만남
“FK베자니아 소속으로 알 아흘리 임대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축구를 그만두려 작정했지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당시 우리 클럽의 회장이 저를 불렀어요.
그 때 회장은 지병으로 임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저보고 괌으로 가면 인천이란 K리그의 팀이 전지훈련을 하고 있으니
거기서 테스트를 받고 한국으로 들어가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죠.
당연히 놀랐어요. ‘왜 나보고 괌으로 가라는 거지? 그리고 왜 한국이지?’라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죠.
그러나 축구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지쳐 있던 제게 그가 제안한 한국행은 쉽게 뿌리칠 수 있는 유혹이 아니었습니다.”
“2주 정도 테스트를 받았던 것 같아요.
테스트를 받는 기간 동안 낯선 팀에서도 제가 가진 기량을 그나마 잘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드라간과 라돈치치 등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조언도 많이 해줬고, K리그와 한국 생활에 대해서도 일러 줬거든요.
무엇보다 그들에게서 들은 K리그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아 제 개인의 기량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한국의 높은 경제력과 그로 인한 안정적인 생활도 제가 의욕적으로 테스트에 임할 수 있었던 힘이었습니다.”
인천에서의 성공적이였던 첫시즌
“냉정하게 평가했을 때, K리그 첫 시즌에 제가 마음먹은 대로 플레이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저에 대한 상대 수비수들의 정보 부족이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어떤 플레이 스타일을 갖고 있는지, 주력은 어떤지, 개인기는 어떤 걸 주로 사용하는지 등에 관한 정보가 없다보니
막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저도 경기하기 편했고요.
사실 처음에는 제가 잘 나서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즌 후반부터 저에 대한 정보 공유가 이뤄지고 난 뒤에 깨달았죠.
앞으로 K리그에서 살아남기가 결코 만만치 않겠다는 것을 말이죠.”
서울로의 이적
“서울로 이적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에 있는 팀 아니겠어요.
어느 나라에나 수도엔 가장 큰 클럽이 자리 하게 마련이죠. 그래서 설레었어요.
또 훌륭한 클럽 하우스와 연습장을 갖춘 곳이고 홈 경기장은 얼마나 웅장하고 아름답습니까.
무엇보다 절 흥분하게 만든 것은 서울에 훌륭한 선수들이 많다는 것이었어요.
박주영을 필두로 정조국, 이청용, 기성용 등 현재 유럽에서도 빼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는
그들과 함께 뛸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죠.”
K리그에서의 활약으로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 발탁
“말 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죠.
국가대표가 된다는 것은 축구를 하는 모든 이들의 꿈이니까요.
더군다나 당시는 2010년 열렸던 남아공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한 유럽의 지역 예선이 있던 시기였어요.
잘 하면 제 인생엔 없을 줄만 알았던 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죠.
너무 행복했지만, 한편으론 너무 힘들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전 한국에 있었고 경기는 유럽에서 열렸기 때문이죠.
시차 적응과 팀 훈련 등 A매치를 치르기 위해서는 최소한 5일이 필요했는데,
제가 K리그를 치르고 A매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3일 정도였어요.
당연히 제대로 된 경기를 보여줄 수 없었어요. 몬테네그로 대표팀에서도 K리그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
조광래(A대표팀 감독)
대표팀에 데려오고 싶을 정도로 훌륭한 기량을 가진 선수다. 공격수지만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더 좋은 장면을 위해 활동한다. 좌우 측면을 넓게 이용하는것과 동료를 활용한 플레이는
그러한 적극성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에 골 결정력까지 갖췄으니 금상첨화다.
김대길(KBSN 해설위원)
장점을 말하자면 투성이다. 득점력,움직임,위치선정,제공권등 고른 분야에서 빼어난 기량을
보유하고 있는선수다. 그러나 데얀선수에게 특히 고마운것은 외국인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K리그에 임하는
자세가 진지하다는 것이다. 국내 선수들에게도 큰 귀감이 될 만 하다.
박문성(SBS해설위원)
국내외 선수를 통틀어 K리그 정상급 공격수다. 특히 패스를 받고 슈팅을 할 수 있는 위치를 찾아다닐줄
아는 감각은 가히 최고다. 더해 K리그에서 수준높은 기량을 보여주며 우리선수들에게 유럽에 대한 적응력을 키워주고, 자신감을 더해준다는 면에서 고맙기까지한 선수다.
이동국(2011 K리그 선수랭킹1위)
공격수가 갖춰야할 개인적인 능력 대부분을 갖추고 있는 선수다. 인플레이 상황에서의 공격력도 뛰어나지만,
세트피스등 정지된 장면에서 수비수를 교란시켜 골을 뽑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무엇보다 득점상황, 골마우스
에서의 침착함과 정확함은 배워야 할 점이 많을 정도다.
2010년 K리거가 선정한 K리거
5위 이동국 (43표)
4위 에닝요 (57표)
3위 김정우 (61표)
2위 몰리나 (80표)
1위 데얀 (91표)
전준형(경남) "단순한 것 같지만 너무나도 잘 해준다."
박정혜(대전) "볼을 잡으면 뭔가 만들어 줄 것 같다."
백민철(대구) "자타공인 최고의 공격수"
정성훈(부산) "볼키핑, 결정력, 큰 키에도 볼을 다루는 능력이 탁월하고, 득점 및 어시스트도 뛰어나다."
장현규(광주) "데얀이 플레이 하는거 보면 (왜 뽑았는지) 알겠죠?"
Epilogue
인터뷰 말미에 데얀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에게 K리그, K리거란 어떤 의미인가’하는 질문이었다.
질문을 받은 데얀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내 삶의 모든 것이다.”
진위를 가리고 싶지도 않을 만큼 명료했으며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어 그는 할 수만 있다면 K리그에서 은퇴하고 싶다고도 전했다.
그래서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축구 선수로서의 자신을 돌아볼 때,
K리그에서 활약했던 기억을 떠 올리며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데얀과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이토록 한국과 K리그를 사랑하고 열정적인 축구를 보여주는
외국인 선수가 있어 참 다행이지 싶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직도 ‘팀의 승리’는 고민하지 않고
‘나의 플레이’에만 연연하는 외국인 선수들이 많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고마움으로까지 발전했다.
다시 한 번 한국을 그리고 K리그를 진심으로 위하고 아껴줘 고마웠다.
데얀이 언제까지 K리그에 머물지는 알 수 없다.
우리 곁에 오랫동안 ‘파란 눈의 K리거’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야 분명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게 어디 그리 뜻대로만 되는가 말이다.
그러나 꼭 그랬으면 좋겠는 게 하나 있다.
이 땅에 머무는 동안 따뜻한 한국인의 정을 듬뿍 느꼈으면,
그리고 국내 선수들 못지않게 우리 축구팬의 커다란 사랑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나 더. 내년에 열리는 유로2012에서는
그토록 소원했던 조국 몬테네그로 대표팀의 일원으로 맹활약할 수 있기도 함께 희망한다.
2011년에 작성됬었던 글 같네요.
퍼온글 입니다.